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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우리 민족의 자주투쟁사 100년을 돌아본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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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4-11 22:17 조회1,40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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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우리민족의 반미민족해방투쟁-2

우리민족 대 미국의 대결 100년사 -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박제민 한국민권연구소 연구위원


이번 연재에서는 한국전쟁 과정과 휴전협정 과정에서 우리민족과 미국이 각각 자신의 정치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했는가 하는 문제를 몇 가지 특징적 상황을 중심으로 약술하였습니다. 필자 주

<순서>
1. 미국의 전격적인 전쟁개입
1) 비상식적인 개입 결정
2) 유엔군복을 입은 미군
2. 미국의 식민지영구예속화 책동
1) 각종 협정을 통한 식민지예속의 군사적, 법적 담보 마련
2) 민족운동가 및 정치범 숙청
3) 악랄한 군사행동
3. 우리민족의 대응
1) 인민위원회와 각급 대중단체 재건
2) 토지개혁 단행
3) 유격투쟁
4. 휴전협정
5. 한국전쟁의 역사적 의의



1. 미국의 전격적인 전쟁개입

1) 비상식적인 개입 결정

“코리아 38선에서 일요일 새벽에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침공하여 왔음을 전함. 현지 시간 9시 30분의 보고로는 서울의 남한군 사령부에서 북쪽으로 65킬로로 거리에 있는 개성에서 남한군 제 1사단이 9시 경 격파되고, 웅진반도 남쪽 3, 4킬로에서 남한군이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음......(중략).....아직 단편적이고 불명확한 것임을 강조해 둠”(UP통신 6월25일자 서울발 통신 /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권 195쪽 재인용)

UP통신의 서울발 단편보도는 미국을 비롯한 이른바 자유세계에 한국전쟁의 발발소식을 전했다.
한국전쟁의 발발소식을 보고받은 워싱턴은 예상과 달리 비교적 차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차분함 가운데 워싱턴의 수뇌부는 ‘비상식적일 만큼 빠른 속도’로 ‘비상식적인 경로’를 통해 한국전쟁에 전면적이고 전격적인 개입을 결정하였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고향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워싱턴에서는 트루먼을 대신하여 애치슨 국무장관이 6월 25일과 26일에 세칭 ‘블레어 하우스’회의를 소집하여 이승만정권에 대한 군사원조를 늘리고, 미 공군과 해군의 한국전쟁 투입에 관한 결정을 내렸다.(브루스 커밍스, 한국현대사 370쪽)

이날의 결정은 후에 트루먼 대통령의 지지를 받긴 했지만 미국 의회와 국방부, 유엔의 승인조차 없이 전쟁 발발 하루 만에 취해진 것이었다.(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379쪽) 이에 따라 한국전쟁에 투입된 미 공군기와 군함들은 6월 30일경 평양을 비롯한 이북과 인민군이 점령한 이남 일대에 대한 폭격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의회와 국방부, 유엔의 동의도 없이 비상식적으로 전쟁개입을 결정한 미국은 이를 각각에게 통보하고 추인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2) 유엔군복을 입은 미군

개입 결정을 내린 미국은 다음 날인 26일에 애치슨의 지시에 따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이하 안보리)를 긴급 소집하여 이북을 침략자로 규정짓고 ‘38선의 원상회복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유엔은 오늘날의 유엔과는 다르게 철저히 미국의 ‘거수기’로서 존재하였다. 유일하게 미국의 거수기 노릇을 하지 않았던 소련은 안보리를 보이콧하고 있었다. 이 같은 조건하에서 미국은 안보리 만장일치 결정을 어려움 없이 만들어 냈다.

27일 미국은 맥아더 사령부의 야전지휘소를 곧 서울에 설치한다는 것과 28일 아침부터 미 공군이 출격을 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지상군 부대를 점차 전투에 참가시키겠다는 것을 이승만정권에게 통보했다.(박세길, 앞의 책 201쪽) 일본 주둔 미 해군과 미 공군이 한국전쟁에 투입된 직후 미국은 다시 백악관 회의를 통해 “미 지상군의 투입과 38선 이북을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맥아더에게 준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유엔 안보리에서 결정한 ‘38선 원상회복 권고’를 스스로 번복하고 ‘북침’을 선언한 것이다. 최종적으로 7월 7일 미국의 요청에 의해 유엔 안보리에서는 ‘유엔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유엔회원국의 군대를 미국 단일 정부하에 둔다는 요지의 이른바 7.7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7.7 결의안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코리아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유엔군 통합사령부를 설치한다.
2. 미국 정부에 이와 같은 최고사령부를 구성하도록 요청한다.
3. 작전에 참가한 각국 군대는 자국의 국기와 유엔기를 동시에 사용케 한다.
4, 유엔군 최고사령관은 안보리에 정기적으로 보고한다.
(박세길, 앞의 책 202쪽 재인용)

이 결의 후 트루먼 대통령은 즉시 미 극동사령관인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이와 함께 공군의 98%, 해군의 83.3%, 지상군의 88%가 미군으로 구성된 유엔군을 조직했다. 이렇게 조직된 유엔군의 지상군이 부산에 도착한 것은 전쟁발발 정확히 6일 뒤인 7월 1일이었다. 군대의 구성 비율을 보건데 미국은 충분히 단독으로 한국전쟁에 개입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국이 전쟁 발발 하루 만에 비상식적인 경로를 통해 전쟁개입 결정을 내리고 다시 유엔군으로 옷을 바꿔 입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한국전쟁에 개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비상식적인 경로를 통한 재빠른 개입결정은 결국 그만큼 미국이 한국전쟁에 대해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그 의지란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이해관계의 반영일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예상해보면 미국의 이해관계는 강점한 이남이 ‘해방’ 될 것에 대한 우려거나 또는 한국전쟁을 기화로 이북도 ‘점령’하는 것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맥아더 총사령관에게 38선 이북에 대한 공격권한을 부여한 사실을 상기할 때 미국의 이해관계는 결국 후자였음이 확실해 진다. 이 같은 결과 미국의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개입이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미국이 유엔을 통해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은 개입목적을 감추기 위함이다. 한반도에 대한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해서 미국의 개입은 필수였다. 그러나 남북간의 내전양상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미국이 아무런 명분도 없이 개입한다면 어떻게 될까? 미국의 개입목적과 본질이 그대로 전 세계에 폭로되게 될 것은 불 보듯 뻔 한일이다. 그래서 미국은 국제대표기구이자 외형상은 민주적 국제기구인 유엔을 통해 개입명분을 만들고 동맹국들을 이끌고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이다. 아울러 미국은 유엔을 통해 한국전쟁에 개입함으로써 한국전쟁을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둔갑시켰다. 사회주의 이북의 침공에 맞서 자유세계(유엔)가 단결하자는 식의 국제적 전쟁논리를 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2. 미국의 식민지영구예속화 책동

