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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74] 자주화를 향해 몸부림치는 <피지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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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1-09-18 16:02 조회1,8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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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74번째 나라로 <피지 공화국> 배경을 알아보면서 "남태평양에는
22개국이 산재해 있다. 남태평양의 총면적은 지구 넓이에 1/3이나 되는 광활한 해양 지역이다. 호주와 뉴질랜드를
제외하고 모든 나라들은 자그마한 섬나라들이며 가장 작은 나라인 나루(Nauru)의 총인구는 1만3천 287명에
불 과하며 면적은 21평방키로 정도의 작은 나라 이다. 그런데 미국의 앞바다 남태평양에 산재해 있는 자그마한
나라들에서 쿠테타와 폭동이 자주 일어나고 있으며 미국의 영향권에서 탈피하여 자주하는 국가로 점차로 전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추세다".며 그의 74번째 연재기획을 소개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연재-74]자주화를 향해 몸부림치는 <피지 공화국>

미국의 앞바다 남태평양 22개국의 진실과 허구

이제는 서방 구미 국가들의 손아귀안에 있지 않는다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IMAGE##>남태평양에는 22개국이 산재해 있다. 남태평양의 총면적은 지구 넓이에 1/3이나 되는 광활한 해양 지역이다. 호주와 뉴질랜드를 제외하고 모든 나라들은 자그마한 섬나라들이며 가장 작은 나라인 나루(Nauru)의 총인구는 1만3천 287명에 불 과하며 면적은 21평방키로 정도의 작은 나라 이다.

그런데 미국의 앞바다 남태평양에 산재해 있는 자그마한 나라들에서 쿠테타와 폭동이 자주 일어나고 있으며 미국의 영향권에서 탈피하여 자주화를 실현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있는 추세다.

현재 <태평양섬나라공회, Pacific Island Forum>에 속해 있는 14개국 가운데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는 8개 국가이며 타이완과 외교관계가 수립된 나라는 6개 국가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막강한 영향력으로 남태평양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는 단연코 중국이다.

역사적으로 남태평양의 전역에서 200여년 전부터 식민지개척에 앞장섰던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손아귀에서부터 서서히 벗어나면서 동방의 중국의 영향권으로 편입되고 있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워싱톤 AP통신에 의하면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2010년 1월 11-19일 에 오세아니아 순방에서 미국의 앞바다 남태평에 있는 나라들의 동향에 대하여 지대한 염려를 표명하면서 호주와 뉴질랜드 그리고 파푸아 뉴기니 나라들의 총리와 국방장관들과 회담을 하면서 남태평양 섬나라들의 문제를 논의했다.

또 보다 더 놀라운 것은 남태평양 국가의 지도자들이 대통령으로 혹은 수상으로 취임을 한 후에 첫 해외 순방지로 미국이나 영국, 호주를 찾아 가는 대신 이들은 중국을 첫 방문국으로 선택했다. 2004년 이후 8개 국가의 수반들이 정상적인 국교를 기대하면서 집권후 첫 방문국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남태평양 국가들에 대한 관심은 막대하다. 제3세계민족 해방역사에 있어서 남태평양에 산재해 있는 작은 섬나라들의 반영반미반제국주의적 투쟁의 역사는 결코 소홀히 여길 수 없다.

피지 공화국의 간추린 과거의 역사


200만년전에 사람들이 피지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BC 1500-1300년경에 멜라네시아인들이 피지로 이동하여 오스트랄로이드와 혼혈하여 살았으며 그후에 플레네시아 혼혈인으로서 현재의 피지민족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고대 피지인들은 사람을 잡아 먹는 식인 풍습과 일부 다처제를 통한 족장의 통치사회가 오래 지속 되었으며 부족간의 분쟁도 계속되고 있었고, 그리고 고대 피지인들이 도자기 제작의 흔적을 보여주는 문헌이 발견되기도 했다.

BC 50년경 해변가에서 어업으로 살아가던 피지인들의 경제중심이 어업에서 농경사회로 옮겨가면서 인구의 증가와 부족 중심의 봉건제도가 정착되였다.

피지 공화국의 위치는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 연결하는 중간 지역에 위치하여 있기때문에 “남태평양의 십자로”라고 불리운다. 피지는 두 개의 큰 섬, 비티레부와 바누아레부 (Viti Levu & Vanua Levu)를 중심하여 840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워져 있다.

총면적은 1만 8,270 km2로 코리아반도 남녘의 경상남북도 크기의 영토이며 인구는 약 93만 5천명으로 추산한다. 피지는 태평양에서 폴레네시아 지역에 속해 있는나라이며 이웃 나라들은 호주를 비롯하여 통가, 바누아투, 뉴질랜드, 투빌루, 솔로몬 그리고 사모아 등 섬나라들이 있다, 피지의 수도는 수바(Suva)이며 제일큰 섬 비티레부 Viti Levu섬에 있다.

