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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65]탄자니아 사회주의국가 건국 아버지 니에레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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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1-04-20 21:11 조회3,79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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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65번째 "탄자니아의 본래의 국가명칭은 <탕가니카> 이었다.
그런데 1961년에 탕가니카는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을 쟁취했다. 또한 1963년에는 인도양 해안에 가까이
있는 섬 나라 <잔지바르>도 역시 영국으로 부터 독립을 쟁취 했다. 오랜 세월 동안 외세의 침략과 식민통치를
받아온 두 나라는 1964년 4월 26일에 <당가니카>와 <잔지바르>의 국가 통합을 이루었으며 <연합국가>를 수립했다."
는 [연재 65]번째글을 싣는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65] 탄자니아 사회주의 국가를 창건한

건국의 아버지 니에레레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제3세계 민중의 정신적 지표로 남아 있는 <우자마 사회주의>


<##IMAGE##>탄자니아의 본래의 국가명칭은 <탕가니카> 이었다. 그런데 1961년에 탕가니카는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을 쟁취했다. 또한 1963년에는 인도양 해안에 가까이 있는 섬 나라 <잔지바르>도 역시 영국으로 부터 독립을 쟁취 했다.

오랜 세월 동안 외세의 침략과 식민통치를 받아온 두 나라는 1964년 4월 26일에 <당가니카>와 <잔지바르>의 국가 통합을 이루었으며 <연합국가>를 수립했다.

통합된 연합국가의 국가 명칭은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이며 초대 대통령으로 줄리우수 니에레레가 취임을 했다. 두 나라의 통합과 연합공화국 수립에 있어서 결정적 역활과 정치적 위치에서 활약한 지도자는 물론 줄리우수 니에레레 이였다.

신생국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에서 탄자니아식 특이한 <우자마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신명을 바친 줄리우수 니에레레 대통령에 대하여 먼저 그의 인적사항을 알아 본다.

니에레레 대통령은 1922년생으로 자니카 부족의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간다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3년간 교사생활을 했으며, 장학금을 받아 영국에 유학하였다.

니에레레는 1954년에 귀국하여 <아프리카 국민연합>, 즉 <타누당, TANU>을 설립하여 영국으로부터 독립운동을 맹렬히 전개 했다. 영국에서 귀국하여 곧 <타누당>을 창설한 니에레레의 정치적 이념은 사회주의 농업경제 부흥에 있었으며 또한 120개의 많은 부족들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것이 그의 꿈였다.

두 나라를 합방하여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니에레레 대통령의 세계관과 그의 사회개발을 위한 기본적 주장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세계가 빈국과 부국, 빈자외 부자로 소외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강자들이 <세계는 하나다>라고 말하는것은 현실에 대한 기만이다. 탄자니아 사람들이일하고 먹는 권리를 강대국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상황이 계속되면 민족으로서의 자유와 평등과 권리를 보장 받을 수 없을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불의한 질서만이 계속 잉태되고 있다.

둘째, 오늘 세게에서 선진국의 개발은 선이고 저개발과 미개발은 악으로 규정하는 풍조에 대하여 니에레레 대통령은 항의적 질문을 던진다.

<개발과 발전이라는것이 인류의 삶의 의미와 행복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

니에레레 대통령은 탄자니아의 전통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가족애와 형제애로 굳게 유대하고 있는 삶의 전통을 매우 중요시하며 그 토대위에 탄자니아식 <우자마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신명을 다 바쳤다. <우자마>라는 말의 뜻은 우리말로 “가족애 혹은 동포애”의 뜻을 가지고 있다. 즉 동포애적 사회주의를 뜻한다.

셋째, 니에레레 대통령의 <우자마 사회주의>개념은 전통적 맑스주의 “계급투쟁”을 부정하고 <아프리카식 맑스주의>를 도입했다. 특히 니에레레 대통령은 중국의 <인민공사>를 모델로 한 우자마 마을을 조직하는데 심혈을 기우렸다.

