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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67]아프리카 <보츠와나>의 반외세 독립투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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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1-05-16 21:16 조회2,9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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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67번째 나라로 아프리카의 <보츠와나>를 소개했다. 아프리카에서
반외세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한 역사를 고찰했다.특히 영국은 대영제국주의 시절의 향수심으로
보츠와나 다이아몬드 생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겠지만 오늘의 보츠와나 공화국은 일찌감치 기존의 전통
관념과 현대적 사고방식이 하등의 충돌 없이 공존하고 있는 성숙한 공화국이다. 서구문명의 백인이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시선에 또 다른 변화를 안겨주는 보츠와나의 전형적 모습을 필자는 만족스럽게 여긴다.[민족통신 편집실]

<##IMAGE##>

[연재-67]다이아몬드의 나라 보츠와나의 반외세 자주독립 투쟁사

영, 미 보츠와나 다이아몬드 이젠 못 뺏어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보츠와나의 역사 이야기와 남아공의 역사 이야기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불가불 남아공에 최초로 침입한 네덜란드와 영국 침략자들이 서로 싸운 전쟁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일단 살펴보아야 하겠다.


<##IMAGE##> 네덜란드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프리카 최남단 해안 케이프반도에 처음 상륙한 때는 1652-1700년대 초로 알려졌다. 그런데 그다음 영국인들이 처음 케이프반도에 출현한 시기는 1795년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영국은 네덜란드인들보다 적어도 100-150년 늦게 케이프반도에 침입한 늦깎이 침략자들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원주민 흑인들을 침략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 보다 오히려 네덜란드 백인들을 침략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영국은 네덜란드인들을 보어인이라고 불렀는데 보어인이란 네덜란드어로 농부란 뜻으로 천대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늦깎이 영국인들은 느닷없이 케이프반도에서 터줏대감이 되고 있는 네덜란드의 보어인을 향하여 총을 겨누면서 점점 북상을 계속했다. 영국군에 몰리는 보어인들은 할 수 없이 1830년에 노예들을 거느리고 북서방향으로 대이동을 해야만 했다.


보어인들의 대이동을 역사가들은 <대이동, Great Trek>이라고 부르는데 보어인들은 북서방향으로 탈출하여 오렌지강과 바르강을 건너 내륙의 새로운 정착지에서 <트랜스발 공화국>을 창건했다.


보어인들을 완전히 추방한 영국은 남아프리카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창건하여 백인들만을 위한 백인들의 천국인 새 나라를 건설했다.


추방을 당한 네덜란드 보어인들은 오렌지강과 바르강을 건너 내륙 지방에 정착하여 <트랜스발 공화국>을 창건하고 영국의 간섭이 없는 독립국을 세웠으며 여러 이웃 흑인 왕국들을 또 다 괴롭히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 창건한 보어인들의 <트랜스발 공화국>은 또 다시 영국의 침략을 받아 치열한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1870-1899년 사이에 1차 보어전쟁과 1899년-1902년 사이에 2차 보어전쟁으로 인하여 보어인의 <트랜스발 공화국>은 또 다시 영국에 패망당하고 남아공에 흡수되어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보어인들은 <대이동, Great Track> 후 겨우 80년이 지난 후에 1910년에 영국의 <남아공연방>에 흡수합병 당하고 말았다.


그러면 1830년경에 오렌지강과 바르강을 건너 북상하여 <트랜스발 공화국>을 창건하고 정착하였던 보어인들이 80년 동안 지내면서 보츠와나와의 관계는 도대체 어떠했는가?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트랜스발 공화국을 창건한 보어인들도 역시 서구의 침략적 백인들이었기에 틈만 있으면 보츠와나를 공격하여 그들의 영토를 확장하려는 침략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보츠와나에는 이미 영국이 먼저 침략하여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어인들의 영토 확장의 꿈은 실현될 수 없었다. 이곳에서도 영국과 보어인들과의 대결이 있었는데 승자는 항상 영국이고 보어인들은 영국에 패망했다.


영국인이든 흡수당한 보어인이든 모두 다 서구의 백인들이기 때문에 보츠와나 에게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동일한 서구 침략자들일 뿐이었으며 다만 백인들끼리 서로 경쟁하는 싸움에 보츠와나 원주민들에게 불똥만 튀어 언제나 희생만 강요 당하였을 뿐이었다.


