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61]아프리카 섬나라≪마다가스카르≫반제투쟁 > 기타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5년 9월 27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기타

[연재-61]아프리카 섬나라≪마다가스카르≫반제투쟁

페이지 정보

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1-02-06 21:57 조회2,495회 댓글0건

본문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민족통신 [연재-61] 아프리카에서 가깝고도 먼 섬나라
마다가스카르 반제국 투쟁에 대한 내용을 다루면서 "마다가스카르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섬나라이다.
그린란드, 뉴 기니, 보르네오 다음으로 큰 섬나라이며 아프리카 본토 모잠비크 해협을 사이에 두고 400km
떨어져서 인도양에 떠있는 열대성의 섬나라 이다"라고 설명하는 한편 이 나라는 반제투쟁에 대한 내용을
역사적인 발자취에서 고찰했다. 이 글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61]아프리카에서 가깝고도

먼 섬나라 ≪마다가스카르≫반제투쟁


위치상으로는 아프리카에 속해 있지만
인종과 정치와 문화는
독자적 사회주의 국가의 역사보존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IMAGE##> ≪마다가스카르≫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섬나라이다. 그린란드, 뉴 기니, 보르네오 다음으로 큰 섬나라이며 아프리카 본토 모잠비크 해협을 사이에 두고 400km 떨어져서 인도양에 떠있는 열대성의 섬나라이다. 최고봉은 해발 2,880m 가 되며 이 높은 고지에는 겨울에 눈도 볼 수 있고 수많은 호수들이 있다. 섬나라라고는 하지만 국토의 면적이 587,041km2 이며 코리아반도의 2.7배이상 되는 큰 섬나라로 인구는 약 1,600만명 가량된다.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 대륙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게 아프리카의 다양한 원시림의 식물과 동물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국제 자연보존 협회>에 따르면 마다가스카르에는 지구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생태학적으로 가장 특이하고 희귀한 동물과 식물들이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마다가스카르는 원숭이들의 낙원으로 특이한 여우 원숭이를 비롯하여 수십종의 괴상한 원숭이가 서식하고 있으며 그외에도 이색적인 특이한 동식물들의 보물섬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아프리카 전역에 퍼져 있는 식물과 동물들과는 별다른 특이한 종류의 식물들과 희귀한 종류의 동물들이 오직 마다가스카르 에서만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에 20만종에 이르는 풍부하고 특이한 원시적 자연환경을 즐기기 위하여 전세계의 자연주의자들이 모여들고 있는 꿈과 같은 곳이기도 하다.

마다가스카르는 그 위치로 볼때 아프리카에 속해 있는 나라이지만 그 나라의 주민들은 아프리카의 흑인들과는 전혀 다른 말라가시인의 후손들이다. 말라가시인들은 인도네시아계로 구분됨으로 마다가스카르는 아시아계의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마다가스카르는 수백만년 동안 무인도로 독자적 진화과정을 지켜 오다가 5-6세기에 이르러서 인도네시아계인들이 무리를 지어 상륙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다가스카르의 주요 인종들은 말레이-인도네시아계, 인도계, 아프리카 혼혈, 아랍계의 혼혈 그리고 프랑스계등이 있는데 이들의 후손들이 이루어 놓은 부족들의 수는 약 18개의 부족들이 씨족을 형성하여 살고 있었다. 종교는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있으며 언어는 마다가스카르어와 프랑스어를 겸용하고 있다.

1. 마다가스카르의 독립을 망친 프랑스


마다가스카르의 고대 역사에 대한 정설은 없지만 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는것으로 보아 BC 2000년경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BC 200년경에 알렉산드리아의 지리학자 포틀레미가 Menuthias 라고 적은 기록이 있는데 아마 마다가스카르를 가르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6세기 경에 마다가스카르에 처음 들어 온 이주자들 대부분은 말레이-폴리네시아계인들이 인도양을 건너 왔으며 이들은 동남아에서 키우던 농작물들을 가지고 왔다. 왜냐하면 벼 농사를 짓는 논이 끝없이 펄쳐진 것을 보면 마다가스카르는 분명히 아프리카가 아닌 아시아인들의 정착지였다. 그들의 얼굴 모양도 어딘가 낮익은 것 같이 느껴지는 친근감이 감도는 아시아계 인종으로 보인다.

