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66] 사회주의로 가던 <잠비아>와 그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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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1-05-01 19:26 조회2,76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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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66번째 나라로 아프리카의 <잠비아>를 소개했다. 아프리카에서
사회주의로 가던 잠비아, 그 미래가 궁금하다. 진보의 나라를 건설하여 사회주의 잠비아를 건국한 아버지로
카운다 대통령이 등장하였다. 그후 역사가 여의치 못했으나 그의 집권시기에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외무장관을
역임했고, 주미 잠비아 대사를 지내기도 했던 루피아 반다 대통령이 집권함으로써 또다시 진보의 바람이 불것으로
전망되고 있는 나라가 오늘의 <잠비아>이다. 우선 <잠비아>의 자연조건과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려고 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사회주의로 가던 잠비아, 그 미래가 궁금하다. 진보의 나라를 건설하여 사회주의 잠비아를 건국한 아버지로
카운다 대통령이 등장하였다. 그후 역사가 여의치 못했으나 그의 집권시기에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외무장관을
역임했고, 주미 잠비아 대사를 지내기도 했던 루피아 반다 대통령이 집권함으로써 또다시 진보의 바람이 불것으로
전망되고 있는 나라가 오늘의 <잠비아>이다. 우선 <잠비아>의 자연조건과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려고 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66] 사회주의로 가던 <잠비아>와 그 현주소 아프리카 기독교 선교사들 발자취는 곧 침략의 고속도로 <##IMAGE##>아프리카에서 사회주의로 가던 잠비아, 그 현주소는 어디인가. 진보의 나라를 건설하여 사회주의 잠비아를 건국한 아버지로 카운다 대통령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집권 이후 역사가 여의치 못했으나 그의 집권시기에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외무장관을 역임했고, 주미 잠비아 대사를 지내기도 했던 루피아 반다 대통령이 집권함으로써 또다시 진보의 바람이 불것으로 전망되고 있는 나라가 오늘의 <잠비아>이다. 우선 <잠비아>의 자연조건과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려고 한다. 잠비아에는 세계 3대 폭포중의 하나인 <모시오아 투니아> 폭포가 있다. 미국과 카나다 사이에 나이아가라 폭포가 있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에는 이구아수 폭포가 있는것 처럼 잠비아와 짐바브웨 사이에 <모시오아 투니아> 폭포가 있다. <모시오아 투니아> 폭포의 이름의 뜻은 잠비아 언어로 <천둥치는 연기>라는 뜻 이다. 폭포의 특성과 아름다움에 따라 “무지개 폭포” “말발굽 폭포” ”안락의자 폭포”등 여러가지 특이한 별명이 있는데 다양한 광채와 기묘한 형태들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와같이 <청둥치는 연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모시오아 투니아> 폭포의 자연적 이름이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빅토리아 폭포>라고 하는 외래어의 영어로 사람의 이름이 붙여졌을까? 그 원인은 1855년에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잠배지강을 탐험하던 영국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모시오아 투니아> 폭포를 처음 발견하고 1857년에 영국 으로 돌아가 영국 여왕에게 잠비아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폭포를 보고하면서 폭포의 이름을 영국 여왕의 이름인 빅토리아를 따라서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했다고 보고를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국의 탐험가 스파크는 1862년에 그가 처음 발견한 <니안자 호수>를 역시 <빅토리아 호수>라고 이름을 붙였다. 