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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코리아 전쟁: 그 진실을 벗긴다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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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6-22 20:03 조회4,0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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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 동포들은 민족분단사와 코리아 전쟁역사에 대해 그 진실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승만
정권부터 그 이후 대부분의 집권자들과 어용학자들은 주로 왜곡역사를 사실처럼 선전하여 왔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보안법’이라는 말도 안 되는 악법을 이용하여 진실을 진실대로 말하지 못하게 하였고,
동족인 북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동족으로 생각하면서 그들의 삶과 철학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그것이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어 감옥에 가야 하는 그런 참담한 사회가 바로 한국의 현주소로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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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코리아 전쟁: 그 진실을 벗긴다③



*정리: 민족통신 공동


남녘 동포들은 민족분단사와 코리아 전쟁역사에 대해 그 진실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승만 정권부터 그 이후 대부분의 집권자들과 어용학자들은 주로 왜곡역사를 사실처럼 선전하여 왔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보안법’이라는 말도 안 되는 악법을 이용하여 진실을 진실대로 말하지 못하게 하였고, 동족인 북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동족으로 생각하면서 그들의 삶과 철학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그것이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어 감옥에 가야 하는 그런 참담한 사회가 바로 한국의 현주소로 되어 왔다.

<##IMAGE##> 코리아 전쟁을 보는 관점도 미국정부와 이를 추종하는 남한의 역대 집권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미국의 양심적인 학자들이나 정의감을 가진 종군기자들이나 중국인이 보는 관점이 아주 다른 점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남한의 양심적인 학자들과 해외동포 학자들이 보는 관점도 미국정부와 이에 추종해 온 남한의 사대매국정권의 주장들과는 완연하게 다른 것이 구체적으로 검증되어 왔다. 미군이 자기 나라 이해관계 때문에 코리아 반도에 들어 온 것을 ‘점령군’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를 거꾸로 천사로 미화하여 ‘해방군’이라고 주장하는 상반된 관점을 주장하는 이들이 바로 미국 지배세력이며 이에 추종해 온 사대매국세력의 입장이다.

미국의 학자 부르스 커밍스가 쓴 ‘코리아 전쟁의 기원(The Origin of Korean War)’을 비롯하여 미국의 종군기자 아이 에프 스톤의 ‘코리아 전쟁의 숨겨진 역사(The Hidden Story of Korean War), ‘중국인이 본 한국전쟁’(윤영무 번역), 한길사가 펴낸 ‘1950년대의 인식’, 풀빛 출판사가 펴낸 ‘한국민중사 II’, 자주민보가 펴낸 이도영 박사의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든 쏴라’, 그리고 인터네트 상에 올라 온 코리아 전쟁의 자료 등의 내용들은 남한과 미국 정부 당국자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미군의 <해방군> 주장이나 전쟁의 원인을 북의 <남침설>로 보는 입장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우리는 일방적인 견해만을 펴고 있는 관변 입장보다는 양심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을 보여주는 학자들과 종군기자의 견해에 입장을 함께 한다는 사실을 여기에 밝히면서 계속해서 코리아 전쟁의 진실을 벗겨 본다.

지난 한세기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 민족은 미국과 일본에 의해 숱한 고통을 받아 왔다. 일제40년도 미국과 일본의 비밀협약(1905년 가쯔라-태프트 밀약)에 의해 수난을 받게 되었고, 8.15해방 이후에도 미군정의 간섭과 탄압정책으로 우리 민족은 말할 수 없는 수난과 대학살의 치 떨리는 참혹한 시대를 겪어야 했다. 그것도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미군정 치하인 지난 1947년 8월부터 1950년 9월까지 통영•거제 일대에서 군경에 의해 민간인 수백 명이 숨진 사건이 발생하였다 빙산의 일각이지만 이것부터 돌이켜 본다.

하청면과 장승포읍 주민들도 1949년 "빨치산"에 협조한 혐의로 국군 제16연대 등에 의해 총살을 당했다. 그 행위는 하수인 역을 맡은 남녘 군인이 하였지만 그 주범은 배후의 미군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좌익으로 몰린 진영의 여교사는 얼굴이 예쁜 젊은 처녀들과 함께 능욕을 당하고 암매장되었는데 그녀는 다리까지 잘리었다. 또 충무•통영군 남녀 800여명의 학살은 헌병무관들이 부녀자 약탈의 은폐 책으로 빨갱이로 몰아 수장한 사건이었는데 이 당시 그들은 창고에 끌려가 남녀 모두 옷을 벗긴 채 구타를 당하였다(김삼웅, 1996:169). 남원군 대강면 강석리에서 11사단 205부대는 마을 주민 60여명을 살해하고 부녀자 7명을 끌어내어 대검으로 목과 유방, 심지어 음부까지 난자하여 모두 죽였다. 이번에는 19명을 일보도로 참수하였는데 김점동이 일본도에 의해 목을 두 번이나 내려쳐졌으나 죽지 않자 "더러운 놈 모가지가 왜 이렇게 질겨"하면서 장교는 세 번째 내려쳤다(서중석, 1999:620). 창원군 북면에서도 해군첩보대대장으로 황광수 수병 등이 이곳 주민과 피난민 60명을 빨갱이로 몰아 살해하면서 어린애가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일본도로 내리쳐 죽이고 부녀자들에게는 젖가슴을 칼로 자르고 팔다리를 절단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김삼웅, 1996:107-108). 이미 앞에서 보았지만 아산군 신창지서 주임이던 유해진은 마을 부녀자를 농간하고 부하까지 농간하게 하고 좌익 측 부녀자를 첩으로 삼았다.