1) 각종 협정을 통한 식민지예속의 군사적, 법적 담보 마련

전쟁 발발 전후 정세는 미국에게 불리했다. 한반도에서는 반미반이승만 투쟁이 유격전쟁의 양상으로까지 발전해 사실상 미국과 이승만정권의 통치기반을 뒤흔들고 있었다. 또한 소련군대가 이북에서 철수한 마당에 이남을 지속적으로 강점한다는 것도 명분이 없었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미국의 이남강점은 여러 면에서 어려워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한국전쟁과 함께 180도로 바뀌었다.

이미 1950년 1월경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을 체결하여 이남에 대해 ‘방위’ 명목의 군사원조를 하여 군사개입의 길을 열어두었던 미국은 전쟁을 계기로 50년 7월 12일에 이승만 정권과 ‘재한 미국군대의 관할권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협정(대전협정)’을 체결하여 주한미군의 치외법권적 지위를 확보했다. 이 협정에 따르면 미군은 이남에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절대적인 지위를 갖으며 이남정부는 미군에 대해 어떠한 구속력도(심지어 범죄를 저지른 미군에 대해서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미군은 우리 민중을 구속할 수 있어서 강점군의 절대적 지위를 보장해주었다. 이 대전협정은 1967년 2월 9일 체결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미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주둔군 지위 협정, SOFA)로 이름만 바뀌어 오늘날까지 주한미군의 절대적 지위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같은 해 7월 맥아더와 이승만이 서한교환형식을 통해 협정을 체결하여 남한군대의 작전지휘권도 미국이 확보했다.

또 미국은 1952년 5월에 한미경제조정협정(일명 마이어협정)을 체결하여 경제문제에 대한 통제를 시작했다. 이 협정은 주한미군에게 고용되는 한국인, 주한미군이 사용하는 물자, 시설, 용역 등에 관한 유엔군통합사령부(즉 주한미군사령부)의 특권과 배타적 통제권을 부여한 협정이다. 이 같은 협정들은 미국과 이승만정권 사이의 정치, 경제, 군사적 예속동맹관계를 법적으로 규정하였다. 이밖에도 한국과 미국간의 연합군 경비지출에 관한 협정(50.7.28), 한국과 미국간의 발틱형 선박용선약정(51.6.12), 한국과 미국간의 상호방위원조법이 요구하는 보장에 관한 협정(52.1.7) 등 이 체결되었다. 이 같은 협정들은 한미간의 관계를 대부분 불평등하고 예속적으로 규정짓고 있는데 이는 모두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이용하여 체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민족운동가 및 정치범 숙청

미국과 이승만정권은 한국전쟁이라는 공간을 이용하여 그 동안 이남에서 반미반이승만 투쟁을 펼쳐온 민족운동가들울 학살하고 탄압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예방적 집단학살’차원에서 벌어진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수감자에 대한 처형이었다.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은 이승만정권이 50년 7월부터 8월까지 두달 사이 경기도 평택에서 제주도에 이르는 전 지역에서 조직적으로 자행한 최대 학살극이다. 소위 좌익성향 인사들을 모아 “사상을 전향·교화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보호지도(保護指導)한다”며 49년 6월5일 결성되었으며 연맹원 수는 30만∼35만명에 이르렀다.

이승만 정권은 전쟁이 발발하자 7월경에 서울을 제외한 경기도 평택 이남의 전체 연맹원을 학살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20만∼25만명의 연맹원이 군·경·극우테러단체들에 의해 집단학살됐다.
이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함께 형무소 수감자에 대한 집단학살도 단행되었다. 그중 대전형무소 학살 사례는 1999년 12월16일 미국 국립문서기록보존소에서 비밀해제된 한국전쟁 관련 문서에서 그 실상이 드러났다. 인민군이 계속 남하하자 이승만친미정권의 명령에 의해 50년 7월4∼6일까지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정치범 1800여명을 대전시 동구 낭월동 등지에서 불법 처형한 것이다. 이러한 학살을 통해 이남 전역에서는 2만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3) 악랄한 군사행동

‘악랄한’ 이라는 표현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들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관계를 따져 볼 때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이 땅에서 감행한 군사행동은 ‘악랄’ 그 자체였다. 미국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학살과 잔인한 병기를 이용한 대량살상도 서슴지 않았다. 이를 대략적으로 살펴보자.

대규모 폭격

미국은 절대적 우위에 있던 공군력에 기초해서 남과 북 전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했다. 미국의 대대적인 폭격은 외형상 인민군과 유격대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실제로는 보급능력 자체를 완전 상실시키는 차원에서 감행되었다.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인하여 이남의 주요철도를 비롯해서 길목, 터널, 집하장, 창고 등 보급과 관계된 일체의 시설들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파괴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민중들의 생활과 직결된 61만 채의 주택과 1만 5천동의 학교, 1만 7천개의 공장 등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자료에 따르면 한국전쟁 3년간 폭격으로 인해 평양에는 단 2채의 건물만 남는 등 38선 이북지역은 현대적 건물이 거의 남지 않았다고 한다.(박세길, 앞의 책 246쪽 / 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417쪽) 이 폭격에 쓰인 폭탄의 양은 미국의 태평양 전쟁기간 쓴 폭탄을 훨씬 능가한다고 한다. 1951년 10월경부터는 미 공군기가 폭격대상을 찾지 못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속출했다고 한다.

