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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크로마이트작전과 월미도방어전 7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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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20-09-13 18:54 조회1,6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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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크로마이트작전과 월미도방어전 70주년


*글:한호석 박사(통일학연구소 소장)


*사진은 필자


<차례>

1. 1950년 6월 19일 미국의 북침작전계획

2. ‘작전계획 크로마이트’에 담긴 네 가지 씨나리오

3. 맥아더의 극비작전계획 빼돌린 조선인민군 정찰병

4. 75,000명 대 400명의 싸움

5. 월미도의 마지막 혈전

6. 금성-4 순항미사일과 익명의 탄도미사일


1. 1950년 6월 19일 미국의 북침작전계획

1950년 6월 25일 38도선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고속기동전으로 한국군 방어선을 돌파한 조선인민군은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고, 공격을 중지했다. 남북무력충돌은 조선인민군의 서울점령으로 3일 만에 종식되었다.

그런데 남북무력충돌이 종식된 이튿날인 1950년 6월 29일부터 미국 원동군 소속 폭격기들이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와 폭격을 감행하면서 전쟁을 도발했다. 남북무력충돌은 사상자를 많이 내지 않고 3일 만에 종식되었는데, 미국의 전쟁도발로 조선은 새로운 전면전에 돌입해야 했다. 만일 미국이 무력침공을 감행하지 않았다면, 6.25전쟁은 3일 만에 끝났을 것이다.

1950년 6월 당시 일본을 점령하고 있었던 미국 원동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원동사령부 산하 합동전략기획단에게 조선을 침공할 작전계획을 수립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맥아더는 3일 만에 끝난 6.25전쟁을 재발시키고 확전시킨 전쟁도발의 주범이다. 1950년 7월 4일 합동전략기획단은 자기들이 완성한, ‘블루하츠(Bluehearts)’라는 제목의 작전계획을 맥아더에게 보고했다. 그 작전계획에 따르면, 미국 해병대가 1950년 7월 22일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미8군은 남부전선에서 북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 떠오른다. 1950년에는 컴퓨터도 없었는데, 합동전략기획단은 어떻게 그처럼 짧은 시간에 ‘작전계획 블루하츠’를 후닥닥 완성할 수 있었을까? 누구나 아는 것처럼, 작전계획을 완성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개념계획을 작성한 다음, 세부적인 작전씨나리오들을 만들고, 그것들을 서로 연결시켜 작전계획을 완성하려면 몇 달이 걸린다. 그런데 합동전략기획단은 불과 5일 만에 작전계획을 완성했다. 졸속작업이었을까? <사진 1>

▲ <사진 1> 이 사진은 1940년대 말 일본 도꾜 치요다구 유라구초에 있는 미국 원동사령부 청사의 모습이다. 당시 일본은 미국의 점령지였으므로, 그 건물에서 일본을 지배하는 최고권력이 행사되었다. 이 석조건물은 1938년에 건립되었는데,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일본을 점령하고,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원동사령부 청사로사용했다. 태평양전쟁 이후 원동사령부의 공식명칭은 연합국 최고사령부였고, 더글러스 맥아더가 총사령관이었다. 그 건물에 맥아더의 집무실이 있었다. 1950년 6월25일 38도선에서 남북무력충돌이 일어나자, 맥아더는 특별기획참모단을 조직하고그들에게 조선을 침공할 작전계획을 수립하라고 명령했다. 남북무력충돌은 사상자를 많이 내지 않고 3일 만에 종식되었는데, 미국은 바다를 건너와 무력침공을 감행하면서 전쟁을 도발했다.

몇 달 걸리는 작전계획수립을 5일 만에 완성한 이변의 내막은 미국 역사학자 스탠리 웨인트롭(Stanley Weintraub)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다. 2000년 미국에서 출판된 ‘맥아더의 전쟁: 코리아와 미국 영웅의 파멸(MacArthur's War: Korea and the Undoing of an American Hero)'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그는 미국 국방부가 6.25전쟁 직전에 ’SL-17‘이라는 제목의 작전계획을 마련해두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작전계획 SL-17'에 따르면, 38도선에서 일어난 남북무력충돌에서 패한 한국군이 남쪽으로 후퇴하여 부산방어선을 구축하면, 미국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북진한다는 것이다. 이 작전계획을 일정별로 정리하면, 미국군 1개 군단이 1950년 9월 30일까지 인천을 점령하고, 10월 15일까지 서울을 점령하고, 1951년 1월 31일까지 남포와 원산에 동시상륙하여 평양을 점령한 다음, 1951년 6월까지 38도선 이북 전역을 점령하는 것이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6일 전인 1950년 6월 19일, 미국 국방부는 이 작전계획을 승인했다.