1643년에 네덜란드의 항해 탐험가 아벨 타즈만이 처음 피지를 발견하였다. 하지만 그는 피지 바다에 암초가 있는것을 발견하고 경고를 내렸음으로 아무도 접근을 하지 않었다,
그는 피지를 호주와 뉴질랜드라고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그후 130년이 지난후 1774년에 영국인 탐험가 제임스 쿡이 피지를 또 다 시 발견하였으며 15년 후에 윌리엄 블라이가 피지의 가장 큰섬 비티레부섬을 비롯하여 39개섬들을 확인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피지 지도를 처음 만들었다.

1800년대에 들어서서 영국의 상인들이 들어와 백향목과 피지의 희귀한 과일들을 거래하면서 서구의 문명이 피지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철제도구, 담배, 의복, 총기들이 급작스럽게 영국인들에 의하여 피지에 유입되었다.

바다에서 폭풍으로 난파된 배의 생존자들과 선원들, 영국에서 도망쳐온 죄수들이 피지 사회에 급작스럽게 유입되여 사회 구성원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이들은 피지족 상류 계급에 파고 들어 족장의 통역, 중개인, 목수, 무기전문가 등으로 둔갑하여 안전한 사회적 위치로 자리를 잡아나가고 있었다.

또한 피지 추장들은 영국과 미국에서 모여드는 선박들의 난파선에서 찾아 낸 무기들을 사용하여 원주민 부족들간의 전투에서 사용하는 문제로 발전하기도 했다.

1835년에 이르러서 피지를 공략하는 또 다른 침략집단이 등장했는데 그것은 영국의 선교사들, 특히 영국 감리교 선교사들이 피지의 토속종교를 개종하려는 노력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1854년에 세력이 강한 추장들이 기독교로 개종함으로써 선교사들은 힘을 얻고 있었다.

한편 이때 피지에서는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침략자들이 서로 주도권을 잡기위한 다툼으로 피지는 무법 천지가 되고 말았다. 그 당시 피지에는 6개의 왕국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외국 침략자들의 권력 싸움에 공연히 원주민 왕국들이 말려들어 외국인들이 가지고 들어온 총을 소유하게되여 왕국들 간의 싸움에서 1847년에 희생자들이 대량 발생하고 있었다.

1874년 10월 10일에 피지는 결국 영국의 식민지로 병합되고 말았다. 앞으로 96년간 억압과 착취의 식민통치를 받아야 하는 비운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피지를 식민지로 만든 영국은 이 때부터 사탕수수 산업을 시작하였으며 1879년에 인도에서 최초로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들을 대량 피지로 데려왔다. 그 때 인도는 역시 영국의 식민지로 있었음으로 가난에서 벗어날수 있는 막연한 희망으로 <40-50년간의 계약노동자>들이 되여 피지로 들어오게 되였던 것이다.

인도인 계약노동자들이 해마다 증가하여 결국 그 때 당시 피지의 원주민 총인구 의 절반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 최초에 피지에 온 인도인 계약노동자들이 40-50년이 지난 후에 계약이 끝난 인도인의 수가 1919년 현재에 최소 6만명이상 이였다고 한다.

계약노동자 신분에서 자유인이된 인도인들은 땅을 소유하고 있는 원주민들과 자연히 심리적으로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계약에서 해방된 인도인들은 서로 똘똘뭉쳐 악착같이 상업에 투신하여 관광사업, 무역, 제조업, 소매상에 전념한 결과 대성공을 거두었다.

피지 원주민 보다 교육열이 높았던 인도인 계약노동자출신 공동체는 토지는 없다.하지만 돈, 달러는 많이 가지고 있는 기이한 현상이 피지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기이한 현상을 <땅을 가진 원주민과 돈을 가진 인도인>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고 있었다. 또 <토지소유공동체>와 <산업공동체>의 양분으로 기이한현상이 피지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유행어외 기이한 현상이 피지 독립후에 반복되고 있는 쿠테타의 배경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2011년 현제 피지 원주민 51%와 인도계 피지인 44%가 정치적으로 팽팽히 맞서고 있다. 하지만 해마다 년간 40만명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는 피지의 관광업은 인도계가 완전히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

영국과 미국이 제3세계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이기는 하만, 역시 피지에 뿌려 놓은 민족분열, 인종갈등 그리고 빈부격차의 사회악 뿌리는 오늘의 피지에서도 제국주의가 남긴 결과로 분석되고 있다.

피지 공화국의 간추린 오늘의 역사


1970년 4월 런던에서 영국 의회는 피지를 영국연방에 묶어 놓는 조건하에서 독립을 허용한다는 결의를 했다. 이 결의에 의하여 피지는 1970년 10월 10일에 드디어 영국 식민통치 96년을 마감하고 독립을 성취했으며 UN의 127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피지 공화국은 영국식 의회 정치제도를 따라 1972년 5월에 첫번 총선을 실시 했다. 첫번 총선에 피지 원주민의 <동맹당, Alliance Party>이 승리하였으며 초대총리로 마라(Mara)가 취임했다.