이른바 몰살작전

51년 초 병력대비가 17만 4천명 대 36만 5천명으로 압도적 우세이고 회력에서도 절대적 우위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전쟁에서 열세에 처하자 리지웨이 미 8군 사령관은 새로운 전투형태을 마련하였다. 기존의 영토확보를 위주로 하는 전쟁형태를 벗어나 상대편 병력을 최대한 살상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는 이른바 ‘몰살작전(킬러작전)’을 전격 도입한 것이다.
리지웨이는 이 몰살작전을 ‘빨갱이가 흰동이가 되도록’ 출혈을 강요하는 작전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 몰살작전에 따라 이후 미군은 대대적인 살육을 감행했다. 보이는 모든 사람을 ‘잠재적 적’으로 간주하고 학살하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학살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세균전과 대량살상무기

미국의 세균병기 사용 사실은 1952년 2월 22일 이북 외무성이 유엔에 공식 항의를 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중국정부도 미국의 세균병기 투척이 만주지방에서도 발생했다며 미국을 강하게 규탄했다. 미국은 즉각 이를 부인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악선전이라고 받아쳤다. 그러나 미국의 세균병기 사용과 관련해서 세계적인 반대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그들이 본 한국전쟁 1, 중국 해방군화보사 참조)

이에 따라 1952년 6월 오슬로에서 개최된 세계 평화회의 집행위원회는 7인의 중립적인 과학자로 구성된 국제 과학조사단이 미군의 세균병기 사용여부를 조사하기로 결정하고 조사에 착수했다.(박세길, 앞의 책 248쪽) 조사단은 7월 9일부터 2주간에 걸쳐 중국의 동북지방을 조사하고 그 다음에는 압록강을 건너 이북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8월 6일까지 조사를 하던 중 미군의 공습을 받기도 했다.

조사단은 여러 가지 물고기, 풍뎅이, 거미, 벼룩, 모기, 쥐가 이북과 만주에 흩어져 있는 것을 연구했다. 이들은 이러한 보균자가 인간과 동물 모두에 페스트, 장티푸스, 콜레라, 이질, 뇌염, 천연두를 감염시켰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상세한 연구를 해본 결과 이러한 곤충의 대부분은 엉뚱한 장소와 엉뚱한 시기에 발견되었다. 즉, 그 지역 토산이 아니던가, 아직 발생기가 아닌 시기에 그리고 눈 덮인 산과 가옥의 지붕에서 다수 발견된 것이다. 또한 중국 동북부지방과 이북에는 장티푸스 뿐만아니라 폐탄저열병, 출혈성 수막염 등 이름 모를 병들도 많이 전염되었는데 이런 곳을 조사해 보면 반드시 그러한 병원균을 보균한 생물류가 발견되었다.(박세길, 앞의 책 249쪽) 이러한 연구 결과를 토대로 국제과학조사단은 다음과 같은 최종 결론을 내렸다.

미 공군이 일본군이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장티푸스를 퍼뜨리기 위해 사용한 것과 정확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장티푸스에 감염된 쥐가 비행기로부터 낙하된 것 같다.(박세길, 앞의 책 249쪽)

이 보다 더욱 구체적인 증거도 포착되었다. “한국전쟁 기간 중인 1951년 12월, 미국 국방장관 로버트 러빗은 생물학무기를 공격용으로 사용할 수 있게 ‘최단시간 내에 실질적인 준비태세를 갖출 것’을 명령했다. 몇 주 뒤 공군 참모총장 호이트 반덴버그는 그 같은 능력이 ‘신속하게 실현되고 있다’고 보고 했다. 미국이 한국에서 대대적인 생물학전 실험을 시작했다고 북한군과 중국군이 미국을 비난한 것도 두 사람 간에 극비 전문이 교환된 직후였다. 1953년 9월 6일 일요일.

마지막 남은 미국 전쟁 포로를 실은 트럭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던 그날 아침. 베이징 라디오 방송은 한국전쟁에서 생물학전에 참가한 것을 시인한 미 공군 장교 25명의 이름을 발표했다. 판문점에서 38선을 넘은 첫 번째 지프차에서는 이 25명 중 3명의 대령인 앤드류 에반스, 워커 마후린 그리고 어색하게 웃고 있는 프랭크 슈와블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에 송환된 뒤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는 위협 아래 자신들의 종전 자백을 철회했다.”(스티븐 엔디콧,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인용)

또한 미군은 가공할 소이탄과 네이팜탄을 전쟁기간 사용하였다.
네이팜탄은 3,000℃의 고열을 내면서 반지름 30m 이내를 불바다로 만들고, 사람을 타 죽게 하거나 질식하여 죽게 하는 무기이다. 소이탄은 150∼400갈론들이의 것을 투하하면 2,000℃의 고열을 내므로, 한 발로 2,500m를 태울 수 있다.(두산동아세계대백과사전 인용)
미국은 1950년 11월 8일 70대의 B29기를 이용해 신의주에 550통의 소이탄을 투하하여 “도시를 지도에서 지워버렸고 일주일 뒤에는 회령이 네이팜탄의 공격을 받아 그 지역이 다 타 버렸다.”(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411쪽) 11월 25일에 이르러서 압록강과 그 남쪽의 적 전초선 사이의 북서부 일대가 상당부분 불타고 있는 지경이었다.

네이팜탄에 의한 학살을 뉴욕 타임즈의 조지버럿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마을과 들판에 있던 주민들이 폭탄세례를 받고 죽어 있었는데, 네이팜탄이 공격했을 때 그들이 취하고 있던 자세 그대로 였다. 예컨대 막 자전거를 타려는 남자, 고아원에서 놀이를 하고 있는 50명의 소년소녀들.....(중략)...주부가 그러했다.”(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413쪽)

핵무기 실전 사용검토

한국전쟁기간 미국이 감행하고자 했던 가장 극심한 군사행동은 핵무기 사용에 대한 검토였을 것이다. 물론 한국전쟁에는 미국의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핵무기사용에 대한 구체적 검토를 미국이 추진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미국의 한국전 개입목적과 그 수행방법의 악랄함을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맥아더가 중국에 대한 핵무기투하를 거듭 요청하여 투르먼이 맥아더를 해임했다고 알고 있다. 물론 이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 핵무기 사용문제를 처음으로 거론했던 당사자는 트루먼 대통령이었다.