이제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반 인륜과 패륜아 행위를 살펴보겠다. 이에는 6.25전후 가장 악명을 떨치던 일본군 출신이고 이승만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던 김종완이 대표적이다. 그는 여수 등에서 일본도로 사람을 참수하는 것을 즐겼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는 1950년 5월 6일 6.25전에 백골부대를 이끌고 거제도 일운면 구조리 앞 바다에 주민 1천명을 1시간 동안 찬물에 세워놓고 시아버지와 며느리, 장모와 사위 등 서로 어려운 사이를 골라 서로 마주 뺨을 때리도록 하고 만약 세게 때리지 않으면 총개머리판과 몽둥이로 난타하는 짐승 같은 짓을 저질렀다(서중석, 1999:583). 이 같은 "뺨 때리기"와 "말 태우기"는 흔히들 자행되던 보편적 현상이었다. 제주에서 토벌대는 주민들을 모아 놓고 시아버지를 엎드리게 하고 며느리를 태워 빙빙 돌게 하고,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 놓고 서로 뺨을 때리게 하였다. 총살에 앞서 가족들을 앞에 세워놓고 총 맞아 쓰러질 때 가족들로 하여금 만세를 부르게 하기도 하였다(김종민, 1998:33).

통영에서는 죄 없는 양민 수십 명을 창고에 가두어 놓고 강제로 정교를 맺게 하고는 수장시켜 죽였고(김삼웅, 1996:108), 필자와의 면담에서 어느 육군상사는 시숙과 제수를 옷을 벗겨 강제로 정교를 맺게 하고는 덮석에 말아 굴리는 반인륜적인 만행을 저질렀다는 전언을 해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가공스런 야수적 행위는 이미 제주에서부터 알려졌다. 처녀와 총각을 불러내어 서로 정교를 강요하였고(황상익, 2000:153 재인용), 처모와 사위를 대중이 모인 가운데 정조를 맺게 하고는 쏘아 죽이기도 하였다(김종민, 1998:33). 완도 경찰은 완도읍 두암리에 살던 좌익아들을 둔 할머니의 이야기다. 경찰이 그 아들을 죽이고는 아들의 간을 꺼내 할머니 입에 물리고는 마을을 돌아다니게 하였던 일이다.

그 할머니는 반 미친 상태에서 경찰이 시키는 대로 하였고 13년 형을 받아 7-8년 복역 후 석방되었으나 몇 달 후 죽었다고 한다(김삼웅, 1996:119).

위와 같은 행위는 미국을 등에 엎고 자기 형제자매를 살해하고 탄압했던 반 민중, 반민족 세력의 횡포였다. 요즘으로 비유하면 자기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우리 민족에게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미국에 기생해서 기득권을 누리는 이명박 정권의 잔인 무도한 행위와 거의 유사한 것으로 비유되고 있다.

그런데 그 주범은 표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직접 만행을 저지른 친일세력들은 하수인에 불과하고 그 주범은 무기를 공급하고 지시를 내린 미군이다. 더구나 미군은 그 당시 사람을 많이 죽인 친일매국노를 높이 평가해 주고 진급을 시켜 고무하였다.

이러한 반인륜적 행위가 단지 6.25 때문에 발생한 것만은 아니다. 이미 일본군국주의의 악랄한 인권말살주의에 물들어 있던 친일파, 곧 민족반역자들이 반공제일주의를 걸었던 미군정과 결합하여 그들의 생사를 걸고 남한사회의 권력을 장악하면서부터 구조적으로 잉태되었다. 실제로 미군정 당시에도 마크 게인의 일본 일기장(Mark Gain’s Japan Diar)에 서술되어 있듯이 경찰이 유사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물론 6.25이전에도 4.3항쟁과 여수항쟁에서 보듯이 토벌대의 이러한 만행은 다반사였다. 단지 6.25이후 보다 대규모로 빈번히 일어났을 따름이다.