이처럼 미국 국방부가 6.25전쟁 직전에 작전계획을 완성해놓았기 때문에, 미국 원동사령부 산하 합동전략기획단은 6.25 전쟁 직후 맥아더의 명령을 받은 때로부터 5일 만에 ‘작전계획 SL-17'의 재판인 ‘작전계획 블루하츠’를 맥아더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그런데 1950년 7월 당시 조선인민군은 고속기동전을 벌이며 부산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고, 미국군은 참패를 거듭하며 낙동강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1950년 7월 3일 한강을 도하한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는 7월 5일 오산전투에서 미국군 제24보병사단 선견대를 궤멸시켰고, 7월 14일부터 16일까지 금강을 도하했고, 7월 20일에는 미국군 제24보병사단을 궤멸시키고 대전을 점령했다.

맥아더는 합동전략기획단이 자기에게 보고한 ‘작전계획 블루하츠’가 ‘작전계획 SL-17’의 재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작전계획 블루하츠’를 폐기하고 새로운 작전계획을 수립하라고 명령했다. 맥아더의 명령을 받은 합동전략기획단이 ‘크로마이트(Chromite)’라는 제목의 개념계획(conceptual plan)을 완성한 날은 1950년 7월 23일이다. 조선인민군 전투부대들이 경상북도 포항으로 진격하고 있었던 1950년 8월 15일 맥아더는 개념계획을 작전계획으로 완성하기 위한 사업을 극비리에 추진할 것을 합동전략기획단에 명령했다. 그런 명령에 따라 개념계획을 작전계획으로 완성할 특별기획참모단(Special Planning Staff)이 조직되었다.

2. ‘작전계획 크로마이트’에 담긴 네 가지 씨나리오

1950년 8월 23일 일본 도꾜에 있는 미국 원동사령부 청사에서 중요한 전략회의가 진행되었다. 맥아더가 소집한 전략회의에는 육군참모총장 육군 대장 조섭 콜린스(Joseph L. Collins), 원동군 참모장 육군 소장 에드워드 알몬드(Edward L. Almond), 해군참모총장 해군 대장 포레스트 셔먼(Forrest P. Sherman), 원동군 해군사령관 해군 중장 터너 조이(C. Turner Joy), 상륙전단사령관 해군 중장 제임스 도일(James H. Doyle), 제7함대사령관 해군 중장 아서 스트러블(Arthur D. Struble), 공군사령부 작전국장 공군 중장 아이드월 에드워드(Idwal H. Edward)가 참석했다. 맥아더는 합동전략기획단이 작성한 개념계획을 꺼내놓고 인천상륙전으로 6.25전쟁의 전세를 바꿔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고위급 군사지휘관들은 인천 앞바다의 수로가 함대가 들어가기에 비좁다는 점,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세계 최고 수준이므로 함선이 개펄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점, 인천항 해안에 화강석으로 쌓아올린 방조제가 있어서 상륙하기에 매우 불리하다는 점 등을 지적하면서 맥아더의 의견에 반대했다. 그런데도 맥아더는 고집을 부리며 45분 동안 그들을 설득하더니 이런 해괴한 말도 했다.

“나는 제2운명의 손길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는다. 만일 우리가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을지 모른다. 인천(상륙전)은 성공할 것이고, 100,000명의 목숨을 구할 것이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고, 나는 적들을 짓밟을 것이다.”

맥아더와 고위급 군사지휘관들이 인천상륙문제를 놓고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낙동강 전선에서는 조선인민군의 격렬한 공격을 받은 미국군 방어선이 무너질 위험에 빠졌다. 낙동강 방어전을 지휘하던 미8군사령관 육군 중장 월튼 워커(Walton H. Walker)는 맥아더에게 미국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얼마나 더 버틸지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했지만, 맥아더는 인천상륙으로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더욱이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에게 인천지역 이외에 다른 지역에 상륙하는 것을 검토해보라는 지시를 내렸는데도, 맥아더는 그런 지시를 따르지 않고 인천상륙을 고집했다.

▲ <사진 2> 이 사진에 나타난 사람들은 왼쪽부터 미국 육군참모총장 육군 대장 조섭 콜린스, 미국 원동군 총사령관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미국 해군참모총장 해군 대장 포레스트 셔먼이다. 6.25전쟁이 지속되고 있었던 1950년 8월 23일 일본 도꾜에있는 미국 원동사령부 작전회의실에서 중요한 전략회의가 열렸다. 그 전략회의에는위의 사진에 나온 콜린스, 맥아더, 셔먼을 비롯하여 고위급 군사지휘관들이 참석했다. 맥아더는 그 자리에서 인천상륙전으로 6.25전쟁의 전세를 바꿔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고위급 군사지휘관들은 인천의 자연지리적 조건이 상륙에 불리하다고지적하면서 반대했지만, 맥아더는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특별기획참모단이 작성한 '작전계획 크로마이트'는 1950년 8월 28일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승인을 거쳐 당시 대통령 해리 트루먼의 최종승인을 받았다.


