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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사회정의,정직을 좌우명으로 살아 온 강은홍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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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5-08 15:59 조회4,8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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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3시간 30분 내 차로 운전하여 왔습니다.” 뉴욕 시와 버팔로 중간쯤에
소재한 조그만 한 도시 ‘오위고’에서 지난 2일 뉴욕에서 열리는 반핵반전평화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달려온
강은홍 목사(75)의 말이다.그는 평소에 사회정의와 정직을 좌우명으로 살아 온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주위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정직한 목사”, “약속을 잘 지키는 목사”,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목사”로 평가해 왔다. 대담을
통해 그의 삶의 발자취를 듣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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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사회정의와 정직을 좌우명으로 살아 온 강은홍 목사




[뉴욕=민족통신 노길남 특파원] ”3시간 30분 내 차로 운전하여 왔습니다.” 뉴욕 시와 버팔로 중간쯤에 소재한 조그만 한 도시 ‘오위고’에서 지난 2일 뉴욕에서 열리는 반핵반전평화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달려온 강은홍 목사(75)의 말이다.

그는 뉴욕 다운타운 42가를 가득 메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평화운동가들과 정답게 대화를 나눈다. 특히 60여 나라에서 3천명의 평화운동 단체 대표들 가운데 무려 2천7백여 명이나 되는 일본 대표들과 만나 유창한 일본 말로 그들의 참가경위를 물으며 거리에서도 친교시간을 갖는다.

<##IMAGE##>일본 사람들은 “우리들은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투하된 미국의 원자폭탄을 맞아 처참한 시련을 겪었기 때문에 반핵반전에 대한 열기가 대단하다.”고 말한다. 이들이 손에 쥔 피케트에는 “No more Hirosima, No more Nagasaki, No more War!”라고 쓴 구호가 보인다. 이들은 또 “지난 4월5일 오끼나와의 미군을 철수하라고 촉구하는 시위에 9만여 명이 동원되었다.”고 전하면서 미국의 전쟁정책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이날 행사장에 참가한 이후 기자는 강은홍 목사에게 민족통신과의 대담시간을 요청했다.

기자는 강은홍 목사가 멀리서 평화시위에 참가한 것도 감명 받았지만 그는 평소에 사회정의와 정직을 좌우명으로 살아 온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주위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정직한 목사”, “약속을 잘 지키는 목사”,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목사”로 평가 받아 온 인물이기에 그의 삶의 발자취를 듣고 싶었다. 그의 삶의 발자취를 듣고 싶어 몇가지 질문을 던졌다.

1.강 은홍 목사님은 언제 어디서 태어 나셨나요?

[답변] 나는 1934년 9월 30일 생으로 평양출신 입니다.

2.그럼 언제 남녘으로 오셨나요?

[답변] 1950년 12월 4일 전쟁 통에 평양 대동강을 건너 잠시 피한다고 할 마음으로 가족들과 함께 우선 황해도 황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16살 때 부모님들과 3형제 동생 둘 모두 황주까지는 왔는데 여기서 2주 내지 한달 정도면 돌아 오겠지 하고 어머니와 동생 둘은 황주에 그냥 남아 있고 아버지와 나는 남하하여 이남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영영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 같은 사람들이 1천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3. 그러니까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은 어머니와 동생 둘이라는 말씀이죠?

[답변] 네, 어머니와 남동생 둘입니다.

4. 그러면 언제 미국에 오셨는지, 그리고 이곳에 오기 전에 남녘에서의 걸어 온 발자취도 듣고 싶습니다.

[답변]미국에 온 것은 1963년 6월이니까 벌써 47년이 되어 갑니다. 나는 이남 땅에 들어와 다시 남쪽으로 계속 내려 갔습니다. 1.4후퇴 서울을 떠나 대전까지 걷고 걸어서 갔습니다. 대전에서 국민방위군에 들어가 1953년 제대하고 나와서 미군부대 식당에서 요리사로도 일한적이 있습니다.

5. 분단 그리고 전쟁으로 친 혈육과도 떨어져 살게 되었군요. 그러면 학교는 어떻게 다녔는지도 듣고 싶습니다.

[답변] 서울서 한영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대학은 기독교 학교인 숭실 대학 영문과를 1960년 졸업하였습니다. 고등학생 때 기독학생회 여름 수양회에서 만나 인연이 된 선교사 쉘든 목사가 권유하여 안동에서 2년 동안 영어 선생을 하고 서울 보이스카우트 국제관계 일을 하다가 1963년에 도미하게 되였습니다.