신불산 공비는 여수, 순천반란사건 때의 공비들이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가 그 일부가 울산으로 이동해오면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공비를 토벌하기 위한 군, 경과 민간 의용대의 작전은 1949년 말∼1954년 초까지 4년 넘게 계속됐다.

감옥은 좌익분자로 넘치는데도 반정부 기운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반정부 집단의 배후에는 북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좌익세력을 일거에 제거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은 한국전쟁의 발발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은 공비들을 지원하는 북한과 그리고 북한을 지원 하는 중공까지 점령 할 수 있는 기회로 되는 것으로 미국과 친일세력, 그리고 이에 결탁한 반민족 세력들은 모두가 그렇게 소망했다.

즉, 전쟁만이 모든 것을 해소 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었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미국은 전쟁을 하기 위한 시나리오를 착착 준비했다.

보도연맹 사건과 집단학살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은 코리아 전쟁 전 1949년 6월에 좌익계 인물들을 관리하려는 목적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의 단체이다. 흔히 보도연맹으로 지칭한다. 한국정부가 제주 4•3 사건,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등 각종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감시할 목적이었다.

1950년 초에 집계된 회원 수는 30만 명이 넘는다. 보도연맹에는 전향자들이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되어 있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들은 전국에서 조직적으로 학살되었다 이를 보도연맹 사건이라 한다. 보도연맹은 북한이나 추종세력들이 조직을 이용해 반정부 활동을 취할 수 있는 항시적 사회 불안 요인으로 취급 받았다. .

이런 우려로 인하여 코리아 전쟁 발발과 때를 맞춰 보도연맹원의 대량학살이 있었다. 코리아 전쟁은 특히 미국의 군산복합체 집단들의 요구에 의하여 대륙 탈환을 목표 삼아 일으킨 전쟁으로 분석된다. 그러므로 미국은 대륙 진군의 전진 기지가 되는 한반도를 완전히 평정 하고 평온 상태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전쟁이 개시되자 수감자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시행되었다. 국민보도연맹원 등 요시찰인에 대한 경찰의 연행과 구금조치는 1950년 6월25일 전쟁 당일 시작되었고, 인민군에게 점령된 서울에서는 보도연맹원의 희생이 없었으며 인민군에 점령되지 않은 경남과 경북 일부 지역의 희생자가 가장 많았다. 살해 형태로는 경찰이 트럭을 이용하여 창고 등에 갇혀 있던 보도연맹원을 외딴 곳으로 데려가 구덩이를 파게 하고 총살한 사례가 많았다. 심지어는 전투가 전혀 있지 않은 제주도에서도 25일 당일에 검거되어 218명이 해병대에 의해 집단 총살당했다.

미군 군사고문관 롤린스 에머리히(Rollins S. Emmerich-1986년 사망)는 부산 교도소에 있는 수감자 3,500명을 모두 사살한 것으로 보고하였다.

또 미 공군 정보장교였던 도널드 니콜스(Donald Nichols-1981년 사망)도 50년 7월 1일 경기도 수원에서 1,800명이 집단 처형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사진을 찍었다. 당시 영국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Alan Winnington)도 그 해 7월 1일부터 사흘 동안 대전지역에서도 집단처형이 이뤄졌으며 지프에 탄 미군 장교들이 "살육을 감독했다"고 밝혔다.

AP통신은 군경에 의한 민간인 집단 처형은 1950년 7월부터 10월까지 그 해 여름과 가을에 집중적으로 이뤄져 최소 10만 여명이 아무런 재판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총살을 당했다고 전했다.

한국 전쟁 때 처형된 보도연맹원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은 없지만, 최소 20만 명이 처형되었으리라는 추산이 나오고 있다. 당시 미국을 휩쓴 매카시즘(극단적인 반공산주의)과 무관한 일이 아니다.

1946년에 상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된 조지프 매카시(1908-1957) 의원은 1949년부터 상원에서 상원 행정운영위 소속 상설 반미조사위원회를 이끌며 공산주의자 적발 추방의 선풍을 일으켰다. 미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매카시는 이에 그치지 않고 1950년 2월 9일 웨스트버지니아 주 휠링에서 열린 공화당의 정치집회에서 국무성 안에는 205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연설을 하게 된다. 그의 이 같은 폭탄적인 발언으로 적색분자 적발 소동이 일어나 미국전역이 반공산주의 극단적인 광풍에 휩쓸렸다.

