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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코리아 전쟁: 그 진실을 벗긴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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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6-21 16:26 조회4,2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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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전쟁은 서방언론들이 보도하는 내용과 그 사실이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같은 현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똑 같은 현상으로 나타났다. 제국주의자들이 약소국들을 침략하고서도 그 이유를 엉뚱한 것으로
둘러 대는 것이 강대국들의 수법이었다. 미국의 아프카니스탄 침략은 물론 이라크 침략행위에서도 그 이유를
다른 것으로 둘러대며 합리화해 왔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코리아 전쟁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은 이미
1950년이 아니라 19세기 후반기부터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아시아를 침략하여 자기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일환으로
온갖 불법적 행위를 자행하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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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코리아 전쟁: 그 진실을 벗긴다 ②



*글:민족통신 공동정리


지구촌 전쟁은 서방언론들이 보도하는 내용과 그 사실이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같은 현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똑 같은 현상으로 나타났다. 제국주의자들이 약소국들을 침략하고서도 그 이유를 엉뚱한 것으로 둘러 대는 것이 강대국들의 수법이었다. 미국의 아프카니스탄 침략은 물론 이라크 침략행위에서도 그 이유를 다른 것으로 둘러대며 합리화해 왔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IMAGE##> 코리아 전쟁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은 이미 1950년이 아니라 19세기 후반기부터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아시아를 침략하여 자기 세력을 확대하기 위한 일환으로 온갖 불법적 행위를 자행하여 왔다. 1866년 셔먼호 사건도 그 중 한 경우에 해당하며 1905년 가쯔라-태프트 밀약도 마찬가지였다. 공통적인 것은 경제적 이권과 군사적 팽창주의에 비롯되었던 것으로 진단된다. 다시 말하면 제국주의자들이 자기 잇속을 챙기려고 간섭하고, 침략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그러면서 그 이유들을 엉뚱한 데로 돌리곤 하였다. ‘코리아 전쟁’도 바로 그러한 제국주의자들의 침략행위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미 제국주의자들은 ‘코리아 전쟁’의 이유를 ‘북조선의 남침’이라고 주장해 오면서 남한 국민들에게는 북조선이 적이라고 선전하는 한편 미국과 이를 지원해 준 16개국의 나라들은 마치도 천사처럼 미화시켜 왔지만 그것은 미국이 이라크를 대량살상 무기를 소지했다는 구실로 침략한 것과 아주 유사한 양상을 띄었다.

그래서 코리아 전쟁을 입체적으로 연구하여 온 학자들, 양심적 종군기자나 지식인들은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라고 비판하여 왔다. 이것이 이라크 전쟁의 진실이며 코리아 전쟁의 진실이기도 하다.

전쟁은 또 발생한 시기를 전후하여 가장 깊숙하게 관계한 강대국의 정치, 경제, 군사적 상황이 어떠했는가를 살펴 보아야 그 진실을 제대로 캐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당시 사정들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미국의 경제공황(대공황)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원인은 미국의 경제공황(대공황)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된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와는 달리 자본주의 자유경쟁 체제에서는 주기적으로 호경기, 불경기, 그리고 대공황이 주기적으로 나타난다. 이른바 자유민주 체제에서의 대공황이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를 뜻한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엄청나게 경제 성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생산은 많아지지만 소비는 크게 늘어나지 못한다. 만들어내는 상품은 많고 사는 사람들은 많이 없으니 남는 물건이 많아 창고에 쌓이게 된다.

재고량이 많아지자 기업. 공장 같은 곳은 망하게 된다. 기업이 망하고 문을 닫으면 직장을 잃은 실업자가 증가하게 된다. 실업자가 증가하면 개인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또 소비가 감소될 수밖에 없다. 기업부도, 실업자증가, 소비감소, 기업부도...가 반복된다.

이렇게 살기가 어렵던 중 미국의 주식가격이 폭락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미국은 경제 대공황에 이르게 되고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대공황은 세계로 확산되어간다.

