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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68]영국,독일에 한세기이상 고통받은 <나미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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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1-05-28 22:32 조회2,7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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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68번째 나라로 아프리카의 <나미비아>를 소개했다. "나미비아는
서구인에 다이아몬드 영혼의 땅 영국과 독일의 기나긴 112년 동안 식민지 통치로 아프리카에서 제일 꼴찌
독립국으로 나미비아라는 나라의 이름은 나미브 사막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나미비아에는 나미브 사막뿐만
아니라 칼라하리 사막이 또 있는데 이 두 지역의 사막 사이에는 생명체와는 관계가 없는 절벽지대가 상당히
많이있다". 불모의 사막 <나미비아>를 소개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연재-68] 불모의 사막 "나미비아" 다이아몬드 영혼의 땅

영국과 독일의 112년 식민지 통치로

아프리카에서 제일 꼴찌 독립국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IMAGE##> 나미비아라는 나라의 이름은 나미브 사막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나미비아에는 나미브 사막뿐만 아니라 칼라하리 사막이 또 있는데 이 두 지역의 사막 사이에는 생명체와는 관계가 없는 절벽지대가 상당히 많이 있다. 그런데 이 생명체와는 관계가 없는 불모의 사막과 절벽의 땅에서 1908년에 어느 한 노동자가 다이아몬드를 발견했다. 이 노동자는 다이아몬드를 영국인 감독관에게 보여 주었다. 문명의 눈이 어두은 원주민들은 나미비아를 목마른 불모의 땅 사막지대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영국인들에게는 1908년 부터 100년 동안이나 다이아몬드 영혼의 땅으로서 영국인들이 믿는 그들의 신의 큰 축복의 땅이 되고 있었다.

영국인들이 나미비아에서 다이아몬드의 채굴 독점권을 탈취한지 불과 5년 후인 1913년에 나미비아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이 갑짜기 증가해 1만 5000명 이상이 되었다고 한다. 영국이 80년동안 나미비아에서 다이아몬드 채굴 독점권을 누리면서도 나미비아 식민지 지역에 수혜를 위하여 즉 부가가치가 돌아가도록 하는데 있어서는 전혀 투자하지 않았다고 한다.

1990년에 나미비아가 독립국이 되었다. 독립국이 된 나미비아 정부가 1994년에 비로서 처음으로 다이아몬드 광산사업 Namdeb를 창설하여 영국의 다이아몬드 회사인 드비어스와 80년만에 처음으로 지분의 50대50 계약을 문서상으로 체결을 하기는 했지만 나미비아 정부가 얻은것은 없었다.

그리고 2001년에 나미비아 해안에 있는 다이몬드 광산에서 채굴을 새로 시작하게 되었는데 영국의 드비어스는 지분 70%를 차지하고 나미비아가 새로 설립한 광산사업 Namdeb의 지분은 겨우 30%를 가지기로 계약을 체결 했다고 한다. 나미바아가 가지고 있는 지분 30%는 영국이 획득하고 있는 다이아몬드 년간 생산량 4천9백 캐럿을 독차지하고 있는데 비하면 보잘것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보잘것 없는 량의 지분이기는 하지만 나미비아 전체 수출에 비하여 다이아몬드 수출은 40%를 차지하고 있었다.

영국이 나미비아에서 다이아몬드 채굴을 시작하여 한때는 다이아몬드 산출 세계 3위를 점유했다. 그런데 영국이 독점한지 100년만에 지금은 다이아몬드 자원이 점점 줄어 들고 있다고 한다. 나미비아 정부가 2000년에 비로서 처음 다이아몬드 연마공장을 설립하여 자체
운영이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미비아의 다이아몬드 산업의 전망은 자원이 점점 위측될 위기에 처해 있다.

나미비아에는 다이아몬드외에도 구리, 우라늄, 납, 아연, 주석, 텅스텐등 종류도 많고 매장량도 풍부하다. 그러나 이들 광산물은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하여 미국과 캐나다와 남아공등 다국적기업들에 의하여 채굴되고 있는 것이 비극적인 나미비아의 역사이다. 광업뿐만 아나라 농업에 있어서도 경작지의 80%를 소수의 백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나미비아 독립 이전의 간추린 역사


나미비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황막한 지역인데 이곳에서 태고로 부터 처음 살기시작한 사람들은 부시맨이라고 불리우는 산족이며 그 다음은 코이코이족이 이곳에서 사냥과 가축을 기르는 부족으로 알여져 있는 것이 고고학적인 기록이다. 고고학적인 선사시대 이후 2천 300년전에 반투족이 나미비아 남중부 고원지대에 출현하여 그 지역에서 이미 살고 있던 무명의 다른 부족들을 쫓아내거나 아니면 반투족의 노예로 삼았다.

