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70]스페인 식민통치 190년 받은 기니<br><br>폴투갈 식민통치 304년,미국 독재지원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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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1-07-05 12:34 조회2,42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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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70번째 나라로 아프리카의 <적도 기니>를 소개했다."적도 기니는
아프리카 대륙 중서부에 있는 작은 나라로 면적이 2만 8,051km2 로 조국반도 남녁 땅의 반의 반밖에 안 되고
인구는 1,240,000명에 불과한 극히 작은 나라이다. 적도 기니의 국토는 육지의 본토와 두개의 섬으로 3개의
지역으로 구성되여 있는데 3개의 지역은 <육지본토 리오무니>,< 비오코섬> 그리고 <안노보섬> 으로 구성 되여
있다. 적도기니는 육지와 섬이 공존하는 나라이며 나라의 수도인 말라보는 육지에 있지 않고 비오코섬에 있는
특이한 나라이다". 5백년 이상 강대국에 시달리고 시달려 온 <적도기니>를 소개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아프리카 대륙 중서부에 있는 작은 나라로 면적이 2만 8,051km2 로 조국반도 남녁 땅의 반의 반밖에 안 되고
인구는 1,240,000명에 불과한 극히 작은 나라이다. 적도 기니의 국토는 육지의 본토와 두개의 섬으로 3개의
지역으로 구성되여 있는데 3개의 지역은 <육지본토 리오무니>,< 비오코섬> 그리고 <안노보섬> 으로 구성 되여
있다. 적도기니는 육지와 섬이 공존하는 나라이며 나라의 수도인 말라보는 육지에 있지 않고 비오코섬에 있는
특이한 나라이다". 5백년 이상 강대국에 시달리고 시달려 온 <적도기니>를 소개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연재-70]스페인 식민통치 190년 받은 기니 폴투갈 식민통치 304년,미국 독재지원 37년 <##IMAGE##>적도기니는 아프리카 대륙 중서부에 있는 작은 나라로 면적이 2만 8,051km2 로 조선반도 남녁 땅의 반의 반밖에 안 되고 인구는 1,240,000명에 불과한 극히 작은 나라이다. 이 나라는 강대국 스페인, 폴투갈, 미국 등에 의해 5백년 이상 시달리고 시달려 온 나라이다. 적도기니의 국토는 육지의 본토와 두개의 섬으로 3개의 지역으로 구성되여 있는데 3개의 지역은 <육지본토 리오무니> < 비오코섬> 그리고 <안노보섬> 으로 구성 되여 있다. 적도기니는 육지와 섬이 공존하는 나라이며 나라의 수도인 말라보는 육지에 있지 않고 비오코섬에 있는 특이한 나라이다. 적도기니의 3개 지역은 저마다 각각 상이한 식민지 역사적 배경을 오래동안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8년에 적도기니가 독립을 처음 획득할 때 UN의 식민위원회의 결의에 의하여 육지본토인 리오무니 지역과 두개의 섬을 하나의 단일 국가로 통합하여 독립국으로 <적도기니 공화국>이라고 선포 했다. 적도기니 공화국의 고대 역사는 3개의 지역이 제각기 상이한 식민지 역사의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3개 지역의 역사를 각각 따로따로 고찰해야 하겠다. 적도기니의 육지본토를 <리오무니>라고 부른다. 리오무니는 복쪽에 있는 카메룬과 남쪽에 있는 가봉 두 나라 사이 끼여 있으며 적도 바로 남부에 있는 아주 작은 나라이다. 육지본토 리오무니의 인구는 적도기니 전체인구 1,240,000명의 약 ¾이 육지본토에 살고 있다. 육지본토의 중앙부는 최고 100m의 구릉지대이며 리오베니트강이 동서로 횡단하여 대서양으로 흘러든다. 종교는 스페인의 영향으로 카톨릭이 2/3이고 문맹률은 45%이상 된다. 적도기니의 육지본토에서 피그미족과 도웨족이 전쟁을 모르고 평화롭게 오랜 세월동안 살고 있었다. 12세기경에 반투족이 적도기니의 육지본토로 이주해 오기 시작 했으며 그후에 전쟁을 좋아하는 팡족이 이 지역에 정착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지배하고 있었다. 팡족(Fang)은 고대 수세기동안 식인종으로 알려지고 있었음으로 팡족의 세력확장은 두려음이 되고 있었다. 적도기니의 공용어는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3개 지역 모두에서 사용하고 있다. 팡족은 강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마술의 마법사가 사회구성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고 팡족이 주민의 80%를 차지하고 있었다. 팡족의 마법사들은 유럽에서 침입한 외국인에 대하여 적대적 이었음으로 노예무역을 하고 있던 서구 유럽인들에게 큰 방해가 되고 있었다. 적도기니의 육지본토에서 노예무역을 수백년동안 경쟁적으로 하고 있던 네덜란드, 스페인, 프랑스, 독일 그리고 영국은 노예무역이 페지된 후에는 식민지 종주국으로 변신을 했다. 1850경에 스페인이 적도기니 육지본토에서 식민지 개발을 본격적으로 착수하고 있었는데 같은 시기에 남쪽에서는 프랑스가 가봉을 식민지화하고 있었고 또 같은 시기에 북쪽에서는 독일이 카메론을 식민지화 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적도기니의 육지본토를 가운데 놓고 남쪽에 있는 가봉을 프랑스가 식민지화 하고 있었으며 적도기니의 북쪽에 있는 카메룬을 독일이 식민지화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프랑스와 독일이 욕심으로 식민지 영토를 서로 확대하기 위하여 중간 지역에 끼여 있는 적도기니의 영토를 서로 침범하여 땅을 갈취했던 것이다. 