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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석유판 돈 왕가 3만명이 소유한 사우디 아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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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6-01 10:37 조회3,7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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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이번에는 중동의 <사우디 아라비아>에 대한 고찰을 통해 "사우디 아라비아
왕정은 미국의 대테러 전쟁을 위하여 협력해 주는 한편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반미 테러를 수출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지난 60년간 지속된 미국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동맹관계는 조금씩 균열구조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대외정책에 구멍이 뚫리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고 분석하고 있다. 필자는 그 동안
강대국들에 압박받아 온 47개 나라들을 연구하여 발표해 왔다.[민족통신 편집실]


[특별연재 기고]



《석유판 돈을 왕실가족 3만명이 소유한 사우디 아라비아

9.11테러를 뒤에서 도와준 사우디 왕실과 미국 지배세력》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IMAGE##> 사우디 왕실이 9.11 테러범들에게 자금을 지원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미국과 사 우디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 당시 뉴스위크 인터넷판에 의하면 주미 사우디대사 술탄 왕자의 부인인 파이잘 왕자비의 은행 계자의 돈이 9.11테러 당시 미 국방부에 타격을 가한 여객기 납치범 2명에게 돈을 간접전달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보고서에 따르면 4년전부터 테러범에게 간접 접촉을 통하여 매월 3500달러를 2001년 7월까지 테러범 2명에게 전달 했다. 그리고 미 상원 합동위원회의 보고에 의하면 미 연방수사국(FBI)과 중앙정보국(CIA)은 테러범들과 사우디 왕실과의 연계 가능성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조사를 하지 않은데 대하여 지적을 했다. 그런데 그 당시 주미 사우디 대사인 술탄 왕자는 테러범들과의 연계 의혹을 무마하기 위하여 완강히 부인했다고 뉴스위크는 보도 했다.

한편 미 하원 의회의 합 동위원회의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9.11테러범 19명중 15명이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들인 것으로 드러 났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사우디 사람들의 반미감정을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9.11 테러사건 발생후 2년만인 2003년 8월 2일에 800 페지가 되는 미 의회의 <9.11 조사 보고서>가 발표됬다. 그런데 가소로운 것은 이 중에서 28 페지는 극비문서로 구분되여 아무도 그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오직 부시 대통령만이 볼 수 있는 극비에 속하는 사건의 내용이 28 페지 속에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28 페지 극비문건 속에 들어 있는 비밀은 무었일까?

<이스라엘이 9.11테러 사건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라고 하는 사실이 이 극비의 28 페지속에 들어 있다고 한다. 쌍둥이 건물 붕괴로 인하여 4천명 이상이 죽었는데도 이스라엘인은 단 한 사람도 사망자가 없다는 이유를 잘 설명해 주는 28 페지이다. 이 말은 또 부시 대통령은 9.11사건을 사전에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 고 있다. 9.11 테러범들이 비행기 조정기술훈련을 미국에서 받는데 있어서 직접 관련된 인물로 알려진 오마 알 베요우미를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그를 체포하여 7일 동안 심문 했다. 하지만 사우디 외무장관이 워싱톤에 급히 직접 찾아와서 라이스 국무장관과 비밀 합의를 했는데 그 비밀 합의에 의하여 오마 알 베요우미는 즉시 석방되여 사우디 아라비아로 무사히 귀국했다.


