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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69]미국 등 외세에 시달려 온 <모잠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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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1-06-17 13:14 조회2,9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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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69번째 나라로 아프리카의 <모잠비크>를 소개했다. "서구 열강들이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제국을 건설한 나라들중에서 가장 일찍 시작 한 나라는 포르투갈 이었다. 포르투갈이
사실상 모잠비크를 식민지로 삼고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1490년대 초에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코다가
모잠브크에 상육하면서부터 처음 시작됬다. 아프리카에서 노예제도가 19세기에 전부 폐지됬는데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은 모잠비크에서 노예제도의 형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수단방법으로 <계약노동> 제도를 창안해
놓고 가장 늦게까지 노예제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빈국의 땅 <모잠비크>를 소개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연재-69] 포르투갈 식민지 500년에 비참해진 빈곤의나라 모잠비크

독립후 영국과 미국이 부추긴 내란 17년에 1백만명 사망

영국과 독일의 112년 식민지 통치로 240만명 난민 발생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IMAGE##>서구 열강들이 아프리카에서 식민지 제국을 건설한 나라들중에서 가장 일찍 시작 한 나라는 포르투갈 이었다. 포르투갈이 사실상 모잠비크를 식민지로 삼고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1490년대 초에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코다가 모잠브크에 상육하면서부터 처음 시작됬다.

아프리카에서 포루투갈의 식민지가 된 나라들은 앙골라, 적도기니,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그리고 섬나라인 카보베르데와 상투메 프린시페등 6개 나라 이었다. 남아메리카에서는 유독 부라질이 포루투갈의 식민지국가로 지배를 받고 이었다. 그리고 포르투갈은 1511년에 말레이 반도 말라가를100년동안 식민지로 삼았다. 하지만 1641년에 네덜란드에게 말라가를 빼앗겼다.

아프리카에서 노예제도가 19세기에 전부 폐지됬는데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은 모잠비크에서 노예제도의 형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수단방법으로 <계약노동> 제도를 창안해 놓고 가장 늦게까지 노예제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모잠비크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가난한 후진국중의 하나인 빈국의 땅이 됬다.

500년동안의 길고 긴식민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사모라 마셸이 1962년 부터 13년동안 게릴라 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사모라 마셸이 창설한 <모잠비크 해방전선, 프렐리모,Frelimo>의 게릴라 극한투쟁이 승리를 쟁취하였다. 그리하여 1975년에 드디어 모잠비크는 역사적인 독립을 쟁취하고 선포했다.

모잠비크의 독립이 선포되자 포르투갈 식민통치 지배자들은 약 23만명이 하루밤 사이에 도망치듯 모잠비크를 급히 떠나 포르투갈로 모두 돌아 갔다고 한다.

<모잠비크 해방전선, 프렐리모>를 창설하여 13년간 게릴라투쟁을 이끌어 왔으며 드디어 독립을 쟁취한 사모라 마셸은 1975년에 모잠비크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다. 모잠비크의 건국의 아버지 사모라 마셸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민족의 자주와 사회주의 노선을 기본정책으로 삼으면서 통치를 시작했다.

사모라 마셸 대통령이 포르투갈의 500년 동안의 식민통치 침략자들을 게릴라 투쟁으로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한 후에 집권 초기부터 민족의 자주와 사회주의 국가를 창건하여 1986년 까지 10년 6개월간 통치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모라 마셸 대통령의 통치이념에 대하여 냉전시대 전성기의 서방 언론들은 일제히 <빨갱이> 또는 <공산주의자>라고 악의적인 선동을 하고 있었다.

제국주의적 냉전 체제의 고정관렴에 사로 잡힌 서방의 언론들은 사모라 마셸 대통령에 대하여 악의적이고 허위로 과장된 비판을 아프리카와 세계를 향하여 계속 선동하고 있었다.

강철보다 더 강한 포르투갈 500년의 노예식민통치의 쇠사슬을 끊어버리고 모잠비크의 자유독립을 쟁취한 건국의 아버지 사모라 마셸 대통령에 대하여 서방의 제국주의 나라들의 언론들이 <빨갱이> 또는 <공산주의자>라고 왜곡된 악평을 선동하고 있었던 것은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부질없는 자가당착이 될뿐 이었다.

그 당시 사모라 마셸 대통령을 보는 또 하나의 시선이 있었다. 그를 바로 보고 친히 그를 영접하고 교양하여 모잠비크의 위대한 지도자로 부각시킨 숨은 이야기가 있는데 이 이야기에 대하여 분명히 밝혀야만 하겠다.

사모라 마셸 대통령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부터 북조선을 네차례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식민통치를 벗어나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민족해방투쟁의 방안에 대한 교양을 직접 받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사모라 마셸 대통령은 모잠비크의 독립을 쟁취한 후에도 냉전시대에 있서서 미국을 비롯하여 서방의 막대한 세력들이 재침략을 노리고 있는 위협에 당면하고 있음을 솔직히 시인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자문을 구하려고 또 다시 북조선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의 가르침을 수차례 받았다고 한다.

사모라 마셸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의 가르침을 받아 실질적인 모잠비크의 외교 정책과 국내의 통치이념에 대하여 독창적이며 민족의 자주와 자립정신에 입각한 정치노선을 분명하게 선택하고 실천을 하였다고 한다.

