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80]솔로몬 제도:영국침략 120년 고통<br><br>지금은 미국-호주의 신 식민지 지배와 간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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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1-11-23 22:49 조회1,78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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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가 지구촌 제3세계를 연구하여 민족통신에 연재한 나라가
이번으로 80개국이 된다. 이번에 소개된 나라는 남태평양 섬나라, 솔로몬 제도인데 이 나라는 영국
침략으로 120년 동안 시달리다가 지금은 또다른 제국주의 미국과 호주의 신식민지 형태로 지배받으면서
고통받고 있는 처지이다. 유박사가 지금까지 연구고찰한 80개국 나라들은 모두가 제국주의자들과 강대국에
시달려 고통을 받아 온 나라들이다. 80번째로 소개되는 "솔로몬 제도"의 현황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이번으로 80개국이 된다. 이번에 소개된 나라는 남태평양 섬나라, 솔로몬 제도인데 이 나라는 영국
침략으로 120년 동안 시달리다가 지금은 또다른 제국주의 미국과 호주의 신식민지 형태로 지배받으면서
고통받고 있는 처지이다. 유박사가 지금까지 연구고찰한 80개국 나라들은 모두가 제국주의자들과 강대국에
시달려 고통을 받아 온 나라들이다. 80번째로 소개되는 "솔로몬 제도"의 현황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80]솔로몬 제도:영국침략 120년 고통, 지금은 미국-호주신식민지 정책으로 간섭 <##IMAGE##>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가 지구촌 제3세계를 연구하여 민족통신에 연재한 나라가 이번으로 80개국이 된다. 이번에 소개된 나라는 남태평양 섬나라, 솔로몬 제도인데 이 나라는 영국침략으로 120년 동안 시달리다가 지금은 또다른 제국주의 미국과 호주의 신식민지 형태로 지배받으면서 고통받고 있는 처지이다. 유박사가 지금까지 연구고찰한 80개국 나라들은 모두가 제국주의자들과 강대국에 시달려 고통을 받아 온 나라들이다. 80번째로 소개되는 "솔로몬 제도"의 현황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남태평양 도서 넓은 지역을 인종지리학적으로 크게 세 개의 구역으로 구분한다. 1) 미크로네시아 2) 폴리네시아 3) 멜라네시아로 구분하는데 “솔로몬 제도”를 비롯하여 “다누아투” “파푸아 뉴기니” “ 피지”등 4개 섬 나라가 멜라네시아 구역에 속해 있다. 이 글에서 “솔로몬 제도”와 “다누아투” 두 개의 섬나라에 대하여 살펴본다. 솔로몬 제도는 호주의 동북쪽에 있으며 파푸아 뉴기니와 인접해 있는 섬나라이며 992개의 섬들로 이루고 있다. 이중 347개 섬에 사람이 살고 있고 645개 섬은 무인도이며 7개의 주요 화산섬이 있다. 전체 섬 면적은 28,446km2이며 서 쪽 맨 끝의 섬에서 부터 동쪽 끝에 있는 산타크루즈 섬까지 거리는 900마일에 이르는 방대한 바다를 영토로 차지하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347개의 섬 중에서 가장 큰 섬 두 개가 있는데 <과달카날>이 제일 큰 섬이고 이 섬에 솔로몬 제도의 수도 “호니아라”가 있다. 그 다음 큰 섬은 <말라 이타>섬이며 이 섬에는 솔로몬 제도 총인구의 40%가 집중되어 살고 있다. 솔로몬 제도의 총인구는 약 52만 명으로 추산한다. 솔로몬 제도의 인종 구성은 멜라네시아인 93%이고 유럽인 0.8%, 중국인 0.3%, 기타 인종들이 347개 섬들에 흩어져 살고 있다. 언어는 솔로몬 제도 전역에 약120개의 언어가 존재하지만 영어가 섞여 형성된 “피진어”가 부족들 사이에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국가적 공용어는 영어이다. 하지만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은 전인구의 2% 정도뿐이다. 솔로몬 제도는 기독교가 96%로 기독교국이다. 기타 종교는 섬나라의 고유한 “정령 신앙”이 뿌리 깊이 존재하고 있으며 기독교가 우세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전통문화의 유산으로 “정령 신앙”이 여전히 사람들의 생활 속에 남아 있다고 한다. 솔로몬 제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는 BC 30,000년으로 고고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Austronesian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BC 4,000년경에 솔로몬 제도에 정착한 것이 역사적 기록으로 확실하다. 그리고 BC 1,200 – 800년에는 남아시아에서 건너온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사용한 토기들이 발견됨으로서 그 들이 솔로몬 제도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여겨진다. 1568년에 최초의 유럽인으로 스페인의 탐험가 맨다나, Mendana가 솔로몬 제도를 처음 발견했다. 