Mara는 원주민 부족 추장회의의 대표자이며 훗날에 원주민 부족회의를 대표하여 명목상 대통령이 되기도 했다.

독립 초창기부터 원주민 동맹당이 단독정권을 수립한데 대하여 인도계 피지인들의 마음속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77년에 실시한 두번째 총선에서 역시 원주민 동맹당은 또 다시 승리하였다.하지만 동맹당 마라총리는 총선에 또 다시 승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계의 <연합당, Coalition Party>을 포섭하여 연합정권을 창출하는 광폭정치에는 극히 소극적이며 정치형태에 오히려 퇴보하여 인도계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데는 항상 실패하고 있었다.

그런데 1987년 4월에 실시한 총선에서 피지에서 놀라운 큰 이변이 발생했다. 원주민계 동맹당 Alliance Party가 총선에서 패배하고 인도인계의 <연합당, Coalition Party>이 1987년 총선에 승리하여 피지의 집권당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집권당이 된 인도계 연합당은 바바드라, Bavadra를 총리로 선출하고 집권을 시작하게 되었다. 피지의 인도계의 민중들에게는 지난 날의 비운과 피눈물의 슬픔을 위로해 줄뿐만 아니라 새로운 회망을 안겨주는 새로운 출발의 기회가 되였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인도계의 집권을 반대하는 원주민들이 인도인 상점이나 사업장에 침입하여 화염병을 던지고 인도인을 구타하고 납치하는 사건이 벌어 지고 있었다.

영국이 뿌려 놓은 뿌리깊은 민족갈등의 씨앗은 이렇게 노출되기 시작하고 있었다.바바드라 총리가 집권을 새로 시작한지 한달도 채 되기전인 1987년 5월 14일에 원주민계의 육군 중령 라부카, Rabuka가 일으킨 무혈 쿠테타가 발생했다.

피지 인도계 민중들이 총선에 승리하여 기적처럼 바바드라 총리 정권이 등장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고 있었는데 한달도 채 되기전에 인도계 민중들의 꿈은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피지 공화국의 역사에 있어서 제1차 쿠테타로 기록된 라부카 중령이 일으킨 쿠테타에 대하여 여러가지 해석들이 난무하다. 그 첫번째 해석은 미국 CIA가 관여 했다는 공작설이다.
미국은 남태평양 도서에서 핵 실험을 계획하고 있는데 미국에 충성하는 피지원주민 정권이 흔들림 없이 확립되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야만 계획된 핵실험을 차질 없이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인도계 <연합당 Coalition Party>이 집권하게 되면 그 배후에는 분명히 인도가 있음으로 미국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될것을 미국은 염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의 CIA 공작설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두번째 해석은 영국 감리교가 배후에서 작용한 라부카 중령의 쿠테타라는 것이다.영국 감리교는 심혈을 기우려 피지 원주민 왕국들에게 성공적으로 선교의 기반을성취했 놓았다. 그런데 만일 인도계 정권이 수립되면 그동안 성취해 놓은 선교의 기반이 붕괴될 것을 염려하여 원주민계의 라부카 중령의 쿠테타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영국 감리교 선교사들의 피지 원주민계의 라부카 중령의 쿠테타 관련설은 매우 설득력이 있는 해석이다. 왜냐하면 코리아반도에서 1919년에 3. 1 독립운동에 대하여 그때 당시 미국 선교사들은 일본편에 서서 일본을 지원한 역사적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 선교사들은 정교분리 이론을 주장하면서 조선기독교인들이 3.1 독립운동에 적극 나서는 것은 기독교 선교에 방해를 초래한다고 주장하면서 노골적으로 3.1 독립운동에 기독교인들이 나서는 것을 반대했다.

미국 선교사들은 현세를 체념하고 오직 내세지향적인 기독교 신앙만을 가지도록 코리아반도에서 미국과 일본에게 유리한 선교정책을 강조하고 있었다.

무혈 쿠테타에 성공한 라부카 중령은 곧 대령으로 진급하여 정권을 잡았다. 하지만 인도계 정치세력은 만만치 않게 뒤로 물러지 않고 라부카 정권에 대하여 항쟁을 계속했다.

인도계 정치세력은 라부카 대령이 주도하고 있는 정권에 동참하여 두 종족의 진영이 서로 50대 50으로 공동정부조직을 구성할 것을 결사적으로 주장했다. 하지만 라부카 대령은 인도계 정치세력의 강력한 요구에 대하여 분개하여 1987년 9월25일에 제2차 친위 쿠테타를 스스로 또 다시 일으켰다.

