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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부처가 탄생한<네팔>도 외세에 시달려<br><br>"영국식민지로 100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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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4-14 23:09 조회3,5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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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이번에는 아시아의 나라 가운데 중국과 인도사이에 끼여 있는 나라,
<네팔>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이 나라도 영국 식민지로 100년동안 시달려 오다가 최근년에 들어서는 또 다시
미국에 의해 직간접적인 간섭과 영향을 받고 있어 네팔 민중들의 향후 움직임이 주목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필자는 그 동안 강대국들에 압박받아 온 46개 나라들을 연구하여 발표해 왔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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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부처가 탄생한 <네팔>도 외세에 시달려

"영국식민지로 100년, 지금은 또 미국이 간섭"



<##IMAGE##>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이번에는 아시아의 나라 가운데 중국과 인도사이에 끼여 있는 나라, <네팔>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이 나라도 영국 식민지로 100년동안 시달려 오다가 최근년에 들어서는 또 다시 미국에 의해 직간접적인 간섭과 영향을 받고 있어 네팔 민중들의 향후 움직임이 주목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필자는 그 동안 강대국들에 압박받아 온 46개 나라들을 연구하여 발표해 왔다.[민족통신 편집실]



히말라야 10대 최고봉 8개를 거느린 석가탄생의 나라 <네팔>
중국과 인도, 영국과 미국이 네팔-내팔 잡아당기는 경쟁


네팔 정부는 북쪽에 있는 중국과 남쪽에 있는 인도에 끼어서 두 나라에 간섭을 받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해 오다가 영국의 침략을 받아 한 세기 동안 식민지 통치로 수난을 겪어 온 나라였지만 이 시대가 끝나자 또다시 미국에 의해 시달림을 받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나라이다. 미국은 네팔의 2만 명 공산반군을 239년의 왕정을 종식시킨 위대한 애국적 군대
로 보지 않고, 단지<테러 집단>으로 간주하고 있어 네팔 민중들로부터 반감을 사고 있다.

네팔은 특히 석가모니가 태어 난 나라로서 세상에 알려졌고, 그리고 히말라야 등 10대 최고봉 중 무려 8개를 소유한 높은 산악의 나라로서도 유명하다.네팔과 불교의 석가모니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과 외세침략 및 이와 관련된 국내 분파현상 등을 고찰해 보았다.

석가모니는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에 인도 동북부와 네팔에 할거한 16개 소 왕국 중의 하나인 카필라국의 태자로 태어났다. 석가족이 창건한 카필라 소 왕국은 인도와 중국 두 강대국 사이에 낀 아주 작은 나라였다.

석가모나가 태어난 카필라 소 왕국의 흔적은 남북으로 500m 동서로 450m쯤 되는 성벽의 터만이 희미하게 그 자취를 남기고 있을 뿐이다.

석가모니의 본명은 싯다르타이다. 싯다르타는 어느 날 소 왕국의 동문으로 나가 봤다. 그는 동문 밖에서 늙은이의 모습을 봤다. 그는 남문을 갔다. 그곳에서 병든 환자를 봤다. 그는 또 서문에서 사람의 시체를 처음 보았다.

싯다르타가 왕자로 태어나 29살 나이까지 인간이 나서 늙고 병들고 죽을 수 밖에 없는 괴로움이 왜 있는 가를 생각지 못했다. 이런 문제를 풀어줄 해답은 무엇일까?

싯다르타는 어느 날 북문에서 눈동자가 별처럼 빛나는 수행자를 만나 출가의 뜻을 굳혔던 것이다. 그렇게 싯다르타가 출가의 길을 떠났던 북문도 이제는 초라한 터의 흔적만 남아 있다.

네팔이 석가의 탄생국이라는 사실과 석가모니의 생을 전해 주는 카필라 소 왕국의 역사적 흔적들이 비록 흙더미와 잡초들에 덮여있다 할지라도 오늘까지 생생하게 전해 주는 흔적과 유물들이 있음으로써 세계 불교인들은 네팔을 동경하는 성지로 여기고 있다.

