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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57]미국만 지지하면 장기집권 가능<br><br>서아프리카 기니와 모리타니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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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12-23 22:12 조회2,5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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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이번에는 민족통신 [연재-57]번째로 한 나라의 독재와
빈곤의 문제를 대처하고 해결하는 과제는 두가지 차원에서 론의할 수 있다. 첫째는 국제적 영역에서
군소국가들이 지역적으로 결합하고 교류 하는 정략적 동맹과 협력을 통하여 대응하는 방법이 있다.
둘째로 독재와 빈곤의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개별적으로 제각기 각국가들이 강력한 국방력과 대외정책을
모색함과 동시에 대내적으로 자주자립하는 경제체제와 사회정책을 세우는 길이 매우 중요한 대응방법이다.
라는 그의 논문을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57]미국만 지지하면 장기집권 가능

서아프리카 기니와 모리타니의 어제와 오늘



<##IMAGE##> 한 나라의 독재와 빈곤의 문제를 대처하고 해결하는 과제는 두가지 차원에서 론의할 수 있다. 첫째는 국제적 영역에서 군소국가들이 지역적으로 결합하고 교류 하는 정략적 동맹과 협력을 통하여 대응하는 방법이 있다. 둘째로 독재와 빈곤의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개별적으로 제각기 각국가들이 강력한 국방력과 대외정책을 모색함과 동시에 대내적으로 자주자립하는 경제체제와 사회정책을 세우는 길이 매우 중요한 대응방법이다.

하지만 어제와 오늘 서아프리카의 군소국가들이 처하고 있는 독재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응방법을 근본적으로 가로막고 봉쇠하고 있는 세력은 다름아닌 바로 미국이다.

미국이 제시하는 국제금융자본과 미국식 시장경제체제와 무역개방 자유화를 개발도상국들에게 발전모델로 삼도룩 강요하고 있으며 또 군사력으로 압제하고 있는 조건하에서는 서아프리카의 군소약소 국가들이 당면하고 있는 독재와 빈곤의 문제는 오히려 약자들의 무덤만 점점 더 늘어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린이 초등학교에서 부터 사회 전반에 이르기까지 강자와 승자독식의 사회구조속에서 자유와 번영이라고 하는 허울 좋 은 이름하에서 무자비한 경쟁만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며 성공의 길이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제시하고 있는 <워싱턴 중심>의 세계화의 질서인 것이다.


서아프리카 나라들 중에서 모리타니와 기니
두 나라 역사의 명암을 알아 본다.


1. 거대한 사막의 나라 모리타니의 간추린 역사


모리타니는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나라로 국토는 1,030,700km며 한반도의 4.4배로 크다. 하지만 국토 3분의 2이상이 사막이고 좁은 록초지대안에서 인구 310만명이 모두 다 뫃여 살고 있는 작은 나라이다.

모리타니의 인종은 백인계 무어족이 30%이고, 흑인계 무어족이 40%이며 그리고 아프리카계 혼혈흑인들로 인구가 구성되여 있다. 하지만 모리타니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적 엘리트층을 백인계의 무어족이 전적으로 독차지 하고 있다. 백인계 무오족은 우월감이 매우 강하여 그들은 모든 사람을 피부색으로 판단하면서 백인들만이 진정한 모리타니인 이라고 주장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언어는 아랍어가 공용어 이지만 일상용어로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종교는 100% 순니파 이슬람교이다. 정부형태는 공화제로 비동맹 중립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모리타니는 실제로는 서방의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유대관계를 유지 하고 있으며 독립후 모리타니의 현대사는 쿠테타로 점철되고 있다. 쿠테타로 정권을 탈취한 세력들은 국제관계에 있어서 강대국 위주로 정치적입장 표명을 이리저리 유리한 방향으로 혼돈함으로 인하여 늘 나라와 국민을 혼란에 빠지도록 오도했다.

모리타니는 고대로부터 북아프리카 흑인들이 유목민족 생활을 하면서 사하라 최초의 농업 생활방식으로 정착했다. 10세기경까지 흑인들이 이땅을 지배했다. 하지만 11세기경 부터 아랍인 베르베르인이 북쪽에서 남하하여 점차 이슬람화 하면서 이 지역의 지배세력이 되고 있었다.

