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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정전상태와 준전시상태가 교차되어온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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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21-05-10 03:21 조회4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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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정전상태와 준전시상태가 교차되어온 역사


*글 : 한호석 박사(통일학연구소 소장)

*사진은 필자


<차례>

1. 정전상태가 준전시상태로 전환되었던 급박한 상황들

2. 북이 준전시상태를 선포하는 상황

3. 북이 전시를 선포하는 상황

4. 1965년과 1975년,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5. 조선인민군에 ‘폭풍 5호’가 발령되었던 1979년



1. 정전상태가 준전시상태로 전환되었던 급박한 상황들

2015년 9월 1일 애쉬튼 카터(Ashton B. Carter) 당시 미국 국방장관은 세계 각국에 배치된 미국군 병사들과 화상담화를 진행했다. 화상담화에 참가한 해외 미국군 병사들 가운데는 판문점에서 군사복무를 하는 육군 일병 조너던 쏘머스(Jonathan Somers)도 있었다. 화상담화 중에 애쉬튼 카터는 쏘머스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한반도는 언제든지 쉽게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지역이다. (중략) 우리는 언제든지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미국 국방장관이 판문점에서 군사복무를 하는 미국 육군 일병에게 그런 말을 꺼내놓은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그 화상담화가 진행되기 열흘 전인 2015년 8월 20일 군사분계선에서 일촉즉발 무력충돌위험이 조성되었다. 2015년 8월 말에 전개되었던 급박한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한국군 합참본부는 2015년 8월 20일 오후 3시 52분경 조선인민군 비무장지대 민경초소에서 발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총탄 1발이 한국군 비무장지대 감시초소로 날아왔다고 하면서 한국군 포병부대에 사격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에 따라 한국군 포병부대는 조선인민군 민경초소 4개소 주변을 향해 155mm 자주포 36발을 집중사격했다. 주변을 향해 쏘았기 때문에 인명피해는 없었다.

북은 자기 지역으로 자주포를 사격한 한국군의 도발행동에 격분했다. 조선인민군 총참모부는 앞으로 48시간 안에 대북확성기방송을 중단하고 방송기재들을 전부 철거하지 않으면 “즉시 강력한 군사적 행동으로 넘어가게 된다는 최후통첩”을 한국군 군방부에 보냈다.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는 비상확대회의를 긴급히 소집하여 대남공격작전계획을 검토, 비준했다. 2015년 8월 21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준전시상태를 선포함에 대한 최고사령관 명령을 각 전투부대들에 하달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한국군도 최고 수준의 경계태세를 취했다.

초긴장상태에 빠진 미국도 부산하게 움직였다. 2015년 8월 24일 미국 텔레비전방송 <CNN> 보도에 따르면, 당시 미국군 고위사령관들과 전쟁기획자들은 북의 공격징후에 대처하기 위한 전쟁계획을 며칠 동안 검토했다고 한다. 2015년 8월 26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당시 주한미국군사령부와 한국군 합참본부는 전쟁계획을 검토하기 위한 공동작전기획단을 가동하였다고 한다.

주목되는 것은, 2015년 8월 20일 무력충돌위험이 조성된 이튿날 북에서 준전시상태가 선포되었다는 사실이다. 준전시상태는 전쟁이 임박한 상태를 뜻한다. 정전상태가 준전시상태로 전환되면, 조선인민군 지휘관들은 비상소집되고, 전투원들은 임의의 시각에 전투를 개시할 수 있도록 완전무장을 하고 갱도진지로 들어가 공격준비를 완료하게 된다. 또한 정전상태가 준전시상태로 전환되면, 로농적위군과 붉은청년근위대는 완전무장을 하고 결전태세에 돌입하고, 전체 인민들은 공습대피훈련과 등화관제훈련에 참가하고, 모든 차량은 징발된다.

북의 준전시상태는 2015년 8월 21일에 처음 선포된 것이 아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오늘까지 북에서 정전상태가 준전시상태가 전환되었던 급박한 상황을 시대별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968년 1월

북은 조선 영해를 침범한 미국 첩보선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직후, 미국의 북침전쟁위협에 대처하여 준전시상태를 선포했다.

1976년 8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조선인민군과 미국군이 유혈충돌한 판문점사건이 일어난 직후, 북은 미국의 북침전쟁위협에 대처하여 준전시상태를 선포했다.