그때 당시 프랑스와 독일은 저들의 식민지를 확대하기 위하여 중간애 끼여 있는 적도기니를 북과 남 양편에서 영토를 갈취하고 국경선을 저들 마음대로 직선으로 새로 설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때 스페인은 적도 기니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지역에서도 프랑스와 독일등 유럽에 패권과 영향력을 점점 상실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적도기니의 영토를 프랑스와 독일에게 빼앗긴 결과로 매우 작고 외소한 육지본토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되고 말었다. 적도기니 비오코섬에는 적도기니의 수도인 말라보가 있다. 어찌하여 적도기니의 수도가 육지본토에 있지 않이하고 비오코섬에 있는가? 비오코섬의 고대역사를 살펴보면 그 원인과 이유를 가히 이해할 수 있다. 비오코섬의 본래 명칭은 페르난도포섬 이였는데 스페인 식민지하에서 자치정부가 잠간 허용되였던 1964년에 비오코섬으로 새로운 명칭이 됬다. 페르난도포섬의 본래의 원주민은 부비족이였으며 12-13세기경에 이보족과 이비비오족이 페르난도포섬에 이주하여 혼혈족을 이루고 있었다. 1471년에 포르투갈의 용감한 탐험가인 페르낭 두포가 최초로 이 섬을 발견했다. 페르낭 두포는 인도로 가는 경로를 찾던 중에 우연히 이 섬을 발견 했으며 그의 이름을 따라 <페르난도포섬>이라고 호칭하게 됬다.1474년에 포르투갈은 페르난도포섬을 침략하고 개척했으며 304년간 페르난도포섬을 식민지 통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1778년에 포르투갈은 남미로 진출하기 위하여 브라질의 영유권을 스페인으로 부터 획득하고 그 대가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의 페르난도포섬에대한 통치권을 스페인에게 양도하는 <산일데폰 조약>을 두 나라사이에 체결을 했다. <산일데폰 조약>이란 무엇인가? 이 조약은 1905년 7월 27일에 미국의 육군장관인 데프트와 일본의 수상인 가즈라가 <데프드-가즈라 조약>을 맺고 조선반도를 일본에 넘겨주고 그 대가로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기로 미국과 일본이 맺은 비밀조약의 원형이 되는 조약을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이에 맺은 비밀조약 이었다. 스페인은 멀리 떨어져 있는 남미 부라질의 영유권을 포르투갈에 이양해주는 대신 아프리카 본토와 상업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르난도포섬과 기니해안의 영유권을 획득하는데 보다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산일데픈 조약>에 의하여 페르난도포섬과 안노본섬은 306년간의 포르투갈의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종주국인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고 말었다. 어쨋던 16세기에 이르러서 영국과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등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페르난도포섬을 이용하여 노예무역의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1778년에 스페인이 페르난도포섬을 완전히 점령함으로 유럽의 백인들이 저마다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삼는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됬다. 스페인은 이때부터 적도 기니에 속하는 페르난도포섬의 종주국이 되고 있었다. 1827-48년에 스페인은 페르난도포섬을 14년동안 영국에게 빌려주는 형식으로 통치권을 영국에게 일시 넘겨 주었다. 영국은 14년동안 페르난도포섬을 지배하면서 해군기지를 설립했다. 하지만 영국은 1843년에 페르난도포섬을 14년만에 떠나 가면서 해군시설을 영국의 침례파 교회에게 양도하고 떠나 갔다. 영국이 떠나간 후에 스페인은 페르난도포섬을 또 다시 지배하면서 농업식민지를 개발했으며 1880년대에 이르러 스페인의 식민지가 전성기를 이루면서 페르난도포섬의 북쪽 끝에 있는 말라보를 적도기니의 수도로 확정했다. 페르난도포섬은 엄쳥난 열대 우림과 주요 광물자원과 수력발전 그리고 농업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기름진 보물섬이며 코코아의 생산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페르난도포섬은 190년간 스페인의 식민지 통치를 받아 왔기 때문에 스페인풍의 문화유산들이 가득 차 있으며 주민의 85%가 스페인 전통의 카톨릭교인들 이다. 그래서 그런지 페르난도포섬의 사람들은 겉모양이 뚜렸하다. 하지만 페르난도포섬 사람들은 눈치가 빠르기에도 매우 유명하다. 페르난도포섬에 스페인 총독이 살고 있던 건물이 유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스페인의 아프리카 식민통치의 역사는 점점 종말에 이르고 있었다. 스페인은 본국에서 프랑스와의 오랜 전쟁과 내전에 시달려 오다가 1939년 이후부터 스페인의 정권은 급속히 쇠퇴하여 식민지통치의 위세가 서서히 석양에 이르고 있었다. 1963년에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3개지역이 스페인의 승인하에서 부분적으로 통합하는데 이르게 되였다. 지금까지 스페인은 3개지역을 분리하여 식민지 통치를 해오던 전통을 페지하고 3개 지역을 하나로 통합하여 <적도기니>라고하는 하나의 국가로 임시로 이름하게 됬다. 그리고 <적도기니>의 완전한 독립은은 1968년에 이루어 졌다. 안노본섬은 적도기니 공화국의 3개 주요 지역중의 하나로 육지에서 350km 멀리떨어져 있는 섬으로 면적은 약 18km2 되는 화산섬이다. 산의 높이는 최고봉이 해발 671m이다. 안노본섬은 1473년 1월 1일에 포르투갈 항해자들이 처음 발견했는데 “안노본” 이라고 하는 섬의 명칭은 포르투갈 언어로 “새해 첫날”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1474년에 안노본섬은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뒸는데 사실 그때 당시 안노본섬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 이었다. 