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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레바논: 중동의 유일한 기독교 나라<br><br>"미국의 간섭이 빠지니 레비논에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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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8-29 14:58 조회3,4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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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이번에는 중동의 ≪레바논≫에 대한 고찰을 통해 “나는 이번에
해외 언론<민족통신>에 연재할 글 <레바논>을 연구하면서 중동의 나라들도 서방 열강들에 의해 심한 고통과
고난의 날들을 보내온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서방언론들이 악의 세력처럼 보도해 온 “헤즈볼라”가 나쁜
세력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되었다. 오히려 레바논 기독교세력이 이나라의 밝은 진로를 가로 막아 왔다는
역사를 접하면서 우리 남한의 보수기독교 세력을 떠 올렸다”고 말한다. 그의 49번째 연재글을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특별연재]레바논: 중동의 유일한 기독교 나라

그러나 기독교 세력이 이 나라 발전의 걸림돌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미국 등 고래등에 끼인 새우 레바논


미국과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천국과 지옥이 혼재


<##IMAGE##> 나는 이번에 해외 언론<민족통신>에 연재할 글 <레바논>을 연구하면서 중동의 나라들도 서방 열강들에 의해 심한 고통과 고난의 날들을 보내온 것을 발견했다."미국의 간섭이 빠지니 레바논에 평화가 온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고 서방언론들이 악의 세력처럼 보도해 온 “헤즈볼라”가 나쁜세력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되었다. 오히려 레바논 기독교세력이 이나라의 밝은 진로를 가로 막아 왔다는 역사를 접하면서 우리 남한의 보수기독교 세력을 떠 올렸다.

레바논은 한국의 경기도에 해당하는 좁은 땅에 약 400만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작은 나라이다. 이렇게 작은 나라, 레바논은 한 때 중동의 진주라고 불리였으며 중동의 홍콩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풍요로운 나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레바논은 한 때 중동의 파리라고 여겨지는 아름다은 나라였는데 오래 계속되는 침공과 내전으로 인하여 여행자들의 지도에서 사라져 가는 비운에 처해 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옛날의 레바논은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이 예루살넴 성전을 건축할 때 레바논의 백향목을 보내면서 지원을 했다. 그런데 1958년 이후부터 시작된 레바논 전쟁과 미국과 이스라엘이 계속하여 퍼붓는 폭탄으로 인하여 레바논의 아름다운 백향목들은 완전히 사라져 없어진 상태이다.

레바논은 오랜 고대 역사를 통하여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오스만 터키등 많은 세력들에 의하여 지배되어 왔다. 특히 1516년에 이르러서 오스만 제국이 레바논을 정복하여 19세기까지 지배했는데 이때 이슬람 교도들과 기독교도들 사이에 분쟁이 격화돠고 있었다. 레바논은 중세기부터 중동 지역에서 유일한 기독교 나라가 되었다.

1861년 프랑스가 레바논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 했으며 1918년에 제 1차세계 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전함으로 영국은 이라크를 수중에 넣었고,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하나의 국가로 병합하여 식민통치를 시작 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서방의 강대국들은 식민지 시대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하지만 중동지역에서 완전히 지배의 손을 떼기가 아쉬운 영국과 프랑스는 교묘한 수단을 써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흉계를 꾸몄다. 그 흉계는 국경선을 제멋대로 그 어 놓고 새로운 신생국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지배력을 유지하려는 각본이었다.

이 음모가 바로 <쿠웨이트>와 <레바논>에 신생독립국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이라크의 일부를 떼어내여 <쿠웨이트> 라고하는 신생독립국을 만들어 냈다.

프랑스는 오래 전부터 시리아와 레바논을 병합하여 하나의 국가로써 식민통치를
해왔는데 이번에는 그 병합통치수단을 완전히 포기하고 시리아에서 레바논을 떼어내여 분리된 독립국가를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레바논은 1943년에 새로 창건된 신생독립국이 되었다.

프랑스가 따로 독립시켜 놓은 레바논은 중세기에 기독교의 뿌리가 깊이 내린 기독교 영향권에 속하는 나라이다. 인구의 과반수를 기독교인들이 차지하고 있다. 레바논의 비극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가 꾸민 음모라고 볼 수 있다.