한편 니에레레 대통령은 탄자니아의 전통적 혈연과 동포애를 중심으로 하는 절대평등과 상호부조의 원칙에 입각한 사회공동체 개념을 주장 했다.

니에레레 대통령은 대중의 착취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반대하며 또한 교조적 사회주의 역시 반대하였다. <우자마 사회주의>는 탄자니아에서 태여나서 자라난 가족단위를 확대해서 “사회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골간으로 두고 있다.

사회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위하여 3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1) 사회적-가족의 구성원은 위치와 권리를 서로 인정하며 그 어느 누구도 사회적-가족에 불명예 스런 언행을 하고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는 불문율이 있다. 2) 모든 소득은 공유로 균등하게 나누어 진다. 3) 사회-가족 성원들은 모두가 다 땀흘려 일을 해야한다.

위의 세가지 원칙하에서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은 “정치의 민주화” “산업의 국유화” “소득의 균등 분배” “국가경제 자립”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네째, 니에레레 대통령은 이른바 자유시장에 의하여 세계가 빈자와 부자, 빈국과 부국으로 양분하는 세계체제 하에서는 사회 구성원과 국가들 사이에 갈등과 반목이 증폭되는 상황이 전개될뿐 이라고 지적했다. 그럼으로 이런 상황을 반대하는 민중들의 지속적인 투쟁을 통해서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고 역설 했다.

가난한 나라의 대통령이된 니에레레의 정치철학은 핍박을 받고 있는 약소국들의 민중들을 위하여 일관된 신념과 오직 그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했던 과감한 행동에 있었다. 억압과 평화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음으로 오늘 세계에서 강대국들에 의하여 엄연히 현존하고 있는 억압구조를 영속화 시켜서는 않된다 라고 그는 크게 외쳤다.


1. 탄자니아의 간추린 역사


탄자니아는 코리아 반도의 약 4.3배가 되는 945,087km2 의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으며 인구는 약 4천 20만명으로 추산한다. 북쪽에는 케냐와 우간다가 인접해 있고, 서쪽에는 르완다, 부른디와 콩고 민주공화국이 있으며, 남쪽에는 잠비아, 말라위, 모잠비크등 여러 나라들이 인접해 있다.

탄자니아는 자연과 지리에 있어서 세계적인 명승지들이 가득차 있는 나라이다. 탄자니아의 특이한 명승지들을 간략하게 알아 본다.

ㄱ) 아프리카의 죄고봉인 킬리만자로 산 (5895m)에는 만년설이 있고 활화산과 분화구로 유명하다. ㄴ) 중부지방에 있는 광대한 평야가 있고 서부에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깊은 탕가니카 호수가 있는데 수심이 1,410m이다. ㄷ) 아프리카의3대 강인 나일 강, 콩고 강, 잠베지 강들의 발원지가 바로 탄자니아에서 시작된다.

ㄹ) 탄자니아의 국토 30%가 일명 미움보라는 원시적 산림지대 이다. 2만4천km2에 달하는 넒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에는 금렵구역이 있다. 이곳에는 세계적 으로 유명한 희귀한 수 천가지의 야생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야생동물을 보유하고 있는 가장 뛰어난 곳이 바로 탄자니아 이다.

탄자니아 협곡에서 180만년전의 것으로 보아는 화석인류 혼적이 발견되여 인류진화의 무대로 여겨지고 있다. BC 1000년경에 카프카스 인종의 사람들이 북부에서 남하하여 흐터져서 살았다. AD 1-1000년에 철기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반투어를 사용하는 종족들이 탄자니아에 정착하여 살았다.

1세기 말경에 아랍, 페루시아 세계와 동아프리카 해안지대 사이에 교역이 행해졌고 이 시기에 중국이 도자기가 전해 졌다고 한다. 잔지바르 섬에서 중국 당나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주전이 출토됬다고 한다.

