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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코리아 전쟁: 그 진실을 벗긴다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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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6-26 07:12 조회3,7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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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자들은 자기가 전쟁을 일으켜 놓고도 그 원인을 피해국에 돌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미국의
제국주의 세력이 그렇게 행동한 적이 대부분이다. 코리아 전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코리아 전쟁"
흔히들 "6.25전쟁"이라고 말하는 전쟁은 본질적으로 우리 민족 대 외세, 즉 미 제국주의와의 전쟁이었다.
여기에 남한 군은 우리 민족의 편에 서지 못하고 처음부터 외세의 편,즉 미군의 맥아더 지휘 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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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코리아 전쟁: 그 진실을 벗긴다⑤



*정리: 민족통신 공동


제국주의자들은 자기가 전쟁을 일으켜 놓고도 그 원인을 피해국에 돌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미국의 제국주의 세력이 그렇게 행동한 적이 대부분이다. 코리아 전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코리아 전쟁" 흔히들 6.25전쟁이라고 말하는 전쟁은 본질적으로 우리 민족 대 외세, 즉 미 제국주의와의 전쟁이었다. 여기에 남한 군은 우리 민족의 편에 서지 못하고 처음부터 외세의 편,즉 미군의 맥아더 지휘 하에 있었다.

1948년8월25일 미국은 이승만 정권과 군대에 대한 지휘권과 군사기지 관할권을 협정으로 명문화 하여 확고하게 틀어쥠으로써 코리아 전쟁에 사전 대비하였다.

일본군 장교 출신들로 군 수뇌부를 조직한 남한 군은 코리아 전쟁에서 미군의 명령에 움직이는 꼭두각시 입장에서 전쟁에 참여한 것이다. 1949년 6월29일 주한미군 철수 완료라는 발표는 거짓이고 사실은 미 군사고문단 이란 이름으로 500명의 미군장교들이 잔류하여 남한의 허수아비 같은 한국군을 지휘 감독하였다.

유엔군의 인천 상륙이 있자 북한군은 신속히 38선 이북으로 철수하였으므로 목적을 달성하였고 더구나 유엔군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보복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보복 아닌 보복이 점령지에서 일어났다.

평화의 상징 유엔군은 코리아 전쟁에 참여하여 처음에 목적을 달성하고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피에 굶주린 정복자가 되어 북한을 침략하였다. {지옥에서 온 악마}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한 지역을 점령하고 비 무장한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국제민주여성동맹과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진상조사단



이러한 범죄행위는 1951년 국제민주여성동맹과 국제민주법률가협회가 진상조사단을 북한에 파견하여 파악된 것이다.

<##IMAGE##> 진상조사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영국인 모니카 펠톤의(Monica Felton)의 기행문인 That"s Why I Went 와 1952년 3월 북한을 방문한 후 작성된 법률가협회의 보고서인 [미국의 범죄에 대한 국제법률협회조사단의 보고서]에 제시된 증언에는 가족 중 어느 누구도 미군에 대항한 적이 없었다. "미국사람들은 신사라고 생각했었는데! 미국인은 기독교도로 생각했는데! 그들이 온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그들이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하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는데!" 펠톤이 그 노인에게 기독교인이냐고 세 번씩이나 물으니까 그제야 "나는 일생 동안 기독교를 믿어왔소. 그러나 기독교인이라 일컫는 자들이 이러한 짓을 하는 것을 본 이후 이제는 더 이상 믿을 수가 없군요."라고 말하면서 그의 연약한 몸을 부르르 떨었다(Felton 1953, 133-35).

굶주린 창자를 움켜쥐고 낟알이 여물기만 기다리던 전답의 곡식을 불살라 버리고 또 아무런 군사시설이 없는 농촌의 평화스러운 새벽에 폭격으로 진동시켜 할아버지와 여러 형제가 화염에 싸여 죽게 한 것도 미국 군인의 소행이었다. 참으로 잔인하였다.

양민학살과 파괴행위에 대해서 국제민주법률가협회보고서는 이것이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서 무작위적으로 저질러진 것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전쟁범죄이었다고 규정짓고 세계법정에 출정시켜 책임자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학살해도 유엔에서 이스라엘 규탄결의안 조차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다. 오직 한나라, 미국이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국제사회나 유엔은 미국의 눈치만 보고 있는 허수아비이다.