1950년 11월 30일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열세를 인정하면서 “원자폭탄의 사용을 고려중이고 그 권한이 맥아더에게 주어졌다”고 말했다. 이 같은 트루먼의 발언은 즉각 세계적인 반대여론(심지어 동맹국까지도)에 부딪혀 즉각적인 실천으로 옮겨지지는 못했으나 미국의 최고지도자의 입에서 나온 이 같은 발언을 통해 우리는 미국이 구체적인 단계에서 핵무기 사용을 검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기록에는 이보다 훨씬 이른 전쟁 발발 2주째인 7월 9일 맥아더는 합동참모부로 하여금 “맥아더에게 원자폭탄을 사용할 수 있게 할 것인가 아닌가를 숙고하도록” 촉구하는 ‘긴급전문’을 리지웨이 장성에게 보낸바 있다.(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381쪽) 당시 맥아더는 핵무기 10~20개 정도를 사용하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맥아더의 이와 같은 구상이 실현되었다면 지금의 한반도는 핵참화속에 완전히 멸망했을 수도 있다. 후에 간행된 맥아더의 회고록에서는 30∼50발의 원자탄을 투하할 것을 계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한홍구, 대한민국사 인용)

이남 유격대에 대한 ‘토벌’과 집단학살

미국과 이승만정권은 이남에서 활동중인 유격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을 감행했다. 이 유격대는 해방 후 조직되어 여순항쟁을 계기로 이남 전역으로 확대된 유격대,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자생적으로 조직된 유격대, 그리고 흩어진 인민군 수 만 명이 합류하여 조직된 유격대들을 말한다. 미국과 이승만정권은 이 유격대를 섬멸하기 위해 잔인한 학살과 토벌을 감행했다. 1951년 2월 초 거창, 함양, 산청 등 지리산 남부지역의 유격대를 토벌하기 위하여 11사단 9연대는 합동작전에 들어갔다. 당시에 하달된 합동작전지침을 보면 유격대 토벌의 잔혹함을 잘 알 수 있다.

1. 작전 지역 내 인원은 전원 총살하라.
2. 공비(유격대)들이 근거지가 되는 건물은 전부 소각하라.
3. 적의 보급품이 될 수 있는 식량과 기타 물자는 안전지역으로 후송하거나 불가능한 경우는 소각하라.
(박세길, 앞의 책 251쪽)

마치 일제강점기에 일본관동군이 항일빨치산들의 유격투쟁을 말살하기 위해 감행한 ‘초토화작전’을 방불케 하는 토벌작전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토벌작전으로 산청, 함양, 합천, 남원, 순창 등 지리산 주변 산악지방 여러 곳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집단 학살의 참극이 벌어졌다. 이밖에도 부녀자 강간, 물품 강요, 재산 약탈 등 온갖 만행이 토벌군에 의해서 저질러졌다.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거창양민학살사건(600여명 학살)은 유격대 토벌과정에서 일어난 학살 중 하나에 불과하다.

대규모 양민학살

한국전쟁 기간 미군과 이승만정권에 의한 양민학살은 한반도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책으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브루스커밍스는 “미국은 네이팜탄을 공중에서 쏟아 부어 불바다를 만들었으며, 나중에는 이북의 계곡들을 물바다로 만들기 위해 거대한 댐들을 파괴했다. 이는 한국전쟁의 가장 악랄한 측면으로, 이에 대해 쓰고 읽는 일 자체가 곤혹스럽다. 바로 이 때문에 200만 명 이상이라는 엄청난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미국은 “흰 파자마”(미국은 우리민족의 흰 의복을 이렇게 불렀다)를 입은 사람은 누구든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고 마을을 불태우기 시작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단지 유격대의 은신처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마을을 통째로 불태워 수없이 많은 민중들을 학살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과 남한군에 의해 학살된 양민의 수는 실로 엄청나다. 몰살작전, 초토화작전, 유격대토벌, 네이팜탄폭격, 정치범숙청, 세균전 등 미국의 모든 군사행동에는 대량살상이 뒤따랐다. 지난 99년에 뉴스보도를 통해 공개된 ‘노근리 양민학살’, 3만 5천 383명을 학살한 신천 대학살, 거창양민학살, 고양 금정굴학살, 강화도학살, 이천학살 등 알려진 학살사건만도 수 백 건에 이르며 최소 100만 명에서 최대 300만 명의 양민학살이 한국전쟁기간 자행되었다.(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http://www.genocide.or.kr)

3. 우리민족의 대응

우리민족은 미군과 이승만정권의 무차별적 대량살상에 맞서 군사적 대응을 하는 것과 함께 인민위원회를 재건하고, 토지개혁을 실시 등 일련의 정치, 경제, 군사적 대응을 해나갔다. 이같은 우리민족의 대응을 통해 우리는 우리민족이 얼마나 조국의 통일독립을 염원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1) 인민위원회와 각급 대중단체 재건

미군과 이승만정권이 쫓겨난 곳에서 우리민중은 과거 미군정의 폭력탄압으로 해산되었던 자생적 정권기관인 ‘인민위원회’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인민위원회 재건을 위한 선거는 1950년 9월 28일 108개 군, 1186개 면, 1만 3천 654개 리에서 진행되었다. 선거 결과 평균적으로 군 97%, 면 96%, 리 98%의 찬성으로 군 위원 3천 876명, 면 위원 2만 2천 314명, 리 위원 7만 7천 716명이 선출되었다.(박세길, 앞의 책 210쪽) 선출된 위원의 절대다수는 농민, 노동자들이었다. 이렇게 결성된 인민위원회는 “일본인 재산과 이남의 정부, 관료, ‘독점자본가’의 재산을 몰수”(브루스커밍스, 앞의 책 378쪽) 하는 등 미군정과 이승만 통치하에서 진행되지 못한 사회개혁조치를 단행하는 등 민중을 위한 정권기관으로서의 활동을 가져갔다.