이러한 매카시즘 광풍은 중국이 공산화되어 미국이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상실한 후 공산세력의 급격한 팽창에 위협을 느낀 미국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로 인해 위세를 떨쳤다. 당시의 국무장관 J.F.덜레스를 비롯하여 대통령 H.S.트루먼(1945~53년 재임)까지 공격 당하여 매카시즘의 공포에 미 국민들이 떨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일을 하다 말고 조사위원회에 소환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었고. 미국에서 추방 당한 사람도 적지 않았으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거나 훼손된 명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미국인들은 자신이 공산주의자로 몰릴까 봐 반공에 앞장서야 했다. 설령 이 시기에는 코리아 전쟁과 대량학살 시나리오에 대하여 반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누구도 감히 반론을 제기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50년 6월경에는 민간인들을 대량학살 함으로서, 그리고 반정부 민간인들을 대량학살 함으로서 반정부 무장공비들의 활동은 수그러드는 추세였다.

1949년 8월부터 시작된 학살만행에 항거한 김달삼 부대의 준동은 지역 곳곳에서 무장전투를 가져와 무장공비 측과 토벌대 상방간에 많은 피해를 가져 왔으며, 이렇게 지역에서 많은 비극을 가져다 준 제3병단의 대장인 김달삼이 괴뢰군의 강력한 토벌에 밀려 점차 북으로 퇴각하다가 1950년 3월에 강원도 정선군 군북면 전투에서 사살되자 지역에서의 무장공비의 활동은 거의 약화되게 되었다. 그러나 김달삼 부대의 중화기 중대를 이끌고 있던 강구면 금진동 출신의 박종화(朴鍾和)가 잔여부대를 모아 강철부대라 명명하고 동대산과 대둔산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벌여 지역에서 또 하나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도 1950년 5월에 생포되어 이후에 이들 무장공비들은 뿔뿔이 흩어져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는 국내에서 무장공비의 준동은 거의 미미한 수준으로 되었다. 이는 곧 이어 일어날 민족 대재앙인 6.25 코리아 전쟁의 전조를 알려 주는 고요였다.

미 군산복합체의 전쟁각본


미국은 반도에서 전쟁을 수행하는데 장해가 될 수 있는 요소들을 제거하여 마침내 준비한 대륙회복의 야망을 향해 줄달음질 할 고속도로를 놓을 수 있었다. 메카시 광풍을 등에 업은 미국은 중국대륙을 향해 준비된 질주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매카시 광풍이 일어나도록 미 국민들을 선동한 집단은 전쟁에 목말라하는 거대 집단 ‘군산복합체’이다.

전쟁으로 번영을 누리는 집단은 돈이 쏟아져 들어왔던 전쟁이 없어지면 중독자가 마약이 끊긴 것처럼 견디지 못한다. 하지만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으로서 아무도 전쟁에 응해오지 않을 것이므로 멕시코 전쟁 때 경험한 것처럼 상대에게 전쟁을 하자고 자꾸 자극을 주어야 했다. 그리고 정작 본격적인 전쟁에 들어갔을 때를 대비해 전쟁 시나리오를 만들어 둬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강대국인 자신과 전쟁하자면 두려워 안 할 것이므로 미군도 철수. 방위선도 후퇴라는 미끼를 줘가면서 자극의 강도를 높여 나가야 했다.

그러면 전쟁의 시작은 공식적으로 남북 간의 전쟁이 된다. 그리고 제3자인 미국은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한 정의의 수호자로서 세계인의 지지와 찬성 속에 등장하여 참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각본이었다.

중국 대륙에서는 1948년 가을 린뱌오가 지휘하는 동북 인민 해방군이 만주에서 국민당 군을 격파하는 요심 전투를 시작으로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이 함락되었고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즉, 미국이 지원하는 중국 국민당이 공산당과의 내전(1946~1949)에서 공산군에게 패퇴한 시기이므로 매카시 광풍이 일었던(1949~1954) 시기인데 미 정부는 그 당시의 미 국민의 요구에 역행하는 애치슨 선언을 하였다(1950.1.12). 이런 행위를 한 자들이 이후에 매카시의 색깔론을 면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적을 속이기 위한 기만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애치슨 선언 후 공화당 의원을 포함하여 많은 비난이 일었다. 그러나 애치슨을 향해서 쏟아지는 매카시즘의 화살에도 불구하고 애치슨은 그 당시는 물론 그 후까지도 무사할 수 있었다.

이보다 앞서 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끝나면서 삼상결정에 참여한 미 국무장관 번즈도 공산주의와 내통한 불순분자로 내몰렸다. 애치슨 선언은 한국과 대만을 방위선에서 제외시킴으로써 북한과 중국을 동시에 기만하기 위한 술책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이 뒤에 밝혀졌다.

1947년 터키와 그리스 방위를 선언함으로써 냉전의 깃발을 올린 트루먼 정권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은 극동의 그리스였다. 극동의 그리스인 한반도에 관심을 쏟았던 건 그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었다.