2600년이 지난 오늘 네팔에서 석가의 유적지는 하나의 추상적 관념에 불과한 돌기둥과 조각들만 나뒹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네팔 정부가 수 여하는<세계불교평화대상>을 한국불교 조계종 천불사 주지스님이 수상했으며 또 이어 두 번째로 석법산 총무원장이 그 평화대상을 수상했다. 이 <세계불교평화대상>은 달라이 라마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념하여 네팔정부가 제정한 대상이다. 인류의 구도의 길에 새겨진 하나의 불교적 이정표라고 가히 평가된다.

세계의 최고봉 에베레스트 꼭대기는 8850m이다. 세계 10대 최고봉 중에서 8개봉을 거느리고 있는 산악 국가가 바로 네팔이다. 네팔에는 만년 설에 덮여 있는 고봉들이 도대체 얼마나 있을까? 6000-7000m급 봉우리가 1,165개,7000-8000m급 봉우리가 127개나 있다. 그리고 8000m가 넘는 고봉들이 8개가 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듯 네팔에는 1,300개의 만년설 고봉들이 있지만 네팔정부가 입산을 허락한 고봉들은 고작 160개에 불과하다. 그리고 네팔정부가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6000m급 봉우리들이 수 없이 많이 있는데 네팔정부는 개발에 아주 미온적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네팔정부의 행정능력이 넓은 산악지역까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한 외국 원정대들이 봉우리 이름을 그들 마음대로 짖는 경우들이 종종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히말라야 고산준봉에 둘러싸인 네팔왕국은 사람보다 신이 더 많은 <신들의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풀이하는 사람들도 있다. 수많은 사원들이 산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오래된 거리의 곳곳에서도 신들의 모습들로 가득 차 있다.

네팔에는 3대 신이라고 불리우는 <브라호만신>, <비슈느신>, <사바신>이 대표적 신이며 그 외에도 수 없이 많은 신들이 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놀라운 것은 네팔에서는 석가모니도 <비슈느신>에 속하는 9번째 화신으로 대접 을 받고 있다.

네팔이라 하면 만년설의 히말라야가 떠오르고 그리고 반드시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라로 생각이 떠오른다.. 산악 국가인지라 산 중턱 곳곳에 집을 짓고 사는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여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길에서 만난 아이들은 변함없이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를 한다.

그러나 언제나 아름다운 곳으로만 생각했던 히말라야에서 뜻밖의 소식을 접할 때 네팔인들은 아마도 업보를 믿고 사는 사람들인가 여겨진다. 험난한 산맥에 길이 꽉 막힌 곳의 주민들은 식량난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네팔을 바로 알려면 그리스-로마의 신화보다 못지 않게 더 많은 흥미진진한 힌두 신화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네팔인들과 가슴을 열고 대화할 수 있다. 네팔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삶에 대하여 원망하지 않고 보다 긍적적으로 받아들이는 구도자의 모습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1.네팔의 간추린 고대 역사


네팔의 고대역사에 대한 기록은 BC 7,8세기 경에 이곳에 이주해 온 키라티족이 양치는 유목민으로 살았다는 것 외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BC 6세기에 네팔의 카필라 소 왕국 룸비니에서 석가모니가 탄생 했다. 석가모니가 입멸한지 3,4 세기가 지난 후에 이르러서 불타의 상징인 불사리를 모시는 솔탑파가 각지에 수없이 많이 건축되었다.

당시 인도의 아소카왕은 무력을 버리고 불교에 의한 통치를 하여 전국에 8만4천군데에다 불타의 분묘를 세웠는데 이것이 불교건축과 불교문화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AD 200년 경에 이르러서 불교 세력이 기울면서 카라티족 왕조의 종말이 왔다.

4세기에 북인도에서 릭챠비족이 쳐들어와서 힌두교와 카스트 제도를 네팔에 전 파했다. 네팔에 아직까지 힌두교와 더불어 남아 있는 고질적인 카스트 제도는 바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릭챠비 왕조가 끝난 후에 879년에 타쿠리 왕조가 들어섰다. 타쿠리 왕조의 등장으로 인하여 네팔에 어두운 암흑시대가 이어졌다. 하지만 카투만두 계곡의 전략적 유리한 위치 때문에 타쿠리 왕국은 몇 세기 동안 생존과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15-18세기에 아라데비 왕이 <말라왕조>를 창건했다. 말라 왕조는 번영을 누리면서 네팔의 문화적 르네상스의 시동을 걸었다. 이 시기에 네팔에는 대승불교를 비롯한 종교문화를 꽃피웠으며 많은 유서 깊은 사원들이 건축되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말라 왕조는 붕괴되었다. 구르카족의 나라얀 샤 1세가 네팔을 통일하고 지배하려는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샤 1세의 탁월한 전술과 지도하에 27년 동안의 전쟁은 샤1세가 승리했다. 패전한 말라 왕조의 영광은 끝나고 말았다.