1. 보츠와나 독립 이전의 간추린 역사


보츠와나의 본래 명칭은 츠와나족이었는데 독립할 때 <보츠와나 공화국>이란 새로운 국명을 가지게 됐다.



고대역사에 의하면 약 3만 년 전에 이 지역에 산족이 거주했으며 그 후 목축생활을 하는 코이코아족이 거주했다. 세 번째로 AD 1-2세기경에 반투족이 이 지역에 정착하여 거주하고 있었다.


17세기에 반투족 계열에 속하는 츠와나족이 이 지역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완전히 정착하여 이 지역의 주인으로 번성하고 있었다. 1800년대 초에 아프리카의 검은 나폴레옹이라는 샤카장군의 침입하여 츠와나족은 한때 약화되는 듯 했다. 하지만 츠와나족은 재집결하여 오히려 더 단단한 부족국가를 건설하여 고도로 발달한 봉건적 세습국가를 창건하였다.


츠와나족은 부족종교를 기반으로 단단한 가족적 가부장제도를 통하여 추장이 국가를 통치한

다. 그래서 1800년대 초에 츠와나에 도착한 영국 선교사들이 츠와나족을 개종시키는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1835년부터 보어인들이 츠와나에 침입하여 농장에서 츠와나인들에게 노동을 강요함으로 폭동이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 보어인들이 츠와나에 침입하는데 대하여 반대하는 세력은 츠와나인들 뿐만 아니라 이미 츠와나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인들이 보어인들의 침입을 적극 반대하여 저지시켰다.


여기서 영국인들과 영국군에 대하여 혼돈할 수 있어 설명이 필요하다.

남아프리카 케이프 반도에서 <남아공>을 창건하여 북상하여 침략한 영국인들과 영국군 있었다. 그 다음에는 북서쪽 내륙지방에서 츠와나를 침략하고 이미 점령하고 있는 또 다른 영국인들과 영국군이 있었다.


그런데 이 두 지역에서 수세기 동안 침략활동을 전개한 영국인들은 때로는 서로 연결도 되고 또 서로 함께 침략 작전도 꾸미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영국인과 영국군이라고 말하게 되면 혼돈하기 쉽다.


특히 1867년에 츠와나 땅에서 금이 새로 발견됐는데 금의 매장량이 세계 공급량의 25%에 해당하는 초대형 금광이었다. 이 금광의 발견으로 인하여 츠와나는 백인들의 전쟁의 격전지가 되고 말았다.


보어인의 번영을 저지하기 위하여 영국은 전쟁을 시작했다. 보어인도 금에 욕심을 내 영국이 츠와나에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결국 전쟁이 터졌는데 이 전쟁이 제1차 보어전쟁이다.


제1차 보어전쟁에 결과로 영국과 보어인들이 평화조약을 맺었으며 영국은 보어인의 <트랜스발 공화국>의 창건을 합법적으로 승인을 했다. 결국 제1차 보어전쟁은 보어인들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영국군은 병력을 대량 증강하여 제2차 보어전쟁을 또 다시 일으켰다. 제2차 전쟁에서는 영국군이 보어인들을 격파하였다. 국은 1881년에 <트랜스발 공화국> 과 츠와나 사이에 국경선을 확정하는 <프리토리아 협정>을 체결하여 츠와나를 점령하려는 보어인들의 꿈을 우선 완전히 차단시켰다.


영국은 제2차 보어전쟁에서 보어인 2만 7,927명을 강제수용소에서 학살했는데 비전투원과 여성과 어린애들까지 학살하였다. 이와 같은 영국의 야만스러운 대량학살은 훗날 독일의 나치의 강제수용소 학살의 본보기가 되었다고 한다.


영국은 <트랜스발 공화국>의 접근을 완전히 차단시킨 후에 영국이 츠와나를 단독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1895년에 츠와나를 영국의 <베추아날란드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1910년에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을 완전히 점령하여 <남아프리카 연방>으로 흡수합병하였다.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을 완전히 흡수한 후에 더 큰 욕심으로 <베추아날란드 보호령>의 일부를 분활하여 <남아프리카 연방>에 흡수시켰다.


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 연방>은 북쪽 짐바브웨까지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하기 위하여 츠와나 즉 <베추아날란드 보호령>을 통과하는 것을 강요 승인을 받아냈다.