뿐만 아니라 9.11테로의 주모자로 알여진 오사마 빈 라덴의 직계 가족식구들이 14-16명 그 당시 미국에 체류하고 있섰는데 그들의 행방은 어찌되였나? 그들의 행방은 9.11사건발생 3-4일 후에 미국 FBI가 제공하는 극비의 비행기로 유유히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무사히 피신을 했다. 사우디 왕가와 오사마 빈 라덴과의 관계를 폭로하는 또 한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사우디 왕가는 빈 라덴의 테러조직에게 4억달러를 보조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사우디 왕가가 어찌하여 9.11 테러행동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위에 기술한 모든 결정적인 관련들은 그 무엇을 말해 주는가? 그것은 9.11테러 사건은 우연히 어떤 한 테러집단에 의하여 단독적으로 감행된 사건이 결코 아니 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9.11테러 사건은 분명히 미국과 사우디 아라비아 왕정과 그리고 이스라엘 세 나 라가 테러발생 과정에 있어서 사전에 치밀하게 상호 깊숙히 모의했고 서로 관련 된 국제적 음모사건 이였던 것이 분명하다.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날은 2010년 5월 18일이다. 지금으로 부터 30년전 5월 18일에 그 비극적인 5.18광주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는 5.18의 원흉을 오직 전두환으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오 늘에 있서서 한국 민중은 전두환 배후에서 치밀하게 계획하고 후원해 준 막강한 세력은 한국 군부가 아니라 미국이였다는 사실을 밝히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오늘의 천안함 침몰 사건에 있서서도 사건을 단계적으로 미국이 원하는 대로 마무리 짓고 있는것이 분명하다.


미국은 얼마 후에는 6자회담 프로세스를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개하려고 하는 일정표를 정해 놓고 남북관 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고 있다. 미국은 천안함 침몰의 진상 규명을 강대국의 강권으로 무마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결국 북한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공작을 이명박에게 노골적으로 제공해 주고 있다. 이와같은 오늘의 시점에서 미국이 방대한 양의 석유매장 때문에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시 하고 있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어제와 오늘에 있어서 그 어떠한 음모를 꾸 미고 있는가를 새삼 밝혀야 하겠다. 그리하여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을 비롯하여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 해 있는 여러 나라들의 실정을 살펴 보려고 한다.


아라비아 반도의 간추린 고대역사



아라비아 반도에는 7개의 국가들이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을 비롯하여 바 레인, 쿠 에르토, 오만, 카 타르, 아랍 에미르트 연방 그리고 예멘 공화국이 있다. 아라비아 반도 전체의 크기는 약 300만 평방 키로미터(km2)이다.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의 면적은 아라비아 반도의 3/4에 해당하는 225만 평방킬로미터이며 우리 한반도의 약 11배가 되며 인구는 2,030만명 이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하여 우리의 관심과 흥미를 일으키는 것은 구약성서의 출액굽의 역사와 사우디 아라비아와 지리적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가운데서 야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 기록했다고 출애굽기 19 장에 기록되였다. 그런데 이 시내산의 위치가 오늘의 사우디 아라 비아의 헤자즈라 지방인 것이 지리적 추론으로 밝혀 졌다.


뿐만 아니라 모세가 이집트에서 타출하여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살면서 양떼를 치다가 어느 날 불붓는 떨기나무에서 야훼를 처음 만났다는 이야기도 (출애굽기 3:1-5) 단연히 사우디 아라비아 땅에서 발생한 사건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BC 1000년 무렵부터 아라비아 반도에 또 많은 나라들이 홍망성쇠 했는데 그 중에서 시바왕국이 기원 전후 양세기에 걸처 수 백년 동안 북부지방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받아 전성기를 이루웠고 고도의 농업사회를 발전 시켰다.


AD 4세기 무렵에는 힘야르 왕국이 등장히여 강대해 지면서 사우디 아라비아의 북부와 남쪽 전역에서 낙타를 사육하는 유목민의 전통을 세우고 <황야의 백성> 이라는 뜻으로 <아랍인>이라고 불렀다. 본래 아랍인들의 종교는 우상을 숭배하 는 다신교였으며 메카는 다신교의 성지로서 고대종교의 중심지였다. AD 5-6세기 무렵 100년동안을 나바테아왕국과 팔미라왕국의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를 자힐리아 시대라고도 한다. 이 말의 뜻은 <무지의 시대>라는 뜻이다. 이 시기에 여러 종류의 아랍부족들 사이에 분쟁이 계속됬는데 자기의 부족을 위하여 싸우다 죽느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당시 아랍인들의 종교는 애니미즈적 성격이 강한 현세적 번영에 이바지하는 것을 덕으로 여기는 운명관적인 종교였다. 당시 메카는 상업도시로 한때 번창하였으며 우상을 숭배하는 카바신전에 많은 순례자들이 모여 드는 화려한 도시이기도 했다.


