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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강대국들에 의해 수난 받아온 중동의 <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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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4-28 13:19 조회4,2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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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그 동안 제3세계 나라들이 강대국들에 의해 핍박을 받아 온
지구촌의 나라들을 연구하여 고찰했다. 이번에는 47번째 나라로<시리아>를 다뤘다. 그는 논문을 통해
"시리아 아랍공화국은 레바논과 함께 아랍부흥운동의 발상지이다. 이 나라는 지리적으로 레바논,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나라로서 그 동안 프랑스 식민지로 30년 고통을 받아왔고, 독립된 이후에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1967년 시리아의 땅, <골란 고원>을 강제로 탈취한 것을 되찾는
데 국력을 집중시키고 있다"면서 이 나라를 포함하여 중동지역의 나라들이 고통받고 있는 역사를 소개했다.
전문을 싣는다.[민족통신 편집실]


[기획]강대국들에 의해 수난 받아온 중동의 <시리아>

이스라엘과 강대국들의 횡포가 이 지역문제의 본질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IMAGE##> 시리아 아랍공화국은 레바논과 함께 아랍부흥운동의 발상지이다. 이 나라는 지리적으로 레바논,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나라로서 그 동안 프랑스 식민지로 30년 고통을 받아왔고, 독립된 이후에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이 1967년 시리아의 땅, <골란 고원>을 강제로 탈취한 것을 되찾는 데 국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사실상 중동문제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스라엘 횡포와 강대국들의 불공평한 이스라엘 지원으로 인한 분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1차 중동전쟁(1948년-팔에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제2차 중동전쟁(1956년 시나이 전쟁이라고도 함-수에즈 운하 문제로 영국-프랑스-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충돌), 제3차 중동전쟁(1967년-이스라엘과 이집트-시리아-요르단-이라크 간 분쟁), 제4차 중동전쟁(1973년 10월5일 이집트의 이스라엘 선제공격으로 거의 파멸시켰으나 미국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실패)을 통해서도 이 지역 문제의 근원은 이스라엘과 일부 강대국들의 부당한 지원이 문제가 되어 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시리아 문제도 그 중의 하나가 된다.

시리아 인구는 1,931만 명(2007년 현재)이며 수도는 다마스커스, 언어는 88%가 아랍어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커디쉬 6%, 그리고 알메니아어, 아람어 및 프랑스, 영어 사용인구가 소수로 나타나 있다. 종교는 이슬람(수니파)가 74%로 압도적이며 이슬람이지만 다른 파(Alawite, Druze 및 기타)가 16%, 기독교 및 기타가 10%로 각각 집계되고 있다. 인구분포도는 아랍인 90.3%이고 크루드인, 알메니아인 등이 9.7%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서방언론에 의해 세뇌되어 <시리아>라는 이름만 들어도 헤즈블라와 하마스를 지원해 주고 있는 이른바 <테로리스트 나라>라고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세계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강대국들의 세뇌공작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시리아>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1971년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미국, 영국 등의 간섭으로 수난을 겪어 왔다. 다행히 하피드 알 아사드 대통령의 30년 철권통치로 주권국으로서 자기 위치를 찾으려고 노력해 왔고, 2000년부터는 그의 아들 바사르가 시리아의 주권을 강조하면서 자주노선을 유지해 왔다. 아사드 대통령은 미국의 압력에 조금도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고 처음부터 시리아의 자주와 자립의 사회주의적 노선을 개척하고 지금까지 지켜 오고 있다.
시리아는 그 당시 이스라엘의 불법적인 팔레스틴 침략에 대항하여 강력히 투쟁했으며 그리고 팔레스타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수백만의 난민들을 따듯하게 품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시리아는 미국에 의한 경제적 봉쇄를 수 십년 동안 당하면서도 주권을 보호하고 있는 나라로 평가 받고 있다.

2000년 6월에 서거한 하피즈 알 아사드 대통령의 둘째 아들인 바샤르 알 사다드는 비교적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유명한 안과의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 형이 교통사고로 죽는 바람에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전문직에 종사 하던 지식인으로서 정권을 잡은 바샤르 대통령은 오늘 세계를 향한 현대적 시리아를 만들어 가는데 정성을 쏟고 있다.

