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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통일운동 원로 로광욱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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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6-04-01 00:00 조회48,8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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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통일운동 원로 노광욱 박사
부인 이효숙 여사도 평생 통일운동 동지


[워싱턴 디씨=노길남 민족통신 편집인] 84세가 된 로광욱 박사는 금년으로 미국생활 54년째 접어든다. 해외동포들은 일반적으로 치과의사이며 도미이후 통일운동에 참여한 인물로 알고 있지만 해방공간을 전후로 로 박사는 성악가이자 평론가로서, 그리고 작곡가로서 민족음악을 추구한 음악가로서 평가를 받기도 한다.

<##IMAGE##> 그는 오랫동안 로광욱이라고 사용하던 이름을 최근 들어 "노광욱"이라고 표기한다고 말한다. 불필요한 말을 듣기 원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부인 이효숙 여사(78)는 이화여대를 입학하자마자 부친의 권유로 1947년 19살 때 미국에 유학을 와서 유니언 신학대학에서 성악과 피아노를 공부하면서 종교음악을 전공했고, 그런 과정에서 로 박사를 만나 1955년 결혼하여 재미동포가 되었으니 이제 미국생활 60년째, 결혼생활 51년째를 맞고 있는 셈이다.

이들 부부는 병원생활에서 은퇴는 하였으나 고객들 중 꼭 노 박사를 찾는 손님들이 있어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아직도 진료를 위해 자신의 병원에 나간다고 말한다. 강변이 바라보이는 자택은 25년 동안 그 모습을 지키고 있다. 기자의 방문을 맞은 노 박사 부부는 최근 몇 년 동안 제작하여 만든 씨디, 「로광욱 통일염원 우리 가곡집」(2001년 봄 서울서 발표한 로광욱 작곡 발표), 로스엔젤레스에서 발표했던 "로광욱 가<##IMAGE##> 곡 작곡발표회" 등에서 소개한 노래들을 담은 기록물을 선물로 준다. 그는 그러면서 그 중에 몇 곡을 직접 들려주며 통일운동에서 차지하는 음악의 위치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뜻을 강조해 준다. 오랜만의 만남이었지만 로 박사의 기질과 정열, 그리고 통일조국을 바라는 그 뜨거운 염원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외모는 과거와 달라졌지만 지금도 청년 같은 패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평생 통일과 민족을 생각하고 그리며 살아 온 노광욱 박사. 그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1953년 도미이후 워싱턴 디씨에서 치과의사로 병원을 운영하여 오면서도 초기에는 선거로 당선된 최초의 한인회 회장을 역임했고 그 이후 민족자주통일협의회 의장, 미주민주국민회의 상임고문, 북미주 조국통일국민회 공동의장 등으로 조국의 통일운동에 기여하여 왔다.

해외통일운동 인사들은 노 박사 자신이 작사하고 작곡한 "고려산천 내 사랑", 재미시인 고원 박사의 시를 작곡하여 소개한 "하나의 조국"이 소개되면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곤 한다.

고려산천 내 사랑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남이나 북이나/그 어데 살아도/
다같이 정다운 형제들 아닌가/
동이나 서이나 그 어데 있어도/
다같이 그리운 자매들 아닌가

산도 높고 물도 맑은
아름다운 고려산천 내나라 내 사랑아
산도 높고 물도 맑은
아름다운 고려산천 내 나라 내 사랑아

고원 시/노광욱 작곡의 "하나의 조국" 가사는 다음과 같다.

말도 피도 같은 겨레
우리 몰래 땅이 잘려
마음 깊이 상처를 지난
5천만의 형제자매
백록담과 천지 물에
사무친 그리움 맴도는 채
소원은 산맥을 넘어도
오고 갈길이 막혔다.

민족은 하나
조국도 하나
통일이 독립이요
통일만이 해방이다

<##IMAGE##>음악인으로서 노광욱,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이에 대해 중앙대학 노동은 교수는 "민족 현실 안에서 민족음악을 추구한 음악가"라고 평하면서 "로광욱은 20년대 소프라노 윤심덕과 함께 활동한 바 있는 부친 로정일의 2남2녀중 막내로 진남포 신흥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일본 아오야마 학원과 미국 훼슬리안 대학과 콜롬비아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영국 옥스퍼드 박사과정에 유학한 이래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서 윤리학 교수로 활동하며, 음악가로 또 번역가로 활동한 바 있는 지식인이었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라는 메기의 추억은 바로 부친 로정일의 번역작품이다.