아무리 흉악하고 흉악한 범인이라 하더라도 특정한 한 사람을 잡기 위해서 아프간 국민을 대량 학살한 세계 최대의 살인마 미국, 그리고 대량살상무기(핵무기)를 제조하고 있다고 세계를 속이고 이라크를 침략한 미국에 대해서 세계는 침묵하고 있다. 사기꾼 말이 옳다고 수긍해야지 만약 바른 말을 했다가는 반미성향의 인물로 낙인 찍혀 몰락하게 되는 게 오늘의 어두운 현실로 되어 왔다.

세계가 미국의 영향력 하에 있기 때문에 누리는 특권이다. 이런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미국은 유엔이나 자유민주주의를 앞세우고 자신의 지배권역을 넓히고 영향력, 세력을 끊임없이 넓혀나가는 세계 유일한 국가이다.

미국의 제11대 대통령인 제임스 k. 폴크(James k. Polk)의 명령을 받은 자차리 테일러(Zachary Tailor) 장군이 멕시코 국경으로 내려가 멕시코 군을 자극하여 전쟁을 시작하도록 부추겼으나 멕시코 군이 이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점점 도발적인 자극의 강도를 높이고 마침내 멕시코 침략전쟁(1846년)을 일으켜 멕시코 땅을 빼앗은 비열한 수법을 코리아 전쟁에서 다시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898년 2월15일 미국 시민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아바나 항에 정박해 있던 미국 전함 ‘메인’이 폭파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스페인은 국제재판소나 또는 중립국과 사건을 공동 조사하자고 미국에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제안을 거부하고 단독으로 조사했다. 그 후 함선이 외부로부터 받은 공격으로 폭파되었다고 발표하고 함선을 바다 쪽으로 끌어내 외부에서 조사하지 못하도록 했다.

스페인 전쟁 후 13년이 지난 1911년에 주목할 일이 벌어졌다. 함선 메인이 인양된 후 선박업자들이 몇 달 동안 조사한 결과 함선이 내부에서 폭파된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외부 공격 설을 뒤집는 이 조사 결과를 부정하던 미국 해군은 폭파 사건 후 90년 만에 인정했다. 미국이 스페인전쟁을 일으키려고 함선 폭파 사건을 꾸몄다는 음모설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이 사실을 돌이켜 보면서 요즘의 <천안함>침몰 사건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가에 대해 떠오르는 그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미국정부는 “아폴로는 달에 가지 않았다”는 진실을 음모론 이라고 폄하하듯이 당시에도 음모로 몰았다. 그리고 1812년 6월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제4대 미국 대통령, 그리고 당시 켄터키 주 출신의 호전적인 하원의장 헨리 클레이(Henry Clay)를 비롯하여 캐나다를 정복하려는 땅에 굶주린 전쟁 광들의 선동으로 미군은 캐나다를 급습하여 토론토 등 전 지역으로 진격해 들어가 공공건물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미국은 자신들의 이러한 부끄러운 만행의 역사는 숨기고 오히려 영국이 미국의 항로를 방해하고 미국 선원들을 강제로 영국군에 징집시키는 것에 반발해서 일어난 분쟁이었던 것으로 역사의 진실을 왜곡했었다.

그러나 미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케네스 C. 데이비스가 이 사실을 폭로했고 브리타니카(Encyclopedia of Britanica) 백과사전에서도 미국이 영토 욕으로 1812년 캐나다 침략전쟁을 일으켰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미국은 다른 나라를 자극해서 전쟁을 시작하도록 부추기고, 사건을 만들어 내고 이렇게 자신이 스스로 만든 사건을 구실로 전쟁을 일으키고 그리고 추악한 소행을 감추기 위해 역사를 조작해 왔다. 이것도 한 두 가지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건들에 연루되어 온 것이 미국이었다.

이상의 전쟁들은 지구상에 공산주의가 생기기 전의 일로서 이념과는 전혀 무관하고 미국이 인디언을 살육하고 개척이란 미명하에 영토를 확장하며 성장해서 본능적으로 받아들인 팽창주의에 기인한 것들이었다. .

군수업자는 자기회사의 무기를 군대가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정치자금을 제공함으로써 군수업체와 군부가 결탁하게 된다. 이렇게 군부와 대기업인 군수업체가 유착된 형태를 군산복합체라 한다.

