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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8]세네갈,친미에서 친북반미로 전환<br><br>노벨문학상 시인 셍고르가 세운 사회주의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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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1-01-03 21:22 조회2,5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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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민족통신 [연재-58]번째로 세네갈에 대한 글을 통해서
아프리카 지역의 최근 민족자주화 흐름에 대하여 진단하는 가운데 이 나라가 북조선과 중국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밝혔다. 특히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과의 경제교류가 아프리카에서 자주화의 길로
들어서는 나라들의 경제교류 숨통을 열어주고 있음을 그의 이번 논문에서 확인된다. 북조선과 친선도
강화되었고, 군사적인 자주화의 경향도 뚜렷해지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의 논문을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58]세네갈,친미에서 친북반미로 전환

노벨문학상 시인 셍고르가 세운 사회주의국가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IMAGE##> -세네갈 20년의 사회주의 전통 변질되고 친미실용주의 갈팡지팡 오늘 와드 대통령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세네갈은 서아프리카 나라들 중에서 가장 서쪽 땅 끝에서 대서양을 면하고 있는 나라로 인구는 1220만 명이고 면적은 19만 6천7km2로 조선반도와 비슷하다. 제일 가까운 이웃 나라는 남쪽에 있는 감비아이고 그 외에 모리타니, 말리, 부르카니파소 등 인접 국가들이 있다.

세네갈에는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가 있으며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에서 배로 약 20분 거리에 Goree 섬, <노예 섬>이 있다. 15세기부터 300년 동안 흑인 노예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팔려갔는데 팔려 떠나가기 전에 이 <노예 섬>에 노예들을 가두어 두는 최종 집결장소로 사용되는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다. 유럽과 미주대륙으로 1,000만 명 이상이 바로 이 <노에 섬>에서 팔려나갔다.

유럽인들의 노예무역의 비극적 악행을 파헤친 영화<뿌리> 주인공인 ‘쿤타 킨타’도 감비아에서 붙잡혀서 세네갈의 이곳 <노예 섬>에 갇혀 있다가 미국으로 팔려 나갔다고 한다.

<노예 섬>안에 있는 역사박물관에는 비참한 노예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여러가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유네스코는 이 <노에 섬>을 세계역사유산으로 지정하여 관광 명소로 되었다.

세네갈은 인구의 94%가 이슬람교도들이며 ‘마라부’라고 하는 영적 지도자가 세네갈의 정치와 경제등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마라부’는 종교적 지도자를 넘어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마라부’의 종교적 이념은 무엇인가?

‘마라부’는 프랑스의 침략에 대항하여 세네갈 민중들에게 독립운동 정신을 심어주고 또한 노예무역의 본거지에 대한 역사의식의 눈을 뜨게 하는 계몽적 종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럼으로 세네갈의 이슬람종교는 중동지역의 이슬람이나 아프리카 다른 지역들의 이슬람과는 판이하게 구별되는 세네갈의 민중 속에 깊이 토착화된 민족종교 성격을 지닌 특이한 세속적인 이슬람 종교이다.

1. 세네갈의 간추린 역사


고고학 기록에 의하면 세네갈 땅은 BC 400년경부터 AD 1200년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 속에서 소닌케족이 세운 가나제국의 영토에 속해 있었다. 11세기경에 이르러서 이 지역에 이슬람이 전파되었다.

13-14세기에 말리 제국이 건설되어 세네갈을 지배했으며, 14-15세기에는 풀라니족의 왕국이 세네갈을 통치했다. 1444년에 포르투갈인들이 세네갈 해안지역을 탐험하여 이 지역의 왕국들과 가까이 접촉하였으며 1500년대 초에 무역 기득권을 획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15세기에 네덜란드,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의 열강들이 서아프리카 무역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경쟁을 벌였으며 먼저 온 포르투갈인들을 밀어 내는 심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1636-59년에 프랑스는 세네갈 강 어귀에 있는 작은 섬을 점령하여 ‘생루이’ 섬이라고 명명하고 프랑스군의 요새를 건설했다. ‘생루이’라는 명칭은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기념하여 붙인 침략적 이름이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는 1677년에 네덜란드의 소유인 Goree섬, <노예 섬>을 탈취했다. 그런데 17-18세기 초에 영국과 프랑스는 세네갈 지역 전역에 대한 영유권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했는데 일시 영국이 점령했다가 1816년에 다시 프랑스에 반환됐다.