하지만 1474-1500년에 아프리카 중서부 지역에서 특히 앙골라 지역에서 많은 원주민 흑인들이 포르투갈의 식민지 개척에 의하여 안노본섬으로 이주해 왔다. 안노본섬의 역사도 패르난도포섬의 역사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안노본섬이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304년간을 지내 왔는데 어느날 갑짜기 식민지 종주국이 스페인으로 바뀌게 됬다. 안노본섬의 주민들은 식민지 종주국이 갑짜기 스페인으로 바뀌는 것을 쉽게 받아 들이지 않었다. 304년동안 안노본섬에서 식민지통치를 하고 있던 포르투갈은 남미의 부라질을 얻는 조건으로 스페인과 조약을 맺고 안노본섬을 스페인에게 넘겨 주었던 것이다. 안노본섬의 주민들은 낯선 스페인에 의한 점령에 대하여 거부감을 나타냈으며 또 스페인이 새로운 토지분활 정책을 감행하는데 대하여 강한 적대행위를 계속했다. 안노본섬의 주민들은 새로운 종주국 스페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이르켜 무정부 상태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하여 안노본섬의 5개 부족들이 단합하여 안노본섬을 당분간 통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은 10척의 배를 안노본섬에 상육시켜 병력으로 안노본섬을 완전히장악하고 그 후부터 190년간 식민지통치를 했다. 1964년에 스페인은 국제정세에 밀리고 견디다 못해 이른바 적도기니의 자치정부를 승인하는 형식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자치정부는 불완전한 정권이지만 4년동안 준비의 과정을 거친 후에 적도기니의 완전한 독립을 허용하겠다고 스페인 식민정권은 선언했다. 1968년에 스페인령의 적도기니 육지본토와 비오코섬 그리고 안노본섬은 드디어 190년 동안의 스페인의 식민통치에서 부터 완전히 해방되여 3개 지역이 하나의 독립국가를 이루어 <적도기니 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적도기니의 독립은 피압박 민중의 투쟁에 의하여 쟁취한 독립이 아니였으며 또한 어떤 탁월한 혁명적 독립운동가의 결사적인 투쟁과 승리에 의하여 쟁취한 독립도 역시 아니었다. 적도기니의 독립은 190년간 식민지 종주국인 스페인의 쇠퇴로 인한 자연발생적인 세계의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누어떡먹기식>으로 무사태평하게 독림을 획득 했다. 1964년에 스페인은 적도기니에 대한 식민통치를 스스로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국제적 긴박한 정세에 이르게 된것을 시인하고 이른바 <적도기니 자치정부>의 수립을 스스로 허용하는 정책을 세우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전환기에 적도기니에서 혜성처럼 무명의 지도자가 출현했다. 이 무명의 지도자는 보니파시오 온도 에두이다. 온도 에두는 적도기니 북쪽에 있는 시골 동리에서 한 때 캐톨릭 교회 주일학교 선생이었고 온도 에두는 젊은 시절 고향 동리를 떠나 스페인 식민통치의 사회적 제도하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평법한 민중의 한 사랍이었다. 그런데 온도 에두는 1950년대에 지방에서 무명인의 생활을 그만두고 북쪽에 있는 큰 국경도시 Gabon으로 진출하여 그 곳에서 정치활동을 전개하기 시작 했다. 온도 에두는 스페인 식민통치를 끝장내기 위한 <식민지 분리 정당>을 창당하여 지도자가 되여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적도기니 전국에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온도 에두의 독립운동은 점점 확대되여 적도기니에서 영향력 있는 정치가로 그의 명성이 넓리 알여졌다. 온도 에두의 분리독립운동에 대하여 스페인 식민통치 당국은 자연히 큰 관심을 가지게 됬다. 스페인 당국은 1964년에 온도 에두를 스페인의 수도인 마드리드로 비밀로 정중하게 초청을 했다. 스페인 정부는 온도 에두에게 앞으로 4년동안 <적도기니 자치정부>의 수반이되여 스페인 본국과 무리한 마찰을 이르키지 않고 순조롭게 독립운동의 준비와 절차를 진행 할 것을 제시 했다. 그리고 스페인과 독립된 적도기니는 앞으로 두 나라 사이에 좋은 우호를 유지할 것을 요구했다. 온도 에두는 스페인의 요청에 전적으로 동의하여 <적도기니 자치정부>의 수반이 되여 4년동안 완전한 독립을 향한 임시정부의 수반의 역할을 하기로 합의했다. 스페인 정부와 온도 에두 사이에 약속한 <적도기니 임시정부>는 4년동안 독립의 준비의 과정을 무사히 끝 냈다. 1968년 3월은 190년간 식민통치의 종주국인 스페인과 새로 독립국이 되기 위하여 준비단계에 처해 있는 적도기니 두 나라에게 역사적인 뜻 깊은 3월이 됬다. 앞으로 5개월 후인 1968년 8월 11일에 적도기니의 새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대통령선거를 실시한다고 3월에 스페인 식민통치 당국은 공식선포를 했다. 적도기니의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4년간 대통령의 역할을 하고 있는 온도 에두는 8월 11일에 실시될 대통령선거에서 응당 당선될것을 자신 만만하게 생각하고 선거운동에 적극 나서 싸우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인가? 4년간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스페인의 두툼한 신임을 얻고 있던 온도 에두는 대통령 선거에서 상대 후보자인 오비앙 응게마 에게 그만 참패를 당하고 말었다. 선거 결과는 34% 대 39%로 온도 에두는 참패하여 독립된 적도기니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꿈이 살아지고 말았다. 적도기니의 초대 대통령으로 예상외로 당선된 오비앙 응게마는 1924년 생으로 스페인의 식민통치하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부터 시작하여 지방의 최고직책에 이르기 까지 두루두루 공직에 종사한 태생적으로 친스페인 성향의 관료출신 이다. 