8세기에 아랍인들이 이 지역에 이주하여 살고 있었는데 아랍어와 반투어가 함께 혼합된 합성어 스와힐리어가 공통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슬람교 문화와 스와힐리의 문화를 기조로한 사람들에 의하여 형성된 도시가 번영하고 있었다.

15세기에 이르러서 포르투갈 사람들이 동아프리카에 출현하기 시작하였으며 아랍인들과 세력 다툼이 점차 일어나고 있었다. 1503년에 포루투갈이 잔지바르 섬나라를 갈취하여 포루투갈의 보호령으로 삼았다.

하지만 18세기에 이르러서 아랍인들과 오만 술탄이 동맹을 형성하여 포루투갈인들이 갈취한 땅들을 다시 빼았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잔지바르 섬 나라는 오만의 보호령이 됬다. 그후 아랍의 무역상들은 노예무역을 위하여 탄자니아 남서쪽까지 깊숙히 진출하였으며 이들은 1840년대 초까지 상아무역의 교역소를 설치하기도 했으며 이 지역을 아랍인들이 지배하고 이었다.

그런데 1840년대 말기에 이르러서 탕가니와 잔지바르등 이 지역에 큰 변화가 발생헸다. 이 지역이 서구 유럽 강대국들의 침략지로 변화고 있었다. 탕가니카는 독일이 침략하였고 잔지바르 섬 나라는 영국이 침략을 했다.

탕가니카는 독일의 식민지로 1916년 까지 약 70년동안 지배하에 있었는 제 1차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한 후에 이번에는 영국이 1919년에 탕가니카를 또 다시침략을 했다.

영국은 1919년 부터 1961년 까지 42년 동안 탕가나카를 식민통치를 했다. 한편 영국은 잔지바르 섬 나라를 1840년대 말에 침략하여 1963년까지 약 110년 동안 식민통치를 하고 있었다.


2. 탄자니아 연합공화국 창건과 그 후의 역사


1961년에 영국에서 독립한 탕가니카와 1963년에 역시 영국에서 독립한 두 나라는 같은 역사와 같은 운명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964년 4월 26일에 <탕가니카>와 <잔지바르> 두 국가는 하나의 국가로 합병하여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을 창건 했다. 1965년 9월 21일에 실시한 총선에서 니에레레가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여 취임을 했다.

1967년에 니에레레 대통령은 인종 평등주의와 자유사상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아류사 선언, Arusha>을 발표했다. 이 선언을 통하여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하여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도입했다. 뿐만 아니라 <우자마 사회주의> 제도를 창안하여 집단농장을 경영하여 농촌의 사회주의화를 목표로하는 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니에레레 대통령은 1975년에 탕가니아 <타누당,TANU>과 잔지바르의 당을 통합하여 신생국의 집권 여당으로서 <혁명당, CCM>을 창당하였으며 초대 당총재로 취임을 했다.

니에레레 대통령은 아프리카에서 최초로 식민지배의 언어인 영어와 불어를 철페하고 스와힐리어를 공용국어로 지정하고 학교교육에서 단일 국어로 정착시켰다.

<우자마 사회주의> 이념으로 통치하여 120개의 서로 다른 종족들을 국가통제하에서 하나로 묶음으로서 사회통합에 성공한 아프리카 유일의 국가가 됬다.

탄자니아가 1961년에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 할 당시 대학생이라곤 16명밖에 없었다. 탄자니아의 교육제도와 이념은 근본적으로 근로와 봉사로 교육과정을 준수하게 하였으며 특히 모든 대학생들에게는 방학 중 국가건설에 연결된 노동에 종사하도록 의무를 부과 했다.

니에레레 대통령이 주창하는 <아류사 선언>과 <우자마 사회주의>는 모든 사람들은 평등한 노동자이며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 했으며, 자본주의에 물드러서 제국주의를 선호하는 사람들을 정치권에서 완전히 배제시켰다.

니에레레 대통령은 이웃 나라 우간다의 친미독재자 이디 아민 대통령 몰아내기 위하여 우간다의 좌익 군대를 지원하여 우간다의 좌익혁명을 성공시켰다.