아프리카 인들은 자연현상이나 자연의 지형을 따라서 그대로 고유 명사로 불렀다. 이 얼마나 소박하고 아름다운 이름들 인가? 그런데 유럽의 탐험가들과 선교사들은 아프리카의 자연적인 아름다운 고유명사에서 자연을빼고 엉뚱하게 권력자들의 이름을 붙여서 영국식으로 지명을 제멋대로 고처 불렀던 것이다. 1855년에 리빙스턴이 처음 보았던 <모시오아 투니아> 폭포는 지금도 옛날 모습 처럼 <천둥치는 연기>의 위력을 조금도 변함없이 그 모습을 그 대로 웅장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리빙스턴 선교사의 잠비아 탐험과 선교여행에 있어서 그의 목적과 잠재의식 속에 깊이 뿌리 밖혀 있는 욕망은 잠비아의 흑인에 대한 멸시와 지배욕이 숨어 있을뿐 참된 인간애와 정의감은 가히 찾아볼 수 없었다. 이와같은 영국 백인들의 우월감을 불식시키고 그들의 침략적 야욕을 청산하지 않이 하고서는 절대로 잠비아 민중들에게 자립정신과 기독교의 신앙적 자력갱생의길을 깨우쳐 줄 수가 없었다. 어쨋던 리빙스턴의 탐험의 길과 선교사의 발자국이 제일 먼저 잠비아에 남겨졌다. 제일 처음으로 리빙스턴 선교사의 발자국이 남겨져 있기 때문에 그 역사성으로인하여 잠비아는 독립당시에 잠비아 헌법에 “우리 국민은 잠비아 공회국을 기독교 국가로 선언한다” 라고 기록되여 있다. 잠비아 국민의 75%가 전통적으로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국민의 75%가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잠비아는 사회적으로 도덕의 타락과 무질서가 극에 달하고 있다. 특히 성윤리의 타락으로 국민의 20% 이상이 AIDS에 감염되여 있으며 가난과 질병으로 인하여 국민의 평균 수명이 40세도 안된는 것이 오늘의 잠비아의 현실이다. 잠비아가 서구인들의 침략을 받기전 옛날에는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 부유국으로 세계 최고의 구리 보유국 이며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잠비아의 실패의 근본적 원인은 외국자본의 왜곡된 착취제도와 그리고 외세를 의존하는 무능한 개방정책으로인하여 감당할 수 없는 외채에 시달리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잠비아의 고대역사에 의하면 호모 사피앤스의 등장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10만년전에 인간이 거주한 증거물들을 발견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잠비아의 조상들이 이곳으로 이동하여 거주한 역사는 AD 1000년경에 아루이족이 북쪽에서 이동해와서 바로체왕국을 건설했으며 그후 도시국가들이 점차 넓은 지역에 퍼져 건설하고 있었다. 14세기와 16세기 사이 반투족이 오늘날의 콩고에서 이주해와 잠비아의 동부와 남동부에 왕국을 세웠다. 18세기에는 인도양 해한에서 부터 통로를 개척하여 아랍의 노예상들이 동아프리카 내륙으로 깊이 침입해 들어왔다. 그런데 아랍인들이 개척해 놓은 노예무역 통로를 이용하여 유럽의 백인 포루투갈의 탐험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동아프리카에 상육한 최초의 유럽인들 이었다. 포루투갈을 선두로하여 영국과 유럽열강들의 동남아프리카에 대한 식민지 쟁탈전과 노예무역이 경쟁적으로 성행하고 있었다. 1800년대 초에 줄루왕국이 번성하여 이웃나라들을 남쪽으로 몰아냈으며 마카롤로족, 로지족등이 잠비아 땅을 장악하고 있었다. 1850년에 영국의 탐험가 데이빗 리빙스턴이 기독교 선교사로서 유럽문명을 과시하면서 아프리카 남부의 내륙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이용하여 잠배지강을 따라 상류로 여행을 계속하여 짐바부웨와 잠비아에 이르러 저 유명한 폭포 <모시오아 투니아> 폭포를 발견하게 됬다. 리빙스턴의 탐험으로 인하여 많은 선교사들이 집단으로 이지역에 오게됬으며 그후에 차례차례 구리와 금등 광석채굴자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기 시작했다. 1855년경에 이르러서 남아프라카 전역은 임이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노예무역의 쟁탈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는데 잠비아에 대한 영국의 독점권을 프랑스는 인정하고 있었으며 1889년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협정을 맺고 양국 신민지에 대한 경계선을 설정했다. 1889년에 영국의 사업가 C.J. 로즈가 <남아프리카 회사, BSAC>를 창설하여 지금의 짐바브웨를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로즈는 계속 북상하여 잠비아에 이르렀다. 