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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 그는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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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2-05-19 19:28 조회5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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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의 정치탐사 제18화

2022년 5월 18일

그는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

한호석 (정치학 박사, 통일학연구소 소장)


1988년 6월 27일 국회에서 중대한 문제가 결정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중대한 문제라는 것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전개된 역사적 사건을 어떤 명칭으로 부를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국회에서 어떤 역사적 사건의 명칭을 정하는 것은 그 사건의 성격과 의의를 결정하고 공식화하는 중대한 문제다. 그런데 그날 국회에서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전개된 역사적 사건의 공식 명칭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해버렸다. 보수야당들인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은 그 사건의 공식 명칭을 '광주민주화투쟁'으로 정하자는 대안을 내놓았다가, 결국 민정당의 주장에 동조했다.

역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민정당은 12.12 내란의 주범이며, 광주양민학살의 주범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1981년 1월 15일에 창당한 종미극우정당이다. 그런 범죄집단이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전개된 역사적 사건의 공식 명칭을 제멋대로 정해버렸으니, 숨이 막힐 노릇이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전개된 역사적 사건을 '폭도'들이 일으킨 '소요사태'라고 부르며 능욕했던 종미우익세력은 자기들의 학살만행을 영구히 은폐하기 위해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공식 명칭을 정해버리는 제2차 능욕을 자행한 것이다. 그것은 법의 심판과 처벌을 받고 일찌감치 사라졌어야 할 흉악범들이 자기들의 범죄를 은폐한 추가범행 이외에 다른 게 아니었다. 이런 내막을 알면,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절대로 쓸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전개된 역사적 사건을 어떤 명칭으로 불러야 하는가? 이 문제를 해명하려면, 지금으로부터 42년 전 광주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 역사적 사건은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역동적으로 상승, 발전하였다.

제1단계 - 계엄군의 폭행만행에 격분한 시위군중이 더욱 격렬히 투쟁하다

1980년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전남도청 광장에서 전두환을 우두머리로 하는 군부파쑈집단을 규탄하는 군중시위가 계속되었다. 5월 18일 0시 군부파쑈집단은 계엄령을 확대, 선포하고, 극악한 탄압을 자행했다. 전두환 군부파쑈집단은 계엄군을 내몰아 국회를 봉쇄하였고, 수많은 정치인들과 진보인사들을 검거하였으며,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휴교령을 내리고, 언론보도를 전면적으로 검열했다. 5월 18일 광주의 청년학생들이 군부파쑈집단의 극악한 탄압에 저항하는 시위투쟁을 벌였고, 그날 오후 4시 광주에 들이닥친 계엄군은 시위에 참가한 청년학생들은 물론 시위에 참가하지 않은 일반시민들까지 닥치는대로 폭행했다. 5월 20일 계엄군의 폭행만행에 격분하여 거리와 광장으로 쏟아져나온 시위군중은 삽시에 20만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시청청사를 점거하였다. 그날 시위군중들 속에 배포된 '결전의 순간이 왔다'라는 제목의 전단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다이너마이트, 화염병, 사제폭탄, 불화살, 불깡통, 기름을 가지고 무기를 제작하라! 관공서를 불태우라! 차량을 획득하라! 특공대를 조직하여 무기를 탈취하라! 아, 형제여! 싸우다 죽자!"

제2단계 - 시위군중이 자발적으로 무장하였으나 심리적 동요를 일으켜 무기를 반납하다

1980년 5월 21일 전두환 군부파쑈집단은 백악관의 승인을 받고 장갑차, 기관총, 작전헬기로 무장한 계엄군을 광주에 증파했다. 그들은 무차별 사격을 가하면서 항쟁참가자들과 일반시민을 살륙했다. 광주학살을 승인한 최종결정권자는 이른바 '도덕정치'를 떠들어대던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였다. 카터 행정부는 광주학살작전의 결정권자였고, 전두환 군부파쑈집단은 광주학살작전의 집행자였다. 학살만행에 격분한 시위군중은 계엄군 제20사단장의 지휘차량을 빼앗았고, 아시아자동차공장으로 몰려가 그 공장에서 생산한 장갑차를 몰고 나왔고, 각지 예비군 무기고들과 경찰서 무기고들을 열고 약 5,000여 정의 카빈총과 권총을 탈취, 분배했다. 이에 겁을 먹은 종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수습대책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져 황급히 무기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시위군중들은 분배된 총기 중에서 약 90%를 '수습대책위원회'에 반납했다.