니에레레 대통령의 <우자마 사회주의>건설의 중요한 과제는 중국 공산당의 초기의 역사를 모델로 삼아 농촌 인구 2/3를 집단농장에 보내는 과업 이었다. 하지만 절대로 강제성이 없음으로 농민들의 자유선택을 허락하기도 했다.

모든 기업들은 국유화 되고 준국영기업들이 만들어 졌다. 소농들은 보다 많은 생산을 위하여 정부의 지시를 받아 드렸다. 빈부의 격차가 줄어 들었고 민중의 보건, 교육이 전 보다 향상됬으며 삶의 질의 균형이 점차 정착되고 었다.

니에레레 대통령의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의 창건과 그의 <우자마 사회주의> 정책의 우수성이 아프리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아 1974년에 <네루상>을 수상했다.

미국 뉴욕에 케네디 국제공항이 있는것 처럼 탄자니아에도 <니에레레 국제공항>이 있다. 아프리카 국가 중 몇안되는 정치적 안정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한 존경받느 지도자로 높이 평가돠고 있었다.

하지만 니에레레 대통령의 성공이 큰것 처럼 실패와 좌절도 역시 큰것 이었다. 니에레레 태통령은 1961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탕가니카의 건국의 아버지로서 대통령이 됬다. 그리고 1964년에는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하였으며 1985년까지 24년간 <우자마 사회주의>를 통치이념으로 삼고 시종일관 집권을 했다.

니에레레 대통령은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의 다양한 민족들의 국가통합을 크게 성공했으며 1979년에는 이웃 나라 우간다의 친미주의 독재자 이디 아민을 축출하는데 우간다의 좌익 군대를 도와줌으로 우간다 민중혁명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니에레레 대통령은 1985년에 자기 자신의 통치능력의 한계점을 스스로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후계자인 알리 음위니에게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고 평화적으로 정권교체를 선택하고 말았다.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니에레레는 퇴임 후에도 자신이 1954년에 창당한 집권당인 <아프리카 국민연합, 타누당>의 의장직을 계속하여 1995년 까지 맡고 있었다. 니에레레 대통령은 1999년에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런데 니에레레 대통령은 1985년에 자기자신의 통치능력의 한계점을 스스로 시인하고 권좌에서 평화적으로 물러났다.

그러면 그가 스스로 시인한 <통치능력의 한계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이 주장하는 <통치능력의 한계점>은 다음과 같다.

ㄱ) 니에레레 대통령의 모택동식 사회주의는 농부들을 강제로 집단농장으로 보냄으로서 농부들을 집단으로 굶주리게 했다고 비평했다.

하지만 영국, 프랑스. 미국은 니에레레 대통령의 <자력갱생의 정치적 이념>을 깡그리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악의적 비판만을 하고 있었다. 외세의 지배하에서 수세기를 살아 온 민중들을 갑짜기 다스리게 됬는데 니에레레 대통령이 중국식 집단농장제도를 하나의 모댈로 삼은 것은 당연한 처음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ㄴ) 니에레레 대통령은 모든 주요 생산수단을 국유화 함으로서 비능율적 부작용으로 국가 경제는 실패로 돌아 갔다고 영국, 프랑스, 미국은 맹열히 비판을 했다. 하지만 영국, 프랑스, 미국의 압력에 못이겨 모든 산업을 다 개방하고 자유화한 아프리카 나라들의 경제가 탄자니아의 사회생활 수준보다 더 훨신 못한 나라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ㄷ) 영국, 프랑스, 미국은 니에레레 대통령이 이웃 나라 우간다의 친미 독재정권 을 붕괴시킨데 대하여 큰 불만을 품고 있다. 니에레레 대통령이 자국 국민을 굶주리게 만들면서 우간다의 이미 아민 친미 독재정권을 붕괴시키는 전쟁 비용으로 총 5억 달러를 사용한데 대하여 영국, 프랑스. 미국은 일제히 맹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영국, 프랑스, 미국은 아프리카 여러 나리들에게 무기를 지원해 줌으로서 지역분쟁을 이르켜서 석유를 강탈해 가는 제국주의적 친략의 행포는 니에레레 대통령에 대한 비평을 함에 있어서 큰 이율배반적인 모순덩어리뿐 이였다.