그럼으로 사모라 마셸 대통령이 독립후에 선택하고 실천한 정치노선은 <빨갱이>도 아니고 또한 무조건적인 <공산주의> 노선이 결코 아니 였다. 사모라 마셸 대통령이 선택한 정치노선과 통치이념은 오직 반외세와 민족의 자주정신에 입각한 <자주와 자립의 정치노선>을 선택하고 이를 모잠비크에서 실천한겄 뿐이었다.

이와 같은 마셸 대통령에 대하여 <김일성, 재미교포 최덕신과 담화> 의 문건 자료중에서 일부를 인용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이 문건은 <주체71(1982)년 5월 3일>에 김일성 주석과 최덕신과의 대화를 기록한 문건인데 이 대화중에 모잠비크의 마셸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가 나타나 있다.

<모잠비크 대통령은 이번까지 우리 나라를 네차레 방문하였습니다. 마셸 대통령이 우리 나라를 처음 방문한 것은 포르투갈 식민지 통치로부터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기 위한 민족해방투쟁을 벌일 때였습니다. 그때 그는 우리에게 민족해방투쟁방법을 배워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우리 나라에“독불장군”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혁명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각계각층 군중을 묶어세워야 하며 그러자면 통일전선사업을 잘해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모잠비크 대통령에게 우리의 통일전선사상을 이야기해주면서 인민대중에대한 진실한 사랑에 기초하여 통일전선사업을 하여야 각계각층군중의 마음을 움직일수 있고 그들을 하나의 숭고한 목적실현을 위한 투쟁대오에 굳게 묶어세워 혁명을 승리에로 이끌어 갈 수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모잠비크 대통령은 나라의 독립을 쟁취한 다음 집권하기 전에 다시금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는데 그때에는 나라를 어떻게 건설하갰는가 하는것을 의논하려왔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와 이틀간에 걸쳐 오랜 시간 담화하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새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을 꾸리고 정권을 세우며,군대를 건설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점차로 건설해야지 단번에 건설하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혁명과 건설은 그 발전단계를 뛰어넘을 수 없으며 성숙된 요구와 환경, 조건에맞게 하여야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는 집권후에도 우리 나라를 방문하였으며 이번에는 나의 생일을 축하하려고왔댔습니다. 잠비아대통령과 기네대통령, 모잠비크대통령들은 다 민족해방투쟁을 하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과 의사소통이 잘됩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만날 때마다 지금 아프리카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데 그들을 구원하자면 농업혁명을 해야 한다고 말해주군 하였습니다.>


모잠비크 사모라 마셸 대통령은 북조선을 네차레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으로 부터 혁명의 투쟁방법과 독림후에는 새나라 건설방안에 대하여 질문하고 아프리카 나라들에게 매우 적절한 투쟁방법과 건설방안을 제시해 주었다.

특히 김일성 주석의 새나라 건설방안에 대하여 세가지를 제시한 것이 주목된다.

첫째는 당이며, 둘째는 정권이고, 세째는 군대라고 제시해 주었다. 이 세가지는 강대한 신생국가건설에 있어서 3위일체의 통치이념인 것을 밝혀 제시해 주었다.

하지만 이를 어찌할까? 사모라 마셸 대통령은 북조선을 네차레 방문하여 배우고 체득한 통치이념을 실천하려고 동분서주 하고 있던 1986년 10월에 남아공 상공 에서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1986년 10월은 마셸 대통령이 집권한지 10년 6개월이 되는 때였는데 의문의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의문의 추락사고>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그 당시 사모라 마셸 대통령에게는 3개의 무거운 압력 세력이 존재하여 정권타토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며 직접 또는 간접으로 사모라 마셸 대통령의 생명을위협하고 있었다.

첫째는 국내의 반정부 조직의 등장이었다. <국민저항운동, 레나모 Renamo>의 새로운 정당 조직은 마셸 대통령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미국 CIA가 세운 이른바 반정부 야당 정치적 깡패조직이었다.

둘째는 영국의 지배하에서 명칭만 독립국의 행세를 하고 있는 영국의 종속국인 남아공이 마셸 대통령에게는 역시 식민지 종주국으로서 괴로운 짐이되고 있었다.

세째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은 아프리카 신생국들이 모두 사회주의지향적인 독립국들이 시작되고 있는데 대하여 서방 국가들이 집단적으로 위협을 느끼면서 모잠비크 신생국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배후 역할을 하고 있었다.

위의 세가지 악조건들이 모잠비크 사모라 마셸 대통령에 대한 살인음모는 그야말로 “식은죽 먹기”로 쉽고 간단한 처사일 뿐이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모라 마셸 대통령이 의문의 사고로 사망한지 20년이 지난 2006년에야 의문의 비행가추락사건에 대한 재조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크게 일어나자 할 수 없이 남아공이 재조사를 시작하였다는 보도가 있었다.