그 후 15세기에 이르러서 유럽인들 네덜란드인, 프랑스인, 영국인들이 진출하여 서로 이권을 위하여 치열하게 수세기 동안 경쟁을 하다가 1903년에 프랑스의 보호령이 됬다. 1920년에는 모리타니는 프랑스 서아프리카통치 제도에 편입되여 지배를 받았다. 1958년에는 프랑스 공동체 내에서 자치국이 되였다. 그러다가 아프리카 독립의해인 1960년에 모든 아프리카 나라들이 독립할 때 모리타니도 11월 28일에 독립국이 됬다.

1961년 8월에 닷다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1964년에 사회주의적 정치기반을 튼튼히 다지는데 주력하여 외세를 배격하고 신생 사회주의적 자주국가 건설에 전념하여 위대한 대통령이 됬다. 하지만 종주국 프랑스와 세게적으로 냉전시대를 관리하고 있던 미국은 비록 사막지대의 작은 나라에 이르기까지 좌경화 정부가 들어서는것을 방관하지 않았다.

1978년 군인들의 무혈 쿠테가 일어나 닷다 대통령 정권을 붕괴시키고 군인들이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나라를 통치하다가 1980년 1월에 하이다라 군사위원회의 수상이 제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사회주의적 노선을 원천 봉쇠했다. 하지만 제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하이다라 대통령의 임기는 1년을 다 채우지를 못하고 1980년 12월 12일에 또 다른 군부 쿠테타로 체포되여 8년동안 감옥생활을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번의 쿠테타의 주역은 역시 군인 출신인 타야 전 수상이였다.

쿠테타에 성공하여 제 3대 대통령이된 타야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미국이 전적 으로 지원하는 탄탄대로에서 자신있게 통치할 수 있게 됬다. 타야 대통령은 백인 우월주의자로서 흑인계 부족지도자 500명을 처형하는 만행을 했다.타야 대통령의 흑인 학대 정치를 피하여 20만명의 흑인들이 이웃나라 말리와 세네갈등 여러 나라로 피신하였다. 이로 인하여 1989년에는 수도 누악쇼트에서흑인들이 반정부 폭동을 이르켰으며, 타야 대통령은 흑인들게 더 가혹한 강경진압을 감행하여 극제사회에서 여론이 악화됨으로 미국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타야 대통령은 세계의 안목을 기만아기 위하여 1991년에 장기집권에 필요한 법률을 제정하여 의회에서 통과시켰으며 1992년 1월에 친정부 여당과 군부의 전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재선되여 장기집권의 길을 열어 놓았다. 1997년 12월에 대통령 선거에서 타야 대통령은 또 다시 재선되였으며 그리고 2003년 11월에 실시한 선거에서 그는 3선에 또 다시 성공했다. 하지만 타야 대통령의 21년 장기집권 기간에는 중반기와 후반기에 이르러서 절대로 평탄치 못하고 항상 정치적 문제에 봉착하여 사면초과의 곤경에 뻐졌다.

타야 대통령이 곤경에 빠진 그 이유와 상황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ㄱ. 타야 대통령의 재선 선거 때 마마 관권에 의한 부정선거가 늘 폭로 됬다. 하지만 군부와 미국의 배경으로 부정선거 시비와 폭로는 아무 효력이 없이 지나가고 타야 대통령은 끄떡 없이 정권을 유지했다.

ㄴ. 타야 대통령의 친미정권에 대하여 이슬람 원리주의 민중들의 거센 반항과 또흑인 유권자들의 선거기권으로 인하여 투표인의 수가 항상 미달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거무효 소동이 선거 때 마다 일어나 장집권에 늘 위협이 되고 었있다.

ㄷ. 타야 대통령은 모리타니 특유의 백인 우월주의 기득권을 철저히 유지하고 고수하는 정치체제를 확보하여 능수능란하게 정치를 하여 장기집권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타야 대통령의 마지막 운명을 비참하게 만드는 결과가 됬다.