멘다나는 남미 페루에서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우연히 솔로몬 제도를 발견 했는데 멘다나는 솔로몬 제도의 해변에서 <사금>이 풍부한 것을 발견 깜짝 놀랐다. 스페인의 멘다나는 미지의 섬들의 해변에 <사금>이 풍부한 것을 처음 발견하고 이 섬의 이름을 <솔로몬 섬>이라고 불렀다. 왜 어찌하여 <솔로몬 섬>인가? 멘다나는 구약 성경에 “금은보화”가 넘치는 솔로몬 왕국을 연상하면서 솔로몬 제도라고 명칭을 창작 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반종교적이며 또 구약 성경을 황금주의로 모방하려는 허망된 발상이며 명칭이며 행위였던가? 오늘 이 지구상에 있는 190여 나라들 중에서 오직 두 개의 나라가 구약 성경의 이름을 그대로 국가의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그 두 개 나라는 <이스라엘>과 <솔로몬 제도>이다. 이 두 개의 나라는 모두 다 성경의 명칭을 사용하면서 실제로는 성경의 원리와 성경의 교훈을 배반하고 어기면서 역행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16세기에 있어서 유럽인들의 탐험행위는 <황금 탐험, Gold rush>이 주요 목적이었다. 영토 침략과 확장을 위한 침략자들의 대명사를 "Gold Seeker"들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 북미주 대륙을 침략한 영국인들은 자기들은 "Freedom Seeker"라고 자랑하면서 남미 대륙을 침략한 스페인 침략자들을 향하여 "Gold Seeker"라고 비난했다. <##IMAGE##>하지만 남태평양의 여러 섬들과 또 솔로몬 재도를 먼저 점령한 스페인을 몰아내고 영국이 솔로몬 제도를 탈취하였으며 영국이 솔로몬 제도에서 오히려 앞장서서 가 되고 있었다. 결국< x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해군이 솔로몬 제도의 여러 섬들을 점령을 했는데 스페인이 이름 짓고 떠나간 솔로몬 제도의 명칭을 그대로 불렀으며 오늘까지도 <솔로몬 제도>가 국가의 공식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1850-1870년에 영국의 선교사들이 대거 솔로몬 제도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영국 교회의 선교의 형태는 솔로몬 제도의 식민화를 위한 길 인도자들이 되고 있을 뿐이었다. 영국은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솔로몬 제도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본격적으로 시작을 했는데 사탕수수 농장의 인부를 보충하기 위하여 근방에 있는 여러 섬들에서 농노들을 대량 솔로몬 제도로 끌어 왔다. 영국은 남태평양에서 농노의 제도를 처음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은 솔로몬 제도에서 농노의 제도를 처음 시작함과 동시에 솔로몬 제도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만드는 첫 발걸음의 계기를 마련했다. 영국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당시 독일이 이미 차지하고 있는 인근의 여러 섬들 까지도 욕심을 내여 1890-1900년경에 서사모아를 독일에 양보하는 대가로 황금의 도서 1,000여개의 군도를 독일에서 탈취하여 영국의 보호령이 이미 되고 있는 솔로몬 제도를 보다 크게 확장하여 영국에 종속된 솔로몬 제도가 되게 했다. 영국은 그 당시 영국의 식민지 통치하에 있던 호주를 앞세워서 시드니 번스필립 회사를 솔로몬 제도에 설립하여 대대적인 코코야자 농장을 이루어 8,000ha 의 거대한 농장을 경영하여 막대한 경제적 착취를 행하여 부귀한 대영제국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됨으로 영국의 농장과 모든 통치제도 일절을 솔로몬 제도 에서 호주로 철수했다. 남태평양에서의 일본군과의 전쟁의 최고의 격전지는 바로 솔로몬 제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1942년에 일본군이 솔로몬 제도를 완전히 점령했다. 특히 솔로몬 제도에서 제일 큰 섬이며 수도가 위치해 있는 과달카날 섬과 그 섬에 있는 수도 “호니아라” 시를 중심하여 1942년 5월부터 1943년 12월까지 1년 7개월 동안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고 있었다. 일본군은 육해공군의 막대한 전투력을 과달카날 섬에 집중하여 전투를 전개했으며 미국군도 역시 과달카날 섬을 지키기 위하여 반격을 가하여 양편에서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 36,000명이 과달카날 섬 전투에 대거 투입됐는데 미군의 반격에 의하여 26,000명이 사망했다. 9,000명이 실종자로 기록됐으며 1,000명의 일본 군인들이 미국군에 붙잡혀서 포로가 되고 있었다. 미국군의 사상자와 미국 군인들이 일본군에 붙잡혀서 포로가 된 미군들도 역시 많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군의 사상자와 피해에 대한 통계를 필자는 얻을 수 없다. 