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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코리아 전쟁: 그 진실을 벗긴다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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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6-27 11:54 조회3,14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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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와 남녘 땅에서 <코리아 전쟁>에 대한 진실을 왜곡하는 움직임들이 부쩍 늘었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뻔뻔스럽게
진행되고 있어 해 내외 애국세력들의 조소를 자아 내고 있다. 금년 이른바 6.25전쟁 60주년 행사를 서울에서 벌려 놓은
이명박 정부는 5백만 명의 양민들을 살해하고 말할 수 없는 재산피해를 낸 가해자 국가들의 보수인물 4백여 명을 대거
초청하여 이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하는 행사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또 남녘동포들과 해외동포들이 오랜
동안 의혹과 의문을 가지고 진상을 규명하라고 요구 받고 있는 <천안함> 침몰사건을 또 다시 왜곡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이어서 북을 향해 군사적 도발을 중지하라면서 7천만 민족이 다 함께 사는 길로 나오라면서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군사적 대결이 아니라 평화적 통일”이라는 말까지 언급해 이명박 대통령과 이 정권이 얼마나 해 내외 동포들을
기만하고 속인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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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코리아 전쟁: 그 진실을 벗긴다⑥



*정리: 민족통신 공동


요즘 들어와 남녘 땅에서 <코리아 전쟁>에 대한 진실을 왜곡하는 움직임들이 부쩍 늘었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뻔뻔스럽게 진행되고 있어 해 내외 애국세력들의 조소를 자아 내고 있다.

금년 이른바 6.25전쟁 60주년 행사를 서울에서 벌려 놓은 이명박 정부는 5백만 명의 양민들을 살해하고 말할 수 없는 재산피해를 낸 가해자 국가들의 보수인물 4백여 명을 대거 초청하여 이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하는 행사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또 남녘동포들과 해외동포들이 오랜 동안 의혹과 의문을 가지고 진상을 규명하라고 요구 받고 있는 <천안함> 침몰사건을 또 다시 왜곡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이어서 북을 향해 군사적 도발을 중지하라면서 7천만 민족이 다 함께 사는 길로 나오라면서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군사적 대결이 아니?평화적 통일”이라는 말까지 언급해 이명박 대통령과 이 정권이 얼마나 해 내외 동포들을 기만하고 속인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해 주었다.

이명박 정권의 왜곡 행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소위 국내외 참전용사 30만 명에게 감사편지를 보내는가 하면 미국의 주요신문들에 감사하는 말까지 광고하는 추태를 벌여 애국동포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이들은 국내외 각 곳에서 유사한 행사들을 벌이며 <코리아 전쟁>에 대한 진실의 역사를 완전히 굴절시키는 놀음을 벌였다.

코리아 전쟁 희생자 5백만 양민들의 영령은 아직 통곡하고 있다


아무 죄 없이 코리아 전쟁의 희생자가 된 5백만 양민들의 영령은 아직도 통곡하고 있는데 남녘의 정치 집권자와 이의 관료들은 그 한을 풀어주기는커녕 이들을 학살하는데 주모역할을 한 미국과 그 추종국 인사들을 서울에 초청하여 “감사 잔치”를 벌이고 있으니 도대체 이명박 정부는 누구를 위한 정치세력인가 또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IMAGE##> 주시하다시피 코리아 전쟁시기에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 장소는 북녘에서 70여 곳, 남녘에서 30여 곳이고 희생자 수는 5백 만 명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미군은 북조선 인민군과 중국인민 의용군한테 밀려 퇴각하면서 원주, 의정부 등 작은 도시들까지 잿더미로 만들었다. 네이팜탄이 이 도시들을 뒤 덮었다.

인민군이 퇴각할 때는 점령했던 마을의 학교나 건물을 그대로 남겨놓고 퇴각한 반면, 유엔군이 퇴각 할 때는 주둔했던 도시를 초토화하고 떠나는 것을 보았을 때에 인민군은 퇴각하더라도 언제나 도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당시 외신들은 평가했다.

사실 유엔의 이름으로 코리아 반도에 침략한 외국군들은 잔인무도하기 그지 없었다. 한 종군기자는 “사찰 등에 불을 지르고 달아난 임진왜란 때의 왜구들 보다 더 흉악한 유엔군”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한편 전쟁을 전후하여 나타난 남과 북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애국과 매국을 볼 수 있었다. 이른바 조국해방 이후 친일매국세력을 처리한 문제 하나만 보아도 어느 쪽이 애국이며 매국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구별할 수 있고, 또한 전쟁 중에 각 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놓고 그 도덕성을 살펴 보아도 어느 세력이 사람을 아끼고 그 생명이 소중한 것인가를 판가름할 수 있다.

해방 후 친일 세력들은 인민이란 말까지 북한이 사용한다고 하며 이 어휘까지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기 시켰다. 이 얼마나 매국적인 자세인가. 인민은 나라를 세우는 주체를 의미하고 국민은 그 나라에 속한 사람이란 뜻으로 수동적인 의미를 갖는다. 인민은 자연인으로서 국가가 있으나 없으나 존재하는 국가보다 상위 개념이고 국민은 국가에 복속된 하위 개념이다. 따라서 우리를 국민이라고 하면 우리는 미국이 남한 땅에 세운 나라, 즉 괴뢰국가에 수동적으로 속해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나라를 세울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 차이는 사뭇 크다고 볼 수 있다.

항일무장투쟁시절 김일성 장군은 부하를 아끼고 사랑하여 보천보 전투 등 위험한 전투에도 몸소 지휘하며 참가했다. 인민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는 이민위천 사상을 정치제도에 적용하였고 몸소 체현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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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진영이 이끄는 독립군의 항일 투쟁이 기진맥진했던 1930년대에 김일성 부대는 북만주를 휩쓸었을 뿐 아니라 국내 진공에도 성공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함경북도 갑산군의 보천보 전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녘의 어용학자들은 이 같은 사실까지도 숨기면서 김일성 빨치산 부대의 항일유격전에 대한 역사는 전혀 다루지 않으면서 기회 있을 때 마다 김일성 장군을 “가짜”니 뭐니 하면서 북조선 역사에 대해서는 항상 왜곡하며 부정적인 것들만 취급해 왔다. 사실 그대로 이야기 하거나 글을 써도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에 의하여 감옥에 가야 하는 암흑과 같은 역사가 바로 이명박 정부시대에 또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김일성 장군이 1937년 6월 4일 직접 지휘한 역사적인 보천보 전투 때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은 인민의 피를 빨아먹던 일본인 상점을 습격하고 많은 물자를 노획하여 인민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당시 <동아일보>가 정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 사건을 연일 보도하면서 김일성의 이름 석자는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조선인들에게 보천보 전투는 1936년 손기정(1912~2002)의 세계 제패에 이은 쾌보였다.

작전을 완료한 혁명군은 「조국광복회 10대 강령」50여장을 비롯, 「일본군대에 복무하는 조선인 병사에게 고함」•「반일 대중에게 보내는 격문」등 수백 장의 "삐라"를 살포한 뒤 밤 11시경 압록강 건너 만주 장백산의 밀영으로 철수했다.