1973년 8월 8일에 박정희 정권에 의한 김대중 납치사건의 음모는 드러 나고야말았다. 김대중 납치사건의 주모자이며 총책의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은 그당시 주일공사 김재권이였다. 김대중 납치사건이 실패하자 김재권은 가족을 데리고 1975년경에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 때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와서 대학을 졸업한 김 성은 곧 미국정부의 외교관으로 근무했으며 2003년에는 주한 미대사관 1등 서기관으로 근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김 성은 2006년에는 미 국무부 한국과장을 지내면서 미국의 앞잡이역할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북조선 인권문제와 핵 문제에 관련된 여러가지 일들을 오래동안 했다.

뿐만 아나라 김 성은 현재 6자회담 특사이기도 한데 2011년 6월6일 뉴스에 의하면 미국정부의 두틈한 신용하에서 주한미국대사로 내정됬다고 한다.

한국과는 180도로 대조적으로 판이한 모잠비크 에서는 사모라 마셸 대통령의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인한 사망사건을 20년후에 재조사를 한다는 보도만 있을 뿐이고 아직은 여전히 의문사로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1. 포르투갈 500백년 식민통치에서 독립한 모잠비크


모잠비크는 면적이 799,380km2이며 조선반도의 3.6배되는 나라이다. 모잠비크 에서 호모사피엔스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최소 10만년 전으로 본다. 약 2000년 전에 반투어를 사용하는 종족이 모잠비크에 이주하기 시작했다. 약 1000년이 지난 후에 이번에는 중동과 인도지역에서 스와힐리어를 사용하는 아랍인들이 모잠비크에 출현하여 반투인들과 무역항구를 개설하여 서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1498년에 포르투갈의 탐험가 마스코다 가마가 모잠비크에 처음 상육한 때부터 모잠비크에 대한 포르투갈의 식민지는 사실상 시작됬다고 볼수 있다.

그 당시 포르투갈은 어떤 나라이였나? 포르투갈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영토확장에 욕심이 많었다. 이것은 당시 유렵의 다른 나라들에게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 놓게하는 위대한 착상의 암시가 되고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그들의 국토의 토양조건이 나빳기 때문에 항상 농업경제에 대한갈망을 품고 있었음으로 그들의 새로운 식민지 확보의욕이 모잠비크 식민지에서이루어 졌던 것이다.

포르투갈의 뒤를 따라 유럽인들이 그 당시 동아프리카에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게된 또 하나의 동기가 있었다. 그것은 로마 교황 알렉산더 6세의 권한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 나라들에게 마음대로 식민지를 개척할 수 있도록 권한을 무제한 허락 해 준데 있었다.

로마 교황 알렉산더 6세는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이슬람교의 아랍세력을 몰아내고 그곳에 기독교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목적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개척자들에게 식민지를 개척 할 수 있는 막대한 권한을 허락 해 주었다.

로마 교황 6세의 승인하에서 그 당시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동아프리카 지역에서식민지 개척지를 서로 나누어 가지기 위하여 국경선을 직선으로 그어 놓았다. 아프리카의 대부분의 나라들의 국경선이 직선으로 그어져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포르투갈의 모잠비크에 대한 식민통치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 해 본다.

ㄱ. 식민 초기에는 아랍인들과 경쟁적인 충돌을 이르키면서 금과 상아 무역에 성공했다. ㄴ. 1700년대 중반에는 아프리카 흑인들에 대한 노예무역에 치중하여 돈을 버는데 성공했다.
ㄷ. 1800-1900년대에는 모잠비크의 남자 노동력을 남아공과 로디지어로 팔아 넘겨 가혹한 노동착취를 했는데 팔려간 노동자등은 종종 쇠사슬에 묶여 일을 하도록 명령을 했다. ㄹ. 모잠비크의 교육제도와 병원 시설은 오직 큰 도시에만 있었고 포르투갈인과 다른 백인들만을 위한 교육제도와 병원시설 이었다.

이 모든 식민 통치과정이 1960년에 곪기 시작했으며 포르투갈 군인들이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평화시위대에게 총격을 가해 600명이 사망 했다. 이와 같은 군부의 총격으로 인하여 모잠비크의 독립을 향한 운동이 거세게 시작되였던 것이다.

모잠비크의 독립 투쟁은 1962년에 <모잠비크 해방전선, 프렐리모, Frelimo>가 창설되여 전설적인 게릴라 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프랠리모 게릴라 투쟁조직을 창설한 창설자는 몬들라네와 사모라 마셸 두사람이 공동 창설자 였다.

하지만 1969년에 공동 창설자인 몬들라네가 암살을 당해 쓰러졌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미국이 배후에서 지원한 음모에 의하여 몬들라네는 암살을 당했다.

몬들라네가 암살을 당하여 쓰러짐으로 사모라 마셸이 단독으로 프렐리모 게릴라 투쟁의 지휘와 책임을 이어 받아 게릴라 투쟁을 계속하여 힘차게 전개했다.

사모라 마셸이 책임지고 지휘하고 있는 프렐리모의 게릴라 투쟁이 활발하게 진 행되는 것을 보고 불안해 하는 것은 미국과 남아공 이었다. 미국과 남아공은 프렐리모에 대처하여 파괴공작을 하기 위하여 모잠비크에서 미국과 남아공이 공동으로 지원하는 반란세력을 육성하여 이른바 <국민저항운동,레나모, Renamo>를 1973년경에 결성 하였다

미국이 뒤에서 지원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남아공이 인계받아 운영하고 있었는데 레나는 모잠비크 내에서 훈련받은 압잡이 집단행동을 감행하여 통신시설을 비롯하여 사회의 기반 조직들을 파괴하여 결국 사모라 마셸이 지휘하는 프렐리모 게릴라전을 무력하게 만들어 무릎을 꿇게하기 위한 공작이였다.