사실에 있어서 <남아프리카 연방>은 영국이 세운 나라이고 <베추아날란드 보호령>도 역시 영국이 세워 놓은 보호령이 아닌가? 그러므로 영국은 남아프리카의 전역을 지배하면서 어디에서든지 통치권을 장악한 무소불능의 대영제국이 되었던 것이다.


영국은 <베추아날란드 보호령>을 <남아프리카 연방>안으로 끌어들여 통합을 하기 위하여 갖은 압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베추아날랜드 보호령>의 원주민인 츠와나족의 거센 반항으로 인하여 욕심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 당시 츠와나족에는 중요한 추장 3인이 있었는데 그 3인 추장의 얼굴이 오늘의 보츠와나의 100플라 지폐에 그려져 있다. 그들 3인 추장은 카마 3세, 바토엔 1세 그리고 세벨레 1세 등 3인이었다.


이들 3인 추장들이 영국을 방문하여 보어인들을 비롯하여 서방 열강들이 츠와나의 금과 다아몬드를 욕심내어 침략해올 위험이 있으니 츠와나를 영국의 보호령아래 그대로 있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다. 아프리카 약소민족의 어쩔 수 없는 최선의 생존방법이었다.


이것은 마치 조선의 구한말 시대에 일본의 조선반도 침략을 막기 위하여 1907년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되었던 3인 특사 이준, 이상설 그리고 이위종의 3인 특사파견 사건과 같은 맥락의 방법이었다.


츠와나의 특사를 영국에 파견한 사건은 성공하여 외부의 침략을 일단 저지하였다. 그리고 츠와나는 영국의 보호령으로 그대로 남아 있다가 1966년에 독립을 쟁취했다.


하지만 이준 열사 등 3인의 조선 특사를 헤이그에 파견한 사건은 실패하여 일본의 조선반도 침략을 막지 못했던 것이다. 조선반도 약소국의 최후의 요청마저 그 당시 서방의 강대국 평화회의는 묵살했던 것이다.


어쨌든 츠와나는 1895년에 영국의 <베추아날란드 보호령>이 되어 영국의 통치를 받기 시작했는데 그 후 7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70년 후인 1966년에 독립되어 <보츠와나 공화국>이 창건됐다.


2. 보츠와나 독립과 공화국 창건



70년 동안에 <보츠와나 공화국>이 창건되는 과정에서 얽히고설킨 이야기들을 간단히 요약해 본다.


츠와나의 최고 부족인 비만와토의 추장 선량왕 카마 3세가 <베추아날랜드 보호령>에서 영국의 지배하에 영국과 동맹관계를 수립하고 명목상으로 츠와나의 통치자가 되고 있었다.


선량왕 카마 3세가 죽은 후에 츠와나의 역사적인 가족혈통통치의 전통에 의하여 그의 아들 세코마 2세가 계승하여 <베추와나랜드 보호령>의 명목상 통치자가 됐다. 하지만 세코마 2세는 1925년에 사망했다.


1925년에 사망한 세코마 2세의 아들인 세레체 카마는 나이 4세인데도 불구하고 츠와나의 최고의 부족인 비만와토족의 전통적인 법통에 의하여 4세의 나이 어린 세레체 카마는 추장으로 추대되어 통치자가 됐다.


하지만 나이 4세인 세레체 카마를 대신하여 그의 숙부가 영국 보호령의 통치 하에서 추장대행자가 되어 영국에 종속적인 섭정을 대행하였다.


나이 4세인 세레체 카마는 그동안 성장하여 남아공에서 대학을 졸업하여 문학학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영국은 세레체 카마를 런던으로 유학하게 하여 옥스포드와 템플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여 졸업을 했다.


그런데 영국에서 법학을 전공 세레체 카마에게 큰 문제가 발생했다. 세레체 카마가 1948년 9월에 영국 여성 Ruth Williams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면 그 당시 흑인이 백인 여성과 결혼을 한다는 사실은 엄청난 사회문제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불법적이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 당시 남아공에서는 흑백 결혼을 법적으로 완전히 금지하고 있었으며 흑백결혼은 실정법을 어기는 중대한 범죄행위였다.

더욱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츠와나의 추장의 상속자인 세레체 카마가 영국의 백인 여성과 결혼을 했다는 사실은 흑백분리 정책을 법으로 제정하고 있는 남아공을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만들었다.