1500년대 초에 반투어를 사용하는 헤레로족과 오밤보족이 내륙의 평원 지역으로 이주하여 나미비아에서 처음 유목민으로 정착하여 양, 염소, 소 목축을 바탕으로하여 남성을 중심으로한 조직된 종족을 이루었다. 이들은 목축업뿐만 아니라 경작이 가능한 지역에서 대규모 강력한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나미비아 땅 해안지역을 유럽인들이 발견하기는 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매마르고 황막한 곳이기 때문에 <죽음의 땅>으로 여기고 있었다. 혹시 유럽인들이 바다에서 조난을 당하여 이곳에 상육을 해도 물이 없어서 살아날 가망이 없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나미비아 땅을 <해골의 해안>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1480년대말에 이르러서 유럽의 포르투갈 해양탐험가들이 인도를 향해서 가다가 처음으로 나미비아 해안 지대를 탐험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그후 17세기에 이르러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등 유럽인들이 나미비아의 해안지대와 내륙지대를 경쟁적으로 탐험하였는데 이지역의 풍부한 바다표범과 고래어장에 매혹을 느끼 면서 몰려들 기시작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인이나 네덜란드인들이 나미비아에 몰려 오기는 했지만 100년이 경과될 때까지 나미비아를 그들의 식민지로 강점한 나라의 기록은 전혀 없다.

100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나미비아를 처음 침공하기 시작한 서구인들은 영국에 의하여 남아공에서 쫓겨난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이었다. 보어인들이 남아공에서 영국에 의하여 쫓겨난 후에 산발적으로 나미비아를 침공하여 전지역을 무장화 시시키고 있었는데 고질적인 백인들의 약탈행위로 인하여 나미비아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1830-1860년에 보어들이 나미비아 전지역을 점령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 했다. 하지만 나미비아를 차지하려는 영국의 반격에 의하여 보어인들은 또 다시 영국에 패망을 당하였으며 나미비아에서 살아져 없어지고 말았다. 영국과 보어인들과의 투쟁에서 항상 영국이 승리를 했다. 영국은 1878년에 보어인들을 쫓아 낸 후에 나미비아의 일부를 분활하여 남아공의 영토로 부속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영국은 가는곳 마다 그곳을 분활하고 분열 시키는 정책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이 이번에는 나미비아를 분활하고 분열시키는데 영국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실패했다. 영국은 1884년에 나미비아를 독일에게 전부 빼앗김으로 나미비아에 대한 통치권이 독일에게 넘어 갔다. 나미비아에 대한 통치권을 획득한 독일은 독일의 농민들을 대거 나미비아로 이주시켜 정착하게 하여 나미비아를 독일령으로 만들고 본격적으로 식민지통치를 시작했다. 됵일은 최초의 식민지화 과정을 매우 평화롭게 진행하였는데 원주민들은 영국인들보다 독일인들을 더 신뢰하여 독일인들에게 그들의 농토의 소유권을 내어 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미비아에 대한 독일의 본격적인 식민정책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었다. 1884-1915년 까지 32년동안 지속된 독일의 식민정책은 상상을 깨치는 가혹한 통치방법과 수단 이었다. 그럼으로 나미비아 민중들의 항쟁은 독일의 야만적 식민지 정책에 맞서서 싸우는 치열한 민족적 해방을 위한 투쟁이었다.

특히 1904-1907년 3년동안 나미비아의 주요 부족인 헤레로인족, 나마쿠아족 그리고 코이코이족등이 연합단결하여 독일에 반대하는 항쟁의 봉기를 이르켰다. 그당시 독일에 반대하여 3년동안 항쟁봉기에 나선 부족들의 원주민의 수는 약 8만명으로 추산됬다. 그런데 무기가 없는 8만명의 부족 원주민들의 항쟁과 봉기는 총포를 가지고 있는 소수의 독일군을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이때 독일군에게 3개 부족의 원주민 6만 5000 명이 비참하게 살해 당했다.
독일군에게 죽임을 당한 사망자 6만 5000명은 대략 봉기에 참가한 부족 원주민의 전체 수의 80%에 해당하는 수 라고 했다. 그리고 죽음에서 겨우 살아 남은 부족의 원주민 수는 약 1만 5000명이었다.

그런데 생존자 1만 5000명은 죽음을 면했다고 하지만 이중적 고난 속에서 허덕이는 비참한 난민들이 되고 있었다.

첫째는 남아공에서 유명했던 흑백분리정책의 시스템에 의하여 흑인들에게 모든것이 제한되고 있는 사회적 부자유로 인한 고난이었다. 둘째는 당장 먹을 것이 없는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난민들이 되고 있는 고난이었다.

역사가들은 독일이 나미비아에서 원주민들을 잔인하게 6만 5000명을 살해한데 대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홀로코스트에서 나치 독일이 사용한 살해의 모델이다> 라고 추론을 했다.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 패함으로 나미비아에 대한 식민통치는 끝나고 1915년에 나미비아를 떠나 갔다. 하지만 독일이 식민지 통치 32년 동안 나미비아에서 자행한 모든 악행들의 잔재들은 오늘도 여전히 나미비아에서 과시하고 있다.