하지만 미국과 남아공의 공작에 의한 레나모의 공작에 대하여 사모라 마셸이 지휘하는 프렐리모 게릴라 투쟁은 오히려 코웃음이 쳐질 정도였고 미국과 남아공 의 공작에 절대로 무릎을 꿇지 않고 최후의 목표인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1975년에 모잠비크에서 프렐리모 게릴라 투쟁을 전개한지 13년만에 모잠비크의 독립을 성취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아프리카의 모든 피식민지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했는데 대다수의 아프리카 신생 국가들이 서구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반발로 인하여 자주와 자립주의적인 국가창건을 희망하면서 사회주의 정책을 모두 다 펼치고 있었다.

2. 모잠비크의 독립과 사회주의 국가 창건


포르투갈이 모잠비크를 사실상 500년동안 식민지로 지배를 했으며 1975년에 사모라 마셸이 지휘하는 프렐리모의 게릴라투쟁이 13년만에 승리하여 독립을 쟁취했다.

사모라 마셸은 독립한 모잠비크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1977년에는 모잠비크 인민의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인민민주주의 국가건설과 사회주의 지향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기초를 마련하는등 정치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데 건국의 아버지 사모라 마솉 대통령의 사회주의적 통치는 어떻게 됬는가? 사모라 마셸은 또 누구인가?

사모라 마셸은 1933년 9월 26에 가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 났으며 초등학교이상의 교유을 받지 못했다. 그는 정규 학교에 진학을 포기하고 그 대신 직업훈련기관인 간호사로 취직을 하여 간호사 기초훈련을 받았다. 그 당시 흑인이 간호사 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픅별한 대우를 받는 특권에 속하는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의 행운의 기회가 사모라 마셸에게는 인종차별의 쓰라린 아픔을 직접 경험하는 기회가 됬다. 그리하여 사모라 마셸은 개인의 직업의 안전을 구하는것 보다는 차라리 민족적 식민지 노예문제를 우선 해결해야만 하겠다 라고하는 비상한 결의를 하게됬다.

그리하여 1963년에 사모라 마셸은 그의 나이 30세때 반식민지 운동에 가담하기위하여 앙골라에서 반포르투갈 군사훈련을 받는데 투신하기 시작했다.

앙골라에서의 군사훈련이 훗날에 모잠비크 독립운동을 위한 프렐리모 게릴라투쟁전선으로 창건될줄을 마셸은 알지 못했다. 사모라 마셸은 프렐리모 게릴라 운동의 창설자인 몬들라네와 혈맹의 동지가 되였으며 또한 그와 더불어 공동 창설자의 위치에서 긴밀하게 반포르투갈 게릴라투쟁을 펄쳐나가고 있었다.

1965년경 프렐리모 게릴라부대의 최초에 잘 훈련된 정예투사들의 수는 250명이 였으며 소련과 중국이 게릴라전 훈련과 무기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게릴라전은점점 확대 강화되여 백인들의 농장 3,000sq mile을 빼앗고 추방했으며 백인들의 철도와 다리를 파괴하는 작전은 크게 성공하고 있었다. 1969-70년경에 게릴라전은 모잠비크의 북방의 전역을 장악할 정도로 강력한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1969년 혈맹적 동지인 몬들라네가 암살을 당해 쓸어지고 말었다. 분명히 미국 CIA가 지원하는 남아공의 음모공작에 의하여 몬들라네는 쓸어졌다. 몬들라네가 쓸어진후에 사모라 마셸이 게릴라운동의 지휘자가 되였다.

사모라 마셸은 혈맹의 공동지휘자 몬들라네를 상실한 비극을 극복하고 분발하여 반포르투갈 게릴라 투쟁을 보다 더 맹렬히 전개하여 13년 동안의 투쟁은 마침내 승리로 끝났으며 1975년에 독립을 쟁취했다.

그 당시 모잠비크의 독립에 대하여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은 미국과 남아공이였다. 그리하여 미국과 남아공은 모잠비크 내부에 이미 조직되여 있는 어용 야당인<국민저항운동 레나모, Renamo>를 부추겨 적극 지원해주고 활성화 시켜서 우익 반게릴라 운동을 전개하도록 경제적 지원과 각종 무기를 제공해 주기를 시작했다.

그러면 모잠비크의 <국민저항운동, 레나모 Renamo>는 도대체 어떤 조직인가?

레나모는 1973년경에 모잠비크에서 백인들이 주동하는 친미우익정치 조직이다. 모잠비크의 독립쟁취로 포르투갈 식민지배자들 약 23만명이 하룻밤사이에 도망치듯 포르투갈로 떠나 갔지만 약 1만명의 포르투갈인들이 여전히 모잠비크에 남아 있었다.

1만명의 포르투갈인들이 외모로는 모잠비크에 동화된것 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레나모와 연결하여 반독립운동과 반사모라 마셸 대통령 운동을 펄치고 있었다.