샤 1세의 승리로 인하여 네팔은 1768년에 지금의 <네팔왕국>으로 독립을 쟁취 했다. 네팔의 고대역사는 이것으로 끝났다. 구루카족의 샤 1세가 네팔을 독립 왕국으로 선포함과 동시에 네팔은 카투만두를 네팔의 수도로 삼고 1768년을 샤 1세 왕조의 새로운 왕국의 기원으로 기록되었다.

카투만두를 왕국의 수도로 삼은 네팔의 영토는 우리 나라 한반도의 2/3 정도의 크기의 영토이다. 중국과 인도 두 나라 사이에 끼여 있는 4각형 모양의 국토는 역사적으로 두 나라 강대국들의 경쟁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

네팔 정부는 북쪽에 있는 중국과 남쪽에 있는 인도에 감염되지 않은 채 순수하게 살기를 원하고 있다. 인도와 중국의 끊임 없는 위협과 영국의 침략 속에서도 네팔은 독립국가의 맥락을 굳건히 이어 왔다.

2008년 현재 네팔의 인구는 3천만 명 이다. 네팔은 세계 유일의 힌두왕국으로 인구 85%가 힌두교 이며 힌두교를 국교로 삼았다. 불교는 8%, 이슬람교는 4%, 기독교는 3%로 구성되어 있다.

네팔에는 약60여개 종족들이 함께 조화를 잘 이루고 있지만 민족별로 구분하면 티벹과 몽골족 62%, 아리안족 35% 기타 3%로 구분된다.

네팔인들은 <자기자신의 팔>을 <네 팔> 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의 뜻은 무엇
인가? <네것 도 내것, 내것도 내것>이라는 뜻 아닌가? 하지만 오늘의 네팔은 불
행하게도 중국과 인도, 영국과 미국 등 강대국들이 서로 <네팔>을 <내팔>인양 강 제로 마구 잡아 당기고 있다.

2. 영국의 네팔 침략과 100년 쇄국정치


1768년에 유구한 역사상 처음으로 독립국이 된 구루카족의 샤 1세 왕국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영국의 침략의 손이 인도를 통하여 네팔의 신생 왕국에 까지 뻗치고 있었다.

구루카족의 샤 1세가 네팔의 독립을 선포한지 46년째 되는 1814년에 영국이 침략하여 이른바 네팔전쟁이 발발했다. 네팔의 샤 1세는 영국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인도의 토착세력과 중국 청나라와의 제휴를 시도 했다. 하지만 영국의 식민 지 확대 야욕의 세력을 막을 수 없었다.

1814-16년 네팔전쟁은 영국군 1만 6000명을 거느린 옥털로니 장군은 용맹스러운 구루카족의 샤 1세의 군대와 산지전을 벌린 끝에 승리했다. 패전한 네팔의 샤 1세 왕국은 영국과 강화조약을 맺고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영국의 주재관이 상주하도록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와 같이 혼란에 빠진 네팔 구루카족 샤 1세 왕국에 대하여 1846년 9월 14일에 <라나의 친영국 쿠테타>가 발생 했다. 이로 인하여 샤 1세의 왕권통치가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그 후 <라나> 가문 일족이 국정을 완전히 장악 하고 영국의 식민통치 하에서 반민족적 100년 동안 쇄국정치를 계속 했다.

라나가문 일족은 영국을 등에 업고 세계 2차대전이 종식하여 1947년에 영국이 네팔을 떠나 갈 때 까지 100년 동안 <종신 수상직>을 고수하면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네팔의 왕실은 <그저 이름뿐인 꼭두각시>가 되여 존속할 뿐 사실상 왕정은 폐지된 상태에서 명분만 유지하고 있었다.