어쨋던 오비앙 응게마는 대통령 선거에 승리하여 1968년 10월에 190년간의 스페인의 식민통치 시대를 마감하고 적도기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적도기니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에게 그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은 매마른 사막에서 생수를 얻으려는 어리석음이 될 뿐 이었다.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이 취임한 후에 적도기니 공화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최악의 비극적 역사를 연출 했는데 서방의 언론 보도에 의하면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이 통치하는 정권은 <아프리카 나치 강제수용소, The Dachau of Africa>라고 혹평을 했다.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은 1968년에 취임하여 1979년 까지 11년간 집권을 했다. 그의 11년간의 통치행태는 어떻했는가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본다. ㄱ)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은 적도기니의 임시정부의 수반으로 4년간 독립을 향하 여 준비하는 과정을 완수 하고 대통령 선거에 촐마했지만 패배를 당한 온도 에두 를 즉시 투옥하여 살해했다. 하지만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은 온도 에두는 감옥에서 자살을 했다라고 허위발표를 했다. ㄴ)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은 집권의 수단과 방법으로 모든 법을 페지 시키고 3개의 축을 중심하여 정치조직을 구성했다. 3개의 축으로 이루어진 정치조직들은 “연합노동당” 소년들로 이루어진 “사병집단” 그리고 응게마 가족들로 구성된 사조직인 “리우무니” 이다. 이들 3개의 축으로 구성된 정치조직들은 적도기니 공화국에서 무소불능 만병통치의 절대적 권력을 보유하고 모든 국가행정을 불법과 권력위주로 통치했다. ㄷ)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은 대통령의 통치수단에 반대하는 세력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사형에 처할 수 있는 악법을 새로 제정하여 실제로 적용하고 있었다. ㄹ)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은 모든 은행의 총재들을 축출 혹은 살해하고 대통령 자신이 은행의 총재가되였으며 국가의 모든 국보들을 대통령의 사물로 전환시켜소유했다. ㅁ)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은 모든 사교육 제도를 페지시킬 뿐만 아니라 종교집회를 비롯하여 어떠한 집단행위도 불법화 했으며 교회건물을 무기고로 전향시켰다. 심지어 죽은 사람을 위한 장례예배와 설교를 금지시켰으며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은 적도기니에서 “지식인”이라는 말 단어 조차도 사용을 못하도록 금지했다. ㅂ)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은 자기자신의 대통령직을 종신직으로 만들기 위하여 헌법을 개정했으며 적도기니 공화국의 수도가 있는 비오코섬의 명칭을 대통령의 이름으로 <응게마 비오코섬> 으로 개칭하도록 명령했다. ㅅ)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은 대마초등 마약을 복용하는 습관이 심했다고 전해졌는데 그래서 그런지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은 과대망상 증세가 심하여 자기자신을 “기적의 사나이” “최고의 달인”이라고 국민들이 부르도록 하는 변태현상을 나타내 보이기도 했다. ㅇ)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은 돈이 필요할 때는 외국인들을 납치하여 몸값을 요구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심지어 몸값을 받고도 죽이는 악행을 일삼고 있었다. ㅈ)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의 11년간의 비인륜적 폭정에의하여 공포증에 시달린 순진한 적도기니 공화국의 전체 인구의 1/3이 이웃나라로 달아났다.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의 11년동안 반인륜적 악정에 대하여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국가들이 그저 못본척 하고 있은 사실이 또한 큰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후 1950-60대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모든 나라들의 독립의 물결이 파도치고 있었다. 그런데 나라마다 독립을 쟁취하면서 반미와 반서방적 정치노선과 사회주의 성향의 국가들로 일제히 창건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 유독 적도기니만은 식민지 통치에 대한 치열한 투쟁의 과정도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성향의 정권이 들어 서지도 않었다. 그럼으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국가들은 적도기니 공화국에서 사회주의 국가의 창건에 대하여 염려 할 필요가 전혀 없는 안전한 국가로 여기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은 오히려 내정간섭을 안한다 라는 미명의 구실로 적도기니의 내부에서 발생하고 있는 극악한 반인륜적인 인권유린의 사건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못본척 하고 있을 뿐이였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이중 잣대의 대외정책 이었다. 