ㄹ. 타야 대통령은 장기집권을 위하여 미국이 시키는대로 이스라엘을 승인하고 국교를 맺는 어처구니 없는 정책을 취함으로 국내는 물론 이락등 아랍세게에서 고립되기 까지 했다. 하지만 타야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단교를 요구하는 야당을 오히려 탄압하여 야당들의 정치활동을 원천 봉쇠하고 금지하는 독재를 했다.

ㅁ. 미국은 타야 대통령의 재선을 위하여 돈과 CIA의 지원을 제공했으며, 강력한야당의 대통령 후보자들의 당선가능을 탄압하여 락선하도록 불리하개 역할했다.

ㅂ. 모니타니에서 석유가 발견되여 미국은 군사전문가를 파견하여 시추작업을 시작했으며 모니타니인 기술자들을 미국이 직접 훈련시키고 있었다. 그럼으로 미국은 타야 대통령을 끝까지 옹호하고 지원하면서 굶주린 모리타니의 민중들의 비참한 모습에는 무관심하고 민중들을 깔보고 무시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모리타니의 정치상황이 사면초과에 이르렸을 때 2005년 8월에 타야 대통령이 사우디 아라비아에 출장중인 기회를 이용하여 국내에서 모하메드 발 대령이 주도하는 쿠테다가 발생했다. 타야 대통령은 쿠테타로 인하여 출장중에서 감히 귀국을 하지 못하고 이웃나라 니제르로 피신하는 신세가 됬다.

쿠테타를 주도한 발 대령은 국민앞에 선언하여 <나는 절대로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는다. 2년후에 민주적으로 대통령선거를 실시한다>라고 분명히 굳게 약속했다.
발 대령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민중앞에 약속대로 2년후에 자가자신 은 출마하지 않고 대통령에 출마한 후보자 19명중에서 선거를 통하여 압달라히가 대통령에 당선되여 21년의 독재정권을 타도하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이번 모리타니 대통령 선거는 UN이 감시하고 관여하는 공명선거로 평가됬다. 그리하여 2007년 3월 25일에 압달라히가 4번째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압달라히 대통령은 가정문제로 특히 대통령 부인의 대형 부정축제 문제가 발생하여 집권초기부터 시달리다가 1년후에 사임압력에 의하여 그만 대통령직을 사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UN의 감시하에 실시된 공명한 선거로 당선됬지만 1년후에 대통령의 사사로운 가정문제로 인하여 퇴임을할 수밖에없게 됬다.

압달라히 대통령은 집권한지 1년만에 모리타니 의회의 의원 95명중에서 69명의의원들로부터 부패와 무능등 이유로 대통령직에서 사임할것을 압력을 받았다.

이와같은 혼란속에서 모리타니는 1960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에 4번재 쿠테타가 2008년 8월에 또 다시 발생했다. 이 쿠테타는 대통령 경호부대 사령관인 압델 아지즈 대령이 주도한 쿠테타이다. UN의 감시하에 선거가 실시되여 겨우 설립된 정권 인데도 불구하고 1년만에 붕괴되고 또 다시 쿠테타가 발생하였던것이다. 압달라히 대통령은 쿠테타군부에 의하여 감옥에 연금된 상태에 있었다.

미국과 유럽등 서방의 국제사회는 일제히 압델 아지즈 사령관의 쿠테타를 맹비난 하고 나섰다. 미국과 유럽연합 그리고 세계은행은 앞서 모리타니에 약속했던 수십억 달러 대규모의 원조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현직 대통령의 도중하차로 인하여 발생한 공백기간을 신속히 대처하기 위하여 대통령궁 보호부대의 사령관이였던 압델 아지즈 사령관이 쿠테타를 주도하여 정권을 장악한 것은 불가피한 비상대책으로 평가됬다.

어쨌던 21년동안을 미국을 배경삼고 장기집권한 타야 대통령의 독재정권을 붕괴 시키고 오늘에 이른것은 그 배후에 반제반미의 이슬람세력이 강하게 뒷받침하고 작용한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또한 오래동안 탄압받던 흑인들의 민권투쟁의 결과였다.