독일의 식민지 정권이 정해 놓은 나미비아의 식민지 수도 Windhoek는 지금도 여전히 나미비아 공화국의 수도로 우뚝서 있다. Windhoek에 꽉들어선 독일식 고층건물들은 오늘 나미비아 공화국의 경제와 상업의 중심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독일은 루터교의 본고장의 나라인데 나미비아는 독일의 식민지였던 탓으로 아프리카에서 유일한 루터교의 나라가 되고 있으며 나미비아 종교인의 75%이상이 루터교의 교인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루터교의 나라가 된 나미비아 식민지 통치하에서 루터의 개혁정신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1915년에 1차 세계대전이 끝남으로 독일은 패전국이 되여 나미비아를 떠나 갔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가? 나미비아에 새로운 식민통치국이 또 다시 들어왔다. 1915년 7월 9일에 독일의 항복을 받아내고 <베르사이유 조약>을 맺은 남아공은 나미비아의 새로운 식민지 통치국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남아공은 어떤 나라인가? 남아공은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보어인들을 쫓아 내고 영국의 연방국으로 창설된 영국의 종속국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역사에서 유일한 <흑백분리정책, Apartheid>을 창안한 나라가 바로 남아공이다. 영국은 남아공을 앞세워 그 당시 국제연맹의 C분류의 신탁통치하에서 나미비아에 대한 점령을 인정받았다.

그리하여 남아공은 영국의 배경으로 1915-1990년 사이에 75년동안 나미비아의 종주국이되여 식민통치를 계속했을 뿐만아니라 Apartheid까지 나미비아에 적용시키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종식후에 1960년대에 아프리카의 모든 이웃 나라들이 한 나라도 낙오됨 없이 모든 나라들이 다 독립을 쟁취했다. 하지만 오직 유일하게 나미비아만 1960년대에 독립을 하지 못하고 1990년까지 30년 동안이나 더 오래 식민통치를 받았으며 1990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독립을 하여 아프리카에서 제일 꼴찌 53번째로 독립국이 됬다.

나미비아 민중들이 영국이 배후에서 지원해 주고 있는 남아공의 강압적인 식민통치에 항거하여 1915년부터 1990년 까지 75년동안 지속적으로 저항하면서 투쟁했다.

나미비아 민중들의 비극적이며 눈물겨운 75년 동안의
투쟁의 역사를 간략하게 추려서 중요한 요점들을 년대별로 살펴 본다.


ㄱ. 1915-1940년대 까지의 나미비아의 독립운동은 여러 부족들의 추장들이 중심이 되여 극히 소극적으로 토지침탈에 대한 항의와 강압통치에 대한 호소를 UN에 청원하는 방법으로 식민통치에 대한 투쟁을 초보적으로 나약하게 이어가 고 있을 뿐이였다.

ㄴ. 1950년대 초기에 들어서서 나미비아의 독립운동은 부족 추장들의 소극적인 운동형태를 벗어나 보다 더 진보적이며 적극적인 양상으로 발전됬다. 이 시기에 전개된 주요 운동형태는 주로 학생 및 지식인집단이 선봉대로 출현하여 사무직 근로자들과 도시의 청년층과 연대하여 <헤레로 남서아프리카 진보협의회>를 창 설했다. 1950년대 중반기에 새로운 운동형태로 오밤버랜드 지역에서 <계약노동자>들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적극적이며 과격화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0년대 후반기에 헤르만 토보이가 이끄는 <오밤보 의회,OPO>를 결성하였으며 또 나미비아의 수도 Windhoek에서는 샘 누마조가 전국적으로 노동자 수천명을 규합하여 노동자 조직을 결성했다. 그리고 새로운 보다 진보적인 독립운동 조직으로 <남서아프리카민족기,SWANU> 가 창설되였다.

1950년대를 마감하면서 OPO의 지도와 SWANU의 지도자들은 단합하여 하나의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영국과 남아공을 대항하여 강력한 투쟁을 전개했다. 남아공 식민정권은 무장경찰을 투입시켜 13명이 사망하고 54명이 부상을 당하는 첫번 무력충돌이 발생히여 이른바 <샤프빌사건, Sharpville>이 발생했다.

ㄷ. 1960년대에 들어서서 새로운 독립운동 정당 <민족연합민주당>이 창당됬다.
그리고 기존의 여러 운동단체들 거둡나 새로운 조직으로 창당 발전됬다. 새로운 운동단체로 <남서부아프리카민족기구, 스와포, SWAPO>가 결성됬다. 스와포, SWAPO는 수백명의 무장특공대를 조직하고 훈련을 시켰는네 이때부터 SWAPO 는 게릴라 투쟁을 맹열히 전개하기 시작하여 30년의 세월을 게속했다.