또한 민주청년동맹, 여성동맹, 직업동맹, 농민동맹, 문화단체총연맹 등 파괴되었던 각종 대중단체들을 다시 창설함으로써 각계의 민중을 조직화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2) 토지개혁 단행

절대다수의 민중이 소작으로 농사를 짓는데 반해 소수의 과거 친일파, 민족반역자들과 이승만정권의 관료들이 대다수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이남의 토지소유관계를 개혁하는 것은 절박한 문제였다. 우리민중은 ‘토지개혁은 농민 스스로의 힘으로’라는 슬로건을 걸고 자체 선발된 사람들로 농촌위원회를 만들어 토지개혁을 집행하게 했다. 토지개혁을 하기위해 세워진 농촌위원회는 1만 8천개로서 14만 명의 농민이 참가했다. 이남 전역에서 1개 시, 6개 도, 1198개 면에서 진행되었다. 또한 개혁으로 몰수된 토지는 59만 6천 202정보였고 분배한 토지는 57만 3천 334정보였다. 토지분배와 함께 과거 농민들이 지주로부터 지게 된 부채와 종래의 지세 및 일체 세금은 모두 폐기되었다.

3) 유격투쟁

한국전쟁 기간 이남에 잔류한 인민군과 이남민중들의 유격대는 장기항전 태세로 미군과 맞섰다. 이들은 지리산 일대를 거점으로 하고 노령산맥을 이동 무대로 미국과 이승만정권에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그 대원의 수는 4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였다고 한다. 전투지역도 순창, 정읍, 남원, 장성, 구례 등 호남 일대와 거창, 산청, 함양, 합천 등 매우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있었다. 그리고 이들 지역 중 일부 산간지방은 이른바 ‘해방구’ 또는 ‘준해방구’로서 유격대의 새력권 하에 놓여 있었다.(박세길, 앞의 책 249쪽) 유격대는 자유자재로 진격과 후퇴를 구사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미군의 배후를 교란했다. 1950년 12월 5일 약 500명의 유격대는 거창군 신원면에 있는 신원지서를 기습공격하고, 반동경찰과 극우테러단체들에게 상당한 타격을 입한 신원면전투가 유격대의 대표적인 투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유격투쟁은 조직된 유격대에 의해서만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부녀자들을 포함한 지방 농민들이 피난민을 가장하여 전선 근처의 언덕배기를 돌아다니곤 했는데 이 피난민들은 “신호가 떨어지면 보따리에서 소총, 기괸총, 수류탄 등을 잽싸게 꺼내어 언덕 아래 부대에 사격을 퍼부어 쑥대밭을 만들었다”고 한다.(브루스커밍스, 앞의 책 370쪽)
조직적, 비조직적 유격투쟁은 미군을 극도의 혼란과 피로로 몰아갔다. 미군은 사방, 전후, 좌우가 전선인 겪어보지 못한 전쟁을 치러야만 했고 결국 아무데나 총질을 해댔다. 이 같은 미군의 움직임은 한국전쟁의 결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4. 휴전협정

한국전쟁 3년간 펼쳐진 우리민족 대 미국의 대결은 휴전협정을 통해 종결되었다.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교전 당사자가 이북과 미국인 조건에서 우리민족의 정치적 요구는 이북에 의해 관철되는 형식이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이북과 미국은 적대행위 중지, 양군의 접촉선으로 하는 군사분계선의 설정, 비무장지대 설치, 휴전 이후의 병력증강 방지, 외국군 철수와 통일방안 모색을 위한 참전 관계국 간의 정치회의 개최를 골자로 하는 휴전협정을 맺었다.

이중 특히 눈여겨 볼 부분은 ‘외국군의 철수와 통일방안의 모색을 위한 참전 관계국 간의 정치회의 개최’이다. 외국군의 철수는 우리 민족의 자주권을 되찾는 문제이고 정치협상은 우리나라의 통일독립문제를 실천적으로 협의해 나갈 수 있는 계기였다. 이남을 강점하고 조국의 분단과 식민지예속화책동을 펼쳐온 미국을 이 마당까지 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이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미국을 상대로 군사적으로는 휴전을 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승리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국군 철수와 통일방안 협의를 위한 정치협상회의’는 미국과 이승만정권의 농간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1954년 4월 26일 소집된 회의는 한국전쟁 19개 참가국들이 7주간이나 논쟁을 하였다. 외국군 철수 문제와 통일방안에서 합의를 하지 못했다. 미국과 이승만정권은 한반도 주둔 외국군인 중국군의 철수는 요구하면서도 유엔군의 철수는 차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남북간의 통일은 유엔의 감시하에서 인구비례 총선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북은 이에 대해 한반도에 주둔한 모든 외국군은 6개월 안에 철수할 것을 주장했고 미국과 이승만정권의 인구비례선거를 반대했으며 유엔의 감시가 아닌 중립국 감시를 주장했다. 꼼꼼히 따져보면 이북의 주장이 우리민족의 의사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주둔 외국군의 철수는 일정 기간 안에 동시 철수방식을 채택해야 한다. 미국과 이승만정권의 주장과 같이 유엔군은 차차 철수하고 중국군만 철수 한다면 한반도에서 언제 또 전쟁이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형평성에도 맞지 않다. 결국 서로가 상대의 외국군이 철수하기를 요구하며 주둔 외국군의 철수를 뒤로 미루게 되고 그만큼 한반도의 긴장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선거감시문제도 따져 보자. 미국과 이승만정권은 마치 유엔이 공평하고 중립적 가치 위에 존재하는 기구인 냥 유엔을 통한 선거감시를 주장했다. 그러나 유엔은 분명히 한국전쟁 교전당사자 중 하나이다. 어떻게 교전 당사자가 남북간의 통일선거를 감시 할 수 있는가? 이것도 절대 말이 되지 않는다. 선거감시는 한국전쟁과 무관한 중립국의 감시하에서 해야 옳다. 마지막으로 인구비례선거를 따져보자. 미국과 이승만정권이 주장한 인구비례선거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시 전쟁하자는 말이다. 당시 인구의 2/3이 이남에 위치해 있는 조건에서 인구비례선거는 이승만정권에게 유리한 국면을 만들어 줄 가능성이 훨씬 크다. 이미 가능성부터 일방에게 기울어진 선거는 평등한 선거라 할 수 없고 흡수통일 선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흡수통일은 또다시 한반도를 전쟁으로 몰아 갈 가능성이 크다.
결국 미국과 이승만정권은 이북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 걸어 제네바 정치협상회의를 파탄 낸 것이다.

