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51]전호속의 나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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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1-09-24 08:38 조회1,82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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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1]전호속의 나의 노래
누구나 조국을 사랑하지만 김정일위원장의 조국사랑은 누구보다도 지극하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조국은 사람들의 참된 삶과 꿈을 펼칠 수 있고 후손만대의 행복이 담보되는 곳으로 민중의 자주성이 실현된 주체의 조국이라는 것, 특별히 사회주의 조국은 위대한 수령에 의하여 창건되었기 때문에 수령은 곧 조국이라는 것이 김정일위원장의 지론이다.
나의 노래 고향으로 울려가라
따라서 조국은 모든 사람들의 진정한 어머니이며 삶과 행복의 요람과 같아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이고 대상이기 때문에 온 민중들은 행복의 요람인 조국의 융성번영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서슴없이 바치게 되는 것이라 말한다.
1962년 8월 어느 날, 김위원장은 학우들과 함께 평양 룡성구역 어은동에서 군사훈련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려 할 때였다. 누군가가 부르는 선창에 따라 전시가요’전호속의 나의 노래’가 숲 속으로 은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전호속의 나의 노래 고향으로 울려가라
조국땅을 보위하려 총을 멘지 삼년석달
적탄알이 비발치는 격렬한 싸움에도
공 세우라 하신 말씀 명심하여 싸웠네
공 세우라 하신 말씀 명심하여 싸웠노라
전호속의 나의노래 고향으로 울려가라
우리 행복 삼키려는 원쑤 미제 쳐부시고
빛난 훈장 가슴팍에 내 집으로 돌아가면
사랑하는 부모처자 두팔로써 안기리
사랑하는 부모처자 두팔로써 안기리라
노래가 끝나자 이번에는 ‘학생’김정일위원장이 먼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우렁우렁한 노래 소리는 산골짜기를 따라 끝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름답게 퍼져나가는 ‘추억의 노래’를 들으며 깊은 사색에 잠겨있는 한 제대군인출신 학생이 한쪽에 앉아서 그 노래를 듣고 있었다. 우람한 목소리로 노래를 다 부르고 난 김위원장은 이 제대군인 학생 앞으로 다가가서 ‘전쟁시기 고지에서 이 노래를 많이 부르지 않았었느냐’고 물어보며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학생은, 불타는 전호가에 노을이 비껴 올 때면 그리운 고향산천과 부모형제가 못 견디게 그리웠었다고 대답하였다. 잎담배도 말아 피워보며 그리움을 달래보려고도 하였지만 보고 싶은 마음만 더해져서 몹시도 애를 태웠었노라고 하였다. 그래도 가요 ‘전호속의 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어서 조금이나마 고향생각을 달랠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김위원장은 고향을 어찌 보고 싶지 않았겠느냐고 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고 부모처자의 안녕을 기원하고 그리워하는 것도 하나의 애국심이라고 하면서 전쟁 때를 생각하면서 감회 깊은 대화들은 계속해서 이어져 갔다.
‘전호속의 나의 노래’는 인민군전사들이 치열했던 싸움터에서 대중영웅주의를 발휘하여 그처럼 용감히 싸울 수 있었던 비결의 하나가 바로 그들의 고향에 대한 사랑, 조국에 대한 불 같은 사랑에 있다는 것을 하나의 소박한 시 형상을 통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한편의 소박한 가요를 통해서도 김정일위원장은 어머니 조국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며 조국의 존엄을 위하여 어떻게 투쟁하여야 하는 것까지 일일이 예를 들어가며 심장 깊이 깨우쳐 주었다.
참으로 김정일위원장의 조국사랑의 정서는 김일성주석을 높이모신 긍지로 사회주의 조국의 융성번영을 확고하게 담보할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근로대중을 행복의 낙원으로 인도하려는 사랑으로 충만해 있었다.
전호속에서도 평화를 노래하였네
<전호속의 나의노래>는 예술영화”화선에서 부르던 노래”의 영화음악으로 널리 알려진 노래이다. 전후 복구사업이 한창이던1959년 심봉원이 작사하고 합창’압록강’과 ‘청산벌에 풍년이 왔네’로 유명한 김옥성이 작곡 하였다.
삼년 석달이나,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치열한 전투를 하면서도 병사들은 평화롭고 무궁번영 할 조국의 앞날을 긍지 높게 내다보았다. 병사들은 손에 억세게 쥐어져 있는 총대가 나라의 진정한 평화를 담보하고 궁극적으로는 꿈에도 그려온 사랑하는 부모처자들의 행복을 지켜낼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내가 지금 서있는 이 자리가 영광스런 조국과 부모형제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심장으로 절감 하면서 ‘정의의 총대로써 침략자들을 무찔러 조국을 영원히 부강하게 하리라’라는 굳은 결의에 차 넘치고 있었다.