또 무엇보다 더 유감스러운 것은 과달칼라 섬 전투의 1년 7개월 동안에 무죄한 솔로몬 제도의 원주민들이 당한 사상자들의 수와 피해 통계에 대하여 필자가 그 자료들을 얻지 못하여 이 글에서 전혀 밝히지 못하는 것이 몹시 유감스럽다. 한가지 특기할 과달카날 섬의 치열한 전투에 대하여 전해지는 이야기는 미국군인 특무상사 Jacob Vouza가 일본군의 포로가 되였는데 그는 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에 협조하지 않고 끝까지 미국군의 작전계회에 대한 비밀정보를 일본군에게 제공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을 했는데 훗날 Jacob Vouza는 미국의 세번째로 높은 공로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을 말하자면 일본군에게 끝까지 협조를 하지 않고 그 당시 미국군과 영국군 이른바 연합군에 협조하여 전투를 승리하도록 작용한 사람들은 바로 솔로몬 제도의 원주민인 민중들 이였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은 솔로몬 제도의 민중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 대신 오히려 점령군의 권위로 통치세력으로 등장 했을 뿐 이였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과달카날 섬과 그 섬에 있는 솔로몬 제도의 수도인 “호니아라”시를 중심하여 전개된 지상전과 또 산호해역 전투가 계속된 해전으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솔로몬 제도의 민중들의 상처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미국군은 과달카날 섬을 떠나가지 않고 그곳에 이른바 <기지촌>을 형성하여 점령군의 통치를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전시에 황급히 호주로 이동하였던 영국 식민정권을 또 다시 솔로몬 제도의 수도가 있는 과달카날 섬으로 복귀시켰다. 전쟁에 시달리고 극심한 경제난에 빠져있는 솔로몬 제도의 민중들은 생활고에 못 견디고 할 수 없이 봇다리를 걸머지고 미군의 <기지촌>이 있는 과달카날 섬으로 특히 호니아라 도시를 향하여 무작정 무진장으로 모여 들고 있었다. 특별히 솔로몬 제도의 총인구 40%가 있는 <말라 이타, Malaita>섬사람들이 대거 이동을 하여 미국군의 <기지촌>이 있는 과달카날 섬과 수도인 “호니아라”시 로 몰려 들어왔다. 영국의 식민통치 하에서와 또 전후에 미국군의 점령 하에서 줄 곳 소외를 당하고 있는 말라이타 섬사람들은 <무조건 상경>식으로 미국군의 기지촌이 있으며 또 수도인 “호니아라”시가 있는 과달카날 섬으로 직장을 구하기 위하여 철새들처럼 집단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말라이타섬 사람들과 콰달카날 섬의 원주민들 사이에 갑작스러운 혼합은 필연적으로 종족간의 마찰과 분쟁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 종족간의 마찰과 분쟁의 시작이 곧 솔로몬 제도에서 내전의 시작이 되였고 또 쿠데타 발생의 씨앗이 될줄을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콰달카날>섬의 원주민들과 <말라이타>섬에서 이주하여 정착한 이주민들 사이에서 발생한 분쟁과 내란의 원인을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ㄱ) 두 개의 섬 사이에 역사적으로 숨어 있는 종족적 갈등으로 인한 이질감과 적대의식이 발로됐다. 특히 영국의 식민 통치 형태는 오직 콰달카날 섬을 위주하여 편파적인 통치를 하여 말라이타 섬은 항상 소외되고 있었다. ㄴ) 과달카날 섬은 “모계사회”이다. 반대로 말라 이타 섬은 “부계사회”임으로 두 섬사람들이 재산과 부동산의 소유권문제로 인하여 심한 사회적 마찰이 발생했다. ㄷ) 과달카날 섬사람들은 보수전통과 친영국적 기득권을 고수하면서 “터줏대감”적 이권을 옹호하고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말라 이타 섬에서 이주해온 이주민들은 보다 더 적극적으로 개방된 삶의 길을 추구하면서 짧은 기간에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는데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다. 특히 미국군의 기지촌을 배경으로 하여 콰달카날 섬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음으로 자연히 경제적 이권문제로 인하여 서로 충돌이 발생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솔로몬 제도의 정치적 불안 속에서 사회적 혼란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었다. 점령군으로 남아있는 미국과 식민지 종주국인 영국 두 나라는 솔로몬 제도에서 두 종족 간에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혼란에 대하여 하등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의 유일한 관심은 그 때 당시 “냉전시대”의 초기에 있어서 솔로몬 제도가 좌익으로 전향하는 것만을 방지하는데 유일한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 이였다. 