6. 도미 후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오셨는지 말씀해 주세요.

[답변] 1963년 도미후 리치몬드(VA)에 소재한 유니온 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고 1966년에 졸업 바로 병원목회와 임상교육 (Clinical Pastoral Education) 을 받게 되었지요. 그리고 1967년에 미국연합장로교 워싱턴시 노회의(UPCUSA) 제6장로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 델러웨어에서 목회를 하고 1969년 1월 오하이오주 아데나(Adena) 제1장로교회 담임 목사로 백인들의 교회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1972년 6월에는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로 파송되어 대만에 가게 되었으나 국제정세로 가지 못하고 아프리카 콩고로 가게 되었습니다. 1973년 9월 프랑스에 가서 불어 공부를 1년하고 1974년 8월에 콩고로 갔습니다. 그곳에 가서는 불어로 신학강의, 임상목회 교육을 하다가 3년 후인 1977년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귀국했지요. 이듬해 인 1978년 8월에는 일본에 가서 일해달라는 선교부의 요청으로 일본에 가서 도꾜에서 1년 일본어 공부를 하고 후쿠오카에서 3년을 일하고 안식년으로 귀국하였습니다. 일본에서는 1982년까지 쿠마모도 교회을 담당하며 재일동포의 인권운동에 참여하여 지문철회 등 여러 가지 차별을 철폐하는 인권운동을 하였지요. 1978년부터 재일동포 인권운동 하면서 시청 현청 그리고 국무총리실까지 재일동포의 인권찾기를 했으나 별효과를 보지못하고 운동자료들을 집대성하여 영어로 번역하여 1979년부터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출하였는데 1981년 2월에 채택되어 일본정부의 대표가 심문을 받게되었고 한편 일본 외무성과 법무성에서 소동이 일어나고 급히 외국인 등록법을 개정하는등의 변화를 갖여 오게되었습니다.

그리고 1년 미국에 돌아와 안식년을 지내며 미국남장로교 총회본부 국내선교부에서 일하며 122년동안 갈라졌던 남-북장로교회가 재연합하는 1983년 총회 준비를 도우며망명생활 중이던 김대중선생을 총회 강사로 모셔오기도 했지요. 그때에 내가 신학 학사 학위 (BD) 를 받고 졸업한 유니온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 (D.Min) 를 맟혔습니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5년 동안은 도꾜에서 한인교회 목회와 인권운동 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미국에 돌아와서는 미국장로교 수도노회와 중대서양 대회의 간사로 1995년까지 일하고, 1996년 1월부터 미국장로교 동북대회 부총무로 사회정의 목회를담당 하고 일하다가 2001년에 은퇴하였습니다. 그리고 은퇴 이 후에도 교회 요청이 있어 2009년까지 미국교회 임시목사로 그리고 노회 임시총무로 일했지요.

7. 민주운동 혹은 통일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답변] 남한 민주화 운동은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동안에 기회가 없었고, 1977년에 재일대한기독교회에서 재일동포인권운동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장로교 선교사로 세계적인 인권운동과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접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조국통일 운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978년 친구인 양은식 박사가 북에 가서 혈육들을 만나고 돌아와 나의 어머니와 내 동생들이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전하여 알게 되어 1981년 3월 21일 해외동포원호위원회가 조직되어 그 첫 케이스로 내 가족을 만나게 되고 조국통일 운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1987년 또 다시 방북하고 1992년 다시 방북한 이래 거의 1년에 한번 내지 두번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워싱턴 디씨에서 일하게 된 1989년에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이 조직되기 시작할 때에 미국의 수도 워싱톤의 범민련 지역위원회를 조직하여 초대 위원장을 담당하고 그 이듬해인 1990년 역사적인 범민족대회에 참가하였고, 그 이후 범민련 유럽 회의 등에도 참가하였습니다. 그리고 재미동포전국연합회의 종교분과 위원장으로 그리고 6.15미국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8. 그 동안 인생에 가장 기쁜 일로 생각되는 추억이 있다면?