미국의 관심은 지정학적 가치일 뿐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한반도에 관심을 쏟았던 트루먼 정권에서 애치슨 선언이 나왔던 것은 전략적 기만전술에서였다.

1949년 6월 29일에 주한미군 철수를 완료 했다는 발표 역시 북한이 남침을 단행하여 전쟁에 참전할 명분을 획득하기 위해 사전 시나리오에 따른 발표였다. 북한이 남침하더라도 미군이 개입해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남북이 사이에 발생한 사건으로 세계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 소련군의 완전 철수와는 달리 미군은 일부를 잔류시켜 한국군을 휘하에 거느리고 활동하고 있었다. 한국군은 사단마다 미 군사 고문관들이 배치되어 한국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국군 1사단의 미군 수석 고문관은 로이드 로크웰 중령이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전후에 한국에 있었고 한국군을 지휘 감독하였다.

연대에는 대위급을 고문관으로 배치하였다. 예를 들어 개성 12연대의 미 작전 고문관은 다리코 대위였다. 다리코 대위 역시 1950년 6월 25일 전후에 한국에 있었고 한국군을 지휘 감독하였다

미국이 한국을 강점하기 위해 양민 수만 명을 죽이고 세운 하수인 이승만 정부를 결사 반대하는 한국국민의 손에 맡기고 미군이 철수했다는 것은 사리에 어긋나는 소리이고 속셈을 감추기 위해 늑대가 내는 양 울음소리에 비유된다.

애치슨 선언은 한국과 대만을 방위선에서 제외시킴으로써 북한과 중국을 동시에 기만하기 위한 술책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이 뒤에 밝혀졌다.

1947년 터키와 그리스 방위를 선언함으로써 냉전의 깃발을 올린 트루먼 정권이었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은 극동의 그리스였다. 극동의 그리스인 한반도에 관심을 쏟았던 건 그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었다. 미국의 관심은 지정학적 가치일 뿐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1947년 당시 조선에 급파되였던 웨드마이어가 미국대통령 트루먼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미군이 남조선에서 철수하면 남조선이 ≪적화≫되어 공산주의의 파급을 도와 주는 것으로 되기 때문에 미국이 조선에서 도모하려는 문제들을 미영중소 4개국회담에서 풀며 거기에서 성공 못하면 유엔에서, 유엔에서도 해결 못하면 미국이 단독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조국반도는 지정학적 잇점을 지니고 있어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미 정부의 사전 시나리오에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가정한 계획들이 있었다. 그렇게 세운 계획들 중 하나로 요시찰인에 대한 검거 학살 계획이 있었다. 중국대륙을 목표로 한 군사작전을 수행하는데 조금이라도 차질을 빚지 않도록 하기 위해 철저히 장해물을 제거 하였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경찰의 연행과 구금조치는 1950년 6월25일 전쟁 당일 시작되었다고 진실화해위는 밝혔다. 그리고 유엔에서 미국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기 위해 6.25 전쟁발발 전에 미리 계획해둔 규탄성명을 발표하고 유엔군을 조직하는 작업을 일사천리 준비대로 신속 완벽하게 진행하였다

“유엔담당 미 국무차관보 존 D. 히카슨 증언에 의하면 미국은 북침을 감추고 북한이 침략한 것으로 날조시키기 위한 ‘유엔결의초안’까지 전쟁 전에 제 마음대로 조작해 완비하고 있었다.

1951년 6월 5일 미 상원세출위원회의 국무성 예산에 관한 실무적인 청문회에서 죤 디 히카슨은 코리아 전쟁 발발과 관련하여 유엔에 제출할 <결의안>이 전쟁 전에 작성되었다 고 증언하였다.

이는 ‘NSC-68’에 따라 수립된 계획으로서 UN군의 코리아 전쟁 참전이 전쟁 전 미국의 ‘NSC-68’에 따라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1950년 4월2일 미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비준된 ‘NSC-68’에는 한국전쟁 발발 후 유엔군을 투입하기 위한 계획이 단계 별로 명시되어 있다. ≪1964년 4월 13일자 뉴욕타임스에서≫

소련이 유엔에 항의하여 불참한 시기를 이용하여 미국은 전쟁 발발 날짜를 잡았다고 한다. 소련은 중국공산당의 국가수립 선포 이후에도 이유 없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는 유엔 결정에 항의하기 위해 1950년 1월부터 유엔을 보이콧 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안보리에서 유엔군의 한국전 파병이 쉽게 결정 되었다.

소련이 거부권 행사를 포기하고 안보리에서 기권하였기 때문에 유엔군이 파병될 수 있었다는 사람이 있다. 소련이 유엔군 파병에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미국은 유엔총회에서 유엔군참전의 결정을 이끌어 냈을 것이다.

