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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br><br>이만영 선생:<이현상평전>필독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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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1-01-19 14:01 조회3,3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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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후란시스코=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인물들을 찾아 집을 나섰다. 운전대를
로스엔젤레스에서 북쪽으로 향해 샌후란시스코 근교에 위치한 산 로렌조라는 시에 거주하고 있는 이만영
선생(72. 범민련 재미본부 부의장)의 아파트를 방문했다. 350마일 거리니까 약 560 킬로미터가 되는
거리이다. 승용차로 6시간 걸렸다. 그러니까 1천4백리 길 정도가 된다.


[기획-1]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이만영 선생:<이현상 평전>필독권유



<##IMAGE##> [샌후란시스코=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인물들을 찾아 집을 나섰다. 운전대를 로스엔젤레스에서 북쪽으로 향해 샌후란시스코 근교에 위치한 산 로렌조라는 시에 거주하고 있는 이만영 선생(72. 범민련 재미본부 부의장)의 아파트를 방문했다. 350마일 거리니까 약 560 킬로미터가 되는 거리이다. 승용차로 6시간 걸렸다. 그러니까 1천4백리 길 정도가 된다.

반가운 만남이었다. 저녁 식사를 나누며 배강웅 범민련 재미본부 의장이 세상을 떠나 대화의 대상을 잃어 버린 듯 이만영 선생은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 그의 삶에 대한 철학과 통일운동에 대한 열정 등을 나누며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만영 선생은 51도짜리 술을 들었고, 나는 깡통 맥주를 들며 쌓였던 이야기들을 주고 받으며 그 동안 적조했던 나날들을 대화로 채우기도 했다. 나는 범민련 창립 20주년 기념 서울행사에 참가했던 이야기와 돌아오는 길에 일본에 들려 재일한국청년동맹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한 이야기, 그리고 재일총련 학교들을 방문하며 느꼈던 감상들을 들려주기도 했다.

오랜만에 만나 처음에는 주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너무나 한심하고 안타깝다고 같은 의견들을 주고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이명박 정권에 탄압받아 온 남녘의 범민련을 비롯하여 한국진보연대, 민권연대, 민주노총, 그리고 야권 정당들이 열심히 투쟁하는 이야기들로 대화의 꽃을 피우다가 공동관심사인 민족문제로 옮겨갔다.

미군 일병에 구타당한 한국군 상병 모습보며 분노해 집단행동으로 사과받아


술잔을 주고 받으며 나눈 이야기들은 주로 우리 민족의 분단사와 관련되는 내용들이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이만영 선생은 군대생활를 하는 동안 미군과 함께 근무하는 소위 "카추사" 생활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한국군 상병이 미군 일병에게 구두발로 차인 이야기였다. 자기보다 계급이 높은 한국군의 엉덩이를 미군 일병이 구두발로 찬 사건이었다. 이것을 본 이만영 선생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주로 운전병 107명으로 구성된 한국군 병사들을 선동하여 집단행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군 병사들은 미군 일병이 한국군 상병을 구두발로 찬 사건을 묵과 할 수 없다. 우리들은 더 이상 미군의 괄시와 멸시를 받으며 근무할 수 없다. 우리를 한국군으로 돌려보내달라"고 집단적으로 요구하며 의정부에 소재한 주한미군 1군단 사령부 병영 내 한곳에 집합했다. 이만영 선생을 포함한 한국군 운전근무 사병들은 모두 야전슬리핑 가방에 짐을 싸 들고 나와 집단항의에 들어갔다. 이들 사병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미군내 수송업부가 마비되는 상황이었다.