2. 압델 아지즈 대통령이 집권하는 오늘의 모리타니


2009년 7월 18일에 모리타니는 대통령선거를 무사히 치뤘다. 2008년 8월에 쿠테타를 주도한 압델 아지즈가 52.6%의 득표로 당선되였다. 압델 아지즈 대통령은 인구 310만명 중에서 절반 이상이 극빈자인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압델 아지즈 대통령은 이와 같은 최악의 경제를 살리기 위하여 물가인하 정첵과 극빈자에게 <토지무상 제공>하는 사회개혁정책을 주장하여<빈민의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고 있다.

2008년 쿠테타 초기와는달리 미국과 프랑스는 할 수 없이 압델 아지즈 대통령의 정권에 대하여 호의를 표명하는체 하고 있다. 하지만 압델 아지즈 대통령이 취임한지 불과 3일 만에 모리타니의 수도 누악쇼트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하여 프랑스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으며 또 최근에는 미국인 교사가 살해를 당하는 어지러운 사건도 발생했다.

뿐만 아니라 2010년 3월에 압델 아지즈 대통령은 모리타니와 이스라엘과의 외교 관게를 전면 단교한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은 미국을 완전히 당황하게 만들었다.

미국과 프랑스는 모리타니에서 전개되고 있는 여러가지 불길한 증조에 대하여 일절 말하기를 자제하면서 다만 강조하는 것은 이런 사건들이 분명히 알카에다와 연류된 혐의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을뿐이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모로코, 알제리, 리비아등 이웃나라들과 또한 아프리카의 국가수반들이 모두 다 압델 아지즈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는데 대하여 신경을 곤두 세우면서도 유구무언이다.

모리타니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이 4곳이 있다. 11세기에 건설된 아름답고 화려한 모스크가 유명하다. 하지만 런던에 본부를 둔 반노예제도협회의 최근 보고에 의하면 모리타니에는 아직도 백인 무어족 유목민 사이에서 행해지고 있는 <흑인 노예제도>가 법적으로는 공식적으로 페지되였어도 여전히 최소한 10만명 정도의 흑인 노예가 있다고 보고했다.

이것은 프랑스의 오랜 150년 식민통치와 또 독립후 미국이 지원한 독재정권들이도대체 그동안 오늘에 이르기 까지 어떻게 정치를 했는가를 잘 말해 주고 있다.그동안 외세의존적인 모리타니의 역대 정권들은 외세에만 장단을 마추웠을뿐 자국의 내부에서 백인들이 흑인을 노예로 삼고 있는데 대하여는 무관하고 있었다.

조선 민주인민공화국과 모리타니와의 외교관계는 1964년 11월에 수립되였으며 모리타니 사회주의자 초대 대통령인 닷다 대통령은 1967년과 1974년에 조선을 두 번 방문했다. 그리고 김일성 주석은 1975년에 모리타니를 친선의 답방을 하여 두 나라는 역사적으로 친밀한 외교관계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에서 독립한 후에 창건한 <기니인민혁명공화국>


초대 대통령 사회주의자 세쿠 투레 대통령의 위대한 공헌

서아프리카에 흐르고있는 3대 강인 나이저 강, 세네갈 강, 감비아 강들은 모두 다 기니의 산악지대인 푸타잘롱 고원에서 발원하여 기니영토 절반이상을 경유하여 대서양으로 흘러든다. 그리하여 기니는 습한 열대성 기후와 국토의 40%에 이르는 열대우림이 울창하고 여러 종류의 기이한 동물의 천국으로 유명하다. 기니에는 고대로 부터 원숭이, 하이에나, 하마, 코끼리, 멧되지, 영양, 침팬지 그리고 뱀등 많은 야생 동물들이 대량 서식하고 있다.


1. 기니의 간추린 역사


기니는 오래전부터 가나제국 영토의 일부였는데 AD 900년경에 이르러서 북동쪽사막지대에서 수수족이 대량 남하하여 원주민인 바가족을 점령하고 소쏘왕국을건설하여 12-13세기 까지 번창하여 가나제국을 지배했다.