김일성 부대를 추격하던 일본군 제74연대(함흥 주둔)는 6월30일 만주 장백현 간산봉에서 오히려 "괴멸적 타격"을 당했다. 일본군의 완전한 패배였다. 이것이 조선 천지를 뒤흔든 보천보 전투사건의 간략한 내용이다.

서울의 성공회대학교의 한홍구 교수는 “작은 전투였지만 정치적 충격은 매우 컸다”고 평가한다. 보천보 전투는 승승장구하던 일제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힌 것이다.

어떤 사람은 김일성 주석이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고 얘기하지만 객관적인 안목을 가진 학자들은 “오히려 소련을 결정적으로 도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1930년 후반 이후 소련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일본의 북진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서 “소련이 항일 게릴라 단체에 대해 실질적인 원조를 제공했다는 증거는 발견할 수 없으나”, 게릴라 부대는 일본이 북진정책을 추진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선봉’에 섰다. 그래서 소련이 멸망할 수도 있었던 1941년 전투(서부로부터의 히틀러의 침공)에서 동부로부터의 도조 히데키의 침공을 막는데 일조했다고 분석한다.

한 자료에 의하면, 게릴라들은 진압작전을 피하기 위해 소련의 국경선을 수 차례 넘나들었으나, 소련은 그들에게 무기나 물질적인 원조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군으로부터 무기와 탄약 그리고 다른 군수품들을 탈취해 사용했다.

미국의 부르스 커밍스 교수는 김일성 부대의 항일 게릴라 활약이 일본이 중국본토 장악을 포기하고 남진을 결심하게 된 본질적 요인이었고, 진주만 공격도 이러한 과정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코리아 전쟁 당시 게릴라 식 습격으로 고민하던 미군은 일본의 “게릴라 소탕작전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그 중 관동군에서 대좌로 근무한 두 사람이 만주에서 김일성 부대를 추격한 적이 있어 미군들에게 브리핑했다. 그들은 김일성 장군과 여타 조선 게릴라들은 중국의 지휘자들과 협조체계를 구축했으나, 영향력 있는 특정인의 지시에 복종하지는 않았다며 “(김일성이) 소련군 또는 중국 공산군 지휘부와의 관계를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고찰했다
1945년 “미 국무부 최고의 코리아 전문가”인 조지 매큔은 1937년 소련 저널에 실린 글에 관심을 가지고 번역하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위대하고 유능한 지도자는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김-니-첸(김일성) 부대가 특히 두드러졌다. 그의 부대원들은 정말 용감하다. 가장 위험한 작전은 모두 그 부대가 도맡아 처리한다.

<우리민족은 주변국의 원조만 받는다>는 친일친미 기생세력들의 민족을 깎아 내리는 모략 선전만을 듣고 우리는 자랐다. 하지만 하늘높이 나부끼는 오성홍기를 바라보며 중국인민이 《저 깃발에는 조선인민들의 피가 스며있다》고 얘기 할 때 코리아의 피를 가진 동포라면 그 누구도 자부심을 갖게 할 것이다. .

미국의 더러운 침략전쟁에 총알받이 노릇을 하다 패잔병이 되어 쫓겨 온 역사만 있는 줄 알고 있었는데 김일성 부대가 주변 강대국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지켜주었다고 하니 뿌듯한 자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중국뿐만 아니고 일본군의 북상으로부터 소련도 지켜 주었다고 하는 것을 알았을 때 더욱 자부심을 느끼는 것은 인지 상정일 것이다.

일본군은 보급로가 위태로워 질까 봐 중국본토나 소련으로 진군할 수 없었다. 더구나 김일성 부대는 중국이나 소련의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침략자 왜놈들에게서 노획한 무기로 싸웠다.

전쟁시기 북 인민군의 도덕성 보여


코리아 전쟁 때 남쪽 동포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인민군을 만날 수 있었다. 인민군은 항일무장투쟁시절부터 낮에는 중무장한 일본군의 눈을 피해 숲 속에 은닉해있고 밤이 되면 활동을 하거나 부대이동을 하였다. 이렇게 야간전투에 익숙하였지만 인구가 밀집된 서울 함락 때는 인민들이 방향을 잡지 못해서 인명 피해가 커질 수 있다고 야간에 공격하지 않고 낮 동안에 서울을 공격하였다. 이것은 민간인이 피난을 갈수 있도록 보호 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도 뒤늦게 밝혀졌다.

항일의 명장 김일성 장군이 이끄는 인민군은 인민의 군대라는 말처럼 인민을 보호하였고 양민을 학살한 흉악한 유엔군과는 대조되었다는 것은 양심을 가진 세계 학자들의 객관적인 평가로 나타나고 있다. .

북조선 인민군이 외세의 침략에 임하는 전쟁 도덕성에 관한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다름과 같다.

27일 오전 11시 인민군이 미아리 고개에 다다르자 서울시민들은 급하게 가족의 손을 부여잡고 전쟁의 포화를 피해 부랴부랴 대도시인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민군이 서울근교까지 내려왔던 6월28일 새벽 2시30분경 어둠 속에서 남한군 공병대에 의해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었다. 미군은 이승만과 그의 일부 관료들을 이미 6월27일 새벽2시에 특별 열차 편으로 서울에서 대전으로 피신 시켰다. 그리고서 피난민들은 내려가지 못하게 다리를 態?뒤따르던 민간인들을 다 죽게 했다. 그리고 미군은 이승만과 저들의 명령을 수행한 남한 군 대령에게 잘못을 돌렸을 뿐 자기들의 책임을 회피하기만 했다. “이런 것을 보면 이승만은 전범이다.”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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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범은 허수아비 이승만도 사형당한 최창식 대령도 아니다. 주범은 바로 미국이라는 뜻이다. 다리를 폭파한 시간 다리 위에는 500명~800명의 피난민들이 있었다. 다리가 폭파 됐으나 피난민은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뒤에서 폭파된 사실을 모르는 피난민들이 몰려들어서 계속 앞으로 밀려서 설사 어둠 속에서라도 폭파된 사실을 아는 피난민이 있다 할지라도 빠져 나오지 못했다. 떠밀려 계속 한강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계속 밀려들어 밤사이 수 천 명이 희생되었다.

이후 강물은 핏물이 되어 오랫동안 서울 한복판을 흘렀다. 한강은 한민족과 함께 피눈물을 흘렸다. 미군이 다리를 끊어 피난을 못 가게 해놓았는데도 친일매국노 일당은 다시 돌아와서 ‘부역자 처리법’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다리가 끊겨 피난을 못 가서 인민군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무고한 사람들을 빨갱이라며 무차별적으로 죽였다.

어떤 사람은 인민군 점령지에서는 남한군(국군)에 협조한 사람을, 그리고 국군의 점령지에서는 인민군에 협력한 사람을 죽였다고 하지만 부역자처벌법이란 법까지 만들어서 보복살인 한 집단은 친일 매국노 일당의 반정부 범죄 집단이며, 대한민국이란 간판을 붙인 대한 괴뢰집단이었다. 이와 같이 미군과 친일매국노는 선량한 우리 민족을 죽이는 살인자였다.