시리아 문제를 포함한 중동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과 서방세계의 인식은 매우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국제사회의 대부분 정보가 미국언론과 서방언론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어 왔다. 이 때문에 우리가 듣는 중동과 이슬람 나라들에 대한 소식은 항상 테러와 분쟁을 일으키는 악순환의 반복뿐이었고 평화로운 그들의 삶의 모습은 접하기가 어려웠다. 오직 이스라엘과 아랍인들이 철천지 원수처럼 서로 싸운다는 소식뿐 이었다.

돌이켜 보면, 2000여년 넘게 평화롭게 살던 중동지역에 1948년에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 이 막강한 무력으로 쳐들어와 남의 나라 땅을 불법적으로 빼앗아 이곳에 이스라엘을 건국하면서 400만 명을 난민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팔레스타인의 비극이며 중동문제의 본질이다.

그렇게 때문에 중동과 이슬람 세계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나라들의 정권은 자국의 민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중동과 이슬람나라들의 민중은 이슬람 종교의 전통과 이슬람 역사의 특성에 근거한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존엄성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데 비롯된다고 진단된다.

시리아를 둘러싸고 있는 이스라엘, 팔레스틴, 레바논, 요르단 등 4개 나라들은 항상 긴장과 적대관계에 처해 있는데 이 지역은 미국의 지배영향이 있기 전까지는 줄 곳 시리아의 영토에 속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중동지역 강점과 미국의 중동지역 개입으로 중동지역의 평화는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시리아는 일찍이 로마 제국 전성기와 비잔틴 제국의 통치시대를 거치면서 1453년까지 동서 기독교 문명 하에서 제국주의 통치를 받았다. 그리고 1453년 이후부터 오트만 제국의 침략을 받으며 이번에는 이슬람 시대를 맞이했다. 시리아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에서는 이슬람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18년까지 455년 동안 이슬람 종교를 신봉 하는 나라가 되었다.

시리아는 1918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기에는 불행하게도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 고통을 받았으나 28년 동안 반프랑스 항쟁을 전개한 결과 1946년에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고, 역사상 최초로 문민정부를 창설하여 현대적 독립국으로 나서게 되었다.

나는 시리아의 이 같은 모습을 보며 사다드 대통령이 신생국 시리아를 신약성경 사도시대에 등장한 안디옥 초대교회의 <사회주의적 원형>의 모습을 그대로 실현하여 이 나라를 <사회주의 나라>로 창건한 것은 중동지역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깊은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게 된다.

하지만 미국의 보수주의 기도교 신자로 자처하는 부시 대통령은 이와같은 원시적 기독교 모습의 깊은 의미가 있는 시리아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리아를 <악의 세력>으로 간주하며 적대적인 관계로 대응했었다.

이것은 부시 대통령이 기독교적 자질을 전혀 갖추지 못한 자가당착적인 태도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또 부시 대통령이 시리아의 숨겨진 보화의 역사성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것을 말해주었다.

1. 시리아의 간추린 고대역사



시리아의 역사는 기원전(BC) 3000년 무렵 셈족계통의 아모리인과 가나안인들이 이 땅에 정착하면서 시작 되었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를 형성하여 알파벧을 발명했고 지중해를 무대로 국제무역에 종사했다.

시리아의 위치는 북쪽 터키고원과 남쪽 아라비아반도와 만나는 지대이고 지중해와 접해 있어 동서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서 아사아와 연결한다. BC 16세기에 이집트와 히타이트에 의해 점령당했고 11-10세기에 셈족계의 아랍인들과 히브리인들이 왕국을 건설 했으나 8세기에 앗시리아 침략으로 망했다.

그 후부터 시리아는 바밸론, 페르시아 제국, 알렉산더 대왕 등 강대국들의 지배를 차레로 받으면서 이 지역을 둘러싼 패권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BC 300년에 셀레우코스 장군이 시리아를 정복하여 안디옥을 도읍으로 정하고 셀레우코스 왕조로 시작된 시리아 왕국을 창건했다.