사실에 있어서 니에레레 대통령이 스스로 <통치능력의 한계점>을 시인하고 대통령직을 사임한 이유와 그 배경에 대한 영국,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설명은 부당한 외곡된 설명뿐 이다.

그러면 니에레레 대통령이 <통치능력의 한계점>을 스스로 시인하고 대통령직을 사임한 참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의 정치적 배경에 대하여 필자는 중요한 요점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ㄱ) 제 2차 세계대전 종식후 유럽의 엣 종주국들과 미국이 합작한 냉전체제는 새로운 아프리카 신생국들에 대한 대책이 보다 더 시급했다. 냉전체제 강화에 있어서 니에레레 대통령의 사회주의 정권에 대하여 사사건건 마다 감시와 봉쇠를 하여 정치적 진로를 완전히 파괴하고 있었다.

ㄴ) 니에레레 대통령은 중국의 지원을 받아 통치체제의 개혁과 상당 부분을 국유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니에레레 대통령은 예측할 수 없었던 정치적 통치방안에 큰 차이점이 발생함으로 인하여 그 어느 때 보다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됬다.

ㄷ)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의 창건에 대하여 체제불만이 섬 나라 잔지바르측에서 부터 자연발생적을 일어나고 있었다. 분만 아니라 외세의 부추김으로 인하여 본토와 섬 나라 사이에 분규가 점점 노골화 되고 있었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권을 붕괴시키 위한 반정부 우익무장세력이 점점 더 기세를 부리고 있는 상황에서 1978년에 니에레레 대통령은 30,000 병력을 75,000 병력으로 증강시켰다. 75,000 명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막대한 비용이 지출돰으로 이에 대한 시민의 불만은 자연히 증폭되고 있었다.

니에레레 데통령은 1979년에 할 수 없이 머리를 숙이고 7개의 서방국가들을 순방하여 경제적 붕괴를 호소하여 원조를 요청하기 까지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니에레레 대통령이 우간다의 이미 아민 친미 독재자를 축출시키는데 큰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그 대가를 치루는데 있어 서방 국가들에 의하여 정치적으로 큰 곤경에 빠지게 됬던 것이다.

1980년에 니에레레 대통령은 탄자니아의 병력을 대폭 감소시켜 10,000명으로 축소 시켰다. 왜냐하면 1979년의 큰 홍수가 있었으며 1980년에는 또 심한 가뭄 으로 농산물의 생산이 큰 타격을 입고 있었기때문 이었다.

ㄷ) 이러한 혼란과 악조건이 연속되고 있는 속에서 1980년 10월 26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니에레레 대통령은 또 다시 5년 임기의 대통령직에 단독 후보로 출마하여 93%의 득표로 당선 되는 기적이 일어 났다.

하지만 니에레레 대통령의 5년 임기는 절대로 평온하지 못했다. 섬 나라 잔지바르의 원주민들 중에서 <탄자니아 연함공화국> 에서 탈퇴를 주장하는 친영국 세력들이 고개를 들고 거세게 니에레레 대통령의 재집권을 육박하기 시작했다.

1982년에는 집권당인 타누당을 반대하며 니에레레 대통령의 <우자마 사회주의>정치노선을 거세게 반대한는 우익집단이 탄자니아 항공기 보잉 737을 납치하여 영국으로 가면셔 니에레레 대통령의 즉각 퇴임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83년에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군인 28명이 반정부 쿠테타 시도가 있었다. 이 쿠테타 시도는 분명히 아프리카에서 냉전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공작이분명했다. 1984년에는 쿠테타와 관련된 재판이 있었으나 죄질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시간만 허비하고 재판을 질질 끌고 그저 억류되여 있을뿐 이었다.