사우디 아라비아에 유대교와 기독교가 1세기 부터 전래되기는 했다. 하지만 당시 아랍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부족의 종교가 우세하여 외래 종교가 정착되지 못했다. 마호메트의 출현과 이슬람교 마호메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의 손에서 성장했다. 25세대 결혼하고 사업에 종사했으나 610년 40살 무렵 메카의 히라산 동굴에서 처음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받고 자신이 예언자임을 자각하고 설교를 시작했다. 그는 천지의 종말을 역설하면서 우상숭배와 다툼과 부정을 그만두고 자선과 봉사정신을 역설하면서 예언자적 활동을 전개 했다. 622년 마호메트는 추종자들을 총동원하여 <메카>를 버리고 <메디나>로 대이동을 하여 메디나를 초기의 선지로 삼고 성환의 땅으로 만들었다.


630년에 마호메트는 종교적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로 등장하여 메디나에 살고있던 유대교도들을 몰아내고 이슬람신앙 공동체를 메디나에 크게 형성했다. 하지만 그 후에 마호메트는 계속하여 여러 부족들을 이슬람 종교로 교화시키는데 성공하여 이슬람의 힘을 모아 메카를 공격하고 정복하여 메카를 이슬람의 새로운 성지로 건설했다. 그리하여 <메디나>와 <메카>는 이슬람 종교와 이슬람 국가에 있서서 양대의 두 성지로 쌍벽을 이루었다. 하지만 훗날에 이 양대 성지는 종교적 분렬과 정치적 분쟁의 온상이 되여 이슬람의 양대 진영인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렬의 원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632년 마호메트가 죽을 때에는 아라비아반도 전지역은 임이 이슬람교로 교화되였으며 국가 건설이 완성되여 이슬람주의로 통치하는 나라가 이루워지고 있었다. 마호메트는 예언자로서 알라신의 계시를 전하고 신의 계시를 기록한 책 <코란> 을 종교적 <경전>으로 편집하여 집대성 했다. 뿐만 아니라 <코란>은 아랍세계와 전중동과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이슬람적 정치적 체재와 통치이념을 남겨 놓았다. 이슬람은 마호메트가 남긴 예언서인 경전 <코란>을 <신이 계시한 말씀>으로 받 아 들인다. 코란을 기독교의 구약성경에 있는 아담으로 부터 시작하여 노아와 아 브라함, 다윗, 예수 그리고 모하메트로 이어지는 신으로 부터의 계시의 책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나님은 마호메트를 마지막으로 세상에 보내여 인간이 지켜야 할 신조와 법률들을 완전히 계시하여 그것을 사람들이 지키도록 했다고 이슬람 종교는 주장한다. 그러나 <코란>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한 과정에 있서서 이슬람 중교는 여러 분파가 발생했다. 코란학파와 문법학파가 분열됬고, 고시학파와 전승학파가 분열되었다. 또 이슬람법 해석에 있서서 법리론파와 신학파로 분열되였다. 이와같은 분열은 마호메트의 후계자 선정문제와 교리싸움이 혼합되여 발생한 복잡한 문제와 자연히 결부되여 보다 더 큰 근본적인 문제로 비약했다. 결국 이슬람교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뿐만 아니라 아랍세계 전역에서 분렬을 일으켰다.

이슬람교의 분렬을 크게 나누어서 두개의 분파로 집대성된다. 수니파와 시아파는 이슬람 세계의 양대 분파이다. 수니파에 대하여 알아 본다.

수니파는 전세계의 이슬람교도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수니파를 정통파라고 한다. 수니파는 후계자를 선정하는 법을 <칼리프 제도>라고 하는데 이 제도는 각 씨족과 부족들이 뫃여서 <싸끼파 회의>를 진행한다. 이 회의에서 중요한 론쟁을 통하여 칼리프를 선정하고 선정된 칼리프는 <코란>에 대하여 충성서약을 하고 무슬림 법학자들은 칼리프가 종교와 정치의 지도자 됨을 제도적으로 수호하는 <코란>의 전통성을 확립한다. 순니파는 <코란주의> 를 주장하는 보수정통파이다.