2. 로마 및 비잔틴의 흥망성쇠와 이슬람 시대의 시리아



로마의 역사는 BC 600경에 제국의 왕정으로 시작하였으며 3세기에는 공화정으로 발전하였고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여 통치했다. BC 27년부터 로마는 제국주의 군주국가로 발전하여 수 백년 동안 전성기를 이루었다.

시리아는 로마제국에 예속되어 동방군단의 주둔지로서 로마 제국의 군사기지의 역할을 하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로마제국은 한때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강대국이었다. 하지만 게르만족의 대 약진으로 인하여 AD 349년에 로마제국은 차츰 황페해 지면서 <서로마제국>과 <동로마,비잔 틴제국>으로 갈라져 둘로 양분되었다.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하지만 동로마, 비잔틴 제국은 1453년까지 존속했다. 동로마,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트 1세가 터키의 이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정하고 오스만 투르크에 의하여 멸망할 때까지 1,104년 동안 존속했다.

동로마, 비잔틴 제국은 제도상으로는 로마를 따라스나 언어와 문화 정치는 완전히 그리스적 이었다. 그리스 동방정교를 국교로 삼았고 그리스 고전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은 인문주의적 사상의 영향을 전 세계에 전파했다.

시리아는 동로마, 비잔틴 제국이 망할 때 까지 1,104년 동안 동로마제국의 영토가 되여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통치하에서 비잔틴 문화와 동방교회의 영향하에서 시리아는 피침략자의 운명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 운명은 또 다시 <이슬람시대>를 맞이했다. 그리고 비진틴 제국의 쇠퇴를 틈타 오스만 투르쿠 제국이 1453년에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수도 명칭을 <이스탄불>로 개칭했다.

오스만 제국은 셀림 1세 시대와 술레이만 1세 시대를 거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이뤘는데 시리아는 물론이고 이란과 아라비아 반도 모두를 정복하여 한 때는 아시아, 아프리카와 유럽 3개 대륙에 까지 오스만 제국의 군대를 주둔하고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다. 허지만 17세기 후반부터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공격을 받기 시작 하면서 쇠퇴기에 들어섰다. 그 동안 식민통치하의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오스만 제국의 완전한 패망으로 인하여 한때 번창했던 터키의 운명은 오늘 초라한 공화국의 모습으로 남아 있으면서 끝을 맺었다.

3. 제1차 세계대전과 시리아의 근대사



제1차 세계대전이 1914년에 시작되여 1918년 까지 4년 4개월 동안 계속 되었다. 이 전쟁의 주역은 <영국-프랑스> 대 <독일- 오스트리아>로서 이 싸움은 강적들간의 대결이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둘러리로 참전했다가 뒤로 물러섰고 이탈리아는 영국 편에 참전했고 오스만 제국은 독일 편으로 참전 했다. 이런 나라들은 자국의 이해타산과 강대국의 유혹과 강요에 의하여 할 수 없이 참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중에 비밀협정을 3번이나 맺으면서 강대국의 욕심과 불법적인 행세를 감행하고 있었다. 영국이 프랑스와 3번 맺은 비밀협정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1916년 5월 9일에 영국-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을 맺었다. 이 비밀 협정은 오스만 제국이 망한 후에 프랑스와 영국이 시리아,레바논, 이락등 지중해 연안국들과 그리고 러시아와 인접한 지역을 분할하여 두 나 라가 통치를 한다 라는 비밀협정이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가 공동으로 관리를 한다.

2. 1915-1916년에 <맥마흔 선언> 비밀문서이다. 이 문서는 10여 차례에 걸처 전시외교정책으로 발송된 문건이다. 그 내용은 아랍인들이 제1차대전에 영국편에 서서 참전을 하면 그 대가로 아랍국가들의 독립을 보장한다라는 내용의 약속이었다. 아랍국가들을 전쟁에 끌어 드리기 위한 술책이었다.