잠비아인들은 영국인 사업가인 로지 회사의 지배를 받으면서 노동의 착취를 당하는 불행한 위치에 놓여져 있었다. 1911년에 영국은 잠비아의 나라 이름마저 없이하고 <북부 로데시아>라고 불렀는데 <로데시아>라는 명칭은 영국인 사업가 C.J. 로즈의 이름에서 부터 유래된 명칭이다. 잠비아는 <북로데시아>라 불렀고 짐바브웨는 <남로데시아>로 각각 호칭되고 있었다. 영국의 <남아프리카 회사>는 북로데시아에서 막대하게 많은 구리광석을 발견하고 대규모의 채굴작업에 착수하여 현지 잠비아인들을 노동자로 고용했다. 하지만임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안었다. 영국의 식민정책은 노동력을 더 많이 획득하기 위하여 말라위까지 침략하였다. 그리하여 <남로데시아,짐바브웨> <복로데시아, 잠비아> 그리고 <말라위> 3 개 나라를 하나로 묶어 연방제를 결성했으며 중아프리카 심의회를 거쳐 1953년에 <로데시아 연방>의 새로운 창설을 법적으 확정했다. 영국은 <로데시아 연방>을 창설하여 통화, 철도, 항공사업, 댐건설등 다양한 공동 사업을 추진하여 3 나라를 하나로 묶어 놓고 영국의 이권과 통치력을 보다 더 강화하여 대영제국의 마지막 위세를 과시하면서 발광하고 있었다. 하지만 24시간 태양이 지지않는다고 과시하던 대영제국이였지만 아프리카에서 영국을 향하여 석양빛이 서서히 빛쳐오기 시작했다. 사실은 3개 나라가 하나로 묶겨져서 영국의 최대의 이익을 위하여 <로데시아 연방>이 창설된 후에 3개의 나라들은 영국을 향하여 서서히 반기를 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1958년에 잠비아에서 케네스 카운다가 제일 먼저 <잠비아 아프리카 민족회의, ZANC>를 결성하였다. 카운다는 영국의 꼭두각시인 <로데시아 연방>을 반대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영국 백인들의 교활한 착취수단이다 라고 역설했다. 케네스 카운다는 영국에 의하여 투옥됬고 카운다가 창설한 <잠비아 아프리카민족회의, ZANC>는 얼마동안 해산됐다. 하지만 1960년에 케네스 카운다는 출옥하여 <잠비아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위원장으로 다시 취임했다. 케네스 카운다의 독립운동은 잠비아의 독립만을 위한 운동뿐만 아니라 <로데시아 연방> 자체를 해체시키고 3개 이웃 나라들도 함께 독립을 쟁취하도록 하는 넒은 의미의 독립운동 이었다. 1963년 12월에 드디어 <로데시아 연방>은 해체되였으며 <북로데시아>는 본래의 국명인 <잠비아>로 다시 회복되였다. 잠비아를 비롯하여 짐브웨와 말라위도 역시 뒤를 이어 각각 독립을 획득했다. 1855년에 리빙스턴 선교사를 선발대로한 영국의 침략자들이 잠비아를 침략하여구리와 광석등 지하자원을 탈취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108년 만에 잠비아는 해방과 독립을 쟁취했던 것이다. 케네스 카운다 대통령은 1924년 4월 28일생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식민지 잠비아에서 교사들 이였다. 카운다는 교육가의 가정에 태어 났는데 특히 어머니는 잠비아에서 여성으로 최초의 교사이었다고 한다. 카운다도 역시 교사로서 사회생활에 진출했다. 하지만 카운다는 그후 1949년 에 교사직을 떠나 영국인 북로디지아 의회의 의원인 브라운경의 통역관 겸 아프리카문제 자문관으로 일 했다. 카운다는 영국인과 가까워지는 그의 직업을 통하여 친영국인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반영국인이 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됬다. 1951년에 카운다는 <아프리카 민족회의, ANC>에 가담하여 한때 사무국장을 지냈다. ANC는 아프리카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된 남아프카의 조직체 이었다. 1958년에 카운다는 ANC를 발전적으로 조직규합을 통하여 <잠비아 아프리카 민족의회, ZANC>를 신설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한후 잠비아의 독립을 위하여 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약했다. 카우다는 2년간 감옥살이도 했다. 카운다의 독립운동 방식은 비폭력운동이며 우선 두가지를 성취했다. 첫째는 연방제 볍률을 일부 수정하는데 영국이 할 수 없이 동의를 했다. 둘째는 감옥에 수감중인 잠비아 애국 독립투사들의 석방을 위하여 투쟁을 했는데 그들의 석방이 실현되였다. 석방된 독립투사들은 영웅으로 민중의 환호를 받았다. 1960년 6월에 카운다는 <통일국가독립당, UNIP>를 새로 창당하여 30만명의 당원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영국은 1960년 12월에 카운다를 런던으로 초대했다. 