수니파는 <칼리프 제도>를 아랍 민족의 우월권 확보로 여기고 있다. 수니파 신도의 수는 약 4억명이며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을 비롯하여 아라비아 반도의 여러 나라들과 이집트와 인도네시아등이 주요한 수니파 국가들이다. 이락의 후세인 왕 자신은 수니파로 집권을 하면셔 이락의 다수인 시아파를 강제로 악압 하면서 통치를 하다가 정권이 붕괴되여 처형을 당했는데 오늘 이락은 다수인 시아파가 권력을 잡았다.

시아파는 어떻한가?

시아파는 이슬람의 지도자는 반드시 마호메트의 혈통을 이은 직게자만이 이슬람의 지도자의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마호메트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죽은 후 에 그의 사촌이며 사위인 <알리>가 이슬람의 제 4대 칼리프 <지도자>로 드디어 선출됬다. 시아파의 소원이 오랫만에 결국 성취됬던 것이다. 그렇지만 제4대 이슬람 지도자 칼라프로 선출된 <알리>는 암살을 당해 죽었다. 수니파의 극렬 보수주의자들이 시아파인 <알리>를 암살 했던 것이다.

시아파는 순니파가 주장하는 보수주의적 <코란주의>를 적극 반대했다. 시아파는 제4대 지도자로 선출된 알리의 죽음을 순교자의 죽음이라고 주장하여 오늘 까지 <알리 순교의 날>을 시아파의 큰 행사로 기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시아파는 순니파의 무슬린 법학자들이 주장하는 칼리프 선거제도를 근본적으로 반대하면서 이슬람의 참된 지도자는 마호메트의 혈통을 이은 사람만이 영적인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시아파는 인간의 이성을 뛰어 넘는 영적인 정통은 오직 마호메트의 혈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오늘 중동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지하드>가 미국에 대하여 성전을 선포하고 있다. 그들은 <지하드>는 마호메트의 혈통을 이어 받은 시아파의 영적인 진리운동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동에서 시아파 강국은 이란과 시리아 이다. 그리고 수니파와 혼합되여 있지만 시아파가 다수인 나라는 이락이다. 전세계에 시아파 인구 수는 이란과 시리아를 중심하여 약 3,000-4,000만 명이다.

지금 이락에서는 다수인 시아파와 소수인 수니파가 서로 테러와 보복으로 얼룩지고 있다. 이락의 시아파는 65%의 다수이고 사담 후세인을 그리워 하는 수니파는 35%의 소수파 이다. 아락에서는 <예수는 예수대로, 모세는 모세대로> 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뜻은 시아파와 순이파는 절대로 서로 승리하지 못함으로 그저 그대로 화해할 수 밖에 없다 는 뜻이다.


이슬람 제국의 간추린 역사

마호메트가 메카에서 이슬람교를 창설하고 632년에 죽은 후에 후계자를 세우는 문제가 큰 문제로 등장했다. 이슬람교가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기 시작하는 초창기를 632년-661년으로 잡는다. 이 시기에 대하여 역사가들은 <칼리프시대> 라고 부르다. 칼리프는 이슬람 최고 지도자를 투표로 선정하는 제도를 뜻한다.


옴미아드왕조시대<661-750>

옴미아드 욍조는 이슬람 세력이 확장되여 사우디 메카에서 부터 현재의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커스로 이전했다. 옴미아드 왕조의 창시자 무아위아 1세는 이슬람교와 제국을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스페인까지 확장했다. 713년에는 중앙아시아와 북서인도를 정복했다. 이슬람교의 법학, 자연신학 그리고 전승학등이 이 시기에 급속도로 발전하여 이슬람권의 확대가 눈부시게 강화되었다.

