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63]아프리카의 쿠바로 알려진 <베냉><br><br>"사회주의 해도 사대주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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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1-03-23 22:17 조회2,77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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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63번째 연재글로 "서아프리카의 쿠바"라고 일컫는 <베냉>에
대해 연고고찰하면서 서방강대국들에 의해 시달리고 착취당해 오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의 깃발을 들게 되었으나
아무리 좋은 제도나 체제를 가지고 있어도 자기를 지킬 방위력(혹은 자위력)을 갖추지 못한다든지 혹은
강대국들에 의존하려고 하는 사대주의로 가면 결국 그 나라는 망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역사적 교훈으로
되새기게 되었다고 강조한다.[민족통신 편집실]
대해 연고고찰하면서 서방강대국들에 의해 시달리고 착취당해 오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의 깃발을 들게 되었으나
아무리 좋은 제도나 체제를 가지고 있어도 자기를 지킬 방위력(혹은 자위력)을 갖추지 못한다든지 혹은
강대국들에 의존하려고 하는 사대주의로 가면 결국 그 나라는 망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역사적 교훈으로
되새기게 되었다고 강조한다.[민족통신 편집실]
<##IMAGE##> [연재-63]아프리카의 쿠바로 알려진 <베냉> 사회주의 해도 사대주의하면 망한다 <##IMAGE##> 서아프리카 가나만, 황금해안에 위치한 베냉 공화국의 고대역사는 아직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다만 1600년 초 경에 폰족, 다호메족들이 최초의 강력한 왕국을 건설했으며 이웃에 있는 당족을 공격하여 정복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다호메 왕국을 건설한 전설에 의하면 이웃에 있는 당족의 왕을 살해하고 그의 시체위에 다호메 왕국의 궁전을 건설했다. 다호메 왕국은 그 당시 강대국이라는 뜻으로 다호메이(Dahomey)라는 국가의 명칭이 처음 시작됐다고 한다. 다호메이라는 국명은 1974년 11월에 마티유 케레쿠 전 베냉 대통령이 사회주의국가를 창건하여 <베냉 인민 공화국>을 선언함으로써 옛 국가의 명칭은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살라지고 말았다. <베냉 인민 공화국>은 가나, 니제르, 나이제리아 그리고 토고 등 여러 나라들과 인접하고 있으며 인구는 약 900만이며 면적은 11만 2620km2로 Korea 반도의 ½ 정도이다. 유럽의 침략자들이 처음 다호메이에 상륙하기 시작한 때는 15세기 무렵이며 포르투갈, 영국과 프랑스 3국의 침략자들은 당시 이곳에 있는 다호미족, 폰족 등 여러 왕국들과 강제로 보호조약을 맺고 200여 년 동안 노예무역과 자유무역의 거점으로 삼고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1892년에 프랑스는 다호메이, 현재의 베냉을 단독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식민지령으로 지정 <다호메이 식민지>라는 명칭으로 통치했다. 프랑스는 그 후부터 제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1960년까지 56년 동안 다호메이에 대한 식민지 통치를 단독으로 계속했다. 프랑스 식민통치하에서 1936년-45년에 다호메이의 학교 교장이었던 Hubert Maga는 친프랑스 지식인으로서 다호메이 독립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는 친 프랑스 지식인으로서 프랑스가 임명한 다호메이 식민지 수상으로 1958-1960에 어용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60년 8월 11일에 다호메이의 독립이 선포됐으며 친 프랑스 Hubert Maga는 자연스럽게 프랑스가 지원하는 다호메이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Maga 대통령은 Catholic 신자이며 그의 아내는 개신교의 기독교 신자이다. Maga 대통령의 집권에 대하여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독립은 말뿐이고 그의 집권 배후에는 프랑스가 지배세력으로 실질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 실이다. 1960년 12월 29일에 Maga 대통령은 신임 내각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호메이의 수도를 남쪽에 있은 포르토노브에서 이동하여 북쪽에 있는 코토노우로 옮기는 용단을 냈다. Maga 대통령이 수도를 북쪽으로 옮긴 이유는 출신지인 북쪽을 권력의 근거지로 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Maga 대통령의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풍랑에 요동치는 쪽배 모양으로 매우 위태로운 정치적 위기에 당면하고 있었다. 1961년에 Maga 대통령은 비판적인 언론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였으며 아프리카에서 유명한 다호메이의 노동조합을 해체시킴으로 친 프랑스 독재정치 본성을 독립 초기부터 그대로 드러내었다. 