각 나라들은 경제대공황을 이겨내기 위해서 정책을 펼치게 된다. 미국에서는 뉴딜정책이라고 하는 정책을 펼친다. 이. 뉴딜정책이란, 생산 활동은 억제하고 실업자 규제를 위한 대규모 공공사업이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경제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식민지를 수탈하게 된다. 식민지에 물건을 파는 것이다. 그러나 선진국이 아닌 가난한 나라에서는 식민지를 만들 수도 없다. 방법이 없으니 사회가 불안해져 간다. 국민들이 불안에 떨고.. 이럴 때 사람들은 누군가 나타나서 자신들을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독일에 구원자가 나타났다. 그가 바로 히틀러이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후 잃어버린 식민지를 되찾고자 전쟁을 벌인다. 이것이 2차 세계대전이다. 한마디로 1,2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이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가 국내에서의 자유경쟁을 끝내고 세계로 포식자의 손을 뻗치는 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최종단계이다.

2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참혹했다. 전쟁에는 승리 했지만 영국 프랑스 등의 유럽 국가와 소련은 전쟁의 피해를 입었다. 반면 미국은 전쟁을 치렀으나 자국의 산업에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아 경제적 여력을 갖고 있었다. 이 여력을 이용하여 식민지를 독식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후에 식민지들을 독립시킨다는 명목으로 경제적 지원과 함께 미국은 자국의 식민지 (미화해서 말하면 자유세계)에 포함시켰다.

소련은 유럽의 나라들과는 달리 미국의 지원을 받지 않고 자력으로 수도에 까지 깊숙이 침략한 독일을 물리치고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미국의 신생독립국에 대한 영향력 확대에 맞서 혁명으로 산업화를 이룩한 소련도 승전국의 지위를 주장하면서 동유럽 국가들을 공산화 하였다. 미국은 식민지나 지배권역의 확대를 꾀하면서도 민주주의니 자유니 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을 사실과는 다르게 미화하는데 능숙한 나라이다.

1898년 4월 20일 미 의회는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고 동시에 전쟁에서 승리해도 쿠바를 병합하지 않겠다는 결의안도 채택했다.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에 뛰어든 것은 남미로의 영토팽창에 있었다. 미국은 전쟁에 승리한 후에 쿠바를 보호령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명백한 약속위반이었다.

그뿐 아니라 미국은 쿠바의 철도, 광산, 사탕수수 회사를 접수해 버렸고, 미국의 산업은 남미 대륙의 경제를 침식해 들어갔다. 그 중 미국의 연합 과일 회사는 남미 국가들의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까지 조정하는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멕시코의 경우, 미국은 멕시코 자산의 43%, 석유시장의 50%를 독점해버렸다. 전쟁의 이유가 경제적인 문제였다는 점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 목적은 자유세계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이라크 내에 친미 정권을 세우고 석유를 독점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의 석유를 통해서 OPEC 산유국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위한 원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스페인과의 전쟁은 불과 10주에 불과한 "빛나는 소 전쟁(splendid, little war)"이었다. 이 전쟁에서 미군 전사자는 450명에 불과했다.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였던 셈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나서 5,200명의 미군이 죽었다. 원인은 말라리아와 황열병이었다. 그리고 필리핀에서는 4년 동안 필리핀 독립군과 전쟁을 치르면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보았다.

이라크와의 전쟁도 일방적인 승리였다. 미군 전사자가 불과 130명 정도였다. 그러나 이라크 게릴라들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매주 3∼6명꼴로 미군이 전사하고 있다. 벌써 이라크 전 때보다 더 많은 미군이 전사하였다. 미군의 희생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는 미군과 함께하는 동맹국들의 희생도 발생하게 될 것이다.

"100년 동안의 미국의 폭력성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100년 동안 미국의 폭력성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횟수가 더 많아 졌다. 구 소련의 몰락으로 견제 세력이 없어진 지금, 세계는 자칭 경찰국가에 의해서 더 많은 지구인이 죽어가고 있다.