3. 1917년에 발표한 영국의 외무장관의 비밀 <벨푸어 선언>이 또 있다. 이 비밀 선언은 앞으로 팔레스틴 땅을 강점하여 그 곳에 이스라엘 국가를 창설한다는 약속의 비밀선언이다. 이 선언이 바로 중동전쟁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팔레스타인 민중 400만 명이 갑자기 실향민이 되는 비밀협정 이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서 미국을 제1차 세계대전에 끌어 들이기 위한 영국과 프랑스는 고등 술책을 사용 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하기 위하여 아랍세계와 미국을 전쟁에 참전하도록 모든 수단과 방법을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과 아랍 나라들이 영국의 유혹과 강요에 의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오스만 제국을 패망시켰다. 오스만 터키제국이 중동지역을 침략하여 수 백년 동안 지배하고 있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인하여 끝나고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면 아랍인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기여한 공헌에 대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아랍인들에게 제공한 보답은 무엇이었나?

영국은 <벨푸어 비밀 선언>을 그대로 실행하여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을 4 차에 걸쳐 100만 명 이상을 유럽에서 이주시켰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갑자기 고향 땅에서 추방을 강행했다. 그리고 영국은 팔레리스타인 땅에 신생 이스라엘 나라를 건국하는데 열중하고 있었고, 프랑스도 역시 영국과 비밀로 맺은 약속대로 시리아를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환시
키는데 적극적 이었다. 프랑스 점령군은 시리아에 강제로 주둔하여 식민통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것이 영국과 프랑스가 아랍인들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시키고 그에 대하여 아랍인들에게 제공한 보답의 전부였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 시리아를 강점하여 식민통치를 시작했는데 1925년에 프랑스는 식민통치를 용이하게 만들기 위하여 시리아를 4등분으로 분할시켜 통치했다. 이때 프랑스는 레바논과 시리아를 또 분리시켜 놓았다. 분열시켜 정복한다는 논리가 여기에서도 구체적으로 적용되었다.

프랑스 식민통치의 첫 10여 년은 친서방 부유층의 귀족정치를 유지했다. 하지만 중산층과 서민층의 불만이 출현하기 시작하여 민족주의 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쿠테타가 빈번히 발생하여 국가질서는 어지럽게 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1925-6년에 시리아 민중의 반프랑스 폭동과 반란이 일어 났는데 프랑스는 폭동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다마스쿠스를 폭격했다.

프랑스는 1932년에 최초로 시리아 의회선거를 실시했는데 극히 형식적 이었으며 선거의 내막은 프랑스에 의하여 정해 놓은 후보자를 뽑는 의회선거 뿐 이였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는 시리아의 영토인 알렉산드레타 주를 터키에 넘겨 줌으로써 시리아의 영토를 분할했다. 프랑스 당국자들은 말로는 시리아의 자치정권을 허용한다고 몇 번이고 약속했지만 실현되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6년에 가서야 프랑스는 완전히 시리아를 떠나 갔다.

4. 시리아의 독립과 사다드 대통령의 사회주의 국가건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 됨으로 프랑스는 시리아를 떠나 갔고 1946년 4월 1일에 시리아는 독립을 성취했다. 그 후 1955년에 영국과 미국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이른바 <바그다드 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은 소련의 중동진출을 막기 위하여 중동국가들간에 맺은 조약이 되었다. 따라서 이 조약에 의하여 1958년에 시리아와 이집트 두 나라는 <아랍 연합공화국>을 창건 하여 단일 국가를 형성했다.

하지만 두 나라가 통합한 <아랍 연합공화당>은 사회주의적 바트당과 부르주아지 인민당 과의 충돌로 인하여 오래 가지 못하고 1961년에 시리아는 연합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시리아와 이집트는 또 다시 각각 독립국가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후 1963년에 시리아는 바드당이 쿠테타에 성공하여 사회주의 노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이스라엘을 적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도 증오하는 반미적 정권으로 되었다.

