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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교수 대담:《한반도 문제점들과 지식인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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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6-08 16:48 조회4,3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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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교수(전 통일부 장관,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전 한성대,상지대 총장, 전 서울문리대 교수)는
6.15선언 10주년 시국강연을 위해 로스엔젤레스에 방문한 기간 민족통신 편집인 노길남 박사와 <한반도
문제점들과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특별대담을 갖고 그의 견해를 듣는 기회를 가졌다. 이 대담 내용에
밝힌 내용들 대부분은 그의 최근 저서《우아한 패배》에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특별대담 내용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한완상 교수와 특별대담:


《한반도 문제점들과 지식인의 역할》




질문-1: 이제 6.15선언 10주년을 맞습니다. 평양을 직접 찾아가 역사적으로는 최초로 남녘의 최고지도자인 김대중 대통령이 북녘의 최고 지도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상봉하여 남북공동선언문에 합의하는 역사적인 쾌거를 이뤄 냈습니다. 교수님은 김대중 대통령을 가리켜 “김구 선생 이후 가장 훌륭한 분이라고 하셨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를 어떻게 하십니까?

<##IMAGE##> 답변: 1970년대부터 오늘까지 40년간의 한국정치사를 쓰려면 김대중 선생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사 뿐만 아니라 한국현대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는 지난 40년 정치사는 <군사권위주의 극복사>, 혹은 <민주화 진행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에 크게 기여한 분입니다. 그리고 한국 민주주의와 남북관계 개선을 병행 추진한 최초의 정치인입니다. 그리고 지난 반세기 한반도 정세를 보면 남북관계가 악화되면 대내 민주주의 역시 후퇴했어요. 서로 함수관계가 있지요. 그 분은 이 법칙을 이해 했어요. 또한 큰 야당 정치인 중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하여 북미간 일괄타결을 일관성 있게 지지했던 정치인은 선생 뿐이었습니다. 선생의 역사적 평가를 하나 더 추가하자면 정보 인프라를 전국적으로 구축한 최초의 대통령입니다.

질문-2: 그런데 이명박 정부와 여당인 한나라당은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전 기간을 가리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정당한 비판이라고 생각합니까?

답변: 역사적 평가는 신중해야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는 것은 냉전수구세력 , 즉 합리적인 보수세력이 아닌 사람들이 단정적으로 내리는 해석일 뿐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따져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한미관계가 실종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사실은 한미관계가 가장 삐걱대었던 시기는 오히려 고집 센 이승만 문민권위주의의 반공시대와 박정희 군사정부 시대의 핵 민족주의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가 아주 불편했습니다.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시기에는 상대적으로 오히려 한미관계가 괜찮았습니다. 둘째로 냉전적 대북강경책이 실종되었다는 거죠. 이것은 일부 맞는 평가이지만 이것을 찬찬히 따져 보아야 합니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민족공동번영의 경제개발을 위해서, 중소기업 활성화를 위해서 냉전 강경책은 마땅히 실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셋째로 사회공공질서가 실종되었다고 하는데 21세기와 같은 상황에서는 경찰과 검찰의 공권력 강화는 국민의 기본권을 해치기 때문에 민생을 치안을 위한 부문을 제외한 국민의 자유, 기본권은 보호되어야 합니다. 넷째로 수구세력은 기업의 투자의욕이 상실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 10년 동안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기조가 신장되었지요. 기업인들의 정치헌금, 대기업들의 정치적 경제부담이 줄었지요. 이 밖에도 한국의 정통성, 교육경쟁력과 사학의 자율성, 강력한 대통령의 권위 등이 실종되었다고 주장하는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잃어버린 10년”에 실종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부분 마땅히 없어져야 할 것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언론권력의 독과점은 21세기 정신에 결코 맞지 않습니다.

질문-3: 이명박 정부를 가리켜 파쇼적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습니다. 이 정권의 성격을 어떻게 보십니까?

<##IMAGE##>답변: 확실한 것은 이명박 정부가 문민권위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20세기 초 유럽에서 나타났던 파시즘의 복사판은 아닙니다만 그 유사품과 같은 것이 여기 저기서 눈에 띕니다. 우리는 평화로운 촛불시위와 노무현 대통령 조문행사 참여를 통제하려는 정부의 행동에서 파시즘적인 작태를 보았습니다. 아버지 어깨에 타고 촛불을 든 어린이의 그 촛불마저 끄게 하는 공권력을 보면서 갑자기 독일의 1930년대로, 그리고 우리의 1960년대~70년대로 후퇴하는 느낌을 참으로 허탈하고 아프게 체험했습니다. 신권위주의의 또 다른 특징은 비관용 문화와 배타적 정책입니다. 확실한 것은 절대권력은 절대로 망한다는 진리입니다. 파시즘적 권력은 많은 역사상 상처를 남기며 또한 반드시 사라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질문-4: 지금 남북관계는 최악화 상태가 되어 조국반도에 전운이 감돌 정도로 우려되고 있고, 한편으로 북미관계, 한미관계는 미묘하게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미관계가 강화되고 북미관계가 약화되는 듯 보이지만 전통적 친미세력인 반공주의자들은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 정책과 작전권 환수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세가지 관계가 어떻게 진전되어야 평화가 보장될 수 있을까요?