UN은 수와포, SWAPO를 유일한 나미비아의 정당한 독립운동세력으로 시인했다. 하지만 그 당시 UN은 남아공이 나미비아를 강점하고 있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는 원론만 되풀이하고 있을뿐 아무런 도움이나 결과가 없이 6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UN은 6년이 지난 후에야 할 수 없이 남아공의 불법적으로 나미비아를 침략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나미비아의 독립이 아니라 또 다른 UN의 신탁통치를 발표했던 것이다.
UN의 “눈가리고아웅”식의 처사에 대하여 나미비아의 독힙운동 단체인 스와포, SWAPO 는 분통을 터뜨리면서 다음과 같이 웨치고 있었다.

<우리는 달리 취할 방법이 없다. 게릴라의 무력으로 일어나 우리의 해방을 쟁취하자>
SWAPO의 게릴라 부대는 나미비아의 3개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투쟁을 전개했다.

그때 UN은 남아공의 무력반격을 형식상으로만 금지시키고 있었다. SWAPO의 맹렬한 게릴라전의 결과로 나미비아는 반개방적인 제한적 자유를 획득했다. 1969년 12월에 나미비아의 당조직을 재정비하고 <나미비아인민해방군대>를 편성하고 또한 <여성 및 청년연맹>을 결성하여 대중적 독립운동을 강화시켰다.

ㄹ. 1970년대에 들어서서 나미비아의 독립운동은 장족의 발전과 독립의 문을 활작 여는 시기로 기록됬다. 1971년에 20.000명 노동자들의 파업, 72년에 농민들의 반란봉기, 1972-74년에 계속적인 청년동맹의 과격저항 운동이 계속됬다.

UN은 남아공과 나미비아의 대화를 주장하고 나섰다. 하지만 나미비아는 대화가 아니라 독립을 요구했다. UN은 새로운 행정관만 교대로 임명할 뿐 남아공에 대하여 제재와 설득에는 아무 효력이 없었다. UN과 남아공은 선거로 나미비아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려고 시도 했지만 나미비아 민중 98%가 선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UN과 남아공은 공작선거를 통하여 침략을 연장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영국과 남아공은 나미비아의 SWAPO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체포를 감행하여 특히 당과 쳥년동맹의 주요 지도자들을 대거 구속했다. 남아공은 사태의 동향이 불리하게 전개되는 것을 민감하게 느끼고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1974-1975년에 남아공은 남아공 안에서의 쿠테타 시도가 발생하여 혼돈에 처해 있었으며 또한 앙골라에 대한 남아공의 군사적 대응이 큰 실패로 돌아 갔다. 이런 일로 인하여 남아공은 나미비아에 대한 전략도 다소 바뀔 수 밖에 없었다.

남아공은 1975년에 가식적 속임수 이기는 하지만 어쨋던 갑작이 헌법회의를 개최하자고 일방적으로 발표하여 나미비아의 독립의 가능성을 시사 했다. 이것은 후에 시간 끌기를 위한 하나의 간교한 술책인것으로 밝혀 폭로됬다.

1976-1977년에 SWAPO는 현존 모든 독립운동 세력들과 특히 남부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운동세력들을 총망라한 세력들이 합류한 대열에 고무되여 민중봉기에 크게 힘을 얻고 있었다. SWAPO는 전국적 대규모 항쟁은 못된다 할지라도 중소규모의 공격은 능히 감행할 수 있는 힘을 과시했다.

UN은 안보장이사회를 통하여 남아공과 나미비아간의 중재자 역할에 책임을 늦었지만 느끼고 있었다. 1877년 7월에 남아공은 UN의 압력에 굴복하여 기존의 압력 단체의 조직체들을 해산시키는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아공은 눈가리고 아웅 식으로곧 이어 새로운 어용단체 정당인 <민주투르연맹, DTA>을 또 다시 창당했다.

창당한 DTA의 새로운 지도자로 Dirk Mudge를 어용지도자로 세웠다. 남아공이 DTA 를 새로 창당한 이유와 목적은 SWAPO와 맏대결 시키려는 정략적 음모와 민중을 기만하기 위한 목적으로 어용 정당을 창설했던 것이다. 후에 폭로된바에 의하면 DTA는 남아공으로 부터 무진장의 경제지원과 무기를 지원을 받으면서 폭력배를 앞세워 SWAPO에 대한 협박과 방해공작을 항상 게획하고 있었다. DTA는 나미비아의 독립을 원치 않는 반국가 정치조직이었다.
1978년 5월에 나미바아 해방운동을 시작한 이후 최대규모의 학살사건이 발생했다. 앙골라에 피신해 있는 SWAPO 난민촌을 남아공이 공격하여 867명 사망과 464명 중상자가 발생했다.