인민군 치하에서는 민간인 학살이 없었고 소수의 친일매국노들을 처단하였을 뿐이다. 양심과 객관의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해방군은 미군이 아니라 북한 인민군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부모형제를 죽인 흉악한 미군과 매국노로부터 우리민중을 해방시켜준 인민군이 해방군이었다고 사실을 말한다면 이것도 국가보안법에 걸어 감옥에 보낼 것이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분단사, 전쟁역사는 남녘 기득권세력과 이에 편승한 사대 매국적 어용학자들에 의하여 굴절되고 왜곡되어 왔다.

코리아 전쟁 역사를 돌이켜 보면, 미국은 코리아 전쟁이 북의 남침이라는 것을 조작하고 음모하여 사전 전쟁계획에 대해서는 숨기면서 북이 6월25일 남하한 그 순간을 유도하고 기다렸다가 사흘만인 6월 28일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군의 참전을 결의시켰다. 이날은 북한군이 서울에 머물러 있었다. 애당초 인민군은 부산까지 남진하지 않고 서울만 점령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는데 유엔의 불법 개입 결정으로 확전이 불가피해지자 7월 1일부로 전시국가총동원령을 내렸던 것으로 분석된다.

유엔군의 모자로 바꿔 쓴 미군과의 첫 전투는 경기도 오산의 죽미령에서 있었다. 6월 27일 한강이남 전선을 직접 시찰한 맥아더가 29일 지상군 투입을 요청하고 30일 트루먼이 이를 승인함에 따라, 일본에 주둔해 있던 스미스 부대가 7월 1일 부산에 상륙하여 3일 오산에 투입되고 5일 죽미령에서 벌인 6시간의 전투에서 406명의 부대원 중 181명이 전사 및 실종하고 72명은 포로가 되었다.

이와 같이 유엔군은 풍전등화 같이 위태로운 남한을 구한 것이 아니고 직접 불법적으로 침략전쟁을 유발한 것이다. 미군은 남녘 땅에 들어와 친일 반역 매국노에게 무기를 공급했다. 1952년까지 미국이 전개한 야만적 공중 폭격전쟁으로 한반도의 북부와 중부는 거의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도시의 건물이란 건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모두 부서져서 허허벌판이 되어 있었다. 더구나 주민들은 오갈 데가 없이 부서진 집 속에 토굴 비슷하게 파놓고 살아가는 참혹한 상황을 맞았다. 도시 전체가 완전히 빈민 소굴이요 난민 소굴이었다. 식량도 동이 날대로 나버렸고 비바람을 피할 천막이나 움집조차도 없었다. 굶주리고 병든 사람이 하나 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수백만의 주민이 희생 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굴속 생활로 생명을 이어갔으며 석기시대란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1951년 1월3일 평양에 대대적인 공습


평양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은 1951년 1월 3일에 행해졌다. 폭격은 3일 밤에 시작되어 그 이튿날 정오까지 계속되었다. 비행기는 15분 간격으로 폭탄을 떨어뜨리는데 처음에는 소이탄, 다음에는 네이팜탄, 고성능폭탄, 그리고는 다시 더 많은 양의 소이탄과 시한폭탄을 연속적으로 투하했다.

이러한 연속적이고 체계적인 공습 때문에 조직적인 구조작업은 불가능했다. 때때로 시한폭탄 터지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때로는 시한폭탄이 10분 간격으로 연속 폭발하였는데 이 폭탄들은 1주일 전에 떨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공습에 희생되거나 다친 이웃, 친지, 가족을 구조하기에 정신 없는 동안 이 시한폭탄은 다시 이 구조대를 살상. 파괴하는 것이었다.

공습?포격에 의해 죽고 부상당한 무고한 시민들을 구조하는 것까지도 허용하지 않는 이러한 미국의 행위에 대해 대부분 서방의 언론들은, 특히 미국의 유피 통신 (UPI통신의 전신) 을 필두로 해서, 공산주의와의 싸움이라는 사실 그 자체 때문에 외면하거나 왜곡된 당국의 발표를 복제해 내는데 그쳤다.

이와 같이 잔인한 범죄자 미국은 6.25 코리아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한국을 구해주고 지켜준 천사의 모습으로 자신을 위장 하였다. 즉, 전범자 스스로가 북한을 전범자로 지목하며 남한국민을 속여 왔다.

미국은 코리아 전쟁으로 중국대륙을 수복하여 장제스(장개석) 괴뢰를 세우려는 야망을 달성하지 못했다. 중국대륙 회복은 미국의 코리아 전쟁을 일으킨 최종 목표였던 것으로 진단된다.

1943년 11월의 카이로 회담 1945년 2월의 얄타회담 등 각종 국제회의에서 중국을 대표하여 장개석이 참석하여 미국을 지지 하였으나 중국대륙을 공산당에 빼앗긴 뒤에는 왜소해진 장개석은 발언권이 약화되어 미국을 지원 할 수 없게 됐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도 미국의 뜻과는 다르게 도출된 것은 지금까지 미국을 지지하던 중국이 빠진 때문이다. 1920년대에 중국은 보잘 것 없는 작은 나라 일본에게 정복당할 정도로 낙후한 나라였다. 그래서 일본을 굴복시킨 세계 최강 미국은 이렇게 미개한 중국을 손쉽게 정복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였다.

1949년 상반기부터 중국 본토에 대한 군사적 방법을 통한 해결 방안이 마련되었다. 즉, 패전국인 일본을 아시아의 후방 병참 기지로 전환시키고, 반도-대만-베트남을 각각 군사적 진공을 위한 교두보로 삼으며, 최종적으로 중국대륙의 회복을 목표로 한다 는 것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1954년 2월 미국 하원에서 로버트슨 국무차관보의 발언을 통해 사후 확인되었다.

[1] 일본의 병참기지화
<1> 일본 주둔 미군에 대해 전투태세 강화가 있었다.
1949. :제8군 전투단 군사훈련에만 전념토록 조치,
1949, 6월: 제8군의 병력증강을 추진 (7만에서 15만으로),
1949, 6월: 8군단을 극동 공군•해군과 함께 통합된 육•해•공군 통합팀으로 실전 배치.
1949, 8, 8월: ‘험한 지역에서 작전수행할 사단의 훈련을 위해 후지산 근방에 훈련지역을 마련하였다-맥아더’

<2> 일본주둔 미군 군사기지의 대폭적인 시설 확장-보수.
1949, 10월말: 오키나와 기지 실제 주둔병력 수용 수준 훨씬 초과 (한국전쟁 개시 후 정상화)
1950, 2월: 요코스카 해군기지 시설 확장 공사.
1949~1950년 전반기: ‘롤 업(roll-up)’계획 비공식 실행 (8군 보병사단 중무장 조치)
1949, 4, 16일: 대충자금 특별회계법 일본 국회통과 (일본인 조세를 군수품 생산에 전환)
→일본 군수산업을 재생시키기 위해 주력한 미국.
<본래 일본의 군수산업은 전쟁도발의 근원을 없애기 위해 미국에 의해 몰수되도록 되어 있었다.> → 그러나 1949년 이후 벌어진 일본의 병참기지화 과정은 코리아 전쟁 중에 일본이 수행한 역할을 통해 밝혀짐.