제2차 친위 쿠테타를 일으킨 라부카대령은 자기 자신이 군사정부 수반과 총리가 되여 헌법을 폐지하는 긴급통치를 강행했다. 라부카 군부 독재정권은 피지에서 인도계 민중들의 요구는 그 어떤 요구라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원천봉쇄의 강력한 정책을 주장하고 있었다.
군사령관으로서 군사정권이 실권을 확보하고 안심하게 된 라부카 사령관은 정치적으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1987년 12월 7일에 임시 정부 대통령으로 간닐라우, Ganilau를 임명하고 총리로 마라, Mara를 임명하였다.

라부카는 여전히 군사정권의 국가수반의 위치와 정권의 권한을 확보하고 있었다.이렇게 하여 라부카 군사정권의 체제는 요지부동하여 1999년 5월까지 11년 동안 장기 집권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부카 군사 독재 정권은 드디어 수명이 다 된 배터리 모양으로 피지정치계에서 뒤로 사라져 없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쥐구멍에도 태양빛이 비치는 날이 있었던가? 1999년 5월에 실시한 총선에서 인도계 <피지노동당, FLP>이 선거전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

11년 동안 친미 독재자로서 무서운 군사정권을 이끌어 온 라부카 군사 독재정권을 총선의 선거로 물리치고 천신만고 끝에 인도계 피지노동당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피지 노동당은 챠우드리, Chaudhry 노동당 당수를 총리로 선출하여 피지의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계 총리가 집권을 하게되는 기쁨을 가지게 되었다.

챠우드리 총리는 1942년 생으로 인도 계약노동자의 혈통이며 그의 종교는 힌두교이다.

챠우드리는 1991년에 피지노동당을 창설하여 8년동안 노동당을 이끌어 왔는데 1999년 5월 총선에서 승리하여 노동당 집권의 총리가 되었다.

피지 의회 71석중에 인도계 <국민연합당>이 58석을 획득했으며, 그 58석중에서 피지 노동당이 37석을 차지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 인가?
피지 노동당 정권이 집권을 시작하여 단 1년간의 집권을 아직 다 끝나기도 전에 피지 원주민계의 반정부 쿠테타가 또 다시 일어 났다.

피지 원주민들이 인도계 노동당이 집권을 하게 된것을 그냥 앉아서 보고만 있지 않았다.

또한 미국도 역시 피지에서 좌파정권이 등장하는것을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다.
2000년 5월에 노동당이 집권을 시작한지 꼭 1년만에 총칼로 무장한 소수의 괴한들이 의회를 습겨하여 노동당 챠우드리 총리를 비롯하여 노동당계 의원들을 다수 체포하여 투옥함으로서 피지 공화국 역사에서 제3차 쿠테타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런데 제3차 쿠테타의 주동자는 누구인가?
제3차 쿠테타의 주동자는 피지 원주민 정당중의 하나인 <피지정치당, SVT>소속 의원의 아들인 조지 스페이트, Speight 이였다.

사실에 있서서 스페이트는 군부 출신이 아니다. 그는 사업가이며 또한 자칭으로 엉뚱하게 나는 <기독교 테러 지도자, Christian Terrorist Leader>라고 주장하는 정체불명의 사람이였다. 이러한 소수의 무장한 괴한들이 쿠테타를 일으켜 일시적으로 성공하였던 것이다.

스페이트가 일으킨 쿠테타는 8주간 동안 질질 끌어 가면서 노동당의 챠우드리 정권만 붕괴시키는데 일등공신으로 성공했다. 8주 후에 피지 군부의 바이니마라마 총사령관은 정국 수습에 등장하여 헌법을 페지시키고 임시 총리로 2000년 7월에 콰라세, Qarase를 임명하여 콰라세 임시정부를 출범시켜 정국을 수습했다.

피지의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여 원주민 콰라세를 임시 정부의 총리로 취임시킨 그 당시 군사령관은 바이니마라마 Bainimarama 군사령관이였다. 바이니마라마 군사령관은 피지 원주민들로 부터 영웅대접을 받게 됬다.

하지만 숨겨진 비밀을 어찌하랴.

바이니마라마 군사령관은 인도계 노동이민의 제3세대에 해당하는 인도계 후손으로서 피지인 군사령관 이었다.

바이니마라마 군사령관은 원주민 공동체로 부터 영웅대접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태생적으 인도계 3세 이기때문에 내면적 비밀로는 원주민계의 콰라세 정권으로부터 암살의 위협을 항상 받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극비에 속하는 느낌이였다고 한다.

콰라세 정권은 쿠테타를 일으킨 스페이트에게 2002년 2월에 종신 징역을 선고 했다. 하지만 종신 징역 선고는 일종의 정치쇼에 불과했고 그 후에 자유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스페이트의 무장한 일당이 일으킨 쿠테타는 8주간 동안에 노동당 정권인 챠우드리 Chaudhry 정권만을 붕괴시킨 일등공신이기 때문에 원주민 정권인 콰라세 총리는 스페이트에게 관용을 베풀어 주었던 것이다.