이러한 솔로몬 제도의 위기 상황 하에서 1978년에 솔로몬 제도는 독립국이 됐다. 1960년대에 그렇게 많은 피침략국들이 아프리카와 동남아 지역에서 자주독립을 쟁취했는데, 오직 솔로몬 제도는 제일 꼴찌로 1978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독립국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솔로몬 제도의 독립은 여전히 영국 연방제에 묶여 있는 나라로서 국가의 공식 수반은 영국 엘리자벧 여왕이다. 독립 후에도 솔로몬 제도는 19년 동안 여전히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솔로몬 제도는 1997년에 비로서 처음으로 선거를 통하여 국무총리를 선출했다. 솔로몬 제도의 초대 총리로 선출된 바돌로메 울루파루 총리는 1997년 독립국의 총리로 집권을 시작했다. 하지만 바돌로메 울루파루 신임 총리가 집권을 시작한지 1 년 후인 1998년에 솔로몬 제도에서 내전이 발생했다. 1998-2003년 사이에 5년 동안 솔로몬 제도는 “내전”과 “쿠데타”가 소용돌이치는 혼란 속에 빠지고 말았다. 솔로몬 제도에서 내전과 쿠데타가 발생한 근원적 원인을 다음과 같이 추적해 본다. ㄱ) 제2차 대전이 끝난 후에 그동안 영국의 식민통치하에서 소외만을 당해 오던 말라 이타 섬사람들이 미국군의 기지촌이 있는 콰달카날 섬으로 대이동을 하여 미국군 부대에서 직장을 모두 다 독차지했다. 과달카날 섬 원주민들은 말라이타 섬사람들의 극성스러운 생활력으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개척해 나아가는데 대하여 불안한 마음과 질투심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하여 말라이타 섬사람들을 향하여 <불청객>이라고 큰 소리로 불평을 터뜨리고 있었다. ㄴ) 과달카날 섬사람들은 친 영국 보수주의와 기득권을 주장하고 있다 . 이와는 정반대로 말라 이타 섬사람들은 반영국적 정서를 가지고 있으며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의 각오로 무슨 일이라도 닥치는 대로 극성스럽게 취업을 하여 급속히 경제적 자립을 할 뿐만 아니라 주택을 구입하여 부동산의 소유자들이 되고 있었다. ㄷ) 이와 같이 두 개의 섬사람들 사이에 분쟁의 씨가 점점 자라는 동안 보다 더 큰 문제는 남녀의 결혼문제가 대두되어 더욱 어렵게 됐다. 콰달카날 섬은 남자위주의 “부계사회”이다. 하지만 말라이타 섬은 여자가 가정의 주권을 가지고 있는 “모계사회” 임으로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발생하고 있었다. ㄹ) 이와 같은 정치적 문제와 사회적 혼란을 핑계 <과달카날 민병대>가 창설되였다. 새로 창설된 민병대는 무조건적으로 말라 이타 섬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주택과 부동산들을 강제로 몰수했다. 과달카날 민병대를 <이사타부 자유운동, IFM>라고 불렀다. 이 자유운동 민병대는 말라 이타 섬사람들을 불법 침입자로 낙인을 찍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주택과 부동산들에 대하여 불법으로 탈취한 재산이라고 억지주장을 했다. 1999년 7월 현재를 기점으로 하여 약 25,000명의 말라 이타 섬사람들이 민병대에 의하여 그들의 주택과 부동산들을 빼앗겼으며 불법적으로 강제몰수를 당했다. ㅁ) 이러한 무법천지 긴급 상황 속에서 1997년에 솔로몬 제도의 초대 국무총리로 새로 취임을 한 바돌로메 울루파루 총리의 처리방법이 매우 미온적일 뿐만 아니라 말라 이타 섬사람들에게 크게 의심스러웠다. 울루파루 총리는 말라 이타 섬사람들 25,000명이 주택과 부동산을 부당하게 몰수를 당한 사건에 대하여 속수무책의 발언만 되풀이하고 형식적으로 대책위원회를 구성했으나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영국은 라부카를 특사로 솔로몬 제도에 파송했다. 라부카 특사는 이웃 섬나라에서 비무장 경찰들을 동원하여 솔로몬 제도에서 치안을 당하게 했다. 하지만 영국 라부카 특사는 말라 이타 섬사람들 25,000명이 빼앗긴 주택과 부동산을 되돌려 주는 것에 대해여 아무 대책이 없이 침묵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ㅂ) 2000년 초에 이르러서 재산을 몰수당한 말라 이타 섬사람들 약 2,000명이 솔로몬 제도의 정부를 대항하여 자체 민병대 <말라 이타 독수리 부대, MEF>를 창설했다. 독수리 민병대는 일부 경찰의 도움을 받아 경찰 무기고에서 총포를 탈취하여 독수리부대는 무장된 세력으로 강화됐다. 독수리 부대는 나약하고 의심스러운 현직 국무총리를 축출하고 제2대 국무총리로 마나세 소가보레를 추대했다. 말라이타 섬의 독수리 부대의 <쿠테타>는 아주 쉽게 성공했다. 제2대 국무총리는 콰달라카 섬 출신이 아니며 또한 반외세적 성향을 소유한 순수한 민족주의적 정치인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친 영국 성향의 과달카날 민병대, IFM과 반외세 성향의 말라 이타 섬의 독수리 민병대인 MEF 두 개의 민병대 사이에 치열한 내전이 1998-2002년 사이에 5년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양편의 사상자는 대량 속출하고 있었지만 정확한 수의 통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양편에서 수천여명으로 추산한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형식적으로 화해와 휴전을 말 할 뿐 아무 성과없이 그저 관망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남태평양의 골목대장으로 이름난 호주가 웬일인지 2002년에 들어서서 갑자기 솔로몬 제도의 내전에 관여하여 휴전과 중재의 역할을 자진하여 담당하기를 시작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가? 