‘조국해방전쟁’의 성격은 이렇게 첫 전시가요에서부터 명확히 규정되었으며 온 나라의 청년들, 온 민중이 합창한 ‘전호속의 나의 노래’는 침략자들에게 대한 민중의 단호한 경고이었고 선언이었다. 김일성주석은 전쟁시기 ‘인류역사는 자기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결사적으로 대항했던 나라와 민중들은 언제나 승리하였다. 우리가 벌려나가는 투쟁은 정의의 투쟁이다. 승리는 반드시 우리 민중들의 편에 있을 것 이라고 격려 하였다.
찬란한 내일을 전호속에서 보았네
전쟁시기에는 국가와 민족뿐 아니라 개인의 운명까지도 예측할 수 없는 급박한 상황을 맞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예측이 어려운 때에 음악은 그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이 강렬한 힘을 발휘하게 되어 민중을 하나로 묶는데 큰 역할을 해낸다. 근로대중들의 감정정서는 음악을 통하여 조국을 수호 하려는 강렬한 열망으로 결집되는 위대한 힘을 뿜어낸다.
혁명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비록, 혁명투사는 자기 생전에 그 투쟁의 열매를 보지 못하고 떠날수도 있지만 조국의 휘황찬란한 앞날과 후손만대의 행복을 위하여 소중한 청춘도 혁명을 위해 바치고 둘도 없는 목숨까지도 기꺼이 조국에 바치지 않았던가? 그래서 혁명가는 자기를 위한 투쟁의 영광은 동지들과 후대들에게 남기고 자신은 낙엽으로 되어 혁명의 뿌리를 감싸주게 된다.
김정일위원장은 혁명가들에게는 오늘보다 내일을 위하여 살며 투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면서 끝없이 번영할 사회주의 조국, 그 품속에서 더욱 보람차고 행복한 삶을 누릴 인민의 모습을 그리며 그 어떤 난관도 달게 여기며 일하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참으로 승리의 신심에 넘치는 말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용서도 하지만 어떤 때는 증오까지도 포용해 버리고 만다. 사랑은 그리운 부모형제, 정든 고향과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도 아낌없이 바치려는 불보다 뜨거운 애정으로 승화된다.
그런데 목숨보다 더 귀중한 그 사랑을 유린하는 침략자들이 있다. 사랑을 파괴하고 있는 무법자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는 불같이 격렬한 투쟁으로 이어지고 여기서 쟁취한 승리의 감정은 민중들의 정서를 뜨겁게 끓게 하여 강하게 분출시켜 놓는다.
이런 격한 감정들은 한곳으로 축적되어 주먹을 불끈 쥐는 힘을 샘솟게 하고 이런 정서들은 승화되어 많은 명곡들을 창조해내게 하며 민중들은 창조된 노래들을 부르고 또 부르며 수령을 따라 조국수호에 나서게 되는 것이다.
준엄한 전쟁시기, 전호속에서도 ‘나의 노래’를 부르며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낭만이 있었던 것은, 혁명가들이 항상 그러하였던 것처럼, 병사들도 착취와 차별이 없는 ‘인민의 나라’의 꿈을 민중들에게 안겨주려는 최고사령관을 한없이 신뢰하고, 조국의 찬란한 미래의 청사진을 긍지 높게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민중들과 병사들은 영도자의 그 위대한 꿈을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불 같은 신념과 의지가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병사들의 꿈은 강성대국으로
사람들은 이북을 비유할 때 고슴도치라고도 하며, 전갈이라는 말로도 표현을 한다. 그것은 북조선이 나라의 면적도 넓지 않고 인구도 많지 않으나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무서운 나라, 또는 대단히 저력이 있는 나라라는 말로 이해되고 있다. 아마 전쟁에서 맞싸워 본 경험이 있거나 국제회의의 협상테이블에서 담판의 당사자로 마주 앉아 본 경험이 있는 외교관들은 북조선을 가리켜 한결같이 말로는 당해낼 수 없는 상대라고 혀를 내두른다는 것이다.