콰라세 정권은 2001년 8월에 총선을 실시하여 콰라세의 <피지통합당 SDL>이 승리하여 의회 32석을 획득하여 집권당이 되었다. 피지 노동당은 27석을 차지하여 제2당으로서 야당이 되여 인도계를 위한 정치세력으로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2006년 5월에 콰라세 정권하에서 두번째 총선을 실시했다. 이번 선거에서도 역시 콰라세 총리의<피지통합당>이 36석을 획득하여 집권당이 되었고 <피지노동당> 이 31석을 차지했다.
이와같은 2001년과 2006년의 총선의 승리로 인하여 콰라세 <피지통합당>이 계속하여 집권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2당이 되고 있는 <피지노동당>은 콰라세총리의 정권과 집권당에 대항하여 줄기차게 투쟁을 계속했다.

제2의 당이된 <피지노동당>은 “국민생활수준향상문제”와 “화해단합단결문제”에 대한 두 가지 의제를 의회에 제출하였다. 의회는 찬성과 반대로 극렬 대립을하고 있었다.
이 극렬 대립문제를 다음의 두 가지 의제로 요약할 수 있다.

1) 여당과 야당이 함께 연립내각을 편성 하자.

2) 불법적으로 쿠테타를 일으킨 자칭 Christian Terrorist Leader라고 주장한 정체불명의 쿠테타 주동자 스페이트에 대한 사면을 곧 취소하고 법적으로 공정한 처리를 단행하라.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보수적인 피지 원주민들과 피지 대추장회의 그리고 피지의 최대 기독교 교단인 감리교단 등이 적극적으로 선동하여 피지노동당이 의회에 제출한 두 가지 의제에 대하여 논의와 통과되는 것을 절대로 반대하고 있었다.

콰라세 Qarase 총리의 정권은 양손에 떡을 쥐고 있는 형국으로 매사에 있어서 우유부단하고 무결정 상태에서 피지의 정국은 원주민계에게 항상 유리하고 인도계 종족에게는 매사에 불리하여 두 공동체 사이에 혼란과 충돌이 계속되고 있을뿐이였다.

독립후 4번째 쿠테타를 일으킨 바이니마라마


2006년 12월 5일에 바이니마라마 군사령이 피지 독립 후에 4번째 무혈 쿠테타를 일으켜 원주민게의 콰라세 총리를 축출하고 조세파 일로일로를 대통령 권한대행자로 추대했다.

조세파 일로일로 대통령 권한대행자는 콰라세 전총리의 정권이 그동안 피지에서 종족분열 만을 조장해 왔다고 비난하면서 무혈 쿠테타에 성공한 바이니마라마 군사령관을 과도정부의 임시 총리로 임명했다.

1970년에 피지공화국이 출범한 후에 4번째 쿠테타에 대하여 <희한한 쿠테타>의 성공이라고 세계 외신 뉴스들은 일제히 보도했다. 왜 희한한 쿠테타인가?

쿠테타를 주도한 바이니마라마 장군은 쿠테타 감행 4일전에 미리 쿠테타설을 발설했다는 것이다. 또 뿐만 아니라 그때 피지에서는 국가적인 행사인<력비경기>가 예정되여 있었다고 한다.

바이니마라마 장군은 <럭비경기> 때문에 쿠테타를 하루 연기를 한다라고 미리 발표를 했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쿠테타야 말로 정말 희한한 쿠테타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콰라세 현직 국무총리는 호주등 이웃나라들에게 호소하여 군대를 피지에 파송해 바이니마라마의 쿠테타를 미리 방지해 달라고 전화로 요청했다. 하지만 그의 호소는 응답을 받지 못했다.

바이니마라마 장군의 쿠테타 성공에 대하여 인도계 민중들은 환영하고 기뻐하고있지만 피지 원주민계 공동체에서는 검은 옷을 착용하고 항의를 표시했다.

2007년 1월 4일에 조세파 일로일로 대통령 권한대행자는 군부 쿠테타에 성공한 바이니마라마 장군을 국무총리로 공식 임명하여 국가재건을 위하여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도록 조치를 과감하게 했다.

바이니마라마 총리는 군사령관과 총리직을 겸임하여 막강한 권한과 무거운 책임을 양어깨에 지고 있었다.

그런데 바이니마라마 장군의 쿠테타 성공에 대하여 기이한 배경 이야기기 있다.
바이니마라마 총리는 태생적으로 분명히 <인도계 혈통>의 후손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한때 바이니마라마 장군에 대하여 그는 <원주민계 혈통>의 후손 이라고 하는 소문이 있기도 했다.