레바논의 독립시기 초창기 상황은 기독교계와 이슬람계의 인맥들이 서로 혼재하여 대립하고 서로 싸우며 혼란을 일으켰던 시기였다. 여기에서 미국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레바논의 기독교 세력을 육성하고 지원해 주었다. 이 때문에 레바논은 독립 초창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67년동안 아랍세계와 서방의 침략세력이 서로 첨예하게 대치하는 치열한 전쟁터가 되어 왔다.

기독교 세력은 <레바논주의 Lebanism>를 주장하면서 완전한 독립국가로서의 레바논 건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이슬람은 <아랍주의 Arabism>를 주장하면서 레바논을 아랍세계의 일부로 편입시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두 세력은 다행히 건국초기인 1943년에 <국민협정>에 합의함으로 일단 갈등과 대립을 해소시키는 듯 보였다. 이 협정에 따라 대통령은 기독교에서, 수상은 이슬람 수니파에서 그리고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에서 맡는 식으로 타협정부가 수립되었다. 새 정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새로 출범한 레바논 정권은 15년을 넘기지 못하고 드디어 1958년에 비극적인 레바논 내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내전이 시작된 근본적 원인은 기독교세력으로 등장한 쌰문 대통령이 독단적으로 과도한 친미와 친서방 노선을 선택하는데 대하여 이슬람 민족주의세력들의 반발로 인하여 시작된 내전 이였다.

레바논의 기독교는 친서방 정치세력으로 튼튼한 자리매김을 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군부와 기독교 민병대를 정권의 힘으로 삼으면서 집권당의 장기집권을 과시하고 있었다. 물론 미국과 이스라엘이 배후에서 막강한 지원을 제공했었다.

레바논의 내전 문제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팔레스타인 난민문제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신생국이 새로 건국 됨으로 인하여 100만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난민이 발생하여 그 대부분이 레바논으로 밀려 들어 왔다.

레바논의 친미적 정권인 기독교세력은 밀려 들어 온 팔레스틴 난민들을 불청객처럼 냉담히 대하면서 정부차원의 구제와 그들의 정착문제에 대하여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면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이슬람 아랍편에서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문제를 국가적차원 문제로 중요하게 여기고 특히 PLO의 레바논 안에서의 활동을 협력하고 지원해 줌으로써 정부와 충돌은 물론이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레바논의 내전문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팔레스타인 난민문제를 올바로 인식해
야한다. 이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중동전쟁에 대하여 대략 살펴 본다.


[1]이스라엘 신생국창건으로 인하여 야기된 중동전쟁


<예수를 죽인 것은 바로 너희들 유대인들이다> 라고 하여 유대인들은 서구의 기독교국들에 의하여 수세기동안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로마제국에 의하여 영원한 망국의 <흩어진 민족, 디아스포라>가된 유대인들은 영국, 독일, 프랑스등 서방의 전형적인 기독교국들에 의하여 심한 박해를 받으면서 유대인들은 러시아와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에 흩어져서 수세기 동안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2,500년동안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가는곳마다 혁명의 비밀결사 조직의 최상부에 튼튼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유럽에서 불길처럼 퍼져나갔던 맑스주의 창시자도 바로 유대인이었다. 소련 공산주의 정권의 최고 지도자들도 모두 다 맑스주의 신봉자 유대인들이었다.

신이 선택한 사람들, 즉 신의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은 오히려 서구의 기독교 문명 사회속에서 무신론을 주장하고 유물론자들과 손을 잡고 기독교의 절멸을 위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원자탄을 만든 과학자와 각종 폭탄과 지뢰가 깔려있는 오늘의 삼엄한 지구를 조종하고 있는 사람들도 역시 모두 다 유대인들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런 유대인들이 어떻게 하여 기독교 개신교의 종주국인 영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서 팔레스타인의 그 좁은 땅에 이스라엘의 국가창건을 이루워 낼 수가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총통이 1935년 5월 19일에 스페인 전승축하 기념식 석상에서 행한 연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스페인은 잠시라도 유대인들에 대하여 안도해서는 절대로 안될 것입니다. 그 동안 스페인을 정복하려고 획책을 꾸며 온 “대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두개의 머리와 두개의 날개를 지니고 있는 “유대적인 괴수”는 절대로 하루 아침에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스페인의 총통은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두 개의 머리와 두 개의 날개를 가지고 양치기 정책을 자유자재로 행동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지적 했다.