5. 한국전쟁의 역사적 의의

한국전쟁은 아직도 해명돼지 못한 문제로 가득하다. 그리고 여전히 분분한 논쟁속에 휩싸여 있다. 아마도 이러한 해명과 논쟁은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전쟁은 우리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 속에서 펼쳐졌다는 것이다. 이는 누구도 부정 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한국전쟁은 인류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극렬한 전쟁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민족 대 미국의 객관적 역량관계는 대비조차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민족은 영웅적으로 이겨냈으며 미국에게 타격을 주었고 우리민족의 염원을 지켜내었다. 미국의 수적, 기술적 우세를 이겨내고 우리민족이 미국의 식민지영구분단책동을 파탄 낼 수 있었던 것은 우리민족의 뜨거운 민족자주정신 때문이었다. 우리민족은 자주권을 생명으로 여기고 이남 강점 미군철수와 통일독립을 위한 일치단결된 투쟁을 펼쳐 강대한 미국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민족자주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어져 이남의 반미자주화투쟁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한국전쟁은 큰 의의를 갖는다. 군사력의 우세만 믿고 세계 최강을 자임하며 약소국가들의 자주권을 유린하던 미국을 상대로 우리민족은 민족의 자주권을 지켜냄으로써 미국의 초강대국 신화를 산산이 깨뜨려 버렸다. 이는 식민지, 반식민지나라 민중들의 반제민족해방투쟁을 크게 고무해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한국전쟁 이후 우리민족은 남과 북으로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장기간 분단됨으로써 민족의 단합되고 일치된 반미민족해방투쟁과 자주적 통일국가건설투쟁을 전개하는데 일정한 난항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현실은 6.15남북공동선언으로 우리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가 다시금 성립되게 될 때가지 일정하게 남과 북이 따로따로 반미민족해방투쟁과 자주적 통일국가건설투쟁을 전개하게 만들었다. 이후 이북은 휴전이라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미국과 ‘전투 없는 전쟁’ 즉, 군사적 자위력에 바탕을 둔 정치외교전쟁, 경제전쟁을 펼쳐야 했다. 미군이 여전히 강점하게 된 이남은 많은 민족자주운동세력과 통일운동세력이 한국전쟁기간 대거 학살당하거나 투옥되고 연이어 반공을 제일국시로 하며 민족운동과 통일운동을 탄압한 친미군사독재정권의 등장으로 매우 어려운 투쟁을 전개해야 했다.


미국의 이남 예속화에 맞선 민중들의 투쟁

우리민족 대 미국의 대결 100년사 ⑦ - 1953년~1980년까지(1)



글이 긴 관계로 이 부분은 두차례에 나눠 연재한다

순서
1. 전후정세와 우리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 변화·
2. 미국의 이남에 대한 예속화책동
3. 이남민중의 반미반파쇼민주화투쟁
4. 광주민중항쟁과 이남민중운동의 일대도약


1. 전후정세와 우리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 변화·

1) 세계정세 변화와 미국의 새로운 전략

한국전쟁은 ‘제국’의 역사에 최초의 ‘휴전’을 남겼다. 이른바 ‘자유민주의 선도자’, ‘세계 최강대국’을 자임하던 미국에게 이 ‘휴전’은 사실상 ‘패배’를 의미했다. 이로 인해 미국의 지위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이 종결되자 미국의 군수산업은 그 판로를 잃게 되어 과잉공황이 발생했다. 그 결과 “1954년 공업 총 생산액은 10.5%나 격감되었고 거리에는 1,300만의 실업자, 반실업자가 넘쳤다.”(남녘, 미제침략사, 102쪽)
또한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인 소련과 중국을 비롯하여 이란, 과테말라, 북베트남, 쿠바 등에서 미국의 이른바 ‘자유민주’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반제투쟁’이 확산되었다.
국내외로 위기에 봉착한 미국은 “핵무기를 이용한 대량보복 전략”과 “동맹강화전략“을 짜고 집행하기 시작했다.

① 핵무기를 이용한 대량보복 전략
이 전략은 핵보복력을 전면전쟁에 대한 ‘억지력’으로 삼으면서도 국지전에서도 미국이 소련, 중국에 ‘핵무기를 이용한 대량보복’을 명확히 한다는 것이다. 방위, 억제력 개념의 핵무기가 아니라 실전사용을 위한 핵무기 전략인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핵탄두는 1953년 1천 개에서 1961년 초까지 1만 8천개로 무려 20배나 증가되었다.

② 동맹강화전략
이 동맹강화전략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하나는 미국과 우방국들 간의 정치군사동맹체제강화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사회주의권, 반제자주권 나라들의 정권전복전략이다. 이에 따라 일본과 서유럽의 여러나라들은 미국의 ‘예속적 동맹’으로 재편되었고 한국, 남베트남, 필리핀 등은 미국의 ‘식민지적 동맹’으로 재편되었다. 개혁적 조치를 단행하며 미국과 대립하던 이란의 모사디그정권(1953년)과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1954년)이 미국 CIA의 비밀공작에 의해 무너진 때도 같은 시기였다.

이 두 가지 전략은 미국의 사회주의진영, 민족자주진영에 대한 공격전략으로 활용되었으며 미군의 강점, 핵무기 배치, 정치적 예속, 경제적 침탈 등등 관련정책들이 수반되었다.
우리민족에게는 ‘분단고착화책동’, ‘이남 식민지예속화책동’으로 나타났다.