중국을 처음 여행하여 기행문을 쓴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서도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인도에서 항해자들이 왔으며 9세기에는 많은 아랍인들이 왔고 또한 동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이 왔음으로 결국 다양한 인종들이 18개부족과 씨족들을 이루게 되었다.

마다가스카르에 유럽인들이 처음 도착한 것은 1500년에 포르투갈 군함이 디에고 디아스의 지휘하에 처음 도착했다. 그 후부터 줄을 이어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서로 다투어 가면서 마다가스카르에 영구적인 침략의 근거지를 삼고 있었다.

17세기에 유럽의 침략자들은 마다가스카르를 완전히 수중에 넣기 위한 수단방법으로 원주민들에게 서양의 보물을 주어 매수하고 또 원주민 여성들과 결혼함으로 보다 빠르게 침략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유럽의 무기들이 대량 마다가스카르에 도입돠여 원주민들의 손에 들어가게 됨으로 자연히 평화롭게 살던 부족들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여 주도권 싸움이 발생했다. 이것은 교활한 영국의 흉계였으며 그리하여 18세기 후반 영국의 영향력에 의하여 메리나 부족이 마다가스카르의 주도권을 잡게되었다.

영국은 재빠르게 주도권을 잡은 메리나 족에게 형식적인 기만술로 독립권을 인정하는 조약을 맺음으서써 메리나 부족을 완전히 매수했다. 하지만 1883년에 이르러 영국과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영국은 프랑스에개 몰리여 마다가스카르의 통치권을 프랑스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프랑스는 그 대가로 잔지바르의 통치권을 영국에게 넘겨주었다.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에서 영국을 쫓아낼 뿐만 아니라 영국에게 매수되여 형식적인 독립권을 소유하고 있는 메리나 부족을 물리치고 1895년에 조세프 갈리에니 장군을 마다가스카르의 초대 총독으로 임명했다. 갈리에니 총독은 마다가스카르에 있는 모든 정치 단체들을 섬 밖으로 추방해 없애고 그 동안 영국이 남기고 떠나간 모든 영국의 영향력을 일소하고 프랑스어를 마다가스카르의 공용어로지정했다.

갈리에니 총독은 명목상으로 노예제도를 폐지 했지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여 세금을 내지 못하는 원주민들의 노동력을 강제로 요구했으며 토지의 소유권은 몽땅 몰수하여 프랑스 정착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커피등 특수 농산물을 생산하여 수출하여 튼튼한 식민지를 구축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은 일본의 진출을 막는다는 구실로 마다가스카르를 침공하여 잠시 지배했다. 하지만 1943년에 드골 대통령에게 굴복하여 마다가스키르를 또 다시 프랑스에게 돌려 주었다.

마다가스카르인들은 400년전 부터 유럽의 여러 나라들의 침략과 착취와 노예가 되여 시달여 오다가 1895년부터 50년동안은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다. 마다가스카르인들은 프랑스의 교육과 훈련을 받아 프랑스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여 그들의 삶의 기준은 프랑스의 제2 국민의 위치에 완전히 동화되고 말았다.

하지만 1947년에 마다가스카르에서 400여년 동안의 암흑과 50년의 프랑스 식민지 역사를 깨고 프랑스에게는 가슴이 아프고 부끄러운 역사적 전환점이 드디어 시작 되었다. 마다가스카르인들은 더 이상 프랑스의 2등 국민으로 취급받는것을 거부하고 자주독립을 위하여 궐기하여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당황한 프랑스는 본능적으로 침략자의 본성을 드러내 무자비한 진압으로 80,000명의 마다가스카르인들을 살해했다. 그러나 마다가스카르의 민중적 봉기의 불길은 절대로 꺼지지 않았고 3년 동안의 끈질긴 투쟁끝에 1950년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토착민의 정치적 정당들이 탄생되었다.