미국의 태생적인 팽창주의는 군수산업을 발전시켰고 군수산업은 로비를 통해 정치인과 결탁하여 군산복합체로 성장했으며 비대해진 군산복합체는 생산한 무기를 쌓아두지 않고 소비할 전쟁이 필요 하였고, 이런 전쟁의 욕구로 팽창주의는 더욱 고조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갈망한 전쟁을 통하여 해외시장을 확장하고 개척하여 국익이 확대되어 나아갔다. 코리아 전쟁 때는 군산복합체들의 요구대로 북한에 수많은 폭탄을 퍼부어서 소비시켰으나 중국이란 거대시장을 회복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결론으로서 코리아를 점령, 군사식민지화 하고 대륙으로의 도약을 목표로 코리아 전쟁을 일으킨 원인은 팽창주의에서 출발했다. 다시 말하면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아무 죄가 없는 전쟁 상대방을 악당으로 선전 선동하는 것이 필요 했다. 상대가 작은 나라일 때는 미국에 맞서는 전쟁에 나오도록 하기 위해 사전에 전쟁 발발 시나리오가 더욱 요구되었다.

미국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1758-1831)가 1823년 12월2일 의회 국정연설에서 남북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의 간섭을 거부하는 상호 불간섭 원칙을 선언했다. 먼로 독트린, 먼로 선언, 먼로주의, 고립주의 등으로 알려진 이 선언은 제국주의적 팽창주의나 개입, 간섭주의에 대비되는 고립주의의 전형처럼 알려졌지만 "먼로 선언"의 본뜻은 "아메리카대륙은 앞으로는 유럽의 어느 강대국도 식민지화 대상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의 스페인 정복(1808)은 중남미주 사람들에게 궐기하여 반란을 일으키라는 신호가 되었다. 그 결과 1822년까지 남쪽으로는 아르헨티나에서 칠레에 이르는, 또 북쪽으로는 멕시코와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중남미 주에서 스페인이 장악했던 모든 지역이 독립을 쟁취했다.

"먼로 선언" 이러한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지배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먼로 선언"은 남쪽으로는 아르헨티나에서 칠레에 이르는, 또 북쪽으로는 멕시코와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중남미 주에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장악했던 모든 지역을 미국의 지배하에 두는 정책이다. 전쟁도 이러한 팽창주의의 일부분일 뿐이며 추악한 전쟁이 이념전쟁으로 정당화되거나 미화될 수 없다.

세계인들의 대다수는 코리아 전쟁이 미국의 침략야욕을 채우려는 더러운 전쟁으로서 잊혀 진 전쟁, 정확히 말하면 잊고 싶은 전쟁이지만 코리안들에 있어서는 고마운 천사나라 미국이 남한을 지켜준 전쟁 또는 공산주의 남침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낸 숭고한 전쟁으로 역사를 기술하고 있어 아직도 그 진실을 깨달으려면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전정회담 중에는 공산 측 대표단의 경호원에 대한 폭력을 포함한 수많은 위반사항을 저질렀으며 중립지역에 대한 포격과 기관총사격을 가하는 악랄한 소행을 자행하였다.

미 군사는 비난이 일자 이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짤막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1953년 7월27일 북한의 남일과 미국의 해리슨이 정전협정에 서명한 이후에 대륙으로의 팽창 야욕을 채우지 못한 좌절감에 빠진 미국은 패배감과 분노를 타락하고 야만스런 보복행위로 표출시켰다.

하나는 협정 서명 1시간 20분 후 미국 세이버 제트기 4대가 중국영토 100Km내에 있는 민간비행장에 침투해 소련 민간 항공기를 폭격해 15명의 승객과 6명의 승무원을 살상했다.

또 하나는 중폭격기 편대가 평양시를 마지막으로 강타한 일이다. 울분에 휩싸인 야만적인 광기의 표출로서 ‘자유와 평화의 사도’라는 탈을 쓴 야누스적인 미국의 참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유엔군사령관 클라크(북방한계선=NLL 을 일방선포한 장본인)는 의회에서 귀국보고를 하면서 “북조선은 초토화되어 석기시대로 돌아갔다. 앞으로 한 세기 정도는 다시 문명사회를 일굴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정부의 지시를 수행함으로써 역사상 승리하지 못하고 정전협정에 서명한 최초의 미군사령관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나는 모든 것이 실패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선임자들인 맥아더와 리지웨이 장군들도 동감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술회했다.

유엔군이 인민군을 물리치고 자유대한을 되찾았는데 유엔군 사령관은 실패했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유엔군의 목적이 대륙획득 에 있었다는 것을 드러낸 발언이었다. 또한 1951년 5월 15일에 열린 의회청문회에서 미국합동참모본부 의장 브래들리는 “조선전쟁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 고른 적과 잘못한 전쟁 (the wrong war, at the wrong place, at the wrong time, and with the wrong enemy)”이었다고 증언하였는데 이 말은 미국이 적과 그리고 전쟁 선택 장소를 잘못 골랐다는 뜻으로 침략전쟁을 시인한 발언이었다.