영국은 카운다를 초쳥하여 3개국을 묶어 결성한 <로데시아 연방>을 해체하는 문제에 대하여 토의를 했다. 드디어 영국은 1961년초에 우선 잠비아의 독립만을 시인하는 선언을 했다. 하지만 영국은 그당시 잠비아에 거주하고 있는 7만 7000명의 영국계 백인들의 처우문제를 들고 나와 잠비아의 독립을 지연시키려 했으며 카운다와 UNIP가 제시하는 타협안에 대하여 우유부단하고 모호한 태도만 취하고 있었다. 1962년 10월에 영국과 잠비아는 최종적으로 독립의 가부를 묻는 선거를 실시할것을 합의 했다. 영국은 7만 7000명의 백인들과, 1만 1000명의 아사아인들을 총동원하여 투표로 독립을 반대하고 독립운동을 지연시키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카운다의 UNIP가 넉넉하게 과반수를 획득하여 잠비아의 독립이 투표로 결정되었다. 1964년에 영국이 설립한 <로데시아 연방>은 완전히 해체되여 아프리카에서 영원히 살아져 없어졌으며 잠비아는 1964년 10월 24일에 국명을 <잠비아공화국>이라고 부르면서 독립국이 된것을 선포했으며 카운다는 대통령으로 취임 했다. 잠비아의 초대 대통령이 된 카운다 대통령은 막스주의와 아프리카인의 전통적인 가치관인 “휴머니즘’을 혼합한 정치철학에 기초하여 <잠비아 사회주의국가>를 창설했다. 뿐만 아나라 카운다 대통령의 통치 형태는 기도교적인 인도주의적 통치이념을 본받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많은 이웃 나라들의 독립운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잠비아는 한때 주변의 모잠비크, 앙골라, 나미비아, 짐바브웨등에서 망명한 독립운동지도자들을 너그럽게 수용하여 그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그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까지 해 줌으로서 잠비아는 경제의 부담을 입을 정도였다고 한다. 독립후의 잠비아의 경제적 타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영국은 잠비아의 독립에 대한 보복으로 대부분의 돈을 잠비아에서 빼내여 남부 로데시아 쏟아 부었다. 이와같은 영국의 경제적 봉쇄와 보복정책은 1990년대 까지 줄곧 계속됬다. 설상가상으로 잠비아의 유일한 재원인 구리가격의 하락이 가속화되면서 1980-1990년에 이르는 사이에 잠비아의 국가경제는 최악의 상태로 빠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영국의 책동이였으며 또한 미국이 뒤에 버티고 있는 정책이였다.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냉전체제를 총관리하고 있는 미국의 검은 손은 잠비아에서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전지역에서 적극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1964년에 잠비아의 대통령이 된 카운다 대통령은 인도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를 기본정책으로 하고 <아프리카통일기구>에 가맹하여 반인종차별주의와 비동맹주의를 외교정책의 기초로 삼고 통치를 하고 있었다. 1969년에 카운다 대통령은 잠비아의 주요기간 사업인 구리와 동광업을 국유화 하였다. 1970년대에 구리 가격의 높은 수준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1973년에 카운다 대통령은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그가 창당한 <통일국민독립당>을 일당체제의 튼튼한 기반으로 확립하고 사회주의 통치이념을 확고하게 다졌다. 하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서 영국은 잠비아와 남로데시아 사이에 설정된 국경선을 완전히 봉쇄하고 페쇄하여 잠비아의 숨통인 교통수단을 완전히 차단 시켰다. 뿐만 아니라 영국은 잠비아가 남로데시아의 철도를 사용하는것 까지 금지시키기고 폐쇠하여 잠비아의 묵을 졸랐다. 또한 그때 석유파동과 구리등의 가격 폭락으로 인하여 잠비아 경제에 악재가 계속됬다. 또한 앙골라 내전으로 인하여 잠비아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벵겔라 철도의 운행마저 중지됬다. 잠비아의 대외 수출은 80-90%이상을 구리와 동에 의존하고 있는데 영국이 부과한 여러 가지 악조건으로 인하여 잠비아의 경제는 파탄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다. 잠비아는 국내의 문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동구권의 갑짝스러운 붕괴로 인하여 큰 영향 을 받게 됬다. 