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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 1964 년의 평양선언과 1992 년의 평양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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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기자 작성일22-04-22 06:06 조회1,1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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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의 정치탐사 제15화

2022년 4월 22일

1964년의 평양선언과 1992년의 평양선언

한호석 (정치학 박사, 통일학연구소 소장)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제민족해방운동의 승리에 의해 건설된 새로운 세계다. 반제자주로선을 견지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이 그 새로운 세계에서 전개되었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험난한 투쟁의 길 위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진보적 인민들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진 두 개의 이정표가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인민들이 제국주의예속체제에서 벗어나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정치의 주체로 등장한 1964년에 발표된 평양선언이 있고, 소련과 동유럽에서 사회주의체제가 와해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국제사회주의운동이 새로운 발전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1992년에 발표된 평양선언이 있다. 그 두 평양선언이 28년의 시차를 두고 각각 발표되기까지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1955년 4월 18일부터 24일까지 인도네시아 반둥(Bandung)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독립국들이 국제정치회합을 개최했다. 이 국제정치회합은 반둥회의라는 명칭으로 세계정치사에 기록되었다. 반둥회의가 세계정치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의는 간고한 반제민족해방혁명에서 승리하여 마침내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독립국들이 국제정치의 주체로 등장하였다는 데 있다. 반둥회의는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Sukarno, 1901~1970)와 당시 인디아 수상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 1889~1964)의 주도로 성사되었다.

그로부터 2년 6개월 후인 1957년 12월 26일부터 1958년 1월 1일까지 에짚트 수도 까히라에서 반둥회의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킨 역사적인 국제정치회합이 진행되었는데, 그것이 곧 아프리카-아시아인민단결회의(African Asian People's Solidarity Conference)다. 이 회의에는 아프리카 20개국과 아시아 5개국, 그리고 소련이 참가했다. 이 회의에 참가한 아시아 5개국은 조선, 중국, 몽골, 윁남, 끼프로스였다. 아프리카-아시아인민단결회의에서는 반제국주의문제, 팔레스타인문제, 알제리문제, 인종차별문제, 핵전쟁문제를 각각 다루는 5개 정치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반식민주의경제투쟁, 식민지영토문제, 최종결의안을 각각 다루는 3개 경제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또한 회의 참가국들은 아프리카-아시아인민단결기구(Afro-Asian People's Solidarity Organization)를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이 국제기구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90개 나라들이 회원국으로 참가했고, 세계로조련맹(World Federation of Trade Unions), 세계민주청년련맹(World Federation of Democratic Youth), 국제민주녀성동맹(Women's International Democratic Federation), 세계평화회의(World Peace Council)가 참관자로 참가했다. 아프리카-아시아인민단결기구는 1960년 4월 아프리카 기네에서 제2차 아프리카-아시아인민단결회의를 개최했다. 아프리카-아시아인민단결회의 아시아지부는 1962년 10월 25일부터 11월 1일까지 스리랑카 꼴롬보에서 국제경제토론회를 개최했다.