"우리들의 집단행동에 놀라 기겁을 하고 우리들을 찾아온 미군 본부사령(소령)은 어쩔줄 몰라서 쩔쩔매며 "무슨 일인가?"라고 묻고 이 사태를 수습하려고 당황하는 눈치였다." 이 사건에 대한 자초지종에 대해 청취한 직후 미군단 본부사령은 한국군의 집단행위를 무마시키려고 하는지 문제의 미군 일병을 이 자리에 호출하여 우리 한국군 1백여명 앞에서 미군의 계급장을 뜯어 내 팽개치더니 "그를 강등시키고 처벌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그 후 이 부대에서 어디로 갔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이만영 선생은 그 당시 집단행동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알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또 하나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이 부대에 황 아무개라는 서울대학교 출신 한국군 상병이 통역 일을 하면서 가끔 그림을 그렸는데 미군중위 얼굴을 그려 초상화를 만들어 준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미군중위가 이 초상화를 당시 1군단장이었던 죤 엠 라이언 중장에게 자랑삼아 그 초상화를 보여주니까 "나도 한장 그려달라"고 요청하여 황 상병이 그의 초상화를 유화로 그려주었다. 라이언 중장은 그 초상화를 받으면서 이렇게 좋은 그림을 그려주었는데 "당신, 황 상병의 소원은 뭔가?"를 물어 그 때 황 상병은 라이언 중장에게 "나는 집이 가난하기 때문에 미국에 유학을 갈 수 없는데 내 소원은 언젠가 유학을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대답한 이후 일주일 만에 그것도 황 상병이 제대하려면 복무연한을 1년 더 근무해야 제대할 수 있는데 그는 막바로 헬리콮터에 실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 뿐만이 아니라 박정희가 소장에서 중장으로 진급할 때 이 라이언 군단장 앞에 와서 승진식을 했는데 이 자리에서 라이언 중장이 자기가 단 계급장을 띄어서 박정희 어깨에 달아주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다시 말하면 미군 장성들이 한국의 군대를 좌지우지 하고 있었다는 일화들이었다. 이것은 곧 한국군이 미군의 식민지 군대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구체적인 내용들이었다.

젊은이들에게 권유하고 싶은 도서로 "이현상 평전"을 추천


<##IMAGE##>그 다음 대화는 평생동안 읽은 책들 가운데 가장 감명깊은 책들의 이야기를 나눴다. 이만영 선생은 남달리 독서를 많이 해 왔다. 남녘에서 출판된 책들도 많이 읽었지만 북녘에서 출판된 책들도 많이 읽었다. 김일성 주석의 <세기와 더불어> 8권 뿐만 아니라 김상일 박사가 그것을 읽고 쓴 독후감들도 읽었다. 그 뿐만 아니라 남녘에서 출판된 역사서적이나 주요출판물들은 거의 읽어 왔다. 그 중에 남녘에서 출판된 도서 가운데 특히 <이현상 평전>은 우리 젊은이들이 꼭 읽어보면 좋겠다고 권유한다. 2007년 7월23일 실천문학에서 출판한 606쪽의 도서이다.

이만영 선생은 "이현상 선생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구빨치산과 신빨치산 생활을 하며 남부총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6.25전쟁 시기 전부터 지리산에서 활동하였고, 1953년 7월 정전협정 이후에도 지리산에서 활동하다가 남녘 토벌대에 의해 죽은 인물로 남녘 투쟁가들 중에 "체게바라"와 같은 혁명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시체는 찾을 수 없지만 그의 가묘가 북녘에 있어 다행이다"라고 설명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6월 평양을 방문하여 최초로 남북최고지도자 회담을 갖는 기간에 만수대의사당(남녘의 국회와 같은 의사당)을 찿았을 때 그 때 안내했던 여성이 바로 이현상 선생의 막내딸(이상진)인데 이 여성이 북녘에서는 최초의 1등서기관이 된 인물"이라고 말해준다.