그 과정에 Maga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어 용의자 11명이 체포 수감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압력에 의하여 ‘원수와의 관대한 화해’라는 어색한 이유를 들어 1962년 11월에 모두 석방했다. Maga 대통령은 경제발전 4년 계획을 발표하고 프랑스 자본을 끌어들여 농업생산에 투자하고 10%를 젊은이들을 위하여 투자를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만일 젊은이들이 정부의 자금의 지원을 받고도 사업에 실패하고 돈만 허비한다면 젊은이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겠다는 엄포도 놓았다. 학생들의 반정부 운동을 봉쇄하기 위한 방법으로 기존의 두 개의 대학조직들을 단일조직으로 강제로 통합시켜 정부가 학생들을 통제하는 어용 조직체를 창설 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Maga 대통령은 대통령궁을 화려하게 건설하기 위하여 프랑스 건축가로 하여금 설계하게 하고 3백만 달러로 1963년에 완공했다. 고급 대리석과 금으로 장식한 대통령궁의 주인공은 그 때부터 벌서 민중의 적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Maga 대통령의 패망의 날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Maga 대통령은 그의 정적인 소그로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그의 음모가 실패하고 말았다. Maga 대통령은 오히려 소그로의 역공을 받아 1965년에 대통령직에서 퇴임 가택연금에 처해있는 가련한 신세가 됐다. 그는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이웃 나라 토고로 일단 망명했다. 하지만 그의 종주국인 프랑스는 그에게 보다 안전한 망명지를 허락해 줌으로서 그는 프랑스로 이동하여 안전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Maga 대통령의 퇴임 후에 소그로가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소그로 정권도 평온하지 못했다. 다호메이의 정치적 현실은 쿠테타로 정권이 해마다 바뀌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 망명중인 Maga 전 대통령은 또 다시 재기의 기회를 노리면서 국내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고 있음으로 다호메이는 더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쿠테타가 계속하여 발생하고 있는 극히 혼란한 가운데 소그로의 정권은 붕괴되고 1968년 6월 17일에 민간인 진소우가 시민 대통령으로 임명되어 정국을 수습에 들어갔다. 하지만 프랑스 망명 중인 Maga는 진소우 민간인 대통령마저도 반대하고 있었다. 1968년 7월 28일에 Maga의 지지 세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시 대통령 선거를 강행하여 민간인 진소우가 투표인 76%의 획득함으로 다호메이의 민간인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런데 1969년 12월10일에 군사 쿠테타가 또 다시 발생하여 민간인 진소우 대통령은 퇴진하고 말았다. 또 다시 불안전한 군정이 시작됐다. 그동안에 군사 쿠테타가 5차례 발생하였으며 다호메이의 정권은 11차례 교체되고 있었다. 1625-1900년 275년 동안에 12명의 다호메이 왕이 거주하였던 옛날의 다호메이왕국의 궁전건물이 지금까지 역사적 유물로 그대로 남아 있다. 이 고대 왕국의 궁전은 다호메이의 옛날의 역사를 후대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비록 서방세력의 침략 속에서 식민지로 몇 백년을 지내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명목상으로 다호메이 왕국과 왕궁은 12명의 왕들이 살면서 계승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다호메이는 그 왕들이 완전히 없어진 후 56년 간 다호메이는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아오다가 1960년에 독립했지만 종주국 프랑스의 이권을 유지하기 위한 간섭과 미 제국주의의 냉전체제를 유지용 희생양이 되어 12년 동안에 5체례의 쿠테타와 11차례의 정권이 교체되는 극히 불행한 나라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다호메이의 이 암흑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수레바퀴를 바른 역사의 레일 위에 올려놓은 민중 혁명가는 1972년에 등장한 마티유 케레쿠로 알려졌다. 