[답변] 여러 가지 기쁜 일들도 많습니다만, 아무래도 미국 온 이래 18년만인 1981년 방북 하여 혈육을 만나던 그 날의 감격과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80년대 말인가 아니면 90년대 초에 북의 한시혜 선생이 미국을 방문할 때 비자문제를 미국무성에 들어가 해결하여 줌으로써 한시해 대사가 미국에 들어 오게 된 것도 기쁨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9.그러면 그 동안 가장 가슴 아픈 일로 추억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답변] 제일 가슴 아픈 일은 북이 1995년 중반에 대홍수(큰 물난리)를 만나 가족들과 이북 동포들이 극심한 어려움을 겪을 때로 생각됩니다. 그 다음으로는 <재미동포전국연합회>가 분열된 사건을 목격하고 마음이 무척 아팠고 지금도 그 아픔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10. 재미동포전국연합회 내분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혹은 해법이 무엇이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답변] 글쎄요. 회장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 사태가 풀리지 않겠어요. 몇 사람들 이야기 하는걸 보면 윤길상 목사가 지금 사퇴하든지 아니면 내년 1월 임기만료로 그만두면 일이 잘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그것도 두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동포연합 문제가 풀리려면 재정문제 해결, 제명처분 해제 등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이것을 할 수 있는 의지를 갖고 있는가 없는가도 잘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회장으로 있는 사람의 그릇에 의해 해결 될 수도 있고, 또는 안 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11. 그런데 윤길상 회장 중심으로 구성된 중집위서 비상대책위와의 협상의지가 전혀 없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한 대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IMAGE##>[답변] 나는 제적당하지 않은 사람으로 지난 1월 임시총회에 참석하여 내 나름대로 윤길상 측에 제안한바 있지만 작년 총회 때 윤길상 회장 집행부 측은 재정보고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 문제는 윤 회장은 자기들 대로 재정 처리했다고 말하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정보고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감사들이 총회에서 선거로 되었는데 이 사람들 2명을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제명 처분해 버렸습니다. 이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이 문제 때문에 결국 비상대책위원회가 생긴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제명이라는 방법으로 처리한 것은 윤리적 차원 뿐만 아니라 법적 차원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재미동포전국연합회가 올바른 길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8명을 또 제명했고, 동포연합을 위해 도와 달라고 부탁 받은 사람까지 제명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에 대하여 법적인 문제를 초월해서 제안한다면 부당하게 제적 당한 사람들을 해제하고 분열된 조직을 하나로 되는데 윤길상 회장이나 집행부가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앞으로 일어 날 수 있는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윤 회장은 이 문제를 계속해서 방관하고 가볍게 본다면 어떤 일들이 발생할지 예상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어 빠른 시간에 문제를 푸는 자세로 전환하기를 바랍니다. 내 생각에는 마음만 먹으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12.강은홍 목사님이 생각할 때 재미동포전국연합회의 회장이 갖춰야 할 회장의 자세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답변] 우선 재미동포전국연합회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단체로서 회원들은 대부분 미국시민들입니다. 이 단체의 회장은 인격적으로 정직 청렴하고 신실하며 동지를 사랑하며 아낄줄하는 민족의 지도자의 자질을 갖인사람이라야 할것입니다. 미주동포들의 입장에서 일하여야 합니다. 물론 우리 단체의 강령에는 여러 가지 목적들이 있습니다. 동포들의 권익을 위하여 그리고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여하는 역할 등이 있습니다.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1972년 7.4공동성명에 나타난 3대 원칙처럼 민족자주의 원칙, 평화통일의 원칙, 민족대단결의 원칙에서 사업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단체 지도자는 회원들이 전부 미주동포이기 때문에 미주동포 회원들의 뜻을 수렴하여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특히 미주동포들로 구성된 단체이기 때문에 남과 북을 하나의 조국으로 생각하는 자세를 견지하여 남과 북이 하나의 조국, 즉 통일조국으로 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하는데 앞장서서 이끌 수 있는 자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일지라도 혼자 끌고 나가면 탈이 나기 때문에 원로들, 중심인물들의 의견들을 두루 수렴하여 모두가 합의하는 일들 주로 정책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입장과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13.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

[답변] 무엇보다 조국통일이 하루 속히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이나 북이나 해외동포들이 모두 통일조국을 이루어 떳떳하게 살수 있는 그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모두는 그것을 위하여 다 함께 마음을 합치고 서로 격려하며 통일을 앞당길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14.가족관계

[답변] 부인 1남 2녀를 두고 있습니다. 아들은 목사, 큰 딸은 변호사이고, 막내딸은 자선 사업가이고, 그 사위는 변호사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들과 며느리 사이에 두 손녀가 있습니다.


*오늘 대담을 위해 귀한 시간을 내주시어 감사드립니다.

<강은홍 목사>의 연락처:

759 Ivory Foster Rd,
Owego New York
NY13827

*전화:607-687-7811
edkang3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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