1950년대 후반기에서 1960년대 후반기에 이르는 10년은 세계정치사에서 특기할 정치격변이 일어난 시기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이딸리아 같은 제국주의국가들의 악랄한 식민통치체제가 무너지고 독립국가들이 창건되는 세기적인 정치격변이 일어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독립국들이 국제정치의 새로운 주체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그런 세기적인 정치격변이 일어난 시기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엄중한 사태가 벌어졌다. 1956년 2월 14일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가 진행되었는데, 그 대회에서 세계정치사를 뒤흔든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그 대회에서 일어난 엄청난 사건은, 자본주의체제가 혁명을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체제로 이행할 수 있다는 이른바 '평화적 이행론'이 제기되었고, 반제전쟁을 피하고 제국주의와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이른바 '전쟁가피론'과 '평화공존론'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이라고 했던가? 당시 소련공산당 제1비서 니끼타 흐루쑈브(Nikita S. Khruschev, 1894~1971)는 이른바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이라는 구실을 내걸고 소련의 최고령도자 이오씨프 스딸린(Joseph V. Stalin, 1878~1953)을 비방중상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당시 소련공산당 지도부가 '평화적 이행론, '전쟁가피론', '평화공존론'을 제기하고, 스딸린을 비방중상한 것은 1903년 7월 30일 로씨야사회민주로동당 볼쉐비끼파로 출범했던 혁명적 당이 53년만에 사상적으로 변질되면서 서서히 와해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당시 소련공산당의 사상적 변질은 맑스-레닌주의의 혁명적 원칙을 외면하고 제국주의세력과 타협하는 사회주의에 대한 배반을 뜻하였는데, 국제사회주의진영에서는 그들의 배반을 현대수정주의(modern revisionism)라고 불렀다. 1956년에 현대수정주의의 늪에 빠져들어간 소련공산당은 그 이후 35년 동안 허우적대다가 결국 1991년 8월 29일 와해되고 말았다.

1956년에 시작된 소련공산당의 사상적 변질은 국제사회주의진영의 내부분렬을 불러왔다. 그들의 내부분렬은 1959년에 전면화되었다. 이른바 '평화공존론'을 떠들어댄 소련공산당은 반제로선을 포기하고 미국와 화친을 도모하면서, 중국공산당을 적대시하였다. 소련은 중국에 파견되었던 소련인 기술자 1,390명을 불러들이고, 중국과 맺은 경제원조협정과 기술원조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이른바 '중소분쟁'으로 알려진 정치격란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당시 국제사회주의진영의 내부분렬을 중국과 소련의 대립구도로만 바라보면, 그것은 대국주의자들의 편협한 논리에 빠지는 것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신생독립국들 사이에서 일어난 정치적 분렬까지 포괄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소련공산당의 사상적 변질로 촉발된 국제사회주의진영의 내부분렬은 곧바로 아프리카-아시아인민단결회의의 내부분렬로 번졌다. 사상적으로 변질된 소련공산당을 여전히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사상적으로 변질된 소련공산당을 반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신생독립국들이 양분된 것이다.

국제사회주의진영이 분렬되자, 미국은 때를 만난 듯이 기고만장하여 더욱 날뛰었다. 미국은 사상적으로 변질된 소련을 고립시키고, 신생사회주의국가인 꾸바를 전복시키려는 음흉한 계략에 따라 1962년 10월 16일부터 29일까지 꾸바위기사태를 일으켰다. 밖에서는 미국의 광란적인 핵공갈이 계속되고, 안에서는 국제사회주의진영과 신생독립국들의 내부분렬이 계속되고 있었던 정치격란 속에서 조선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당시 조선의 관심과 노력은 반제자주로선을 견지하고 국제사회주의진영의 분렬을 극복하는 데로 집중되었다. 이를테면, 1963년 1월 30일 조선로동당은 당기관지 <로동신문>에 '사회주의진영의 통일을 수호하며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단결을 강화하자'라는 제목의 사설을 발표했고, 10월 28일에는 '사회주의진영을 옹호하자'라는 제목의 사설을 발표했다. 그리고 조선은 1964년 6월 16일부터 23일까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아프리카 34개국 대표들이 참가한 국제경제토론회를 평양에서 개최하였다. 이것은 조선이 건국 이래 처음으로 주최한 국제정치회합이다.