[2] 일본을 반공의 보루로 삼기 위한 정치적 조치들

<1> 미국에 의한 일본의 군국주의적 망령 부활기도
→ 재일 한국인에 대한 박해 (한반도에서 군사작전 중 야기될지도 모를 위협을 사전에 제거함) / 1949, 9, 8 : 재일한국인 조직해체, 재일한국인 재산몰수, 간부 추방(맥아더 명령)/ 1950, 3, 3 : 일본내 좌익세력에 대한 불법화 조치 → 1950, 6, 16 : 일본지역에 대해 일체의 공개집회와 시위 금지. (사실상 전쟁 동원 체제 돌입)

[3] 구체화되는 미국의 전략

<1> 애치슨 라인(1950년 1월 12일)
남한과 대만에게 관여 안 하겠다던 애치슨 라인은 ‘우리의 첫 방어 라인으로, 그리고 덧붙여 우리가 그곳에서부터 공산 지배지역의 감소를 모색할지도 모를 첫 공격라인’으로 그것이 공식적으로 담고 있는 내용과 실제 미국의 정책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은 애치슨 라인 선언을 할 당시에 오히려 대만과 남한에 군사력 증강을 추진하고 있었다.
<2> 1950, 4 : 국방비 증대 비밀리 추진 (중공에 대한 초강경파 덜레스 국무장관 등장과 함께)
<3> 1950, 1, 26 : 한미상호방위 원조협정 체결
(원조를 미끼로 미국이 한국의 내정을 관찰할 수 있는 절대적 권한을 합법화 함)
<4> 1950, 6월 : 미 군사고문단의 지도하에 남한군대 10만으로 성장. (국내 치안 유지 수준)
<5> 1950년 미국 군사 지도자들의 극동지역에 대한 잦은 왕래 - 고무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주장.
<6> 전쟁 준비되지 않은 북한의 군대 - 1949년 말까지 방어 형 군대였으나, 1950년 공격용 군수물품 수입 (북진하려는 남한에 대한 대응, 1950년 7월말 완료 계획), 6.25 당일 동원계획이 수립되어 있지 않았음.

<타임> 등을 발행한 대표적 우파 언론인 헨리 루스 등 차이나 로비 세력은 한반도를 위험한 장소나 곤경?빠진 곳으로 보지 않고 중국을 자유화하는데 꼭 필요한 <전투지>로만 생각하였다. 즉, <훨씬 더 큰 전쟁> 즉, 중국과의 전면전이 일어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코리아 전쟁은 대만으로 쫓겨 간 장제스의 국민당 친미세력이 다시 중국대륙을 탈환할 수 있게 만들어 줄 절호의 찬스였다. 맥아더에게 한반도는 애초에 일본의 방어진지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그는 한국 상황에 무지 했고 한국인을 깔봤던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모든 걸 맡겨놓고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할 때 잠시 서울을 방문한 것을 빼면 그 때까지 단 한 차례도 한국을 찾지 않았다.

맥아더가 세운 비밀 작전 계획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미국의 공군력을 동원해서 중국의 항공 기지와 산업 시설, 그리고 만주와 동북지역의 군수시설을 파괴한다. 둘째, 미 해군을 동원해 중국의 남해와 황해의 해안 항구들을 포위 공격한다. 셋째, 대만의 장개석 군대를 파견해 중국 남부를 기습, 점령하게 한다.

마이클 샬러에 따르면, 맥아더의 궁극적인 관심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위대한 조국 미국이 아시아에서 승리하길 원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을 패배시켜야만 했다. 남한은 중국을 패배시키기 위한 기회로서만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전쟁은 사실상 중국 공산주의에 대한 것이었다. 코리아 전쟁이 확대되면 중국에 내란을 일으켜 국민당 정권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맥아더는 코리아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대만을 방문해 장개석과 회담을 가졌다. 회담의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중국과의 전쟁에 대해서 논의했을 것이다. 장개석은 그 전부터 대만군을 코리아 전쟁에 참전시키겠다고 제안해 온 터였다.

코리아 전쟁은 6.25에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코리아 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갑자기’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완전히’ 끝난 역사의 한 토막이 결코 아니다.

코리아 전쟁은 해방 이후 우리 민족이 기울여 온 통일국가 건설의 노력이 좌절되면서 모순이 한꺼번에 폭발된 것이며, 또한 미국의 대 동아시아 전략의 산물이다. 중공 봉쇄정책이 포기되기 이전에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하였던 모든 분쟁은 바로 미국의 군사전략과 결정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일본의 재무장, 코리아 전쟁, 베트남 전쟁, 군사기지 설치를 둘러싼 미국과 아시아 민족 간의 끊임없는 충돌 등은 미국에 의해 장기간에 걸쳐 연출되는 각각의 장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의외로 빨리 끝나서 엄청난 군수물자 재고로 군수업체들이 파산에 몰리고 특히 군수식품(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군량미)은 썩어나서 대서양과 태평양에 갖다 내버려야 했을 지경이라 새로운 전쟁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일본 1945년 8월12일 흥남 앞바다서 원폭실험


2차 대전 중에 미국은 생산 설비를 총동원하여 많은 무기들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원폭 투하로 전쟁이 빨리 끝나 버렸다. 원폭을 급히 일본에 투하한 이유는 일본도 원폭을 개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본은 패망직전인 1945년 8월 12일 흥남 앞 바다에서 원폭 실험에 성공하였다.

경쟁적으로 당시 최신무기인 원폭개발에 뛰어들었다. 일본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1년에는 육군 주도로 동경대 이화학 연구소에서, 42년에는 해군주도로 교토 제국대에서 원자 폭탄 개발에 착수하였다.

B-29의 일본 폭격으로 이화학연구소가 파괴되자, 일본에서 행해지던 원폭실험의 주요무대는 한반도 이북 지역으로 옮겨지게 된다. 전력과 우라늄 공급이 용이한 북한 흥남으로 옮겨서 개발을 계속 하였다.

일본의 원폭개발은 독일 나치와의 유대가 큰 힘이 되었다. 일본과의 동맹을 통해 세계를 지배하려던 나치는 원폭개발에 필요한 기술과 우라늄을 지원해주었다. 실제 독일잠수함 U-234호는 독일이 패망한 그 순간에도 우라늄 10박스를 싣고 일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2차 대전 당시 미 공군이 작성한 공격 목표물 중 첫 번째가 흥남에 소재한 질소비료공장이었고 공업단지 내의 5대 공장과 부전강 발전소 등 산업시설이 모두 포함돼 있었다.

이미 지적한 대로 군산복합체의 잉여무기 처리가 미국이 코리아 전쟁을 일으킨 주요한 또 하나의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무기가 나가지 않고 재고가 쌓이자 공장은 생산을 멈추고 돈벌이가 끊겼다. 군수산업체는 돈벌이가 끊기자 마치 마약중독자에게 마약 투입을 중단할 때 나타나는 일종의 금단현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기의 사용처가 필요했다. 재고가 쌓여 처분하고자 하는 욕구를 떨치지 못했다.

자신의 동족인 유태인을 학살한 나치에게 까지 자금을 대준 유대계의 군산복합체에게는 전쟁까지도 사업일 뿐이다.