독일의 국가사회주의 노동당 당수 (1918년)가 발언한 유대인들에 대한 증언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손이 닿는대로 사민주의 팜플렛들을 모아 저자들의 이름을 보았다. 그들은 모두 다 유대인들이었다. 대중의 무지함과 우리 지도층의 안일함 탓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유대인의 거짓말 공세에 쉽사리 농락을 당하고 있다. 실제로 국가의 은인이 될 수도 있는 노동조합을 이용해서 유대인들은 비유대인 국가의 경제를 파탄시킨다>

<러시아를 손아귀에 넣은 국제유대인들은 독일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독일을 러시아와 비슷한 전철을 밟게될 포식대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만약 유대인들이 맑스주의의 도움으로 세상을 정복한다면 그들의 왕관은 인류의 무덤 앞에 바쳐진 조화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스페인 총통의 지적과 독일의 노동당 당수의 유대인에 대한 논평은 그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들의 지적과 논평은 바로 오늘 21세기에 있어서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유대적 두 얼굴과 두 날개의 양치기 정책에 대한 예언의 말이었다.

오늘 유대인은 유대교를 신봉하면서 기독교 세력를 마음대로 활용하고 있으며 또한 이스라엘 정부는 시오니즘을 튼튼한 민족적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교묘하게 미국과 서방의 자본주의를 마음대로 활용하고 있다.

한편 미국은 물론 두말할 필요도 없이 중동에서 확산되고 있는 급진 이슬람주의와 반미와 반제국주의 세력을 차단하기 위하여 <중동재편>에 주력하고 있으며 미국의 목표달성을 위하여 이스라엘과 미국은 서로 서로 이용하면서 깊숙이 연관되여 있는 것이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돈이 몹시 필요했다. 영국은 돈 많은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준다는 약속을 하여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아 전쟁에 승리했다. 영국이 유대인들과 비밀로 맺은 약속은 이른바 <벨푸어 선언> 이라고 한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7년에 영국은 유대인들에게 약속한 <벨푸어 선언>에 근거하여 지금까지 지배하던 팔레스타인에 대한 통치권을 포기하고 말았다.

영국은 팔레스타인 땅을 둘로 분활하여 이스라엘에게 나누워 줄것을 유엔(UN)에 제의를 했으며 유엔은 1948년 5월 14일에 팔레스타인 땅을 둘로 쪼개서 이스라엘에게 주는 동시에 신생국 창건을 승인 했다. 이것이야 말로 팔레스타인측으로 보면 하루 아침에 나라의 절반을 강탈당하는 엄청난 한 꼴이 되었다.

제1차 중동전쟁 (1948-49)


유엔의 이스라엘 건국의 승인은 곧 제 1차 중동전쟁으로 이어졌다. 제 1차 중동 전쟁에 대하여 이스라엘은 독립전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랍인들은 <알 나크바, 고난 시작의 전쟁>이라고 불렀다.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국가창건선포는 당장 아랍국가들의 반발을 일으켜 이집트, 사우디 아라비아, 레바논 등 6개국들의 대규모 군대가 동원되여 싸웠다.

하지만 아랍진영의 내부 불화로 인하여 이스라엘 항전에 실패했다.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의 영토는 UN이 정해준 56%보다 더 확장되여 제 1차 중동전쟁후에는 팔레스타인 영토의 80%를 이스라엘이 차지하는 역효과를 나타냈다.

제1차 중동전쟁으로 90만명 이상의 팔레스틴 난민이 발생했다. 2,500년 이상 살아 온 고향인데 하루 아침에 고향과 집을 몽땅 잃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레바논을 비롯하여 이웃 나라로 몰려 들었다. 레바논은 갑자기 몰려든 팔레스타인 난민 처리문재로 인하여 기독교인측과 아랍인측의 양진영이 서로 대립하여 싸우는 내전의 기폭이 되고 있었다.