그는 “아프리카의 쿠바”를 창건한 <베냉 인민공화국 건국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졌다. 1851년에 프랑스가 다호메이의 아보미 왕조와 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식민통치를 시작한지 총 121년이 지난 후 1972년 10월에 마티유 케레쿠가 무혈 쿠테타를 일으켜 프랑스의 지배와 간섭을 영영 끊어버리고 완전한 독립을 쟁취했다. 마티유 케레쿠는 1972년 10월 친프랑스 어용정권인 Maga 정권을 타도하였으며 12년 동안 계속된 다호메이의 정치적 불안을 일소하고 1974년 11월에 자주자립의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선언했다. 마티유 케레쿠는 1975년에 12월에 유일한 합법정당으로 막스주의를 표방하는 베냉 인민혁명당 (PRPB)을 결성하고 국가명칭을 새로 <베냉 인민공화국 PRB>으로 제정했다. <다호메이>라는 낡은 국가명칭은 이때부터 영원히 사라졌다. 1980년 2월에 베냉 인민공화국 의회는 마티유 케레쿠 의장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민정 대통령으로 집권을 하게 됐다. 베냉 인민공화국은 1989년 6월에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을 제3선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으며 1991년까지 통치하게 됐다. 그런데 1991년 3월에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스와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베냉 의회는 다당제를 도입하여 대통령 선거를 치루었다. 프랑스와 미국이 앞세운 대통령 후보자인 소그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을 반대하는 선거전략을 통하여 대통령으로 당선 됐다. 대통령에 당선된 소그로는 <베냉 인민공화국>의 국가명칭에서 <인민>을 빼내고 <베냉 공화국>으로 국가명칭을 개칭하였다. 소그로는 친 프랑스 친 미 정치노선을 채택하여 장기집권을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 노선을 반대하고 극우 정책으로 집권을 시작한 소그로 대통령은 5년 임기의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1996년에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서 소그로는 재선에 실패하고 퇴진하고 말았다. 1996년 대통령 선거전에서 마티유 케레쿠는 지지율 52.49%를 획득하여 프랑스와 미국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현직 소그로 대통령을 물리치고 정권을 다시 되찾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은 사회주의적 정권을 되찾을 뿐만 아니라 5년 후에 2001년 3월에 또 다시 5년 임기에 재선되어 2006년까지 베냉 인민공화국을 통치했다.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은 <베냉 인민공화국 건국의 아버지> 로서 그의 집권기간이 총 29년간이었다.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이 2006년 3월 19일에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를 하지 않고 후임자 야이 보니에게 정권을 평화으로 이양하고 정계를 완전히 떠나갔다.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의 퇴임은 헌법에 대통령 나이를 70세로 제한한 헌법을 지키기 위한 준법정신 때문이었다. 서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당시 프랑스 대통령 드골은 서아프리카 나라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 독립할래? 자치권을 받아서 프랑스와 뭉칠래?” 라고 협박하고 있었다. 이에 기니(Guinea)가 당돌하게 드골에게 독립하겠다고 나섰더니 드골은 당장 기니에게 모든 지원을 중단하고 관료들을 철수시키는 가혹한 보복을 하여 기니를 혼란에 빠지게 했던 때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냉의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은 독립은 물론 제국주의 프랑스에 대항하여 장장 29년 동안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국가의 공식이념으로 삼고 당당하게 통치를 강행했다. 도대체 이 놀라운 마티유 케레쿠의 통치비결이 무엇이었으며 그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을까? 필자는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의 통치이념에 대하여 이것저것 참조하는 중에 눈에 띈 한 가지를 발견했다. 1990년대 초에 들어서서 동유럽에서 격변하는 자유 바람이 세차게 불어 닥치고 있었으며 프랑스와 미국의 악랄한 경제적 봉쇄로 인하여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다.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은 인덕정치의 극치를 발휘하여 민중의 여론과 인민의 요구를 올바로 파악하기 위하여 전 국민 대표자 연석회의를 소집했다. 