이 날은 뉴욕에서는 서구의 5개국 외무장관들이 모여 나미비아 독립문제를 토의하고 있었는데 남아공은 나미비아 민중에 대한 대량 학살을 감행하고 있었던것이다.

DTA는 여러가지 기만적 선거전술을 내세워 1978년 12월 선거에서 일시 승리를 했다. 하지만 DTA의 승리는 불투명한 현상뿐이였고 나미비아 민중들의 SWAPO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끊어 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ㅁ. 1980년대에 들어서 나미비아 독립운동은 어떻게 진행됬는가? 가장 관심을 끄는 문제는 UN의 감시하에서 나미비아의 독립을 위한 선거가 어떻게 진행될것인가에 있었다.

남아공은 UN이 나미비아에서 SWAPO를 민중이 지지하는 합법적인 정당으로 인정한데 대하여 UN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또한 그당시 짐바브웨에서 로버트 무가베가 압도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된데 대하여 남아공은 염려를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짐바브웨의 선거결과와 똑 같은 일이 나미비아의 독립을 위한 선거에서도 나타나지 않을가하고 남아공은 크게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4년 3월1일에 나미비아 민중에게 큰 경사스로운 뉴스가 발표됬다.

SWAPO 공동창설자인 토이보가 남아공의 모략으로 테로분자라는 죄명을 쓰고 20년간수감되여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1984년 3월 1일에 석방됬다는 뉴스 이었다.

토이보의 20년 감옥살이 에서 석방된 것은 나미비아의 독립을 향한 첫 발거름으로 인식되여 나미비아 민중들은 열광적으로 그를 환영했다. SWAPO는 토이보의 석방을 환영하고 그의 변함이 없는 지도력을 인정하고 8월에 당의 사무총장으로 추대했다.

1985년에 남아공은 엉뚱하게 <나미비아 과도정부, 임시정부안>을 작성하여 발표했다. 두말 할 필료도 없이 나미비아의 SWAPO는 남아공이 발표한 일방적으로 작성된 <임시정부안>을 즉각 거부 했으며 또한 남아공이 제시한 것을 UN도 인정하지 않았다.

1986년에 11월 30일에 나미비아의 수도인 카타투라에서 SWAPO 주최로 독립을 위한 범국민 대회를 개최하고 있었는데 남아공의 사복 군인들과 자경단 갱들이 대회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다수의 사망자와 수십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나미비아의 독립운동은 더 이상 피흘림 없이 평화롭게 UN의 감시하에서 선거 절차를 통하여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당시 나미비아의 자유독립을 쟁취하는 과정에 있어서 국제정세도 매우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뿌리 깊은 앙골라 분쟁에 쿠바군 약1만여명이 파견되여 있었는데 남아공은<앙골라의 이권과 나미비아 독립>문제를 쿠바군의 주둔과 연결시키고 있었다.
어찌하여 알골라에 쿠바군이 주둔하고 있었는가? 그 당시 앙골라의 반제국주의투쟁과 나미비아의 독립 투쟁들은 전략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투쟁이였기 때문에 쿠바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런데 1988년 1월에 앙골라와 쿠바는 쿠반군을 철수시키는데 합의를 하였다.
이제는 남아공이 쿠바군을 핑게삼아 독립을 반대 할 조건이 없어지고 말았다. 한편 1988년 5월에 모스크바에서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앙골라 분쟁문제와 나미비아 독립을 승인하는 문제를 서로 연결하여 하나로 묶어 해결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결국 소련과 미국의 중재를 통해서 남아공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소련과 미국이 제시한 시행하는 시기를 1988년 9월 29일로 확정했다.
1988년 12월 22일에 남아공, 앙골라 그리고 쿠바는 UN이 나미비아에 대한 독립 안을 실행하는 시기를 1989년 4월 1일로 정하는 문서에 세 나라는 서명을 했다. 그리고 쿠바군이 앙골라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시일을 1991년 7월로 확정했다.

그리고 UN은 신생국 나미비아의 제헌을 위한 선거를 1989년 11월로 확정 했다. 남아공은 나미비아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을 1,500명 이하로 줄이고 오직 기지내에만 있도록 제한 했다. 모든 정치범은 석방되고 외국에 있는 난민들도 귀향하게 했다.

나미비아의 독립을 위한 선거는 계획 대로 1989년 11월에 실시되였다. 국회의석 72중에서 SWAPO가 41석을 획득하였고 남아공의 어용정당인 DTA는 21석를 얻었으며 군소 정당들이 10석을 차지했다.

1990년 2월 16일에 국회는 다수당의 대표자이며 SWAPO의 지도자인 샘 누조마를 나미비아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 했다. 샘 누조마는 나이 31세때 SWAPO를 창설하여 30년 동안 게릴라 투쟁을 하였으며 61세때 대통령으로 선출 됬다.