1235년경에 소쏘왕국은 말리제국과의 키리나 전투에서 패망하고 말리제국이 승리함으로 기니는 15세기초 까지 말리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15세기말에 이르러 포르투갈인들이 기니의 해안에 침입하여 그때부터 노예무역을 시작했다. 그때 기니해안 항구에서 시작된 노예무역수출은 몇백년간 지속됬는데 아프리카의 인구의 절반이 넘는 흑인노예들이 기니항구를 통하여 아메리카로 수출됬다.

말리제국은 1400경에 송가이 제국에 의하여 패망하였고 송가이 제국은 1591년에 모로코의 침략을 받아 패망했다. 16세기부터 기니는 이슬람 플라니제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는데 플라니제국은 19세기까지 존속하면서 기니 주민들에게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하여 지하드 성전을 맹열히 전개하고 있었다.

19세기초에 프랑스인들이 기니해안에 상륙하여 식민지개척을 시작했으며 1849년에는 기니를 프랑스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또한 프랑스는 기니와 세네갈을 통합하여 함께 식민통치했다. 뿐만 아나라 프랑스는 해안지역에 있는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을 합병하여 프랑스 보호령으로 통치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1878년에 원주민들의 거센 항전에 부디쳤다. 원주민의 통치자 사모리 투레는 기니해안 상류에서 이슬람 와술루 제국을 창건하여 원주민 전사들이 프랑스군에 저항하여 투쟁했다. 원주민 전사들의 투쟁은 1898년까지 지속되여 20년동안 싸웠다. 하지만 화약으로 무장한 총포를 소유하고 있는 프랑스군에원주민 전사들은 패망할 수 밖에 없었다. 원주민의 통치자 사모리 투레는 프랑스군에 체포되여 가봉으로 추방되였고 원주민 저항군은 패망하고 말었다.

프랑스는 1940년대 이르기까지 100년동안 기니를 비롯하여 북족 세네갈에서 부터 서해안을 따라 남쪽의 라이베리아에 이르기까지 서아프리카의 전역을 점령하여 식민지 통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식으로 인하여 아프리카에는 서구의 여러 나라들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해방과 독립운동이 일제히 시작되고 있었다.

1948년에 기니의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 세쿠 투레는 <아프리카민주연합>에가입하고 <기니노동조합연맹>을 조직하여 서기장을 맡아 기니의 독립은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세쿠 투레는 누구인가?

세쿠 투레는 1878년부터 1898년까지 20년동안 프랑스의 침략에 항전하여 프랑스군과의 전투를 지휘한 원주민 항쟁운동의 지도자인 사모리 투레의 손자이다. 세쿠 투레는 50년전에 기니를 침범한 프랑스를 걱퇴시키기 위하여 프랑스에 항전하여 용감하게 싸운 사모리 투레 할아버지의 고귀한 애국적 혈통을 이어 받은 손자이다. 세쿠 투레는 고귀한 혈통을 이어 받아 오늘의 기니독립을 위하여 <아프리카노동 총연맹>을 조직하여 맹렬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세쿠 투레는 자가자신이 노동자 출신임을 항상 자부하고 있었다.

1958년 10월 2일에 기니는 세쿠 투레의 지도하에 프랑스 식민통치공동체에서 탈퇴하여 독립을 쟁취함으로서 아프리카 최초의 독립국이 됬으며 동시에 UN에 가입했다. 세쿠 투레는 기니민주당의 지도자로서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기니는 전체 면적이 245,857km2 세계 78위이며, 인구는 9,402,000명으로 세계 83위로 기록됬다. 주요 부족은 풀라니족, 말링케족 그리고 수수족이 있다. 종교는 이슬람이 75%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언어는 프랑스어가 공용어 이다.

기니는 보크사이트 매장량이 세계 3위이며 생산량도 세계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기니의 공업 발전을 위하여 과거에 구소련의 지원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또한 중국의 원조로 기니에 철도가 처음 건설되기도 했다.