베트남 전쟁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일어난 제국주의자들의 침략행위에서 비롯되었다. 그 구실도 조작되었다는 것은 만인이 주지하는 사실이다. 1964년 8월 미국이 북 베트남을 공격하기 위해 통킹만 사건을 연출하였다. 먼저 <뉴욕타임스>가 미 국방부의 베트남전 비밀보고서인 이른바 ‘펜터건 페이퍼’를 입수해 1971년 6월 13일부터 연재함으로써 날조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언론비평가 노먼 솔로몬은 당시 통킹 만 사건을 취재했던 워싱턴 포스트의 머레이 마더 기자를 인터뷰했는데 그에 따르면 개전의 구실이 된 미군 전함 매독스호의 피격사건이 발생하기도 전에 이미 월남군의 전함이 북베트남에 대한 함포사격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나름의 취재를 통해 통킹만의 진실을 제대로 알리기도 전에 <워싱턴 포스트>의 수뇌부가 이미 미국 정부의 베트남전 참전을 비호하는 쪽으로 일찌감치 편집방향을 잡았다고 증언하였다.

심지어는 911사건도 오늘에 이르러서는 많은 미국인과 전문가 및 군인들은 자해 공갈단 미 CIA 가 대 테러전쟁을 일으켜 아프간과 이라크를 공격하기 위해 꾸며낸 것이 확실하다고 일부 지식인들은 주장하고 있다.

2001년에 기밀 해제되어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CIA 는 쿠바 침공의 명분을 획득하기 위해 자작극인 노스우드 작전(Operation Northwoods)을 1962년에 수립하였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1995년 4월 19일 오전 9시 5분, 미국 중부 오클라호마주의 주 정부 수도인 오클라호마시티 중심가에 있는 마약 단속국 등 미국 연방정부의 각 기관 사무실과 탁아소 등이 들어 있던 알프레드 머라 빌딩을 사건 조작기관인 미 CIA 가 폭파시켜 티모시 맥베이(당시 26세)를 희생양으로 삼아 처형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폭로한 이야기도 있다..

이와 같이 미 CIA 는 군산복합체에 의해 조종 받고 지배를 받는 기관으로 지적 받아 왔다. 코리아 전쟁 당시 충북 영동의 노근리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발생한 양민학살이 록펠러-모건 재벌의 록히드사 전투기의 기총 사격에서 이루어 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코리아 전쟁 최후 점검으로 1950년 6월19일 당시 국무장관 덜레스를 파견하여 38선 일대를 비밀리에 시찰하는 등 모든 점검을 완료하고 북한을 유인, 기다리던 전쟁이 시작되었다. 군수업체인 모건과 록펠러, 듀퐁은 전쟁 물자를 끊임없이 쏟아 부어야만 자신들이 살 수 있었다.

미국은 대통령의 지시보다 군수업자인 록펠러-모건 재벌의 지시를 받아 운영되는 전쟁 사업을 끊임없이 펼쳐야 살 수 있는 거대 회사라고 빙자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평화는 미국의 적이고 미국은 평화의 적 이라는 말이 생긴 것이다.

전쟁이 아닌 천재지변도 미국은 세력 확대의 기회로 삼는다. 프랑스는 지배권 확대에 목적을 둔 미국의 아이티 지원에 대하여 비난 했다. 2010년 1월19일 프랑스는 미국이 아이티를 점령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미국은 공항 관제권을 쥐고 프랑스와 브라질 등 다른 나라의 구호품을 실은 항공기는 착륙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원조라는 미명하에 풍부한 자원과 지리적 이점을 가진 아이티를 군사적,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군사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아이티에 대규모 군 병력을 파견하여 점령하였다.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도 전쟁 상황도 아닌데 미국이 아이티 비극을 이용해 또 군사적으로 점령하려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군인을 보내는 대신 의사•구조대•의약품•물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다니엘 오르테가 니카라과 대통령도 미군의 아이티 철수를 요구 했다. 브라질도 미군의 항공모함 배치 및 해군 병력 파견 등을 이유로 미뮌?아이티 점령을 시도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국경 없는 의사회, 니카라과도 잇따라 비난 대열에 합류 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지는 “아이티 주민들은 미국은 군인 말고 구조대원과 의료진을 지원하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구호 활동보다 군사적 점령에 목적을 두어 지진 발생 1주일이 됐는데도 약탈과 폭력이 오히려 극심해졌다.

미국의 군산복합체 영향력


미국의 코리아 관계 문제도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다.

“오바마는 취임하면 신속하게 북한과 양자대화에 나설 것이라고 하였으나 2009년 1월 20일 취임한 오바마는 2009년 여름에 접어들어서야 북핵 실무진을 임명했다. 또 북한이 고대하던 미국과의 양자대화는 지난해 12월에 들어서야 처음 열린 것을 보더라도 미국은 대통령보다 군산복합체가 지배하는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하였다. 1978년 말까지 1개 여단, 1980년 6월 말까지 또 1개 여단을 철수하며, 남한에 있는 핵무기도 줄이겠다고 하였으나 당선 후에 하나도 실행하지 못했다.

미 군산복합체는 무기판매사업은 물론 언론, 영화, 금융, 스포츠, 대학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개입하여 백악관과 군부, 정부기관을 뒤에서 움직이며 인류에게 전쟁을 가져다 준다.

코리아 전쟁에서 몸소 전장에 뛰어들어 목숨을 내걸고 대결한 북조선 인민군들의 자세와는 달리 군산복합체 소유자들은 대재벌로서 전쟁이 나더라도 직접 전장에 뛰어드는 일이 없어 전쟁을 선택하는데 부담이 없다.

파라마운트는 모건의 영화사이고 20세기 폭스사의 최대주주는 록펠러, 워너 브러더즈는 모건과 록펠러, 듀퐁이 대주주이다. 미 국민들에게 매카시즘을 일으킨 주체는 언론과 영화사를 장악하고 선전 선동을 벌린 군산복합체이다. 군산복합체는 전쟁이 필요했고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적이 필요했고 공산주의를 적으로 설정하여 매카시즘을 일으켰다.

군산복합체는 공산주의가 사라지자 테러리즘을 적으로 삼아 오늘날 대 테러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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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재벌들은 공황에 대비해 보험 역할을 하는 군수산업을 필요로 한다. 대공황으로 경기가 침체에 빠지면 군수공장을 총 가동시켜 이를 만회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이 동원된다. 군수공장을 총 가동시키기 위해서는 생산된 무기 들이 쌓이지 않고 제 때에 소비 할 수 있는 소비처가 필요하다. 즉, 전쟁을 벌려 경제를 일으키는 군산복합체의 국가가 미국이다.

애치슨 선언을 한 딘 애치슨 미 국무부 장관은 군산복합체인 탄약제조업체 듀퐁의 고문변호사 직도 갖고 있었으며 군산복합체가 그를 행정부에 앉혔다.

코리아 전쟁당시 전쟁정책과 전략을 수립한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은 록펠러 동지인 멜런가의 멜런 공업 연구소의 사장이었다.