1983년 3월

북은 평양점령을 상정한 새로운 공중-지상전 전략에 따라 미국이 감행한 북침전쟁연습에 대처하여 준전시상태를 선포했다.

1993년 3월

북은 새로운 선제핵타격계획에 따라 미국이 감행한 북침전쟁연습에 대처하여 준전시상태를 선포했다.

2015년 8월

군사분계선에서 한국군의 포격으로 촉발된 무력충돌위험에 대처하여 북은 준전시상태를 선포했다.

준전시상태보다 더 엄중한 상황은 전시상태다. 북이 전시를 선포하는 것은 전쟁이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전시선포를 하는 것은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다르다. 선전포고를 하고 개전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통용되었던 낡은 전쟁방식이다. 현대전쟁에서는 선제타격을 하는 쪽이 승리하게 되어 있으므로, 어떤 나라도 의회에서 선전포고를 의결하고 나서 개전하지 않는다. 당연히 북도 전쟁을 결심하는 경우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개전할 것인데, 적의 전략거점들에 대한 선제타격을 개시하는 것과 동시에 전시를 선포할 것으로 예상된다.

북은 북측 외부에 전시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북측 내부에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부에서는 북이 전시를 선포했다는 사실을 즉각 알 수 없다.

2. 북이 준전시상태를 선포하는 상황

북은 어떤 상황에서 준전시상태를 선포하고, 어떤 상황에서 전시를 선포하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2013년 8월 22일 <동아일보>가 입수해 보도한 북의 ‘전시사업세칙’ 요약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북의 ‘전시사업세칙’은 2004년 4월에 제정되었고, 2012년 9월에 개정되었다. 북은 ‘전시사업세칙’에서 준전시상태를 선포하는 상황과 전시를 선포하는 상황을 각각 규정했다.

우선 북은 어떤 상황에서 준전시상태를 선포하는지 살펴보자. ‘전시사업세칙’에 따르면, 북이 준전시상태를 선포하는 상황은 다음과 같다.

1) 적대세력이 최고존엄을 모독하였을 때

2) 적대세력이 전선과 해상에서 군사도발을 감행했을 때

3) 적대세력이 북의 최고리익을 침해하는 도발을 감행했을 때

‘전시사업세칙’에 따르면, 적대세력이 북의 최고존엄을 모독하는 것은 준전시상태를 선포하여 대처해야 하는 엄중한 상황이다. 수령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충성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북의 시각에서 보면, 수령을 모독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악독한 적대행위로 된다.

이런 사정을 이해하면, 탈북자단체가 미국의 지령에 따라 북의 최고존엄을 모독하는 대북전단을 대형 풍선에 매달아 북으로 날려보내는 것은 북의 격분을 유발하는 적대행위가 아닐 수 없다. 2021년 4월 25일부터 29일까지 기간에 경기도 북측 지역과 강원도 북측 지역에서 반북전단 50만장을 대형 풍선 10개에 매달아 북으로 날려보낸 탈북자 박상학의 행동은 북의 격분을 유발한 적대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남측의 실정법을 공공연히 위반하면서 반북전단살포를 감행하여 남북무력충돌을 불러일으키려고 광분하는 악질범들을 엄벌에 처하고, 그들의 대북적대행위를 근절해야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지킬 수 있다.

또한 ‘전시사업세칙’에 따르면, 북이 준전시상태를 선포하는 두 번째로 엄중한 상황은 미국군사령관이 지휘하는 한미련합군이 ‘평양점령’과 ‘참수작전’을 상정한 도발적인 북침전쟁연습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군은 2021년 3월 8일부터 19일까지 한국군을 참가시킨 가운데 북의 거듭되는 경고와 반대를 무시하고 북침전쟁연습을 또 다시 감행했다. 그것은 북이 준전시상태를 선포하는 상황을 유발하는 대북적대행위였다. 그러므로 북침전쟁연습을 감행하여 전쟁위험을 고조시키는 한미련합군의 대북적대행위를 근절시켜야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지킬 수 있다.