유럽의 백인들은 피침략지의 원주민들의 생명을 파리 잡듯이 희생시키고도 양심의 가책따위는 하나의 사치로 여기고 있었다. 프랑스는 독립을 원하면서 봉기한 마다가스카르인 80,000명을 살해하고도 여전히 10년동안 끄떡없이 식민통치를 계속했다.

1960년에 드디어 마다가스카르는 독립을 쟁취 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독립 후에도 마다가스카르를 완전히 떠나지 않고 농장주, 즉 영구적 정착민으로 남아 있으면서 독립한 마다가스카르의 막후 세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하에서 마다가스카르의 초대 대통령으로 필버트 치라나나가 1960년에 취임했으며 1965년에 재선되여 1972년 5월까지 집권하다 반프랑스 반정부 쿠테타에 의하여 결국 퇴진하게 되었다.

필버트 치라나나는 누구?

치라나나는 1912년에 메리나 부족에 속하는 캐톨릭교 가정에 태여났으며 13살때 아버지가 별세하여 형 밑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초등학교와 대학교육을 받아 마다가스카르의 지식인으로서 여러 해 동안 교직생활에 종사했다.

그는 중년에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프랑스 식민통치하에서 많은 높은 직위와 관직에 종사하면서 친프랑스 정치인으로 낙인이 찍히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통치하에 있는 마다가스카르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56년에 치라나나는 프랑스의 국회 의원으로 선출된 마다가스카르인 3인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프랑스가 세운 꼭두각시 정당인 마다가스카르 사회민주당의 회장이 되여 친프랑스 정치인이 되었다. 1960년 6월에 마다가스카르는 보기 드물게 평화적으로 독립을 쟁취했다. 독립을 평화적으로 쟁취한 그 숨어 있는 이유는 프랑스 식민통치하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필버트 치라나나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는 전제조건 하에서 프랑스는 평화적으로 독립을 승인 했다.

8.15 해방 당시 우리 조국반도에서 친일파 세력들이 미국을 배경삼고 친일 기득권을무기로 삼으며 분단세력으로 등장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역사와 치라나나 대통령의 친프랑스 행각은 그 배경과 과정이 비슷한 역사로 이해된다.

치라나나 대통령이 집권하는 12년동안 유일한 어용정당인 사회민주당의 일당독재가 계속됐으며 수없이 많은 반독재와 반프랑스 애국인사들이 투옥을 당했다.

치라나나 대통령은 메리나 부족 출신이다. 메리나 부족은 본래 소련 진영과 가까운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부족이다. 하지만 치라나나 대통령은 자기 출신인 메리나 부족을 배반하면서 친프랑스 어용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그는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모든 외교관계를 끊고 친프랑스 독재를 하고 있었다.

1971년에 남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정부 시위를 잔인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미 정권의 종말에 이른것을 예고 했으며 1972년 10월에 가브리엘 라만초아 장군이 일으킨 쿠테타에 의하여 치라나나 대통령은 몰락했다. 치라나나는 1978년에 65세의 나이로 사망 했다.


2.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한 디디에 라치라카 대통령



마다가스카르의 독립후에 친프랑스 치라나나 초대 대통령의 꼭두각시 정권이 12년동안 독재와 억압통치를 한후에 가브리엘 라만초아 장군이 주도한 쿠테타에 의하여 몰락 했다. 가브리엘 라만초아 장군은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프랑스를 멀리하면서 아프리카의 개혁적인 국가들과 우호적 연대를 강화하고 특히 공산권에 속하는 나라들과 외교를 새로 시작했다.

가브리엘 라만초아 대통령은 의회를 해산하고 치라나나 전임 대통령에 의하여 투옥되었던 정치범들을 전격 석방하면서 개혁정치의 용단을 내렸다. 하지만 너무 무리한 개혁을 단시일에 성취하려는 지나친 의욕으로 인하여 성공보다는 오히려 좌절로 빠져들었고, 끝내 1975년 2월에 퇴임을 함으로써 집권 3년으로 단명의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라만초아 대통령은 퇴임을 하면서 동료군인 라치만드라바에게 권력을 인계하여 후계자가 되도록 했다. 하지만 라치만드라바는 후계자가 된지 14일 만에 암살을 당했다. 라치만드라바의 암살후에 안드리하 마하죠가 <최고혁명평의회>를 조직하여 의장으로 취임하면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 곧 디디에 라치라카가 신임 의장이 되여 지도력을 발휘하여 국가적으로 당면한 위기를 원활하게 처리하고 있었다.