그외에도 외부에서 많은 백인들이 모잠비크에 흘러 들어왔다. 그리하여 모잠비크는 1975년의 독립의 기쁨과 평화의 희망은 잠깐의 꿈이 되고 말었다. 미국과 남 아공이 부추겨 주는 우익 레나모가 이르키는 반정부 운동이 내전으로 발전하여 오래동안 계속됨으로 인하여 사모라 마셸 대통령은 독립을 쟁취한 후에 오히려 레나모의 우익반정부 세력이 일으키는 내란에 몹시시달려야만 했다.

하지만 사모라 마셸 대통령은 우익 반정부 레나모가 이르키는 내전속에서 시달리면서도 새로 출발한 모잠비크 공화국의 통치력은 흔들리지 않고 튼튼히 서서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때 당시 서방의 정치 평론가 John S. Saul은 모잠비크가 당면하고 있는 서방이부추기는 레나모와의 내전속에서도 튼튼히 서서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사모라 마셸 대통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론평을 했다.

<모잠비크의 사모라 마셸 대통령이 모잠비크를 통치하고 있는 그의 통치형태는 매우 특이하다. 그의 특이한 통치력은 그가 서민층의 민중속에서 출생하고 성장하고 출현한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민중의 애로를 이해하고 민중과 대화의 길을 열어 놓고 있으며 또한 그는 행동으로 민중의 친구가 되고 있다>

서방의 한 정치평론가의 사모라 마셸 대통령에 대한 론평의 글은 우리 재미동포 들의 민족에 대한 무딘 양심의 눈을 뜨게해 준다. 또한 민중에 대해 애정이 전혀 없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분개심을 일으켜 준다.

그런데 이게 또 웬 날벼락인가? 사모라 마셸 대통령은 행동으로 민중의 친구가 됬던 그의 인연이 영원히 단절되는 비극에 이르게 됬다. 사모라 마셸 대통령은 비행기 추락사고 라고하는 의문사를 당하여 1986년 10월 20일에 사망했다.

사모라 마셸 대통령의 혈맹의 동지인 모잠비크 해방전선 프렐리모의 창설자인 몬들라네가 1969년 2월 3일에 의문의 암살을 당하여 사망했다. 그런데 이번에 또 사모라 마셸 대통령이 몬들라네의 의문의 암살로 인한 죽음처럼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을 했다.

결국 모잠비크의 두 명의 독립운동의 령도자들이 의문사로 죽임을 당했다.

모잠비크의 독립운동의 투사이며 민족의 유능한 지도자 두 개의 별이 미국 CIA에 의하여 떨어졌다. 이것은 8.15해방 후에 조선반도 남녁에서 김 구선생과 여운형 선생등 쟁쟁한 민족의 지도자들이 미국의 배후음모에 의하여 암살된 사건 들과 동질의 사건들이다. 분명히 조선반도와 모잠비크는 같은 맥락에서 발생한 사건인 것이 확실하다.

미국과 남아공은 동남아프리카 지역에서 반제반서방 신생국들의 출현을 방지하고 그 근원을 말살시키기 위하여 모잠비크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이웃나라들에서 CIA의 동일한 수단과 방법으로 암살과 추방등의 방법을 계속 활용하고 있었다.

사모라 마셸 대통령의 사망후에 모잠비크는 어떻게 되였는가? 사모라 마셸 대통 령의 죽음을 기다렸던것 처럼 미국이 지원히는 친미 대통령이 곧 취임을 했다.

사모라 마셸 대통령의 후임으로 등장한 모잠비크 제2대 대통령은 조아킹 시사노 이었다.

시사노 대통령은 취임하는 즉시 전임 사모라 마셸 대통령의 사회주의적 정치노선을 완전히 버리고 시장경제 체제의 도입과 다당제 정치제도를 도입하는 신헌법을 제정했다.

시사노 통령은 1939년 10월 22일 생으로 어려서 부터 친포르투갈 가정에서 성장했다.그 당시 모잠비크에는 유일한 포르투갈 백인 고등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시사노는 이 유일한 백인학교에서 유일한 흑인학생으로서 졸업생이 되었다고 한다.

시사노는 포르투갈 리스본에 유학하여 의과대학에 입학을 했다. 하지만 1년후에 의과대학을 포기하고 중퇴를 했는데 시사노가 의대학을 중퇴한 이유는 해부학,Anatomy에 낙제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960년에 시사노는 포르투갈 유학에서 의과대학을 포기하고 프랑스로 왔다. 1962년에 시사노는 프랑스에서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모잠비크 독립운동에 가담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 당시 모잠비크 본국에서는 몬들라네와 사모라 마셸 두 사람이 <모잠비크 해방전선, 프렐리모 Frelimo>를 방금 새로 창설하여 본격적으로 통일 게릴라전선을 구축하고 있을때 였다.

시사노 에게는 프랑스에서 프렐리모의 해외조직의 주동자로서 활약을 시작하기에 매우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프렐리모 게릴라투쟁 초기에 있서서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의 조직확대 연대가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1963년에 시사노는 알제리아에서 프렐리모에 소속된 게릴라 훈련을 받도룩 지시를 받고 알제리아로 갔다. 알제리아에서 게릴라 훈련을 받은 시사노는 모잠비크로 돌아와 프렐리모 운동조직의 본부에서 중앙위원이 됬으며 또한 중앙위원으로서 프렐리모 통일운동의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게 됬다.