2. 세쿠 투레 대통령의 통치 이념


제 2차 세계대전 종식후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들은 거의 모두가 사회주의적 이념을 기초하여 건국하였다. 오랜 프랑스의 식미통치하에서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들이 대부분 이었다.

특히 기니의 독립운동가 세쿠 투레는 프랑스 식민통치 이전부터 아프리카의 운명과 공동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길은 오직 마르크스-레닌이념을 결합한 아프리카화한 독자적인 사회주의적 국가창건의 추구에 있다고 주장했다.

세쿠 투레 대통령은 사회주의적 신생국가 건설에 있어서의 집단체재의 방향은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민족적 양심주의에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기니에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세가지를 강조했는데 토지공동소유, 부족의 평등 그리고 상호 호헤적 사회평등제도를 주장했다.

세쿠 투레는 기니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족쇠와 가난에서 자유>라는 슬러건으로 사회주의적 국가체제를 추구하였으며 국제적으로 비동맹운동의 회원국으로 참여하고 한편 미국과 프랑스등 서방국가들과의 관계를 경게했다.

세쿠 투레 대통령의 사회주의적 국가 출범에 대하여 염려하고 두려워한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그동안 프랑스가 기니에 설치한 전화선을 모두다 끊어 버리는 만 행을 행했으며 행정기관을 철수할 뿐만 아니라 공문서와 공공시설을 파괴하고 프랑스 자본의 기니유입을 모두 다 봉쇠하는 졸열하고 악날한 조치를 취했다.

프랑스가 지난 100년동안 기니를 점령하고 착취를 하면서 식민지배를 행한데 대한 반성과 보상을 위한 양심의 소리는 전혀 없다. 프랑스는 문명국임을 자처하고 있으면서 특히 역사적으로 기독교국으로 세계선교국임을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신생국 기니에 대하여 취한 졸렬하고 악날한 처사는 강대국의 재정복의 폭력이라고 규탄할 수 밖에 없다. 프랑스는 미개한 기니인들에게 선량한 기독교인으로 인식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니인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약탈을 당했다면 그것은 결국 양국은 모두 다 똑같이 미개한 민족들이 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세쿠 투레 대통령은 1968넌에 제선되여 프랑스를 완전히 멀리하고 사회주의 국가로서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행정과 정책등 모든 분야에서 사회주의 체제를 확립했다. 하지만 얼마 후에 세쿠 투레 대통령은 소련과의 관계가 소원해 지면서 이번에는 중국과 가까워 졌다.

세쿠 투레 대통령은 중국의 모택동식 사회주의국가를 모방하여 기니의 독자적인 문화혁명을 이르켰다. 투레 대통령은 기니의 문화혁명을 파손시키려고 침투하여 방해하고 있는 캐톨릭과 개신교 선교사들을 모두 다 추방했다. 1978년 11월에 푸레 대통령은 기니의 국명을 <기니인민혁명공화국>으로 변경하여 만난을 극복하여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총력을 기우렸다.

세쿠 투레 대통령은 1974년과 1982년에 재선에 성공하여 정부운영의 박차를 가하여 집단농장등 다양한 혁명적 과업을 추진하면서 긴급한 식량문제 해결에 전력을퍼부었다. 하지만 태산같이 높이 쌓인 기니의 고질적인 외세의 방해세력을 물리치고 극복하기에는 항상 한계점에서 부딛치고 고전을 하고 있었다.

1970년에 포르투갈이 주도하여 기니의 극우파 반대세력을 충동질하여 투레정권을 전복시도한 사건을 비롯하여 1980년에는 기니의 석유매장지로 추정되는 대서양 해상지역에 대한 분쟁으로 이웃나라들과의 관계도 악화됬다. 뿐만 아니라 기니의 주요부족인 만딩카 부족과 풀라니 부족사이에 끊임 없는 분쟁도 투레 대통령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었다. 투레 대통령이 국내에서 분쟁을 이르키고 미국이 지원하고 있는 반정부 반대파에 대한 강경대책은 극히 당연한 처사이다.