네팔의 최고 권력자로 등장한 라나 일족은 교육의 길을 가로 막아 인구의 10%만 을 읽고 쓸 줄 알고 있을 뿐 90%를 완전히 문맹으로 만드는 폭정을 100년 동안 감행 했다. 라나 일족은 자신들의 호화로운 생활을 위하여 유럽식 궁전을 수 없이 많이 건축했는데 그 때 지었던 호화로운 궁전들이 현재 정부 청사나 호텔로 사용되고 있다.

라나 가문 일족이 영국을 등에 업고 <종신 수상직>을 고수하면서 폭정을 하고 있을 때 이름뿐인 꼭두각시 왕실에서는 왕족들 사이에서 음모와 암살 등 온갖 부정 부패가 계속되고 있었다. 권력을 잡은 라나 정권은 일부러 왕실을 피바다로 만드는 흉계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라나 가문 일족의 폭정이 오래 계속됨에 따라 폭정에 대한 반발심은 점점 더 거세게 일아 나기 시작했으며 1921년에 드디어 역사상 처음으로 반정부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 했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1947년에 영국이 떠나간 후에 네팔의 정국은 3개의 분파가 형성 되고 있었다.

첫째 분파. 영국의 식민통치와 라나 정권의 폭정이 100년 동안 계속 될 때 그 밑에서 그저 왕가의 이름만 유지하고 있던 왕가 식구들이 왕정을 다시 복귀하기 위하여 궐기하는 분파가 발생 했다. 이와 같은 왕정복귀운동에 군부와 보수주의 기득권 세력이 적극 합세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미국이 왕정복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지원하는 힘이였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어떻게 개입하고 지원을 했는가는 훗날에 낱낱이 밝혀 졌다. 인도 역시 미온적으로 왕정복귀를 원하고 있었다.

둘째 분파, 라나 정권이 100년 동안 영국을 등에 업고 독재 폭정을 헸지만 그 동안 쌓아 놓은 친정부 기득권 세력과 친 영국 세력들이 총 집결하여 권력을 계속 장악 하려는 분파가 버티고 있었다.

세째 분파, 라나 정권의 폭정과 영국 외세에 저항하여 싸우다 인도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망명 반체제 인사 코이랄라가 주도하는 민중운동 세력의 분파이다.

코이랄라는 왕정의 복귀를 결사 반대하면서 민주정권을 창설하기 위하여 민중의 힘을 통한 개혁 운동을 전개했다. 네팔에서 최초로 민주주의 또는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1959년에 네팔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 정당인 <네팔 의회당>이 등장하여 민중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기 시작
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모택동을 숭모하는 소위 마오이스트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하다가 1994년에 네팔 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위의 세 개의 분파들이 극렬 대립하면서 1950년대에서 2000년대에 이른 50년 동안 조용한 히말라야의 왕국 네팔은 격동의 시대를 맞고 있었다. 영국의 식민통치 100년으로 황폐화된 땅에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는 네팔의 역사는 또 다른 험난한 역사 속에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네팔의 이와 같은 험난한 역사는 8.15 해방 후 한반도의 역사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3. 미국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네팔


영국의 식민통치가 물러간 후에 네팔의 민중이 봉착한 험난한 과제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왕정복귀 세력을 제거해야 할 과제이다. 둘째는 정치적으로 부상한 마오이스트 네팔공산당을 육성해야 할 과제이다.

영국의 식민통치하에서 명목상으로 왕위에 있던 트리부반 왕은 왕정복귀를 위하여 인도의 후원을 요청하면서 인도 대사관에 망명신청을 하는 연극을 연출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인도에서 망명생활을 한바 있는 코이랄라는 <네팔 의회당>을 창당하여 사회주의 정치활동을 네팔 남부지방에서 맹렬히 전개하고 있었다.

인도의 암묵적 승인 하에서 트리부반 왕은 네팔에서 민주주의를 이행하겠다고 허위적 맹세를 하면서 왕위복귀를 호소하고 있었다. 사실상 그 당시 인도는 개혁주의가 등장하는 것 보다는 보수적 왕권이 복구되는 것을 더 바라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트리부반 왕은 네팔의 왕정제도를 회복하는데 성공했다.하지만 왕권을 획득한 트리부반 왕은 4년 후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아들 마헨드라가 왕위를 계승했다.왕위를 계승한 마헨드라 왕은 1959년 2월에 네팔 역사상 최초로 민주적 선거가 치뤄지게 했다. 민주적 선거를 통하여 네팔의 사회주의 성향의 <네팔 의회당>의 코이랄라가 수상이 당선되었다. 코이랄라는 반영국 반독재 투쟁을 하다 인도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반영 반독재 사회주의자였다.