1966-74년에 시사노는 프렐리모 조직의 서기장과 국방장관의 직책을 겸임하는 최고의 중요한 요직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프렐리모 게릴라 조직의 창설자이며 현재 최고의 령도자인 몬들라네가 의문의 암살을 당하는 그 날과 그 현장에 서기장이며 국방장관의 직책을 맡고 있는 시사노는 어디에 있었는지 그의 행방을 전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역사가들은 이의문에 대하여 따거운 질문을 오늘도 던지고 있다.

어쨌던 시사노는 1975년에 모잠비크가 독립을 쟁취한 후에 사모라 마셸 대통령의 행정부에 시초부터 외무장관 이였으며 사모라 마셸 대통령이 비행기 추락으로 의문사를 당할때 까지 외무장관직을 계속 맡고 있었다.

사모라 마셸 대통령의 사회주의 정치노선이 서방의 완벽한 경제봉쇄로 인하여 날이 갈수록 빈곤에 빠질 수 밖에 없었으며 더욱이 심한 한재로 인하여 소련과 중국의 원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경제난을 해결하기에 역부족한 상태였다.

이와같은 어려운 시기에 모잠비크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외교관 4명이 CIA의 요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짐으로 사모라 마셸 대통령 행정부에 큰 소동이 일어 났다.

하지만 외무장관인 시사노 장관은 딴판으로 솜방망이를 들고 형식적인 수사로 시간만 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수 더 하여 시사노 외무장관은 Washington을 전격적으로 방문하
여 미국의 식량원조를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서방의 보도에 의하면 그 당시 모잠비크는 미국의 식량원조를 제일 많이 받는 나라로 나타났다. 이것을 시사노 외무장관의 공로라고 서방의 언론들은 추겨 올렸다.

시사노 외무장관의 친미행각과 직접 연결되는 사건이 또 하나 전개되고 있었다.

그것은 미국과 남아공이 지원하는 친미반공어용단체인 <국민저항운동, 레나모Renamo>의 불길이 활활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것 이었다.

사모라 마셸 대통령 진영의 프렐리모 게릴라독립운동의 공로와 역사성을 완전히 묵살하고 프렐리모를 오직 맑스주의 단체로 매도하면서 타도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모잠비크의 분쟁과 내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레나모가 시작한 내란으로 인하여 1,800개의 학교건물이 파괴됬으며 720개소의 진료소가 파괴됬다. 개인 상점 900개와 1,330대의 차량이 파괴됬으며 레나모에 협조하지 않는 사랍들의 자녀들을 부모앞에서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레나모가 이르킨 내란으로 인하여 모잠비크가 큰 혼한에 빠저 있는 와중에 1986년 10월 19일에 사모라 마셸 대통령은 소련제 민간항공기로 여행중에 있었는데 남아공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마셸 대통령의 비행 추락사고에 대하여 남아공의 발표는 일기불순, 기계고장, 그리고 비행기조종사의 음주등을 추락사고의 원인이라고 공식 발표를 했다.

하지만 모잠비크 정부의 발표는 딴판이다. 비행기 추락의 의심점은 제일 먼저 비행기 추락에 대한 보도를 왜 오래동안 감추었다가 늦게 발표를 했는가? Black box를 왜 남아공이 공개하지 않고 비밀로 보관하고 있는가? 비행장 신호소의 Radio 기록을 왜 훼손시켰는가? 비행기 추락은 분명히 Radio의 의도적인 오도에 의한 사고 였다고 모잠비크는 단정하고 있다.

비행기 추락사고 20년이 지난 후에 남아공은 의문에 대한 재조사를 할 수는 있다.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실제로 지금까지 재조사가 일우어지지 않고 있다.

1986년 11월 4일에 47세의 조아킹 시사노 대통령은 모잠비크의 제 2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다. 시사노 대통령이 취임을 시작한 후에도 모잠비크의 두개의 정치적 진영인 <프렐리모>와 <레나모>와의 내전은 여전했으며 오히려 한때 더 치열하게 싸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1992년에 이르러 두 진영은 내란을 종식시키고 영구적 평화 협정에 조인을 하기로 합의를 했다. 미국과 남아공이 뒤에서 부추겨서 1970년대에 창설된 레나모는 사모라 마셸 대통령의 사회주의적 국가창건을 방해하고 붕괴시키기 위 한 목적으로 창건이래 어용정치조직으로 줄곧 작용했다.

1992년에 모잠비크의 내란의 주동역할을 해온<레나모>는 17-20년만에 <프렐리모>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하지만 양측의 평화협정 조인에도 불구하고 UN군 6,000명이 2년동안 1994년까지 주둔하는 조건하에서 내란은 겨우 종식이됬던 것이다.

모잠비크의 공산화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미국과 남아공이 부추겨 세운 레나모의 반공주의적 내란 17-20년간에 모잠비크 민중 100만명 이상이 목숨울 잃었으며 240만명이 삶의 터전을 완전히 잃은 난민이 됬다.