위와 같은 맥락을 살펴보면, 올해 들어 북이 준전시상태를 선포하는 상황을 유발하는 대북적대행위가 벌써 두 차례나 감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북은 준전시상태를 선포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북이 준전시상태를 선포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고 해서, 무력충돌위험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요즈음 한반도 정세는 북이 준전시상태를 선포한 상황에 버금갈 만큼 무력충돌위험이 조성되었다. 북은 준전시상태를 선포한 이후 무력충돌위험이 단계적으로 고조되는 과정에 전시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미처 알지 못한 시각에 전시를 선포할 수 있다. 현재 한반도에 조성된 심각한 상황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3. 북이 전시를 선포하는 상황

북이 전시를 선포하는 것은 개전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개전은 무력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군사행동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북이 통일방도의 하나로 제시한 무력통일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누구나 아는 것처럼, 국가분렬을 극복하고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두 가지 방도는 평화통일과 무력통일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분단국가는 이 두 가지 통일방도를 추구한다. 이를테면, 조선과 중국은 평화통일과 무력통일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분단국가들이다. 예맨과 기쁘로스도 그런 상황에 처해있는 분단국가들이다.

평화통일은 통일협상에 의해 실현되고, 무력통일은 통일전쟁에 의해 실현된다. 분단국가에서 통일세력과 분렬세력이 통일협상을 성사시키는 경우 평화통일을 실현할 수 있지만, 분렬세력이 통일협상을 끝내 반대하는 경우도 있다. 세계사의 경험을 보면, 분렬세력이 분단고착화책동을 자진하여 포기하고 통일협상에 호응한 사례는 없으므로, 평화통일은 비현실적인 방도이고 무력통일은 현실적인 방도라고 말할 수 있다.

분렬세력이 통일협상을 거부하고 분단고착화책동에 광분하면, 통일세력이 분렬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통일협상을 성사시키는 수밖에 없다. 통일협상을 거부하고 분단고착화책동에 광분하는 분렬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통일협상을 성사시키고,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조국통일의 길이다. 평화통일을 반대하면서 전쟁위험을 고조시키는 분렬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무력통일은 통일협상에 의거한 평화통일을 실현할 통일국가건설의 방도다.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통일협상에 의거한 평화통일과 분렬세력을 제압하는 무력통일이 상호모순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1953년 정전 이후, 북은 분렬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통일협상에 의거하여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통일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북의 시각으로 보면, 무력통일과 평화통일은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하나의 연속적인 진전과정으로 보인다. 따라서 북의 시각으로 보면, 전시를 선포하는 것은 분렬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통일협상을 성사시켜 통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되는 것이다.

그러면 북은 어떤 상황에서 전시를 선포하게 되는지 살펴보자. ‘전시사업세칙’에 따르면, 북이 전시를 선포하는 상황은 다음과 같다.

1) 미국과 남측의 침략전쟁의도가 확정되거나, 북에 무력침공을 감행했을 때

2) 남측의 애국력량이 북에 지원을 요구했을 때

3) 국내외에서 무력통일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되었을 때

4) 미국과 남측이 국부지역에서 일으킨 군사도발행위가 확대되었을 때

위에 열거한, 전시를 선포하는 상황들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국내외에서 무력통일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되었을 때 북이 무력통일을 실현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전시사업세칙’에 서술된 바에 따르면, 국내에서 무력통일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된다는 말은 남측에서 그런 국면이 조성된다는 뜻이고, 국외에서 무력통일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된다는 말은 국제정세에서 그런 국면이 조성된다는 뜻이다. 양자를 구분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4. 1965년과 1975년,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북이 무력통일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되었다고 판단한 적이 있었던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미국의 우드로우 윌슨 국제학술쎈터(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가 발굴하여 2012년 5월 16일에 공개한 역사자료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역사자료는 평양 주재 도이췰란드민주공화국 대사 브리(Brie)가 동베를린에 있는 사회주의통일당(SED) 외교담당 비서 겸 도이췰란드민주공화국 제1외무상 헤겐(hegen)에게 1967년 12월 8일에 보낸 비밀전문이다. 비밀전문에 따르면, “조선의 지도부가 생각하는 세 가지 민족문제해결방안”은 “남조선 인민들이 대규모 혁명봉기를 일으키는 것”과 “박정희를 반대하는 군부세력이 군사정변을 일으키는 것”과 “미국이 남조선정권을 지원해주지 못할 만큼 국제정세가 악화되는 것”인데, 첫 번째 해결방안과 두 번째 해결방안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북은 세 번째 해결방안에 노력을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비밀전문에 서술된 세 번째 해결방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비밀전문이 작성되었던 1967년은 북이 세 번째 해결방안을 실현할 수 있는 국제정세가 조성되었던 시기였다. 당시 국제정세를 보면, 미국은 남측 정권을 지원해주지 못할 만큼 깊은 수렁 속에 빠져있었다. 그것은 윁남전쟁이라는 깊은 수렁이었다. (베트남이라는 말은 미국식 국명인 비엣남을 제멋대로 발음한 것이므로, 현지에서 사용되는 윁남이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