농민 노동자 대표자들과 종교지도자와 시민사회 대표 그리고 정치인들이 모두 다 한자리에 모여 ‘어떻게 하면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탄압과 봉쇄를 극복할 수 있겠는가’하고 국민들에게 직접 문의를 했다. 그 연석회의에서 나온 제안이 <민주선거 실시와 대통령 임기제 도입>이었다.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은 지체없이 민중의 제안을 받아들여 1991년에 민주선거를 실시했다.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은 대통령 선거에서 소그로에게 패배하여 깨끗하게 권좌에서 물러나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도록 솔선수범했다.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이 선거 결과에 깨끗이 인정하는 행위에 대하여 아프리카 나라들에게서 환성이 터져 나왔으며 프랑스와 미국에게는 경종의 소리로로 되었다. 개도국에서 참으로 흔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티유 케레쿠는 5년 후인 1996년에 대통령 선거에 재출마하여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프랑스와 미국을 등에 업고 있던 당시 대통령인 소그로를 물리치고 당당히 당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2001년 3월에 역시 5년 임기에 또 다시 재선되어 2006년 까지 집권을 할 수 있었다.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은 사회주의에 대한 백절불굴의 통치자이면서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품이 넓은 아버지와 같은 <인덕정치형의 통치자>였던 것이다. 마티우 케레쿠 대통령의 29년간 통치에 대하여 베냉의 민중들 속에서 독재자라는 소리는 전혀 들어 볼 수 없다고 한다. 마티유 케레쿠 태통령은 전 아프리카에서 유일한 혁명적 대통령으로 사회주의적 통치이념을 시종 변함없이 29년 동안 초지일관하게 드높이 휘날리며 베냉인민공화국을 통치했다.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은 나이 70세로 대통령의 직위를 제한한 헌법에 절대 복종하여 평화롭게 후임자 <야이 보니 대통령> 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조용히 2006년에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를 했다. 1972년에 마티유 케레쿠가 이르킨 사회주의 혁명정부 창설 이후부터 2006년에 정권을 후임자에게 평화적으로 이양하고 은퇴할 때까지 34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하지만 이 34년의 기간에 소그로 대통령이 정권을 탈취하여 1991년-96년 까지 5년 동안 베냉을 친 프랑스와 친 미국적인 정치노선으로 집권을 했다. 따라서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이 직접 집권한 기간은 총 29년으로 기록된다. 소그로 대통령의 5년간의 집권은 사회주의 베냉인민공화국에 일시적으로 큰 타격과 손실을 초래했다. 베냉이 프랑스로부터 독립했을 때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다.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의 사회주의 이념의 통치로 인하여 민중은 모두 다 평등하게 겨우 살만한 때에 이르렀다. 그런데 시대적 변화로 인하여 동유럽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이 일제히 몰락하는 세찬 바람이 불어 닥쳐 베냉은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었다. 이때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소그로가 등장하여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을 물리치고 정권을 탈취했던 것이다. 프랑스가 승인하고 지원해 주기만 하면 얼마든지 정권을 탈취할 수 있다는 것을 소그로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 소그로의 정체를 알아 본다. 소그로는 1935년에 토고에서 출생하고 프랑스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친 프랑스 지성인으로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 마호메이에 돌어와 그의 사촌 형인 크리스토포 소그로가 당시 Maga 정권을 전복시켜 정권을 잡았을 때 재무장관을 지낸 경력을 가지고 있다. 1972년에 마티유 케레쿠가 Maga정권의 잔재들을 깨끗이 타도하고 혼란에 빠져있던 당시 마호메이에서 혁명정부를 창설했다. 그때 소그로는 마호메이를 등지고 해외로 탈출하였다. 마호메이를 탈출한 소그로는 해외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IMF의 서아프리카 중앙은행의 총무로 활약했다. 1979년에는 서아프리카 중앙은행의 은행장으로 임명됐다. 