1854년에 프랑스의 페테르브가 34세의 나이로 세네갈의 총독이 되었다. 페테르브 총독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세네갈 전역을 점령하여 여러 부족들의 소왕국들을 소탕하고 지배영역을 확장했으며 땅콩 재배와 수출을 위하여 세네갈의 다카르항을 처음 개항했다. 그 당시 땅콩은 “세네갈의 황금”으로 불리고 있었다.

1861년에 페테르브 총독은 세네갈을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적 통치 본거지로 삼고 정치, 군사, 경제의 모든 분야에서 프랑스의 세력이 확장되어 영국이 점령한 인도지역과의 경쟁에서 맞먹는 프랑스령 아프리카 제국의 건설을 구상 하고 있었다.

1886년에 프랑스는 포르투갈령인 기니와 감비아의 경제에 관한 협정을 맺음으로 아프리카에 대한 동화정책을 확립했다. 1895년에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의 통일된 하나의 통치단위를 이루었으며 1902년에 행정 수도를 세네갈의 다카르로 정함으로 세네갈은 명실공이 서아프리카 식민 통치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다.

2. 세네갈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국가 창건



세네갈의 독립운동은 1928년에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에 유학 중이던 레오폴드 셍고르의 독립정신으로 부터 시작됐다.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여 동경에 유학중이었던 조선의 학생들이 조선독립운동의 중요한 활동을 전개한 것처럼 세네갈의 셍고르도 파리에서 유학생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셍고르는 아프리카의 고대 문화유산의 우수성이 현대의 유럽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을 발견하고 피식민지인 세네갈의 독립운동에 대한 자각심을 갖게 됐다.
셍고르는 파리에서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 결합한 독립운동의 핵심체를 만들었다.

셍고르는 프랑스의 비인도적인 서아프리카에 대한 식민통치와 동화정책에 항거하여 투쟁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아프리카인의 존엄성을 재발견하고 자주독립의 길을 열어 나가는데 있어서 첫걸음으로 정치적 문화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리하여 셍고르는 정치적 문화운동의 동인조직인 <네그리 튀트 운동>을 창설하고 지도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셍고르는 1935년에 아프리카인으로 최초로 프랑스 최고의 유자격자 교사들의 조직인 ‘아그레제’의 정식 회원이 됨으로서 아프리카인의 위상을 과시했다.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에 프랑스군으로 징집되어 참전했는데 셍고르는 독일군에 포로가 되여 나치의 집단수용소에서 2년을 보냈다. 셍고르는 집단수용소에서 2년 동안 지내면서 세네갈독립운동에 관련한 유명한 시들을 발표하여 문학가로서의 자질을 과시했다. 셍고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프랑스 제헌의회의 의원이 됐다.

1946년에 프랑스 정부는 세네갈을 ‘해외 종속 준주’로 삼고 여전히 통치를 계속했다. 같은 해에 셍고르는 프랑스 국민의회의 후보자로 출마하여 의원으로 당선됐다. 셍고르는 프랑스 국민의회의 의원이 되어 파리에서 개최하는 국민의회에 세네갈 출신 흑인의원으로 처음 참가할 수 있었다. 1951년과 1956년에 셍고르는 재선되어 국민의회의 의원으로 정치활동을 활발하게 계속할 수 있었다.

1956년 8월에 셍고르는 세네갈의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을 총연합하는데 주력하여 드디어 <세네갈 민중연합>을 창건했다. 그리고 셍고르는 세네갈의 철도교통의 중심지인 티예시의 시장으로 취임을 했다.

1958년에 세네갈은 아직도 여전히 프랑스에 매여 있기는 하지만 명칭 상으로 이른 바 프랑스 제국내의 <세게갈 자치공화국>이 됐다. 하지만 세네갈의 독립운동세력은 박차를 가하여 <세네갈 진보연맹>을 결성하고 셍고르를 중심한 독립국을 프랑스에 강력히 요청했다.