제 1차 중동전쟁에 실패한 아랍진영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대항하여 항쟁을 계속하기 위하여 해방군 조직(Palestein Liberation Organization)을 새로 결성하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시켰다.

제 2차 중동전쟁 (1956년 수에즈, 시나이 전쟁)


제 2차 중동전쟁은 주로 이집트에서 미국과 소련의 대결장이 된 전쟁이었다. 또한 이스라엘과 이집트와의 대결전이기도 했다. 영국, 프랑스,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수에즈운하의 국유화에 성공했다.

이 시기에 소련은 아랍세계의 혁신세력에 손을 뻗쳐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등 여러 나라들에게 군사, 경제원조를 적극 제공하였다. 반면 미국은 서독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현대무기를 대량 공급하고 있었다.

제 3차 중동전쟁 (1967년 6월전쟁, 6일전쟁)


이스라엘은 1967년 6월 5일 새벽에 공격 3시간 만에 아랍제국의 비행기 400대를 전격적으로 폭파했고 또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점령했다. 전쟁이 발생한지 6일만에 UN의 중재로 정전이 선포되었다. 이 6일전쟁으로 인하여 아랍세계의 리더십에 균열이 일어나는 듯 했다.

그러나 1967년 8월 20일에 수단에서 개최된 <아랍정상회담>은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대하여 이른바 <3부정책>을 채택했다. 그 것은 (1) 이스라엘과는 협상하지 않는다. (2) 이스라엘과는 평화를 구하지 않는다. (3)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았다.

제 3차 중동전쟁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빼았은 영토는 초기에 영토보다 8배로 증가하여 총 102,400 평방킬로미터로 확대되었다. 한편 3차 전쟁으로 인하여 팔레스타인 난민의 수는 끝을 모르게 증가하여 레바논에게 막대한 혼돈과 부담을 안겨 주었다. 또한 PLO의 게릴라 활동도 레바논에서 점점 더 활발해지고 있었다.


[2]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미국의 중동전략



레바논은 미국과 이스라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충지이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생명줄인 물 줄기의 상류의 하사바니 강이 바로 레바논을 지나 흐르고 있다. 사실 이스라엘이 물줄기를 확보하는 것은 민족생존의 문제로 매우 중요하다.

제 3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이 결사적으로 시리아의 골란 고원을 점령한 이유중의 하나도 역시 시리아에서 흐르는 물줄기를 확보하기 위한 욕심때문이였다.

뿐만 아니라 레바논은 게릴라들이 활동하는데 매우 적합한 지형임으로 이스라엘과 싸우는 레바논의 <헤즈볼라>와 <팔레스탄 해방기구,PLO>의 전투적 요새지가 되고 있음으로 이스라엘에게는 상당한 위험한 지역으로 여겨진다.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레바논을 본격적으로 침공하기 시작한 것은 1978년 부터이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한 이유는 레바논 남부지역을 기지로 삼고 있는 PLO를 몰아내기 위함이였다. 이스라엘의 첫번 침공을 <리타나작전>이라고 한다.

UN은 결의안 425호를 체택하여 1978년 3월에 이스라엘 침략군과 PLO를 모두 다 레바논에서 철수시키고 그 대신 평화유지군이라는 명목으로 친미와 친이스라엘 노선을 따르는 레바논의 기독교 계통의 민병대인 남부군에게 레바논 남부지역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넘겨 주었다. 이와 같은 UN의 처사는 레바논을 남북으로 갈라 놓고 지역갈등을 일으키게 하는 또 하나의 38선을 그어 놓는 처사였다.

1982년 6월 이스라엘은 UN 결의안 425호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또 다시 두번째 레바논을 침공했는데 이번 침공을 이스라엘은 <갈랄리 평화작전>이라고 했다. 하지만 레바논 측에서는 제1차 레바논전쟁이라고 불렀다.

제 1차 레바논전쟁은 레바논 남부지역을 벗어나 레바논에 정착하고 있는 여러곳 에 흩어져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까지 무차별 침공 폭격을 감행하여 사망자가 3000명에 이르고 재산피해도 막대했다.