잠비아의 우익세력들은 미국의 부추김에 힘을 얻고 머리를 들고 나와 잠비아의 다당제민주주의 선거를 요구하며 부르짔는 소리가 점점 요란해 졌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은 1980년대초 부터 계속하여 IMF의 압력으로 잠비아를 협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와같은 수없이 많은 정치적 악조건에 처해 있으면서도 케네스 카운다 대통령의 대내와 대외 정치활동은 매우 용맹스러웠다. 카운다 대통령의 용맹스러운 정치적 황동에 대한 이야기들은 매우 감동적이며 놀라울뿐 이였다. 그의 놀라운 감동적인 정치적 활동중에서 중요한 몇개를 추려서 소개한다. ㄱ) 카운다 대통령은 아프리카통일기구의 의장으로서 <영국연방원칙선언문>을친히 작성하여 영국연방수뇌회에 제출했다. 그가 작성한 선언문의 내용은 영국이 남아프리카에 대하여 무기를 수출하는데 대한 항의문이였다. 이로 인하여 카운다 대통령은 영국이 뒤에서 부추기는 정치적 폭력사태를 많이 당하고 있었다. ㄴ) 카운다 대통령은 그당시 영국과 미국의 은행들이 아프리카에 제공한 200억 달러의 외채에 대하여 채무조정을 강행하겠다고 위협하는데 대하여 카운다 대통령은 서구문명국들을 향하여 거침 없이 폭언을 발언했다. <영국과 미국의 은행 들은 아프리카 국민들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이다>. 영국과 미국의 백인 경제체제는 아프리카에서 “피의 혁명”의 위험성을 증대시킴으로 언젠가 가서는 미국이 위기에 자처하게 될것이라고 경고 했다. ㄷ) 카운다는 대통령이 되기전 1957년에 감옥에 갖쳐 있다가 1960년에 출옥하여 독립은동을 전개했다. 그때 카운다는 주변에 있는 5개국의 연합를 결성하여 지역적 독립운동을 추진한 혁명적 독립운동가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ㄹ) 카운다 대통령은 <아프리카최고 대통령상>제도를 직접 창설했다. 제1회 수상자는 남아공의 주마 대통령이었다.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중에서 특이한 공헌을 세운 사람에게는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도 수여하는 아프리카 최고의 포상제도를 카운다 대통령이 처음 창설했다. ㅁ) 2007년 10월 20일에 남아공의 <국가유산위원회>는 나이 83세인 케네스 카 운다 전 잠비아 대통령에게 제2회 우분투상을 수여 했다. 제1회 우분투상은 넬손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에게 수여했다. 우분투상은 아프리카에서 인권운동에 공로가 큰 지도자들에게 수여하는 표상 제도 이다. 카운다 전 잠비아 대통령에게 퇴임한지 17년후에 우분투상을 왜 수여했을까? 그 이유는 카운다 대통령은 결백하고 강직한 사회주의적 국가통치철학을 시종 변함 없이 관철함으로서 아프리카 모든 나라들에게 인권운동에 사표가 되는 모범적인 아프리카의 위대한 사회주의 지도자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ㅂ) 케네스 카운다 대통령은 1980년 4월에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수령의 탄생을 축하하는 4월명절 행사에 동참했다. 그는 김일성 주석과 나란히 같이 연단에서 평양시환영회에 모인 평양시민을 향하여 열열한 연설을 했는데 반미제국주의투쟁에 있어서 두 나라는 굳건한 유대를 공유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뿐만 아니라 저녁 축하연회에서 카운다 대통령이 직접 지었다는 <김일성 만세>라는 시를 본인이 직접 읊음으로 아프리카 나라들 중에서 더욱 친근하고 우호적인 대통령으로 유명해 졌다. ㅅ) 카운다 대통령은 88서울 올림픽에 불참할 뜻을 밝혔다. 카운다 대통령은 88서울 올림릭에 불참하는 이유에 대하여 다은과 같이 말했다. <조선반도는 칼도마 위에 올라가 있는 잉어 한마리인데 서울 올림픽이라는 날카로운 칼 한 자루가 그 위에 내려드리운 것과 흡사하다>라고 하였다. 카운다 대통령은 북남의 분단이 영구화 되는 것을 염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카운다 대통령은 1969년 4월 12일에 조선인민공화국과 외교관계를 설정하고 대사급의 외교관교환협정에 조인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후 아프리카의 모든 나라들이 독립을 쟁취하면서 거의 모든신생국 나라들이 좌파노선을 선호하여 반영과 반미 사회주의 국가들을 창건했다. 잠비아도 예외가 아니였다. 카운다 대통령이 1964년 10월 24일에 잠비아공화국을 창건하여 아프리카의 전통적인 “휴머니즘”에 근거한 사회주의 국가를 창건 했다. 카운다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시종 영국과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에 항거하면서 악날한 경제적 봉쇄를 계속 당했다. 