1959년에 프랑스는 견디다 못해 쓰러졌다. 프랑스는 할 수 없이 1959년 4월 4일에 드디어 프랑스령인 세네갈과 수단, 말리, 니제르, 부르카니파소등 여러 나라들을 한데 묶어서 <말리연방>을 결성하는데 승인했다. 프랑스는 식민통치를 할 때는 쪽쪽이 분열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식민통치를 포기할 때는 일괄 통합하여 하나로 묶어서 <프랑스령 연방제>로 승인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1960년 6월 20일에는 < 프랑스 령> 이라고 하는 <문구>를 완전히 빼 버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한 <말리 연방>이 됐다. 프랑스령이라는 문구를 완전히 빼버린 <말리 연방>에 속한 여러 나라들이 프랑스와의 관련 없이 독립국이 됐다.
그 후에 <말리 연방>에 속한 여러 나라들은 곧 제각기 독립국이 됨으로서 <말리 연방>은 자연히 해체 됐다. 1960년 9월에 세네갈은 레오폴드 셍고르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독립국이 된 것을 선포했다.

셍고르 대통령은 누구?

레오폴드 셍고르 대통령 자기 자신은 가톨릭교의 신도이다. 그런데 인구 90% 이상이 이슬람교도인 이슬람 국가 세네갈에서 어떻게 셍고르 대통령의 평화적으로 20년 동안의 집권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셍고르 대통령이 세네갈의 민중의 <자주적 삶>을 종교적 이념보다 더 귀 중히 여기면서 민중들의 상호존중의 정신을 세워 나아가는 정치풍토와 그리고 사회주의적 생활제도를 기초하여 통치능력을 제시함으로 세네갈을 아프리카에서 제일 평화로운 나라로 만드는 기초를 튼튼히 닦아놓았기 때문이었다. 세네갈은 독립 후에 아프리카에서 단 한 번도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은 나라로서 지금까지 그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

셍고르 대통령은 아프리카 문화의 전통주의와 아프리카의 사회주의 이념을 굽히지 않고 굳건히 서서 그의 통치이념과 사회주의 이념이 일치하는 정책을 끝까지 관철했다.

셍고르 대통령은 아프리카의 전통문화를 고집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 외국의 문화들도 경우에 따라 존중히 여기는 넓은 마음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옛날 아프리카의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소중한 <나눔의 이념>을 귀중히 여기고 따라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었다.

셍고르 대통령은 정치 외에도 문학 작가로서 많이 활동했다. 그는 노벨 문학상의 수상자로서 작품 활동을 통하여 프랑스의 당대의 문인들 앙드레 지드, 알베르트 카뮈, 장 폴 사르트르 등 프랑스의 유명한 문인들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그들은 셍고르 대통령의 뛰어난 문학성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했다.

셍고르 대통령은 극히 예외적인 지도자이었다. 아프리카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권력 이양을 오직 쿠데타의 방법만을 사용하고 있지만 셍고르 대통령은 스스로 정권교체를 결정하고 20년 동안 평화적으로 집권한 후에 역시 평화적으로 스스로 퇴임을 결정했다.

셍고르 대통령의 정치적 통치 이념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세네갈 국가의 자주권적 존엄과 민족애의 인덕정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민족의 대단합을 지향하여 여러 종류의 부족들과 <이슬람-기독교의 평화공존>의 대원칙을 통치이념으로 삼고 자기 자신이 솔선 실천하여 민중들의 절대적 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셍고르 대통령은 국무총리인 압두 디우프에게 20년 전통의 사회주의 정권을 평화적으로 이양해 주고 1980년에 권좌에서 조용히 물러났다. 셍고르 대통령으로부터 평화적으로 사회주의 정권을 계승받아 세네갈의 제2대 대통령이 된 압두 디우프 대통령은 1981년 1월 1일에 취임을 했다.

하지만 세네갈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압두 디우프 대통령의 정권은 집권초기부터 예상 외의 많은 난관에 봉착하였다.