영국과 미국은 이스라엘을 옹호하면서 배후에서 조정하는 역할로 중동 나라들을 간섭해 왔다. 그 결과로 중동전쟁이 1948-67년 사이에 3번이나 발생되었다. 제3차 중동전쟁(1967년) 때 시리아는 <골란 고원>을 이스라엘의 침략으로 빼앗겼다. 시리아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게 되는 시기가 바로 이때부터이며 오늘도 빼앗긴 <골란 고원>을 되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 후 1970년 하피즈 알 사다드가 반미 무혈 쿠테타를 일으켜 시리아의 정권을 장악 했다. 그는 아랍 민족주의를 내걸고 정권을 강화했다. 이 사건을 일으킨 사다드는 1955년에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사회주의 바트당에 가입하여 정치활동을 했고, 그 업적을 인정받아 공군 사령관과 국방장관을 역임하게 되었다.

무혈 쿠테타에 성공한 아사드는 1971년 3월에 실시한 총선에서 전국 국민 99.2%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사다드 대통령은 <인민, 민주,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는 157조의 신 헌법을 채택하여 집권 초기에 정권의 안정을 이뤘다. 그리고 1973년에 소련의 원조로 유프라테스 댐 제1기 공사를 완성하는 등 경제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으며 내정을 순조롭게 안정시키면서 대외적으로도 통치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집권 초기부터 중동정세가 매우 유동적이었으며, 73년에 제4차 중동전쟁이 발생했고 75년에는 레바논 전쟁에 개입했다. 1978년에는 이스라엘-이집트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인하여 이집트가 친미로 전향한 데 대하여 크게 분개하며 아랍세계에서 반이집트 운동의 선봉에 설 뿐만 아니라 친소경향으로 돌아서기 시작 했다.

사다드 대통령은 아랍 민족주의를 내걸고 <이스라엘-아랍간의 적대구도>를 이끌어 온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는 항상 아랍세계의 단결을 외치면서 반미와 동시에 반이스라엘에 대한 강경정책을 한평생 변함없이 고수해왔다.

사다드 대통령의 정치적 체제는 <사회주의 인민 민주주의 국가> 이다. 그는 사회주의경제에 의한 국가 건설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으나 헌법을 통해 이슬람교를 우대하는 정책으로 강조했다. 정당은 바스당을 중심으로 4개당이 결집한 <민족진보전선>을 형성하여 강한 민족주의 정치로 30년 동안 일관했다.

사다드 대통령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에 빼앗긴 <골란 고원>을 되 찿기 위하여 반환협상을 줄곧 벌여왔으나 사실상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00년 6 월에 서거 했다.

시리아를 30년 통치해 온 아버지 하페즈 알 사다드 전 대통령은 장남인 바실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하지만 바실이 1994년에 교통사고로 불행하게 숨짐으로 차남인 바샤르가 대신하여 후계자가 되었다.

안과의사로 서방에서 교육받은 바샤르는 군에 입대하여 대권수업을 받고 대령으로 예편한 후 2000년 6월에 아버지 후계자로 35세 나이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이어 2007년에 5월에 재선에 성공하여 현재 제2기 집권을 하고 있다. 영어와 불어에 능통한 바샤르 대통령은 정치범 석방, 언론 통제완화, 일부 시장경제 도입 등으로 실용정책을 추진하여 나름대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편드는 미국과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으며 또한 레바논 문제로 인하여 서방과 정면 대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테러지원국으로 지목 받는 불안한 요소들을 갖고 있는 상황이다.

바샤르 대통령의 실용정책은 일부 계층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실제로 시리아의 <민족 민주 사회주의 노선>의 후퇴의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닌 것으로 진단되고 있다. .

최근 일간 에디오트 신문 보도에 의하면 바샤르 대통령은 <시리아가 이스라엘과 직접 협상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1967년에 빼앗긴 골란 고원을 돌려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전의 국경선으로 무조건 철수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미국에게 <미국은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협상을 적극 지원해야 할 책임이 있다>라고 지적하며 미국의 간섭정책으로 일어난 사태에 대하여 책임을 묻는 입장과 자세도 보였다.

5. 이스라엘-시리아-팔레스타인의 분쟁 그리고 영국과 미국



<만일 당신의 집에 어떤 사람이 찾아 와서 당신의 집 절반이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 라고 통고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말은 1947년에 유엔이 팔레스타인에게 몇 백년 동안 살던 집의 51%를 내놓으라고 명령한 것이 부당한 것이라는 뜻이다.