사태가 복잡해지자 미국은 다국적 평화군을 레바논에 주둔시키고 레바논에 집결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수단, 튀지니아, 알제리로 분산시켰고 그동안 레바논에서 활약하고 있던 PLO 본부는 튀지니아로 이동했다.

1984년에 이스라엘은 자국의 국토 안전과 보호를 위함이라는 구실로 레바논의 남부지역을 또 다시 침략하여 이른바 <안전지대>를 설정해 놓고 이스라엘 군대 를 상주시키는 적극적인 침략행위를 자행했다.

이스라엘이 1990년대에 자행한 다양한 침략행위와 2006년 6월에 제 2차 레바논전쟁을 일으킬 때까지 행한 그 많은 침공행위에서 그 잔인성은 국제사회에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특히 신의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유대민족과 이스라엘의 침략이 미국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한 그 속내를 올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레바논을 침공한 그 진의가 과연 무엇일까? 미국이 정말 이스라엘의 안전과 보호만을 위해서 그 많은 침공을 감행 했을까?

이스라엘의 식수인 물의 40%가 레바논 남부 하스바니 강을 통하여 흐르고 있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악착같이 침공하는 이유 중 하나도 물 때문으로 진단되고 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레바논 인구의 40% 이상이 무슬림인데 미국과 이스라엘은 무슬림의 세력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기독교의 정치세력을 강화시켜 친미적인 집권당의 위치를 굳건히 세워 그 세력을 육성시키자고 하는 것이 침공의 주된 목적으로 분석된다.

레바논의 기독교세력을 대항하여 맞서 투쟁하고 있는 유일한 정치세력은 헤즈볼라뿐이다. 미국과 서방의 언론들은 헤즈볼라를 단순히 <테러조직> 또는 <깡패집단>으로 매도하며 나쁜 세력으로 폄하하여 왔지만 실제는 그렇게 볼수 없다고 분석된다.

레바논의 헤즈볼라는 의회선거(06년 7월)에서 24석을 차지한 건전한 정당이며 강력한 정치세력이다. 또한 민중이 지지하는 민주적 정당조직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언론들은 레바논에서 이슬람 운동의 확산이 중동 전역에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 하기때문에 헤즈볼라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헤즈볼라를 <테러조직> <깡패집단> 으로 왜곡 보도해 온 것으로 진단된다.


[3] 레바논전 휴전협정은 헤즈볼라의 절반 승리




“강자는 맘대로, 약자는 당하기만” 이라는 말은 중동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침략적 행위에 대하여 비꼬는 말이다.

1965년 5월에 제2차 레바논전쟁이 발발했다. 레바논 헤즈볼라와 이스라엘군은 34일 동안 치열한 전투에서 레바논측은 1200여명, 이스라엘측은 160여명의 사망자를 냈다.

다급해진 미국은 급히 UN을 끌어 들여서 제2차 레바논전쟁을 조속히 끝내기로 했다. UN은 <휴전결의안 제1701호>를 채택하여 전쟁을 일단 끝냈다. 그리고 미국과 프랑스의 주도하에서 레바논과 이스라엘 양국의 국경선에 <불루라인, 완충지대>를 설치했다. 그리고 이 완충지대에 UN 평화유지군 1만 2000명을 주둔시키는 결의안을 체택했다.

UN 결의안은 불공정한 결의안으로 비판받았다. 미국은 레바논과 이스라엘 국경선에 설치한 <불루라인, 완충지대>에서 레바논 정부군과 UN군은 총을 들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하지만 헤즈볼라군에게는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 불공정한 규정을 만들어 놓았다.

레바논 휴전협정에 대하여 미국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휴전결의안을 극구 찬양하면서 헤즈볼라는 레바논의 친미정권의 주권을 시인하며 휴전협정을 준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60년 레바논 휴전협정의 성사는 “불패의 군대”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이스라엘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해 불만스러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또한 미국이 레바논 남부를 영원히 완전한 점령지로 만들려는 욕심과 계획도 무산되고 말았다.