이 외에도 탄자니아 국내와 국외에 둘러 샇인 불안한 정세가 니에레레 대통령의 정권을 압박하고 있었다. 니에레레 대통령이 스스로 퇴임을 결정하고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한 배후에는 분명히 옛종주국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그 당시 세계의 냉전체제를 총 지휘하고 있던 미국의 압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85년 11월 5일에 니에레레 대통령의 <우자마 사회주의>정권은 완전히 막을리고 잔지바를 출신 알리 하산 음위니 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말었다.

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 종식후 부터 24년동안 제 3세계 민중의 정신적 지표로 남아 있는 니에레레 대통령의 <우자마 사회주의> 이념은 오늘 아프리카와 중남 미 그리고 동남 아시아 전역의 모든 나라들에서 영속되고 있다.

미국이 지원하는 섬 나라 잔지바르 출신 알리 하산 음위니가 1985년 11월5일에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3. 알리 하산 음위니 대통령 등장과 오늘의 탄자니아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섬 나라 잔지바르 출신인 음위니는 1925년 생으로 잔지바르의 고위직을 두루 거친후에 니에레레 대통령의 정권하에서 부통령이 되었다. 니에레레 대통령의 후임으로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의 제 2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으며 1990년에 재선되여 1995년 까지 10년동안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을 통치했다.

일라 하산 음위니 대통령의 10년동안 통치하에서 그 무엇이 변화됬고 달라졌나?

퇴임한 니에레레 대통령은 후임자 음위니 대통령의 정권에 대하여 솔지히 말하기 를 <기대치 않았던 사회주의의 퇴보이다>> 라고 말 했다. 일부 사회주의의 강경파 지지자들은 니에레레 대통령의 재집권을 주장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알리 하산 음위니 대통령의 집권으로 인하여 10년안에 변화되고 달라진 것을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1954년에 니에레레가 영국에서 귀국하여 <아프리카 국민연합, 타누당>을창당 했으며 1975년에는 집권 여당의 <혁명당, CCM>을 새로 창당하여 사회주의 정치 제도를 확립하고 통치를했다.

그런데 새로 취임한 알리 하산 음위니 대통령은 <혁명당, CCM >의 정책을 완전히 무시하고 다당제를 도임하기 위하여 개헌을 단행했다. 개헌과 동시에 곧 12 개 정당들이 우후죽순 처럼 경쟁적으로 창당하여 정계와 사회를 크게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둘째, 알리 하산 음위니 대통령의 집권을 기다리고 있던 IMF는 즉시 음위니 대통령에게 사회주의 재도를 포기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서방의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채택는데 무조건 동의할 것을 재촉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영국,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자본금이 홍수처럼 탄자니아로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음위니 대통령의 정권하에서 농업과 산업의 90%를 개인 소유로 다시 전환 시킴으로서 탄자니아는 외국자본의 종속된 국가와 사회가 되고 말었다.

세째, 음위니 대통령은 자기자신을 이슬람교의 신자라고 밝혔다. 탄자니아를 이슬람 국가로 만들기를 원하는 정치인들이 집단행동을 하여 문제를 이르켰다.

카톨릭 성당이 방화로 인하여 전소되고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는 사건이 계속하여 일어 났으며 개신교 교회에 대한 방화도 전국으로 발생하였다.

종교적 분쟁으로 인하여 음위니 대통령 정권에 큰 부담이 되고 있었다. 이슬람에 대하여 항의하는 기독교 목사와 지지자들을 구속하고 재판에 회부하는 사건도 발생하고 있었다.

네째. 음위니 대통령이 본래 잔지바를 출신이기 때문에 잔지바르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일부 정치인들과 분리를 반대하는 정치인들 사이에 암투가 벌어짐으로 음위니 대통령의 통치능력에 큰 걸림돌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알리 하산 음위니 대통령의 10년 통치로 인하여 사회주의 제도는 완전히 망가져없어지고 IMF가 발표한 탄자니아의 지불불가능한 외체는 적어도 $900 million 이 되었다.