답변: 한미, 북미, 남북이라는 3가지 관계는 한반도 상황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문제의 초점을 남북관계 개선에 두면서 생각하고 싶습니다. 역지사지로 생각하면 문제는 풀릴 수 있습니다. 우선 평양 당국의 입장에서 문제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평양 당국은 한반도 주변국들 중에서 자기 체제를 무력으로 위협하는 나라는 미국이라고 확신합니다. 평양 당국은 중국이나 러시아가 핵 공격을 할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핵무기가 없습니다. 오직 미국만이 과거 6.25때 북한 전역을 초토화했고, 또 지금도 막강한 핵 무기로 위협하고 있기에 미국을 두려워 하며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 문제를 풀기 위해서 북과 직접대화, 협상하기를 원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양은 워싱턴에 대해 애증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6자회담 보다 양자회담을 선호하지요. 미국이 북과 평화협정을 맺고 국교정상화 조치로 임한다면 일괄타결 방식이나 행동대 행동 방식을 통해 비핵화를 실천하겠다는 입장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부시 정권하에서 6자회담이란 틀 속에서 문제를 풀려고 했지만 계속 꼬이기만 해서 오늘까지 왔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평양 측은 이 3자 관계 중 북미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즉 평양의 입장에서는 북미관계가 독립변수이고, 남북관계 개선은 종속변수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바로 <통미봉남>정책으로 나타났습니다. 북미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면 남북관계도 부차적으로 개선된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이 같은 평양의 시각을 워싱턴 측에서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평양과 역지사지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서울 정부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명백합니다. 서울 정부가 북미관계 개선을 촉진시킬 수 있는 외교력을 적극 발휘해야 합니다. 특히 대미외교 역량을 이 방향으로 강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그렇게 하지 않고 과거 군사권위주의 시대의 자세를 답습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북미관계 개선을 좋게 생각했습니다. 한미관계가 굳건한 동맹관계를 유지시킨다는 전제하에서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북미관계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일에 서울정부가 최선을 다하는 일입니다. 이명박 정부의 방향도 이렇게 나가기를 바랍니다.

질문-5: 해 내외 동포사회 보수층에서는 “북한은 절대로 변화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이런 주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IMAGE##> 답변: 보수 층에서는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러나 남북관계 개선을 바라고 추진해 온 세력은 오히려 “북한은 변하고 있다”고 보수층과 다른 의견을 말합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 만큼 빠르게 확실하게 변화하지는 않았으나 변화하려고 애썼던 것은 사실입니다. 금강산 관광사업과 개성공단 사업은 북의 군부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전혀 이뤄질 수 없는 사업입니다. 북한의 군사안보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양보였습니다. 특히 개성지역은 북의 입장에서는 군사요지입니다. 이 지역을 개방했고, 남한 중소기업에 대단히 유리한 조건으로 허락한 것입니다. 중국이나 동남아 노동자의 임금의 4분의 1 수준으로 낮춰주었습니다. 이것은 그들 방식의 ‘퍼주기’라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그리고 그 넓은 공장대지를 부담되지 않는 비용으로 쓸 수 있도록 한 것 은 6.15공동선언 정신에 따라 크게 양보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것은 대단한 변화라고 봐야 합니다. 또 한가지 그들의 변화에 놀란 것은 2007년 10.4선언인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의 4항에서 종전에는 평화협정 당사자들을 미, 중, 북으로 보았는데 이 때 남한을 참여시킨 자세는 참으로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 난 것이 불과 2년 반 전의 역사였는데 이것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6.15선언, 10.4선언이 무시되고, 남북관계가 최악의 사태로 돌변함으로써 나는 허탈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북한이 보여 주었던 변화들이 물거품으로 되는 것을 보고 안타까와 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6.15선언이나 10.4선언에서 보여주는 북한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도 보지도 않으려고 하고, 읽었어도 그것을 평화구현을 위해 활용할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던 서울과 워싱턴의 냉전적 ‘불변 태도’가 오히려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질문-6: 교수님의 로스엔젤레스 시국 강연 차 방문하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곳 책방들에 있던 최근에 출판한 532 페지의 두꺼운 도서 《우아한 패배》가 다 팔렸습니다. 제가 한 서점에서 마지막 한 권 남은 교수님 저서의 그 책을 구입했습니다. 이 책 제목도 흥미로웠지만 내용도 무게가 있었고, 쟁점들이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주로 국내외 언론들과의 대담 내용들을 수록하여 주었고, 한반도 정세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하여 주었습니다. 북의 주체철학 전문가와의 대담내용을 포함하여 극우 언론과의 대담 등, 그 내용들이 정말 다양하였습니다. 교수님은 이 책에서 ‘21세기 주역들과의 대화’라는 부제에서 “줄씨알”이라는 새 낱말을 사용하시면서 이들이 “21세기 민중이요, 21세기 주역”이라고 하셨는데 줄씨알의 정치사회적 의미를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고 <줄씨알>이라는 어휘를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나요?