네팔에 민주주의가 도입되어 의회가 창설되고 사회주의자가 수상으로 당선되는 큰 변화가 발생했다. 영국의 식민시대가 끝나고 네팔에 큰 변화기 발생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보다 더 큰 험난한 사회적 문제들이 만만치 않게 기다리고 있었다.

마헨드라 왕은 사회적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독재정치를 감행하기 시작했다. 군부와 보수주의 기득권 세력들이 왕권 복귀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나서면서 마헨드라 왕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마헨드라 왕은 1960년 12월 15일에 군대가 의회 의원들을 체포를 하도록 지시했고 또 의회를 전격 해산시켰다. 그리고 코이랄라 총리를 20년 동안 감옥에 투옥 시켰고 결국 그를 망명생활을 하도록 다시 추방 했다.

1962년에 마헨드라 왕은 <네팔에는 네팔에 맞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라는 괴변으로 이른바 <판차야트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 제도로 왕은 직접 수상과 내각 을 임명하여 정권을 구성했으며 국회의원 수도 상당수를 왕이 직접 지명했다.

네팔의 근대화를 어느 정도 추진하기는 했지만 독재를 강행한 마헨드라 왕은 1972년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 비렌드라가 왕위를 계승하여 1975년에 대관식을 올렸다.

비렌드라 왕의 통치가 계속되는 동안 왕에 대하여 불만을 품는 민중들의 분노는 네팔을 점점 내전상황으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비렌드라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하여 <입헌군주제도>를 허용하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때 비로서 새 정당들을 허용했는데 통일공산당, 네팔농민동맹, 인민전선 그리 고 네팔 좌파전선 등 사회주의 지향적 군소 정당들이 우후죽순처럼 발생 했다.

특기할 것은 이때 마오이스트 공산주의자들의 결집이 싻트기 시작 했으며 훗날에 <네팔공산당>으로 출현했다. 모택동의 이념을 추종하는 네팔의 공산주의자들의 정당이다. 이들은 목숨을 내 놓고 반군, 반외세와 네팔 왕실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민주화를 이루는 것이 이들의 행동 목표이었다.

<네팔공산당>은 벌써 네팔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삼고 전국에 인민전선을 확장하여 막강한 기동력으로 유격전을 펼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프라찬타는 네팔공산당의 창당자이며 또한 의장직을 맡고 있었다.

1975년에 대관식을 올린 비렌드라 왕은 선왕이 1962년에 제정한 판차야드제도를 통치의 발판으로 삼고 정권을 강화하려 했다. 하지만 백약이 무효로 정국은 날이 갈 수록 점점 더 극심한 데모와 폭동으로 위기에 빠져 들고 있었다.

비렌드라 왕은 할 수 없이 1980년에 국민투표로 헌법을 개정했고 1981년에는 총선을 실시 했다. 1987년에 극심한 반정부 운동을 탄압하여 정권의 안정을 시도 했으나 실패했다. 1990년에 비렌드라 왕은 할 수 없이 판차야드제도를 폐지할 것을 선포하고 복수정당제를 도입함과 동시에 국왕의 정치활동을 중지하겠
다고 발표 했다.

1991-94년에 실시한 총선에서 <네팔공산당> 단독정권이 발족되었다. 하지만 1997년 3월에는 정국이 혼란하여 네팔공산당과 3당의 연립정권이 구성 되였다.