서아프리카 은행장이 된 소그로는 세계은행의 영향력을 최대한의 기회로 활용하여 사하라-아프리카 경제개발계획 작전에 있어서 지도적인 역할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소그로가 1991년 4월에 실시한 베냉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마티유 케레쿠 현직 대통령을 물리치고 베냉 대통령으로 당선됐던 것이다. 서아프리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나라는 바로 프랑스이다. 프랑스가 승인하고 지원하기만 하면 모든 나라에서 새로운 정권이 세워질 수 있었다. 그 소그로 대통령의 집권 5년은 어떻게 진행되었던가? 소그로 대통령의 아내 Rosin이 르네상스당을 창건하고 남편을 당수로 앉게 했다. 1993년에 소그로 대통령은 동경 국제회의에 참가하여 아프리카를 대표하여 친 미 행각을 자행했다. 소그로 대통령이 무작정 인권과 자유경제를 전매특허 모양으로 선전하고 있는 동안에 민중 속에서 확장되고 있는 빈곤과 사회적 불안이 곰팡이처럼 베냉에 침투하여 어둠속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소그로 대통령의 무작정 외세의존 경제정책에 대하여 1993년의 의회선거는 반대파가 형성했으며 또한 소그로 대통령에 대한 쿠테타 시도가 발생했다. 하지만 쿠테타는 일단 실패로 끝났으나 이 사건으로 정권의 불안이 표출되고 있었다. 소그로 대통령의 치명적 실패는 대통령 친인척 중심의 통치형태에 있었다. 대통령 부인이 정당을 창당하고 국회의원이 되는 사건을 비롯하여, 대통령의 아들이 비서실장과 공보담당 역할을 하고 대통령 처남들이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또한 대통령의 형을 외국의 대사로 임명하였고 그 외에도 많은 친인척들이 정부의 요직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소그로 대통령의 친인척 중심의 정권에 대한 민중의 불만은 극에 이르고 있었다. 베냉 의회는 해마다 대통령이 제출하는 예산안을 거부했지만 소그로 대통령은 IMF의 실행 강요를 핑계 삼아 강제로 통과시키는 처사를 감행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노동자 학생들의 반정부 항의시위가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Yale대학의 아프리카 전문연구원 Paul Ngomo는 ‘왜 어찌하여 소그로 대통령은 5년 임기를 끝내고 재선에 실패하였는가’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진술했다. 첫째, 소그로 대통령의 정치적 지도력 부족이다. 사회주의 독재자를 물리 치고 자유민주주의 정권을 창출한다는 슬로건으로 선거에 승리한 소그로는 그의 정치적 지도력에 있어서 앞뒤가 일치하지 않음이 그대로 폭로되었다. 그의 서방을 모방한 피상적 민주주의가 민중을 속여 외세의존 사대세력 등장을 위한 수단과 방법인 것이 폭로됐기 때문이었다. 둘째, 그가 주장하는 피상적 자유민주주의의 속에는 개인 이기주의와 부유한 집단의 이기주의가 작용하여 나라와 민족 전체 집단적 이익을 손상시키는 독소가 들어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특히 소그로 대통령의 친인척의 대거 등용은 민주주의를 빙자하여 사대매국세력들로 지배세력 구축하려는 음흉한 기도로 민중들이 인식하였다. 아무리 권력으로 위장 해도 민중을 속일 수 없었다. 셋째, 민중은 본능적으로 사회주의적 지도자를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이 오래 동안 보여준 인덕정치적 풍토에 대한 베냉 민중들의 그리움도 작용을 했을 것이다. 또한 외세의존적 경망스러운 소그로 대통령에 대한 민중의 숨김없는 심판의 칼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Yale 대학의 정치 사회과학 연구원의 직설적인 해석이 아니더라도 필자와 독자 여러분들이 함께 동감할 사실은 수세기 동안 서구문명과 외세의 식민통치에 시달려 오다가 겨우 해방의 기쁨과 희망의 등대를 미티유 케레쿠 대통령을 통하여 발견한 베냉 민중들이 아니었던가?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은 온갖 서방의 경제봉쇄와 IMF의 덧 그리고 개혁개방의 협박 속에서 그래도 끝내 참고 인내하면서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은 베냉 사회주의 국가를 이끌어 왔으며 비록 빈곤하지만 평등하게 어느 정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사회주의 나라를 건설하여 통치하고 있었다.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의 이런 자주정치, 인덕정치의 향수심에 젖은 베냉의 민중은 1996년의 대선에서 사회주의자 마티유 케레쿠를 또 다시 그들의 대통령으로 불러 세웠다.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의 재선에 대하여 세계는 깜작 놀랐다. 1996년에 5년 만에 또 다시 정권을 회복한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은 결코 순탄한 통치를 할 수 없었다. 