1950년 9월 1일 맥아더는 인천상륙전의 공식명칭을 크로마이트작전(Operation Chromite)으로 정했다. 크로마이트라는 말은 황연(Chrome)원광석을 뜻한다. 맥아더의 특별기획참모단이 작성한 ‘작전계획 크로마이트’는 1950년 8월 28일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승인을 거쳐 당시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의 최종승인을 받았다. ‘작전계획 크로마이트’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작전씨나리오로 구성되었다.

1) 100-A: 미국 해병대가 전라북도 군산에 상륙하여 금강계선에서 조선인민군을 공격하는 작전씨나리오.

2) 100-B: 미국 해병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여 북진하는 미국 육군과 합세하여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조선인민군을 공격하는 작전씨나리오.

3) 100-C: 미국 해병대가 인천에 상륙하였으나, 미국 육군이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지 못하는 경우 미국 해병대가 군산에 상륙하여 대전을 점령하는 작전씨나리오.

4) 100-D: 강릉-주문진에 상륙한 미국 해병대가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고 북진하는 미국 육군과 합세하여 조선인민군을 공격하는 작전씨나리오.

3. 맥아더의 극비작전계획 빼돌린 조선인민군 정찰병

맥아더가 인천상륙전 준비를 다그치던 1950년 8월 30일 평양에 있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무전실로 한 장의 무전통신문이 날아들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정보가 담겨있었다.

“최고사령부 앞.

미 극동사령부 비상련락회의에서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아군의 배후를 타격하고 압록강 계선까지 북진하기 위한 작전이 결정되였음.

상륙개시날자는 9월 13일.

상륙지점은 인천.”

맥아더가 극비 중의 극비라고 하면서 철저한 정보보안조치로 은폐하였던 인천상륙전 극비정보를 빼돌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에 보고한 사람은 당시 일본 도꾜에 있는 미국 원동사령부 비상련락회의에 침투한 조선인민군 정찰병이었다. 조선은 그로부터 67년이 지난 2017년 12월 5일 온라인매체 <조선의 오늘>에 실린 ‘특집 - 전쟁과 녀인’에서 6.25전쟁 중에 배출된 여성영웅 14명을 소개하면서 맥아더의 극비정보를 빼돌린 여성정찰병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그 여성정찰병의 이름은 로남교다. 특집방송에 따르면, 1950년 8월 30일 로남교가 무선통신으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에 보고한 것은 ‘작전계획 크로마이트’ 중에서 인천상륙전씨나리오인 ‘100-B’였다고 한다.

특집방송에서는 평양에 있는 애국렬사릉에 안장된 영웅의 묘비를 방송화면을 통해 보여주었는데, 네 줄로 새겨진 묘비명에 영웅이 걸어온 한생이 비껴있었다.

로남교 동지

남조선혁명가, 공화국 영웅

1907년 3월 3일 생

2006년 1월 25일 서거

이 짤막한 묘비명만 읽어보면, 6.25전쟁의 운명을 바꿔놓은 극비정보를 빼돌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에 보고하기까지 로남교 영웅이 걸어온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를 가늠하기 어렵다. 지난 날 김일성상 계관인 허문길 작가는 로남교의 영웅적 투쟁을 형상한 장편소설 ‘포성 없는 전구’를 창작했고, ‘눈보라 창작단’은 그녀의 영웅적 투쟁을 형상한 다부작 영화 ‘포성 없는 전구’를 2014년에 창작했다. 조선의 특집방송에서 해설자는 일본 도꾜에 있는 미국 원동사령부 비상련락회의에 침투한 로남교 영웅이 “사랑하는 자식을 멀리 떼어두고 피눈물을 삼키며 적후활동을 벌였다”고 하면서, “몇 글자 안 되는 그 무전문에서 그가 넘어야 했던 아슬아슬한 순간들, 뛰여난 지략과 용감성으로 헤쳐야 했던 나날들과 죽음의 고비들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고 했다. <사진 3>

▲ <사진 3> 이 사진은 1950년 8월 30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전 극비정보를 평양에 있는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에 보고한 조선인민군 정찰병 로남교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다. 그녀는 미국 원동사령부 비상련락회의에 침투하여 극적인 정찰활동을 벌였다. 그녀가 무전통신으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에 보고한 것은 맥아더의 '작전계획 크로마이트' 중에서 인천상륙전씨나리오인 '100-B'였다. 그런 공로로 로남교는 공화국영웅칭호를 받았다. 그녀의 극적인 정찰보고를 통해 '크로마이트작전'에 관한 정보를파악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미국군이 1950년 9월 13일 인천상륙전을 개시할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로남교 영웅의 극적인 정찰보고를 통해 ‘크로마이트작전’에 관한 정보를 파악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미국군이 1950년 9월 13일 인천상륙전을 개시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두 가지 해결하기 힘든 작전적 난제를 안고 있었다.