디디에 라치라카 신임 의장은 사회주노선으로 <혁명방위민족전선>을 결성하였다. 그는 은행을 국유화하고 국민 투표를 실시하여<사회주의혁명헌법>을 제정했다. 디디에 라치라카 의장의 강력한 새로운 정책으로 인하여 프랑스인 농장주들과 자본가들은 지금까지 움켜쥐고 있는 돈과 기술을 챙기고 마다가스카르를 모두 떠나 프랑스로 갔다.

1976년 1월에 디디에 라치라카는 마다가스카르의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 했다.라치라카 대통령은 프랑스와의 모든 관게를 단절했으며 정부는 공산주의적 정책으로 많이 기울어 있었다. 디디에 라치라카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적 정치노선을 견지하면서 1982년에 재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1989년에도 농민들의 절대적 지지로 63%의 득표를 얻어 3선의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디디에 라치라카 대통령에게도 피치못할 정치적 시련이 계속 닥쳐오고 있었다. 그것은 미국을 비롯한 프랑스와 서방의 IMF가 차관의 대가로 요구하는 긴축조치와 날로 고조되는 채무위기등이 라치라카 정권에 악영향을 가해주었다.

또한 1989년에 3선 선거에서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당선이 되기는 했지만 그 후 일어난 여러가지 복잡한 사회적 문제들이 지방에서 확대되기도 했다. 디디에 라치라카 대통령은 동서남북 4방으로 둘러 싸고 있는 서방의 제국주의압력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1993년 3월에 실시된 대선에서 디디에 라치라카 대통령은 도전 후보자 알버트 자피에게 패전하여 4선 대통령이 되는데 결국 실패했다. 디디에 라치라카 대통령은 4선에는 실패하여 3선 대통령으로서 17년동안의 사회주의 지향적 집권을 유지 하다가 그의 통치를 끝냈던 것이다.

선거에 승리한 알버트 자피는 1993년 3월에 제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새로 취임한 자피 대통령은 대학교수 출신으로 나약한 점이 너무 많이 있음으로 국무총리와 불화의 불씨가 처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동시에 자피 대통령의 임기동안에 마다가스카르의 국가 경제적 사정이 급속히 악화됨으로서 학자 대통령인 자피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급락하고 있었다. 결국 1996년 7월에 국회는 자피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통과시킴으로써 알버트 자피 대통령은 1996년 9월에 단명대통령이 되여 퇴임하고 말았다.

마다가스카르는 3년동안 정치적 공백이 계속됐으며 1996년 11월에 공석중인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 대통령 선거는 세계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기이한 대통령 선거전이 벌어졌다.

그것은 놀랍게도 1993년에 퇴임한 디디에 라치라카 전임 대통령과 탄핵을 당하여 3년전에 퇴임한 자피 전대통령 두명의 퇴임한 전직 대통령들이 맞대결을 하는 진기한 선거전이 벌어 지고 있었다.

1차 투표에서 무승부로 당선자가 없었으며 2차 결선 투표가 1996년 12월 29일에 실시되여 디디에 라치라카가 또 다시 당선되여 4선의 사회주의자 대통령이 탄생함으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디디에 라치라카 대통령은 4선 대통령으로 2002년 5월 6일에 그의 일생 최종으로 퇴임을 했는데 그는 4번 당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지향의 대통령으로서 그의 집권 기간은 총 23년이었다.


3. 마다가스카르에 기독교 왕국을 꿈꾼 대통령



사회주의자 대통령으로 오래 동안 명성을 날린 디디에 라치라카 대통령은 미국을 비롯하여 옛 종주국 프랑스와 영국의 <눈의 가시>가될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게 항상 뒤따라 다니고 있는 제국주의자들의 혹독한 비평의 소리는 <자유시장 경제체제의 낙오자>라고 낙인을 찍는 혹평의 소리였다.