1990년 3월 21일에 그렇게도 오래 기다리던 나미비아의 역사적인 새날이 왔다.
UN 사무총장 쿠엘라, 앙골라 산토스 대통령, 그리고 남아공의 클레르크 대통령을 비롯하여 수 십명의 국가수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샘 누조마 대통령은 나미비아의 독립을 선언 하였으며 또 새로운 국기를 게양 했다.

나미비아 최초의 지방선거에서 49개의 지방 행정부와 13명의 지역 대표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SWAPO는 13명중 9명이 선출됬고 남아공의 어용정당인 DTA는 불과 3명이 선출 됬다. 뿐만 아니라 49개의 지방관청중 39를 SWAPO가 차지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나미바아 신생국의 첫출발은 이렿게 희망적 이었다.

나미비아 독립 이후의 역사


나미비아의 초대 대통령 샘 누조마 (Sam Nujoma)는 누구?
샘 누조마는 1929년5월 12일 생으로 영국의 식민지 치하의 땅에서 오밤보 부족의 빈농의 아들로 태어 났다. 그는 어려서 선교사가 세운 미션스쿨에서 초등교을 받은것이 그의 학교 교육전부이였다.

샘 누조마는 야간학교에 진학했으나 그것도 가족을 돌보기 위하여 중도 그만두고 직장을 구하려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 샘 누조마는 16세가 되던 해 철도노동자가 되였다. 하지만 샘 누조마는 철도노동자 시절에 벌서부터 철도노동조합의 결성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는 철도 노동조합의 결성을 추진한 이유로 직장에서 회고를 당할 뿐만 아니라 추방을 당했다.
추방당한 샘 누조마는 추방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1960년 4월19일에 SWAPO를 창설하여 앙골라를 거점으로 하여 30년간 게릴라 무장투쟁에 맹열히 돌입했다.

샘 누조마가 1990년 3월 21일에 나미비아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것은 1960년 부터 게릴라 투쟁에 돌입한지 30년만에 최후의 승리를 하게된 결과 였다. 30년 동안 망명생활의 고생된 투쟁의 세월이 흘러간 후 이었다.

샘 누조마 대통령의 통치 능력은 나미비아에서 뿐만 아니라 전아프리카 전지역에서 반제반미 아프리카의 자주자립 민족주의 운동에 선봉자 역할을 담당했다.

샘 누조마 대통령이 집권 14년동안 나미비아를 통치한 과정들을 간략하게 살펴 본다.

ㄱ. 샘 누조마 대통령의 집권하에서 가장 큰 과제와 공과는 나미비아에서 벡인들 이 독차지하고 있던 토지의 환수를 강행하는 과제이었다.
샘 누조마 대통령은 말하기를 <흑인농민 25만명은 토지가 없는 반면에 백인지주 4000명이 전체토지의 절반 이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옳치 않다. 만일 백인들이 토지환수를 거부한다면 정부는 할수 없이 무력환수에 나설 수밖에 없다> 라고 분명히 선언을 하고 실행했다.

ㄴ. 샘 누조마 대통령의 경제정책은 절대로 용이한 과제가 아니었다. 나미비아의 전체 인구 184만명중에서 10만에 (6%)불과한 백인들이 모는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재정의 80%를 식민통치하에서 남아공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는데 독립후에 완전히 끈어지고 말었다.

신탁통치의 오랜 기간동안에 나미비아의 풍부한 지하자원들이 철저하게 강대국들의 <지하자원수탈정책의 강행>에 의하여 희생만 당하고 있을 뿐이였다. 하지만 독립된후 샘 누조마 대통령의 집권 15년에 나미비아의 경제적 잠재력은 관목할 만큼 발전하였으며 2000년에 국내총생산의 성장율은 4.2%를 과시할 수 있었다.
특히 나미비아는 다이아몬드, 금, 우랴늄등 귀중한 지하자원은 풍부하다. 남아공의 무자비한 수탈행위가 이제는 제고된 오늘에 있서서 나미비아의 경제적 자체발전의 전망은 아프리카의 그 어느 나라들 보다 더 밝고 희망적이다.

ㄷ. 샘 누조마 대통령의 외교정책은 매우 강력하고 놀라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남아공이 나미비아의 독립을 시인하고 1990년에 물러 났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나미비아의 크고 아름다은 항구인 Walvis Bay 만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남아공은 끝까지 버티고 주장하면서 계속 장악하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미국이 쿠바의 독립은 시인하면서도 <관타나모 만>은 웅켜쥐고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고 붇들고 있는 꼴과 같은 형국이었다.

하지만 샘 누조마 대통령은 독립후 4년만인 1994년에 기어히 Walvis Bay를 되찿는데 성공하여 그의 외교정책의 능숙함을 과시했다. 2004년은 Walvis Bay를되찾은지 10주년이 되는 해이다. 나미비아의 민중들은 10주년을 기념함과 동시에 샘 누조마 대통령의 뛰어난 정책을 치하하면서 전국적으로 축제를 벌리고 있었다.