첫째, 조선인민군 주력부대를 낙동강 전선에 집결시켜 부산으로 진격하는 마지막 고비를 넘어서고 있었던 결정적인 시기에 주력부대 일부를 차출하여 인천으로 급파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일 주력부대 일부를 인천으로 급파하면, 미국군은 조선인민군의 공격이 약화된 틈을 타서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었고, 조선인민군 주력부대 일부가 인천으로 이동하는 중에 미국군의 공습을 받아 인명손실을 입을 위험도 있었다.

둘째, 조선인민군 주력부대 일부가 인천으로 이동하여 방어선을 구축한다고 해도, 미국군은 계획을 바꿔 인천이 아닌 다른 지역에 기습적으로 상륙할 수 있었다. 만일 미국군이 인천상륙-서울점령계획을 포기하고 남포상륙-평양점령계획을 실행에 옮기면, 조선은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바로 이런 난제들이 가로놓였기 때문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미국군이 인천에 상륙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았으면서도 주력부대 일부를 인천에 증파할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바야흐로 결전의 시각은 다가오고 있었다.

4. 75,000명 대 400명의 싸움

지도에서 월미도를 찾아보면, 그 섬을 중심으로 사방에 펼쳐진 묘한 지형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육지와 연결되었지만, 원래 월미도는 면적이 0.7㎢밖에 되지 않은 작은 섬이었다. 그 섬의 가운데에는 해발고가 108m인 월미산이 있다. 1950년 9월 당시 월미도에는 주민 600여 명이 살고 있었다. 월미도에서 마주보이는, 면적이 104㎢인 영종도는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다. 영종도에는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섰고, 영종대교와 인천대교가 영종도와 육지를 연결해주었지만, 1950년 9월에는 영종도와 월미도는 월미수로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다. 6.25전쟁 당시 미국군은 월미수로를 날치수로(Flying Fish Channel)라고 불렀다. 미국군이 인천을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면 반드시 월미수로를 통해 월미도에 상륙해야 한다. 그러므로 조선인민군에게 월미도는 인천과 서울을 방어하는 전략요충지였고, 미국군에게 그 섬은 인천과 서울을 점령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상륙지점이었다.

미국과 한국에서는 인천상륙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쓰이지만, 그들의 상륙지점은 인천이 아니라 월미도였다. 조선에서는 인천방어전이 아니라 월미도방어전이라고 부른다. 이 글에서는 인천상륙전을 월미도상륙전으로 고쳐 부른다.

미국 해군 제7함대사령관 아서 스트러블이 월미도상륙전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유럽의 노르망디상륙전에 지휘관으로 참전했고, 필리핀의 레이트상륙전에도 지휘관으로 참전한 경력이 있어서 ‘상륙전의 백전로장’으로 자처했다.

그는 1950년 8월 18일과 8월 20일 인천 앞바다에 있는 덕적도와 영흥도에 정찰병들을 침투시켜 조선인민군의 해안방어태세를 파악했다. 그는 정찰보고를 통해 월미도에 소수의 조선인민군 방어대가 주둔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월미도상륙전에 참가한 제7합동타격단은 제77항모타격단, 제91해상봉쇄단, 제99해상정찰단, 제79전투비행단, 제90상륙공격단, 해상수송단, 한국군 해군부대로 편성되었다.

제7합동타격단은 1950년 9월 4일부터 인천지역을 폭격하면서 동시에 군산지역과 남포지역도 함께 폭격했다. 월미도가 상륙지점이라는 정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군산과 남포도 함께 폭격한 것이다. 그들은 매일 같이 B-29 폭격기를 출격시켜 인천 중심부로부터 반경 50km 안에 있는 모든 대상물을 파괴했다.

