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미교수:<제주4.3항쟁과 22살유격대사령관 김달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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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실 작성일19-04-04 08:58 조회3,085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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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곧(약 열흘 후) 출간될 저의 세번째 북한여행기 <우리가 아는 북한은 없다>에 나오는 김달삼에 대한 구절입니다.
“김달삼. 불과 22세의 나이로 제주 4·3 항쟁 당시 유격대 총사령관이었다고 한다. 후쿠야마 육군예비사관학교 출신으로 일본군 초급장교(소위)였다는 그가 어떻게 반제국주의 민족혁명에 뛰어들게 됐는지 궁금하다. 하긴 굳이 사상이나 이념을 들먹일 것도 없다. 순진한 마을사람들이 무지막지하게, 무자비하게, 잔인하게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 피가 끓지 않았다면 심장이 없는 사람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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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생님의 댓글
대학원생 작성일
국방부가 4.3민중항쟁의 학살에 대하여 사과했다고 한다. 이전에 노무현대통령이 국가를 대표하여 사과했었다.
그러나 진짜 사과를 해야할 당사자는 입을 굳게 닫고 있다. 미국과 미군이다. 1948년 당시는 미군이 일제에 이어 군정통치를 하고 있던 시기다.
4.3항쟁이 일어나고 4월 28일 평화적 해결을 위한 9연대와 무장대간 담판이 성사되자, 모든것이 일단락 되는듯 하였다.
느닷없이 5월 1일에 대동청년단, 서북청년단을 동원한 오라리 총격 및 방화사건이 일어나는데 미국이 철저히 배후조종 계획조작한 방화사건이었다.
미군은 사전에 준비하여 당일 육지와 공중에서 입체적으로 촬영을 하고 이를 항쟁무장대의 소행으로 무조건 덮어씌웠다.
9연대장 김익렬이 범인을 붙잡아 자백을 받고 우익청년단의 소행임을 밝혔지만 미군정청 딘 장군은 김익렬을 해임해 버리고 방화범은 풀어준 뒤 대대적인 학살을 시작하였다. 30만 제주도민중 3만명이 학살당했다.
6.25가 일어나기도 한참 전에 이미 미국과 미군은 한반도에서 학살과 전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것이 4.3민중항쟁의 본질이다.
아래 사진
1948년 5월5일 제주4.3사건 처리대책을 협의하기 위해 제주비행장에 도착한 미군정 수뇌부.
"화평이냐 진압이냐"는 갈림길 선택을 놓고 열린 이날 9인 비밀회의에서 경찰총수인 조병옥 경무부장은 강경진압을, 경비대 김익렬 연대장은 평화적인 해결을 주장하다가 몸싸움을 벌였다.
딘 장군은 다음날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조치하고, 강경진압을 선택했다.
왼쪽부터 보좌관, 군정장관 딘 소장, 통역관, 유해진 제주도지사, 제주군정관 맨스필드 중령, 안재홍 민정장관, 경비대 송호성 총사령관, 조병옥 경무부장, 김익렬 제9연대장, 최천 제주경찰감찰청장.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1'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