원래 아프리카-아시아인민단결회의 집행위원회는 1963년 9월 끼프로스 니코시아에서 진행된 회의에서 1965년에 알제리에서 아시아-아프리카 경제토론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는데, 조선은 그보다 앞서 1964년 6월 평양에서 아시아-아프리카 경제토론회를 개최한 것이다. 조선이 아시아-아프리카 경제토론회를 먼저 개최한 까닭은, 아시아-아프리카 경제토론회가 사상적으로 변질된 소련공산당의 주도로 진행되는 것을 막고 아시아-아프리카 경제토론회에서 반제자주로선과 자력갱생로선을 명백히 천명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은 1964년 6월 평양에서 개최된 아시아-아프리카 경제토론회에 소련을 초청하지 않았고, 당시 소련을 지지하는 인디아, 몽골, 에짚트, 남아프리카, 탄자니아, 모로코도 초청하지 않았다. 1960년대 소련은 국제사회주의진영에서 영도적 권위를 가진 대국이었지만, 조선은 그런 위세에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되레 더 단호한 태도로 소련을 상대했다. 이런 사실 하나만 놓고 봐도, 조선의 반제자주사상이 얼마나 강하고 철저한지 알 수 있다.

1964년 6월 16일부터 23일까지 평양에서 진행된 아시아-아프리카 경제토론회에 참가한 34개국 대표들은 반제자주로선과 자력갱생로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표시하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세상에 나온 역사적 문헌이 바로 평양선언이다. 평양선언의 제목은 '자력갱생하여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할 데 대하여'로 정해졌다. 1964년 6월 23일에 발표된 평양선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제국주의국가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나라들에 대한 원조를 수단으로 삼아 경제를 예속시키는 신식민주의를 반대, 배격한다."

- "정치적 독립을 달성하는 것과 더불어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해야 반제민족해방혁명을 완수할 수 있다."

- "제3세계 나라들의 경제적 협조와 호상원조는 평등과 호혜와 자주성, 내정불간섭의 원칙에 따라 수행되어야 한다."

위와 같은 내용을 담은 평양선언은, 아시아, 아프리카 신생독립국들을 제국주의세력의 전쟁도발위험과 현대수정주의자들의 난동을 억제하고 자주적 발전의 길로 이끌어준 사상적, 정치적 이정표로 되었다.

1964년 6월 23일 평양선언이 발표된 때로부터 28년 세월이 흐른 1992년 4월 20일 평양에서 또 다른 평양선언이 발표되었다. 1992년에 발표된 평양선언의 제목은 '사회주의위업을 옹호하고 전진시키자'이다. 1992년은 소련과 동유럽에서 사회주의체제가 와해된 것으로 하여 제국주의련합세력이 '역사의 종말'을 떠들면서 광란하던 시기였다.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엄청난 시련과 난관이 국제사회주의운동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1960년대 국제사회주의운동이 분렬과 혼란을 극복해야 했다면, 1990년대 국제사회주의운동은 좌절과 시련을 극복해야 했다. 재생의 활로를 갈구하고 있었던 1990년대 국제사회주의운동에 절실히 요구된 것은 국제사회주의운동의 전진과 승리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과 신념이었다.

바로 그러한 시기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국제사회주의운동의 새로운 전진행로와 승리적 전망을 밝혀주는 사상리론활동과 국제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1992년 1월 3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사회주의건설의 력사적 교훈과 우리 당의 총로선'이라는 제목의 담화에서 일부 나라들에서 사회주의체제가 와해되고 자본주의체제가 복귀된 원인을 전면적으로 분석하고, 사회주의건설의 새로운 길을 밝혀주었다. 또한 1992년 2월 어느 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92년 4월 15일 태양절 80주년에 즈음하여 세계 여러 나라의 당대표들과 지도급 인사들이 평양을 방문하는 계기에 시련에 처한 국제사회주의운동을 다시 일으켜 세울 공동의 투쟁강령을 발표하기 위한 구상과 계획을 밝혔다. 또한 1992년 3월 어느 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국제사회주의운동을 다시 일으켜 세울 공동의 투쟁강령에 담아야 할 내용을 밝혔으며, 태양절 80주년 경축행사에 전 세계 혁명적 당 및 진보정당의 대표들과 지도급 인사들을 대거 초청하는 방도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실행지침을 제시하였다. 그렇게 되어 1992년 4월 20일 평양에서는 전 세계 70개 혁명적 당 및 진보정당 대표들이 '사회주의위업을 옹호하고 전진시키자'라는 제목의 평양선언을 발표하였다. 1992년 평양선언의 주요내용을 발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사회주의사회는 인민대중이 주인이 되고, 모든 것이 인민대중을 위하여 복무하는 진정한 인민의 사회이고, 자본주의사회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지배하고 극소수 착취계급이 주인행세를 하는 부익부 빈익빈의 불평등한 사회이다."