반면 헤즈볼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그 막강한 공격에 맞서 만만찮은 전투력을 유감 없이 과시하여 국제사회를 깜짝 놀라게 했으며 단연 헤즈볼라는 이스라엘과 싸우는 전쟁에서 절반 이상의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헤즈볼라는 1967년 6월 5일 중동전쟁 6일전쟁 때 이스라엘에게 빼앗긴<세바 팜스 지역>을 탈환하는데 실패했다. 또한 이스라엘 병사 2명을 붙잡아 놓고 이스라엘에게 체포돼 있는 수십명의 헤자볼라 병사들과 맛교환을 하려던 계획도 달성하지 못하고 휴전을 하고 말았으니 헤즈볼라는 결국 절반의 승리만 거둔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런데 최근(2010년 8월 3일)에 와서 이스라엘 군과 헤즈볼라 군이 <불루 라인 완충지대>에서 갑작 스러운 총격전을 벌였다. 이 총격전으로 인하여 헤즈볼라 측에서 병사 3명과 이스라엘측에서 고위 장교 1명이 사망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번에 발생한 총격전에 대하여 레바논의 미셀 술레만 대통령은 군부 고위간부회의를 소집하여 이스라엘이 휴전협정을 위반했다고 비난하는 성명을 즉시 발표했다. 이것은 이전에 없었던 놀라운 일이다. 레바논의 현직 대통령이 미국을 향하여 이와 같이 강력한 비난의 발언을 하는것은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4] "미국의 간섭이 빠지니 레비논에 평화가 온다"



지난 15년동안 레바논에서 계속된 고질적인 내전은 뿌리 깊은 기독교와 이슬람 헤즈볼라와의 싸움이였다. 그런데 레바논의 중심세력인 기독교 공동체에 분열과 혼란이 일어나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레바논 군부는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서 중립노선을 지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시리아-이란과의 복잡한 연관 사이에서도 레바논 정권과 군부는 미국측에 기울지 않고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레바논의 전직 대통령인 에밀 라후드(1998-2007) 대통령은 전직 군 최고 지휘자였으며 3대 기독교 가정출신으로 모든 기득권을 다 소유한 대통령이였지만 그는 레바논의 제14대 대통령이 된 후에 친미노선에서 변신하여 엄정한 중립노선을 유지했고 오히려 친시리아 대통령으로 활약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레바논 헌법에 의하면 대통령은 반드시 기독교인이 맡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 라후드 대통령의 후임 대통령을 선정하는 과정에서는 그런 원칙보다는 현실적으로 레바논의 당면문제를 타결해 나가는데 필요한 인물이 누군가에 관심이 모아졌다. 즉 민중의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레바논의 제 15대 대통령인 미셀 술레만 현직 대통령은 어떻게 해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였던가?

2007년 11월에 임기가 완전히 끝난 라후드 대통령 후임자를 뽑는 의회선거 정국은 6개월 동안 아무 진전도 없이 정파간의 투쟁으로 복잡하였다. 이 상황에서 80여명이 숨지고 200여명이 중상을 당했다.

당시의 정파들 투쟁은 친미적 기독교 집권당파, 친시리아파, 친이란파가 서로 권력다툼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대통령 의회선거 절차는 6개월동안 지속되면서 19차레 연기 조치를 취하다가 아무런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곡절 끝에 지난 10년동안 레바논 육군참모 총장을 지낸 미셀 슐레만을 단일 후보자로 세우기로 정파간에 일단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미셀 슐레만의 참모총장 10넌동안의 행적은 너무 시라아편 이였다는 이유로 집권여당의 반대에 부딪쳤으며 이에 대하여 해즈볼라측은 중도노선만이 레바논의 평화의 길 이라고 맞섰다.

이와같은 난제에 직접 개입한 것은 <아랍연맹>이였다. 아랍연맹은 레바는의 <의회 소집>을 제 3국인 카타르의 수도인 도하에서 할것을 제안 했다.

아랍연맹의 적극적인 조정하에서 6개월 동안 공전하고 있던 악몽을 깨끗이 씻고 2008년 5월 21일에 남의 나라 카타르의 수도인 도하에서 대통령 선거를 치루게 되었다. 투표의 결과는 의회의 유권자 수 총 128명 중에서 90%인 118표를 획득함으로 미셀 슐레이만이 레바논의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비록 남의 나라에서 치른 대통령 선거이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즉시 그는 연설에서 <평온한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것을 호소 했다.