ㄹ. 샘 누조마 대통령은 UN 국제정치 무대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2000년 9월 UN 밀레니엄 정상회에서 공동의장으로서 사회를 맡은 샘 누조마 대통령은 기조연설자로 등장한 김대중 대통령을 재치있는 웅변과 열광적으로 높이 소개하는연설을 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연설이 끝난 후에 샘 누조마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특별 성명으로 화답 하였다. .

뿐만 아니라 샘 누조마 대통령은 1971년에 그당시 아프리카의 한 민권운동가로서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연설를 했는데 UN의 승인과 후원을 받아 독립을 위하여 남아공과 협상을 벌리는등 UN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한때 독림운동을 전개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샘 누조마 대통령은 UN을 투쟁의 대상으로 여기고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했을 뿐 UN에 예속되거나 UN에 얽매이는 때는 전혀 없었다.

ㄹ. 샘 누조마 대통령은 극렬적인 마르크스 주의자라는 평을 받았으며 스파이를 잡아 내는데 귀신같이 예민하고 강력한 지도자 넓리 알려져 있다. 이런 사람을 외유내강이라고 평한다.

그래서 그런가? 샘 누조마 대통령은 얼굴에 횐 수염이 가득하고 그의 잔잔한 미 소가 매우 인상적이다. 샘 누조마 대통령은 종교간의 갈등과 인종간의 반목을 국민들의 대화와 접촉으로 능히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그것을 항상 조장하고 실천하는 지도자로 알여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샘 누조마 대통령에게 놀라운 소식이 전해 왔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 배우이며 또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성으로 불리우는 <안젤리나 졸리>와 나미비아의 샘 누조마 대통령과의 관계는 매우 특이하고 전설적이다.

어느날 안젤리나 졸리는 샘 누조마 대통령으로 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 한통을 받았다.

<당신의 특별하고 귀한 날을 보낼 곳으로 나미비아를 선택한 것에 나와 나미비아 전국민은 놀랐다. 당신은 나미비아에서 새로운 아이를 낳은 것이 아니라 그것은 새 국가의 새 시대를 열어 놓은 것이다. 당신과 당신의 가족은 항상 이곳이 당신의 집임을 잊지 말라>

안젤리나와 브레드 피트는 그들의 첫아기 출산의 장소로 사막의 나라 나미비아를 선택했던 것이다. 나미비아에서 출생한 그들의 딸의 이름은 샤일로인데 안젤라는 샤일로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샤일로가 자신이 태어난 나미비아에 대하여 깊은 이해속에서 자라기를 바란다> 라고 말했다.

안젤리나와 브래트는 나미비아 동물 보호구역과 원주민 부시맨들을 위한 기금으로 200백만 달러를 기증했다. 안젤리나 졸리의 가족과 샘 누조마 대통령의 나라 나미비아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끈끈한 인연을 맺었다.

ㅁ. 샘 누조마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 공화국과의 관게도 역시 매우 적극적이며 끈끈한 역사적 인연을 맺고 있는데 1990년 3월에 공화국과 수교를 맺었다.

공화국 최고인민위원회회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샘 누조마 대통령과의 상봉과 친밀한 회담과 접근은 샘 누조마 대통령의 집권 초기 부터 14년 동안 꾸준히 연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일히 셀수 없을 정도로 뉴스에 항상 보도됬다.

또한 양형섭 상임 부위원장의 나미비아 예방도 항상 이어지고 있었다. 또한 조선 공화국과 나미비아 국가 사이에 경축 축하문들이 수 없이 많이 해마다 절기마다 양국이 서로 교환하고 있다.

하지만 특기 해야할 기사가 두 개가 있다
.

첫째는 200년 12월에 샘 누조마 대통 령의 공화국 방문이다. 공화국의 초청을 받아 국빈으로 공화국을 방문한 샘 누조마 대통령은 평양시민을 동원한 대규모 환영 석상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뜨거운 환영를 받었다. 그리고 그의 출국 환송행사도 육해공군의 사열로 매우 특별한 환송행사를 진행 했다.

둘째는 2002년 8월에 나미비아 정부는 SWAPO 독립운동 시절에 희생된 애국열사들을 추모하는 <영웅 묘지>공원을 조성했다. 이 <영웅 묘지>에는 높고 웅장하며 뾰죽한 탑이 우뚝 서 있으며 횃불을 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웅장한 탑을 북조선 공화국의 기술진들의 제작이라고 한다.

SWAPO의 애국영웅들이 흘린 자유의 피는 오늘의 나미비아와 내일의 나미비아의 자유의 나무에 물을 주고 있다 라고 샘 누조마 대통령은 그의 출판된 자서전에서 말하고 있다.

이 <영웅 묘지>에 우뚝 서 있는 웅장한 기념탑은 나미비아를 정복한 침략자와 침략을 당한 나미비아릐 역사를 같이 보여주고 있다.