하지만 미국은 기니의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탄압문제를 국제적 여론에 부각시켜 기니를 인권탄압국가로 국제화할 뿐만 아니라 투레 대통령을 독재자로 민들어 놓고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데 열정이었다. 프랑스도 기니의 상인들과 농산물협동단체 들을 매수하여 반정부시위에 동참하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1984년 3월에 국제적 압력세력과 또한 국내의 반체제 세력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걸국 세쿠 투레 대통령은 견디다 못해 심장마비를 이르켜 사망했다. 세쿠 투레 대통령이 20여년간 장기집권을 하는동안 비록 많은 결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프리카 전체를 대신하여 <반유럽식민과 반제반미>의 선봉자의 역할을 죽는 순간까지 했다는 사실을 역사는 밝히고 있다. 세쿠 투레는 아프리카 대륙의 전체 민중에게 고난당하는 슬픈 유산을 남겨 놓고 떠나 갔다.

미국은 투레 대통령의 사망을 기다렸다는 듯 음모를 감출 겨를도 없이 투레 대통령 사망후 3일 만에 란사나 콩테가 친미 쿠테타를 이르켜 정권을 잡도록 공작을했다. 정권을 잡은 콩테 대통령은 기니의 국명을 <기니공화국>으로 다시 변경하고 선심정치로 구속자들을 전원 석방하고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개혁하고 민주주의 자유를 허용한다고 허울 좋은 모양으로 크게 선전했다.

콩테 대통령은 1984년 4월에 정권을 잡은 후 1993년과 1998년 그리고 2003년에 세번 대선에 승리하여 24년간 장기집권을 했다. 미국이 세워 놓은 친미 외세의존적 대통령이지만 콩테 대통령은 집권 기간에 반정부운동이 심화되였으며 세번이나 쿠테타 시도를 당하면서 겨우 위기를 넘겼다. 특히 2007년에는 역사에 없는 전국적 반정부 대규모 시위로 인하여 18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기니에 서 발생했다.

미국이 지원하는 란사나 콩테 대통령의 집권기간 이지만 24년동안에 게엄령 없이는 도저히 정권을 유지할 수 없었으며 선거때 마다 부정선거 항의로 사망자가 속출했다. 경제정책의 실패와 정권의 부패로 노조의 총파업은 항상 계속됬다. 콩테 대통령 집권후 IMF의 지원이 계속됬지만 IMF는 기니의 만성적 적자운영과 말로만 부르짓는 민영화의 부진 그리고 공공부분의 개혁부진과 부패등으로 인하여 완전히 실패하였으며, UN이 발표한 삶의 질 지수에 의하면 기니는 세계 최하의 국가로 발표됬다.

반정부 시위와 쿠테타 시도에 시달리던 란사나 콩테 대통령은 2008년 12월 22 일에 오랜 당료병으로 사망했다. 기니는 귀중한 천연자원이 풍부하지만 정부의 실정과 강대국들의 착취로 인하여 민중들만 경제난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다.

란사나 콩테 대통령의 사망후 6시간만에 2008년 12월 23일에 기니 군부에 의하여 쿠테타가 즉시 발생하여 헌정이 일절 중지됬다.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다디스 카마라 대위는 방송을 통하여 콩테 전대통령 정권의 모든 정치와 기관의 활동은 일절 중지되고 곧 선거를 통하여 새로운 정권을 창출한다고 발표했다.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다디스 카마라 대위는 반미성향의 군인으로 알려졌으며 그는 1년 후에 민주적 선거를 통하여 정권을 창출한다고 공식 발표를 했다. 하지만 미국은 카마라 쿠테타 군사정권에 대하여 거리감을 가지고 의혹의 눈으로 감시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중국이 다디스 카마라 군사정권을 지원하고 나셨다. 중국은 기니의 막대한 알루미늄 지하자원에 관심을 가지고 7 빌리온 달러를 제공해 주기로 계약을 했다. 란사나 콩테 전대통령의 친미독재정권의 정치노선을 선호하던 일부 우익 기니인들은 분명히 친중국적인 카마라 군사정권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데모를 강행 했다. 물론 미국은 뒤에서 반군정 데모를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카마라 군사정권과 친미데모군중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150명이 사망하고 천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미국은 좋은 구실로 카마라를 압박했는데 카마라 대위는 2009년 12월 3일에 암살기도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총상으로 겨우 살아 남은 카마라는 즉시 해외로 망영의 길을 선택했다.