그 주된 이유는 프랑스와 미국이 결사적으로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의 정권복귀를 흔들어 무너뜨리려고 지독한 경제적 봉쇄를 가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서구식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미명 아래 온갓 압력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은 2001년에 또 다시 재선되어 놀랍게도 2006년 3월까지 29년 동안 베냉 인민공화국을 통치할 수 있었다. 이미 사회주의가 어떤 것인지 경험한 베냉 민중들을 프랑스, 미국, 아이엠에프 그 어떤 세력도 현혹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이 2006년 대선에 불출마를 선언함으로 베냉의 대통령 선거전은 치열한 경쟁 없이 비교적 평온하게 진행되어 야이 보니 후보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야이 보니 대통령은 프랑스 오를레앙 대학과 파리 대학에서 경제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 출신 대통령이다. 그는 1952년 생으로 무슬림교 가정에 태어났지만 복음주의 보수적 기독교의 열렬한 교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야이 보니 대통령은 서아프리카 개발은행의 수장으로 오랜 기간 동안 근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음으로 그는 미국과 두터운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2006년 4월 3일에 베냉 대통령으로 취임한 야이 보니 대통령은 2006년 12월 14일에 벌서 Washington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과 친근한 옛 친구처럼 다정한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두 대통령의 담화 중에서 각각 한 문장씩 인용한다. 부시 대통령- 나는 귀하의 미국방문을 환영 합니다. 미국의 중요한 관심사는 베냉의 민주화와 경제적 안정입니다. 귀하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드리며 미국은 베냉 국민의 노력에 적극 지원하여 민주주의 정권의 정착과 경제지원을 후원할 것를 약속합니다. 야이 보니 대통령- 나를 미국에 초청해 준데 대하여 감사 합니다. 베냉은 시급한 과제가 평화입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경제적 지원과 의료와 개발사업이 우선 시급합니다. 미국이 베냉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표명해 주신데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위의 두 대통령의 대화에서 앞으로 양국의 관계가 밀착될 것을 예견할 수 있다. 히지만 야이 보니 대통령이 미국을 의존하고 미국과 밀착하여 있다고 할지라도 야이 보니 대통령의 통치과정은 절대로 수탄치 못했다. 2007년 3월 15일에 야이 보니 데통령을 암살하려는 차량공격이 발생했다. 다행히 야이 보니 대통령의 생명은 무사했지만 경호원들이 중상을 당했다. 야이 보니 대통령이 제 아무리 친미적 노선을 선택한다 할지라도 서아프리카의 여러 이웃 나라들의 행보를 무시하고 독자적 친미행각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특히 베냉 민중들의 가슴 속에 사회주의 지도자 마티유 케레쿠 전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생생히 살아 있는 베냉의 정치풍토에서 특히 보수주의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친미주의자 야이 보니 대통령은 선택의 폭은 그리 넉넉하지 못하다. 2010년 11월에 베냉에 홍수피해로 인하여 이재민 68만 명이 발생했다. 2011년에 대통령 재선을 바라보는 야이 보니 대통령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2011년 2월 27일이 본래 베냉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의 날이었다. 그런데 선거인단 명단에 유권자 30만-100만 명이 누락되는 사고가 발견되어 대통령 선거를 두 번씩이나 연기했다. 야이 보니 대통령은 선거인 명단 누락사건에 대하여 국민에게 사과문을 발표했다. 2011년 3월 13일에 드디어 베냉 대통렁 선거를 실시했는데 후보자 14명이 출마하는 혼란 속에서 선거를 했다. 3월 13일에 제1차 투표에서 당선자가 나타나지 못했다. 당선자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결선 투표를 2주일 후에 다시 할 예정이다. 강력한 최종 후보자로 야이 보니 현직 대통령과 베냉의 정치계의 원로 69세의 아드리엔이 맞대결하는 치열한 경선 투표가 2주 후에 다시 있을 것으로 예정되었다. 베냉과 토고는 서로 맞붙어 있는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로 1960년에 베냉과 같은 조건에서 영국 식민지 토고가 독립했다. 그런데 토고는 독립 후 지금까지 Eyadema 대통령의 일가에 아버지와 아들이 2대에 걸쳐 38년 동안 철권독재를 하고 있지만 프랑스와 미국의 승인 아래 끄떡 없이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와 영미 제국의 승인이 없으면 내전과 민주화라고 하는 온갓 미명 아래 정권이 교체되는 등 국가는 혼란에 빠지고 민중이 고난을 당하고 있다. 