압바스 왕조 <750년-1250년>

압바스 왕조는 아랍인들의 특권은 약화되고 오히려 비아랍인들이 국가의 요직에 등용되는 정책을 펴 나아 갔다. 문화면에서 이슬람교와 헬레니즘 문화를 융화시키는 문화향상을 도모했다. 하지만 1250년에 몽골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하여 멸망 했다. 그후에 맘룩 왕조 1250-1453>가 이집트와 시리아 일대를 모두 지배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 <1453-1922>

오스만 투프크족이 1500년경에 소아시아에서 이슬람 제국을 창건하고 지배했다. 오스만은 지금의 터키의 전역을 정복하고 지배했다. 또 오스만 제국은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비잔틴의 수도의 명칭을 이스탄블 이라고 개칭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시대의 전성기를 이루워 영토를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등 3개 대륙에 걸처 형성하여 이슬람 역사상 최고의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포레옹의 이집트 침입과 19세기에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함으로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은 독일군과 연합하여 싸웠으나 전쟁에 패하고 말았다. 오스만은 정치적 무능과 부패가 노출되고 나포레옹의 불란서가 강대국으로 등장 함으로 인하여 마호메트 후손들이 창건한 화려한 이슬람 제국시대는 500년 동안의 통치와 번영을 끝내고 1922년에 완전히 막을 내렸다.

사우디 아라비아 왕실과 미국


오스만 제국이 붕괴된 후에 터키에서 케멜의 주도하에 터키공화국이 설립된것 처 럼 사우디 반도에서도 1927년에 사우디 부족의 <압돌 아지즈>가 여러 부족들을 평정하여 <사우디 아라비아 단일왕국> 을 창건했다.오스만 제국이 통치하던 오랜 시대에 사우디반도의 여러곳에 있는 오아시스 주변에서 종교적 집단을 중심하여 여러 소왕국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멸망한 후에 영국의 통치를 받고 있던 사우디 아라비아 반 도에서 영국의 승인 하에서 독립국이 신생되었다.

1927년에 압돌 아지즈에 의하여 창건된 사우드 아라비아 왕국은 최초로 통일된 <근대입헌군주국가>로 처음으로 창건된 것이었다. 1932년 9월에 나라의 명칭을 오늘의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 이라고 공식적으로 개칭했다. 국왕은 <메카>와 <메디나>에 있는 두곳의 <모스크>에 대하여 절 대적 수 호자로 군림했다.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이 1927년에 창건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왕정이 78년의 세월이 흘러 갔다. 그동안 5명의 왕들이 집권 했고 2005년에 제6대의 압둘라 국왕이 즉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5명의 국왕들의 재임 기간은 평균 14년으로 나타났다. 사우디 아라비아 국왕들의 재임기간이 평균 14년으로 이렇게 짧은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이것은 사우디 왕실이 정상적으로 평온하지 못했다는 것을 밝히 말해 주고있다. 지면상 제한으로 사우디 왕실의 문제점을 매우 간략하게 요점만 적어 본다.

ㄱ. 사우디 왕국을 처음 창건한 건국의 아버지인 아지즈 왕은 왕비가 17명 있었으며 그는 생전애 80명의 왕세자와 딸들을 낳았다. 물론 이 80명 왕세자들은 17 명의 왕비에게서 낳은 이복형제들이었다. 제2대 사우드왕, 제3대 라이잘왕, 제4대 칼리드왕,제5대 파드왕들이 모두 다 하나 같이 10여명 이상의 왕비와 결혼을 했으며 수십명의 왕자들과 딸들을 낳았다.