"로광욱은 해방공간을 전후로 성악가이자 평론가로 활동하였다. 특히 1943년 경성치과전문학교 졸업직후 부민관에서 임원식 피아노 반주로 제1회 독창회를 개최한 이래, 1944년에 제2회 독창회(부민관), 제3회 독창회(배제중학 강당)를 가진바 있는 성악가였다. 그의 스승은 임상희이었다.

"해방공간과 6.25기간 동안 민족음악 건설의 기치를 내세운 "조선음악가 동맹"(위원장 김재훈, 부위원장 안기영, 서기장 신막, 작곡부장 김순남 등) 중앙집행위원이자 근로인민당 문화부 위원으로 신막과 안기영과 함께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주요 평론작품으로 세가지가 있는데, "민족음악의 두 가지 조류 특히 그의 회고성에 관하여 "음악에의 동경" 등이 그것이다. 그의 비평활동은 민족적이면서 사실적 미학에 바탕을 두었다.

<##IMAGE##>"로광욱의 뜨거운 민족애와 조국에 대한 열정은 작곡가로서도 최근까지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 반증한다. 1986년에 가곡집 "꽃 꺾어 그대 앞에"와 2000년 가곡집 "파도처럼"을 출간하였다. 해방공간의 비평 성향처럼 이들 작품에서도 민족적이고 사실적 작품들이 그 특징을 이루고 있다."고 설명하며 마지막으로 "그는 삶을 열정적으로 불사른 그런 민족음악가로 자리 매김 되는 음악가"라고 평가했다.

노 박사는 자신이 작사를 지은 내용들도 민족과 통일에 관한 것이지만 다른 이들이 지은 시나 곡도 거의가 민족과 통일로 이어지는 내용들이다. 기자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심혈을 기울여 쓴 노래잖아"라면서 자신이 작곡한 노래들은 혼신을 다하여 만들었다는 것을 간단한 말로 표현해 준다.

그는 "나는 10여 년 전 북녘의 시인이 쓴 시의 첫 구절 "해도하나 달도 하나"를 따서 노래를 지어보았다. 말과 이치로 움직여지지 않는 캄캄한 마음에 촛불을 비쳐보려는 꿈을 가지고..."라면서 그의 작품을 소개한다.

해도 하나 달도 하나 강산도 하나
더불어 살아야 할 우리도 하나
갈라져 살아온 지 그 몇 해인가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 만나자
아, 간절한 소원 이루자

해도 하나 달도 하나 강산도 하나
고락을 같이 해 온 민족도 하나
헤어진 이 아픔이 가실 때까지
서로 함께 달래면서 발맞춰 가자
아, 간절한 소원 이루자

해도 하나 달도 하나 강산도 하나
우리 함께 일으켜 세울 나라도 하나
그 어디 있다 한들 우리는 형제
모든 힘 서로 합쳐 나라 세우자
아, 간절한 소원 이루자

<##IMAGE##>노 박사는 1922년 2월5일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으로 경성치과의전(지금의 서울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알라바마대학 치대를 졸업한 의사지만 도미하기 전에 1945년 서울치대 강사,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 47년 근로인민당 문화위원, 미국에 온 1953년 이후 학업을 마치고 치과의사를 개업하게된 시기를 전후하여 박정희 군사독재에 반대하던 인물 고 김용중 선생을 돕기 시작한 것도 1963년. 그 후 미국서 박정희 3선개헌 반대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70년대 80년대에도 정력적으로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참여한다. 그리고 90년 한겨레신문에 작품 "고려산천 내 사랑"에 입선, 그리고 지금까지 통일운동 원로로서 활동해 온 인물이다.