제7합동타격단은 월미도상륙전 직전인 1950년 9월 10일 항공모함에서 이함한 함재기 43대를 출격시켜 주민 600여명이 사는 월미도에 소이탄(napalm tank) 93발을 투하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국 해병대 여단장으로 월미도상륙전에 참전한 에드윈 씨몬즈(Edwin Simmons)는 2013년에 출판된, ‘해안벽을 너머(Over the Seawall)’라는 제목의 책에서 그날 소이탄 폭격으로 월미도에 있는 집들이 모두 완파되었다고 회고했다. <사진 4>

▲ <사진 4> 이 사진은 1950년 9월 초 미국군 항공정찰기가 촬영한 월미도 사진이다. 당시 월미도는 육지와 연결되지 않은 작은 섬이었다. 그 섬의 가운데에는 월미산이 있다. 월미도는 월미수로를 사이에 두고 영종도와 마주보고 있다. 6.25전쟁 중에 조선인민군에게 월미도는 인천과 서울을 방어하는 전략요충지였고, 미국군에게 그 섬은인천과 서울을 점령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상륙지점이었다. 1950년 9월 13일 미국제7합동타격단 75,000명과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 400명이 싸운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인민군 월미도 방어대에게는 물리력으로 싸울 수 없는 전투였고, 죽음을 각오한 정신력으로 싸워야 하는 혈전이었다.

결전의 날, 월미도상륙전에 참가할 제7합동타격단의 총병력은 75,000명이었다. 그들의 무장력은 다음과 같다.

항공모함, 순양함, 구축함, 상륙정, 상륙함, 보급함 - 261척

함포, 견인포, 기관포 - 1,600문

전차 - 500대

함재기 - 500대

제7합동타격단의 상륙을 저지할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는 제918포병련대 일부병력, 제3보병대대 일부병력, 제226륙전대 일부병력을 합쳐 400명으로 편성되었다. 그들의 무장력은 다음과 같다.

76mm 견인포 - 5문

37mm 견인고사포 - 2문

37mm 박격포 - 소량

1950년 9월 13일 마침내 결전의 날은 왔다. 바다를 건너와 남의 땅을 침공하는 ‘미제침략군’ 제7합동타격단 75,000명과 조국의 작은 섬을 피로써 사수하는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 400명이 싸운 전투였다. 항공모함을 비롯한 방대한 규모의 최신식 무장장비로 중무장한 제7합동타격단 75,000명과 견인포 7문밖에 갖지 못한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 400명은 세계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피의 결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에게 그것은 물리력으로는 싸울 수 없는 전투였고, 죽음을 각오한 정신력으로 싸워야 하는 혈전이었다.

1950년 9월 13일 오전 10시 10분, 전운이 감도는 월미수로에 순양함 4척과 구축함 6척으로 편성된 함대가 나타났다. 10척의 거함들은 40mm 기관포를 쏘아 월미수로의 부유기뢰를 하나씩 폭파하면서 서서히 월미도로 접근했다.

오후 12시 20분, 순양함 4척은 월미도에서 11~16km 떨어진 먼 바다에서 기동을 멈췄고, 구축함 6척은 월미도에서 730m 떨어진 해상까지 바짝 접근했다. 그러는 사이에 수평선 넘어 항공모함에서 이함한 함재기들이 까마귀떼처럼 하늘을 뒤덮으며 월미도 상공으로 몰려들어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이미 9월 4일부터 계속되어온 9일 동안의 연속폭격으로 월미도는 폐허로 변했건만, 함재기들은 폐허 위에 또 다시 폭탄을 투하했다.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가 보유한 37mm 견인고사포 2문은 포신을 85도 각도로 세워 공중으로 사격하는 방공무기인데, 유효사고도는 3km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월미도상륙전에 출격한 코쎄어(Corsair) 함재기의 비행고도는 10km 정도였다. 그러므로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는 37mm 견인고사포로 코쎄어 함재기를 격추할 수 없었다. 미국 해군 항공모함 한 척에는 날개가 접히는 코쎄어 함재기를 100대나 실을 수 있었는데, 그 함재기에는 20mm 기관포 4문이 장착되었고, 127mm 로켓탄 8발 또는 1,800kg의 폭탄을 탑재할 수 있었다.

코쎄어 함재기의 집중폭격이 끝나자, 구축함 6척이 1시간 동안 월미도를 향해 127mm 함포를 집중사격했다. 폭격과 포격이 끝났을 때, 타래치는 포연과 불길 속에서 희미한 모습을 드러낸 월미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제7합동타격단 지휘관들은 완전히 파괴된 월미도에서 어떤 생명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으로 여겼다. 포연과 불길 속에서 희미한 모습을 드러낸 월미도는 죽음의 침묵을 말해주는 듯했다.