남한은 휴전협정에 참여도 서명도 하지 않았으나 현재까지 휴전이 실시되고 있다. 이것은 곧 남한이 미국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이다. 미군의 지배하에 있는 미국의 군사기지인 남한과 초강대국에 맞서고 있는 북한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기꺼이 막아야 할 세계 공산화의 위협이 없었다면 미국이 한국에 신경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소련이 해체되고 자본주의로 돌아선 이후에도 미국과 러시아가 핵무기 감축을 하지않고 서로 상대방을 겨누고 있는 핵무기를 다량 보유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코리아 전쟁이 미소 양 진영 사이의 이념전쟁이나 미소의 대리전쟁이란 소리도 미국과 소련이 이념이 같아진 오늘날에도 조국반도뿐만 아니고 세계 도처에서 전쟁의 위험은 변함이 없다. 따라서 대리전쟁이나 이념전쟁이니 하는 그와 같은 주장은 허위임이 드러났다
.
전 세계가 이념이 같아진 오늘날에도 국제사회나 유엔에서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세계 지배야욕은 여전하고 미국이 어느 나라를 침략할지 모르는 전쟁위험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념이 해결되면 미국은 다른 구실을 내세워 각국을 침략한다. 소련군을 몰아낸 아프간과 이라크를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것은 이념 때문이 아니다.

국제사회나 유엔을 지배해서, 민간인을 살육하는 이스라엘을 비호하고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러도, 이라크나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가혹행위를 하여 인권유린의 범죄를 저질러도 비난이나 제재를 받지 않고 막가파 식으로 뭐든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특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

미국은 세계인류와 공생하면서 평화롭고 정의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하는 나라가 아니고 세계 도처에서 자신이 지배하는 범위를 끊임없이 늘려가는 팽창야욕에 가득 찬 국가이다. 이런 나라가 어떻게 민주국가이며 인권을 존중하는 국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석유덩어리로 만든 신형무기인 네이팜 탄은 가공스런 살상을 저질렀다. 높은 공중에서 폭발한 네이팜은 조그만 산탄으로 사방에 퍼져 지상에 있는 모든 물체를 태워버리고 사람의 살에 붙어서 몸을 불태워 버린다. 네이팜탄은 투하하면 공중에서 터지면서 네이팜에 불이 붙어 땅에 흩어지는데 3,000℃의 고온을 내며 불바다를 만드는 야만적인 폭탄이다.

그런데 미군은 이 네이팜탄을 월남전에서 사용하여 전 세계인의 비난을 받은바 있었다. 사실은 그 이전인 코리아 전쟁에서 그것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져 왔다. 그 피해는 더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비-29편대 매일 북한에 800톤 폭탄 투하


한국전쟁 시기 B-29 편대는 북한에 매일같이 800 톤의 폭탄을 투하하였다. 이중에는 대량의 순수 네이팜도 포함되어 있었다. 1950년 6월부터 10월 말까지, B-29는 네이팜 320만 리터를 쏟아 부었다.

1950년 7월, 대전 전투에서 생포되어 북으로 끌려간 미 제24 사단장 윌리암 딘(William Dean) 장군이 후에 말하기를, 그가 본 마을이나 도시 대부분이 그저 눈 위로 비죽 솟아 나온 폐허들 뿐이었다고 한다. 그의 기록을 보면 그가 만난 거의 모든 코리안들이 폭격으로 인해 가족들을 잃었다.

코리아 전쟁이 끝날 무렵 즈음에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조차도 워싱턴에 이렇게 말하였다.

“2차 대전 말, 네이팜이 만들어졌을 때에는 누구도 네이팜이 모든 민간인을 처치해 버릴 것으로는 상상도 못했었다”고. 지적하면서 “미국은 남한에서 북한군을 물리치고 나서 북한지역을 침략해 들어가고 북한과 동맹관계인 중국을 침략해서 상실한 거대중국 시장을 되찾는 데에 코리아 전쟁의 목적이 있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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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초기 6개월 동안 미 극동공군 폭격사령관을 역임했던 오도넬이 맥아더 청문회 증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국 군이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북한의 5개 주요도시 (평양, 성진, 나진, 원산, 진남포)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코리아 반도의 전부가 정말 놀랄 만큼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이름값을 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서 있지 않았다. 중공군이 들어오기 전에 더 이상 목표물들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른바 유엔군은 북한지역을 점령할 때 필요이상으로 힘없는 양민들을, 그리고 아이와 여자들까지 불태워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고 식수에는 독극물을 풀어 놓고 북한에는 살지 않는 유해 곤충들을 대량으로 살포하는 등 대륙을 침략하는데 후방에 장애물을 남겨놓지 않기 위해서 미 종군기자들이 ‘석기시대’라고 표현할 정도로 완전히 초토화 시켰다.