2000년대에 들어와 극심한 정치적 곤경에 빠진 네팔 왕정이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을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인도와 중국은 거대한 코끼리이며 네팔은 그 사이에 끼여 있는 토끼로 묘사되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네팔에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한 나라는 인도였다.하지만 최근에는 티베트 문제가 대두될 때 마다 네팔은 중국을 고려하여 네팔 안에 있는 티베트인 문제에 대하여 냉담한 태도를 취해왔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유사시 네팔은 중국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극심한 곤경에 빠진 네팔의 비렌드라 왕은 친 중국 노선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면서 접근을 시도하고 있었다. 인도를 의식하는 중국은 네팔의 팔을 붙들어 주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네팔의 비렌드라 왕이 친중국 노선을 선택함으로써 <정권의 위기>를 면하려고 모색한 것은 그 모색 자체가 <정권의 위기>를 오히려 더 초래하는 것 임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누군가가 계략을 꾸며 친중국 노선을 모색하고 있는 비렌드라 왕을 속히 제거해야만 했다. 누군가란 도대체 누구일까? <누군가>로 단정되는 것은 바로 미국이 아니었던가?

2001년 6월1일에 네팔 왕실에서 대 참사가 벌어졌다. 네팔 왕가의 치트란 별장에서 함께 모여 즐거운 식사를 하고 있던 비렌드라 왕과 그의 직계 가족식구 8명 이 몰살하는 참사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도대체 어찌된 참사 사건인가?
이 참사에 대하여 공식발표와 비공식발표로 두 개의 사건의 경위 설이 존재한다. 하지만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이 거론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로서 정설이 되고 있다.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있다. <디펜드라>라고 이름하는 나이 30세 의 왕세자가 왕위세습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 8명 식구를 살해 했다는 것이다.

또 한 주장은 정적인 라나 일가 가문의 딸과 열렬한 연애 중에 있었는데 왕가의 정치적 이유 때문에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를 살해 했다고 한다.

어째던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지금까지 진행돼 오던 왕족과 공산주의 자들간에 대화가 무산되었고 정부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 했다.

<디펜드라> 왕세자는 술과 약을 먹고 한 손에는 M16을, 다른 손에는 우지소총을 들고 람보식으로 부모형제를 살해했다. 디펜드라 왕세자는 현장에서 자살을 시도 했으나 뇌사로 3일 후에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희대의 왕궁 잔혹비극 사건 경위 설명 발표에 대하여 적어도 네팔에서는 믿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발표된 사건의 경위에 대한 의혹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왕위 계승자 중의 하나인 숙부 캬난드라는 유독 사고 현장에 없었다는 것이다.평시에는 이런 별장에서의 저녁식사 때 라면 반드시 응당 숙부가 동석했다는 것이다. 그날 저녁 그는 어디에 있었을까?

이런 의문은 뉴욕의 9.11쌍둥이 건물의 테러사건 때 그날 유태인들은 모두 다 결근하여 죽음을 면했다고 하는 공공연한 비밀과 맥을 같이 하는 의문이다.

그리고 캬넨드라가 왕위에 등극한 후에 즉시 벌어진 미국과 네팔과의 관계는 절대로 참사와 무관하다고 말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 이다.

---캬넨드라가 왕위에 오르던 바로 그때 미 대사관에는 <네팔국방협력사무소>가 새로 신설되었다. …캬넨드라가 왕위에 오른지 두 달 안에 콜린 파월 국무장관이 친히 네팔 왕을 친선 방문했다.

---네팔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기 시작하면서 2천만 달러의 군사원조를 제공했다.네팔의 보안군을 3만5천명에서 10만 명으로 즉시 증강 시켰다.

---네팔의 마오이스트 공산군에 대한 토벌작전을 위하여 경찰이 아닌 군을 동원시키는 대대적인 작전을 새로 세웠다.

---네팔에 대한 군사지원을 증강하여 군부강화를 본격화 할 것을 캬넨드라 왕에게 약속했다.

그런데 여기에다 기름을 붓는 사건은 2001년 9월 11일 뉴욕 테로사건이었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이유 삼아 네팔 서부 산악지대에 근거지로 하고 있는 마오이스트 공산 반군을 대항하여 싸우도록 네랄 왕정 군에게 최신 무기를 지원하
기 시작했다.

결국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 삼아 네팔에서 왕정을 연장시키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네팔에서 왕정을 반대하면서 싸우는 애국적인 민주화 운동을 테로라
고 규정짓는 좋은 기회로 삼고 있었던 것으로 분석되었다.


4.세계의 지붕, 네팔에 민주화의 봄이 오다.