그는 또 이현상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만 12년 옥살이를 한 인물로 강인한 성격과 함께 인자한 휴머니스트라고 설명하면서 "쿠바 혁명에서 체 게바라가 한 역할에 대해 세계가 다 알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현상 선생이 전 생애에 펼친 활동을 돌아보면 그는 체 게바라 보도 훨씬 더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하고 싶다"면서 그의 혁명활동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이현상은 충청도 금산의 부유한 아들로 태어 났지만 한 생을 혁명에 불태운 인물이다. 이현상(李鉉相, 1905년 9월 27일 ~ 1953년 9월 17일)은 한국의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노동운동가이며, 해방 후에는 남조선로동당의 간부로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파르티잔 활동을 주도했다. 호는 화산(火山), 가명은 로명선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이씨. 충청남도 금산 출신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현상 선생과 같은 일제시기의 독립운동가이며 혁명가 가족들은 남녘에서는 탄압받고 온갖 수모를 겪어 왔지만 북녘사회에서는 고인의 애국활동을 높이 평가해 왔다. 그의 값높은 애국활동은 가족들의 부귀영화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북녘 사회는 이들 가족들에게도 열사가족으로 대접해 주었다.

인터네트 위키백과에 따르면 북녘의 애국렬사릉에는 1968년에 조성된 이현상의 가묘가 있다. 이현상은 북조선의 제1호 열사증을 추서받은 인물이며 애국렬사릉에도 가장 먼저 묻힌 인물인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 8월에는 조국통일상도 추서되었다. 부인과 자녀, 셋째 형의 가족 등 대부분의 가족들은 전쟁 중 이현상이 북녘으로 보냈다. 이현상에게는 1남 3녀가 있었다. 외아들 이극은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냈고 정년퇴직후에 인민대학습당의 국제도서교환처장으로 일했다. 맏딸 무영은 중앙당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인민군 정치부와 노동당에서 일했다. 둘째 딸 문영은 만경대 혁명학원을 졸업하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일했다. 막내딸 이상진은 북조선의 외교관으로 활동하다가 북조선의 첫 여성 일등서기관이 되어 경공업 분야를 담당했다. 이상진은 김대중의 북조선 방문 때 만수대의사당을 직접 안내한 일이 있다. 처 최문기는 1972년에 사망해 혁명열사릉에 있는 이현상의 가묘에 홀로 묻혔다고 한다.

남녘에는 이현상의 어머니와 둘째 형수만 남았다. 이들은 이현상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렵게 생활하다 사망했다. 특히 1975년 사망한 어머니는 무덤이 파헤쳐져 시신이 훼손되기도 했다.

다음은 이현상이 지리산에서 조선인민유격대를 지휘하며 창작한 한시이다.

“ 地理風雲堂鴻洞 지리산의 풍운이 당홍동에 감도는데
伐劍千里南州越 검을 품고 남주를 넘어오길 천리로다
一念向時非祖國 언제 내 마음 속에서 조국이 떠난 적이 있었을까?
胸有萬甲心流血 가슴에 단단한 각오가 있고 마음엔 끓는 피가 있도다.


남녘의 방송 드라마에 반영된 이현상 인물의 발자취들도 있다. 《여명의 그날》 - 1991년 KBS1 드라마, 배역: 김병기, 《야인시대》 - 2003년 SBS 드라마, 배역 : 김두삼 등이다.

이만영 선생은 이현상 선생에 대한 인간미에도 심취되어 있다. "이승만 정권시기의 경찰 토벌대 대장도 이현상 선생이 자기들이 보기에는 비록 적이지만 그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노골적으로 표시한 적이 있다"고 소개한다.

이만영 선생이 걸어 온 길


<##IMAGE##>이만영 선생과의 대화는 다시 이만영 선생 자신의 과거사로 옮겨졌다. 자신에 대해서는 잘 말하려고 하지 않는 겸손한 성격의 소유자가 이만영 선생이다. 좀 처럼 자신의 이야기는 잘 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간신히 그의 발자취를 알아냈다. 1938년 11월10일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다섯명의 동생이 있고, 대학 갈 무렵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그 한달 만에 아버지가 재혼 하는 바람에 반발한 추억도 있었다. 경제사정 때문에 대학갈 형편도 되지 못했다. 대구대학(지금의 영남대학) 법정대학에 입학했지만 중도에서 그만두고 나머지는 반청강생으로 학교에 다니다가 군대에 들어갔다.