그는 특히 김용중 선생과 인연이 된 것을 평생 잊지 않고 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70년대 초 조국평화통일 재미촉진위원회라는 조직의 위원장으로 활약하면서 이미 그 때 반외세 민족자주를 외쳤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자주적 평화통일을 부르짖었다. 노 박사가 간직한 자료 중에는 1972년 6월20일자로 된 "동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이 조국평화통일 재미촉진위원회 이름으로 발표된 호소문도 있었다. 이것은 이 조직의 결성을 알리는 소식도 되었다. 의장단 명단에는 림창영, 전규홍, 김용중, 강용흘, 류영환 이라고 되어 있고 위원장에 로광욱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노 박사는 또 그동안 오랜 이민생활을 지나오면서 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기 전 시기의 남녘 정부당국으로부터 기피인물로 되어왔다. 이러한 남녘 정부의 정책은 미주동포들 뿐만 아니라 유럽, 일본 등 해외동포들 가운데 민주운동, 통일운동을 전개해 오던 인물들에게는 공통적으로 가해졌던 탄압의 현상이었다 .심지어는 노 박사는 1992년 5월23일 뉴욕에서 고희 기념음악회를 개최하는 과정에서도 뉴욕총영사관(김기수 총영사 시기)의 고의적인 방해로 차질을 빚었다고 설명하며 당시의 신문 보도자료를 보여준다. 출연자들이 영사관에서 못하게 한다는 이유 때문에 행사가 어려웠다는 과거사도 더듬는다. 이 사건은 미국 정계에도 폭로되어 당시 총영사관도 곤욕을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IMAGE##> 그는 지난 3월6일 남녘의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이춘열 사무처장에게 서한을 보내면서 "내가 무슨 민주화나 통일운동이랍시고 한 것이 있다면 그 주류는 음악입니다. 음악도 거의 60년 가까이 지난 일임으로 요새 음악한다는 사람들이 알 리가 없기 때문에 중, 제 머리 깎는 셈치고 "43년부터 소위 해방공간 "53년까지의 음악활동의 편린을 보이려고 한 것이고, 가곡 작곡의 연대를 적음으로써 70년대 초부터 90년대 말까지 정세의 굴곡들이 가곡에 반영되었던 것을 보이려고 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노 박사는 음악자료들을 담은 씨디와 민주.통일운동 관련 자료 등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민주화기념사업회", "민예총" 등에도 사본을 보내기도 했다.

노광욱 박사의 방북 역사는 어떠했는가. 그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하던 1971년 돌아 돌아서 평양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방북은 1988년이었다는 것이다. 첫 방문에서 그는 김용중 선생이 쓴 남북정상에게 보내는 편지 중 김일성 주석에게 전하기 위하여 평양당국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당시에 그렇게 전한 편지에 대한 응답을 받지 못하고 돌아 온 것이 지금까지도 못내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는 표정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그의 통일운동에 대한 열정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한층 더 뜨거워지기만 했다. 노 박사는 통일운동 원로들 사이에는 "대쪽같은 성격의 소유자"로 꼽힌다. 한번 마음 먹은 일은 끝장을 내는 성격이다. 원칙이나 경우에 어긋나는 일을 적당히 넘기지 않고 반드시 지적하고 고치려고 하는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부인도 남편 로 박사에 대해 "곧고 직설적인 성격"이라고 말한다. 부부사이의 관계는 원앙새 같은 평을 들어 왔다. 이효숙 여사가 제안하는 것이면 노 박사는 언제나 들어주는 편이다.

<##IMAGE##> 사실상 이효숙 여사는 단순히 노광욱 박사의 부인이라기 보다는 통일운동의 동지이며 통일운동 원로로서 활약해 왔다. 1928년 11월30일 경남 마산출생으로 마산여고를 나와 이화여대에 입학하자 말자 미국으로 오게되어 알라바마 대학을 졸업한 뒤에 다시 유니온 신학대학에서 종교음악(성악과 피아노)을 공부했다. 민족민주운동에는 언제나 남편과 함께 실천하여 왔지만 직책을 맡은 것은 80년 여성동우회 이사, 91년 한국고문희생자 후원회 이사, 94년 워싱턴민족운동연합 부회장, 한겨레미주홍보원 워싱턴정신대협의회 이사 등을 거치면서 시민운동, 민족운동을 결합하여 참가해 왔다.

이 효숙 여사는 남녘 학계에서 유명한 여성학 학자인 이효재 교수의 언니가 된다. 이 교수도 지금은 은퇴하여 요즘에는 자신들의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출판하기 위해 집필중이라고 한다.

기자는 노광욱 박사 부부와의 대담을 통하여 한 통일운동 원로가정의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볼 수 있었다. 이들이 뿌려 온 통일의 씨앗들이 해외에서 그리고 국내에서 뿌리내려 파릇파릇 자라나고 있다. 하루 속히 해 내외 통일운동 원로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뻐할 날, 자주적 평화통일의 그 날이 오기를 기원하며 우리는 작별인사를 나눴다.[끝]

*노 광욱 박사 연락전화는 (301)292-4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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