2005년에 즉위하여 현제 제6대왕으로 재임하고 있는 압둘라왕은 왕비 30명과 결혼하여 15명의 왕세자와 20명의 딸들을 낳았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3만명의 왕족과 6천명의 왕세자들이 있다고 하는 말은 절대로 과장된 말이아니다. 사우디 아라비아는 건국 초창기 부터 왕자들의 <집단통치제도>를 정착시켰다. 그동안 2명의 국왕이 이복동생 또는 족하에 의한 암살로 사망했다. 후계자 선출 문제로 인하여 수 없이 많은 왕자들 사이에서 암투와 쿠테타가 왕실 내부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

사실 사우디 왕가는 수없이 많은 왕비 어머니들이 낳은 제 각기 다른 의붓형제들이 통치하는 방대한 권력의 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의 조직은 100% 왕자들로 구성된 <왕권정부>이다. 국방장관, 내무장관, 재무장관 그리고 외무장관을 비롯하여 모든 정부의 요직과 외교관들은 물론 말단 공무원에 이르기 까지 왕세자들이 모든 국가 가관들을 독차지 하고 있다.

ㄴ. 1938년에 사우디왕실은 미국에개 석유생산권을 무상으로 허락했다. 이때 부터 사우디 아라비아는 미국의 돈독한 동맹국의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버지 부시대통령은 사우디 왕을 대통령 별장에 귀빈으로 모시면서 <당신은 우 리의 사촌 형제이다> 라고 하면서 매수하는 최대의 친절을 베풀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지금도 그 매수수단 방법을 여전히 계속 사용하고 있다.

사우디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60%를 미국과 영국의 석유재벌들이 소유하고 있으며 40%는 3만명이 넘는 왕족과 6천명의 왕자들을 비롯하여 특권층이 석유로 인한 부를 독점하고 있다. 사우디 왕실은 보잉 747을 구매할 정도로 세계 최고의 호화로운 왕궁의 시설을 가추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일반 서민층 국민들이 얻는 소득은 최하이며 실업자와 빈민의 수는 최고에 이르고 있다. 이로 인하여 사우디 아라비아 민중들의 반 왕정-반미 감정은 날이 갈 수록 치솟고 있다. 사우디 왕정은 이 문제를 처리하고 잠재우기 위하여 다음의 두가지 방법을 활용하고 있다.

첫째는 잘 훈련된 3만 5천명의 국가 경비대를 왕자들이 통솔하고 지휘 하면서 왕 실과 왕정을 튼튼히 보호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은 최신 무기를 사우디 왕정에게 판매하여 왕정을 튼튼하게 보호해 주고 있다.

둘째는 사우디 왕국은 이슬람 종교국가이기 때문에 <코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여 우매한 민중들의 종교적 충성심을 일상생 활속에서 유감 없이 발휘하도록 종교적 세뇌공작정치로 민중을 통치하고 있다.

ㄷ. 미국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딜렘마에 빠져 있다. 미국은 사우디 왕정의 무 지한 독재 정권을 무긴해 주고 있다. 미국은 이슬람 종교의 원시적 페쇄성을 종교의 자유라는 이유로 계몽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만일 사우디 왕정이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페쇠된 종교 의식을 개혁하게 된다면 그 때는 왕정 반대-반미 운동이 치솟게 될것이 분명하다. 이것을 미국은 무서워하고 있다. 그럼으로 미국은 다른 나라에서 입버릇 처럼 부르짓고 있는 민주화를 사우디 아 라비아 에서는 <미국은 내정간섭을 하지 않는다> 라는 구실로 사우디 왕정의 독재를 묵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뒤에서 왕정을 튼튼히 유지하도록 지 원을 해 주고 있다. 미국은 사우디의 민중들이 당하고 있는 비극을 그저 못본체하고 있를 뿐 석유의 이득을 지키기 위하여 미국은 사우디 아라비아 에서 헤어날 수 없은 딜렘마에 뻐 져 있다.

ㄹ. 왕족들의 호화로운 생활과는 대조적으로 가난한 민중들에게 막대한 석유돈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전세계의 석유매장량의 24%를 사우디가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사우디 아라비아의 민중들은 문맹과 질벙과 기아에 대대손손 시달리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이슬람 원리주의가 무엇인데 이런 모양인가? 코란의 가르침으로 민중을 시대에 뒤떨어지게하여 민중을 눈뜬 소경으로 만드는 것이 <코란>의 원리주의인가?