무력으로도 건드릴 수가 없고 담판에서도 말발이 서지 않는 이런 현상을 두고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그것이 알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나라들도 일군들을 전문적으로 육성하고 있지만 북조선의 인재육성의 비법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대단한 대답은 나오고야 말았다. 그것은 자주노선을 고수하고 자력갱생의 기치아래 주체교육을 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도 사회주의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가는 김정일위원장의 영도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떤 사람은 북조선의 음악에 대해 기계적이고, 딱딱하고 냉혈적인 차가운 음악일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으로 혹평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던 사람이 후에,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북의 음악을 들어볼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시간은 흘러서 몇 개월 지난후에 이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북조선의 음악에서 다른 나라의 음악과 다른 특이한 몇 가지를 발견할 수가 있었다.
첫째는 음악에 민족적 색채가 짙었으며 우리나라의 장단과 가락은 아주 매혹적이었다고 하였다. 민족악기의 독특한 음색이 인상적이었다고 하면서 자기에겐 역시 민족적인 선율이 제격이었다고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나는 그가 맞는 말을 했다고 생각 했다.
아무리 들어보아도 ‘전호속의 나의 노래’같이 밝은 희망을 심어주고 민중들과 기쁨에 넘쳐 살게 된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음악은, 다른 나라의 노래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이북의 예술가들이 놀라운 창의력으로 세계 음악의 중심에 설수 있는것은 전적으로 민중중심의 음악정치를 펼치는 김정일위원장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었다.
이것은 최근 평양을 방문했던 미국의 저명한 지휘자와 이남의 이름있는 음악가도 이북의 교향악단과 공연단체의 공연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몹시 감격하였다고 말하였다.
음악으로 단결을 이룬 나라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나 전쟁이 일어난 날은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전쟁에서 진 쪽은 패자로써 이런 패전의 쓴맛을 다시는 보지 말아야 하고 저지른 도발은 패망이라는 역사적 교훈을 받게 된다.
정의의 수호자, 전쟁의 승리자에게는 자손만대에 그 영광을 기억하게 하고 승리의 자랑찬 역사는 긍지 높게 간직한다.
이러한 가치와 생명력을 가진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위대한 계승자가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전시가요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기념비적인 노래는 실로 영원한 생명력으로 민중을 파고든다.
이북의 가요는 다른 나라의 노래처럼 절망적이지 않고 우쭐해서 남을 경멸하는 쪼의 노래는 아예 하지도 않고 있지도 않다. 무법자처럼 설치고 미쳐 날뛰는 그런 싹수 없는 음악은 아예 없다. 쇳소리 망치소리 나는 망나니 같은 시끄럽고 파괴적인 소리는 음악축에 끼지도 못한다.
이북의 전시가요는 고귀한 정서가 내면에 흐르고 있어 비록 견디기 힘든 역경이 순간을 엄습한다 해도, 민중은 언제나 희망을 노래한다. 노래는 한없이 즐겁고 활력이 샘솟는다. 철학적인 정서는 사람들 사이에 풍요롭게 묻어나고 인정은 철철 넘친다.
조국해방전쟁(6.25전쟁) 시기에도 그 조그마한 나라가, 미제를 우두머리로 해서 쳐들어오는 열 여섯 개국의 연합세력을 어떻게 물리칠 수가 있었겠는가? 불가사의한 이야기의 비결은 ‘전호속의 나의 노래’같은 심장의 노래가 병사들 속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영광은 노래와 함께 영원할 것이다
전쟁시기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조국해방전쟁의 길에 나섰던 대열에 어린 병사들도 있었다. 전선으로부터 후퇴의 수천리길을 걸어 오면서도, 병사들은 전시가요의 구절구절에 담겨있는 깊은 뜻과 선율에서 오는 감동을 몇 번이고 곱씹으며 최고사령관이 있는 그곳을 찾아 떠난다.
병사들의 마음속엔 그 길만이 승리의 길이며 최고사령관동지만 있으면 반드시 이긴다는 뜨거운 믿음이 있었다. 진정 그 어린 병사들은 최고사령관동지는 조국이고 승리라는 믿음에 충만해 있었다.
이북의 가요들은 소박하다.
그러나 백전백승을 가져오는 이북의 전시가요들에는 위대한 생명력을 웅비하고 있었으며 노래의 생명력은 온 나라 민중을 일깨워 승리의 광장으로 불러 일으키는 기적 같은 힘을 뿜어냈다.
수령만을 굳게 믿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병사들은 전쟁의 진정한 승리자로 되었고 무적의 강자들로 이름을 떨쳤다.
오늘도 이북의 근로대중들은 조국수호전쟁의 그 날, 전선에 울려 퍼졌던 가요 ‘전호속의 나의 노래’의 의미를 다시금 심장에 새기며 제국주의자들의 집요한 반북활동을 단호히 거부하고 내 나라의 푸른 하늘아래 보란 듯이 강성대국의 문패를 내걸을 굳은 결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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