남한정부와 어용언론들 점령자를 천사로 왜곡


남한정부와 어용매체들은 점령자를 천사로 둔갑시키며 미국과 자유세계의 희생의 은덕으로 침략자인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남한을 지켜내서 자유를 만끽하며 살고 있다고 왜곡 선전해 왔다. 이런 현상은 전쟁이 발발 한지 60년 세월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남녘에서는 코리아 전쟁의 역사가 왜곡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의 제국주의 세력은 우리 조국반도를 갈라놓고 우리에게서 서로 왕래 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고 자기들이 남한 땅을 강점하고서 이 땅의 군사주권까지 장악하고 주인 노릇을 지속 해 왔다. 이산가족은 무슨 죄로 한 맺힌 삶을 살아야 하나? 미국이 말하는 자유가 우리의 자유는 아니다.

유엔군의 학살 만행과 잔인한 폭격으로 대폭적인 인구 감소를 겪은 북한은 지금까지 전시동원 체제가 계속되고 있다. 잠시 휴전일 뿐 아직도 전쟁 중에 있고 실제로 정전협정 후에도 미국의 핵 공격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조국반도는 언제나 긴장과 전운이 감돌고 있는 상황이다.

남한은 지금까지 미군의 꼭두각시 역할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베트남을 침략하기 위해 통킹만 사건을 조작한 미국을 지원하기 위해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한군을 파병해야 하는 것이 남한 당국의 처지이다.

코리아 전쟁에서도 남한군은 미군의 총알받이 역할을 충실히 해냈었다. 코리아 전쟁에서 아몬드 소장이 지휘한 미 10군단은 미 2사단과 7사단 그리고 남한군 5사단 및 8사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군단장은 1950년 크리스마스 공세 때 동부 전선을 지휘했던 에드워드 아몬드 소장이었다. 그는 횡성과 홍천을 잇는 공격로의 좌익에 국군 8사단(사단장 최영희 준장), 그 우익에는 국군 5사단(사단장 민기식 준장)을 앞에 세웠다.

미 2, 7사단은 국군 8, 5사단을 뒤에서 지원하도록 하였다. 아몬드 소장은 남한 군을 총알받이로 앞세웠던 것이다. 대포와 전차 등에서 미군과는 큰 수준 차이가 있는, 화력에서 뒤져 있는 남한 군 사단을 오히려 전면에 배치하였다.

그 결과 당연히 남한 군은 북한 인민군의 화력 앞에 전멸 상태가 되었다.

51년도 미 10군단 지휘보고서에 따르면 남한군 8사단은 장교 323명, 사병 7142명의 병력 손실을 본 것으로 나와있다. 남한군 5, 3사단 역시 부대원을 각각 3000명씩 잃었다. 이 같은 사실은 미군이 남한군을 총알받이로 취급하는 하나의 예에 불과한 것이다.

미군에게 전시작전권이 있으므로 전쟁 시에는 미군의 작전명령에 따라 국군은 앞에 나가서 싸워 미군에게 갈 총알을 몸으로 막아야 한다. 자기나라 땅에서 전쟁 났는데 자기가 주관해서 싸우지 않고 외국군대의 손에 끌려서 수동적으로 지시 받고 싸운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간다. 지금도 전시작전지휘권은 미군에 장악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이것을 찾아 오지 못하고 그 반대로 미군이 더 오래 소유하고 있을 것을 애걸하고 있는 웃지 못할 현실이다.

남한군은 미군의 명령에 움직이니까 ‘괴뢰군’이란 말을 듣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면서 북한군을 가리켜 남한 보수진영은 수십 년 동안 ‘괴뢰군’이라고 불러왔다. 이것도 구체적인 사실과 현실을 왜곡하는 자세이다.

북한군은 전쟁이 나도 소련 중국의 작전명령 없이 홀로 싸운다. 힘세다는 조폭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비겁하게 떼로 덤비니 지원군을 요청한 것이다. 북한으로 봐서는 남한 땅도 우리나라인데 왜 우리나라를 미제에게 빼앗긴 채로 부모 형제도 못 만나고 참고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미제 침략자를 내쫓으려는데 오히려 침략자가 나눠준 총을 들고 침략자가 지휘 감독하는 대로 하는 남한 군대를 괴뢰군으로 부르는 것은 이치에 맞고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

이런 자신을 감추기 위해 친일친미 세력들은 북한을 가리켜 ‘괴뢰’라고 불렀다. 현재는 그것을 남한에서도 잘 알기 때문에 북한이 남한 군을 가리켜 괴뢰군이라고 업신여겨 불러도 남측에서는 듣고서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그 대신 정치범 수용소라든지, 인권 침해라든지, 아사자가 속출한다는 등의 말로 북을 폄하하는 자세로 대꾸한다.

해방된 조국에서 65년 동안 어머니가 살아있는데도 자식이 만날 수 없는 생이별을 강요한 자가 누구인가. 누가 통일된 임시정부수립을 결의한 모스크바 삼상결정을 무산시켰는가. 누가 우리 민족의 자주통일을 짓밟는 장기적 신탁을 주장하였는가. 그 주역은 바로 “미국”이다. 더구나 미국은 신탁통치의 기간을 5년으로 하되 연장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영구적인 신탁통치를 제안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삼상결정은 소련의 강력한 신탁통치 반대에 부딪쳐 미국의 장기적 신탁통치를 통한 한반도의 지배권 확보와는 전혀 다르게 도출이 되었다. 이에 미국은 삼상결정에 참여한 미 국무장관 번즈를 공산주의와 내통한 불순분자로 내몰고 삼상결정을 무산시키기 위하여 회의의 결정내용을 “소련은 신탁통치를 강조하였고 미국은 즉각적인 독립을 옹호하였다”고 정반대로 왜곡하였다.

미 군정청은 동아일보 등의 언론 매체를 통해 이러한 허위사실을 유포시켰다.(동아일보는 미국 발 기사라고 속이며 정확한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당시 친일 보수 세력이 모여 있던 한민당을 대변하던 동아일보는 미 군정청의 지시에 적극 가담하여 12월 28일자 1면 머리기사로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소련에 경고한다는 사설까지 실었다.

식민지 후진국에나 있을 법한 신탁통치가 우리나라에 실시된다는 사실이 민족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대중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이러한 왜곡된 뉴스에 너나 할 것 없이 신탁통치 반대, 곧 반탁운동을 벌였다. 실제로 당시 반탁운동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의 거짓말에 속아 소련은 신탁통치를,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고 믿고 있었다.

당시 모스크바 삼상결정 발표 뒤 부분적으로 반탁의사를 나타내던 좌익세력은 곧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였다. 당시 좌익세력은 찬탁, 곧 신탁통치를 찬성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분단을 막기 위해 임시정부 수립을 먼저 하도록 규정한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했다.
당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했던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점차 진실이 알려지니까 우리 민족의 독립을 원하는 사람은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 했소. 반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우리보고 찬탁을 했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우리가 왜 신탁통치를 지지해. 우리는 찬탁을 말한 적이 없소. 우리가 외친 것은 삼상결정 지지였고 통일된 임시정부였소"

미 군정은 거짓 내용의 벽보를 제작해 일제히 붙이는 등 친일파들을 고용해 반탁운동을 지휘하였다. 이렇게 해방 후 냉대하는 북한 정권을 탈출한 친일세력들은 미군정의 후원에 고무되어 스스로를 애국자라 내세우면서 모스크바 삼상결정을 지지하는 세력을 소련의 사주를 받은 꼭두각시, 민족을 팔아먹는 매국노로 비방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미군정 치하의 이 땅에서 벌어졌다.