3. 압두 디우프 대통령의 무원칙 절충과 제3의 길



셍고르 대통령이 건설한 풍미로운 세네갈 사회주의 20년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 뒤를 계승한 압두 디우프 대통령은 이른바 ‘제3의 길’을 주장하며 무원칙한 절충을 시도함으로서 많은 혼란과 난관을 자초하고 있었다.

디우프 대통령은 마치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18년간 집권하면서 영국 노동당의 당수로서 무원칙한 절충을 시도하여 영국의 전통 사회주의에서 뒤로 물러선 것과 같은 모양이 됐다. 토니 블레어는 영국의 전통 노동당의 사회주의 노선에서 후퇴하여 사회개혁운동과 거리를 두어 20세기 서방세계의 진보정치를 결정적으로 위축시킨 장본인이다. 이러한 토니 블레어를 가리켜서 <미국이 길들인 푸들강아지>라고 만화 정치평론가들은 풍자하기도 했다.

디우프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무원칙 절충으로 인하여 영국의 토니 블레어가 되고 있었다. 셍고르 전임 대통령이 건설해 놓은 사회주의 국가의 나침판을 잃어버리고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압두 디우프 대통령이 봉착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에 대하여 그 원인과 해결책이 어떠했는가를 간략하게 살펴본다.

첫째, 1981년에 이웃 나라 캄비아에서 좌파 <민족해방혁명회>가 혁명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디우프 대통령은 좌파 혁명 쿠데타를 지원해 주지 않고 오히려 병력 3,000명을 파견하여 좌파 쿠데타를 진압해 버렸다.

세네갈과 캄비아는 역사적으로 한 민족 한 국가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가 제 멋대로 한반도에 38선 긋듯 세네갈과 캄비아 사이에 금을 그어 놓음으로서 세네갈과 캄비아는 분열되어 두 나라가 됐다.

그럼으로 디우프 대통령은 당연히 분열의 역사성을 감안하여 캄비아에서 발생한 좌파혁명 쿠데타를 지원하여 양국을 통일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야 했었다.

하지만 디우프 대통령은 오히려 병력 3,000명을 파견하여 통일을 위한 좌파의 쿠데타를 진압했으니 집권 초기부터 디우프 대통령의 정체에 대하여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디우프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 헌법을 개정하여 복수정당제를 도입해 세네갈에 두개였던 정당을 갑자기 10개로 늘어나게 했다. 서방의 제국주의자들은 이른바 <다당제 선거전략>을 단골 방법으로 이용, 나라를 사분오열시켜 민족의 단결과 단합을 막아 침략과 약탈에 유리한 조건을 만드는 일을 자주 자행하였다.

디우프 대통령은 이러한 수단방법을 미처 깨닫지 못했거나 미국에 이미 매수된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디우프 대통령은 집권초기에 농부들의 정식 수출량의 3배에 해당되는 땅콩 70만 톤의 엄청난 수량을 밀수출하여 착복했다. 이것을 국민들이 알게 되어 그의 집권에 대한 두 번째 위기상황을 초래하였다.

셋째, 세네갈 남부의 카자망스 주는 아주 작은 주이다. 하지만 이 작은 주는 역사적으로 졸라부족의 본거지이며 특히 졸라족은 세네갈에서 유일한 가톨릭교도들이 절대 다수인 부족 이다. 절대 다수가 가톨릭신도인 이 카자망스 주의 부족이 <카자망스 독립운동>을 조직하여 이슬람 국가인 세네갈에서 독립을 주장하면서 무장투쟁을 선포하고 있었다.

카자망스의 독립운동과 무장투쟁의 시작은 의심할 여지없이 미국과 프랑스의 개입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디우프 대통령의 정권을 불안하게 만들어 놓고 셍고르 대통령이 창건한 사회주의 정치노선을 포기하게 만들기 위한 미국 CIA 공이 분명했다. 이 독립운동은 세네갈의 큰 내란으로 발전하였다.