하지만 구사일생의 기회로 27년동안 사회주의를 포기하지 아니하고 정권을 이끌어 왔다. 영국과 미국이 제아무리 가진 수단과 방법으로 카운다 대통령 정권을 붕괴시키려했지만 영국과 미국은 사실상 력부족했다. 잠비아 민중들의 단결된 힘과 건국의 아버지 카운다 대통령의 진실된 품성에 대한 존경심은 1968년, 1973년, 1998년, 1983년 그리고 1988년에도 재선하여 27년동안 카운다 대통령이 잠비아 사회주의 국가를 철권통치를 하도록 지원했다. 하지만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카운다 대통령은 27년동안 통치한 사회주의 철권 통치를 포기할 것을 스스로 결의하고 1990년에 잠비아의 <사회주의국가헌법>을 수정할것을 수락했다. 카운다 대통령은 수정된 헌법에 의하여 <복수정당제민주주의선거>를 잠비아의 사회주의 국가 창건 이후에 처음으로 합법적으로 실시하도록 절차를 순수히 수용했다. 그리하여 잠비아는 결국 사회주의 헌법이 페지된 조건하에서 다당제 선거가 전국적으로 실시됬다. 다당제 선거에 노동운동의 지도자라고 자칭하는 프레더릭 칠루바가 유력한 후보자로 부상했다. 칠루바 후보자는 카운다 현직 대통령 재출마를하지 못하도록 봉쇄하는 선거법을 개정했다. 잠비아 역사상 처음 치려지는 다당제 대통령 선거에서 프리더릭 칠루바가 당선이 확정됬다. 카운다 대통령은 다당제 민주주의선거제도 하에서 당선된 프레데릭 칠루바에게 대통령으로 당선된것을 축하하면서 그에게 대통력직을 평화적으로 이양해 주고 기꺼히 조용하게 퇴임을 했다. 케네스 카운다 대퉁령이 퇴임을 스스로 결단한 이유가 무엇일가? 그의 나이는 아직 67세인데 스스로 퇴임을 결단한 것이 사실일가? 필자는 카운다 대통령이 잠비아의 사회주의 정권의 종지부를 찍고 스스로 퇴임을결단한데 대하여 보다 근원적인 이유와 원인을 고찰해 본다. 아프리카의 본래적 사회적 전통은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서구문명의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통치이념에 배치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아프리카의 사회적 전통에 의하면 확대된 가족제도하에서 토지의 공동소유, 친족의 공동노력등 공유하는 관습적 전통이 있다. 이와 같은 아프리카의 사회주의적 관습은 오늘의 침략적 자본주의 사회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하지만 문제는 아프리카의 사회주의적 관습이 국가적인 통치수단에 미치는 영향 이 정권의 형태나 경제체제를 강화하는 중요한 과제를 해결하는 제도적 대책에 있어서 턱없이 빈약한 것이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 대책을 세우는 제도적인 형태 에 있어서도 역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마다 제각기 상이하고 분산적인데 또한 문제가 있다. 아프리카에서 옛날 노예무역을 강행하던 서구열강들이 과거에 해왔던 것에 비해 오늘은 보다 더 악날하고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아프리카에서 착취정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프리카 나라들이 그저 단순히 <이제는 노예가 아니라 해방된 민족이며 독립국가를 건설했다>라고 하는 자부심만 가지고서는 절대로 충분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이락전쟁의 예를 들어 말해 보자. 미국은 사담 후세인이 대량 살상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몰아 쳤다. 하지만 사실은 미국이 사담 후세인에게 그런 무기가 없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이락이 대량살상 무기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미리 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미국은 가지고 있다고 몰아 쳤다. 사담 후세인이 대량 살상무기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미리 분명히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했던 것이다. 무슨말 인가 하면 미국은 <약자는 치고, 강자는 치지 못한다>는 말이다. 미국은 그 어느 나라이던 <핵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절대로 치지 않는다. 하지만 만일 이와 반대로 <핵무기> 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느 나라던지 필요하면 미국은 친다는 말이다. 미국이 어찌하여 리비아를 치고 있는가? 