미국이 제3세게를 향하여 인권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적 경찰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적도기니에서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미국이 전세계의 인권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독선적이며 이기주의와 이중 잣대라는 사실이 적도기니에서 증명되었다. 적도기니의 인권문제에 대하여 미국이 못본체 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오히려 적도기니 공화국의 내부에서 드디어 군부의 반정부 쿠테타가 1979년 8월 3일 발생했다. 적도기니의 군부의 반정부 쿠테타는 외부의 개입에 의한 쿠테타가 아니라 순전히 국내의 군부가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의 반민족적이며 반인륜적 폭정에 항거한 자연발생적인 쿠테타이었다. 뿐만 아니라 더욱 놀라운 것은 쿠테타를 이르킨 군부의 부사령관이 바로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의 조카인 데오도로 음바소고 장군 이라는 사실이다. 데오도로 음바소고 장군은 적도기니의 군사 지도자를 역임했으며 현재 쿠테타를 이르킨 군부의 부사령관 이다. 독재자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은 미국의 버림을 받았으며 적도기니의 민중의 버림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혈연 친척인 조카로 부터까지 버림을 받았다. 1979년 8월 3일에 발생한 적도기니 군부의 쿠테타로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은 집권 11년만에 권좌에서 축출됬다. 군부 쿠테타의 성공으로 적도기니 공화국의 차기 대권의 주요 후보자로 부상한 군인은 바로 축출된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의 친조카인 데오도로 음바소고 장군 이다. 데오도로 음바소고는 삼촌인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이 1968년에 처음 정권을 장악했을 당시 스페인 육군의 중위로 복무중이었다. 데오도로 음바소고 중위는 삼촌이 통치하는 정권 하에서 이제는 군인이 아니라 정치인이 됬다. 데오도로 음바소고는 정치인으로 비오코섬의 주지사를 역임했으며 유명하고 악명 높은 블랙비치 감옥에서 형무소의 소장을 비롯하여 국가 방위대장등 적도기니 공화국의 중요한 요직들을 두루두루 차지하는 권력자가 됬다. 그런데 대오도로 음바소고는 어떻게 삼촌의 정권을 탈취하고 대통령이 되었던가? 1968년에 적도기니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삼촌인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은 나라와 민죽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고난의 투쟁의 과정이 전혀 없이 스페인 종주국의 후원하에서 무사태평하고 안이하게 독립을 획득 하였다. 독립을 성취하고 무임승차격으로 공짜로 대통령이 되었던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은 11년간 통치하면서 적도기니를 세계최빈국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정신병 환자처럼 폭정을 감행하여 겁에 질린 적도기니 민중의 1/3이 국외로 탈출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이와 같은 최대의 위기속에서 자연발생적으로 군부의 반정부 쿠테타가 일어 났는데 그동안 적도기니 공화국의 중요한 고관직을 두루 지내면서 경험과 권력을 쌓아놓은 데오도로 음바소고가 쿠테다에 성공하여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했다. 하지만 쿠테타의 지도자로 부상한 데오도로 음바소고 장군은 축출을 당한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의 친족카 이라는 사실이 드러남으로서 의혹이 제기됬다. 그 당시 미국 CIA 첩보기록에 의하면 적도기니에서 삼촌과 조카인 혈연의 친척끼리 정권을 교체하는데 대하여 처음에는 굉장히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미국 CIA는 동양에서 김씨. 이씨, 박씨들이 친척이지만 별 문제가 아닌것 처럼 적도기니에서도 친척관계는 별문제가 없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쿠테타의 성공을 시인했다고 한다. 쿠테타의 성공이 확인되자 겁에 질린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과 현정부의 방위부대요원들은 모두 숲 속으로 깊이 도망쳤다. 하지만 1979년 8월 18일에 모두 숲 속에서 생포됬다. 쿠테타에 성공한 적도기니 최고군사회의는 오비앙 응게마 정권이 집권 11년동안 저지른 폭정에 대한 증거와 증언들을 수집하고 이것들을 근거로하여 1979년 9월 29일에 군사재판을 소집했다. 군사재판은 학살, 살인, 공금횡령, 인권침해와 민족반역죄에 대한 죄로 오비앙응게마 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10명의 피고인에들게 30년형을 그리고 그외의 여러 피고인들에게는 가벼운 형량과 재산을 몰수하는 형벌을 부과하고 재판을 종결했다. 오비앙 응게마는 군사재판이 종결된 후에 즉시 총살을 당했다. 오비앙 응게마는 11년전 그 당시 적도기니 임시정부의 수반이였던 온도 에두를 감옥에서 살해하고 자살했다고 거짓 발표를하여 잔인 했던것 처럼 11년후에 이번에도 역시 같은 감옥에서 그것도 친조카의 손에 비참하게 사형을 당했다. 삼촌을 비참하게 처형한 대오도로 음바소고는 1979년 10월 적도기니의 제2대 대통령으로 뻐젓하게 취임을 했다. 데오도로 음바소고 대통령은 1982년에 헌법을 개정하여 7년제의 대통령으로 다시 취임을 했을 뿐만아니라 1989년, 1996년, 2002년 그리고 2009년에 또 다시연속적으로 재선되여 2016년까지 37년간의 철권집권이 보장되여 있다. 데오도로 음바소고 대통령은 <적도기니 공화국 민주당>의 당위원장의 권한으로 일당 독재를 하고 있다. 