전두환 정권이 12.12 사태 이후에 미국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레이건 대통령에게 온갖 아양을 떨면서 미국방문 2박 3일의 허락을 받은 사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뿐인가 이명박은 미국의 승인뿐만 아니라 일본의 승인까지 받으려고 일본 왕 앞에서 대통령 부부가 허리를 45도 굽혀 경배를 하기까지 했다. 다시 베냉의 이야기를 하자. 베냉은 건국 초창기 12년 동안 친 프랑스 어용정치 매국노 Maga 때문에 독립은 말뿐이고 프랑스의 식민착취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다음에 소그로가 등장하여 베냉의 사회주의 정권을 탈취하고 5년 동안 프랑스와 미국에 의존한 사대주의 정치를 하다가 쫓겨났다. 지금 베냉은 2006년부터 친미 경제학 박사인 야이 보니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친미 행각을 5년 동안 하고 있으며 2011년 3월 13일에 재선을 노리고 있었으나 득표에 실패하여 2011년 3월말께 결선투표를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야이 보니 대통령은 태생적으로 친 프랑스와 친 미 성향의 학자 대통령이다. 하지만 서아프리카 이웃 나라들의 반 프랑스와 반미 반제 열풍에 애매한 입장에 처해 궁색한 대통령 선거를 치루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는 오늘 베냉의 정치적 현주소를 살펴보면서 자꾸만 <서아프리카의 쿠바> 를 창건한 사회주의 혁명가 마티유 케레쿠 베냉 전 대통령에 대하여 필자가 ‘무엇을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라고 자문자답을 하면서 고심했다. 마티유 케레쿠 전 대통령은 베냉사회주의 국가를 창건한 건국의 아버지로서 29년 동안 사회주의 이념으로 시종일관하게 베냉을 통치했다. 대통령 나이 70세 제한인 베냉의 헌법에 순순히 복종하여 평화적으로 정권을 후임자에게 이양하고 은퇴를 결단했다. 필자는 지난 2월-3월에 7일간 평양 방문 기간에 <조선 혁명박물관>과 <당창건 사적관>을 방문하여 수 없이 많은 실록과 문건들을 보고 또 해설을 들으면서 조선의 혁명에 대하여 새로운 배움의 기회를 갖았었다. 그러면서 필자는 베냉의 마티유 케레쿠의 혁명에 대한 나의 짧은 지식을 머리속에 상기시키면서 나 나름대로 마음속에서 조선과 베냉 두 나라를 비교해 보느라고 몹시 고심을 했다. 간략하게 그때 혁명 사적관에서 해설을 들으면서 나의 느낌을 말 한다면 <ㅌㄷ 제국주의 동맹의 결성> 그리고 인상적인 <카륜회의에서 혁명의 진로 발표> 등 역사의 이야기들을 해설자에게서 들으면서 필자는 자꾸만 ‘저 아프리카 베냉의 유명 마티유 케레쿠 대통령의 혁명이야기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하고 자문자답을 했다. 물론 혁명사적관 안에서 듣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항상 듣고 있는 북에서 주장하는 <총대위주 선군정치> 그리고 <고난의 행군>, <우리민족끼>라는 낯익은 구호들은 마티유 케레쿠의 혁명사에서 들어 볼 수 없으며 또한 아프리카 그 어는 반제투쟁의 나라에서도 들어볼 수 없는 희귀한 구호들이다. 필자는 잠시 그동안 베냉이 보유하고 있는 군사력을 (2009년) 참조하여 보았다. 베냉의 총 병력 4,800명으로, 1개 기갑대대, 3개 보병대대, 1개 공수부대 그리고 1개 포병 중대가 있을 뿐이다.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무기들을 일일이 살펴 볼 필요도 없이 열악할 뿐만 아니라 전투기는 한대도 없는 것이 베냉의 군사력이다. 예정웅 정세분석가가 주장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무기 보유 현황을 필자가 여기서 다시 인용을 하지 않더라도 오늘 베냉이 29년의 사회주의 통치의 장엄한 역사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방의 강대국이 망쳐 놓고 있는 현실을 필자는 가히 이해하면서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또 지금 리비아는 어떠한가? 필자는 리비아가 2003년 12월에 핵을 포함한 대량살상 무기개발을 포기한다고 발표하고 미국과 1대1의 대화의 통로를 모색한 이야기는 미국의 속임수에 넘어간 카다피의 실수였다고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카다피는 <미국에 절대 항복 안 한다> 라고 항전의지를 표명했으며 또한 <단기전이던 장기전이던 미국을 이길 것이다>라고 당호하게 말하고 있다. 강자가 되지 않고서는 강자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필자는 베냉과 조선의 역사를 비교 고찰하면서 실감 있게 느꼈으며 또한 리비아의 경험을 되새겨 보면서 카다피 대통령의 강경 발언에 대하여 전적으로 성원을 보내고 싶다. 나는 이 글을 마치며 역사적 교훈을 떠 올린다. 사회주의를 하여도 자위력이 없으면, 그리고 사대주의로 나간다면 망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새롭게 깨닫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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