미국인들은 원주민을 학살하면서 죄의식을 없애기 위해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자신들은 세계의 모든 종족들을 개화시켜 관리할 책무가 있다는 논리를 확립 했다. 그래서 세계 정복이 그들의 의무가 됐다.

이승만은 일제 때부터 조선독립의 운명을 미국의 외교노선에 맡기자고 한 외세의존형의 인간으로서 독립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미국은 식민지 건설을 위해 일제 패망 전부터 이러한 이승만을 길러왔다. 이승만은 항일투쟁을 목표로 민족의 단결을 위해 활동한 사람이 아니다. 정반대로, 해외에 있던 항일 독립단체들을 미국의 조정에 따라 파괴하고 와해시키는 역할을 하였고 안중근 같은 항일애국투사를 테러리스트나 살인범으로 부른 사람을 미국은 독립투사로 위장하여 초대 대통령으로 앉혔다.

우리민족은 나라의 분열을 원치 않았다. 분열에 앞장선 이승만 정권을 원치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의 희망에 의해 국민이 탄생시킨 정권이 아니고 미국이 한국인의 소망을 짓밟고 반대하는 민중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친일파들을 규합해 강제로 세운 정권 즉, 정부를 세우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참여가 배제된 채 세워진 정권으로서 우리의 자주적인 정권이 아닌 오직, 미국의 대륙지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정권이며 미국의 보호가 없으면 하루아침에 국민들에 의해 무너질 사대주의 정권이었다.

이승만이 국가안보를 이유로 반공법을 만들었는데 우리의 국가가 어디에 있는가? 이승만 정권은 사실상 국가안보 보다는 국민들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보호 할 구실로 권력안보가 필요하였기에 반공법 같은 압박수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미국은 해방 후 김구 등 민족지도자 암살, 민중항쟁 탄압 등 미군정이 저지른 죄악을 코리안인들끼리 다툼으로 수습하여 자신들의 소행을 감추려고 이승만과 같은 하수인 세력을 필요로 하였다.

미군은 코리아전쟁 포로들에게 고문과 생체실험을 행하고 북으로 가서 서방의 민간조사단에게 폭로할까 두려워 불법적으로 교환에 응하지 않고 석방해 버렸다. 그리고는 허수아비 이승만에게 책임을 돌렸다. 포로들은 미군이 관리하는데 미군의 지시를 받는 이승만 세력이 석방 하였다고 둘러댔다.

이렇게 포로교환 하기 전에 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하고서 이제 와서 남한의 친일친미 기생세력들은 북한에 있는 포로를 석방하라고 주장한다. 미군이 남한을 직접 통치하지 않고 대리역할을 할 하수인 역을 맡을 세력이 필요한 이유는 이와 같이 비난 받는 일은 그 하수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소리를 해서 자신의 소행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팽창주의 야욕으로 일제 패망 전부터 코리아 땅에 자신의 입장을 대신하면서 지원할 하수인 역 정부를 세우기 위해 이승만을 육성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

조국반도 북부는 김일성 주석의 독립 투쟁이 활발한 지역이었으므로 미국은 반으로 갈라 남쪽에 이승만 하수인 역을 세웠다. 이와 같이 미국은 우선 반도 남쪽을 지배권역에 넣고 다음엔 이를 발판으로 대륙으로의 더 큰 팽창의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6•25전쟁의 원인은 그 보다 앞선 작은 전쟁에 있었고 작은 전쟁의 원인은 미국의 태생적 본능인 팽창주의 야망에 있었다. 6.25 코리아 전쟁을 포함, 지구상에서 미국이 참전한 전쟁은 모두 팽창주의 야망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지적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리아 전쟁의 원인은 냉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냉전은 미국의 팽창주의를 실행하게 해주는 도구일 뿐이다. 미국은 1866년 8월 함선 ≪셔먼≫호를 타고 우리나라에 침략의 첫 발을 들여 놓은 때에 벌써 평양에까지 침입하여 그곳 주민들의 재물을 강탈하고 부녀자들을 능욕하였으며 대포와 총을 마구 쏘아 무고한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그 후 미국은 ≪챠이나≫호, ≪쉐난도아≫호 등 함선들을 연이어 침입시켜 조국반도를 정복해 보려고 날뛰면서 온갖 야수적 만행을 감행하였다. 20세기 초부터 미국은 일제의 조선강점을 적극 지지하여 미주의 독립운동 단체들을 탄압하였고 장지연과 전명운 등 항일독립투사들을 처형하였다. 미국의 외교관 ‘스티븐스’는 일본의 코리아 침략을 옹호하는 연설을 하였다.