상황을 오판하고 윁남전쟁에 무력개입을 감행하였던 미국이 패전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1965년 어느 날 김일성 주석은 평양 주재 중국대사 하오더칭(郝德靑)을 접견하였다. 중국 인민대학 교수 청샤오허(成曉河)가 2013년 10월 23일 서울에서 진행된 국제학술회의에서 인용한 중국 외교부 기밀해제문서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하오더칭 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남조선 인민의 계급투쟁이 고조되었고, 갈등이 증대되었으므로 우리는 조만간 (통일)전쟁을 할 것이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전쟁을 하지 않고서 이 문제(통일문제를 뜻함-옮긴이)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생각해두었고 준비했으므로 그대로만 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가 (통일)전쟁을 하면, 중국이 파병해주기 바란다.”

한국외교협회가 발행한 전문지 <외교> 2008년 7월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1965년 어느 날 김일성 주석은 6.25전쟁 시기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관으로 참전했으며, 1965년 당시에는 중국인민해방군 부총참모장이었던 양융(楊勇)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더 늙기 전에 (미국과) 한 번 더 겨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 짐(통일전쟁을 뜻함-옮긴이)을 후대에 물려주면, 그들이 우리보다 반드시 더 잘 싸운다는 법도 없다. 전쟁경험이 있는 우리가 이 무거운 짐을 져야하겠는데, 당신들이 우리와 함께 (미국을 상대로) 싸워보는 것이 어떤가?”

1961년 7월 11일 조선과 중국이 체결한 ‘조중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에 따르면, 체약 일방이 전쟁상태에 처하는 경우 체약 상대방은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 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1965년 당시 중국은 조선의 무력통일의사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 사정은 다음과 같다.

1) 1965년 당시 중국은 소련과 극심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른바 중소분쟁이다. 중국은 미제국주의보다 ‘소련제국주의’를 더 위험한 존재로 여겼다. 그래서 중국은 미국과 전쟁을 하고 있는 윁남민주공화국에 소련과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했다. 1966년 9월 조선은 윁남민주공화국과 파병협정을 맺고, 조선인민군 전투비행사들, 고사포부대, 공병부대를 윁남전선에 파병했으나, 중국은 윁남민주공화국이 소련과 관계를 끊지 않는 것을 비난하면서 웰남전선에 파병했던 중국인민해방군을 철수했다. 그런 태도를 가진 중국은 조선의 무력통일의사를 지지할 수 없었다.

2) 중국은 자기들이 조선의 무력통일을 지원하는 경우 미국의 핵공격을 받을 것으로 우려했다. 그도 그럴 것이, 1965년 당시 미국은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발된 각종 전술핵탄 950발을 주한미국군기지에 배치해놓고 있었다. 특히 전라북도 군산공군기지에 주둔한 미국 공군 제8전술비행단은 일본 오끼나와 가데나공군기지에 주둔한 제18전술비행단, 필리핀 클락공군기지에 주둔한 제3전술비행단과 함께 조선과 중국을 상대로 핵폭탄투하를 연습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중국은 1964년 10월 16일 자국의 첫 핵시험에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것은 실전에서 사용하기 힘든 원시적인 핵폭탄이었고, 미국 본토까지 핵탄두를 운반할 대륙간탄도미사일도 없었다. 이런 상황은 1965년 당시 중국이 미국의 핵공격을 막아낼 핵억제력을 갖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핵억제력을 갖지 못한 중국이 미국의 핵공격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의 무력통일의사를 지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알제리독립전쟁(1962년)과 제3차 중동전쟁(1967년)으로 국제정세가 매우 복잡하게 돌아가던 1960년대가 지나고 마침내 윁남전쟁이 종식단계에 접어들었다. 윁남전쟁에서 패한 미국은 1973년에 윁남전선에서 미국군을 전부 철수했다. 1975년 4월 30일 당시 남윁남 주재 미국 대사 그레이엄 마틴(Graham Martin)은 새벽에 헬기를 타고 비상탈출했고, 당시 남윁남 대통령 두옹반민(Duong Van Minh)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통일세력은 분렬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여 윁남전쟁을 승리로 결속했다. 그보다 앞서 1973년 10월 조선인민군의 지원을 받은 에짚트군은 제4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하여 이스라엘군을 점령지에서 내쫓고 시나이반도를 되찾았다.