48년 2월26일 한국에서의 선거의 가부를 묻는 표결에서도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보이콧으로 부결되자 미국은 유엔 총회에 상정하여 우리민족에게는 발언권을 주지 않고 민족의 뜻과는 배치되는 남한만의 ((이미 천명한대로 소련과 북한이 유엔의 결정에 따르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표결이 실시된 것이므로 이 결의안이 남한에만 미친다는 것을 회원국은 이미 알고 통과시킨 것이다. )) 유엔감시하의 단독선거를 결정하였다.

우리민족은 스스로 선거를 치를 능력이 부족하다는 전제하에 내려진 이 같은 결정을 우리민중들은 반대하여 항거하였고 많은 사람이 미군의 지령을 받은 친일반역자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자주적으로 감시가 없는 자유스런 축제분위기 속에서 해방된 조국의 첫 선거를 하고 싶었고 친일매국노가 날뛰는 분단이 확실한 반쪽 짜리 선거를 원치 않았다.

코리아 전쟁 발발 직후 유엔한국위원단(UNCOK)은 북한 남침에 의해 일어난 전쟁이라면서 미국이 제시한 자료를 그대로 유엔에 보고함으로써 유엔군 참전 결정을 이끌어냈다.

1949년 대륙에서 중국공산당의 국가수립 선포 이후에도 이유 없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지 않고 일개 섬에 불과한 국민당의 타이완 정부가 22년 동안이나 유엔에서 중국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을 대신하여 유엔의 회원국은 물론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의 지휘를 버젓이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유엔을 쥐락펴락 제 마음대로 주무르고 전횡을 일삼는 미국 때문이었다.

미국잡지 《라이프》는 50년 8월호에서《전쟁개시에 이르러 이번 전쟁만큼 완전히 준비되었던 전쟁은 우리들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없었던 일이었다.》라고 썼다.

당시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참모로 근무한 에이다는 《코리아 전쟁은 일본에 있는 미군총사령부의 직접 명령에 의하여 남한 군이 개시하였다》라고 폭로하였다.

「유에스뉴스 앤드 리포드」1945년 12월 10일호에서 미10군단장 ‘오르몬드’ 는 『중국을 공격하는데 있어서 코리아처럼 편리한 보급로는 없다. 육, 해, 공군의 동원이 코리아보다 더 좋은 지역은 없다. 한국은 제1급의 전략적 지역이다.』라고 하였다.

미 경제원호처 한국과장이었던 존슨은 1950년 5월 미 하원 세출위원회에서 『한국군은 미국무기로 무장하였으며 서울의 미 군사사절단의 지도하에 미국 장교들에 의하여 훈련 받은 10만의 한국군이 모든 준비를 끝마쳤으며 언제든지 한국에서 전쟁을 개시할 수 있다』고 보고 하였다.

1949년 11월 미 상원 군사위원회 위원 ‘노랜드’가 이승만이 차린 초대연에서 이렇게 발언 하였다.

『나는 한국에 와서 반공태세가 정립된 것에 대해 만족하게 생각한다. 특히 국군이 잘 정비되고 훈련되어 마음이 든든하다. 이 군대를 가지고 북진 통일하기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내가 미국에 돌아가면 한국에 대한 원조를 더욱 증가하여 북진준비에 만전을 가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전쟁인 만큼 만일을 생각해서 새로 50만~60만 명의 청장년들을 준 군사적 조직에 망라하고 더 훈련시키는 것이 좋겠다.』

1950년 1월 미 극동군사령부 외교국장 시볼드가 이승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준비가 다 되었으면 북진은 하루라도 속히 하는 것이 유리한데 와서 보니 국군의 준비를 좀 더 빨리 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더 준비하여 개전하면 국군의 승리는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에 대처하여 미군이 원조 또는 직접 참전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1949년 10월에 있은 국군사단장회의에서 주한 미 군사고문 단장인 로버트는『38선 이북지역에 대한 공격은 나의 명령에 의하여 진행되었으며 금후에도 진행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정세를 악화시켜 전쟁 발발을 도모하기 위한 공격이 진행되고 있다는 발언이다, 6.25전쟁 당시 내무부장관 김효석은 채병덕이 다음과 같이 얘기 했다고 하였다.

『당시 국군참모총장 채병덕의 말에 의하면 1949년 7월부터 1950년 5월까지의 기간에 38선 일대에서 1천여 회 가까이 북한을 공격 하였으며 수백 명에 달하는 이북주민들을 살해하고 수천 호 민가를 소각했다. 이것은 「국군의 강대성을 시위하며 이북주민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주라」는 로버트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코리아 전쟁 당시 해군참모총장 이용운은 1975년 6월 일본 도쿄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949년 8월 10일에 있은 몽금포 기습작전을 계기로 6.25전쟁으로 확대되었으며 전쟁은 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가 1951년 5월 미 상원 외교군사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 하였다.