기독교에 보수주의자들이 성서의 무오설만을 고집하면서 서구의 침략행위를 적극 옹호 하는 보수주의 가독교가 있다. 기독교 처럼 이슬람교 세계에서도 <코란>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원리주의를 무조건 고집하면서 부도덕한 왕정에 무조건 복종하도록 강요하는 원리주의자들이 있는 것이다.

이슬람 역사에서 1700년대에 전개된 <와하비 원리주의> 운동에 의하면 이슬람종교를 전투적 종교로 개조하여 마호메트의 가르친 본래의 교훈으로 돌아가기를 주장하는 반문화와 탈사회적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는 종교운동이 있었다. 오늘날 사우디 아라비아 왕정은 민중들에게는 <와하비 원리주의>를 주장하면서 민중들에게 근본주의적 엄격한 종교생활을 강요하고 있다

그런데 사우디 아라비아 정권을 독차지하고 있는 왕족들은 어떠한가? 왕족들은 기회주의적으로 다양 한 삶의 자유를 마음끝 누리면서 오직 말로만 엤날의 이슬람 전통인 <와하비 원리주의>를 고수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일 사우디 왕정이 <와하비 원리주의> 를 사우디 민중들에게 강요한다면 왕정은 우선 사우디 왕실에서 부터 반서구적이며, 반자본주의적이며 또 반미적인 정치 노선을 분명히 밝혀야 할것아는가? 그리고 참된 이슬람 종교의 원리적인 생 생활 풍토를 민중들에게 생활로 제시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우디 아라비아의 왕정은 전혀 그러치 않다. 미국이 이락을 공격할 때 미국군의 군사기지 사용을 사우디 땅에 허락했다. 이것은 분명히 이슬람 종교의 원리를 어기는 처사이며 <와히비 원리주의>를 배반하 처사 이었다. 사담 후세인 이락 왕은 사우디 왕가와 동일한 수니파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우디 왕정은 미국이 이락을 공격하는데 협력했고 사담 훗세인 왕을 처형 하는데 침묵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미국의 압력이 물론 있었겠지만 그것 보다 다른 이유는 두 나라의 왕들 사이에 수니파의 지도권에 대한 경쟁심과 갈등이 작용했 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오사마 빈 라댄은 사우디 아라비아 왕가의 많은 왕자들 중의 하나 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사마 빈 라덴은 사우디 왕정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궐기 했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오사마 빈 라댄은 속다르고 걷다른 타락하고 부패하여 미국에 이용당하며 끌여 가고 있는 사우디 아라비아를 미국의 악마로 부터 사우디를 구출 해 내기 위하여 궐기한 용감한 투쟁인 것이다. 사우디 왕정이 <와하비 원리주의>를 민중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여 민중들에게 고통을 부과하면서 왕실 내부에서는 극도로 타락하고 부패하여 권력의 쟁탈전으로 국력을 소모하는데 대하여 오사마 빈 라덴은 분개하여 궐기했던 것이다.

사우디 왕실은 오사마 빈 라덴의 왕자와 왕족의 지위를 박탈하여 오사마 빈 라덴 을 왕실에서 추방 했다. 오늘 오사마 빈 라덴의 직계 가족 식구들은 중동과 유럽에 분산되여 숨어 살고 있다.


이 글을 끝 맺으며,



사우디 왕실은 <와하비 원리주의>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보수주의 왕정을 현재 까지 유지하고 있다. 석유로 얻어지는 수입을 오직 왕실이 독점하고 있다. 사우디 왕정은 1990년 <사막의 폭풍> 제1차 걸프전 때 부터 지금까지 미군에게 협조하며 군사기지 사용을 허용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사우디 왕정은 이슬람 성직자들의 반발을 사고 있으며 드디어 오사마 빈 라덴이 주도하는 알 카에다 항전 에 직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우디 왕정은 <메카>와 <메디나> 성지 간의 갈동과 유전이 밀짐되여 있는 지역에서 경제적 균열이 심화됨으로 인하여 빈곤층의 왕정에 대한 적개심과 반발이 날로 날로 심화되고 있다. 석유 부자 왕족식구들의 흥청망청 호화로운 생활의 보습들을 그림의 떡 모양으로 관망하고 있는 서민층 대중은 마음속으로 웨치기를 <나회들 두고 보자, 언젠가 우리들은 너희들의 피를 마실 때가 분명히 올 것이다> 라고 울분을 터뜨린다고 하는 기사를 어느 외신 기자는 보도 했다.