맥아더, 재일동포들 조직해체와 재산몰수도 명령


미국은 또 북침전쟁을 일으키기 전에는 코리아 반도에서 군사작전 중 일본에서 야기될지도 모를 위협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해서 재일 동포들에 대한 박해를 하였다. 즉, 1949년 9월8일 재일동포들의 조직해체와 재일동포들 재산몰수 그리고 간부 추방령이 맥아더에 의해 내려졌다.

요크 대학에서 동아시아 역사를 강의하면서 킬램 시니어 펠로십 등 많은 학문적 영예를 안았던 ‘스티븐 엔디콧’과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 미 육군 지휘 및 일반 참모 대학, 미 공군사관학교, 미 공군 공중전 대학 등의 교과서 집필에 참여했던 토론토의 요크 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에드워드 해거먼’ 의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이란 책에는 미국은 일본 전범과의 비밀거래를 통해 세균전 실험 정보를 얻었고 결국 초기 코리아 전쟁에서 이 무기를 실험, 사용했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들은 미국, 중국, 북한, 캐나다, 호주 등으로부터 광범위한 비밀문서 등 자료를 수집하고 관련 인물들을 인터뷰해 세균전을 이용한 주장의 신빙성을 높였다. 그간 생물학전을 부인해 온 미국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으며 미국의 생물학전 프로그램이 순수하게 방어 및 보복 성격에 머무른 게 아니라 공격무기로 개발되었다는 새로운 사실도 드러났다.

1951년 12월 미국 국방장관 로버트 러빗은 생물학무기를 공격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최단시간 내에 실질적인 준비 태세를 갖출 것"을 명령했다. 몇 주 뒤 공군 참모총장 호이트 반덴버그는 그 같은 능력이 "신속하게 실현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1953년 9월 6일 일요일, 마지막 남은 미군 전쟁 포로를 실은 트럭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던 그날 아침, 베이징 라디오 방송은 코리아에서 생물학전에 참가한 것을 시인한 미 공군 장교 25명의 이름을 발표했다. 판문점에서 38선을 넘은 첫 번째 지프차에는 이 25명 중 3명의 대령인 앤드루 에반스, 워커 마후린 그리고 어색하게 웃고 있는 프랭크 슈와블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에 송환된 뒤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는 위협 아래 자신들이 종전 자백을 철회했다.


"국제민주법률가협회(IADL)": 미군의 세균전 사용 확인



1952년 3월의 "국제민주법률가협회(IADL)"의 보고서는 미군에 의해 세균전이 진행되었음을 확인했다. 협회의 조사단은 북한 곳곳에서 페스트, 콜레라, 티프스, 출혈열, 일본 뇌염등의 균을 가진 특별한 벼룩과 파리, 썩은 생선, 거미 등을 발견하였는데 이들은 전혀 나타나지 않아야 할 곳에 집단으로 뭉쳐 있었다. 이 곤충들이 발견되기 전에는 미군 비행기가 아주 낮게 선회하는 것이 목격되곤 했던 것이 확인됐다.

이러한 내용은 52년 6-8월 사이 작성된 국제과학조사단의 "한국과 중국에 있어서의 세균전 사실에 관한 보고서"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는데 특히 이 보고서는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세균무기제조 지도자 이시이 시로와 미국의 관계에 관심을 나타냈다.

부르스 커밍스는 "미국은 일본인과 나찌 세균전문가를 고용하였고, 제네바 협정으로 사용 금지된 신경가스 사린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으며 이를 부인하다가 국제적인 망신을 샀다"고 적고 있다. 이시이 시로는 마루타, 즉 인간생체실험을 주도한 장본인이다.

731부대의 수많은 생체 실험 데이터들은 전쟁 종결 후 미국이 입수했다. 731부대에서 활동했던 실험자들에게는 면죄부가 주어졌다. 731부대의 수장 이시이 박사는 후에 도쿄대학 학장까지 역임하였다.

---1951년 5월 6일 남포시에 4차례에 걸쳐 맹폭격을 감행하면서 독가스탄을 퍼부어 그 부근인민들을 포함하여 1379명의 무고한 주민들을 살해하였다.