미국은 IMF를 내세워 5년간 지불연장을 해 주었지만 5년 후에는 원금과 이자를합하면 원금의 97.5%로 증가한다고 했다.

미국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등 유럽 나라들이 벌떼처럼 출현하여 음위니 대통령에게 $차관을 제안하여 결국 탄자니아는 국제적으로 채무국이 되고 말았다.

알리 하산 음위니 대통령은 1995년 10월에 실시한 다당제 대통령 선거에서 락선됬다. 니에레레 대통령이 창안한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붕괴시키고 자기가 도입한 다당제 선거제도에 의하여 자기자신이 선거전에서 실패하여 락선됬던 것이다.

1995년에 탄자니아 혁명당, CCM 출신인 벤자민 음카파가 제 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여 취임을 했다. 혁명당 CCM의 창시자인 니에레레 대통령은 비록 사망했지만 그를 추모하는 민중은 혁명당의 후보자 벤자민 음파카를 당선 시켰던 것이다.

벤자민 음파카 대통령은 니에레레 대퉁령의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완전히 다시 회복시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신임 음파카 대통령은 총선에서 혁명당 CCM의 의석186을 차지하여 안전을 확보하고 혁명당의 총재로 취임했다.

1996년에 벤자민 음파카 대통령은 동아프리카의 좌익 성향이 강한 우간다와 케냐등 여러 나라들과 협력체인 EAC를 출범시켰다. 1998년에 음파카 대통령은 강대국의 시장경제체재가 약소국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연구를 위한 <헌법개정위원회>를 설립했다. 뿐만 아니라 음파카 대통령은 집권당인 혁명당 내부에서 헌법개정에 관한 <백서, White Paper>를 발간하여 시장경제를 배격하는 개헌 국면을 주도하고 있었다.

벤자민 음파카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서울을 방문했는데 그때 두 대통령들은 미제국주의에 의하여 약소국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과 투쟁에 있어서 지구촌에서 결코 먼나라가 아니며 서로 협력관계를 확대해 나가자고 다짐했다.

2000년 10월에 실시한 탄자니아 대선에서 벤자민 음파카 대통령은 5년 임기로 또 다시 재선됬다. 하지만 재선에 성공한 음파카 대통령의 제 2기 집권은 결코 순탄치 못하여 시종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다.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의 연합체인 섬 나라 잔지바르에서 단독으로 시민연합체를 구성하여 벤자민 음파카 대통령 행정부에 대하여 큰 골치덩어리로 작용했다. 본토와 섬 나라 잔지바르 사이에 분쟁은 1964년에 연합체 구성 초기부터 줄곳불치의 암처럼 작용하고 있다.

<탄자니아 연합공화국> 의 헌법은 본토에서 대통령이 당선되고 부통령은 반드시 잔지바르 출신이여야 한다는 헌법이 있다. 또 잔지바를 내부에서도 연합체 지지파와 분리파 사이에 분쟁이 엣날 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뒤에서 옛종주국 영국이 사회주의 전통을 뿌리채 뽑으려는 분열정책 때문이다.

벤자민 음파카 대통령은 고투속에서 10년간의 통치를 마감하고 2005년 12월에실시한 대선에서 역시 혁명당 CCM 출신인 자카야 키크웨테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퇴진을 했다. 자카야 키크웨테는 제 4내 대통령으 당선되여 취임을 했다.

탄자니아의 제 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자카야 키크웨테 대통령은 1950년생으로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의 창건자 니에레레의 혁명사상을 추종하는 개혁적 인물로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2010년에 실시한 대선에서 또 다시 재선되였으며 2015년 까지 집권을 하면서 탄자니아의 빈곤문제를 해결하려고 힘쓰고 있다.