이름이 내란이지 사실은 포르투갈, 영국, 남아공 그리고 미국에 의한 아프리카에 대한 공동침략행위일뿐이였으며 다른것 아무것도 아니였다.

사모라 마셸 대통령의 갑짝스러운 사망으로 극우 세력이 등장하여 1986년 11월4일에 시사노 국방잔관이 3년동안 대통령직을 대행하게 됬다. 시사노 대통령은 국명을 <모잠비크인민공화국>에서 <인민>을 빼고 <모잠비크공화국으로>으로 고쳤다.

시사노 대통령은 곧장 IMF로부터 막대한 서방자본을 끌어 드림으로서 시급한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다당제 민주주의 정치 형태를 채택함으로 전임 사모라 마셸 대통령의 통치이념과 완연하게 구별되는 정치형태를 과시했다.

시사노 대통령은 영국의 국무총리 Thatcher 수상과 만나 두 나라의 관계를 정상으로 회복한는데 동의를 했을뿐만 아니라 서방과의 소원해진 관계를 고치는데도 영국과 긴밀히 협력하기로 합의를 했다.

1990년 3월 13일에 시사노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하여 부시 대통령의 관대한 대접을 받으면서 맑스주의를 포기한데 대한 칭찬의 말과 앞으로 우방국가로서 많은 경제원조를 받기로 약속을 하고 돌아 왔다.

1994년에 시사노 대통령은 모잠비크의 역사상 처음으로 다당제 선거제도에 의 하여 신임 대통령으로 당선됬으며 또한 1999년에 재선되였다. 하지만 시사노 대통령은 2004년에 3선에는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에서 은퇴를 했다. 시사노 대통령은 모두 18년간 집권을 했는데 사회주의 지향적 국가를 망쳐놓고 친미적 예속국가를 만들었다.

시사노 대통령의 집권기간에 모잠비크는 다당제 의회제도를 도입했는데 의회는 250명으로 구성되여 있다. <모잠비크해방전선,프렐리모 Frelimo>가 160석을 차지하여 의회의 의원수로는 여당이며 사회주의적 이념 맥락을 견지할 수있었다.

두번째로 <모잠비크 국민 저항당,레나모 Renam>당은 90석을 찾이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명칭으로만 다당제일뿐 모잠비크는 <사회주의 당>과 <반사회주의 당> 두개의 양당의 대립하여 구성되여 있다.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의 양당체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레나모당은 반사회주의 당으로서 의회의원 수가 90석으로 소수당이며 야당 이다.

하지만 레나모당은 미국의 막대한 경제지원을 등에 업고 있으며 또한 CIA 공작 정치에 힘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레나모당에 속한 의원의 수로는 비록 소수이며 야당이지만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레나모당이 권력을 무제한 행사하는데 있서서는 여당이 되고 있었다.

시사노 대통령은 친서방 친미적 통치자로서 여당 혹은 야당의 가림이 없이 무조건 18년동안 여당의 권한을 행사하면서 집권을 하다가 2004년에 퇴임했다.

3. 오늘의 모잠비크는 어디로 가는가?


모잠비크는 2004년 12월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아르만두 구부자를 선출하였으며 선출된 아르만두 구부자는 2005년 2월 2일에 모잠비크의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으며 또 다시 2009에 재선되여 지금 현직 대통령으로서 집권을하고 있다.

아르만두 구부자 대통령은 1943년 1월 20일생으로 20세때 사모라 마셸이 지휘하고 있던 프렐리모 게릴라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열성적 독립운동가로 활약헸다.

독립을 쟁취한후 아르만두 구부자는 사모라 마셸 대통령 행정부에서 내무장관이 되여 포르투갈 식민지배자들을 모잠비크에서 완전히 추방하는 책임을 완수했다.

전임 시사노 대통령의 집권하에서 1992년에 모잠비크 게릴라독립투쟁운동 단체인 <프렐리모>와 친미 친우방 세력을 대표하는 <레나모>가 평화협정을 체결할 때 <프렐리모>측을 대표하여 아르만두 구부자가 평화협정에 서명을 했다.

전임 시사노 대통령이 친미와 친서방 개방정책을 18년 동안 펄치면서 모잠비크의 모든 국영 기업체들을 사유화 했는데 그때 아르만두 구부자는 시사노 대통령의 친미와 친서방 정권하에서 교통부장관을 지냈다.

구부자는 교통부장관을 지내면서 모잠비크의 관광사업을 적극 추진시켰으며 또한 건축사업을 비롯하여 어업과 수출에서 크게 성공하여 부유한 사업가가 되었다.

그리하여 아르만두 구부자는 <프렐리모> 조직의 운영을 위하여 경제적으로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2002년에 반외세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프렐리모>의 총재가 됬다.

2004년 12월 대통령 선거에 아르만두 구부자는 모잠비크 해방전선 <프렐리모>의 후보자로 출마하여 63.7%의 득표로 당선 됬으며 2005년 2월 2일에 모잠비크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아르만두 구부자 대통령은 2009년에 또 다시 재선되였음으로 2014년까지 임기가 연속되고 있다.

아르만두 구부자가 <프랠리모>의 후보자로서 대통령에 출마를 했을 때 그는 영국을 비롯하여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순방하여 선거운동을 하면서 서방의 지지를 획득하려고 노력을 했다.