---1951년 7월 6일과 9월 1일 원산지구와 황해도 여러 지대들에 최루성 및 질식성 독가스탄을 투하하여 수십 명의 중독자와 희생자를 내게 하였다.

---1952년 2월 27일부터 4월 9일까지 기간에 공화국북반부의 여러 지역에 33차례에 걸쳐 독가스탄을 뿌렸다.

---1952년 9월 간리지역과 연안지방에 주로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독을 묻힌 100원짜리 가짜 돈과 삐라를 대량 뿌렸으며 1952년 5월 18일에는 대동군에 독을 묻힌 조개를 낙하하였다.


휴전협정은 포로송환문제 때문에 2년 가까이 지연되었다. 이 지연 때문에 전쟁은 무의미하게 계속되어 남측이 13만, 북측이 25만 명 가까이 사상자를 내는 반인도주의적 결과를 내었으며, 남북주민의 전쟁참화와 고통은 더 심화되었다. 또 결과적으로 국군포로나 인민군포로의 이산가족문제를 대거 남겼다.

이의 근본적 요인은 미국이 스스로 조인하고 비준한 제네바협정 전쟁이 끝나면 전쟁포로는 지체 없이 석방되고 본국으로 송환되어야 한다는 자동송환원칙을 위반하고 자유송환원칙을 요구한 때문이다.

1949년의 제네바협정도 공정한 자유의지의 확인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점이 고려되어 자유송환 대신 자동송환원칙이 채택되었다. 미국은 이 자유송환원칙을 스스로 조인하고 비준하고서 겨우 두 달 만에 뒤 짚는 행위로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게 되고, 북한에 수용되어 있는 미군포로의 송환을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당시 변호사출신인 애치슨 국무장관도 이를 반대하였다. 그런데도 미국은 대대적인 폭격과 무장도발 강화로 이를 관철시켰다.

우리 부모형제를 무수히 죽이고 국제조약을 제 맘대로 짓밟아 버리는 미국은 그냥 미국이 아니고 미 제국주의자인 것이다. 2010년 우리는 일제치하 35년 그리고 미제치하 65년 합해서 100년을 제국주의의 치하에서 살고 있다.

미국은 이같이 불법을 주장하며 시간을 끌어서 포로를 가두어 두고 세균무기를 시험하여 포로들에게 반인륜적인 고통을 가하였다.

1950년 11월 20일 부산 거제리 제100호 포로수용소 관하 제7호 수용소의 포로가운데서 주로 인민군포부대에 복무했던 포로들을 수용소 동남방 6키로 미터 지점에 끌고 가서 앉거나 누워 있도록 하고 그로부터 200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미 배치해두었던 탱크들의 중화기로 집중 사격하여 인민군 포로 전원을 학살하였다. 1951년 3월 ≪유엔군총사령부≫의 위생복리처장 젬스 준장이 인솔하는 세균 살륙전은 비밀리에 거제도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으면서 인민군 포로들을 대상으로 세균무기시험을 진행하였다.

---1952년 2월 18일 거제도 제62호 포로수용소에서는 포로들이 ≪민간억류자≫로 되겠다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 약 1000명의 미군병력으로 수용소를 포위하고 25정의 중기관총, 63정의 경기관총을 난사하여 102명의 포로들을 즉사시키고 260여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1952년 5월 27일 거제도 제77호 포로수용소에서는 이른바 ≪자원송환≫을 반대하고 공화국북반부로 돌아 갈 것을 주장하는 포로 800여명을 화염방사기로 소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1952년 6월 10일 거제도 76호 포로수용소에서 27대의 탱크와 12문의 포를 동원하여 화학탄을 발사함으로써 227명의 인민군 포로들이 희생되었다.

---1952년 7월 7일 거제도수용소 소장 보우트너는 작업에 동원시킨다는 구실 밑에 거제도수용소 4대대에 수용하고 있는 인민군포로 120명을 특별한 장치를 한 두 대의 자동차에 갈라 싣고 4시간 동안 감금한 채 가스무기시험을 하여 그들 전부가 두 달 동안이나 눈을 뜨지 못하였으며 불구자가 되게 하였다.

---1952년 6월 10일 제76호 포로수용소에서는 인민군 포로들이 ≪개인면회심사≫를 거절한 것과 관련하여 4000여명의 무장인원과 22대의 탱크, 20문의 포, 40정의 기관총 및 경기관총을 동원하여 무려 4시간에 걸쳐 무차별사격과 독가스를 살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여 276명의 포로들이 살해되고 수많은 부상자가 났다.