추장의 상속자인 세레체 카마가 백인 여성과 결혼하여 츠와나에 귀국을 했지만 곧 추방을 당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 이유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남아공의 압력으로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만일 세레체 카마가 츠와나의 추장이 된다면 남아공의 흑백분리 실정법은 큰 혼돈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베추와나랜드 보호령>을 운영하고 있는 영국인들은 남아공과 손발을 서로 맞추어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무조건 세레체 카마를 츠와나에서 추방하여 떠나가도록 추방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셋째는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인데 세레체 카마의 나이가 너무 어리기 때문에 추장의 대행자로서 그의 숙부가 지금까지 통치를 하고 있었는데 오늘에 와서 그의 숙부는 조카에게 추장의 위치를 넘겨주기를 원치 않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숙부도 역시 세레체 카마의 흑백 결혼을 반대하여 이혼과 추방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레체 카마는 사면초과의 악조건으로 인하여 1951년에 츠와나를 떠나 영국으로 귀국 불가 추방의 길을 가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레체 카마와 그의 영국인 아내 Ruth는 추방당한지 5년만인 1956년에 츠와나로 귀국하여 정치적 활동을 전개했다. 그가 귀국하게 된 근본 동기는 우선 츠와나 민중들의 부르짖음과 행동으로 항의하는 폭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츠와나 민중들은 부족의 전통인 추장의 혈통적 계승을 갈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츠와나 민중들의 데모는 바로 영국의 식민통치에 대한 반 영국 시위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었다. 만일 츠와나 민중들의 반 영국 데모를 영국이 묵살만 한다면 츠와나의 반 영국 데모가 점점 더 확산되어 전 남아프리카에 확산될 위험성이 있다고 영국은 판단했다.

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에서 흑인의 인권과 인종차별 정책에 대하여 영국을 향한 규탄의 소리가 국제적으로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은 세레체 카마의 츠와나로 귀국하는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IMAGE##> 추방을 당했던 세레체 카마는 오히려 영국에서 조국 츠와나의 독립을 위하여 준비와 정신적 훈련을 할 수 있는 유용한 기회로 삼았다. 그가 츠와나에 귀국할 때는 추장계승자의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현대적 보통 시민의 신분으로 귀국을 했다.


그래야만 자유롭고 현대적인 정치활동을 능률적으로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세레체 카마는 1956년에 귀국하여 맹렬히 정치활동을 전개하여 1965년에 민주당을 창당하고 <베츠아날랜드 보호령>의 국무총리가 됐다.

그리고 세레체 카마 국무총리는 보츠와나 민중의 절대 지지를 획득하여 영국과 합의하여 독립국을 창설했으며 1966년에 대통령이 되여 츠와나의 독립을 선포했다. 세레체 카마 대통령은 츠와나를 <보츠와나 공화국>이라고 국명을 새로 정하고 공포했다.


1813년에 영국의 런던선교회가 츠와나에 처음 출현한 때와 그리고 영국과 보어인들의 침략을 받은 때부터 152년만에 추와나의 혈통적 추장상속자 세레체 카마에 의하여 <보츠와나 공화국>이 창건되어 자유와 해방, 독립을 쟁취했던 것이다.


3. 보츠와나 공화국의 어재와 오늘


세레체 카마 대통령이 창건한 <보츠와나 공화국>은 창건의 과정과 그 배후관계에 있어서 친 영국 친 서방 국가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건국 초기를 지나 1970년대에 들어서서 세레체 카마 대통령은 점진적으로 정치노선을 민족주의에 입각한 온정적인 민주주의 노선을 따르면서 이웃 나라들의 식민지해방독립운동에 도움을 제공함으로써 공동연대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특히 1980년 3월에 짐바브웨 독립 성취에 있어서 카마 대통령의 배후지원은 확고했으며 또한 그의 지휘 하에서 <남아프리카발전 협력회의>가 창설되었다.


카마 대통령은 냉철한 지성인이었지만 한편 깊은 통찰력과 온정에 넘친 친화적 정의감이 풍부한 지도자였다. 카마 대통령의 외교정책도 점진적으로 넓어졌다.


세레체 카마 대통령의 외교 노선을 중도, 독립적이었다고 평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카마 대통령은 1973년에 소련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뿐만 아니라 대만과의 관계를 폐쇄하고 1974년 12월에 중공과 광범위한 국교를 수립했다.