디디에 라치라카 대통령은 미국이 강요하는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관계개선>과 그리고 <자유시장경제제도 도입>을 끝끝내 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디디에 라치라카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에는 할 수 없이 어느 정도 문호를 개방하여 IMF의 구조조정 융자에 협의하여 정치적 안정책을 찾으려고 노력한 때도 얼마 동안 있었다.

이와 같은 경력을 가지고 있는 디디에 라치라카가 이번에 또 다시 5선 대통령이 되기 위하하 출마를 결심 했다. 하지만 디디에 라치라카에게 맞대항을 하여 도전 한 후보자는 <진실한 기독교 신자> 라고 선전하는 마르크 라발로마나나 이였다.

그는 기독교 진실한 신자로서 마다가스카르의 “그리스도교 교단” 평신도회의 회장이라고 크게 선전을 하면서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 했다. 그는 또한 마다가스카르의 수도인 안타나나리보 시의 현직 시장이기도 했다. 그는 현직 시장일 뿐만 아니라 개인 소유의 방송국을 활용하여 선거전을 펄치고 있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과 프랑스는 막강한 힘으로 진실한 기독교인 대통령 후보자인 마르크 라발로마나나를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다.

2001년 12월에 실시한 선거 결과는 1차 투표에서 양편이 모두 과반수를 얻지 못 하여 법적으로 2차 결선투표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라발로마나나는 자신의 승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하면서 2차 투표에 참가하기를 거부했다. 그의 숨어 있는 이유는 만일 2차 결선에 참가하면 실패할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였다.

1차 선거는 2001년 12월에 있었는데 마다가스카르의 고등법원은 2차 결선투표를 거부하고 취소할 뿐만 아니라 일방적으로 2002년 4월 29일 라발로마나나를 대통령 당선자로 발표하여 라발로마나나의 승리를 공식적으로 선포 했다.

마다가스카르의 고등법원이 내린 일방적인 판정에는 분명히 미국과 프랑스등 서 방의 강대국들의 압력이 작용한것이 분명했다. 디디에 라치라카는 역시 서방의 강대국들의 압력의 희생양이 되여 패전을 받아 드릴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모든것을 깨끗이 포기하고 국외로 잠시 망명의 길을 떠났다.

라발로마나나는 결국 미국과 프랑스등 서방 강대국들의 국제적인 후원에 힘입어2002년 5월 6일에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그는 2006년에 또 다시 재선되되여 연임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의 집권행태는 IMF 민영화 프로그램 개발에 앞장섰으며 외국투자를 무분별하게 유치 도입하여 고강도 자본주의 경제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은 사회주의자 전임 디디에 라치라카 대통령이 제정한 농민을 위한 토지소유권 관련법들을 완전히 개정하여 서구식 경제 기법을 도입하였다.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은 고부가 가치의 플렌테이션 농업으로 전환을 추진했으며 경제개혁과 외국 자본의 도입과 개방의 정치를 했다.

하지만 그의 개방정치의 성과가 일반 서민대중에게는 전혀 돌아가지 아니하고 오히려 농민들의 빈곤은 그의 집권후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심화되고 있었다.

라발로마나나 태통령의 선거공약은 마다가스카르를 기독교 왕국 국가로 개조하여 범죄와 빈곤이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그의 공약은 거짓으로 판명 되었다. 그의 집권후에 정치개혁과 부패척결은 하나도 이뤄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부 관리들의 부정 부패는 극에 달했고 외국자본의 무분별한 도입으로 인하여 경제적 양극화만 심화될 뿐이였다.