현재 압둘라 왕정 내부의 왕새자들 가운데도 권력 투쟁으로 강경파와 온건파가 팽팽이 대립하여 국왕은 진퇴양난에 처해 있다고 한다. 사우디 왕정은 내부적 갈등뿐만 아니라 미국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 아랍나라들과의 관계에서도 극히 어려운 난제에 직면하고 있다. 9.11이후 반세기 동맹이 흔들리고 있는데 그 주요한 문제들을 지적한다.

ㄱ. 지금까지 왕정유지는 오직 미국의 힘 때문이였다. 그렇지만 이제는 왕권보호를 위하여 민중의 눈치를 의식하여 비록 수사학적 의미일 뿐이기는 하지만 사우디 왕정이 <반미적 발언>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동시에 미국 CIA도 실효성이 전혀 없는 발언 이기는 하지만 사우디 왕정의 교체 설을 자주 발언 하고 있다. 미국이 국제회의 석상에서 중동의 민주화 구상을 가끔 언급 할 때마다 사우디 왕정은 미국에 대하여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다.

ㄴ. 사우디 왕정은 현상유지 친미노선의 큰 틀을 유지할 전망이다. 압둘라 국왕은 즉위 후부터 지금까지 7,000명에 달하는 왕위 계승 후보자들로 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 놓은 상태에서 튼튼한 기반을 유지하면서 미국에 대하여 친미노선을 그대로 유지할 전망이다.

ㄷ. 미국 또한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민중들의 이슬람 원리주의 혁명보다는 왕실의 현상 유지를 더 원하고 있다. 사우디에서 석유 생산의 60%를 미국과 영국이 가져가고 40%를 사우디 왕정이 소유한다. 그런데 이 40%에 해당 해되는 석유중에서 80%를 사우디 왕실이 차지하고 겨우 20%를 가지고 사우디 국가 운영을 의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 사우디 민중들이 어떻게 석유생산의 헤택을 받을 수 있겠는가? 미국은 이와같은 불공평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안정된 미국의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하여 모르는척 하고 무조건 왕정을 옹호해 주고 있는 형편이다.

ㄹ. 이란과 시리아는 시아파 국가이고 반면 사우디 아라비라는 수니파 국가이다. <시아파>와 <수니파> 양 종파의 진영은 서로 대립하여 걸프 연안 헤게모니 쟁탈전이 심화 되고 있다. 두 종파는 또한 반미와 친미 노선으로 양립되고 있는 실정이다. 만일 사우디 아라비아 왕실 내부에서 과격 개혁파가 승리한다면 그 때는 이란, 시리아, 사우디 아라비아 세 나라가 모두 함께 뭉쳐서 시아파 수니파의 구별 없이 모두 단합하여 반미전선을 합동으로 구축하게 될것이 분명하다. 이때 미국은 당황하게 될것이다.

지금도 사우디 아라비아의 왕정을 반대하는 수니파 저항조직이 매월 100명 정도 이락을 비롯하여 아랍국가들로 밀입국하여 반미 저항투쟁을 벌이고 있다. 사실상 반미테러라는 표현 보다는 반미자주권을 쟁취하기 위한 저항세력이라는 묘사가 더 적절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미국은 사우디 왕정에게 테러를 수출한다고 맹비난을 퍼붓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 왕정은 미국의 대테러 전쟁을 위하여 협력해 주는 한편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반미 테러를 수출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지난 60년간 지속된 미국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동맹관계는 조금씩 균열구조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대외정책에 구멍이 뚫리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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