그것은 미국 뉴욕에서 2001년에 발생한 9.11사건과 관련하여 미국의 요청에 의하여 호주는 솔로몬 제도의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관여를 자진했다. 9.11사건 이후에 미국의 입장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테러행위와 내전을 방지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솔로몬 제도가 비록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이다. 하지만 이 작은 섬나라에서 계속되고 있는 테러와 내전이라 할지라도 <작은 나라에서부터 큰 나라로 연결고리가 될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라고 미국은 판단하고 염려를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미국의 염려 때문에 호주는 미국을 위하여 자진해서 솔로몬 제도의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중재자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때 당시 호주의 하워드 국무총리는 솔로몬 제도의 내전에 개입하기 위하여 급히 RAMSI를 조직했다. RAMIS는 호주, 뉴질랜드, 파푸아 뉴기니 그리고 통가등 4개 국가들이 동참하였다. RAMIS는 2,000명의 군인과 경찰들로 구성되어 솔로몬 제도에 주둔했다. 1998년에 시작한 솔로몬제도의 내전은 미국의 요구와 호주의 강력한 개입으로 조직된 RAMIS (Regional Assistance Mission to the Solomon Island)에 의하여 5년 동안 지속된 내전이 2003년 7월에 종식 됐다. 콰달라카 섬의 민병대인 IFM와, 말라 이타 섬의 민병대인 MEF는 RAMIS의 주재에 의하여 드디어 서로 평화협정에 조인하였으며 5년간의 내전을 종전하는데 양편이 합의를 했던 것이다. RAMIS의 중재는 일단 성공하여 5년간의 내전이 끝나게 됐다. 하지만 RAMIS는 그 창설 배경이 생태적으로 친영국적 정치노선에 튼튼히 자리를 잡고 있으며 또 그 배후에는 UN을 빙자한 미국이 RAMIS를 조종하고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외견상으로는 종전이 성공했다. 하지만 종전 후에 8년이 경과된 오늘 2011년 11월 현재에도 콰달라카 섬사람들과, 말라 이타 섬사람들 사이에 참된 화해는 이루워 지지 않고 있다. RAMIS는 2003년 종전 후 1년 동안 솔로몬 제도 양편의 민병대로 부터 3,600개의 무기, 총포들을 회수했는데 그 중에 660개는 고성능 전쟁무기들 이였다. 뿐만 아니라 RAMIS는 내란의 선동자로 1,168명을 체포하였으며 그 중에서 773명에게 중징계를 부과시켰다. 물론 말라이타 섬사람들에게는 불공정한 처사였다. 2003년에 평화협정을 조인한 후부터 2011년 까지 8년 동안에 솔로몬 제도의 정권은 7명의 국무총리가 등장하고 교체됐다. 이 7명의 국무총리들은 모두 다 평균 <1년 반>의 단명의 국무총리들이 되여 교체되고 있었다. 교체가 아니라 사실은 양편에서 서로 불신임을 주장하여 축출을 당한 것뿐이었다. 콰달라카 섬사람들과 말라 이타 섬사람들의 내전은 외견상으로는 끝났다. 하지만 아직까지 서로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 지지 않고 계속하여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는 외세를 의존하고 있는 기득권 세력의 횡포에 대하여 분개하는 민중들의 투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콰달라카 섬사람들이 타지방 섬사람들을 향하여, 특히 말라 이타 섬사람들을 향하여 <불청객>으로 여기는 종족간의 뿌리 깊은 분쟁의 씨가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어느 편이나 막론하고 일단 정권을 잡은 세력은 극심한 부정과 부패로 인 하여 민중의 지탄을 받으면서 민중의 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상대방의 정치인들의 부정과 부패를 공격하고 있다. 특히 외세에 의존하고 있는 정치인들은 일단 정권을 잡기만하면 ”한탕주의” 로 부정과 부패를 감행하여 외국의 원조를 독차지하는 것이 예사로 되고 있었다. 그러하니 솔로몬 제도에 참된 화해와 평화가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넷째로 솔로몬 제도의 국민들이 뿌리 깊은 분쟁으로 싸우고 있는데 대하여 호주를 비롯하여 영국과 미국은 오히려 그것을 보고 반기고 있다. 그리고 솔로몬 제도에서 발생하고 있는 내전과 테러의 영향이 밖으로 퍼져 나가지 않고 오직 솔로몬 제도의 내부사정으로만 끝나도록 하는 것이 호주를 비롯한 영국과 미국의 유일한 관심사 이다. 