데오도로 음바소고 대통령은 미국을 기만하기 위하여 형식적인 법으로 다당제를 도입하고 민주주의 선거를 실시한다고 선전을 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데오도로 음바소고 대통령은 37년동안 무서운 독재정권의 권좌에 튼튼히 앉아 있으면서 오늘도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통치를 하고 있다. 데오도로 음바소고 대통령은 1942년 6월 5일 생이다. 그는 스페인 식민지 통치하에서 16세 때 캐톨릭 학교에서 영세를 받고 신실한 스페인 캐톨릭교회의 신자가 됬다. 그는 21세 때 우등생으로 선발되여 스페인에 유학하여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65년에 스페인 육군의 소위로 임관됬다. 1968년에 적도기니가 스페인 식민통치에서 해방되여 독립한 후에 데오도로 음바소고는 적도기니 공화국의 육군 중위로 진급되였고 1971년에는 대위로 진급 됬다. 데오도로 음바소고는 그의 삼촌인 오비앙 응게마가 대통령이 됨으로 이제는 군복을 벗고 군인이 아니라 정치인이 되여 일약 고관직에 승진하여 적도기니 공화국의 군참모부장을 비롯하여 11년동안에 정부의 고관직을 두루두루 지내면서 막강한 정치가로 부상하고 권력을 차근차근 축척해 놓았다. 친삼촌인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의 정권하에서 막강한 권력을 11년동안 누리고 있던 데오도로 음바소고가 아니였던가? 그런데 데오도로 음바소고는 어느날 갑짜기 적도기니 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이 되었으니 참으로 요상한 일이다. 데오도로 음바소고는 쿠테타의 주체세력이 되여 삼촌을 권좌에서 몰아낼 뿐만 아니라 사형을 집행하고 바로 그 자리에 올라 앉아 적도기니의 제2대 대통령으로 1979년 10월에 취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또한 2016년 까지 37간의 그의 집권이 튼튼히 보장되여 있다. 적도기니 공회국의 독재정권은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의 11년간 통치와 대오도로음바소고 대통령의 통치가 보장되여 있는 2016년 까지를 모두 합하면 48년동안 미국의 시인과 지원하에서 독재정권이 건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데오도로 음바소고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는 정권이 전임자 오비앙 응게마 대통령과 비교할때 훨신 더 잔혹한 것으로 나타났다. 데오도로음바소고 대통령의 집권기간에 잔혹한 불의에 항거하는 양심적 지성인들 중에서 90%가 외국으로 추방을 당했으며 550 여명을 강압적으로 투옥되고 사형을 당했다. 그러면서 데오도로 음바소고 대통령은 미국과 서방에 대해서는 완전히 친서방과 친미 종속적 통치를 노골적으로 펼치고 있다. 음바소고 대통령은 자신이 독실한 카톨릭 신자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의 의해 초청을 받은 것을 자랑삼아 정권의 종교적인 권위와 위세를 과시하고 있다. 데오드로 음바소고 대통령은 종교를 악용하여 국영방송을 통하여 적도기니의 통치이념은 <절대자와 영원한 계약을 맺었다>라고 전국민들에게 방송하여 종교적 권위를 이용하여 철권통치를 국민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데오도로 음바소고 대통령은 공무원들의 부정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모든 국가재산을 강제적으로 몰수하여 대통령이 직접 관리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고 국민을 향해 대중연설을 한바 있다. 하지만 미국과의 관계에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데오도로 음바고소 대통령은 그의 개인의 재산과 대통령의 아들 및 친족들이 천문학적 수자의 막대한 국가의 돈을 프랑스와 미국의 여러 은행들의 계좌에 분산하여 빼돌리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적도기니 공화국의 1,200만 민중들의 삶의 모습은 과연 어떻한가? 의 2011년 5월 30일에 발표한 기사에 의하면 적도기니의 77%에 해당하는 민중들이 절대빈곤 “최저빈곤선” 의 이하에서 매일 매일 겨우 살아가고 있느데 그들의 하루 생활비가 1달러에도 못 미친다고 한다. 적도기니니의 독립 이후의 주요 산업은 페르난도포 섬의 커피와 카카오 농장이 유명 했으며 내륙지방에서 원시림의 목재 자원이 주요한 산업의 전부이었다. 하지만 적도기니 역사에 있어서 드라마틱하게 변화와 발전을 초래한 놀라운 사건이 1996년에 적도기니에서 발생했다. 그것은 거대한 유전이 적도기니에서 발견 됬다고 하는 사실이다. 1996년에 적도기니에서 발견된 유전은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나라들 중에서 세번째로 큰 유전이다. 이제 적도기니는 나이지리아와 가봉 다음 가는 거대한 산유국이 되였으며 하루 생산량은 39만 배럴에 달한다. 적도기니는 석유생산에 힘입어 1996-2005년 기간동안 연평균 38.8%의 경제성장을 기록하였다. 적도기니는 나이지리아와 가봉에 비하여 인구가 훨신 적은 나라 임으로 적도기니 국민의 생활수준은 Oil Money에 의하여 전반적으로 급속히 향상이 되였으리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서방 세계에 수 없이 많은 언론들이 오늘도 전하는 보도에 의하면 적도기니의 Oil Money의 혜택은 불균등한 분배로 인하여 일반 민중들의 생활수준은 전혀 향상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절대빈곤 속에서 굼줄이는 생활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을뿐 이라고 전하고 있다. 1999년 미국 상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적도기니 데오도로 음바소고 대통령은 세계 국가원수들 중에서 아홉 번재로 많은 재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걱도기니에서 생산되는 원유수입의 돈의 대부분이 최근까지 남미 칠례의 독재자인 피노체트의 비밀 계좌에 흘러들어 가고 있다 라고 보고 했다. 