그것은 리비아가 가지고 있던 핵프로그람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만일 리비아가 핵프로그람을 그대로 지금까지 보유하고 있었드라면 미극이 분명히 리비라를 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잠비아의 카운다 대통령이 어찌하여 27년동안 이끌어 온 사회주의 통치의전통을 스스로 종결하고 퇴임을 했는가에 대한 대답이 확실해 졌다고 생각 된다. 사회주의의 기본 이념은 자기 스스로가 주체가 되여 자기를 해방시키는 해방운동이다. 자기를 해방시키려면 반드시 자기방어의 <힘>을 가져야만 가능하다. 어느 민족이든 자기민족을 스스로 해방시키기 위하여 다음 세가지는 필수이다. <주체적 자주문화> <주체적 자주경제> 그리고 <주체적 자주국방>이 필수적 이다. 자주적 억제력이 없는 나라는 제구주의 침략의 문을 열어 놓는것과 같다. 아프리카 모든 사회주의 나라들이 참된 자기 해방을 스스로 쟁취하기 위하여 반드시 <주체적 자주의 힘>을 소유함으로서 완전한 독립을 성취하기를 바란다. 카운다 대통령의 퇴진과 칠루바 신임 대통령의 등장에 대하여 서방언론들은 평화적인 정권교체라고 극구 찬양을 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날부터 잠비아는 영국의 재침략을 당하는 날이였으며 또 미국은 IMF를 통하여 잠비아에서 본격적으로 착취 사업을 시작하는 날이 되고 있었다. 1991년 11월 2일에 잠비아의 제2대 대통령에 취임한 칠루바 대통령은 1943년 4월 30일 생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외가집 할머니와 삼촌의 보호아래 성장했는데 그의 외가집은 가독교 가정임으로 칠루바는 어려서 부터 기독교인이 되고 있었다. 칠루바 대통령은 영국 Warwick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과정을 수료한것이 그의 교육의 전부이다. 칠루바는 잠비아 노동계급에 침입하여 노동자들을 선동하면서 카운다 대통령의 사회주의 정권을 파헤치고 반정부 운동과 다당제를 주장했다. 칠루바 대통령은 그의 취임과 동시에 즉시 IMF, 세계은행 그리고 미구의 민간투자들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국가의 모든 공기업들을 폐쇠하고 민영화 했는데 그의 집권 1-2년 사이에 광산을 비롯하여 140개 공기업들에게 무리하게 민영화 계획을 펄쳤다. 하지만 칠루바 대통령 집권후 4-5년이 지났지만 구리생산의 지속적 감소와 이로 인한 철도운영의 저하로 인하여 6,600명의 철도노동자가 4000명으로 감소했다. 칠루바 대통령은 외세에 눌려 구조조정을 강행했으나 남아프리카 나라들과의 무역 상황의 변화와 맞물리면서 무역과 생산은 더욱 더 감소됬다. 더욱이 잠비아의 심한 가뭄으로 농촌경제가 바닥났고 식량난이 전국적으로 퍼져지속되고 있었다. 1995년 7월에 파텔 상무장관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자료에 의하면 잠비아 전체 인구 950만명 가운데 550만명이 기아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보고 했다. 칠루바 대통령의 집권 3-4년이 지나도록 명확한 경제발전책과 농업정첵이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 정부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칠루바 대통령은 1995년 2월 9일에 각료와 의원 전원에게 48시간 내에 재산을 공개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무절제한 토지장관, 중앙은행장등을 경질하는 긴급조치를 취했다. 잠비아는 국민총생산, GNP의 40%에 달하는 막대한 외채이자를 줄이지 못하는한 잠비아의 경제회복은 거의 기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이와같이 칠루바 대통령이 집권을 시작한 후부터 잠비아의 사정이 비극적으로 변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잠비아의 기독교인들은 잠바아 국가 창건이래 최고의기독교 황금기라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한국의 조용기 목사는 칠루바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1995년에 잠비아에서 대중집회를 인도 했는데 연인원 10만명이 동원됬다. 조용기 목사는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은 잠비아를 반드시 부강한 나라가 되도록 축복하신다> 라고 설교를하여 10만 군중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칠루바 대통령은 조용기 목사를 그의 관저로 초청하여 조용기 목사의 축복기도를 받았으며 조목사에게 <잠비아에게 힘이 되는 성령의 불을 넣어주었다>라고 치하의 말을 했다. 