키크웨테 대통령은 아프리카 연합회의 의장을 지냈으며 2008년 11월에 중국의 하이난섬 보아오에서 개최한 보아오 포럼에 39개국의 2천명이 대표자들이 뫃인 회의석상에서 후지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함께 나란히 주석단에 앉기도 했다.

자카야 키크웨테 대통령은 <중국이야 말로 아프리카 발전에 공헌자이다>라고 극구찬양을 했으며 그는 또 터키에 대하여 <터키는 국제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아프리카의 소리>이다 라고 말하여 직간접으로 미국에 대한 견제를 표명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국제여론을 총동원하여 짐바브웨에 대하여 제재를 추진하고 있을때 바로 키크웨테 대통령은 미국를 향하여 반대의견을 강하게 표시했다.

현재 탄자니아 내부에서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 대립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 하지만 키크웨테 대통령은 니에레레 대통령의 통치시대에 종교적 갈등이 전혀 없이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온 지난 날의 역사를 상기시키면서 종교간의 중재에 힘쓰고 있다.

뿐만 아나라 키크웨테 대통령은 1964년대 그 옛날의 니에레레 대통령 통치시절때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친선적 국교를 교환하면서 상주공관을 개설하고긴밀하게 협조체제를 구축했던 역사를 상기시키면서 오늘의 세계에서 복잡하고 변화된 다양한 외교형태를 심사숙고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글을 끝 맺으며,


탄자니아의 비극의 역사에 대하여 생생하게 묘시한 다큐멘터리 <다윈의 악몽>이라는 작품이 있다. 프랑스에서 개봉 2달만에 20만명의 관객을 동원 했다고 한다.

탄자니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름답고 큰 “빈토리아” 호수가 있다. 이 호수에는 다양하고 양질의 물고기들이 무진장 풍부하여 호수가에 살고있는 원주민들은 자자손손 물고기를 잡는 어업으로 태평세월을 누리면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빅토리아 호수에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나타나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과학적 실험이라는 이유를 말 하면서 나일강의 거대한 농어를 유입시키기 시작 했다.

빅토리아 호수에 원래 살던 어종들은 거대하고 광폭한 파괴적 침입 괴물에 의하여 멸종의 위기에 처하게 됬다. 호수의 생태계의 파괴로 인하여 이지역의 원주민 어부들은 삶의 터전을 상실하게 됬으며 자본의 착취로 인하여 빈곤과 기아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이 됬다.

하지만 한편 농어의 살고기를 가공하는 대규모의 공장이 들어 서고 이 공장에서 가공하여 생산된 농어는 고가의 상품이 되여 유럽과 미국으로 수출 돤다.

한편 농어 가공 공장에서 버려진 생선의 머리와 뼈는 햇볕에 말려 공업용 기름에 튀겨져서 원주민들의 주식으로 재활용된다. 프랑스의 화려한 식품상점에는 곱게포장된 농어 살고기들은 쉽게 살수 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농어를 실어 운반하는 비행기들은 농어를 싣고 갔다가빅토리아 호수로 돌아 올 때는 비행기에 반군에게 지원해주는 불법 무기들을 가득히 싣고 온다는 사실이다.

이 작품의 제목이 “다윈의 악몽”인데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과학 영화가 아니라 제국주의 세계화 진화에 대한 악몽을 적나나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을 끝 맺으면서 끝내 아쉬움이 있음을 숨길 수 가 없다. 니에레레 탄자니아 건국의 아버지인 초대 대통령이 그 좋은 <아류사 선언>과 또 그 훌륭한 <우자마 사회주의> 이념을 모두다 가지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어찌하여 <선군정치 이념>은 없었을까?

탄자니아 군대의 총수가 한때 75,000 명 이였다가 곧 10,000명 으로 삭감을 했으니 어떻게 그 훌륭한 <우자마 사회주의> 이념인들 관철하고 성공시킬 수가 이었겠는가?

<ㅌㄷ 정신>과 무장된 선군이념이 결여된 상황하에서 무자비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당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다시 느끼게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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