- "오직 사회주의만이 온갖 형태의 지배와 예속, 사회적 불평등을 없애고 인민들에게 실질적으로 자유와 평등, 참다운 민주주의와 인권을 보장해줄 수 있다."

- "일부 나라들에서 사회주의건설이 잘 되지 않은 것은 그 나라들에서 인민대중의 근본요구에 맞는 사회구조를 수립하지 못하고 과학적 사회주의리론의 요구에 맞게 사회주의를 건설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

- "사회주의의 전진을 위한 담보는 인민대중을 사회의 진정한 주인으로 만드는 데 있으며, 그러한 사회는 승리적으로 전진한다는 것이 리론적으로,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진리이고 현실이다."

- "사회주의위업을 옹호하고 전진시키기 위하여서는 매개 당들이 자주성을 확고히 견지하고 자체의 력량을 튼튼히 꾸려야 한다."

- "매개 당은 언제, 어떤 환경 속에서도 혁명적 원칙을 버리지 말아야 하며 사회주의기치를 높이 들고 나가야 한다."

- "모든 당들이 자주성과 평등의 원칙에서 동지적 단결과 협조, 련대성의 뉴대를 강화하는 것은 공동의 과제이며, 사회주의를 위한 모든 당들과 진보적 력량 앞에 나서고 있는 국제적 의무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다."

평양선언은 시련에 처한 국제사회주의운동에 재생의 활력과 혁명적 신념을 안겨주었다. 평양선언이 발표된 이후, 사회주의체제가 와해된 나라들에서는 평양선언의 정신에 따라 사회주의재생운동이 전개되면서 혁명적 당들이 재건되었다. 평양선언이 발표된 이후, 혁명적 당들과 진보정당들은 국제적 단결과 협력을 추구하는 운동에 나섰다. 평양선언이 발표된 이후, 국제사회주의운동 내부에서는 사회주의위업을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를테면, 아일랜드, 벨지끄, 스웨리예, 민주꽁고를 비롯한 여러 나라 정당들은 평양선언에 기초하여 자기 당의 강령을 새로 작성하거나 정치결정서를 채택하거나, 평양선언을 당대회의 공식문건으로 첨부하였다. 평양선언 발표 5주년에 즈음하여 20여 개 혁명적 당들이 모스크바에서 진행한 국제회의에서는 '평양선언의 기치를 들고 앞으로 전진하자'는 제목의 성명이 발표되었다. 동유럽에서 활동하는 혁명적 당들은 평양선언이 발표된 4월 20일을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인민들의 국제련대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혁명적 당들은 평양선언에 기초하여 사회주의를 옹호고수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전 세계 100여 개 정당과 단체들은 1997년부터 새로운 사회 건설에 관한 세계정당 토론회를 매년 메히꼬에서 개최하고 있다. 1992년 4월 20일 평양선언이 발표되었을 때, 그 선언에 서명한 정당은 70개였는데, 2017년 4월에는 그 선언에 서명한 정당이 300여 개에 이르렀다.

위에 서술한 역사적 사실을 살펴보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세계적 범위에서 반제자주화와 사회주의건설을 지향하는 혁명적 당들과 진보적 인민들이 시련과 난관에 처하였을 때마다, 조선이 그들 속에서 재생의 활력과 혁명적 신념을 불러일으켜 전진과 연대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양선언은 오늘도 그들의 투쟁 속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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