언론들도 바이니마라마 장군의 혈통에 대하여 혼란을 일으키는 기사들을 난발했다. 어떤 언론은 <원주민계>의 바이니마라마 장군이 <인도인계>를 위해서 쿠테타를 일으켰다 라고 보도를 하기도 했다. 즉 <토착민>이 <인도계> 입장을 대변해 쿠테타를 일으킨 셈이다.
어쨋든 토착인들이 바이나마라마의 쿠테타에 대하여 불만이 큰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필자의 견해로는 인도계 후손인 바이니마라마 장군이 혹시 원주민계 여성과 결혼을 했기 때문에 두 종족 사이에서 이런 혼란이 발생했는가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와 결혼한 여성은 Maria Makitalena이며 6명의 자녀가 있다.

어째던 바이니마라마 장군은 원주민 추장중에서 가장 유력한 추장이며 또한 전직 총리와 전직 대통령이였던 마라 추장과는 매우 가까우며 절친한 정치적 관계를 서로 맺고 있는것 만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었다.

그럼으로 바이니마라마 장군의 쿠테타 계획에 대하여 원주민 추장 마라가 미리 다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 소문도 퍼져 있었다고 한다.

이유는 어쨋던 96년 동안 영국의 노동계약으로 인하여 흘린 눈믈과 또 독립후에 원주민과의 종족분열과 갈등으로 인하여 인도계 민중들이 흘린 피눈물을 가히 닦아줄 수 있는 바이니마라마 장군이 일으킨 쿠테타는 성공한 쿠테타였다.

피지의 두 종족 간의 끝이 없는 비극적인 투쟁을 영국과 미국은 부추기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계속되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을 바이니마라마 장군의 혁명적 쿠테타는 새로운 자주적인 정권을 창출하여 눈부신 성과를 거두고 있다.

오랜 역사에서 피지를 지배해 온 서구의 외세가 완전히 종식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런데 2009년 4월 9일에 피지 원주민계가 장악하고 있는 피지의 대법원은 바이니마라마 장군이 일으킨 쿠테타를 불법적 반국가적 쿠테타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조세파 일로일로 과도정부 대통령은 바로 그 다음 날인 4월 10일에 대법원의 발표를 일절 무효화하고 오히려 대법원의 법관들을 파면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은행장들을 새로 교체하는 적극적 조치를 감행했다.

조세파 일로일로 대통령은 바이니마라마 장군에 대한 국무총리 임명을 다시 재확인 시키고 국가재건 비상조치로서 지금까지 원주민계 위주의 언론들을 통제하기위하여 강력한 법령을 발표했다.

<피지는 당분간 피지식 민주주의를 할 수 밖에 없다>라고 비상 조치를 발표했다.
조세파 일로일로 과도정부 대통령은 나일라티카우 Nailatikau를 부통령으로 2009년 4월 17일에 임명했다.

조세파 일로일로 과도정부 대통령은 이2006년에 바이니마라마 장군이 일으킨 혁명적인 쿠테타 정권에 동참하여 3년 7개월 동안 혁명정권의 수반으로 정권의 안전과 정착을 위하여 큰 공헌을 했다.

조세파 일로일로 대통령은 2009년 7월 30일에 자기가 부통령으로 추천한 나일라티카우 부통령에게 과도정부의 대통령직을 계승하게 하고 퇴임했다. 그는 1920년 생으로 89세의 고령으로서 후임자를 선택하고 퇴임했다.

2009년 11월 3일에 나일라티카우 정권은 피지에 주둔하고 있는 호주와 뉴지랜드 대사관을 봉쇠하고 24시간 내에 두 나라 대사들이 피지를 떠날 것을 통고했다.

이와 같은 피지 과도정권이 취한 강경 대외정책에 대하여 그때 당시 ABC 기자인 Philippa McDonald 는 바이니마라마 총리와 특별 기지회견을 했다.

문: 호주와 뉴질랜드 등 외교관들을 추방한 이유는?
답: 그들이 주장하고 선전하고 있는 일들 우리 피지에서 전혀 없는 일들이다. 그런 허위적 언론들을 추방할 수 벆에 없다.

문: 당신은 군인이고, 군부독재자라고 하는데?
답: 독재자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 내가 독재자라면 강대국의 지도자들은 독재자들 중에서 더 지독한 독재자들 아닌가?

문: 당신이 추구하는 피지의 개혁은 무엇인가?
답: 피지 독립 당시 처음에 채택된 헌법들은 영국연방제도 하에서 제정된 헌법이기 때문에 오늘의 피지는 그런 헌법제도에서 탈피해야 한다. 과감한 개혁 없이는 불가능하다.

문: 당신이 뜻하는 개혁적 헌법은?
답: 피지의 낡은 헌법은 전적으로 종족분규를 조장하는 헌법이다. 개혁의 골짜는 바로 이러한 종족분규를 조장하는 내용들을 헌법에서 제거하는데 있다.