친일파들은 이제 반공 반소를 앞세워 하루아침에 애국자로 자신을 둔갑시켰다. 미군정에 고용된 친일 세력들은 돌아다니면서 “신탁통치란 무엇이냐 , 소련이 사주해서 좌익이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이다”라고 선전하였다.

우리 국민은 미국의 역사왜곡, 사기 행각에 말려들어 미군의 의도대로 좌우대립이 일어나 미군정 지역만의 단독선거 강행으로 우리나라를 끝내 분단의 길로 몰고 갔다.

그러나 사실은 좌우대립이 아니고 미군과 친일세력이 한패가 되어 애국적 민중을 탄압하기 위해 술수를 써 애국을 좌익으로 몰아 분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 당시 좌익 공산진영은 소련이 제안한 찬탁을, 우익 진영은 미국의 제안인 반탁을 서로 주장해서 그 당시 나라가 심히 혼란스러웠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극소수를 제외하고 국민 전체가 미국이 날조한 것을 믿고 있는 것은 당시 나라를 통치한 미군정의 조직된 공작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코리아 전쟁이 북조선의 남침 때문에 시작 됐다고 속인 것처럼 그 당시에도 미군정은 우리 국민들을 철저하게 속였다.

당시 신문에는 찬탁과 반탁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다는 허위 기사만 냈다. 이것을 오늘에 와서야 찬탁을 삼상지지로 바르게 고쳤지만 현재도 미군정의 날조 공작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않고 우리 국민들 사이에서 의사소통의 잘못으로 오해가 생겨 반탁과 찬탁으로 갈린 것처럼 기술하고 미국이 속임수를 쓴 사실을 숨겨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미국 언론의 사실왜곡 내용을 남한 언론도 조작


미국은 처음에 자국의 언론 즉, 일본에서 발행되는 태평양 성조기를 통하여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거짓으로 알리고 이것을 동아일보 등의 한국 언론이 받아쓰게 하는 비열한 방법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조작했다.

동아일보는 미군정의 지시를 받고『태평양 성조기』지 1945년 12월27일자 한국관련 기사 (랄프 하인젠 기자)의 한국관련 내용을 그대로 번역하여 한국국민에게 알렸다.

랄프 하인젠 기자는 동아시아에 문외한이었다. 즉, 자신이 직접 쓴 기사가 아니고 미군이 넘겨준 원고를 기사화한 것이다.

미국의 공작으로 <태평양성조기> 와 <합동통신>에도 같은 날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미 육군 극동군사령부를 대변하는 <태평양 성조기> 와 그리고 서울의 주한미군사령부가 일제식민지의 도메이 통신을 접수하여 운영하면서 <합동통신> 으로 간판을 고친 두 기관에서 동시에 같이 보조를 맞췄다는 것은 미국의 정치적 음모였음을 보여준다.

모스크바에서 이 결정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시각은 12월 28일 오후 6시였다. 그런데 하루 전인 12월 27일에 동아일보에 모스크바 결정에 관한 기사가 났다. 미군 측의 의도된 공작임을 또 한 번 보여주고 있다.

미군의 압력으로 동아일보에 이어서 조선일보도 조선인에게 신탁통치라는 굴욕적인 왜곡된 뉴스를 보도함으로써 양대 신문에 의해서 우리민족의 좌우익 분열로 극심한 좌우대립이 극에 달했다. 이와 같이 미국은 우리민족의 분열을 획책하였고 현재도 분열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군정은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 제안자는 미국이라는 <타스통신>의 보도는 사전 검열을 통해 알려지지 않게 통제했다.

그래서 진실은 간헐적으로 알려지는데 그쳤다.

이와 같이 미국은 자신들이 날조한 것을 진실인 것처럼 뉴스로 내보냄으로써 우리 국민을 속였다. 오늘날에도 북한에 관한 뉴스는 거짓말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온 국민이 체험으로 알고 있다.

특히 식민지 배상금을 지불하는 걸 원하지 않는 일본은 북한 소식인지 북한 모략 선동인지를 구분 하지 않고 마구 보도하고 있다. 일본 지배세력은 하루도 안돼서 탄로 날 거짓말을 하는 뻔뻔스런 자세를 보여 왔다.

2010년2월23일. 일본 아사히(朝日) 신문은 아래와 같이 거짓말을 뉴스처럼 내보내고도 부족한 느낌이 있어서인지 해설까지 실었다.

지난해 5월 북한의 2차 핵실험 직후 중국이 북한에 개혁•개방, 세습 반대, 핵 포기 등을 요구했다고 일본 아사히(朝日) 신문이 23일 보도했다. 내정간섭이 될 수도 있는 이례적인 강경 대응이다. 신문은 복수의 북한 소식통을 인용, 이 같은 요청은 공산당에 의해 이뤄졌다고 전했다. 북한의 핵 보유가 기정사실화되고, 경제 상황도 불안해지면서 인접국인 중국이 강한 위기감을 표시한 것으로 아사히는 해석했다.

신문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해 5월 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3남 김정은을 지명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김 위원장의 매부 장성택 국방위원을 중국에 파견했다. 그 직후 북한은 핵실험을 강행했으며 장 국방위원은 5월 말 다시 중국을 방문했다. 이때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인 왕자루이(王家瑞)가 장 위원에게 개혁•개방, 세습 반대, 핵 포기 등 요구사항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중국은 당시 예정됐던 정부 고관과 대표단의 북한 파견을 취소했다는 것이다.

아사히는 또 “중국이 전에 없던 강경 자세로 나오자 북한은 중국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김정은이 장 국방위원과 함께 6월 10일 중국을 직접 방문하도록 했다”고 전했다. 중국에 김정은을 보내 세습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풀이했다.(*참조자료 보기---여기를 짤각하여 열람 하세요)

이와 같이 일본 신문이 보도 했으나 하루도 못 되어 중국 외교부 친강(秦剛) 대변인은 23일 정례브리핑에서 “중국은 내정 불간섭의 원칙하에 결코 다른 국가의 내정 및 사무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아사히 신문의 보도에 대해 사실무근이라며 정면 부인했다. >(**참조자료 보기---여기를 짤각하여 열람 하세요)

1947.5.21 서울에서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미국은 일방적 퇴장으로 파탄시켰다. 미국은 통일된 국가 보다는 남한에 단독 정부를 수립하는 게 목적이었고 이를 위해 독자적으로 행동하였다.

전후처리 관련 분쟁에는 유엔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유엔헌장 제107조’의 규정을 위반하고 불법적으로 유엔에 상정하였다. 이것은 상대방 진영을 무시하고 독단적이고 불법적인 행동으로서 조국을 분단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불법적으로 유엔에 상정할 때부터 분단은 정해져 있는 거나 같았다. 제평화기구에서 범죄단체로 전락한 유엔은 우리 조국을 완전히 분단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죽는 날까지 혈육을 만날 수 없게 하여 수백만 명 이산가족에게 죄를 저지른 범죄 집단 유엔은 북한을 침략해서 무고한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는 범죄를 또 저질렀다.

미국은 저들의 거수기를 발동해 47년 11월 14일에 유엔감시하의 선거를 담당할 「유엔한국위원단」을 만들어냈으나 몇 달 뒤 「유엔한국위원단」을 반대하여 2.7 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1948년).