카자망스의 독립투쟁은 아무 성과도 없이 다만 디우프 대통령의 정권 집권초기부터 마지막까지 계속하여 서로 밀고 당기는 혼란 속에서 사상자만 수십만 발생하고 또 수없이 많은 이재민들이 발생하여 정권을 흔들어 놓는 내전만 계속되고 있을 뿐이었다. 독립이 목적이 아니라 내전을 일으키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넷째, 세네갈의 오랜 내전의 주동 세력의 지도자는 ‘압둘 와드’ 였다. 와드는 내전 중인 반군 지도자로서 디우프 대통령에게 큰 골칫덩어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디우프 대통령은 할 수 없이 와드를 체포하여 감옥에 수감해 놓았다.

하지만 프랑스는 디우프 대통령에게 은근히 압력을 가하여 와드를 석방하여 디우프 대통령 정부의 행정조직에 합류하도록 노골적으로 요청하기까지 했다. 프랑스는 와드를 훗날 세네갈의 차기 대통령으로 지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 역시 미국 CIA 공작이 확실했다.

다섯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72년 9월에 세네갈과 수교를 시작하여 상주공관을 개설했으며, 1974년에는 셍고르 대통령이 조선을 친선 방문하여 두 나라 사이에 교류를 활발하게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디우프 대통령 정권이 친 서방 외교로 급전환함에 따라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양국은 상주대사관을 폐쇄하고 조선은 주 기니대사가 겸임하는 조치를 취했다.

한편 디우프 대통령은 1984년 7월9일부터 12일까지 4일간 서울을 방문하여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한국의 체신부는 디우프 대통령의 방한을 기념하여 기념우표를 발행하기까지 했다.

결론으로 위의 다섯 가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미국과 프랑스는 세네갈을 사회주의 노선에서 완전히 작별을 고하도록 유도하기 위하여 세네갈의 최소의 부족인 졸라족이 기독교 신도들인 것을 악용하여 <기독교 분리독립>이라고 하는 분쟁의 씨를 뿌렸다. 세네갈에서 셍고르 초대 대통령이 심혈을 다하여 기독교- 이슬람교 두 종교 사이에 융화와 평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어 놓았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종교적 평화공존의 나라가 바로 세네갈이었다.

하지만 디우프 대통령은 이것을 완전히 망쳐놓았다. 미국과 프랑스는 교묘하게 뒤에서 작용하여 디우프 대통령으로 하여금 파괴적 정치를 하도록 유도했다.

미국과 프랑스는 세네갈에서 이루어 놓은 종교들 간의 평화와 공존의 역사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제국주의적 침략의 야욕을 채우기 위하여 종교적 분쟁을 계획적으로 조작하여 수십만의 사상자와 수백만의 이재민이 발생하도록 공작을 함으로서 세네갈의 분쟁과 이재민의 문제는 어제와 오늘 또 미래에도 여전히 지속되리라고 전망되고 있다.

4. 세네갈의 제3대 와드 대통령은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



2000년 3월에 실시한 선거에서 디우프 대통령은 압둘 와드에게 참패를 당했다.
미국 제국주의는 제3세계를 지배하는 최선의 수단 방법으로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을 활용하고 있다.

허울 좋은 인프라 우선주의, 민간기업의 끝없는 욕심증진방법 그리고 돈을 앞세우는 부정선거 방법 등을 이용하여 미국이 매수한 후보자를 반드시 당선시키는 선거 전략을 미국은 어느 나라에서나 활용하고 있다. 한국도 절대로 예외는 아니어서 정권마다 선거마다 미국이 개입한 흔적이 적지 않다.

디우프 대통령은 사회주의에서 뒤로 물러선 후 자기 나름대로의 새로운 세계화의 정치적 이념에 맹종한 결과로 디우프 대통령 자기 자신이 스스로 걸려든 함정에 빠져서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바로 낙선되었던 것이다.