이처럼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김일성 주석은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였다. 김일성 주석의 중국방문은 윁남전쟁이 통일세력의 승리로 결속되기 직전인 1975년 4월 19일부터 4월 26일까지 이루어졌다. 1975년 5월 6일 베이징 주재 도이췰란드민주공화국 대사가 본국에 보낸 비밀전문에 따르면, 1975년 4월 19일 김일성 주석은 중국이 마련한 국가환영연회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연설하였다고 한다.

(전략) “분단된 나라를 통일하기 위한 조선인민의 투쟁은 세계 반제민족해방투쟁에서 중요한 고리로 됩니다. (중략) 만일 남조선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경우, 우리는 같은 민족성원으로서 팔짱을 끼고 구경하지 않을 것이며, 남조선 인민들을 힘있게 지원할 것입니다. 만일 적들이 무모하게 (침략)전쟁을 시작한다면, 우리는 (통일)전쟁으로 결정적인 대답을 줄 것이며 침략자들을 완전히 소멸할 것입니다. 전쟁에서 우리가 잃을 것은 군사분계선이요, 우리가 얻을 것은 조국통일입니다.” (하략)

평양 주재 도이췰란드민주공화국 대사관이 1975년 5월 12일 본국에 보낸 비밀전문에 따르면, 당시 베이징에서 진행된 조중정상회담에서는 “윁남과 캄보쟈에서 전개되는 (전쟁종식)상황과 그것이 남조선의 정세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논의했다고 한다. 이런 정황을 살펴보면, 김일성 주석은 조중정상회담에서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에게 윁남전쟁의 승리로 국제정세가 조선의 무력통일을 실현하기에 유리하게 전변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조선의 무력통일의사에 대한 중국의 지지를 요구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당시 마오쩌둥 주석은 그런 중대한 문제를 검토할 수 없을 만큼 노쇠했다. 그래서 마오쩌둥 주석은 조중정상회담에 배석한 덩샤오핑(鄧小平) 부주석과 그 문제를 논의하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1972년 2월 21일 당시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이 사상 처음 중국을 방문한 것으로 하여 해빙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한 중미관계를 중시한 덩샤오핑 부주석은 조선의 평화통일은 지지하면서도 조선의 무력통일에 대한 지지는 유보했다.

5. 조선인민군에 ‘폭풍 5호’가 발령되었던 1979년

웰남전쟁의 승리로 조선의 무력통일에 유리한 국제정세가 조성된 때로부터 4년이 지난 1979년 10월 한반도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났다. 한반도는 북이 무력통일에 유리한 정세라고 판단할 만큼 돌변적인 정세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1979년 10월 26일 국가분렬을 고착화하려고 획책하던 독재자 박정희가 자기 심복의 손에 암살당했고,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우두머리로 하는 극우군부세력이 위헌적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고, 1980년 5월 18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광주민중항쟁이 주한미국군사령관의 진압명령을 받은 한국군 계엄부대의 유혈탄압으로 좌절되었다. 북의 시각에서 보면, 그러한 돌변적인 정세변화는 무력통일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정세를 조성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월간조선> 2021년 1월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당시 북은 무력통일의 결정적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하고 다음과 같은 긴급행동을 취했다고 한다.

1) 박정희 암살사건이 일어난 이튿날 조선인민군 전군에 ‘폭풍 5호’가 발령되었다. (북에서 ‘폭풍’은 비상소집명령이다.)

2) 당시 동유럽 사회주의나라들을 순방하고 있었던 오극렬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이 방문일정을 중단하고 급거 귀국했고,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회의가 긴급히 소집되었다.

3) 최전선에 배치된 조선인민군 대련합부대들은 전투동원태세를 갖추었다. 이를테면, 곡산군과 세포군에서는 땅크, 장갑차, 자행포, 방사포 등 무장장비 1,000여 대를 동원한 실전훈련이 진행되었다.

4)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조선인민군과 미국군이 총격전을 벌였다.