마다가스카르에는 현재 수많은 기독교 한국 선교사들이 큰 집단을 이루고 있다. 다음은 어느 한 한국인 선교사 (K. S. C.)의 말을 인용한 글이다.(2009년 3월 24일)

<지금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의 정부는 결국 막을 내리고 대통령은 이 나라를 떠 나야 할 사태로 되여가고 있다. 사실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이 기독교 교단의 부 총재이기 때문에 대통령의 그늘에서 많은 헤택을 받았다. 하지만 6-7년만에 이러한 마음 아픈 결과를 얻게 되었으며 앞으로 이 나라의 교회들은 아픈 상처를 안고 진통을 겪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동안 대통령을 통해 큰 힘을 과시해 왔던 이곳의 가장 큰 기독교단 (한국의 장로교와 같음)의 총재가 방금 구속되었다. 부총재는 라발로마나나 대통령 이다. 마다가스카르의 앞날이 어두어 지고 우리 선교사들도 불안에 처해 있다>

뿐만 아니라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은 한국 ‘대우로지스틱스’ 에게 마다스키르의 토지 총 130만ha의 농지를 99년간 임차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대하여 새로 등장한 임시 과도정부의 수반인 안드리 라조엘리나는 라발로마나나 전임 대통령령이 한국 대우와 맺은 임차계약을 즉각 취소하고 일절 모두 다 무효화 시켰다.

자기 나라의 국토를 외국이나 외국군대에게 팔거나 빌려주는 처사를 국민의 동의가 전혀 없이 행하는 것은 매국적 행위이기 때문에 마다가스카르에 새로 등장한 임시 과도정권은 즉시 무효를 발표했던 것이다. 사실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이 국민의 심판을 받고 결국 퇴진을 하게된 여러가지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남녁의 "대우 로지그틱스"와의 불법적인 막대한 토지의 임대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은 2002년에 취임하고 2007년 1월에 2선 대통령으로 재집권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임기중에 쿠테타로 축출당할 위험들을 여러번 겪으면서 겨우 정권을 유지하면서 집권을 계속했던 것이다.

2009년 1월에 반정부 지휘자 안드리 라조에리나는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을 가리켜 독재자이며 악당의 두목이며 또한 깡패 대통령이라고 도전하면서 정면 대결을 하여 반정부 시위를 지휘했다.

마다가스카르에 <기독교 왕국>을 새우겠다고 정견을 발표하면서 집권을 시작한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은 2009년 2월 7일에 반정부 시위에 20.000명이 가담을 하는 정치적 곤경에 처해 있었다.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은 시위군중에게 총격를 가해 30여명이 사망하는 큰 사태로 발전되었다. 2009년 3월 17일에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은 군부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자기자신이 외롭게 고립되고 있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발로마나나가 기독교인으로 대표적인 큰 교단의 부총재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은 정권을 군부에게 넘겨 주었다. 군부는 나라의 비상을 전 격적으로 선포하고 과도정부의 지도자로 안드리 라조에리나를 추대하고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그에게 위임했다.

한편 퇴임을 결의한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은 스위츠란드로 즉시 망명의 길을 떠났다. 이로서 마다가스카르의 <기독교 왕국 건설의 꿈>은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스위츠란드로 피신을 한 라발로마나나의 범죄 사실이 낱낱이 드러 나기시작 했는데 우선 6천만 달러의 국가 돈으로 개인 소유의 비행기를 2008년에 구매한 사실이 폭로되여 7천만 달러의 벌금과 4년간의 투옥이 결석 재판에서 선고되었다. 그 후 그는 망명지를 남아프리카로 이동했는데 역시 결석 재판에서 그에게 종신형이 선고 되었다.

반정부 투쟁에서 지휘자로 활약한 안드리 라조에리나는 국가의 비상상태 하에서임시 국가수반으로 추대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나이가 40세 미만의 젊은이기 때문에 지금은 비상사태 하에서 임시로 국가 수반의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앞으로 대통령이 되기에는 헌법상으로 <나이 문제>가 쟁점으로 떠 올랐다.

마다가스카르 <의회헌법개정 위원회>는 2010년 11월 17일에 특별 <국민투표, Referendum>를 실시하여 <대통령 년령 제한 35세>로 하향조정하는 헌법개정안을 74.13%의 득표로 통과시켰다.

2010년 11월 17일에 실시한 <국민투표>에 대하여 미국과 서방 언론은 반대하는 기사를 내고 있었다. 그 이유는 만일 극민투표가 34세의 라조에리나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타날 것을 미리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하지만 국민투표는 성공적으로 실시되여 미국을 난처하게 만들어 놓았다.