솔로몬 제도의 콰달라카 섬과 수도인 호니아라 시에서 데모와 폭동, 탈취와 강간이 항상 계속하여 발생하고 있는 것은 지난 8년 동안 예사로 여길 정도다. 그런데 최근 2011년 11월 10일에 솔로몬 제도의 언론인 Silo Breaker가 전하는 News에 의하면 방금 새로 11월 초에 국무총리로 취임을 한 Darcy Lilo 총리를 반대하는 시위가 솔로몬 제도의 수도인 “호이아라” 시에서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는데 경찰은 데모하는 군중들 중에서 122명을 체포했다고 한다. 하지만 새로 취임을 한 Dacy Lilo 총리는 물러서지 않고 곧 내각 국무위원들을 선정하여 발표를 강행하겠다고 언명했다. Dacy Lilo 총리의 정치적 성향과 또 민중들이 시위를 강행하고 있는 참된 이유가 무엇인지 현재는 확실 하지 않음으로 곧 알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한편 오늘 2011년 11월 현재 솔로몬 제도에 RAMIS는 200-300명 정도를 잔류 병력으로 주둔하고 있는 실정이다. RAMIS는 특별한 변동이 없는 한 2013년에 솔로몬 제도에서 완전 철수를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RAMIS가 정말 솔로몬 제도에서 완전철수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아무도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실정인 것이다. 2011년 11월 17알에 호주를 방문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떠오르는 중국에 맞대응을 하기 위하여 남태평양 지역 내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겠다고 언명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호주의 북쪽 끝단원에 미국군 기지를 신설하고 2,500명의 미군을 주둔시킬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호주는 과거 수세기에 걸쳐 영국의 식민지와 보호령이 되여 피침략국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호주는 1900년 1월 1일에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연방의 자치국으로 독립을 획득했다. 독립 후에도 호주는 또 한 세기 동안 영국의 하수인 격으로 대영제국을 위하여 남태평양 제도에서 골목대장의 역할을 하면서 영국의 이익을 위하여 대변인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주는 2001년 9.11 사건 이후부터는 미국이 필요한 나라가 됐다. 미국은 9.11사건 이후에 테러와의 전쟁과 남태평양에서 중국의 세력이 확장되고 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호주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하여 호주는 지금까지 영국의 지배권 하에 있던 관계에서 버서나 이제는 새로 미국의 안전을 위하여 미국의 하수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호주의 주도하에서 RAMIS가 창설되었다. RAMIS는 솔로몬 제도의 내전에 직접 관여를 함으로서 분명히 미국의 요구에 봉사하고 있다. 그럼으로 2013년에 솔로몬 제도에서 RAMIS를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한 호주의 말을 어찌 믿을 수 가 있겠는가? 바누아투의 고대 역사는 모호하다. 하지만 일부 고고학자 자료에 의하면 BC 1300-1100년경의 것으로 보이는 질그릇들의 흔적을 발견됨으로 인하여 훨씬 이전부터 Austronesian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다누아투 섬에 살았으리라고 판단을 한다. 유럽인이 제일 처음 바누아투 섬을 발견한 것은 1606년에 포르투갈의 탐험가인 큐이로스이였다. 하지만 탐험가 큐이로스는 다누아투 섬에 정착하지 않았다. 그 후부터 100여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1774년에 영국인으로서 남태평양 탐험과 점령에 있어서 유명한 제임스 쿡 (Captain Cook)이 다누아투 섬에 상륙했다. 제임스 쿡은 스코틀랜드 북쪽에 있는 헤브리디스 열도를 연상하여 새로 발견한 섬을 “새 헤브리디스”라고 섬의 이름으로 불렀다. “새 헤브리디스”섬의 명칭은 2016년 동안 그대로 불리여 졌다. 하지만 1980년에 독립국이 됨과 동시에 “새 헤브리디스” 섬의 명칭은 216년 만에 “바누아투” 섬으로 개칭됐던 것이다. 1774년에 제임스 쿡이 상륙한 후에 1825-1830년에 많은 유럽인들이 바누아투 섬에 왕래하였는데, 특히 1860년대에 영국인들은 이웃에 있는 여러 섬들. 피지, 사모아, 뉴기니 섬들에서 거대한 농장을 개척하여 농부들이 대량 필요했다. 단편적인 여러 역사자료에 의하면 영국인들은 농부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바누아투 섬에서 남자들을 대량 농로로 붙잡아 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다누아투의 인구가 단시일 내에 기형적으로 극히 감소됐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영국인들은 처음에는 목화 농사를 시작하였는데 그 후에 coffee, cocoa, cocnut 그리고 바나나 농사에서 많은 이득을 획득하고 있었다. 1860년대에 영국의 선교사들도 바누아투 섬에서 교회를 설립하였지만 선교사들은 산업 부흥이 우선이고 교회 부흥은 부차적 이였다. 