5) 조선인민군 정찰병들이 경기도 한강하구와 경상남도 포항만으로 각각 침투했다.

6) 조선인민군 수송부대는 대규모 전쟁물자를 전방지역으로 수송했다.

<월간조선> 2021년 1월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1980년 당시 김일성 주석은 소련을 비공개로 방문하여 레오니트 브레즈네브(Leonid Brezhnev)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정상회담을 진행했는데, 정상회담 중에 김일성 주석은 브레즈네브 서기장에게 “남반부 인민들의 영웅적 투쟁에 의해 금년 내에 반드시 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남반부 인민들의 영웅적 투쟁”은 1980년 5월 18일에 일어난 광주민중항쟁을 뜻한다. 김일성 주석은 1980년 5월 7일 조시프 브로즈 찌또(Josip Broz Tito)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베오그라드를 방문하였을 때 장례식에 참석하러 그곳에 온 브레즈네브 소련공산당 서기장을 만나 정상회담을 하였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을 비공개로 방문하여 브레즈네브 서기장을 또 다시 만난 것이다. 이런 정황을 보면, 당시 김일성 주석은 정상회담에서 브레즈네브 서기장에게 무력통일의사를 통보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북은 무력통일을 실현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무력통일을 실현할 주객관적 조건이 충분히 성숙되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로부터 어느덧 40년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시대는 바뀌었고, 세대는 교체되었으나, 분렬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북의 통일의지는 변하지 않았다.

북의 통일의지는 무력통일과 평화통일을 순차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군사적 준비를 완료하는 길로 북을 이끌어갔다. 그리하여 북은 연방제통일방안과 무력통일작전계획을 각각 완성했다.

2000년 10월 6일 안경호 당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의 발언을 들어보면, 북이 완성한 연방제통일방안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김일성 주석이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설방안을 제시한 20주년에 즈음하여 진행된 평양시 보고대회에서 안경호 서기국장은 “우리의 낮은 단계의 련방제안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 제도, 두 개 정부의 원칙에 기초하되, 북과 남에 존재하는 두 개 정부가 정치권, 군사권, 외교권 등 현재의 기능과 권한을 그대로 갖게 하고, 그 위에 민족통일기구를 내오는 방법으로 북남관계를 민족공동의 리익에 맞게 통일적으로 조정해 나가는 평화통일방안”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다른 한편, 북이 무력통일작전계획을 완성했다는 사실은 2015년에 한국군 합참본부가 청와대에 보고한 대외비 문건을 보도한 <신동아> 2020년 1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기사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은 “2012년에 새로운 작전계획과 지휘체계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북은 연방제통일방안을 실현하기 위해 남북정상회담과 남북관계개선에 힘쓰는 한편, 무력통일작전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군사훈련에도 주력했다. 북은 15일 작전계획을 수정보완하여 7일 작전계획을 수립했고, 7일 작전계획을 수정보완하여 3일 작전계획을 최종적으로 완성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북은 무력통일에 개입하려는 미국의 침략적 군사행동을 핵억제력으로 저지하고, 고속기동전과 전략갱도전을 벌여 인명손실과 전쟁피해를 최소화하는 3일 작전계획을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군 합참본부가 2015년 청와대에 보고한 대외비 문건에 따르면, 조선인민군이 완성한 ‘전격적 개념의 기습공격계획’은 “방사포 등 화력으로 단시간 내 서울과 전략지대를 타격하고, 기동전으로 3~5일 내 부산을 점령한 후, 핵-미사일로 위협해 미국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협상으로 전쟁을 종결”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국군의 방어력은 예나 지금이나 너무 허술하다. <신동아> 2014년 1월호에 실린 전면전 씨나리오에 따르면, 한국군에게는 조선인민군의 비대칭전력인 탄도미사일을 막을 미사일방어체계가 없고, 조선인민군의 대규모 포병화력에 맞설 포병전력과 비축탄약이 없고, 조선인민군의 반항공망을 뚫고 들어갈 첨단공군전력이 없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면 “핵심전력이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고, 전략거점들이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평화통일준비와 무력통일준비를 완료한 북은 오늘 중국과 미국이 대만문제를 놓고 무력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된 급박한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북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동중국해, 대만해협, 남중국해에서 고조되는 중미전쟁위기는 한반도에서 무력통일의 결정적 시기를 앞당기는 외적 요인으로 보일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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