선거전에서 두 후보자가 팽팽히 맞섰다. 그러나 제2차 결선 투표에서 디우프는 패배했다. 그는 부정선거를 주장하면서 항거했다. 하지만 그는 대세에 몰려 결국 승복하고 와드 당선자에게 축하의 전화를 걸고 권좌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디우프 대통령이 고전 끝에 결국 권좌에서 물러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사회주의자 셍고르 대통령이 이룩해 놓은 20년 전통의 사회주의 국가의 역사를 후임자로 등장한 디우프 대통령이 제대로 계승하지 못한 것을 뜻한다.

왜 계승하지 못했는가? 그것은 사회주의 정권을 계승하지 못하고 단절되도록 미국이 흉계를 꾸몄기 때문이다.

권좌에서 물러난 디우프는 놀랍게도 2003년에 <프랑코프>의 사무총장이 됐다.
프랑코프는 무엇인가? 프랑코프는 전 세계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는 <불어권 나라들의 연합단체> 조직이다. 이 조직에는 캐나다의 불어권 퀘벡주를 비롯하여 프랑스 어를 사용하고 있는 50여 국가들이 가입된 국제적 조직이다.

옛날의 종주국 프랑스는 오늘에도 <프랑코프>를 운영하면서 직접 혹은 간접으로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지배권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런데 세네갈의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디우프가 하필이면 프랑스의 하수인격인 <프랑코프>의 사무총장이 됐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를 또 다시 한번 놀라게 만들고 있다.

세네갈의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 압둘 와드는 누구?

압둘 와드는 1974년부터 세네갈 민주당의 당수로서 셍고르 대통령의 사회주의 정권을 처음부터 온건한 방법으로 반대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제2대의 디우프 대통령의 시절에 들어서서 그는 보다 더 거센 항전을 전개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투옥당하는 강력한 야당 지도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정권교체를 향하여 맹렬한 정치적 투쟁을 계속하여 지금까지 4번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 드디어 제3대 대통령이 됐다.

제3대 와드 대통령은 프랑스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 지식인이며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에서 변호사직과 법대의 교수직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또 미국 Boston대학에서 초빙연구교수와 파리에서 한 때 교수생활도 했다. 그는 영어와 불어에 능통하여 저서도 출판했고 음악에는 violin, guitar에도 수준급이다.

와드 대통령은 2000년 3월에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집권 초기부터 친 서방 행각을 시작하여 미국과 프랑스에 자주 방문한 것을 비롯하여 심지어 대만을 방문하여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면서 선진국의 원조를 끌어들이는데 열중했다.

와드 대통령의 독자적 친 서방 외교에 대하여 아프리카 나라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있었다. 이것을 눈치 챈 와드 대통령은 비판을 피하기 위하여 <오메가 플랜>을 제창하여 선진국의 자본을 아프리카에 공동으로 끌어 드림으로서 선진국과 함께 개도국들 모두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괴변을 주장하기도 했다.

와드 대통령은 헌법을 개정하여 임기 5년제를 도입하여 3선을 허용하는 법을 채택했으며 의회의 의석을 압도적으로 확보하여 장기집권의 포석을 튼튼히 했다.