『북한군은 38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배치돼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방어를 위해서 배치돼 있기 때문이다. 공격을 위한 배치는 결코 아니었다. 반면에 한국군은 자기의 모든 물자와 장비를 38선에 집결시켰다.』

50년 6월 19일 미국대사와 주한미군과 이승만 정권 수뇌들과 가졌던 회담에서 덜레스는 다음과 같이 얘기하였다.

『내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것은 북진준비상황을 직접 보고 미비한 점이 없으면 곧 북진을 단행하자는 트루먼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왔다. 와서 보니 준비는 이만하면 족하다. 전기는 왔다. 우선 남한에서 먼저 개전하라. 개전후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미국을 믿으라. 만일 그 기간에 전국이 불리하게 되면 방어태세로 넘어가 2주일간만 유지하라. 그러면 미국의 참전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1949년 6월 5일부 뉴욕 헤럴드 지에 실린 서울특파원의 보도에 의하면 한국주둔 미 군사사절단 단장 로버트 장군은 <5백 명 이상의 미국 군사교관들을 가지고 북한을 공격하기 위하여 남한군을 열심히 훈련시키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표현 하였다.

≪1949년 10월 육군사령부에서 열린 사단장회의에서 로버트는 확실히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많은 공격은 나의 명령에 의하여 수행되었으며 또한 앞으로도 더 많은 공격이 수행될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 부대는 제 마음대로 공격하고 아무러한 성과도 없이 막대한 양의 탄약을 써버렸으며 게다가 치명적인 손해를 입었다. 앞으로는 38도선 이북지역에 대한 국방군의 진공은 오직 미 군사절단의 명령에 의하여서만 수행되어야 한다. 라고 말하였다.≫ 일본도서 ≪미국은 패하였다≫, 14쪽 에서


38도선 시찰을 끝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덜레스는 6월 18일 이승만에게 <북조선에게 먼저 침입했다는 선전과 동시에 북조선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라.>고 언명하였다. 일본도서 ≪미국은 패하였다. 16쪽≫


6월 20일 덜레스는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에서 남한에 부과된 역할은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르기 위한 일을 조작해 내는데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위대한 사건 가운데서 당신의 나라가 맡아야 할 결정적인 역할에 대하여 나는 지극히 중대한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고 하였다. 미국도서 ≪한국전쟁은 누가 일으켰는가≫ 일문판, 41

1950년 6월 26일부 아사히신문에 다음과 같은 보도가 게재되었다. 한국군은 23일 밤10시 돌연히 북조선 군 진지에 맹렬한 포 사격을 시작하여 24일 오전 4시까지 105미리 포와 81미리 포 204발을 발사하였다. 계속하여 24일 오후 12시 25분부터 6시 30분까지 300발을 쏘았으며 세 번째는 25일 아침 6시부터 10시까지 사이에 200발을 북한군 진지에 쏘았다.

한국전쟁은 사실상 남으로부터의 도발로써 시작 되었다.
- ≪교도통신≫ 1975년 8월 25일


북한군이 남한군으로부터 대대적인 불의의 공격을 받고 38도선 전선에서 2-3키로 미터 후퇴하였다가 반격으로 넘어갔다. 미국도서 ≪아메리카 현대사≫ 일문판, 160

남한이 옹진반도를 먼저 공격하고 북한이 반격할 때 일부러 계속 밀려 국제여론을 환기시킨 다음 만주지역까지 점령하려는 것이 미국의 의도이다. ≪중앙일보≫1989년6월23일


북한은 무려 천 회 공격에도 남침을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 발발을 위해서는 남한 군이 중화기까지 동원해서 대대적인 공격을 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었다.

대대적인 공격을 하도록 이승만과 일당들에게 단숨에 북한으로 밀고 올라가 통일 하자고 하였다. 이 말이 시나리오에 따른 전쟁 발발을 시키는 말인 줄도 모르고 이승만은 말 그대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게 될 줄로 알았다. 미국이 이승만을 어떻게 철저히 속였는지는 이승만이 가지고 있던 미국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전쟁이 개시 된지 3일만에 인민군대에 의하여 서울이 함락되면서 리승만의 집무실을 비롯한 남조선《정부》와 군부의 기밀실에서 극비자료들이 인민군대에 의하여 압수되게 되었다.