피노체트는 칠례의 최악의 독재자로서 16년간에 3,197명을 살해했으며 민중의적으로 폭력을 무기로 삼고 착취와 투옥과 추방으로 칠례를 국가적으로 완전히 망쳐 놓고 2006년에 죽었다. 이와 같은 최악의 독재자인 피노체트 대통령에게 적도기니의 음바소고 대통령이 비밀 은행계좌를 열어 놓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미국 상원의 보고서는 폭로 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도기니 공화국의 데오도로 음바소고 대통령의 독재정권의 행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그의 독재정권은 오히려 날이 갈 수록 보 다 더 튼튼한 정권을 장악하고 있다. 37년 동안의 독재자로서 그의 집권의 기간 은 2016년 까지 보장되여 있는 현실이다. 데오도로 음바소고 대통령의 통치행태는 어떠한가? 그의 독재와 장기집권이 어떻게 37년 동안이나 가능한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시도하여 다음의 여러 가지 실제 사례들을 되도록 간략하게 ㄱㄴㄷ 순으로 살펴 본다. ㄱ) 적도기니에 외국 자본이 투자를 한다는 것은 전혀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다. 적도기니는 오직 매마르고 빈곤한 버려진 아프리카 중서부에 있는 세계의 최빈국 으로 왜소한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그럼으로 미국은 적도기니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관심 밖에 있었고 다만 적도기니 공화국에서 <사회주의 국가>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서 만족했으며 혹독하고 무지막지한 독재자에 대하여는 그저 모르는쳑하고 관대할 뿐 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 버림 받은 작은 땅에서 석유가 발견되었는데 매장량이 1.1 billion 배럴이 되고 또 천여개스 매장량도 엄천난 것이라는 사실이 1996 년에 밝혀졌다. 미국은 황급하게 개입하여 1997년 초부터 관여하기 시작하였으며 미국정부의 고위급 요원들이 적도기니를 방문하고 그들의 뒤를이여 미국의 주요 석유회사들이 방문하고 줄줄히 적도기니에 투자를 경쟁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발행한 적도기니 안내서의 2008년도 발표에 의하면 1978년 부터 미국의 석유회사들이 적도기니에 투자한 달러는 적어도 $7 billion 이상 된다고 발표를했다. 그리고 적도기니 공화국이 미국으로 부터 석유채굴권과 이익배당금으로 받아들이는 Oil Money는 국민 1인당 1년수입 (Per capita)이 37,900 달러가 된다. 2009년에 발표한 Per capita로 따지자면 적도기니 공회국은 세계에서 10대 부국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ㄴ) 하지만 2011년 3월에 국제 뉴스가 전하는 보도에 의하면 현재 적도기니 공화국의 인구의 80%가 하루 1달러 미만의 돈으로 살고 있으며 5세 미만 영아의 사망률이 20%에 이른다고 한다. 전체 인구의 40%만이 식수공급을 국가로 부터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석유수출로 축척한 부는 데오도로 음바소고 대통령의 개인의 재산이 되고 있으며 가족들과 특권층만이 석유의 부를 누리고 있을 뿐이며 국민의 80%에게는 석유수출로 벌어 들이는 Oil Money의 혜택이 전혀 돌아가지 않는다고 보도했다. ㄷ) 2009년에 WikiLeaks 보도에 의하면 미국의 국방부는 적도기니와 수백만 달러의 비밀계약를 맺고 적도기니의 해안보호의 책임을 지고 있으며 또한 적도기니의 군인들을 훈련시키고 있다고 보도했는데 이것은 분명히 그 당시 미국의 국방장관이었던 Donald H. Rumsfeld 장관의 개입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미국의 한 외교관은 데오도로 음바소고 대통령을 훌륭한 지도자라고 찬양했다. Clinton 대통령의 특별보좌관 Lanny Davis는 1백만 달러 계약을 개인적으로 맺고 음바소고 대통령의 사생활에 대한 특별지도와 고문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대통령의 체면과 외모에 좋은 인상을 만드는 역할을 전문적으로 했다고 한다. 미국의 여러 인권단체들이 계속적으로 적도기니의 인권문제와 고문학살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미국 국무성은 일방적으로 인권문제의 제기를 묵살했다. 한편 부시 대통령은 항상 그의 입버릇처럼 “음바소고 대통령이 인권개선을 약속했다” 라고 하는 일방적인 답변으로 아무 문제도 없는것 처럼 처리 했다. 미국의 한 외교관은 말 하기를 “엄청난 량의 Oil과 천연깨스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매우 변덕스러운 적도기니의 음바소고 태통령을 미국이 뭐라고 비평하기에는 매우 곤란하며 그저 우방국으로 대해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라고 말했다. 2006년에 그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인 Condoleezza Rice는 적도기니의 데오도로 음바소고 대통령에 대하여 미국의 good friend 라고 찬양했다. 뿐만 아니라 최근 Obama 대통령은 뉴욕에서 음바소고 대통령을 환영하는 만찬회에서 나란히 다정하게 서있는 기념사진이 신문에 보도 되기도 했다. 2004년 미국 상원조사위원회 발표에 의하면 음바소고 대통령은 Exxon Mobil, Amerada Hess 그리고 Chevron등 여러 굴직굴직한 석유재벌들로 부터 거대한 돈의 뇌물을 받은 것이 확실하며 그 돈이 Riggs Bank에 숨겨져 있는 것이 밝혀 졌다고 한다. ㄹ) 미국이 개입된 적도기니의 국가적 비리는 너무 방대함으로 지면상 제한 때문에 이것으로 생략한다. 하지만 음바소고 대통령의 개인적인 부정축재에 대한 기사들과 또 적도기니의 황태자로 알여진 데오도로 음바소고 대통령의 아들인 데오도린 오비앙의 부정축재와 그의 방탕한 생활에 대한 기사들을 간추려서 소개한다. 