샘 누조마 대통령은 14년간의 집권을 끝내고 2004년 11월14일에 후임자 제 2대대통령을 선출하는 대선을 실시했다. 대선에서 역시 SWAPO의 대통령 후보자인 히피케푸니에 포함바가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였으며 2005년 3월 21일에 평화적으로 정권을 후임자 에게 위임하고 퇴임을 했다.

퇴임한 샘 누조마 전임 대톨령은 2005년에 나미비아 대학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학위를 수여 했다. 뿐만 아니라 더욱 놀라운 것은 2005년에 75세의 샘 누조마는 늦깍이 대학생으로 대학에 신입생으로 입학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젊었을 때 대학생이 못됬던 것이 천추의 한이었던 모양이다. <나미비아의 산악지대에는 상당량의 광물이매장되여 있는데 이에 대하여 공부를해야하겠다>라고 자신의 대학입학에 대하여 설명을 했다고 한다.

2005년 3월 21일에 나미비아의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리피케푸니에 포함바대통령은 누구?


포함바 대통령은 1935년 8월 18일생으로 나미비아의 독립운동 정당인 SWAPO 의 핵심지도자중의 한 사람으써 샘 누조마 대통령과 생사를 같이한 전통적인 혈맹의 동지이다.

포함바 대통령은 2004년 초선에서 압도적 득표로 당선됬으며 또 2009년 12월에 재선되여 2015년까지 집권임기가 연장 되여 있다.

포함바 대통령은 나미비아의 북부 사막지대의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으며 그가 나이 어렸을때 그곳에 있는 선교사가 세운 학교에서 공부했다. 포함바는 16세에 고향을 떠나 나미비아 독립운동 단체인 에 입단한 것이 인연이 되여 25세 때 SWAPO의 당원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포함바는 곧 체포되여 추방을 당하여 이웃나라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포함바가 샘 누조마를 처음 만난것은 1966년 3월 1일 이였으며 1970년에 포함바는 SWAPO의 중앙 위원으로 선정됬으며 동시에 당의 부사무국장이 됬다.

1970-1980년대에 있서서 포함바는 SWAPO의 요직들을 두루 맡으면서 당의 행정과 대외 활동을 위한 당의 대표자로도 큰 역할을 했다.

1990년에 나미비아가 독립을 쟁취하여 샘 누조마 태통령이 취임할 때 포함바는 내무장관으로 임명됬다. 그 후부터 포함바 장관은 14년동안 하루도 쉬임이 없이 샘 누조마 대통령의 측근자요 동반자가 되여 여러 부처의 장관직을 두루 맡으면서 충성스럽게 나라에 봉사했다.
샘 누조마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자신의 후계자로 히피케푸니에 포함바를 추천하여 SWAPO의 대통령 후보자가 되게 했다. 2004년 11월14일 대선에서 압도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됬다. 뿐만 아니라 포함바 대통령은 2009년 11월 28일에 또 다시 재선에 성공하여 2015년까지 집권을 하게 됬다.

포함바 대통령의 통치형태는 특히 대외정책의 큰 틀에서 볼때 변함이 없는 전임 샘 누조마 대통령의 통치이념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그럼으로 이것저겻 더 많이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차라리 최근에 전해진 나미비아와 중국 과의 관계와 그리고 조선과 관계된 보도에서 포함바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들을 전하면서 이 글을 끝 맺는다.

2010년 7월 13일에 나미비아의 수도에 있는 대통령의 관저에서 중국 대사 Ruixing이 참석한 가운데 나미비아의 대통령관저 신축 낙성식이 거행됬다.

그런데 포함바 대통령의 연설에 의하면 중국의 원조로 대통령 관저가 신축됬다고 하면서 중국에대한 감사의 멧세지가 있었다. 나미비아의 고관 200여명도 이 낙성식에 참석하고 있었다.

Ruixing 중국대사의 연설도 역시 두 나라의 상호 신뢰와 친선을 더욱 돈독하게 지켜 나아갈 것을 역설하고 있었다. 포함바 대통령은 역사적 견지에서 우리 두 나라의 친선과 유대는 그 어느때 보다 더 중요하고 희망적이다 라고 화답했다.

뿐만 아니라 나미비아의 포함바 대통령은 그의 집권 초기에 나미비아 외무장관을 평양에 보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친서를 전달했다. 포함바 대통령은 전임 샘 누자마 대통령이 1990년 3월 24일에 양국의 외교관계를 설정하여 역사적인 유대관계를 맺은 인연을 상기시키면서 조선과 나미비아간에 경제과학기술 협조를 체결하는데 서명을 했다.

서구 문명국들의 인종주의적 가해자들에 대한 반대 작용은 이렇게 끊임없이 오늘도 여기 저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끝. ( 5/27/11 유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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