영국과 미국이 중심이 된 유엔은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어 팔레스타인 민중 400만 명을 갑자기 땅과 집을 빼앗고 난민이 되게 만들었다. 그 누가 이런 명령을 받아 들일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들은 강대국 미국과 영국의 논리와 지원에 의해 자가 나라 땅을 이스라엘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 후에 팔레스타인들은 빼앗긴 집을 되찾기 위하여 싸움을 하다가 오히려 남은 집 절반 마저 모두 다 빼앗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중동의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그 동안 세계적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었고, 그 분쟁의 후유증으로 오늘 날에도 중동지역 분쟁은 세계의 화약고가 되고 있다.

중동문제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로 얽힌 경제적 문제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단순히 종교 문제와 문화적 갈등문제로 풀이하는 것은 지극히 추상적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둘러 싸고 풀리지 않는 실타래와 같은 오늘의 중동 문제는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 간섭하는 강대국들에 의해 해결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 보다는 양심세력들로 구성된 제3세계 나라들에 의해 그 돌파구를 찾는 것이 해법이 될 것으로 보인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떠나 중동지역에서의 이스라엘-시리아 갈등은 또 어떤 문제인가? 1967년 6월에 제3차 중동전쟁이 발생 했는데 그때 이스라엘이 시리아의 골란 고원을 탈취 했다. 골란 고원을 빼앗긴 시리아는 그것을 되찾으려고 대이스라엘 공세를 강화해 왔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을 빼앗고 그들의 신생국을 건국한 후 증가하는 인구를 위하여 더 넓은 땅이 필요 했다. 더 넓은 영토를 얻기 위하여 제3차 중동전쟁 때 시리아에서 <골란 고원>을 불법적으로 탈취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강점한 골란 고원에다 1981년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1993년 까지 모두 33개의 정착촌을 건설했다. 이스라엘이 골란 고원을 절대로 시리아에게 되돌려 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은 골란 고원을 되돌려 주지 않으려고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후원을 등에 업고 결사적으로 싸우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강제로 빼앗은 시리아 땅에 불법적으로 건설한 33개 정착촌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이것도 보다 더 큰 욕심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욕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골란 고원에 이스라엘에게 생명수 물을 공급해 주는 수자원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스라엘은 필요한 물의 30%를 <골란 고원>에서 공급받고 있다. 만일 이스라엘이 골란 고원을 시리아에게 되돌려 준다면 당장 물 공급의 30%를 어딘가에서 마련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골란 고원의 문제는 시리아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모두 중요한 사안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체면이나 상식도 무시하고 시리아 땅을 강제로 빼앗고도 조금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날강도 짓을 하고도 부끄럼조차 없는 자세를 보여 온 것이 이스라엘 당국이다.

시리아로서는 어떻게 하든 빼앗긴 영토를 되 찾아야 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미국과 영국 등 일부 강대국들은 이스라엘 편을 들어 강탈한 땅을 당연한 것으로 눈감아 주고 있는 형국이다. 사실상 이러한 문제의 책임은 미국과 영국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미국 정부는 아버지 부시 때부터 클린턴과 아들 부시 그리고 오늘의 오바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리아에 대한 정책은 민주당과 공화당을 막론하고 오로지 <네오콘의 공포 전략> 뿐이었다. 미 당국은 시리아에 대하여 보상이 없는<공짜 경품>을 계속 난발했으며 한편으로는 오바마 정권하에서 시리아가 미국에 대하여 고분고분하게 행동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미국 지배세력들은 그 동안 이라크 다음으로 시리아를 공격하여 지배하려고 구상해 온 것 같다. 미 당국자들은 지금까지 나라의 땅을 억울하게 빼앗긴 시리아에게 동정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간섭과 지배를 하려고 주권을 침해하는 발언들을 남발해 왔다. 그 중 주요한 발언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시리아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를 도와주지 말고 손을 떼라.
… 시리아는 시리아에 체류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망명정부 하마스와 단절하라
… 시리아는 알카에다와의 연계를 끊으라.
…시리아는 레바논에서 활동하는 반이스라엘 헤즈불라를 지원하지 말라
…시리아는 레바논 내전에 개입하여 이슬람을 도와주지 말라.
…시리아는 이라크에 유입되는 외국무장 세력을 적극 대처하여 막으라.
…시리아는 이란과 비밀관계를 끊으라
…시리아는 핵무기에 대하여 꿈도 꾸지 말며 화학무기 생산확대를 중단하라.
…시리아는 핵 활동과 미사일 기지 건설을 중지하라
…시리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핵무기 의혹을 청산하고 연계를 끊으라