1948년 2월 5일에 군정장관 A.L. 러치가 미군 철수설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한 이틀 후에 발생한 2.7 사건은 1948년 5월10일로 예정된 남한만의 단독 총선을 앞두고 미군정 지역에서 단독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반대하여 일어났다.

당시 민중들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조선의 분할 침략 계획을 실시하는 유엔한국위원단을 반대한다. 남조선의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양군 동시 철수로 조선 통일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우리 조선 인민에게 맡기라. 국제 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 김성수(동아일보의 사주)등 친일 반동파를 타도하라.”…

경상남도 밀양군에서는 2월 7일 이른 아침에 농민들이 지서 두 곳을 습격하여 경찰이 발포로 맞서면서 10여 명이 사살되고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합천군에서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농민들이 지서를 공격하여 역시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와 유사한 충돌이 전국에 걸쳐서 일어나 2월 20일까지 2주 동안 진행되었다. 전체 참가 인원은 약 200만 명이며, 이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100여 명, 투옥된 사람은 8,500 명 정도로 추산된다.

1948년 5월로 예정된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을 앞둔 2월 9일 백범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 고함.〉라는 제목으로 단선단정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는 등 전 국민이 단선단정을 반대하였다. 이렇게 전 국민의 반대 속에서 탄생된 정권이 대한민국 이승만 친일파 정권이었다.

1948년 창군 당시의 군 수뇌부 인맥은 대부분 일본군•관동군 출신이었고 미군정에 고용됐던 친일세력들이 그대로 정권 상층부에 자리잡고 있어 민중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였다. 악랄하게 굴었던 일제 앞잡이들이 해방 후에도 그대로 경찰 조직에 기용되어 치안을 맡아 애국적 인사들을 탄압하였고 반정부 기운도 여전하였다.

미군정이 관동군 출신을 한국군의 구성의 주도세력으로 삼았던 것은 일제 때 만주에서 중국 인민군과의 전투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중국대륙을 회복하기 위해 그들의 경험을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미 군정청의 자금에 의해 운영되는 친일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를 배출한 단체)의 폭력에 시달리던 제주에서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의미하는 5.10 총선을 반대하여 일어난 1948년의 제주도 4.3 항쟁과 제주항쟁을 진압하란 명령에 불복해서 일어난 여수•순천의 반란, 그리고 뒤이은 야산 유격대 등으로 남한의 민중들은 저항했다.

독립을 방해하고 다시 식민지노예로 삼으려는 외세와 친일매국노 치하에서 노예 가 되느니 자유인으로 싸우다 죽는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제주 4.3사건과 미군정의 무자비한 살육행위


제주4.3사건이 일어나자 미군정은 무자비한 살육으로 탄압하기 위해 박진경 연대장, 최경록 연대장, 송요찬 연대장, 함병선 연대장 등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지휘관을 임명했다. 친일세력들은 한국 민중들의 배척의 대상이 되어 불안전한 위치에 처해 있었다. 미군정은 그들 친일세력에게 진압을 맡겼다.

친일 세력들에게 진압을 맡기면 공을 세워 한국을 통치하고 있는 자신들로부터 확고한 지위를 부여 받아 불안전한 매국노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할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미군정은 일본을 대신해서 자신이 한국을 통치하기 위해 일본이 하던 방식대로 친일세력을 기용하였다.

