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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 청년운동가, 권오혁씨의 15년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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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jok 작성일05-09-06 00:00 조회11,2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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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정은 운동하는 가정이다”
<젊은 활동가7> 권오혁 통일연대 대외협력국장


<##IMAGE##> 권오혁씨의 하루는 참 바쁘다. 아침에 일어나면 8시30분까지 의정부에 있는 동부화재 출장소에 출근해서 30분간 조회를 하고, 곧바로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 근처에 있는 통일연대 사무실에 출근해 업무를 시작한다. 그리고 저녁 7시쯤 퇴근해서 장모님과 바통터치해서 두 아이를 보살핀다. 그리고 부인이 학원일을 마치고 올 때면 늦은 저녁을 차려주고 새벽 두세시가 되어서야 잠이 든다.

물론 권오혁씨만큼 안바쁜 사람이 어디있느냐고 묻는다면 대꾸할 생각은 없으나 통일연대 일꾼으로 활동하면서 보험 아르바이트를 하며 두 아이까지 돌보는 그의 정신력과 체력은 가히 본받을만 하다.

통일연대에서는 대외협력국장으로 각종 집회나 기자회견을 도맡아 집행하고 있으며, 얼마전에는 백두한라민족대행진단 실무사업을 전담하기도 했다. 사실 두 아이를 책임진 가장으로써 월급도 한푼 없는 통일연대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리라.

그러나 권오혁씨는 다른 일꾼들처럼 24시간 온 시간을 바쳐 통일연대 사업에 매진하지 못하는 것이 미안할 뿐이란다. 그런 그를 향해 동료들은 성실하고 맡은 바 일을 책임적으로 수행하는 모범적인 일꾼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왜 동료들은 그를 칭찬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을까. 그를 만나보니 그 이유를 알만했다.

권오혁씨는 91학번이다. 그는 91학번이라면 대부분이 강경대 열사의 죽음이 삶의 큰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 또한 예외는 아니었단다. 고등학교 시절 90년에 있은 3당야합을 보고 ‘눈물이 날 만큼 감격하면서 김영삼씨가 뭔가 큰 일을 벌이는구나’하고 기대했다는 그에게 강경대 열사의 죽음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30만의 시위는 20여 년간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 후 최루탄이 난무하는 거리에서, 선배들과의 대화에서 새로운 세상에 접하게 된 그는 자연스럽게 대학 4년을 누구보다 뜨겁게 보냈다. 학교 총학생회장, 한총련 산하 동총련 의장 등을 역임한 후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에서 사무처장을 2년간 맡기도 했다. 그 와중에 연행되어 8개월간 감옥살이도 했다.

출소 후 양심수군문제해결을위한모임(양군모) 활동에 이어 민권공대위, 반미반전비대위 등의 단체에서 일하다가 당시 한 사건에 연루되어 또다시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10개월간 감옥살이를 마친 그는 출소 당월에 결혼식을 해, 가정을 꾸렸다. 그렇다고 그는 사회단체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김양무정신계승사업회를 거쳐 실천연대, 지금은 실천연대 파견으로 통일연대에서 3년째 활동하고 있다.

세월로 보면 15년이다. 20살 때 시작한 애국의 길에서 단 하루도 벗어남이 없이 일선에 서서 활동하고 있는 그다.

곁눈질 없이 오직 한 길만을 걸어온 비결은 뭘까.
“이렇게 사는게 사람답게 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아이들뿐만 아니라 이 땅 아이들을 보면 이 일을 그만둘 수도, 잠시 접을 수도 없습니다. 부모님한테도 그렇고, 자식들에게도 그렇게 부끄럽지 않게 사는 모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그에게도 괴로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정이 생긴 이후 단 하루도 경제문제와 육아문제 때문에 고민이 없었던 날이 없었다. 이사도 수차례를 가야했고, 다섯 살난 큰 아들 기현이는 아내의 이모댁, 장모댁, 어린이집을 전전해야 했다. 권오혁씨가 경제활동을 하지 않으니 부인이 학원강사일로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경제문제가 다 풀리는 것도 아니다. 쌓여가는 빚 때문에 싸우기도 수차례였다.