5. 월미도의 마지막 혈전

그런데 상상을 초월한 ‘기적’이 일어났다. 집중타격을 받고 전멸한 줄 알았던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의 75mm 견인포 5문이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불을 뿜었다. 수백 발의 포탄과 폭탄을 맞아 산산이 부서지고 불타버린 작은 섬에서 불사조처럼 살아남은 월미도방어대가 75mm 견인포를 지하진지 밖으로 끌어내 미국 구축함에게 기습타격을 시작한 것이다.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의 반격은 어떤 전과를 가져왔을까? 미국 역사학자 로이 애플먼(Roy E. Appleman)이 집필했고, 미국육군군사연구소가 1961년 워싱턴에서 초판을 발행한 ‘남으로는 낙동강, 북으로는 압록강(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그 책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가 포탄 9발을 명중시킨 2,200t급 미국 구축함 콜렛함(USS Collett)은 화력통제장치가 파괴되었고 승조원 5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또한 포탄 3발이 명중한 3,400t급 구축함 걸크함(USS Gurke)도 부분적으로 파손되었고, 승조원 3명이 부상당했으며, 2,200t급 구축함 스웬슨함(USS Swenson)은 포탄이 함체에 스치면서 승조원 1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했으며, 2,000t급 구축함 드 헤이븐함(USS De Haven)도 부분적으로 파손되었다고 한다.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가 사용한 76mm 견인포의 사거리는 13km다. 주목되는 것은, 그 견인포가 BR-350A 철갑탄을 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철갑탄을 쏘면 2km 밖에 있는 타격대상을 60도 각도로 직격하는 경우 43mm 두께의 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부대가 쏜 76mm 철갑탄이 명중했어도 거대한 미국 구축함은 부분적으로 파손되었을 뿐 격침되지는 않았다.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의 기습반격을 받고 놀란 미국 구축함들은 오후 1시 47분 견인포 사거리 밖으로 달아났다.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미국 순양함들은 오후 1시 52분부터 월미도를 향해 1시간 30분 동안 203mm 함포를 미친 듯이 쏘아댔고, 함포사격의 뒤를 이어 함재기들이 까마귀떼처럼 또 다시 날아와 월미도를 맹폭했다. 폭격이 끝나자 미국 순양함들은 오후 4시 10분부터 30분 동안 또 다시 함포를 쏘아댔고, 오후 4시 40분이 되어서야 수평선 너머로 물러갔다. <사진 5>

▲ <사진 5> 이 사진은 1950년 9월 15일 월미도 전투가 끝난 직후 촬영된 월미도의 모습이다. 상상을 초월한 격전이 3일 동안 벌어진 월미산에는 온전한 나무가 한 그루도남아있지 않았다. 그날 아침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는 76mm 견인포를 지하진지에서 끌어내 해안으로 몰려드는 미국 해병대 상륙정들을 향해 마지막 남은 철갑탄을쏘았다. 해안으로 밀려든 상륙정들에서는 미국 해병대원들이 긴 사다리를 해안방조제 곳곳에 걸쳐놓고 개미떼처럼 기어올랐다. 사흘 간의 격전에서 살아남은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 300여 명은 해안방조제를 기어오른 미국 해병대원 수 천 명에 맞서마지막 순간까지 혈전을 벌였다.

이튿날인 1950년 9월 14일 오전 11시경 제7합동타격단 함대가 다시 월미수로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전날과 달리 순양함들이 먼저 월미도를 향해 203mm 함포를 집중사격했고, 그 다음에 함재기들이 날아와 월미도를 맹폭했고, 마지막으로 구축함들이 월미도를 향해 127mm 함포를 집중사격했다. 그런데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는 반격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철갑탄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0년 9월 15일은 월미도 전투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 오전 5시 함재기들이 날아와 월미도를 폭격했고, 순양함과 구축함들이 포격했고, 203mm 로켓포를 탑재한 군함 3척이 월미도 해안으로 접근하여 로켓포탄 1,000여 발을 난사했다. 오전 6시 25분, 월미도 해안에서 약 2km 떨어진 해상에 집결한 상륙정 17척과 상륙함 3척이 연막탄을 터뜨리며 일제히 해안으로 돌진했다.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부대는 76mm 견인포를 지하진지에서 끌어내 해안으로 몰려드는 상륙정들을 향해 마지막 남은 철갑탄을 쏘았다. 마지막 철갑탄은 벌떼처럼 몰려드는 상륙정 3척에 명중했다.

이제 월미도방어대에게는 소총과 수류탄 같은 개인화기들, 그리고 37mm 박격포밖에 남지 않았다. 미국군 상륙정들은 해안방조제에 접근했다. 해병대원들은 꼭대기에 갈고리가 달린 긴 사다리를 해안방조제 곳곳에 걸쳐놓고 개미떼처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포연이 자욱한 월미도 해안에 운명의 시각이 왔다. 지난 사흘 동안 맥아더의 75,000명 대군을 상대로 벌인 격렬한 방어전에서 살아남은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 300여 명은 미국 해병대원 수 천 명을 상대로 마지막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미국 역사학자들이 서술한 많은 기록들은 월미도방어대의 마지막 전투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날 해병대원들과 함께 월미도에 상륙한, 미국의 저명한 여성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Marguerite Higgins)가 남긴 목격담이 월미도방어대의 마지막 전투를 증언해주는 유일한 역사기록이다.