문: 당신이 원하는 개혁은 언제 완성하고 성취하는가?
답: 개혁의 완성과 성취는 군이 총칼로 성취하는것 아니다. 민중과 젊은 세대가 해야 한다. 지금까지 민중과 젊은 세대에게 기회를 주지 못했다. 그들의 힘으로 반드시 성취할 것이다.

문: 당신은 2014년에 총선에서 민주적 정권의 창출과 민주적 정부를 수립을 할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때 까지 너무 길지 않은가?
답: 과도정권이 언제 까지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민중의 뜻이 언제 성숙해 지는가에 달려있다. 절대로 2014년 까지 법적으로 기다리는 그런 시간표는 없다.

문: 당신은 강력한 지도자상을 과시하고 있다. 당신이 원하는 피지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답: 예, 군과 인민이 하나로 굳건히 단결된 조건 하에서 나는 강력한 지도자가 될수 있다. 피지의 오래 된 종족갈등이 사라져 없어지고 외세의 부추기는 세력도 없어져야만 한다. <토착민>은 지금까지 늘 <인도계>를 구박했다. 종족분쟁을 끌어오는 것은 항상 외뢰의존적 정치적 제도이다. 내가 개혁하려는 것은 이런 정신구조를없이하는 것이다.

그때에 모든 민중들은 개인의 특권을 평등하게 행사할 수 있는 평화로운
삶을 살게 될것이다. 피지는 세계적인 관광명승지로 해마다 40만명을 유치할 수 있는 나라가 반드시 될것이다.

더 많고 장시간의 ABC 기자와의 회견을 여기서 지면상 관계로 생략한다.
한편 남태평양의 나라들은 피지의 쿠테타 불씨가 자국에 미칠 영향에 대하여 긴장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피지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지는 못하지만 당분간 피지인들의 뉴질랜드 입국을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호주도 역시 피지의 군사 쿠테타에 대하여 대응하지는 않겠지만 양국인들의 왕래를 당분간 제한하겠다 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호주의 리드 총리는 피지 군부의 쿠테타를 비난하면서 “피지의 쿠테타 문화가 남태평 나라들에게 확산되는 것을 경계해야한다”라고 경고했다.
그러면 미국은 어떻한가? 미국의 반응은 상상을 초월한 악의적이며 비열한 반응을 나타내 보이고 있었다.

다음은 WikiLeaks가 폭로한 미국 CIA와 US Cables 등이 피지에 대하여 미국 정부에게 발송한 비밀문건들을 간추려 알아본다.

ㄱ. 피지 쿠테타 군부는 무차별 구속과 구타를 계속하고 있다. 만일 미국을 비롯한 유럽연합 외교관들이 피지사태를 비방하고 외곡보도를 한다 피지군부는 그들을 체포하고 구타를 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피지 군부는 비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피지 쿠테타 발생 당시 미국 대사 Lary Dinger는 매일매일의 피지 상황을 장편의 소설식으로 Washington에 보고하고 있었다.

ㄴ. US Cables는 수없이 많은 매일매일의 현장 사진들을 미국에 전송했는데 주로 피지 군인들의 만행과 약탈, 여성학대에 대한 악의적 선전 자료들만을 수집하여 미국으로 전송햇다.

ㄷ. 미국 Lary Dinger 대사의 보고에는 쿠테타 주동자 바이니마라마 장군에 대한 심리분과 정신과 의사의 분석자료가 있다. 그 자료에 의하면 바이니마라마 장군의 판단력에는 문제가 있다. 그는 국제적 반응에 대하여 무지하며 미국과 호주등 나라에서 받을 막대한 경제적 손실에 대하여 무감각하다.

ㄹ. 또 다른 바이니마라마 장군에 대한 분석 보고는 바이니마라마는 군인으로서실제로 중동지역에서 치열한 전투에 참가한 경험과 지휘를 한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에 다만 이상적으로 평화와 평등 사회를 꿈꾸는 명예 추궁자이라고 분석한 보고를 미국에 했다.

ㅁ. 미국 CIA는 조세파 일로일로 과도정부 대통령을 비밀로 수차 접촉하여 그로하여금 바이니마라마 쿠테타 정권에서 손을 떼고 물러날 것을 공작했다. 하지만 CIA 공작은 실패했으며 결론은 그가 너무 늙은 노인이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참고로 조세파 일로일로는 퇴임후 2009년 7월에 90세에 사망했다)

ㅂ. 호주와 미국간의 비밀 Cables 교신에 의하면 미국과 호주는 피지의 쿠테타 정권에 대하여 보다 강경한 정책을 세우는 강경책을 다짐했으며, 특히 남태평양에서 증가하고 있는 중국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한 공동정략을 강조했다.

호주는 미국에게 “피지 군인들이 UN 평화유지군”에 참가하는 것을 중단하라고 요청 했다. 하지만 미국은 호주의 요청을 거부하면서 피지군의 유용한 면을 강조하여 미국의 양면성을 또 다시 노출시켰다.