활동을 끝내고 밤늦게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오전 활동을 끝내고 아내가 출근하는 세시전까지 집에 들어가 아이들을 돌본 적도 있다. 물론 지금은 그나마 시간면에서 자유스러운 보험일로 아르바이트를 대신하고 있다.

쌓여가는 빚과 두 아이의 육아, 출산 후 한달만에 출근해 건강이 마냥 걱정스러운 아내…. ‘잠시 활동을 중단하고 빚 갚을 때까지만, 아이들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만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안든다면 거짓말이죠. 하루에도 수십번씩 들 때도 있어요. 활동도 다른 일꾼들처럼 맘껏 못하니 더 그렇죠. 그렇지만 지금 힘들다고 이 끈을 놓아버리면 영영 회복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격려합니다.”

또 하나 그를 격려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아내다. 권오혁씨가 두 번째 구속이 되었을 때 아내 한지연씨의 어머니는 기치를 타고 곧바로 안동에 내려가 혼인신고를 했다고 한다. 그후 한지연씨는 1년여 동안 혼자 신혼집에서 생활했다.

최후진술 때 홀로 앉아 법정을 지켜준 장모를 위해 시를 낭송하고 최후진술을 한 사위 권오혁씨. 장모에게 사위는 “평생 그 일을 하며 살 사람”이었던 게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일까. 한지연씨는 주말이 되면 집에서 쉴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남편과 두 아이를 데리고 행사장에 얼굴을 내민다. 남편의 삶을 함께 할 뿐만 아니라 대학시절 자신 또한 학생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 생활이 너무 궁핍해지면 남편에게 하소연을 하기도 한단다. 그러나 결론은 “내가 더 돈을 많이 벌어야지”라며 자기 결의를 높이는 아내의 모습은 남편 권오혁씨에게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후원자다.

다른 일꾼들보다 부족한 시간이기에 “오늘 미루면 그 일은 다시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계획한 모든 일을 제 시간에 맞추는 치밀한 계획과 책임성으로 지금도 성실히 자기 몫을 다해 나가며, 하루종일 일과 아이들 때문에 지친 몸이지만 밤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오는 아내를 위해 따뜻한 식사를 준비하는 권오혁씨.

그는 “우리 가정은 운동하는 가정이다”는 슬로건을 잊지 않으려 애쓴다고 전했다. 우리나라 보통 중산층 가정이 아니라 ‘운동하는 가정’. 그에 맞게 경제규모도 짜고 생활방식도 마련해야 한다는 거다. 중산층의 눈으로 보면 도저히 생활할 수 없는 경제형편이겠지만 그런 눈이 아니라 ‘운동하는 가정’의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당부였다.

권오혁씨의 든든한 후원자는 아내와 장모뿐만이 아니었다. 고향 안동에 있는 부모님도 그에게는 고마운 후원자들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들 몰래 대학 2학년 때 군대희망서를 제출할 만큼 부모의 눈에는 자식의 모습이 불안해 보였다. 우리나라 모든 부모가 그렇듯 ‘옳은 소리를 하면 내 자식이 피해’보는 게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아들은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눈물로 호소했다. 그 일 이후 권오혁씨는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부모님께 전했다.

이제 형들과는 이야기도 잘 하지 않으시는 아버지는 ‘산에나 가자’며 그를 이끌고 나와 “북한에서 핵무기를 가지면 좋지? 통일되면 다 우리꺼니까”하고는 정세이야기를 먼저 꺼내신다. 부모님과 대학시절부터 큰 언쟁한번 없었다는 그는 자신의 삶으로, 그 삶으로 행복한 모습을 가감없이 부모님께 보여드린 것이다. 또한 구속 당시 직접 당신들이 집회에 참가하면서 자식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은 부모님은 지금은 그의 믿음직한 버팀목이다.

15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 있는 시간. 권오혁씨는 긴 호흡을 가진 사람이었다. 일이년만 가고 말 길이 아니라 자신의 평생을 두고 갈 길이었기 때문일까. 그는 눈앞의 일에 조급해하고 화내고 좌절하지 않았다. 15년을 한결같은 모습으로 길을 개척하는 그의 긴 호흡에 부모님도 감화되고, 아내도 힘을 내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동료들도 그의 긴 호흡을 배우고 있을 것이다.

[자주민보 박준영 기자 200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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