“우리가 사다리를 타고 수직에 가까운 해안방조제에 기어올랐을 때, 치명적인 함포사격과 폭격 속에서 살아남은 북조선 병사들이 해안 가까이에서 소총과 박격포로 쉴 새 없이 공격하며 우리를 괴롭히고 있었다.”

히긴스의 목격담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 300여 명은 해안방조제를 기어오른 미국 해병대원 수 천 명에 맞서 마지막 순간까지 혈전을 벌였다. 미국측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월미도방어대 210여 명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전사했고, 나머지 136명은 부상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6. 금성-4 순항미사일과 익명의 탄도미사일

월미도가 피로 물들었던 그날로부터 세월은 흘러 70년이 지났다. 그 동안 월미도에서 혈전의 흔적은 사라졌고, 포탄화염이 작열했던 바닷가에는 유원지가 들어섰다.

그러나 조선은 월미도 혈전을 잊지 않고 있다. 2014년 7월 23일과 7월 26일 <로동신문>은 “조국해방전쟁시기 47개 주요전투들”을 간략하게 해설한 기사를 실었는데, 거기에는 월미도방어전이 들어있다. 1982년 조선에서 첫 상영의 막을 올린 영화 ‘월미도’는 월미도방어대 400명이 제7합동타격단 75,000명과 맞서 혈전을 벌이며 최후를 맞는 이야기를 담은 명작인데, 요즈음도 그 영화는 가끔 <조선중앙텔레비죤> 전파를 타고 방영된다.

월미도 혈전은 조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만이 아니다. 조선은 미국과 또 다시 결전을 벌여 그들을 기어이 꺾어버릴 강한 힘을 키워왔다. 월미도방어전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강한 힘이다. 70년 전 조선인민군에게는 눈앞의 적함을 격침시키지 못한 72mm 견인포와 철갑탄밖에 없었지만, 70년이 지난 오늘에는 수평선 너머 보이지 않는 적함을 격침시킬 타격력이 있다. 금성이라고 불리는 순항미사일이다.

조선인민군은 금성-1 지대함순항미사일, 금성-2 공대함순항미사일, 금성-3 함대함순항미사일, 금성-4 지대함순항미사일을 해안지대 지하기지들 안에 대량으로 실전배치했다. 2017년 6월 8일 강원도 원산 인근 해안에서 동북방향으로 시험발사된 금성-4 지대함순항미사일은 레이더망을 피하여 낮은 고도로 200km를 날아가더니 표적에 가까운 상공에 이르러 공중에서 1~2차례 선회비행을 하고 아주 작은 표적에 명중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고도화된 정밀타격력이다. 이런 적아식별능력과 선회비행능력은 섬 뒤쪽에 숨은 적함까지 쫒아가 타격한다는 뜻이다. 금성-4 지대함순항미사일은 2020년 4월 14일과 7월 4일에도 시험발사되었다.

그런데 미국이 자랑하는 100,000t급 핵추진항공모함은 함체길이가 332m인 거함이므로, 금성 계렬 순항미사일로는 격침하지 못한다. 조선인민군의 항모격침미사일은 따로 있다.

2017년 4월 15일 평양에서 진행된 군사행진 중에 세계 군사전문가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특이한 모양의 탄도미사일이 등장했다. 조선은 그 탄도미사일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미국은 ‘KN-18’이라는 자의적 명칭으로 부른다.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2017년 5월 2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현지지도로 진행된 시험발사에 다시 등장했다. 비행거리가 450km이었으므로, 실제 사거리는 500km다. 조선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다음과 같은 절묘한 능력을 지녔다고 한다. <사진 6>

▲ <사진 6> 이 사진은 2017년 4월 15일 평양에서 진행된 군사행진에 등장한 특이한 모양의 탄도미사일이다. 이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2017년 5월 2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현지지도로 진행된 시험발사에 다시 등장했다.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초정밀타격력을 지난 항모타격미사일이며, 저위력전술핵탄두를 장착한 항모타격미사일이며,500km 밖에 있는 거대한 핵추진항공모함을 단 한 방에 격침시킬 수 있는 고체연료탄도미사일이다. 70년 전 월미도에서 견인포와 철갑탄을 쏘며 혈전을 벌였던 조선인민군은 70년이 지난 오늘 저위력전술핵탄두를 장착한 항모타격미사일을 보유했다.

1) “적함선을 비롯한 해상과 지상의 임의의 바늘귀 같은 개별적 목표들을 정밀타격할 수 있는 정밀조종유도체계가 도입되었다. 중간비행구간에서 소형 열분사발동기에 의한 속도교정 및 자세안정화계통의 정확성이 재확증되였고, 보다 정밀화된 말기유도체계에 의한 재돌입구간에서의 초정밀유도정확성이 확증되였다.” 그리고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예정목표점을 7m의 편차로 정확히 명중하였다.”