제3단계 - 무기반납을 거부한 투사들이 민중무장대를 조직하다

1980년 5월 22일 이른 아침, 무기반납을 거부하고 무장투쟁을 벌이기로 결심한 600여 명의 투사들이 민중무장대를 조직하였다. 이들을 '시민군'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부정확한 명칭이다. 군부파쑈집단과 종미우익정권을 반대하는 무장투쟁을 벌인 투사들을 '시민'이라는 무미건조한 명칭으로 부를 수 없다. 무장투쟁의 주체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민중이다. 전남도청을 점거한 민중무장대는 화순광업소에서 가져온 폭약뭉치 2,100개를 수류탄 신관 450개에 연결하여 전남도청 지하실에 설치했다. 만일 그 폭약더미가 폭발하면, 광주시 절반이 날아갈 것이라는 섬뜩한 소문을 들은 계엄군은 지레 겁을 먹고 시외로 퇴각했다. 전남도청 지하실에 쌓아놓은 폭약더미는 계엄군을 퇴각시킬 만큼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제4단계 - 항쟁파의 결사항전준비와 투항파의 폭약뇌관제거

1980년 5월 25일 항쟁지도부 회의에서 항쟁파와 투항파가 대립하였다. 투항파는 무장대원들에게서 무기를 회수하고 전남도청에서 빠져나가자고 주장했고, 항쟁파는 무장투쟁을 계속하여 전남도청 끝까지 사수해야 한다고 맞섰다. 격론 끝에 항쟁파는 투항파를 항쟁지도부에서 몰아내고 결사항전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투항으로 기울어진 폭약관리반원들이 광주 시외에 있는 전투교육사령부와 은밀히 내통했다. 전투교육사령부가 파견한 폭약전문가 5명은 전남도청 지하실로 잠입하여 밤새도록 작업을 벌인 끝에 폭약뇌관을 전부 제거해버렸다. 계엄군을 퇴각시킬 만큼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던 폭약더미에서 뇌관이 제거되는 순간, 민중무장대는 계엄군의 공격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줄 방어력을 상실했다.

제5단계 - 민중무장대의 마지막 전투

1980년 5월 26일 전남도청 지하실에 쌓아놓은 폭약더미에서 뇌관이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군부파쇼집단은 20,000여 명의 계엄군 병력을 내몰아 전남도청을 포위하고 집중공격을 가했다. 5월 27일 오전 전남도청을 사수하던 민중무장대원들은 장렬히 전사했고, 민중무장대의 마지막 전투는 끝났다.

위에 서술한 사건전개과정을 보면, 시위투쟁에서 무장투쟁으로 이어지는 발전경로를 확인할 수 있다. 시위투쟁에서 무장투쟁으로 이어지는 발전경로를 포괄하는 명칭은 민중항쟁밖에 없다. 그러므로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전개된 역사적 사건을 광주민중항쟁이라는 명칭으로 불러야 한다.

광주민중항쟁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기반납을 거부한 600여 명의 투사들이 민중무장대를 조직한 것이다. 6.25전쟁 이후 민중무장대가 조직되어 정규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인 것은 광주민중항쟁에서 처음 일어난 일이다.

동서고금의 민중항쟁사를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민중항쟁이 좌절될 뻔한 위기의 순간에 항쟁지도자가 나타나 항쟁을 끝까지 이끌어가고, 마지막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는 사실이다. 광주민중항쟁도 예외가 아니다. 광주민중항쟁이 투항파의 출현으로 좌절될 뻔한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 항쟁을 끝까지 이끌었고, 마지막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항쟁지도자는 누구였을까? 역사자료는 그가 바로 윤상원 열사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950년 9월 30일 전라남도 광산군에서 출생한 윤상원 열사는 1978년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고, 광주지역 노동운동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에 뛰어든 그는 민주투쟁위원회 대변인으로, '투사회보' 발행인으로 활동하면서 항쟁을 이끌었다. 1980년 5월 21일 그는 아시아자동차공장과 나주경찰서 무기고에서 장갑차와 총기를 실어내와 시위군중을 무장시키고, 그날 저녁 민중무장대를 광주천에 매복시켜 야간전을 준비하였으며, 낡이 밝자 민중무장대를 이끌고 전남도청에 들어갔다. 그런 과정에 윤상원은 항쟁지도자로 전면에 나섰다. 그는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 본관 2층 민원실에서 계엄군과 총격전을 벌이던 중 전사하였다. 광주민중항쟁을 상징하는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은 무장투쟁에서 전사한 항쟁지도자 윤상원과 항쟁 전에 별세한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주제로 하여 창작된 노래다.