데오도린 오비앙은 Citibank와 Wachovia 은행을 통하여 2004-2008년 사이에 미국으로 돈세탁한 1억 1천 5백만 달러를 송금을 했는데 돈세탁에 직접 관여한 미국의 법률회사와 부동산 회사들의 명단을 확보했다고 미국정부는 발표했다. 미국의 법률회사인 Sidley Austin Brown & Wood가 데오드린 오비앙이 3,300만 달러로 G-5 jet 비행기를 구입하는데 관여했다고 발표했다. 데오드린 오비앙은 그의 여자친구의 이름으로 교모하게 우회한 Shel 석유회사의 은행구좌를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데오드린 오비앙은 칼리포니아 Malibu에 1만 5천평방 피트의 넓고 광대한 맨션을 3,500만 달러로 구입하여 호화주택을 소유하고 있는데 Malibu에서 가장 많은 재산세를 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200만달러짜리의 초호화판 스포츠카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최고급차 40대를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데오드린 오비앙이 미국에 입국하는 비자는 무비자로 입국과 출국이 항상 넓게 열여져 있다. 2004년에 부시 대통령은 “부패한 나라들의 관리는 미국입극을 금지한다” 라는 법률에 서명했다. 하지만 적도기니의 경우는 예외로 특혜를 받고 있다고 한다. 미국 법무성이 보관하고 있는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데오드린 오비앙은 2005년 4월부터 2006년 4월까지 1년사이에 7,300만 달러를 미국으로 밀반입 했다고 한다. 미국 이민국 직원의 고백에 의하면 데오드린 오비앙은 무비자로 항상 출입국을 하고 있는데 입국을 할때 마다 1백만 달러를 현금을 가지고 입국을 하지만 공항의 출입국 관리소에서 무사통과를 하고 있다고 털어 놓았다. 미국의 국토안보국 비밀조사 보고에 따르면 데오드린 오비앙은 아버지 음바고소 대통령의 정권하에서 오래동안 농림부장관을 하면서 적도기니의 방대한 원시림벌목을 통하여 세계적으로 거대한 목재회사들로 부터 현찰로 거두어 들이는 돈을 농림부장관인 데오도린 오비앙은 그 돈을 개인의 이름으로 착취를 했다고 한다. 데오드린 오비앙은 미국의 석유회사들로 부터 뇌물 또는 강요로 착취하여 쌓아 놓은 달러가 수억 달러가 되는데 이 달러를 유령회사를 이용해 돈세탁을 하여 수억달러를 미국의 여러 기업체와 은행에 분산하여 은익해 놓았다고 한다. 한편 프랑스의 경우 적도기니 대통령 가족의 소유로 되여 있는 파리의 중심부나 휴양지등에 최고급 대형주택과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으며 고급 차량 15대를 소유하고 있는데 구매가는 5천 7백만 유로화로 추정된다고 했다. 또 한가지 적도기니에 대한 놀라운 사건은 데오도로 음바소고 대통령이 엉뚱하게 UN “유네스코”에 300만 달러를 기증하여 “과학상”을 제정했다는 사실이다. 독재자의 돈으로 “유네스코 상” 을 만드는가 라고 하는 항의가 있었다. 하지만 적도기니의 데오도로 음바소고 대통령은 “유네스코”를 통하여 적도기니의 나쁜 이미지 제고를 노린것으로 관측된다. 미국에 대하여 가장 큰 의문이있다. 미국이 적도기니의 독재자 데오도로 음바소고 대통령의 비리와 또 그의 아들 황태자로 알여진 데오도린 오비앙의 범죄 행위에 대하여 모든 정보를 입수하고 있으면서도 왜 그들에 대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그 의문에 대한 답변은 매우 간단하다. 미국 법무부는 적도기니에서 불법적으로 돈이 미국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명백히 언급해도 그것은 솜방망이에 지나지 않고 미국 정부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미국은 주요 석유 수입국에 대하여 어떤 형태로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한 관례로 되여 있다. 미국 관리들은 적도기니 비리에 대하여 어떤 언급도 하기를 꺼려한다. 적도기니가 UN “유네스코”에 300만 달러 “과학상”을 제정한데 대하여 세계가 반대를 하지만 미국은 슬그머니 눈감아 주었다. 미국 국무부의 적도기니에 관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여 있다. <미국의 투자가 늘어남에 따라 미국-적도기니의 관계는 긍정적이고 건설적이 되어 가고 있다> 데오도로 음바소고 대통령은 말하기를 <우리에게 석유가 있는 것은 유대인이 사막에서 만나를 먹었던 것과 같다> 포브스의 2006년도 세계 부자 순위에 따르면 데오도로 음바소고 대통령은 6억 달러의 개인 재산으로 8번째 부자로 올랐다. 하지만 <휴먼 라이트 워치>의 최근 보고서에 의하면 적도기니의 인권상황은 세계 최악의 기록을 여전히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적도기니 국민 셋 중의 한명은 40세 이전에 영양실족과 질병으로 사망한다고 보고 했다. 원유 5억 배럴이 매장된 자원부국 적도기니에서 국민 80%가 1인당 하루 생계비가 1달러도 못 미치는 빈국이라는 사실은 정말 믿기 어렵다. 하지만 이 믿기 어려운 사실을 세계의 많은 언론들은 하나도 숨김이 없이 낱낱히 적도기니의 비참한 현실을 사실 그대로 보도해 주고 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수영 자유형 100m 예선에 적도기니의 무삼바니가 출전했다. 수영 경력이 고작 8개월이며 수영복도 보통 수영객이 입는 보통 수영복 차림으로 출전 했다. 무삼바니는 제1조 예선에서 1위였다. 하지만 결선에서 탈락하고 말었다. 탈락후 무삼바니는 신문기자에게 말 했다. <남들은 메달을 따려 수영했지만 나는 물에 빠져 죽지 않으려 손을 저었다> 무삼바니의 말은 시사 하는바 크다고 생각 된다. 원유 부국으로 벨기에와 덴마크 의 다음으로 세계 28위의 부국이라고 적도기니의 통치자들은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적도기니의 80%가 하루 생계비 1달러도 못 미치는 절대빈곤속에서 생존 하고있는 현실속에서 그래도 굶어 죽지 않으려고 민중들은 손을 젔고 있는 것이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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