카마라 대위는 망명 길을 떠나면서 기까운 친구인 군장성 코나태 장군에게 쿠테다 정권의 권력을 완전히 넘겨주고 우선 모로코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모로코에게 압력을 가하여 카마라를 동유럽 어느 나라로 넘기라고 위협하면서 카마라를 국제형사재판에 회부한다고 위협하고 있다. 카마라는 모로코에서 이동하여 기니와 보다더 우호적인 부르키나파소에 머물고 있다.

한편 기니 군사쿠테타 정권을 위탁받은 코나테 장군은 민주정권창출을 위하여 2010년 6월에 민선 대통령선거를 실시했다. 대통령 후보자 24명이 난립한 혼란속에서 과반득표자가 없었음으로 2010년 11월 7일에 제 2차 결선 투표를 했다. 걸선 투표 결과 <기니인민단합당>의 <알파 콩테> 후보자가 52.5%의 득표로 당선이 확정됬다. 하지만 제2차 결선 투표에 대하여 불복을 주장하면서 결선투표 무효를 주장하는 사건이 11월 17일에 발생하여 군부는 비상사태를 선포 했다.

당선자로 발표된 알파 콩테는 52.5% 득표로 기니의 주요 부족인<말린케부족>에 속한다. 이와 반대로 락선된 후보자 달랭 디알로 후보자는 47.5% 득표로 약간 소외된 <플라니부족>에 속한다. 결국 선거 결과에 불복하여 비상사태까지 발생한 내막은 두 부족간에 불화에 근거한 분쟁인 것이다.

그런데 <말링케 부족>은 건국의 아버지 사회주의자 사모리 투레 초대 대통령이 속해있던 부족인고로 당선자 알파 콩테에 대하여 미국이 좋치 못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지나 않은가 하고 필자는 의심이 간다.

<플라니부족>의 선거불복 소동으로 인하여 지금 기니에서 긴급 비상사태가 선포됬고 또 폭동으로 사망자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2010년 11월 18에 세계 언론들은 보도했다.

하지만 2010년 12월 3일에 기니 대법원은 알파 콩테가 대통령으로 당선된것을 국민앞에 분명히 공포했다. 기니의 대법원 공포로 인하여 기니 대통령 선거 소동사태는 일단 끝났다고 본다.


이 글을 끝 맺으며,


유럽의 침략자들이 아프리카에서나 아메리카 땅 어디에서 든지 소수의 군인들이 화약과 총포를 가지고 몇천년된 신전제국을 식은 죽 먹는듯 점령하고 살해할때 죽임을 당하는 원주민들은 유럽인을 <금발에 턱수염을 기른 신들이 나타 났다> 라고 하면서 그들의 종말을 고했다.

죽음을 고하는 그들의 말 그대로 유럽의 침략자들은 신의 명령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디오 이교도의 혐오스러운 우상숭배자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신전을 파괴했다고 자랑하며 고백했다.

정복자들의 발걸음과 자랑과 고백은 어제나 오늘이나 똑 같다. 아프리카 군소 나라들에서 아옌데와 체 게바라의 삶과 죽음을 볼 수 있고 천안함의 폭파 소리와 연평도의 사격 총포속에서 상카라의 최후의 모습과 닷다와 투레 대통령의 장업한 항거외 웨침의 소리를 듣는다.

제국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의 전제가 모순 덩어리다. 칼 든자가 칼 없는 상대방에게 맨 손으로 칼을 만질 자유를 준다면 이게 어디 자유인가?

아프리카에서 모든것 몽땅 빼앗아 가고 난 후에 자유롭게 벌어 먹으라고 말하는 유럽의 종주국들의 논리는 부익부 빈익빈의 논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백인을 더없이 깨끗한 성모로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더러운 창녀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아프리카 군소 국가들의 어제와 오늘의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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