1950년6월20일 면밀한 작전계획에 따라 덜레스가 이남의 외무부장관에게 이북 침공을 지시한 내용의 문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리승만《정부》는 극비문건을 하나도 처리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인민군대한테 압수당하였다. 그것은 당시 리승만이 미군을 믿고 허장성세하여 북침전쟁을 개시하면 파죽지세로 북진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 인민군대의 반공격에 의하여 도망칠 수도 있다는 것을 전혀 예견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민군에게 몽땅 압수당한 이승만의 극비전쟁문서


이승만이 얼마나 급했으면 기밀문서를 책상 위에 그냥 놓아둔 채로 방안열쇠도 잠그지 못하고 남행열차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민군대는 6.25 한국전쟁도발과 관련되는 이승만《정부》와 군부의 극비문건을 몽땅 압수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전쟁역사에 드문 일이었다.

인민군대가 서울에서 압수한 이승만 정부와 군부의 극비문건에는 6.25전쟁도발과 관련된 자료들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북한정부는 미국의 사주 하에 이승만이 6.25 한국전쟁을 도발하였다는 것을 자료적으로 완전무결하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에서 아무리 비방중상 하여도 도발자는 남한 군이다. 어리석은 이승만은 속아서 미군이 처 올라갈 것으로 굳게 믿었다.

하지만 미국의 시나리오는 그게 아니었다. 북의 38선을 넘은 남침반격이 있자 계획적으로 후퇴하였다. 그래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였다.

한국은 북한의 움직임을 전혀 예상 못 했던 것은 아니다. 50년에 들어서서 비상상황은 여러 번 발령됐다. 특히 6월 들어서는 초순부터 비상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북이 남침을 시작한 25일의 전날인 24일에 갑자기 비상이 풀렸다. 병사들에게 외출과 휴가를 허용한 것이다. 당시 부대에 남아 있던 장병의 수는 군의 복무규정과 육본의 요구 범위에도 미치지 못했다. 남아 있던 장병마저 긴장감이 풀어져 있는 상태였다는 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내린 평가다.

50년 5월 육본의 작전국장 강문봉 대령이 아군과 적의 병력•장비를 비교한 뒤 상대적으로 부족한 전력을 보완하기 위해 ‘긴급 건의서’를 제출했다. 이렇게 미국과 남한 군은 북한군의 사정은 손바닥 보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6월 초 이뤄진 군 고위 지휘관에 대한 대규모 인사 조치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다고 지휘관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였다.

새로 전선 사단에 부임한 지 며칠 안 되는 지휘관들이 전쟁이 터진 뒤 그 사단을 제대로 지휘하기를 바라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기’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미국은 전쟁 발발 한 후에 한국군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하였었다. 유엔군을 끌어들이기 위한 사전 시나리오가 아니고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자신들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인민군의 남하를 성공적으로 저지하여 시나리오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므로 이렇게 지휘관에 대한 대규모 인사 조치를 단행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대한민국이 방어에 얼마나 준비가 없이 북한의 남침을 맞았는지 잘 보여준다. 38선을 넘은 적이 미군의 본격적인 개입이 있기 전까지 그야말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내려온 이유가 다 여기에 있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이와 같은 계획적인 사전조치를 취함으로써 제대로 대항을 못하게 하고 후퇴하도록 명령까지 내렸다, 23일 밤10시부터 중화기를 동원하여 무수히 많은 포탄 세례를 퍼붓는 공격에만 집중하였고 정작 중요한 방어에는 얼마나 준비를 안 했는가를 알 수 있다. 24일에는 38선을 넘어 비행기까지 동원하여 입체적으로 공격하였었다.

또한 다음의 사실들을 통하여 국군이 장비가 없어 총 한발 쏘지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은 이승만 정권을 북침전쟁의 길로 내몰기 위해 1949년 한 해에만도 10만5000정 이상의 각종 최신보병총과 2000정 이상의 중기관총과 경기관총 그리고 5000만발 이상의 탄약 수많은 각종 포들과 그에 따르는 막대한 양의 포탄들,5000대의 군용차들과 79척의 함정과 20대의 비행기를 제공하였다.

 남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를 두고 당시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트는 남한의 한개 연대는 북한의 한개 여단에 대항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맥아더의 수수께끼> 일문,1951년판 258쪽


무기를 공급한 것은 이승만에게 미국이 지원한다는 것을 보여줘서 전쟁의 불 집을 안심하고 터뜨리라고 공급한 것이다. 한국에 파견된 미 군사고문단 단장 로버트는 1950년 1월에 “북벌계획은 결정된 문제이다. 이것을 실현하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북진통일을 간청하는 이승만에게 말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침공을 개시한다 할지라도 정당한 이유를 가지기 위한 여러 조건들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렇게 미국은 코리아 전쟁을 사전 준비하면서 내외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작업을 해 온 것으로 밝혀져 왔다. (계속…)



[기획]코리아 전쟁: 그 진실을 벗긴다② ---여기를 짤각하여 열람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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