2001년 6월1일에 의문의 왕가 8명의 참사사건에서 유일하게 살아 남은 캬넨드라는 죽은 왕세자들의 숙부이다. 그는 즉시 왕위에 올라 앉고 미국의 적극적인 지지와 막대한 군사적 후원을 받으면서 집권을 시작했다.

캬넨드라 왕은 2002년 2월1일에 국영텔레비젼 방송에 갑자기 출연하여 그때 당 시 듀바 총리의 내각을 해임시켰다. 해임 이유는 마오이스트 공산반군을 제대로 진압시키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캬넨드라 왕은 향후3년간을 왕이 직접 국정을 관장하겠다고 비상사태를 선포 했다. 캬넨드라 왕은 정부의 주요기관에 군대를 배치하고 모든 언론들은 사전에 검열을 받도록 통제하여 독재정치를 재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캬넨드라 왕의 퇴진을 요구하고 민주화 투쟁을 벌리는 민중의 항쟁과 또한 마오이스트 반군의 투쟁은 하루도 쉬지 않고 전국적으로 맹렬하게 계속되었다.

캬넨드라 왕은 위기에 몰리면서 할 수 없이 2008년까지 반드시 민중이 요구하는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표명하면서 평정을 시도 했다. 하지만 민중의 거센 항쟁은 끝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2005년에 들어서서 네팔 인구의 80%는 이미 마오이스트 공산 반군의 수중에 있었다. 극심한 위기에 몰린 캬넨드라 왕정은 <왕정 쿠테타>를 스스로 일으켰다.스스로 왕정 쿠테타를 통해 의회 마저도 해산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왕정을 지지하던 중상층 까지도 캬넨드라 왕에게 등을 돌렸고 왕정의 본산지인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시민들도 왕정에 대한 저항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다. 캬넨드라 왕정을 반대하는 민중항쟁은 전국적으로 극에 달했다.

그때 당시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는 미국의 최신 군수물자로 무장한 10만의 왕정의 군인들이 버티고 있었다. 미국이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자초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2006년 4월에 네팔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는 마치 서울의 4.19 민주화 운동을 연상하게 하는 거국적 운동이었다. 캬낸드라 왕은 마치 이승만 대통령처럼 미국을 의지하여 정권을 유지할 수 없음을 분명히 시인했다.

2006년4월24일에 캬넨드라 왕은 대국민연설을 통하여 국왕의 왕권을 포기 할 것을 발표하고 해산시킨 의회를 다시 복원하고7개 정당을 연합하여 국무총리를 선출하도록 할 것을 선언했다. 드디어 네팔은 민주화의 가시적 시점에 이르렀다.

한편 마오이스트 공산군은 1994년에 프라찬다가 창설한 이후 오늘까지 버티면서 10년 동안 투쟁했다. 그 동안 무려 <10만3천여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내는 게릴라전을 이끌어 왔다. 하루 속히 내전을 끝내고 싶었던 욕망이 작용했다.

그러면 네팔 마오이스트들은 모택동의 교훈을 잊었던가? 모택동의 교훈은 무엇인가? 모택동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고 가르쳤다. 모택동은 선거에서는 절대로 평화가 튀어 나오지 않는다고 항상 교시했다.

하지만 어찌하랴. 2006년 11월21일에 마오이스트는 총을 내려놓고 평화협정을 선택했다. 85세 고령의 코이랄라 총리와 마오이스트 공산반군 지도자 프라찬타는 <네팔정부-공산 반군, 역사적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말았다.

물론 역사적인 평화협정은 캬넨드라 왕의 왕위를 폐위시키는데 큰 의미가 있었다.그리고 이 평화협정으로 인하여 앞으로 있을 <제헌의회 선거>를 위한 첫 발걸음을 재촉하는 뜻 깊은 역사적인 평화협정 이기도 했다.

2008년 4월에 네팔 역사상 최초의 <제헌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마오이스트 네팔공산당이 제1당이 되었다.마오이스트는 55개 정당들이 참여한 이번 의회선거에서 의석의 과반인 120석을 획득했고, 비례대표 약 30%의 지지율을 얻어 역시 1위를 차지했다. 전체 601석 가운데 총 220석을 확보 했다.

네팔 마오이스트 지도자 프라찬타는 1994년에 네팔 공산당을 창당 하였다. 그는 그의 정치노선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마르크스, 레닌, 마오주의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도그마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인민이 스스로 관리함으로써 부유한 자들이 선거를 좌지우지할 수 없는 21세기의 민주주의를 지향한다> 라고 밠혔다.