세네갈의 고질적인 문제인 카라망스 지역의 독립운동과 반군이 일으킨 내전의 문제가 와드 대통령에게도 무거운 부담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세네갈을 방문한 기회를 이용하여 내전의 문제는 눈 녹듯이 사라져 없어지고 말았다. 부시 대통령의 세네갈 방문으로 카라망스 지역 내부에서 <자체분열>이 발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럼으로 결국 와드 대 통령은 부시 대통령의 방문의 덕분으로 인하 세네갈의 오래된 고질적인 내전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와드 대통령 정부와 반군은 양측 오랜 투쟁에 대하여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반군은 무장해제를 했다. 너무나도 쉽게 오랜 반군의 내전문제가 해결되고 말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국은 약소국에서 필요할 때는 반군을 만들어 놓고 서로 싸우도록 내전을 일으킨다. 하지만 내전이 필요하지 않을 때는 반군들의 내부에서 서로 분열하도록 공작하여 분산시킴으로서 내전문제를 눈 녹듯 스스로 해결하도록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2007년 3월에 와드 대통령은 재선에 당선되어 집권을 계속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동안 쌓이고 쌓인 부정부패와 강권에 의한 부정선거로 인한 야당들의 법적 고발 소동에 직면했다. 뿐만 아니라 와두 대통령은 모리타니 백인 정권에서 피란하여 세네갈에 수용 중에 있는 흑인 피란민 2만 명 처리문제로 인하여 국내에서와 국제적으로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편 WikiLeaks의 세네갈에 대한 비밀문건 폭로에 의하면 주 세네갈 미국대사와 CIA는 와드 대통령의 목을 조르는 심문을 통하여 와드 대통령 행정부의 부패문제, 세네갈의 9/11연결과 돈세탁문제 그리고 와드 대통령의 아들의 장관등용문제들을 비롯하여 와드 대통령의 부정과 지나친 독재에 대하여 강력히 추궁했다. 미국은 미국에 부담이 되는 정치문제를 가지고 와드 대통령을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미국의 목을 조르는 추궁에 대하여 와드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내정간섭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어쨌든 와드 대통령은 미국과 프랑스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막대한 달러의 지원 받고 있으며 또한 서방의 기술지원과 개발을 위한 자본유치를 위하여 와드 대통령은 여전히 서방의 제국주의 나라들과 밀접한 유대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2009년 11월의 외신 보도에 의하면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에서는 매일 같이 수천 명의 시민들이 길 거리에 밀려 나와 반정부 시위를 벌리고 있다는 보도를 했다. 왜냐하면 IMF 대표가 임기를 마치고 세네갈을 떠나가는데 와드 대통령은 35만 달러의 뇌물을 그에게 비밀로 전달했다는 것이다.

와드 대통령은 자기가 속해 있는 부족에게 너무 편파적이며 또 정권의 부패가 최고점에 이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나이가 83세 임에도 불구하고 2012년에 재집권을 위하여 욕심을 부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과 조건하에서 세네갈에 이변의 징조가 나타났다. 그 이변은 무엇인가?

와드 대통령은 사면초가의 난국을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금까지 서구 편향적인 외교에서 벗어나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국가들과 우호관계를 강화하고 있으며 빈라덴 그룹과도 경제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와드 대통령은 최근에 그의 정치적 행태에서 많은 변화를 갑자기 일으키고 있다. 자연과학의 진화론자들의 말에 의하면 진화과정에서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이른바 <돌연 변이>가 발생한다고 한다.

그 와드 대통령의 <돌연 변이> 관련 몇 가지 징조를 살펴본다.

ㄱ. 와드 대통령은 2005년에 중국과 외교관계를 복원하고 대만과의 단교를 전격 선언했다. 이것은 미국에 거슬리는 결단이었다. 그리고 또 와드 대통령은 이란과 베네수엘라 등 반미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의 의지를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눈치를 개의치 않고 독자적인 결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ㄴ. 와드 대통령은 중남미 아이티에서 큰 재난으로 극심한 빈곤에 처한 난민을 세네갈로 대량 이주시켜 그들이 새로운 삶을 세네갈에서 시작하도록 적극 도와주겠다고 선언했다.
와드 대통령은 아이티의 국민은 본래 세네갈과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같은 동족이라 밝히면서 백인들의 노예무역으로 인하여 세네갈의 동족인 조상들이 강제로 아메리카로 끌어간 비극적인 역사를 공격적으로 밝히고 있다. 와드 대통령은 미국과 프랑스 백인 제국주의에 대한 간접적 항의를 아이티의 재난문제를 통하여 표하고 있다.

ㄷ. 와드 대통령은 기독교인들이 믿는 <예수>를 인성적 인간으로 비유하는 발언을 하여 천주교 대주교는 와드 대통령을 비난했다. 하지만 와드 대통령의 발언의 참뜻은 어느 대상에 대하여 그 대상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숭배를 한다면 비록 <예수>일지라도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와드 대통령의 이와 같은 발언을 깊이 있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서방의 기독교계는 일제히 와드 대통령의 발언을 문제 삼고 있다.

ㄹ. 와드 대통령은 세네갈 립 50주년 기념일 2010년 4월 4일에 전국에 방영된 TV 방송에서 중대한 발표를 했다. 그 발표는 세네갈 역사에 중대한 발표였다. 세네갈에 아직도 주둔하고 있는 프팡스 군을 완전히 철수시키겠다는 발표였다.