---1952년 8월 13일 용초도 제2포로수용소에서 미국침략자들은 자그마한 철조망 안에 수많은 인민군포로들을 가두어 넣고 2개소 대병력을 동원하여 1000여 개의 가스탄을 폭발시킴으로써 350명 이상이 중한 화상을 입었으며 44명이 의식을 잃고 4명이 희생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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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자료에 의해 파악된 학살 당한 인민군 포로 수는 3만 3600여명에 달하며 부상당하였거나 불구가 된 수는 수만 명에 달한다.

공산군에게 잡힌 유엔군 포로들은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치고 (http://news.donga.com/3/all/20100221/26336550/1)
유엔군에게 잡힌 공산군 포로들은 고문하지 말라고 아우성쳤다.

---1992년 12월 14일 경남 거제군 신현읍 고현리 용신마을 제 6포로수용소 화장실 자리에서 간이 경지 작업을 하던 포크레인 기사 김동윤(당시 26세)씨가 포로들의 내부관리 서류 50여 점을 발견했다.

"미군이 북한포로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총기 성능시험을 하고 있다", "세균무기실험 등 생체 실험을 하고 있다"는 등의 내용이 적혀 있으며 편지 끝 부분에는 "피의 섬 거제도에서 제 6수용소 전체 인민군 전쟁포로 일동"이라고 쓰여 있었다.

땅속에 묻혀 있던 현대사의 진실이 발견된 것이다. 이 편지를 처음 필사했던 당시 거제 신문사의 서용찬씨는 편지를 만든 천이며 내용들을 볼 때 당시 포로들이 직접 쓴 것임은 틀림이 없다"고 증언하였다.

52년 8월 영(英) 연방군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도니 밴크로프트 소령이 목격한 바에 의하면 미군들은 제네바협약을 위반하고 많은 포로들을 학대하여 포로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개입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방독면을 쓴 미군들이 생체 실험에 항거하는 포로들을 진압한 후 수용소 밖으로 나오고 있는 장면의 사진들이 공개 되었다. 1951년 5월 18일 UPI통신의 전신인 당시의 UP통신에 의하면 선상의 실험실에는 3천 여 회나 범죄적인 시험이 행해져 그 결과 거제도에 감금되어 있던 12만 5천여 명의 인민군포로 중, 1400명은 중태에 빠지고 나머지 중 80퍼센트가 어떤 종류의 질병에 걸려있다 라고 보도 하였다. 유엔군은 세계최강 미국과 약소국 북한과의 전쟁이 아니고 정의와 평화를 위해 침략자를 응징하는 군대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유엔을 지배하고 있는 미국이 조직한 군대다.

2차 세계 대전의 영웅이란 칭호에 만족하지 않고 이번 전쟁에서도 가장 먼저 공을 세우려는 전쟁 광 맥아더는 1950년 7월 9일, 전쟁이 터진 지 이 주일밖에 안 지났는데도 워싱턴의 리지웨이 장군에게 긴급 서신을 보냈다.

원자폭탄을 맥아더에게 허용해 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이 원자(A) 폭탄은 핵폭탄을 가리킨다. 맥아더는 북한에 이어 중국까지 점령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20년 가까이 정권에서 소외 당한 채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공화당 우파들에겐 맥아더는 집권을 위한 대안 카드로 떠받들어졌다.

트루먼이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맥아더에게는 막강한 후원자가 있고 공화당 후보로 언급되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맥아더는 정치적 야심을 품어서 공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작전국장인 찰스 볼티(Charles Bolte)에게도 맥아더는 자신의 비범한 야망을 전달하였다. 전쟁을 장악하여 북한을 점유한 다음, 중국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겠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참모본부에서는 핵폭탄의 사용 불가 결정을 내렸다. 핵폭탄까지 사용할만한 목표가 아니고 사용 후에는 오히려 미군에게 장해가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중국침략 계획은 맥아더만 갖고 있었던 게 아니고 미 행정부의 사전 계획이었던 것이다.

워싱턴은 당시 미국이 450 기의 핵폭탄을 준비해둔 반면, 소련에게는 25기뿐이었기 때문에, 모스크바의 반응에 대해 별 걱정을 안 하고 있었다. 미국이 강적이 있어서 핵폭탄을 이렇게 많이 비축해 둔 것이 아니었다. 북한만을 상대하기 위해서 비축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렇게 터무니없이 많이 생산해둔 이유는 핵으로 위협하여 중국을 삼키고 나아가서 세계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속셈이었다고 분석된다..