그런데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의 시대에 들어와서 미국과 시리아 사이에 <어떤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는가?> 생각 되는 점들도 보이고 있어 이를 바라보는 중동나라들의 표정은 반신반의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9년 3월에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취임 후 첫 중동 방문길에서 펠트먼을 미국의 특사로 시리아에 파견했다. 미국이 지난 2005년에 시리아와 외교단절을 선언한 후에 펠트먼 특사의 파견은 단절된 외교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뜻으로 해석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2010년 2월에는 미국 상원 외교관계 위원장 존 케리가 시리아를 방문하여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을 직접 만나 미국과 시리아의 관계개선 문제를 토의 했다고 로이터와 시엔엔 등이 보도했다.

이에 대해 시리아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바샤르 대통령의 반응은 <미국과 조건 없는 대화를 희망한다>는 것이었다. 바샤르 대통령은 미국과의 대화를 원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반드시 어떤 전제조건이 없어야만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입장도 분명히 밝혔다.

바샤르 대통령은 시리아 테레비죤 방송을 통하여 발표한 성명에서 면담한 미국 관리들의 그 이름은 밝히지 않으면서 <오바마 대통령이 보낸 관리들과 만나 미국으로부터 긍정적인 신호가 보이기는 했지만 우리는 신중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라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바샤르 대통령에게 분명히 보여 주어야 할 것은 상호주권을 존중한다는 메시지이다. 과거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취한 대 시리아 압력 같은 것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여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 없이는 바샤르 대통령에게 그 어떤 전향적인 자세를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분석되었다.

시리아가 항상 부르짖어 온 대미정책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미국과의 대결이 아니라 대화이다>라는 것이 기조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슬람 종파들의 분쟁이 미국에 유리하게 작용하도록 분열공작을 일삼아 왔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서 시리아 국민들은 거의 주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글을 끝 맺으며


꾀 오래된 기억이지만 필자와 아주 가까이 지내던 불교계의 한 친구는 나에게 대답하기 매우 곤란한 질문을 했다. 그는 <단일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구약성경에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데 어찌하여 서로 세 종교가 피투성이로 싸우는가?>라는 물음이었다.

나는 이번에 시리아의 역사를 살펴 보면서 신구약 성경을 모르고는 시리아를 바로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불교계의 그 친구가 던진 질문이 더욱 실감나게 된다. 그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에 평양을 방문했던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에게 <외화를 위해 시리아에게 미사일을 판매하고 있는데 만일 미국이 보상해 준다면 미사일 프로그램을 중단 할 것이다> 라고 대답한 그 말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된다.

영국의 <선데이 타임지>의 지난 4월15일자 보도가 내 눈길을 끌었다. 이 보도는 <시리아와 북한은 미국의 공동의 적 (악의 축) 으로 상정되고 있는데 두 나라의 군사력의 증강과 기술협력은 지난 20년간 더욱 높아지고 있으며, 시리아는 중동 최대의 미사일 발사대와 화학무기의 보유고를 높이게 되었다> 라고 밝혔다.

북조선의 김정일 위원장이 시리아 바샤르 대통령의 42세 생일을 축하하여 축전을 보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도 이러한 움직임이 무엇 때문에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시리아와 북조선은 1966년 7월25일 수교한 이래 양국의 관계는 서로 주권을 강조하면서 대외정책에서 민족자주권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긴다는 측면에서 공통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양국의 유대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긴밀한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민족자주권에 대하여 중시하지 않으며 강대국들에게 의존적 자세를 보여 온 남한과의 외교관계는 아직도 미수교국으로 남아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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