ㅅ. 2009년 9월에 Hillary Clinton 국무장관은 뉴욕에서 피지의 UN 대표와 회담을 요청했다. 이 회담요청은 사전에 호주와 뉴질랜드가 미국과 협의하여 요청을 했다. 하지만 피지의 UN 대표는 Hillary Clinton의 회담요청을 거부하여 무산되고 말았다.

그런데 2010년 9월에 미국은 또 다시 피지의 UN 대표와의 회담을 요청했다. 이번에는 피지 UN 대포 Ratu Kubuabola가 순수히 응하여 Hillary Clinton과 그외의 남태평양 지도급 인사들과 공동회의를 한시간 동안 진행했다.

미국은 피지의 바이니마라마 군사정권과 정식 외교관계를 맺을 것을 제안 했다. 미국의 제안에 대하여 피지의 외무장관은 “피지 군사정권의 2014년 총선 계회”을 미국이 외교정책상으로 정식으로 승인할 것을 요청했다.

미국과 피지는 양국의 요청을 서로 수용하기로 합의했다. 미국은 이 합의로 인하여 호주와의 약속를 배반하는 입장이 됬다. 하지만 미국은 피지에 대한 봉쇄 Santion 는 여전하다고 강조하면서 호주를 달래고 있다. 미국의 이중잣대의 양면성 정책은 언제 어디서나 여전하다.

그리고 미국 CIA 가장 중요한 과업은 피지 군사정권과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대하여 비밀정보를 획득하여 미국에 보고하는 것이였다.

피지에 대한 WikiLeaks의 폭로 문건들과 US Cables의 폭로 기사들은 수십가지더 있다. 하지만 지면상 제한으로 이것으로 끝친다.

이 글을 끝 맺으며,


피지의 군사 쿠테타를 2006년 12월 5일에 일으켜 과도임시정권을 20014년에 실시할 총선을 통하여 종식하고 피지의 고질적인 종족 분쟁이 없는 민주주의 정권을 창출하겠다고 바이니마라마 국가 수반은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에 분명히밝히고 있다.

그런데 또 놀라운 것은 바이니마라마 피지 국가수반은 Catholic 학교에서 교육을받았고 영국 감리교 계통의 피지 기독교감리교의 신자로서 꾸준히 교회에 출석하는 신실한 감리교회의 교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2011년 8월 23일 BBC 태평양 지역 보도에 의하면 바이니마라마 총리는 피지 감리교가 2011년 8월에 개최하는 제160차 감리교 전국 총회를 금지하는 비상 명령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피지 감리교의 주요 지도자 목사들의 해외 여행을 금지하기 까지 했다.

영국 감리교는 1850년대에 피지 원주민 부족왕들에게 성공적으로 선교하여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역사적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피지 원주민 감리교인들은 인도계 노동이민자들이 이슬람교도들 이라고 하는 이유로 인하여 종족분쟁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피지의 감리교 교단의 비리는 넓리 알려진 사실이다. 피지 감리교는 영국을 종주국으로 여기는 피지 우익 보수정치의 수호자이다. 또한 인도계와 종족분쟁에 있어서 화해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종교의 이유로 분쟁과 분열을 부추기는 역할만 했다.

어쨋던 신실한 감리교의 교인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니마라마 총리가 감리교의 제160차 전국총회를 계엄령으로 금지시킬 뿐만 아니라 감리교 지도급 목사들의 해외 여행까지 금지시키는 조치는 매우 놀라운 일이였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우리 조국 반도 남녁의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생각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신실한 보수주의적 기독교 신자이며 꾸준히 교회에 출석하는것이 피지의 바이니마라마 총리와 너무나도 유사한 점이 많이 있다.

그런데 피지의 바이니마라마 총리는 본인이 속한 감리교이지만 피지역사를 망치는 반민족적이며 비신앙적인 교단에 대하여 분개하여 역사적인 제160회 총회를 정지시키는 용맹스러운 지도력을 발휘했다. 참 놀라운 정의로운 감리교회의 신자인 바이니마라마 총리이다.

하지만 조국반도 남녁의 이명박 대통령은 어떻한가? 이명박 대통령이 과시하고 자랑하고 있는 보수주의 교회들의 오늘의 부패상에 대하여 이명박 대통령은 분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 말이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장로라고 하는 S 교회의 목회자들의 추태스러운 망동에 대하여 또는 이명박 대통령이 크게 선전하는 보수주의 S복음 대형교회의 비리에 대하여 이명박 대통령은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의 바이니마라마 총리처럼 분개할 수있는 참된 신앙심과 용기가 전혀 없어 보인다.

오죽하면 보수 늙은 거장인 김동길씨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하여 뿔났을까?
20014년에 실시될 피지공화국의 총선이 외세의 방해와 간섭 없이 성공할것을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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