(해설 -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대기권을 벗어나 120km 고도에서 중간비행을 하는 동안, 미사일 탄체에 장착된 여러 개의 소형 열분사발동기로 비행속도와 비행방향을 조절했다. 또한 대기권 밖에서 대기권 안으로 재돌입할 때, 말기유도장치로 비행방향을 조절했다. 그리하여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450km 밖에 있는 작은 해상표적을 7m의 편차로 맞추는 초정밀타격능력을 과시했다.)

2) 시험발사에서는 “조종전투부의 말기유도단계까지 세밀한 원격관측”을 할 수 있었다.

(해설 -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대기권 밖 120km 고도에서 해상표적을 향해 극초음속으로 낙하돌진비행을 했는데, 조선국방과학원 과학자들은 낙하돌진비행을 원격관측했다. 이것은 450km 밖에 있는 해상표적 인근 상공에 무인전략정찰기를 날려보내 원격관측을 했다는 뜻이다. 450km 밖에 있는 작은 해상표적은 레이더로 포착할 수 없으므로, 무인전략정찰기를 날려 보내야 포착할 수 있다. 이로써 익명의 탄도미사일과 무인전략정찰기가 연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인민군이 운용하는 방현-5 무인전략정찰기는 시속 200km의 속도로 10시간 동안 비행하는 스텔스무인전략정찰기다. 이런 스텔스무인전략정찰기를 날려 보내 원격관측을 하지 않으면, 익명의 탄도미사일로 450km 밖에 있는 작은 표적을 맞추기는커녕 포착할 수도 없다. 조선은 2016년에 스텔스무인전략정찰기를 개발했고, 2017년에 그것과 연동되는 익명의 탄도미사일을 개발했다.)

3) “발사 전 준비공정이 고도로 자동화되여 발사시간을 훨씬 단축하도록 체계가 완성”되었다.

(해설 - 발사준비공정이 고도로 자동화되었다는 말은 고체연료를 사용했다는 뜻이다.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탄도미사일은 액체연료를 주입하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발사준비시간이 대폭 단축된다.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탄도미사일이다.)

4) 익명의 탄도미사일은 무한궤도식 자행발사대에 탑재되었다.

(해설 - 무한궤도식 자행발사대는 차륜식 자행발사대와 달리 길이 없는 산악지대로 들어갈 수 있다. 미국의 위성감시는 도로망을 따라 진행되므로, 익명의 탄도미사일을 탑재한 무한궤도식 자행발사대가 도로를 멀리 벗어나 산악지대로 들어가면 미국의 위성감시망은 ‘먹통’이 된다. 또한 무한궤도식 자행발사대는 모래사장에서 익명의 탄도미사일을 쏠 수 있다. 차륜식 자행발사대가 모래사장에 들어가면 차체 중량으로 발사대가 기울어져 미사일을 쏠 수 없지만, 무한궤도식 자행발사대는 모래사장에서도 탄도미사일을 쏠 수 있다.)

2018년 2월 12일 미국의 안보전문지 <내셔널 인터레스트(National Interest)>는 2017년 7월 중국에서 발행된 해군전문지에 실린 분석기사를 인용하면서, 2016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화성-9 탄도미사일이 적함을 정밀타격하기 위한 무기로 생산되었는데, 이 탄도미사일은 중국의 둥펑(東風)-21D처럼 고도화된 정밀타격력을 지닌 탄도미사일이며, 미사일방어망을 뚫고 들어가 항공모함을 격침시킬 수 있다고 해설했다. 그런데 그 분석기사의 필자는 미국이 'KN-17'이라고 부르는 탄도미사일, 다시 말해서 조선에서 2017년 5월 29일에 시험발사된 익명의 탄도미사일을 화성-9로 착각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익명의 탄도미사일이 중국의 둥펑-21D처럼 초정밀타격력을 지닌 항모타격미사일이며, 저위력전술핵탄두를 장착한 항모타격미사일이며,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탄도미사일이라는 사실이다. 저위력전술핵탄두를 장착한 조선의 항모타격미사일은 500km 밖에 있는 핵추진항공모함을 단 한 방에 격침시킬 수 있다.

70년 전 월미도에서 사거리가 13km밖에 되지 않는 견인포로 철갑탄을 쏘며 혈전을 벌였던 조선인민군은 70년이 지난 오늘 사거리가 500km인 항모타격미사일에 저위력전술핵탄두를 장착했다. 그런 엄청난 위력 앞에서 미국의 핵추진항공모함은 무용지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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