미국은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의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식민지 노예로 만들었다. 미군정이나 이승만 사대매국 정부가 친일파가 아닌 지도자나 관료는 소수였기 때문에 친일파를 기용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승만은 온 국민이 반대해서 그의 명령에 따를 사람이 별로 없었다. 친일파들도 미군의 지시를 따르지 허수아비였던 이승만의 지시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해방 후 김구 등의 민족 지도자를 수없이 죽인 사람은 허수아비 이승만 세력의 지원도 있었지만 그 주범은 미군 측이었다. 이렇게 민족 지도자는 미 군정청이나 정부에서 기용하기는커녕 수없이 살해 했는데 소수였기 때문에 친일파들을 기용 했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 얘기이다. 해방직후 조선의 전 지역에서 조직된 각급 인민위원회들은 일본군대와 경찰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자치를 실시하여 사회의 안정을 보장하고 있었다.

일본은 항복하여 패망한 후에 자국으로 안전하게 귀국하기를 원하여 조선에 있는 민족지도자에게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여 치안을 담당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그들에게 치안을 맡겼다. 따라서 미국이나 소련 두 제국주의자들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명분으로 조선을 점령할 이유가 없었다.

한국을 돕기 위해 왔다면 미군은 이런 우리의 자치 기구를 지지하고 도움을 줘야 했는데 이를 인정하지 않고 해산시키고 친일세력으로 치안을 담당케 하였다. 군정은 제주 4.3 이 발생 했을 때 평화적인 사태해결을 위해 협상했던 김익렬 연대장 등 일본군 출신이 아닌 장성은 교체시켰다.

군정장관 딘 소장은 제주에서 군정 당국 수뇌회의를 주재하고 떠나면서 (5월6일). 전격적으로 제9 연대장을 교체 하였다 그 동안 협상을 추진해 온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하고 그 후임에 박진경을 발령한 것이다. 박진경은 일본군 소위로 제주도에서 복무하면서 독립운동을 탄압한 인물이다.

미군은 제주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는 박진경을 진압군 지휘관으로 교체하였다. 이렇게 연대장으로 부임한 박진경 중령은 ‘양민과 폭도의 구별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무조건 연행 학살했으며, 딘 장군은 이 학살을 보고받고 ‘성공한 작전’으로 평가하고 그를 대령으로 특진시켰다.

이로서 제주도민 4만 명이 희생되고 살아남은 사람도 부모형제를 잃은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1948년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군인들이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자 한국군은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토벌에 돌입했으며 작전 중 산간마을을 소개하였다. 빨치산을 토벌하던 제3연대 제2대대 소속 1개 소대는 산청군 시천면 덕산국민학교에 주둔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49년 7월 18일 빨치산의 공격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제2대대장의 인솔하에 출동한 국군은 신천리 인근 마을에 불을 지르고 강변과 신천국민학교에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사살, 척살의 방법으로 살해했다. 그리고 이날 이후 제2대대 주둔지인 덕산국민학교와 제3연대 정보과 군인들이 본부를 차려놓은 농회 창고에서 마을 사람들을 연행하여 취조한 후 살해했다. 희생자들은 토벌작전에 나갔던 국군에게 각 마을에서 연행되어 국군의 주둔지에서 고문을 당한 후 시천면 덕산국민학교 뒷산이나 농회 창고 뒷산, 삼장면 가막골 등지에서 살해당하거나 혹은 희생자의 거주지에서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제3연대는 1950년 1월 말 서울로 이동할 때까지 인근 지역 주민 수백 명을 빨치산과 협력하거나 좌익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살해했다.

1949년부터 코리아 전쟁 발발 직전까지, 경북 대구에 주둔하던 육군 제6연대와 이 부대를 재편한 22연대ㆍ육군 정보국 소속 호림 부대ㆍ경산 경찰서 등은 지역 내 빨치산과 남로당 세력에 대한 토벌작전을 벌였다.