미국은 치밀하고 구체적인 핵무기 사용계획을 이미 세워 놓고 있었다. 셰이크다운(Shakedown) 계획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소련과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그 전쟁은 제3차 세계대전이고 핵전쟁이 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세워진 계획이었다. 그 계획의 핵심은 보복공격을 당할 위험 없이 소련을 완벽하게 파괴한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 따르면 미국은 제3차 대전이 발발한 지 6일째에 소련에 대한 핵 공격을 개시한다. 미국 본토와 유럽의 공군기지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이 소련의 70개 도시에 모두 133개의 핵폭탄을 투하한다. 소련의 전쟁의지를 완전히 말살함으로써 핵 보복의 위험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소련이라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코리아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스탈린은 근심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중국인민 의용군이 코리아 전쟁에 개입할 당시 미국은 또다시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였다. 그러나 이때도 핵무기 사용은 실행되지 않았다. 당시에 핵무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적 전투기를 제압하고 안전하게 실어 날라야 하지만 미국은 당시 소련의 비밀병기 미그-15기를 제압할 수 없었다. 항공기의 기술력에서 앞선 소련으로부터의 핵 보복을 받는 경우를 배제할 수 없었다. 이를 무시하고 무모한 3차 대전을 일으킬 것을 주장한 맥아더는 해임되었다.

코리아 전쟁 당시 격추되거나 추락한 공군기는 미국이 1천106대로 소련 공군기의 335대에 비해 3배 이상 많았다. 소련 공군이 코리아 전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50년 11월8일. 이날 소련 공군의 미그-15 전투기는 지금의 단둥(丹東) 상공에서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미 공군 F-51기를 격추해 첫 전과를 올렸다. 또 이틀 뒤인 10일 신의주 상공에서 "하늘의 보루"라고 불리는 B-29 폭격기 1대를 격추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중국은 중국인민 의용군을 파견할 때 소련 공군의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당시 소련 공군은 미국과 전면전으로 비화할 경우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을 우려해 작전 범위를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로 제한했다.

더러운 반칙으로 얼룩진 미국의 코리아 침략 전쟁


코리아 전쟁은 군사적으로 미국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패한 첫 번째 전쟁이었으며 더러운 반칙을 하여 죽어서도 영원히 불명예를 씻지 못하는 전쟁이 되었다. 그 만큼 도덕적으로도 패하여 철저히 패배한 전쟁이었다.

하버드대 ‘제프리 페렛’ 은 ‘전쟁으로 만들어진 국가’라는 책에서 그리고 미국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했고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던 보스톤 대학의 ‘앤드류 바세비치’ 교수는 ‘새로운 미국의 군국주의’ 라는 책에서 미국인들이 어떻게 전쟁의 유혹을 받는가 하는 것을 파헤쳤다.
미국은 200년의 짧은 역사를 가졌음에도 세계 여러 나라를 상대로 300회 이상의 크고 작은 전쟁을 하였고 패배를 모르던 전쟁 광 이었다. 이렇게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하는 거대제국 미국이 조그마한 한반도를 차지한 걸로 만족할 수 있을까?

원자폭탄의 위력으로 세계를 놀라게까지 하였으니 미국의 야망은 하늘 높은 줄 몰랐을 것이다. 1951년 4월12일은 미소 양국의 공군사에 희비가 엇갈린 하루로 기록됐다.

미군은 중국인민 의용군의 후방 병참선을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압록강철교와 주변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무려 72대에 달하는 B-29 폭격기와 호위 임무를 맡은 F-80 전투기 32대를 한반도의 북쪽으로 출격시켰다.

소련 공군도 이에 맞서 60대의 전투기를 발진시켰다. 약 40분에 걸쳐 치러진 공중전에서 소련 공군은 단 한대의 손실도 없이 B-29 폭격기 16대와 F-80 전투기 10여대를 격추시키는 완벽한 승리를 거뒀으며, 미 공군사에 이날은 ‘검은 목요일’로 기록됐다.

그 결과 극동 주둔 미 공군은 전략 폭격 능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 때문에 미국은 원폭을 투하하겠다는 구상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후 미국은 모의폭격 실험까지 실시하면서 북한과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원자폭탄으로 계속 위협하였다. B-29는 37개월의 전쟁 중 21일을 제외하고는 내내 하늘을 누볐다. 약 21,000 회의 출격에서, 167,000 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다음에 계속...)



[기획]코리아 전쟁: 그 진실을 벗긴다④ ---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기획]코리아 전쟁: 그 진실을 벗긴다③ ---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기획]코리아 전쟁: 그 진실을 벗긴다② ---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기획]코리아 전쟁: 그 진실을 벗긴다①---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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