뿐만 아나라 칠루바 대통령은 나라에 무슨 일이 셍기면 전국민을 향하여 방송으로 기도를 하면서 잠비아는 기독교 국가라는 발언을 여러번 했다고 한다. 칠루바 대통령은 <기독교신앙인의 걷모양>을 과시하여 통치수단으로 삼았다. 하지만 칠루바 대통령에 대한 쓴소리도 너무 많이 있다. 칠루바 대통령은 그의 부인과 1년동안 비밀로 별거생활을 하다가 결국 이혼을 했다고 한다. 한편 칠루바 대통령은 재임 10년동안에 수백만 달러의 공금을 횡령한 사실이 밝혀짐으로 면책특권이 박탈된 상태에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고 AFP 특파원이 보도했다. 1997년에 칠루바 대통령을 몰아내기 위한 쿠테타 시도가 있었는데 겨우 죽음을 모면했으며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수백명을 반역죄로 투옥시키고 집권을 했다. 건국의 아버지 카운다 대통령이 창건한 잠비아 사회주의 국가를 망치고 집권 10년 동안에 잠비아를 IMF채무국으로 만들어 놓은 칠루바 대통령은 2002년 1월 2 일에 민중의 증오속에서 퇴임을 당했다. 2002년 1월 2일에 잠비아의 제3대 대통령으로 레비 음와나와사가 취임했다. 음와나와사 대통령은 11명의 대통령후보자들과 치열한 경쟁속에서 겨우 당선되여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다. 하지만 그가 전임 칠루바 통령에게서 물려받은 잠비아는 국민의 75%가 하루에 1 달러 미만으로 죽지 않고 겨우 살아가는 상태이였다. 새로 취임한 음와나와사 대통령은 지금까지 정부가 국민의 빈곤에 대하여 무책한데 대하여 사죄하는 대국민 사과의 연설을 했다. 음와나와사 대통령은 1948년 9월 3일 생으로 법학을 전공하여 법학 박사 학위를 받고 변호사의 신분으로 정계에서 활약하다 부통령과 대통령이 됬다. 그의 정치적 특질은 변호사 출신답게 부정부패 척결에 공을 세웠으며 국가소득을 가난한 민중에게 우선 분배하는 정책에 주력하였다. 국제기구로 부터 많은 원조를 획득 했으며 외채의 탕감도 대량획득 하여 국가의 경제적 악몽에서 다소나마 버서나고 있었다. 그는 관광산업도 대폭 개선하고 확대시켜 국가의 경제성장율을 6%로 끌어 올리기도 했다. 음와나와사 대통령은 2006년 9월 28일에 재선되여 정권을 보다 더 강화하여 의욕적으로 집권 제 2기를 집권하고 있었다. 음와나와사 대통령은 서방의존 일변도에서 버서나 동양외교로 전환할 강한 의지도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2007년 2월에 중국 호금도 국가주석과 회담하여 두 나라의 친선협력의 전통을 되살릴 것을 굳게 약속했다. 호금도 주석은 잠비아의 빈곤퇴치 노력에 중국이 적극 지원할 것을 굳게 약속했다. 하지만 음와나와사 대통령에게 운명의 불행의 날이 닥아 왔다. 2008년 6월 28일에 그는 아프리카연합정상회의에 참석하여 이집트에 머물고 있었는데 갑작히 뇌경색을 이르켜 긴급 입원을 했다. 급히 프랑스로 옴겨서 구급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2008년 8월 19일에 사망했다. 그 당시 부통령으로 있던 루피아 반다가 대통령직을 대행했다. 그리고 그는 2008년 11월 2일에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됬다. 잠비아 제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루피아 반다 대통령은 1937년 2월 13일 생으로 스웨덴과 영국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직업으로 광산장비를 공급하는 일을 했다. 루피아 반다 대통령은 잠비아 사회주의 국가 건국의 아버지 카운다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정치가였다. 그는 카운다 대통령이 창설한 <잠비아 아프리카민족회의, ZANC>의 청년당원으로 활약했다. 카운다 대통령 정권하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다 외무장관을 역임 했으며, 주미 잠비아 대사를 지내기도 했다. 루피아 반다 대통령의 집권으로 인하여 잠비아 건국의 아버지 카운다 대통령의 사회주의 통치이념이 서서히 되살아 나는가 싶은 느낌을 강하게 느낀다. 필자는 카운다 대통령과 루피아 반다 대통령을 서로 연상하면서 신문기사 하나를 소개하면서 끝을 맺는다. 연합뉴스 2009년 10월 20일 기사를 소개한다. <중국은 잠비아에 대한 광산 개발 투자를 계속할 방침이다. 중국은 잠비아와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기때문에 이곳에 대한 투자를 지속할 것이다. 약 2억 달러가 투자된 구리 제련소는 중국정부 산하의 CNMC가 소유하고 있으며 600명이 넘는 고용창출과 연간 15만톤의 구리를 생산할 것이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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