1949년 5월부터 1950년 3월까지 국군 제3연대 제3대대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는 함양군 일대와 지리산 등에서 빨치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산간마을을 소개(疏開)하였다.

당시 안의면 특공대로 활동했던 참고인은 "잡아온 사람들을 경찰들이 몽둥이로 패서 빨갱이로 만들고 나서 총살시켰다"고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술하였다. 이 사건의 가해 주체는 국군 제5사단 제3연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였다.

1949년 7월에서 1950년 1월 말 사이에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신천리 강변, 신천리 신천국민학교, 원리 덕산 국민학교 뒷산, 사리 농회 창고 뒷산, 삼장면 평촌리 가막골 외 지리산 산간마을과 골짜기 등 여러 곳에서 국군 제3연대 정보과, 제2대대 소속 군인들에게 집단살해 당했다.

제7사단 제3연대는 1949년 3월 1일부터 5월 9일까지 덕유산, 괘관산, 반선리 일대에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1949년 7월~1950년 1월 국군 3연대 소속 군인들이 경남 산청군 주민 129명을 살해한 ‘산청 시천•삼장 민간인 희생 사건’은 빨치산의 공격으로 타격을 입은 토벌군이 비무장한 농민들을 고문•총살하거나 총검과 죽창을 이용해 살해하였다고 진실화해위는 밝혔다.

재미 사학자 방선주(66)씨가 입수한 미국 극동군사령부의 비밀문서는 문경 양민학살 사건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 에 1949년 12월24일 오후 2시. 국군 2개 소대가 들이닥쳤다. 국군들은 마을주민 100명을 한곳에 모아놓고 공산주의자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다. 주민들이 필사적으로 부인하는데도 아랑곳없이 국군들은 수류탄을 터뜨리고 소총과 카빈총을 쏘아댔다. 남녀 86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이 가운데는 여자 41명 어린이 10명과 갓난아이 5명까지 단지 국방군을 환영하지 않는 것 같다는 지휘관의 느낌 때문에 학살되었다.

이웃 사람들의 주검 밑에서 죽은 채 엎드려 있던 14명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집은 모두 불태워졌다. 더구나 이와 같은 만행을 지휘한 국군 장교와 경찰은 무장공비들이 마을 사람들을 학살했다고 상부에 허위로 보고했던 것으로 주한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비망록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산북 면사무소 서기로 학살현장 구호활동을 폈던 천규철씨는 정부가 직접 개입해 조작 은폐하였음을 시사한다. "나는 학살 다음날 면장의 지시를 받고 석달 부락에 들어갔는데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이었다... 뒤에 신임 문경 경찰서장이 공비의 소행이라고 적은 보고문을 면에 보내와 그대로 호적에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친일 매국노들은 인민군 치하에서 인민군들의 학살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국제민간단체에 조사를 의뢰 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자신의 소행을 인민군에 뒤집어씌운 조작된 것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국군 제3연대 1.2대대는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7월까지 산동면에, 국군 제12연대 1-3대대는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초까지 구례중앙초등학교와 구례구역 등에 각각 주둔하면서 구례군 일대 빨치산에 협력한 것으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집단 사살했다.

국군 제8사단은 1950년 3월 28일부터 오대산 및 황병산 일대에서 끈질긴 공비토벌작전을 펼쳤다. 미군은 1949년 12월부터 1950년 1월 기간에 지리산, 태백산, 오대산 등 5개 지구에 대한 ≪토벌≫공세를 벌리고 이 지역의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무고한 주민 약 4만 명을 학살하였다.

미군과 이를 추종한 친일세력의 횡포는 8.15이후 날이 갈수록 극심한 자세를 보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악화되는 과정에서 코리아 전쟁이 일어 났기 때문에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를 말하려 한다면 그 역사적 배경의 진실부터 알아야 한다. 그래서 민족통신은 여러 가지 자료들을 수집하여 기획연재물로 소개하여 코리아 전쟁의 진실을 캐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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