이만영 선생은 군대를 마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대전교도소에서 11개월 일한적이 있었다.이것도 위장취업을 해서라도 비전향장기수 같은 인물들을 만나고 싶었던 심정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이 직장에서 가장 감명 받은 것은 0.07평 독방에서 고생하였던 비전향장기수들의 삶의 모습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울수 있었다고 한다. 이현상 선생처럼 이들 비전향장기수들도 지조가 있어 그것이 존경스러웠다는 이야기이다. 그 중에 홍명기 선생에 대한 인상이 깊었다. 교도소에 들어 온지는 오래되었는데 그 사건이 신문에 보도 된 것은 뒤늦게였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그 시기를 결정해 언론에 터뜨렸다는 것이다.

그는 홍명기 선생이 당시 한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체포되면 미 정보계통에 먼저 넘겨지는데 그 때에 약물투입도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대방동 502정보부 기관에 의해 수사가 시작되었다."고 말한 것들을 떠 올리며 "공안당국이 형무소에 깡패들을 투입시켜 비전향장기수들을 구타하고 괴롭혔던 반인륜적인 일이있었는데 이것은 비전향장기수들을 강제로 전향하도록 유도한 공작이었다"고 상기시켜 주었다. 그는 이러한 사실들을 설명해 주며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이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6.15선언 덕분에 북송되었지만 "이들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낸 초인적 인간들"이라고 말한다.

이만영 선생은 날이 갈 수록 한국에서 산다는 것이 싫어졌다. 38세 되던 1976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리고 35년의 세월이 흘렀다. 미국생활 36년째 접어 든 셈이다. 그 동안 식당 접시딲기 일도 찾으러 다녔고, 주유소에서 펌프멘으로 일하려고도 일자리를 찾아 다녔다. 그 과정에서 자동차 바디숍에 취직되어 일 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그 기술을 바탕으로 자신이 바디숍을 직접차려서 경영하기도 했다. 그 과정인 1988년 부인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자녀들 공부시키려고 "스타벅스"같은 커피숍도 몇 년 운영하면서 자녀들 학교 뒷바라지를 해 주었고, 그 후에는 자녀들이 독립하여 자기 분야에서 잘 살 고 있다.

그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다. 윤한봉씨가 민족학교를 설립하고 재미한청을 조직하여 전국에 청년단체들을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하던 초기에 그의 재판을 위한 변호사비용도 대 주었고, 그리고 한 때 백기환 선생이 대선후보로 출마하여 국내외에서 모금활동을 벌일 때에 그의 선거를 돕기위해 가진 재산 일부를 헌금한 일도 있었다. 남을 돕기위해서는 주머니를 아끼지 않는 성격이다. 이러한 성격은 작년에 세상을 떠난 배강웅 범민련 재미본부 의장도 비슷하다. 그래서인지 이만영 선생과 배강웅 의장의 관계는 남달랐다. 서로 끊임없이 연락하며 돈독한 관계를 맺어 왔다. 범민련 재미본부 부의장을 맡게 된 것도 배강웅 의장 때문에 본의 아니게 그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는 언제나 "나는 감투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다."고 말해 왔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 술잔을 나누며 주고 받는 대화를 통하여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배울 수 있었다. 지난 해 세상을 떠난 배강웅 의장이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며 동지였다. 그의 대화 상대자였던 고 배강웅 의장을 대신하여 누가 그의 대화 상대자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이 궁금했다.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면서 다음 또 만나자고 약속하고 아쉬운 작별 인사를 주고 받았다. (끝)

*이만영 선생의 새 연락처는 1-510-333-8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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