그런데 영국 침략자들에게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은 프랑스인들이 1882년에 칼레도니안 무역 회사를 창설하고 다누아투섬에 대거 상륙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영국이 바누아투 섬을 독점할 수 있는 권리는 없는 것이었다. 영국보다 늦게 상륙한 프랑스이지만 수적으로 영국인들 보다 프랑스 인들이 우세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프랑스는 수적으로 3:2를 과시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경쟁과 투쟁을 피하기 위하여 서로 합의하여 해결책을 모색했다. 그들의 해결책은 이른바 <콘도, Condominium> 해결 방법이었다. 1882년부터 1906년 까지 24년 동안 영국과 프랑스는 팽팽히 맞서 경쟁을 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서로 합동하여 바누아투 섬나라를 동업으로 침략하기로 결국 합의를 했던 것이다. British- French Condominium을 1906년에 조인하여 두 나라 정부가 동등한 위치와 권한을 가지고 바누아투 섬나라를 “공동소유”를 하는데 합의를 했다. 1905년 7월 27일에 태프트-가쓰라 협약으로 미국과 일본이 조선반도와 필리핀을 “갈라먹기”로 합의한 것과 같은 맥락 이였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의 합의는 “갈라먹기”가 아니라 공동으로 “함께 먹기”로 합의를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또 1899년에 영국과 독일 과 미국 세 나라는 동서 사모아 섬들을 “갈라먹기” 위하여 이른바 <사모아 분할정책 3자회의>를 개최하여 세 나라가 동서 사모아에 대한 분쟁을 해결한 역사가 있다. 하지만 1906년의 바누아투 섬에 대하여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 사이에 발생한 분쟁의 해결 방법은 “갈라먹기”식이 아니라 공동으로 두 나라가 “함께 먹기”식의 해결책을 고안해 냈던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강대국이고 문명국이라고 자랑이며 또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기독교 국가라고 자처하고 있는 영국-프랑스의 침략 행위는 남태평양에 떠 있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작고 작은 “바누아투” 섬나라를 탈취하여 서로 공동으로 점령하는 잔인하고도 비열한 정책을 감행하고 있었다. 아프리카 원시림 속에서 사나운 사자 호랑이 맹수들이 나약한 노루 한 마리를 무참하게 잡아 서로 뜯어 먹는 잔인모습을 영국과 프랑스는 연상케 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통치권에서 해방된 다누아투는 미국의 영향권 하에서 극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됐다. 해방과 동시에 바누아투에는 신흥종교 지도자 John Frum이 혜성처럼 등장하여 다누아투의 민족해방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John Frum 은 <조상들의 영혼이 돌아와 백인의 지배로 부터 해방시켜 준다>라고 하는 메시아적인 신앙운동을 일으켰다. 다누아투 민중들은 독립정신을 일제히 일으켰다. John Frum의 메사야적인 독립운동은 오늘의 다누아투 민중들의 삶속에서 깊은 영향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1970대에 정치 정당으로 <신 헤브리디스 민족당>이 창당되어 Catholic 신부인 Lini가 지도자가 되었으며 1980년에 <바누아투 공화국>으로 독립국이 됐다. Lino신부가 초대 국무총리로 취임했는데 그는 친 영국 성향의 국무총리이다. 1980년에 독립을 쟁취한 바누아투 공화국의 인구는 약 22만 2천명으로 추산하며 국토의 면적은 83개의 섬들의 넓이를 총합하여 12,200km2 이다. 1906년부터 1980년에 독립이 될 때까지 74년 동안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통치를 받아 온 바누아투의 정치적 진로와 사회적 내면에 대하여 대략 다음과 같이 그 과정을 살펴본다. ㄱ. 바누아투의 공식 언어는 영어와 불어를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83개의 섬들 중에서 영어만 사용하는 섬들이 있고 또 프랑스어만 사용하는 섬들이 있다. 그럼으로 “친영국파”와 “친프랑스파”로 분열되는 현상이 자연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회적으로 현실적 문제이다. ㄴ. 바누아투 공화국의 의회도 영어를 국어로 사용하는 의원들과 프랑스어를 국어로 사용하는 의원들로 구분되어 있음으로 기이한 현상이 의회에서도 표출되고 있다. 1980년에 독립 초기부터 1990년 까지 10년 동안에 영국편중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정권이 집권을 했다. Walter Lini 신부가 친 영국 계열의 대표적 지도자로서 국무총리로 집권을 했다. 