특히 세레체 카마 대통령은 1974년 11월 27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리고 1977년에 카마 대통령은 쿠바와의 국교수립을 체결했다.


그럼으로 세레체 카마 대통령이 1966년에 <보츠와나 공화국>을 처음 창건한 건국 초기에는 할 수 없이 친 영국 정치노선 통치하는 듯 했지만 사실은 그 후 점차로 친 서방 노선에서 탈피하여 비동맹 외교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세레체 카마 대통령은 1921년 7월 1일 추장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추장의 혈통적 세습전통 때문만이 아니라 1965에 카마 자신이 직접 창건한 보츠와나 민주당을 통한 민주적 선거에 의하여 대통령이 됐다.


세레체 카마 대통령의 이름 <세레체>는 <진흙>이란 뜻인데 그의 사상과 역할은 보츠와나 민중을 <진흙>처럼 하나로 뭉치게 하였고 또 남아프리카의 이웃 여러 국가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의 영국인 아내 Ruth는 이혼을 강요하는 외부의 압력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카마 대통령의 정치적 성공을 위하여 아내로서 헌신봉사를 했으며 카마 대통령이 당료병과 심장병으로 투병할 때 정성을 다해 치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세레체 카마 대통령은 1980년 7월 13일에 사망했다.


보츠와나 정부는 세레체 카마 대통령의 생일 7월 1일을 국가 경축일로 제정했다. 카마 대통령의 후임으로 1980년 7월18일에 퀘트 마시레가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마시레 대통령은 1925년 7월 23일 생으로 중학교 교사와 교장으로 봉직한 교육가였다.


1962년에 세레체 카마 대통령이 <보츠와나 민주당>을 처음 창당할 때 퀘트 마시레는 공동 창당자로 활약했으며 세레체 카마가 대통령에 취임할 때 퀘트 마시레는 부통령이 되었다.


퀘트 마시레 대통령은 전임자 세레체 카마 대통령의 통치이념을 그대로 계승하여 민주적으로 비 인종차별적 평등사회를 형성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퀘트 마시레 대통령은 대통령선거법 5년 임기, 2선까지 허용하는 새 헌법을 친히 자신이 제정하고 그 선거법에 의거하여 자기 자신이 1998에 대통령직에서 평화적으로 물러났다.


퀘트 마시레 대통령이 집권 18년 간에 공헌한 그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선 카마 대통령이 백인 여성과의 결혼을 함으로써 남아프리카 전체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퀘트 마시레는 침묵적이지만 행동으로 카마의 결혼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고 한다.


마시레 대통령은 어려운 문제의 해결자 역할을 수행했는데 보츠와나의 부족 전통주의와 현대적 민주화 운동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문제를 원만하게 조화시켜 보츠와나의 사회적 변화를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는데 크게 성공한 통치자로 알려졌다.


영국 정부까지도 마시레 대통령의 통치력의 우월성을 인정하여 엘리자벧 여왕은 퀘트 마시레 대통령에게 영국의 나이트 작위를 수여했다.


특히 그 당시 남아공에서 영국의 흑백분리제도에 반대하여 영국에 항거하는 투쟁이 맹렬히 벌어져 영국정부의 박해와 체포를 피하여 보츠와나에 피신하고 있는 남아공의 흑백분리 정책을 반대하는 투사들이 많이 있었다. 퀘트 마시레 대통령은 그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해 주면서 관대했다고 한다.


퀘트 마시레 대통령이 1998년에 대통령직에서 퇴임했다.


보츠와나 공화국의 제 3대 대통령으로 페스투스 모가에가 취임을 했다. 페스투스 모가에 대통령은 1939년 8월 21일 생으로 역시 집권당인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 당선되어 1998년 4월 1일에 보츠와나의 3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페스투스 모가에 대통령은 영국에 유학하여 옥스포드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

여 우등생으로 졸업하였으며 또 석세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페스투스 모가에 대통령은 세레체 카마 대통령이 창당한 <보츠와나 민주당> 청년당원으로 활약했으며 정부의 경제개발 분야 중요한 요직에서 두루 봉직한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1971-1976년에 경제개발원의 요직을 거쳐 상임 경제개발원 원장이 되었다.


페스투스 모가에 대통령은 2004년에 재선되어 2008년까지 10년간 집권을 했다.