프랑스 식민통치에서 독립된 지 50년이 됐는데도 아직도 프랑스군 기지가 세네갈에 잔존하고 있으며 1,200명의 프랑스 군이 기지에 주둔하고 있는 실정이다.

와드 대통령은 독립 50주년 기념 TV 방송에 프랑스군의 완전한 철수와 프랑스 군대기지의 완전한 철폐에 대한 선언을 발표했다. 지금까지 외세 의존적 역사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단호한 <돌연 변이>적 결단의 선언이었다.

ㅁ. 세네갈 독립 5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술진이 제작한 대형 조형물이 세네갈에 우뚝 건립됐다.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 공항 인근 대서양 연안에 세워진 조형물의 높이는 50m로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보다 4m 높아 아프리카의 대표적 상징물이 됐다.

와드 대통령은 세네갈의 독립 50주년 기념으로 이 대형 조형물을 건축했다고 말하면서 사실 이 조형은 <아프리카 르네상스>의 상징이라고 했다.

특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지원하여 제국주의 침략에서 세네갈이 독립을 쟁취한데 대한 50주년 기념으로 <기념 조형물>을 건립하게 된 것을 설명하면서 와드 대통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술진에 대하여 깊은 감사의 말을 전했다.

2010년 4월4일 독립기념일을 기하여 높이 세워 <아프리카 르네상스>는 일반 시민에게 공개되고 있으며 외국 관광객 유치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고 한다.

세네갈 독립 50주년 기념행사와 제막식에는 아프리카 20여 국가수반들이 대거 참석했으며 미국의 제시 잭슨 목사 등 수천 명이 참석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이 제막식에 참석했다. 와드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김영남 상임위원장을 향하여 조선의 유능한 기술자들에 의해 <아프리카재생기념비>가 건설 된데 대하여 만족하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깊은 감사의 뜻을 표현했다.

위의 모든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와드 대통령의 놀라운 <돌연 변이>는 놀랍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와 모습들이며 지칠 줄 모르는 약소국가들의 반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의 역사가 잘 표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맺으며...


세네갈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문화수준이 높은 나라 중 하나로 알려진 나라이다. 그래서 그런지 쿠데타가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나라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초대 대통령이 된 나라이다.

하지만 세네갈은 천만 명의 노예들을 수출한 <노예 섬>이 아직도 그냥 남아 있는 비극적 역사의 상징이다. <노예 섬>에 보관되어 있는 노예 수출의 다양한 유물들은 세네갈의 비극의 역사를 그대로 말해 주고 있다.

셍고르 대통령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는 오직 세네갈에서만 볼 수 있는 지도자였다. 하지만 미국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세네갈은 그저 종이 한 장의 차이로만 보일 뿐일 것이다. 미국은 셍고르 대통령을 대수롭게 보지 않으려고 눈을 돌린다.

MBC 보도에 의하면 2009년 9월 15일에 미국을 방문한 와드 대통령은 미국정부로부터 5억4천만 달러의 원조를 받기로 하고 만족하여 돌아왔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필자는 와드 대통령의 이와 같은 정치적 행태에도 불구하고 <돌연 변이>의 징조가 나타나고 있는데 대하여 희망을 가지고 기다려 보기를 주장한다.

만일 와드 대통령이 2010년 4월에 세네갈의 <아프리카 재생기념탑> 제막식에서 행한 그의 의미 깊은 연설이 진짜라면, 1년 전 2009년에 미국에서 달러를 구걸한 행위의 망령을 쫓아내기 위한 <돌연 변이> 씻김굿 발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망을 가지고 참고 기다려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가 왔다갔다했을 지라도…

필자는 와드 대통령이 <아프리카재생 기념비> 제막식에서 발언한 그의 뜻깊은 발언들을 종합하여 생각해 보면서 세네갈의 자주자립의 국가 재건을 기원하는 심정으로 아직은 와드 대통령에게 성원을 보내고 싶은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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