2) 우리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 변화

한국전쟁과 함께 정치군사적으로, 이념적으로 ‘보다 분명해진’ 남과 북의 분단은 해방 이후부터 조선민족의 자주적 통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분투해온 민족자주역량의 물리적 분리를 가져왔다. 이 결과 해방직후 형성된 우리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가 남과 북의 일치된 힘을 발휘하기 힘든 형태로 희미해져 버렸다.
물리적으로 분리된 남과 북의 민족자주역량은 불가피하게 각각의 지역적 현실(사회변혁의 단계와 성격, 외세의 강점유무 등등)에 따라 사회변혁운동을 펼쳐야 했다.
이북은 한국전쟁의 후과로 국토의 대다수가 황폐화 된 상황에서 ‘전후인민경제복구’와 ‘반제반봉건민주주의’와 ‘사회주의’건설에 매진해 나갔고 이남은 미군의 강점, 식민지예속화정책, 친미파쇼정권의 형성으로 인해 ‘자주민주통일’을 기본좌표로 삼고 투쟁을 하게 되었다. 분단으로 ‘일치된 행보를 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자주와 통일을 위한 우리민족의 투쟁에서 크나큰 어려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상황을 우리민족 대 미국의 대결구도가 완전히 소멸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면 남과 북이 비록 물리적 분단과 사회여건의 차이로 인해 일치된 행보를 취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기본노선에는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분단의 원인은 미국의 이남강점이었고 우리민족의 목표는 ‘자주와 통일’로 동일했다. 본질적으로 활을 쏘는 ‘이유’와 그 ‘과녁’이 일치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오늘날 민족민주운동이 반미자주화투쟁과 조국통일투쟁을 펼쳐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놓는 ‘전국적 관점’은 민족분단의 원인과 현실에 기초한 가장 타당한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2. 미국의 이남에 대한 식민지예속화 책동

1) 특징

① 미군강점의 장기화
한국전쟁 이전에 일시 철수한 미군은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다시 들어왔고 한반도 ‘안보’를 명분으로 이남에 아예 눌러앉았다. 이는 단순한 군대의 주둔이 아니라 미군정의 연장에 가깝다. 기존의 미군정 직접통치가 이승만친미정권의 ‘고문관 정치’로, 그리고 이 ‘고문관 정치’가 다시 주한미군을 주축으로 주한미대사관, 주한미상공회의소 등 각종 정치적 예속화 기구를 통한 정치적, 경제적 예속을 심화시켰다. 이남민중이 펼치는 반미자주화투쟁에서 가장 핵심적인 투쟁이 주한미군철수투쟁이 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관계에서 비롯된다.

② 이른바 ‘한미동맹’체제로의 전환(신식민주의의 심화)
이른바 ‘한미동체제’는 미국이 이남을 ‘식민지에 가까운’ 예속을 하고 있는 상황을 미화분식시키기 위해 나온 말이다. 이 ‘한미동맹’은 반사회주의, 반북 동맹이며 그 내용은 정치, 경제, 군사적 예속을 의미한다. 주한미군이 한미동맹의 조종자라면 한미동맹은 주한미군의 이남강점의 결과라고 하겠다. 특히 뒤에서 보다 상세히 다루겠지만 이른바 한미동맹은 미국의 신식민주의정책에 따라 친미정권과 그의 추종세력을 세우고 미국의 현지기구들의 정치공작을 통해 유지되었다.
참고로 미국의 대 한반도 지배전략의 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세기 말 조선점령정책(제너럴 셔먼호 사건, 셰난도허호 사건, 신미양요)->일본을 통한 간접지배정책(1905년~1945년)->한반도영구분단정책과 이남식민지예속화책동(1945년~1950년)->한반도전면점령정책(한국전쟁시기 미국의 군사전략)->분단고착화 및 ‘이른바 한미동맹’(1953년~현재)

2) 군사강점

① 법, 제도적 뒷받침

미국은 주한미군은 주둔의 명분을 “언제든 깨질 수 있는 평화의 조건을 결정한 이 휴전협정”이 맺어진 한반도에서 “미군은 한국군과 함께 북한의 또 다른 도발행위를 저지하기 위해 분단의 최전선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며 주둔명분을 밝혔다.(주한미군 홈페이지 http://www.usfk.or.k)
이러한 명분에 따라 주한미군은 그 법, 제도적 장치로 ‘한미상호방위조약’(1953년 10월 1)과 ‘한미주둔군지위협정’(1966년 7월 9)을 체결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3조에서 “각 당사국은 상대 당사국에 대한 무력공격을 자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고, 공동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하여 각자의 헌법상의 절차에 따라 행동한다”고 규정함으로써 한미군사동맹에 ‘합법성’을 부여했고 4조에서 “미국은 자국의 육·해·공군을 대한민국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비(配備)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대한민국은 이를 허락한다“고 규정하여 주한미군이 강점과 이남의 군사기지화도 ‘합법화’시켰다. 또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외국군대의 주둔을 다루는 중요한 조약임에도 불구하고 그 기간, 규모, 방식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국가조약임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 규모, 방식 등이 명시되지 않은 것은 ‘실수’가 아니라 주한미군의 영구주둔을 위해 ‘꼼수’를 쓴 것 이라고 생각된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은 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른 미군의 지위와 역할을 부여하는 부속 협정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악명높은 소파(SOFA, Status of Forces Agreement)가 바로 한미주둔군지위협정이다.