윤상원 열사는 민중무장대를 조직하고, 무장투쟁전략을 제시함으로써 항쟁지도자로 나섰다. 그가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민중무장대에 제시한 무장투쟁전략은 다음과 같다.

1) 민중항쟁은 파쑈권력이 타도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패하여 죽더라도 다음 혁명의 불씨가 되기 위하여 결사항전을 해야 한다.

2) 민중항쟁을 전국적 범위로 확산시켜야 이길 수 있다.

3) 전남도청을 사수하는 민중무장대를 통일적인 전투지휘체계로 조직화해야 한다.

4) 무기반납으로 침체된 민중의 투쟁의지를 고양시키고, 전체 민중의 무장화를 촉진시켜야 한다.

5) 혁명적 입장을 견지하는 김종배를 무장력으로 강화시켜주고, 투항주의자들을 축출한다.

6) 복귀한 운동권 인사들을 도청 지도부의 간부로 세우고, 의식 있는 학생들을 민중무장대에 인입하여, 혁명적이고 중앙집권화된 민중권력을 세운다.

위의 인용문을 읽어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윤상원 열사는 민중항쟁과 무장투쟁을 전국적 범위로 확산시켜 군부파쑈집단과 종미우익정권을 타도하고, 민중정권을 수립하려는 투쟁전략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그런 혁명적인 투쟁전략을 제시한 것은 즉흥적인 행동이 결코 아니었다. 혁명적 투쟁전략은 즉흥적인 발상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료에 의하면, 윤상원 열사는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기 전에 빠리꼬뮌(Paris Commune)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빠리꼬뮌을 공부한 그가 광주민중항쟁을 이끌어 광주꼬뮌을 수립하려고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빠리꼬뮌은 무엇인가? 빠리꼬뮌은 1871년 3월 18일 프랑스 빠리에서 민중항쟁과 무장투쟁으로 수립된 민중정권이다. 빠리의 혁명세력은 꼬뮌을 수립하고, 약 2개월 동안 혁명적 정책을 실시하였다. 1871년 4월 19일 빠리꼬뮌이 발표한 성명서의 맨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프랑스가 자기의 불가항력적 의지를 엄숙히 표출하여 베르사이유를 무장해제시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린 문제다. (중략) 우리 빠리 시민들의 사명은 역사를 밝게 비추는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풍요한 우리의 혁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무는 싸워 이기는 것이다."

그러나 민중항쟁과 무장투쟁을 결합시켜 꼬뮌을 수립하려던 윤상원 열사의 혁명적 투쟁전략은 계엄군의 집중공격을 받고 좌절되었다. 빠리꼬뮌이 프랑스군의 무자비한 공격과 살륙으로 좌절되었던 것처럼, 광주민중항쟁도 계엄군의 무자비한 공격과 살륙으로 좌절되었다. 빠리꼬뮌을 사수하기 위한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꼬뮌참가자들(Communards)은 빠리꼬뮌이 시대와 국경을 넘어 세계 각국의 혁명세력들에 깊은 영감을 안겨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빠리꼬뮌 이후 1905년 1월 22일 로씨야 각지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1917년 3월 8일 로씨야 뻬뜨로그라드에서 코뮌이 수립되었고, 1927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코뮌이 수립되었고, 같은 해 12월 중국 광저우에서 꼬뮌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빠리꼬뮌은 윤상원 열사에게도 깊은 영감을 주었다.

빠리꼬뮌이 어떻게 좌절되었는지를 알았던 윤상원 열사는 광주민중항쟁이 꼬뮌을 수립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감했으면서도, 결사항전을 결심했다.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패배가 아니라 미래를 눈앞에 그리며 최후를 마쳤다. 그가 민중무장대에 제시한 전략투쟁에 "패하여 죽더라도 다음 혁명의 불씨가 되기 위하여 결사항전해야 한다"고 적어넣은 것은, 패배의 통한이 아니라 미래혁명의 불씨를 가슴에 안고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는 것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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