페스투스 모가에 대통령은 임기를 1년 7개월이나 앞두고 자신의 공약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10년 동안 집권하는 기간을 마무리하고 자진 퇴임을 했다.


대통령의 임기를 1년 7개월이나 앞두고 평화적으로 자진퇴임을 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보츠와나 공화국은 남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 중에서 제일 안정된 국가로 평가되고 있었다.


특별히 초대 대통령 세레체 카마 대통령의 평생의 숙원이었던 다양한 부족들 간의 상생의 사회를 건설하는 꿈이 페스투스 모가에 대통령의 집권기간 10년 동안에 성취됐다.


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의 모든 나라에서 정치적 소요와 불안과 폭동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지만 보츠와나 공화국은 페스투스 모가에 대통의 통치 아래 분쟁과 소요가 전혀 없는 평온을 유지했고 모가에 대통령도 통치한 후에 평화롭게 자진 퇴임을 했다.


페스투스 모가에 대통령은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으로부터 모범적인 지도자에게만 수여하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페스투스 모가에 대통령은 아프리카의 희망을 품는 <이브라힘 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10년간 총 500만 달러를 받으며 10년 후에는 평생 동안 매년 20만 달러를 받는 큰 상이다.


노벨평화상의 상금의 네 배가되는 이 <이브라힘 상>은 아프리카의 어느 한 사업가가 제정한 희망을 상징하는 상인데 그는 이 상을 만든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프리카를 망치는 것은 사대주의와 부정부패이다. 아프리카는 더 이상 남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면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이 단 $1의 뇌물도 주고받지 않는 결백하고 유능하며 참된 자주적 자도자들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이브라힘 상>의 제 1차 수상자는 요아킴 휘사노 전 모잠비크 대통령이다. 그리고 제2차 수상자는 2008년에 보츠와나의 페스투스 모가에 대통령이다.


페스투스 모가에 대통령의 <이브라힘 상>을 수상할 때 축하하여 코피 아난 전 UN 사무총장은 다음과 같이 축하의 연설을 했다.


<페스투스 모가에 대통령의 탁월한 양심적 지도력은 아프리카 모든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위한 희망의 표상이며 또 모든 질병을 퇴치하는데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나는 보츠와나의 안전과 무한한 번영을 확신한다.>


2002년에 그 당시 중국의 장택민 국가주석은 미국의 이락침공을 맹렬히 비난했는데 역시 페스쿠스 모가에 대통령도 코피 아난 UN 사무총장과 중동문제에 관한 회담 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맹렬히 비난했다.


2003년 11월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박근광 대사는 보츠와나 페스투스 모가에 대통령에게 공화국 대사 임명장을 제출했다.


페스투스 모가에 대통령이 2008년에 퇴임하여 그의 후임자로 등장한 보츠와나 제4대 이언 카마 대통령이 취임했다. 이언 카마 대통령은 매우 특이한 인물이다. 이언 카마 대통령은 1953년 2월 27일 생으로 <보츠와나 공화국>을 창건한 초대 대통령 세레체 카마 대통령의 첫 번째 아들이다.


물론 이언 카마 대통의 어머니는 영국인 백인 여성 Ruth William이다. 이언 카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흑백결혼 문제로 인하여 영국으로 추방당해 있을 때 영국에서 태어났다.


이언 카마의 아버지인 세레체 카마 초대 통령이 창당한 <보츠와나 민주당, BDP>은 창당 후 43년 동안 여전히 집권 여당으로 건재하고 있으며 이언 카마도 역시 <보츠와나 민주당>의 소속된 후보자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언 카마 대통령은 보츠와나 방위군 사령관 출신이며 1999년 10월에는 <보츠와나 민주당>의 총선에서 승리하여 부통령이 됐다.


이언 카마는 부통령으로 있다가 2008년 4월 1일에 페스투스 모가에 대통령의 후임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다.


정치 분석가들은 이언 카마 대통령의 등장에 대하여 아버지의 통치이념을 계승할 것이며 또한 전임자 페스투스 모가에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그대로 이어 받아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분석했다.


2008년 4월 1일에 집권을 시작하여 2011년 5월 현재에 있어서 이언 카마 대통령의 집권 3년이 지났는데 그 동안 그의 집권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가?