새로 개정된 헌법에 의하여 마다가스카르의 새 대통령선거가 2011년 5월 4일에 실시된다. 안드리 라조에리나는 1974년 5월 30일 생으로서 앞으로 대통령 선거 때에는 36세가 됨으로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를 할 수 있게 되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4. 30대 중반의 젊은 대통령의 행방은 어디로?



마다가스카르의 2선 대통령으로서 친서방 무한권력을 과시하던 라발로마나나 전임 대통령은 막강한 권력으로 지방정부의 자치권을 완전히 환수하였으며 그리하여 중앙정부가 모든 권한을 독점하는 독재체제를 만들어 놓았다. 대통령의 권한을 무진장으로 대폭 강화하였다. 뿐만 아니라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은 대통령 출신 종족인 메리나족에게 모든 권력의 혜택을 집중시킴으로 경제적 불균형과 부정축재로 민중의 불만이 전국적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2007년 12월에 마다가스카르의 수도인 안타나나리보 시에서 시장선거가 있었는데 무소속 후보자로 32세의 안드리 라조에리나가 출마했다.

안드리 라조에리나와 현직 대통령이 서로 대결하는 선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무소속의 안드리 라조에리나가 막강한 여당 후보자를 누르고 62%의 득표로 안타나나리보 시의 시장으로 당선되는 이변이 발생했다.

안타나나리보 시의 시장으로 취임한 32세의 젊은 라조에리나 시장은 음악 방송의 진행자 출신이었다. 그는 정부의 부정부패에 대하여 저돌적인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안드리 라조에리나 시장은 국내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전역에도 널리 알려진 자신의 소유인 테레비죤 방송국을 가지고 있는 유명인사 중 한 사람이었다.

라조에리나 시장은 어느 날 자신의 소유인 TV방송의 인터뷰 시간에 사회주의자 대통령으로 명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민중의 가슴 속에 깊은 애정을 간직하고 있는 전직 사회주의자 대통령인 디디에 라치라카와의 인터뷰를 방영했다.

뿐만 아니라 TV 방송은 라발로마나나 현직 대통령의 불법 행위를 폭로하여 광대한 국토 130만ha를 한국의 "대우 로지스틱"에게 99년동안 임대하는 처사를 맹렬히 공개적으로 폭로하면서 방송을 진행했다.

이와 같은 일로 인하여 32세의 라조에리나 시장은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에게 위협적인 정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국민의 여론이 자연히 젊은 시장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대하여 몹시 분노한 현직 대통령은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은 라조에리나 시장이 소유하고 있는 TV 방송국에 대한 폐쇄령을 내렸다. 방송국 페쇄에 맞서 라조에리나 시장은 대규모 반정부운동을 더 크게 전개했다.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은 안타나나리보 시에 정부가 공급하는 전기와 물에 대하여 단전과 단수 명령을 내렸고 급기야는 라조에리나를 시장직에서 쫓아내는 해임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기독교 신자 답지 않은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의 행동에 대한 반발이 전국적으로 일어 났으며 오히려 더 큰 반발이 대통령에게 부메랑이 되여 되돌아 왔다.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은 2009년 3월 17일에 정권을 군부에게 넘겨 주고 망명의 길을 떠나야만 했다.

라발로마나나가 망명으로 떠나간 마다가스카르의 임시 대통령으로 라조에리나가 2009년 3월에 취임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그의 임시 대통령 취임식에는 미국과 서방의 외교사절들은 전혀 참석하지 않았음으로 미국의 노골적인 불편한 심사를 알 수가 있었다.

미국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친미적인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의 몰락을 내심으로 끝끝내 반대할 뿐만 아니라 개혁적인 젊은 라조에리나가 등장하는 것을 보고 크게 우려하고 있는것으로 밝혀져 이것이 그대로 폭로 되고 말았다.