믈론 슐레이만 신임 대통령의 소속을 따진다면 그는 본래 기독교파에 속했지만 그는 중립주의자로 널리 알려졌다. 그의 10년 동안의 경력을 바탕으로한 정치철학이 슈레이만 새 대통령에 대한 기대는 레바논 뿐만 아니라 중동과 아랍 여러 나라들에게 큰 희망이었다.

문제는 미국이 끈질기게 추진하고 있는 레바논에 대한 고립정책과 헤즈볼라의 무장해제를 목표로 삼고 있는 미국에 대하여 슐레이만 대통령이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가 주요 관심거리로 떠 오르고 있다.

미국은 슐레이만 대통령의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서방 나라들과 특히 사우디 아라비아를 비롯한 모든 아랍 나라들은 대거 참석했다. 그만큼 미국은 레바논 신임 대통령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나타 냈다. 그것은 레바논의 정국을 수습하는데 있어서 중동을 좌지우지하는 미국이 아니라 아랍연합이 일등 공신의 역할을 한데 대한 미국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셈이다.

레바논의 신임 대통령 취임에 대하여 2008년 6월 3일 뉴욕 타임스는 아주 재미 있는 글을 실었다. <미국이 없는 자리에 평화가 깃든다> 라는 글이였다. 이 글의 뜻은 이제는 중동의 아랍세계에서 많은 당사국들이 미국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중동의 자립과 평화를 향하여 움직인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미국의 영향력이 쇠약해 졌다는 뜻도 된다.

레바논은 미국의 입장에서 볼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다. 앞으로 이곳에서 제 3
차 세계대전이 일어 난다면 그것은 미국이 잘못 건드리는 레바논이 될것 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이번 글을 끝 맺으며,


중동의 유일한 기독교국인 레바논에서 15년 내전 (1975-1990)으로 15만명의 레바논의 무고한 시민들이 죽었고 팔레스타인 난민은 100만명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점령에서 팔레스타인을 되찾으려는 투쟁은 끝을 모르고 치닫고 있다.

레바논의 내전을 그치게 하는 노력에 있어서 가장 걸림돌이 되고 있는것은 절대로 아라인들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레바논의 기독교인들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인 슐레이만 대통령 후보자를 놓고 19번이나 선거를 지연시킨 장본인도 미국이 항상 문제 삼고 있는 헤즈볼라가 아니라 그것은 바로 레바논의 기독교인들 때문이었다.

레바논의 기독교는 정통보수만을 외골수로 고집하면서 <대화로 풀어나가자> 라고 주장하는 유능한 진보적인 기독교 지도자를 무조건 반대한다. 레바논의 이러한 기독교는 오히려 미국을 난처하게 만들 때가 허다했다.

레바논 건국초기에 기독교 인구는 55%를 과시했는데 지금은 공식집계에 의하면 27%로 줄어 들었다. 레바논은 중세기 때 부터 뿌리깊은 중동의 유일한 기독교국이라고 자처해 왔지만 오늘 레바논의 기독교는 레바논에서 망국의 악역을 맡고 있는 주동세력으로 혹평을 받고 있다.

레바논 베이푸트에 자리잡고있는 역사깊은 기독교 예배공동체에서 경고의 소리가 요란하다. 그 경고의 소리를 보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인들이 사회에서 점점 소외되고 있다. 레바논의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대통령 지명자에 합의하지 못한 사실은 레바논 기독교 공동체의 어두운 미래를 보여준 사건이다>

이것은 2007년에 레바논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주의적 기독교 평화 애호자인 슐레이만”을 기도교인들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은데에 대한 경고의 소리였다.

나는 레바논을 고찰하면서 남녘의 한 신학교수가 말한 것이 새롭게 느겨졌다. <한국에서 민족 통일을 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은 극단적인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이 될 것이다> 이 말처럼 기독교 장로인 이명박의 기독교도 점점 레바논의 기독교와 닮음 꼴이 되여가고 있음을 심히 염려하게 된다.

***레바논, 어떤 나라인가---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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