이언 카마 대통령은 Swaziland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영국의 군관학교에서 비행기 조종사 면허증을 받은 pilot이다. 그는 가끔 자신이 조정하는 비행기로 대통령 업무를 수행한다고 한다.


이언 카마 대통령은 57세의 노총각인데 어느 날 집권 민주당의 회의에 참석하여 말하기를 “나는 이제 결혼할 준비가 됐다”라고 말을 했는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말이 “뚱뚱한 여자는 안 되고 키는 큰 편이 좋다” 라고 발언한 것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와 같은 카마 대통령의 발언에 대하여 일부 여성인권 운동단체에서 대통령의 발언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항의하는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이언 카마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 제일 첫 사업으로 실행한 강력한 조치는 alcohol, 술에 대한 70% 세금을 부과하는 새 법안이었다. 하지만 주류업자들의 거센 반발과 술 애호가들의 항의에 못 이겨 카마 대통령은 술에 대한 30% 세금으로 타헙했다.


이언 카마 대통령은 보츠와나의 사회에 서방의 퇴폐적 자유물결이 침투하여 들어오는 것을 우려하여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보다 강력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카마 대통령은 <국내안전관리국, DIS>을 새로 창설했다.


이언 카마 대통령은 경찰과 군부에만 의존하는 부족한 면을 보충하기 위하여 새로운 통치수단으로 보다 강력한 집행기구를 신설했다.


한편 이언 카마 대통령은 현재 아프리카에 만연하고 있는 친미 독재정권과 독재자들에 대하여 확고한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대하여 명성을 회득하고 있다.


특히 이언 카마 대통령은 탄자니아의 자카야 키크퀘테 대통령과 그리고 잠비아의 레비 음와나와사 대통령과 함께 연대하여 반미 반제국주의와 자주자립 정책노선을 채택하는데 있어서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보츠와나의 주요산업인 다이아몬드의 제작기술과정을 지금까지 전적으로 외국에 의존하고 이었는데 이언 카마 대통령은 모든 제작과정을 보츠와나인의 손으로 제작하도록 하여 실업자들의 고용창출에 성공을 거두고 있다.


또한 보츠와나가 가지고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광대한 자연보호구역 안에 있는 진기하고 희귀한 동물들을 전 세계에 공개하여 관광객을 유치할 계회도 밝혔다.


하지만 이언 카마 신임 대통령의 새로운 많은 정책에 대하여 어려운 문제점을 제기하는 반대 세력도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중에 제일 큰 문제는 건국의 버지 세레체 카마 대통령이 창건한 <보츠와나 민주당>이 47년 동안 유일한 집권당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카마 대통령은 츠와나 부족의 혈통적 후계자 신분으로 대통령이 됐지만 정당정치제로 보면 유일한 일당 독재체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 쉬운 처지에 있었다.


그렇지 안아도 이언 대통령이 새로 창건한 <국내안전 관리국, DIS>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것은 마치 미국의 FBI가 아닌가 하고 비방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보츠와나 민주당>의 47년 동안 집권당이 되고 있는데 대하여 헌법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들려오고 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과 이전 종주국이었던 영국은 이언 카마 대통령이 통치하고 있는 보츠와나 공화국이 하루 속히 반정부 세력에 의하여 붕괴되어 이른바 친미 자유주의 국가가 새로 설립되기를 꿈꾸면서 CIA 는 공작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어쨌든 이언 카마 대통령은 츠와나 족의 가장 강력한 비만와토 부족의 혈통적 추장이며 또한 다른 한편으로 영국인 백인 여성을 어머니로 하고 있는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로서 보츠와나 공화국의 제4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다.


지금까지 이언 카마 대통령의 3년간의 초기 집권능력으로 보아 제아무리 외부에서 영미 제국주의 세력들이 재침략을 노리고 있다고 한들 <보츠와나 공화국>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튼튼한 자주자립 나라로 계속하여 성장해 나아갈 것으로 확신한다.


특히 아마도 영국은 대영제국주의 시절의 향수심으로 보츠와나 다이아몬드 생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겠지만 오늘의 보츠와나 공화국은 일찌감치 기존의 전통 관념과 현대적 사고방식이 하등의 충돌 없이 공존하고 있는 성숙한 공화국이다.


서구문명의 백인이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시선에 또 다른 변화를 안겨주는 보츠와나의 전형적 모습을 필자는 매우 만족스럽게 여긴다. (끝) (5/15일/11/ 유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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