그러면 아르만두 구부자 대통령의 정체성에 대한 시각의 문제는 없는가?

아르만두 구부자 대통령의 통치철학에는 분명히 양면을 충분히 고려한 통치능력을 분명히 과시하고 있었다.

구부자 대통령은 <프렐리모>의 독립투쟁 게릴라전통에서 한발걸음도 후퇴하지 않는 민족주의적 지도자이며 애국애족의 대통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만두 구부자 대통령은 포르투갈의 500년의 식민통치의 뿌리 깊은 유산으로 남아 있는 한맺힌 금주림과 빈곤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의 성공한 기업가적인 자질과 체득한 기업체 경영의 경험을 통하여 선별적이며 또한 폭넓은 개방적인 광폭정치를 펄쳐 나가고 있는 것이다.

2010년 12월에 아르만두 부자 대통령은 모잠비크의 최고급 관광 hotel인 Polana Hotel의 개통식에 참가하여 말하기를 모잠비크의 개방은 절대로 강대국에 의한 <피동적 개방>이 아니라 모잠비크는 필요에 따라 민족의 최선의 이익을 위하여 선별적으로 문호를 열어 놓는 <체제적 개방정책>이라고 역설 했다.

모잠비크의 Polana Hotel의 건축과 운영은 북조선 평양에 유경 Hotel을 건축하여 2011년에 개통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뿐만 아니라 2011년 6월10-14일에 북조선의 태권도 17명으로 구성된 시범단이 보스턴, 뉴욕, 델라웨어 밸리(뉴저지)에서 진행되여 미국인들의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이끌어 낸것은 조선인민공화국이 취하고 있는 선별적인 광폭정치의 일환으로 이해된다.

모잠비크 구부자 대통령의 선별적인 체제적 광폭정치의 또 하나의 모습은 중국의 호금도 주석과 구부자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과시됬다. 2007년에 두 나라가 체결한 경제협력에 의하면 두 나라는 인민들에게 행복을 마련해 주는데 견해일치를 달성했다고 발표했다.

두 나라의 정상회담에서 경제발전과 관련해 4가지를 합의 했는데

첫째, 경제무역협력 강화이며
둘째, 인문분야의 교류확대이며
셋째, 국제문제에서 두나라는 상호 공동이익을 수호하고
네째, 쌍반간에 고위층 내왕의 강화등 이었다. 모잠비크와 중국은 정부, 의회, 정당간 우호협력을 강화하여 평화로운 세계건설을 위해 노력을 경주할 겄을 합의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김영남위원장은 모잠비크의 아르만두 구부자 대통령이 제3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을 축하하여 축전을 보냈으며 또한 2009년에 재선된 것을 축하하여 축전을 보냈다.

이 글을 끝 맺으며,


모잠비크는 역사적으로 비극의 나라이다. 포르투갈의 500년간의 식민통치의 약탈로 인하여 모잠비크 땅 구석구석마다 파괴되지 않은 곳을 찾아 볼 수 없었으며 또 노예무역의 근거지로서 오래동안 사용되여 민중의 절대빈곤과 문맹이 85%가 넘는 비극의 나라가 되고 있었다.

물론 모잠비크는 독립 후에 아직도 가난한 나라이다. 아프리카 여행자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국경선을 통과하여 모잠비크 땅에 들어 서면 곧 가난한 모습이 강하게 나타나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못살아도 독립을 쟁취한 모잠비크 민족끼리 평화롭게 외세에 더 이상 굴복하지 않고 하나 둘 차근차근 새나라를 꾸려나가려는 사모라 마셸 대통령의 사회주의 국가건설의 꿈은 절실 했다.

그런데 이게 웬말인가? 제국주의자들의 음모로 인하여 사모라 마셸 대통령은 죽임을 당하여 그 꿈이 살아지고 말었다. 사모라 마셸 대통령이 죽임을 당한 후에 친서방 친미 외세의존 정권이 18년간 통치하는 동안 비극적인 내란이 계속되여 무죄한 민중 100만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240만명이 삶의 터전을 완전히 잃은 난민이 발생했다.

모잠비크의 식민지 유산 청산을 방해하는 옛종주국 포르투갈과 영국과 미국의 혹독한 반공주의적 국제정치에 의하여 희생된 모잠비크는 오늘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외세를 끌어 들이는 <레나모>가 모잠비크에 현존하고 있다.

하지만 <레나모>와 대결하여 모잠비크-우리민족끼리의 정치적 통치이념을 고수하는 민중의 정치력인 <프렐리모>의 역사적 전통이 눈에 보이지 않게 계속하여 진행되고 있다.

오늘의 모잠비크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답변은 <프렐리모>에 뿌리를 두고 있는 현직의 아르만두 구부자 대통령의 통치방식은 과거 시사노 전임 대통령의 피지배적인 외세의존적 개방정책이 절대로 아닌 구부자 대통령의 독창적인 자주적 개방 통치방식 이라는 독특한 점이다.

모잠비크가 처해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아르만두 구부자 대통령이 취하고 있는 통치방식은 광폭통치의 풍토안에서 가히 찾아 볼수 있는 자주적 개방통치의 정치이념으로 이해 할 수 있다고 본다. 끝. (2011년 6월 16일, 유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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