1948년 1월 8일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서울에 도착하자 이날 서울의 여러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으며 1월 19일에는 경성전기회사 노동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다.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의 입국을 반대하는 애국민중의 투쟁은 마침내 경향 각지로 확대됐다.

1948.2.7일에는 전국에서 참가하였다( 2.7 항쟁 즉, 2.7구국투쟁). 서울, 인천, 대전, 목포, 부산을 비롯한 여러 도시의 철도노동자들은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은 물러가라!≫
≪미군은 즉시 철수하라≫,
≪이남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한다≫ 등의 구호 밑에 총파업에 돌입했다.
투쟁은 삽시에 40여개의 도시를 포함한 경향 각지를 휩쓸었고 철도, 체신을 비롯한 각 부문에 걸쳐 수백 개의 공장, 업체 노동자들의 참가하에 대규모적인 동맹파업으로 확대되었다.

같은 날 전라북도 완주군 농민들도 투쟁에 나섰으며 경찰의 탄압만행에 격분하여 경찰지서를 들이쳤다. 합천, 김제를 비롯한 각지의 농민들은 시위와 횃불투쟁 등을 벌였다.

2월 13일 청년학생들은 서울 탑골 공원 앞과 종로 네거리, 남대문 거리들에서 ≪유엔임시한국위원단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2월 7일부터 10일까지의 사이에만도 투쟁참가자들은 33개소의 경찰기관을 습격하고 47명의 악질친일경관들을 살상했으며 68개소의 전선을 끊어버리고 39대의 기관차와 5개소의 철길과 도로를 파괴해 버렸다.

이 투쟁으로 이남 전역에서는 교통과 통신이 마비되었고 대부분의 공장, 기업체들에서 생산이 정지상태에 들어갔다. 2.7구국투쟁은 미국과 그 추종자들의 가혹한 폭압 속에서도 3개월 가까이 줄기차게 벌어졌다. 이 투쟁에는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지식인 등 무려 2백여 만명에 달하는 각 계층 애국민중이 참여했다.

참으로 2.7구국투쟁은 민족의 분열을 막고 통일 독립된 조국에서 살려는 우리 민중의 굳센 의지를 내외에 널리 과시한 애국적 투쟁이었다.1948년 2월 5.10단독선거를 분쇄하여 민족분단을 막고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하여 무력투쟁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2.7구국투쟁이라는 "작은 전쟁"에서부터 6.25전쟁이 끝나는 1953년 정전까지 우리민족은 죽음으로써 미국에 항거하였다.

해방된 조선에서 독립정부의 수립은 오직 조선인의 힘만으로 이뤄져야 하며 유엔으로 간판을 바꾼, 실질적인 미군 감시하의 선거는 원치 않았다.

우리민족의 장래는 우리 민족 스스로가 결정해야지 세계대전 후 독립하여 미국의 원조가 필요한, 우리민족에 관심조차 없는 잡다한 신생국가들을 포함한 유엔총회의 다수결로 결정한다는 것은 미국이 천명하고 「국제연합헌장」에도 있는 민족자결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즉, 그 나라 운명은 그 나라 사람들 스스로가 결정해야지 다른 나라가 또 다른 ざ瓚?운명을 좌우해서는 안 된다고 그 당시 민중들은 외쳤다. .

이렇게 민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횡포에 의해 불법적으로 조작된 1948년의「5.10단독선거」는 민중을 억압하는 살벌한 공포분위기 속에서 강행되었다. 그것은 민의가 수렴된 자유스럽고 평화적 선거가 아니었고 주한미군이 개입된 군사적 폭력행사였다.

이에 대해 AP통신은 『미군 정찰기는 상공을 비행하였고 선거장이 있는 곳에는 야구용 타봉을 가진 「향보단」에 의하여 엄중히 경호되어 있었다. 그리고 서울에서는 수 천 명의 경관과 투입된 민간인이 미군의 지원 하에 각 요소와 교차장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으며 각 골목입구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민간 경비대원은 도끼자루, 야구용 타봉, 곤봉 등을 휴대하고 있었고 경비대는 미국제 카빈총으로 무장하였다. 분위기는 계엄령하의 도시와 같았다』라고 보도했다.

미군은 투표를 거절하는 사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주저하는 사람들까지도 닥치는 대로 체포구금하고 마구 때리며 학살하는 만행을 감행했다. 골목마다 뭔가를 두들겨 패는 소리가 났고 여자의 비명 소리도 들려왔지만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만 듣고 있을 뿐 주위에서는 그 쪽으로 감히 가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미국은 5월7일부터 10일까지의 사이에만도 5만 여명에 달하는 우리 민중들을 체포했고 5백89명의 애국민중을 잔인하게 죽이는 만행을 감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파렴치하게도 이미 작정했던 대로 단독선거결과를 날조하여 『선거가 성과 있게 진행』됐다고 왜곡하여 발표했다.

이처럼 미국은 유엔을 도구로 이승만을 괴뢰 정권으로 만들어 내는 선거놀음판을 벌림으로써 우리 조국과 민족을 분열시키는 범죄행위를 자행했던 것이다.


미국의 단선단정 음모와 조작 배경



1946년 3월5일 서울에서 38도선 철폐를 요구하여 국민대회를 열어 미 군정청까지 행진하는 시위가 있었으나 미군정은 정반대로, 1946년 5월23일 38도선 무허가월경 금지포고령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38선 왕래를 금지시켜 놓고 미군은 지령을 내려 이승만에게, 이제는 통일정부를 기대할 수 없으므로 남에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발언하게 하였다. (1946.6.3. 이승만 정읍발언).

이 같은 발언은 1947년 5월21일의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기 전으로서 미국은 자신들이 원하는 항구적 신탁통치가 아닌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을 향해 나가는 미소공동위원회에는 관심이 없고 단독정부 수립의 길로만 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48.2.10 김구,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성명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발표
1948.2.16 김구, 김규식,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이 통일정부 수립방안을 비롯한 제반 문제를 토의하자고 북측에 서신
1948.2.26 유엔 소위원회, 조선 전토가 어려우면 남에서의 단독선거도 가능하다는 권고안가결

이에 대해 남에서는 2.7구국투쟁, 제주도 4.3항쟁, 5.8총파업 등
단선반대투쟁 전개
1948.3.11 남의 김구, 김규식, 조소앙, 김창숙, 조완구, 홍명희, 조성환 등이 남북 협상으로 민족자결과 조국통일을 실현하자는 성명 발표
1948.3.25 북측이 평양방송을 통해 남북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4월 평양)
제안
1948.4.17 김구, 기자회견에서 평양행 표명
1948.4.19 평양에서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 (4.26)
1948.4.26 평양에서 남북인사 15명을 중심으로 남북 지도자협의회 (∼4.30)
1948.5.1 평양에서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
1948.5.6 김구, 김규식, 남북협상에 관한 공동성명 발표
1948.5.10 남북지도자들의 분단을 막기 위한 활동이 활발함에도 남은 범죄단체 유엔의 감시 속에서 단독선거 강행 실시
1948.7.17 남에서 헌법을 공포하고 초대 대통령(이승만) 선출
1948.8.15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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