<##IMAGE##> 답변: <줄 씨알>이라는 어휘는 제가 2년 전부터 쓰기 시작했습니다. 쌍방향 통신매체를 일상적으로 활용하면서 놀라운 양의 지식을 습득하고, 그 지식을 교환 전달하면서 특정 이슈들에 대해 줄-안에서(On-Line)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누리꾼들을 ‘줄씨알’이라고 불렀습니다. ‘줄시알’은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주역이지요. 이들은 공간의 장애를 받지 않고 줄-안에서 문제를 공론화하기도 하며 토론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어떤 합의에 이르게 되면 줄-밖에서(Off-Line) 그 힘을 집결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보통신혁명의 혜택으로 세상 돌아가는 지식을 자기 힘으로 습득, 축적, 교환할 수 있는 사람이지요. 이들이 갖고 있는 지식의 양과 힘에 주목하면서 지식노동자라는 뜻의 ‘코그니타리아트(Cognitariat)’라는 새 낱말이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것은 앨빈 토플러의 표현입니다. 이들은 산업화 시대의 프로레타리아와는 다름니다. 이 ‘줄씨알’은 즉자적 노동자 계급과는 달리 대체로 대자적 누리꾼들입니다. 자기와 세계에 대해 항상 성찰할 수 있고, 상황에 대해 예리하게 분석 비판하는 능력을 스스로 갖추게 됩니다. 스스로 인터네트를 통하여 학습합니다. 물론 그들 모두가 깨어 있는 씨알(Grass-root)은 아닙니다. 뉴욕 타임스는 이들을 네트-루트(net-root)라고 묘사했는데 제가 말하는 줄시알과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네트 상에서 이름을 떨쳤던 <미네르바>가 바로 ‘줄씨알’입니다. 촛불의 저력을 과시한 중심세력이 줄씨알들입니다. 이들은 깨어있는 21세기 대자적 민중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을 부당하게 탄압하려는 권력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어리석은 권력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오늘의 ‘줄씨알’들도 의견표현에 있어 수준 높은 세련됨과 겸허한 자기 성찰의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른바 알바들은 창발적 줄씨알이 될 수 없습니다.

질문-7: 한완상 교수님께서는 1970년대부터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해 오셨습니다. 특히 깨달은 민중, 즉 대자적 민중의 역할을 역설하셨는데 21세기의 지식인 역할에 대해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저의 입장은 분명합니다. 70년대 지식인들이 대체로 사물과 세계를 실증주의적으로 관찰 분석하는 지식 기사적 역할에 자족하는 듯한 현실을 보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 때는 정의, 민주주의, 인권, 평화의 가치가 국가권력에 의해 조직적으로 훼손되면서 밑바닥 민중은 말할 것도 없고, 국민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지식인은 마땅히 용기 있는 증인이 되어야 하고, 그 상황을 변혁시키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지요. 그래서 당시에는 잠자는 민중, 즉 즉자적 민중이 아니라 대자적 민중으로 나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는 지식인과 시민과의 관계에 주목했습니다. 비정부기관(NGO)의 힘이 커질 것으로 내다보고 이 운동에 지식인이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1세기 정보화 흐름과 함께 그 막을 올리게 되면서 저는 놀라운 구조적 변화를 감지했습니다. 20세기는 무력한 대중의 사회였고, 그 대중을 조종했던 권력은 대중매체를 장악함으로써 대중 곧 즉자적 민중을 깨어나지 못하게 조종했습니다. 그러나 21세기 전후하여 쌍방향 통신매체를 주체적으로 활용하는 누리꾼, 즉 줄씨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이 속도에서 한국의 줄씨알의 역할은 다른 구미선진국들을 제치고 앞서 나갔습니다. 이들 줄씨알들이 역사의 주체와 동력으로 그 힘을 발휘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들이 바로 지식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지식인은 이들 줄씨알과 협력하여 보다 나은 새 질서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줄씨알과 지식인은 서로 배워야 합니다. 제가 이 같은 열린 사회에 대한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제 삶의 체험에서 터득한 것입니다. 지식인은 권력의 화려한 수사어귀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권력의 추악한 실체를 용기 있게 그리고 정확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폭로해야 합니다. 그러한 비판적 자세는 21세기에도 지식인의 역할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신권위주의 망령이 되 살아나려는 상황에서는 더 더욱 그렇습니다. 여기에 창조적인 줄씨알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아니 지식인들 자신이 바로 비판적 줄씨알이 되어야 합니다.

***그의 저서 <우아한 패배> 맨 뒷 쪽에도 21세기 지식인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이념의 증오와 냉전의 독선으로 체색된 낡은 색안경을 벗어 던지고, 열려 있는 밝은 인간의 눈으로 기막힌 모순의 진실과 대좌해야 한다. 좌우, 진보, 보수를 떠나 스스로 사회 개혁을 위한 주역이 되어야 한다”라고 그는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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