프라찬타는 국왕 처리문제에 대하여<국왕은 나라 밖으로 추방되거나 법정에 서야한다>라고 언명 했다. 네팔은 239년 왕정을 종식시켰다. 캬넨드라 왕은 2008년6월 12일까지 왕궁을 떠나 평민으로 살아야 했다.왕관을 정부에 반납해야만 했다. 왕실이 소유하고 있는 몰수된 토지는 523만여 평이며 왕궁은 박물관으로 지정되었다.

이 글을 끝맺으며,


239년의 왕정을 물리치고 민중항쟁의 승리를 획득한 네팔은 815 해방을 우리 한반도와 함께 맞이했다. 네팔을 세계 최빈국이라고 흉보는 일부 한국인들은 낮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겠다.

물론 네팔의 정치는 아직 해결해야만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의 본질은 공산반군 신생정부와 야당 간의 정치대결 문제 이다.왜 대결인가? 대결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야당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외신 뉴스에 의하면 2008년에 폐위되여 축출당한 캬넨드라 왕은 <왕정복고>를 고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누구를 믿고 그런 소리를 하고 있을까?

제1당으로 등장한 공산정권 이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상상을 깨고 제2당의 후보 자야다브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민주화 진행에 차질이 염려되고 있다.우선 프라찬타 초대 총리와 야타브 초대 대통령 사이에 대결이 발생하고 있다. 프라찬타 총리는 왕정종식 투쟁에 목숨을 내놓고 투쟁한 2만 명에 이르는 공산반군 대원들을 정규군에 편입시켜줄 것을 육군참모총장에게 지시했다.

하지만 육군참모총장은 이를 거부했다. 프라찬타 총리는 육군참모총장을 전격 해임 했으나 야타브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을 옹호하고 나섰다.

공산반군의 정규군 편입 문제를 대통령과 총리 사이의 불화 문제로만 단순히 볼 수 있는 문제가 절대로 아니다. 좀더 시야를 넓혀 깊이 보면 이 문제는 미국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다.

미국은 네팔의 2만 명 공산반군을 239년의 왕정을 종식시킨 위대한 애국적 군대로 보지 않는다. 미국은 공산반군을 오직 <테러 집단>으로 여기고 있다. 미국의 압력을 느끼고 있는 야타브 신임 초대 대통령은 처음부터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어느 나라에서도 미국의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는 단체나 군인들을 모두 다 무조건 <테러 집단>으로 낙인을 찍고 있다. 최근 네팔정부가 <하나의 중국>정책을 대중외교로 삼는데 대하여 미국은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다. 중국이 네팔을 접근하여 <내팔>로 만드는데 미국은 안절부절 하고 있다.

미국은 서방국가들을 동원하여 연합회를 조직하여 네팔정부가 티베트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하도록 독촉하는 결의를 했다

네팔의 수도 카프만두는 완전히 유엔(UN)에 점령당한 모양으로 유엔산하에 속한 많은 건물들과 외국 공관관저들이 줄을 있고 있다. 이들 건물 주위에는 바리게이트와 포대를 쌓고 수많은 무장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

카트만두의 전 시가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저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는 외국 은행과 상가의 영어간판들로 요란스럽고 화려하다. 서양의 한 도시를 보는 듯 하다. 아시아의 최빈국 이 땅 주인들의 삶과 너무 대조적이다.

마오이스트 공산당의 프라찬타 총리가 전격 사임한 후 그의 후임으로 2009년 5월 23일에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인 쿠마르가 제2대 국무총리로 취임을 했다. AFP 통신은 신임 쿠마르 총리를 <온건적 공산주의자>라고 회의적인 보도를 했다.

향후 공산주의 반군2만여명이 언제 네팔 정부의 정규군에 편입 될 지의 난제는 새로 취임한 온건주의 공산주의자 쿠마르 총리에게 지워지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네팔은 독립국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중국과 인도의 중간에 위치해 있으면서 지금은 영국이 아니라 미국의 직간접적인 간섭과 영향으로 시달림을 받고 있는 처지에서 있어 향후 네팔 민중들의 움직임이 주목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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