하지만 1991년에 친 프랑스 정당 <연합중도당,UMP>이 집권하여 칼로트 코르만이 수상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UMP당의 코프만 총리는 1995-2004년 까지 친영국 정당과 연합정권을 형성하여 집권했는데 그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2004년 5월에 친 프랑스 경향의 UMP이 재집권에 승리하여 Serge vohor가 총리로 당선되어 집권을 시작했다. 하지만 Vohor 총리는 중국 대만과 외교관를 맺으려고 시도를 함으로 인하여 곧 친영국파의 공세에 밀려서 12월에 퇴임을 당했다. 바누투아는 또 다시 친영국파 계열이 정권을 잡게 됐다. 2008년 9월에 실시된 선거에서 친 영국 계열의 Edward Natapei가 또 다시 당선됐다. 하지만 그는 7개의 많은 정당들과 연립을 해야만 했다. 그럼으로 총리가 되기는 했지만 불안전한 집권을 시작했다. 2010년 12월 2일에 선거에서 이번에는 친 프랑스 정치인으로 분류되는 Santo Kilman이 당선되어 2013년까지 총리로 집권을 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바누아투의 정치적 현주소로 되여 있다. 수백 년의 긴 세월 동안 서방 침략자들의 착취와 멸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멜라네시아 지역의 섬나라 사람들은 모두가 다 순박하고 유쾌하게 생활하고 있다. 솔로몬 제도를 처음 발견한 스페인 탐험가는 해변에 흩어져 있는 “사금”을 발견하고 너무나 황홀하고 욕심이 북받쳐 올라 본능적으로 “아, 솔로몬 섬이여”라고 외쳤을 것이다. 구약 성경에 있는 “솔로몬의 부귀영화”를 잘 알고 있던 모양이다. 그런데 스페인 탐험가는 욕심을 성취하지 못하고 영국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솔로몬 제도에서 떠나가야만 했다. 영국인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솔로몬 제도에 남기고 떠나간 모든 흔적들을 일절 다 지워 버렸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스페인이 남기고 떠나간 “아, 솔로이여” 라고 외친 그 외침의 소리만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영국은 솔로몬 제도를 점령하여 영국의 식민지로 삼았다. 옛날 유태 나라의 솔로몬 왕국은 어떻 했는가? 옛날 솔로몬 왕국은 부귀영화로 가득한 물질주의에 빠져서 극도로 타락하였다. 그리하여 여호와 신의 징계를 받아 솔로몬 왕국은 패망 했다. 영국은 어떠한가? 영국도 역시 수세기동안 대영제국의 부귀영화는 솔로몬 왕국처럼 번창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영국의 부귀영화는 간곳없이 사라져 없어지고 영국이 본래에 가지고 있던 작고 작은 옛 섬나라로 “잉글랜드”가 되고 말았다. 바누아투 섬나라는 8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인데 총면적은 코리아반도 남녘 땅 전라남도보다 조금 넓은 나라이다. 최근 NEF(신경제재단)이 조사하여 발표한 “행복지수”에 의하면 다누아투 섬사람들이 내면에서 느끼는 행복감은 세계 1위라고 발표했다. 행복은 절대로 경제 순위가 아니라고 하는 보석과 같이 귀중한 교훈을 종교적이 아닌 다누아투 섬 나 라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배울 수 있다. 세계 4대 활화산 중 하나가 바누아투 섬에 있다. 오랜 세월동안 “신 헤브리디스”라는 국명으로 불리다가 1980년에 독립국이 되면서 “바누아투”가 국명이 된 신생국이다. 빨간 불기둥과 연기가 치솟는 황홀한 섬나라 바누아투는 영국과 프랑스의 오랜 억압 속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에게나 적대감이 없이 삶의 느긋함과 평화로움을 소유하고 있다. 바누아투는 가난해도 굶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들은 자연이라는 천연 냉장고에 먹을 것이 온통 수두룩하여 땅과 바다에서 필요한 만큼을 소유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평화로운 섬나라 사람들에게 영국과 프랑스는 어떠했는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는 그렇게도 잔인하고 악마적이며 또 비종교적인 행동으로 바누아투 섬나라를 공동소유, 공동통치를 하면서 바누아투에서 세계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침략행위를 오랜 세월 동안 자행했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하여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노를 느끼게 된다.(끝) www.facebook.com/kilnam.roh 혹은 www.twitter.com/#!/minjoktongsh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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