그런데 퇴임하고 망명한 라발로마나나를 아직도 지지하는 일부 극우파 세력들이 있었다.이들 극우파 세력들이 미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여론화되었다. 이것은 라발로마나나 정권이 얼마나 친미와 친서방 국가였으며 그들과 결탁되여 있는 정권 이였는가를 증명해 주었다.

망명한 라발로마나나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버리지 못하고 있는 기득권세력에 대하여 안드리 라조에리나 과도정부의 임시 대통령은 또 다시 놀라운 선언을 발표 했다. 그의 발표는 라발로마나나 전임 대통령이 2008년에 국고금 6천만 달러로 비행기 보잉 737기를 구입했으며 그 비행기를 개인 소유로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라조에리나 과도정부 대통령은 그 비행기를 몰수하여 그 돈을 전부 국민들에게 돌리겠다고 약속했다. 과도정부 대통령 안드리 라조에리나는 최근 인터뷰에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사이의 차이가 너무 큽니다. 라발로마나나 정부는 그 문제에 대해 별로 생각하고있는것 같지 않아요. 우리가 마다가스카르의 국민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그들의 권리를 지켜주겠다는 약속 입니다> 라고 했다.

이제 2011년 5월 4일에 실시될 역사적인 마다기스카르의 대통령 선거에 36세가되는 젊은 안드리 라조리나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공산이 커지고 있어 그 귀추가 이 나라의 최대 관심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을 끝 맺으며,


필자는 이글을 쓰면서 2007년에 마다가스카르 정계에 혜성처럽 나타나 단숨에 대통령궁에 입성한 34세의 안드리 라조에리나 과도정부 대통령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과정에 있다.

하지만 필자가 이와는 정 반대로 오하려 더 크게 의분을 터트리고 있는 것은 대통령궁에서 쫓겨난 전직 대통령의 행위이다. 그는 진실한 기독교인으로 <기독교 왕국>을 건설하겠다고 선고공약을 하여 당선되었던 라발로마나나이다. 그는 이 나라를 진실로 생각하는 국민들로부터 용서 받지 못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범죄 행위중 한 두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보잉 737 비 행기를 6천만 달러 국고금으로 구입하여 개인의 소유로 만들었다는 법죄 행위와 그리고 또 하나는 국토 130ha를 국민의 허락도 없이 한국의 "대우 로저스틱스"에 99년 동안의 임대게약을 맺은 범죄행위이다. 이 같은 행위들은 이 나라에서 매국적 범죄행위로 용서받지 못할 것으로 본다.

그 외에도 2선의 재선선거에서 결선 투표를 거부하고 어용화 된 고등법원의 판결로 대통령에 불법적으로 취임한 행위도 역시 국민의 용서를 받을 수 없는 범죄이다. 그의 범죄행위 중에서 특히 <기도교 왕국 건설> 이라는 사기극도 매국적 행위로 간주되고 있다.

그의 <기독교 왕국 건설> 이라는 것이 어찌하여 정치적 사기극에 해당되는 것인가.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는 이 같은 사기극을 생각하면서 한국의 정치풍토를 떠 올린다. 남녁의 이명박장로가 그와 같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후보자로 출마 할 때 제일 효과적으로 사용한 수단 방법이 바로 대형 교회인 <소망교회 장로> 라고 하는 선전수단 이였다. 기독교 세력의 대중적 지지의 힘을 등에 업고 이명박 장로는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

그리고 그의 집권형태가 이른바 <고소영>형태인데 여기에도 소망교회 장로설이 중요하게 노골적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미국과 기독교를 동등한 위치에 올려 놓고 집권세력의 안정을 꿈꾸던 라발로마나나의 몰락을 이명박 대통령이 흉내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집트의 위기를 비롯하여 미국의 중동정책도 뚜렷한 실패의 신호가 표출되고 있다. 사실은 2007년에 마다가스카르에서 라발로마나나 친미주의 대통령이 34세의 젊은이에 의하여 몰락하여 추방될 때부터 이미 미국의 중동정책이 총체적인 몰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되었다. 그러한 신호는 이미 이 지역에서도 떠오르고 있었다. 미국이 간섭하고 지배하던 나라들의 몰락은 대부분 반제투쟁의 도전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끝)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5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