② 미군의 군사작전 지휘권 소유
이른바 ‘대전협정’(1950년 7월14일, 한국육해공군지휘권이양에 관한 이대통령․맥아더유엔군사령관 사이에 교환된 공한)을 통해 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이 미군 사령관에게 넘어갔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은 한국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10월 17일에 공표한 ‘유엔군의 작전지휘권에 관한 한미합의의사록’에서 “유엔군 사령부(여기서 유엔사령부는 사실상 주한미군 사령부를 뜻함, 필자 주)의 작전지휘권 하에 있다”라는 명시를 통해 국군에 대한 작전권 행사를 거듭 확인했다. 이렇게 하여 작전지휘권은 유엔사령관(주한미군 사령관 겸임)->한미군사위원회 대표(주한미군사령관 겸임)->한미연합사령관(주한미군 사령관 겸임)으로 보직만 바뀐 주한미군사령관의 권한 하에 머물렀다. 나라의 자주권은 구체적으로 군사와 외교를 통해서 드러난다.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이다. 군사가 뒷받침 되어야 자주적인 외교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사권한의 가장 핵심인 작전지휘권이 주한미군 사령관의 권한 하에 있다는 것은 사실상 ‘주권’의 상실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한때 주한미군 사령관을 역임했던 리차드 스틸웰은 “전 세계에서 가장 경이로운 주권의 양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③ 국군의 예속화
미국은 이남의 국군도 주한미군의 예속군대로 재편시켰다. 엄밀히 말해 창설부터 미군 군사고문단의 직접지휘아래 조직, 확대되었고, 작전지휘권 조차 없던 국군은 민족의 군대라고 할 수 없었다. 미국은 국군에 대한 원조물자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국군전반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 원조액수는 1945년부터 1960년에 이르는 16년 동안 미국이 이승만친미정권에게 지급한 약 30억 달러에 이르는 무상원조 중 80%이상이 군사원조였다고 한다. 이러한 군사원조를 바탕으로 국군은 미군식 군사교리, 군사작전, 군사무기로 무장한 ‘미군식 군대’가 되었다. 세간에서 국군을 ‘미국의 용병부대’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 같은 관계를 꼬집는 말이다.

미국은 또한 1975년에 그동안 유지해온 유엔군사령부의 간판대신 ‘한미연합사령부’를 구축하여 국군에 대한 공식적인 직접지휘를 시작했다. 이 한미연합사령부는 국군과 주한미공군, 방공부대, 병참부대를 포함하여 65만 명의 병력을 작전통제 하에 두게 되는 명실상부한 국군의 최고기관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물론 이 막강한 한미연합사 사령관은 주한미군 사령관이 겸직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주한미군 사령관은 전시 야전군총사령관, 유엔군사령관, , 미 제7함대에 대한 작전지휘권자에 이어 한미연합사령관(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자)라는 새로운 직함을 또 하나 달게 되었고 그 권한도 더욱 강화되었다.

④ 이남의 핵기지화와 대북전쟁연습을 통한 대북군사위협
앞에서 미국의 새로운 전략 중 ‘핵무기를 이용한 대량보복전’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미국의 공격적 전략은 이남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1958년 1월 29일, 미군은 280밀리 원자포와 ‘어네스트존’ 핵미사일의 배치를 정식 발표했다. 이어 2월에는 주한미 1군단 지휘부에서 이것을 실물공개하고 원자포발사시험을 벌이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은 1970년 2월 14일부터 3일간에 걸쳐 개최된 미 상원 외교위원회 사이밍턴 분과위원회 비밀청문회에서 다시한번 밝혀졌다. 이 비밀 청문회에서 밝혀진 이남배치 미군핵무기는 F4팬텀용 제니미형 공대공 미사일, 나이키허큘리스 지대공 미사일, 어네스트 존 원자포, 서전트 원자포, 핵지뢰 이렇게 5종류에 달했다.(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권, 252쪽) 또한 미국은 1971년 6월경 오키나와에 비치되어 있는 전술 핵무기 수백 기 중 일부를 이남으로 이전시켰다고 한다. 이 같은 핵무기 배치는 1979년 현재 최소한 650기에서 1000기에 달했다.(미 부르킹스 연구소)

미국의 이같은 행위는 “한국 국경 외부로부터 증강하는 작전비행기,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의 반입을 정지한다“는 <정전협정13조d항>을 일방적으로 위반한 것은 물론, 한반도에서 다시금 전쟁을 도래할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도 모자라 이북에 대한 핵공격협박을 자행하기까지 했다 1975년 6월 미 국방장관 슐레진져가, 이듬해에는 후임 국방장관인 럼스펠드가 “한국에서의 핵무기 사용도 배제하지 않을 것”임을 공언했던 것이 그 예이다.

핵무기 배치와 함께 미국은 한미연합군사연습을 통해 이북에 대한 물리적 압박을 하며 한반도의 정세를 긴장시켰다. 그 대표적인 한미연합군사연습이 1969년 3월부터 시작된 포커스 레티나(Focus Retina)였다. 이 훈련은 미 본토로부터 완전무장한 병력 2,500명을 한반도 작전지역으로 불과 30여 시간 내에 투입하는 당시에는 최대규모의 공수작전훈련이었다. 이 포커스 레티나훈련은 1971년부터는 작전명 "프리덤볼트", 1976년부터는 "팀스피릿으로 바뀌어 진행되었다.(오늘날의 을지포커스 렌즈훈련, 전시증원훈련 등 한미연합군사연습의 모체라고 할 수 있다) 1969년 미 해군 전자정찰기 EC-121기가 이북 영공에서 불법 정찰활동 중 격추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사건 직후 미국은 두 개 항공모함 전투선단을 동해에 출동시키는 조치와 함께 이미 3월 중순 시작된 "포커스레티나" 군사훈련을 전시작전에 준해 실시하도록 명령한 적이 있다. 이 예는 한미연합군사연습이 언제든지 이북침공실전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미국과 이남의 정부당국자들이 ‘일반적인’, ‘연례적인’ 군사연습이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민중이 믿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3) 정치적 지배

정치경제군사특징일제 치하
(직접 식민통치)일제 총독부가 전권을 행사 일본 종속일본군 주둔직접통치예속적 한미동맹
(신식민주의 통치)미국 영향 하에 한국정부가 집행미국 종속미군 주둔미국에 사실상 예속(외형상 독립국)
<직접식민통치와 신식민통치 비교>

미국이 과거 제국주의 나라들과 다르게 ‘신식민주의 통치방식’을 채택한 이유는 이남민중의 반미자주의식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과거에 일제가 행했던것과 마찬가지로 직접식민통치를 실시 할 경우에는 이남 민중이 거세게 반대하는 반미항전을 벌일 것이 뻔한 조건에서 외형상 독립국가를 세워 반미항전을 무마하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미국이 택한 길은 친미파쇼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고 이는 박정희, 전두환 이 양대 친미파쇼정권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미국이 보여준 모습을 통해서 증명된다.

① 박정희 친미군사쿠데타(1961년)와 미국
4.19 혁명과 함께 이남에는 자주, 민주, 통일투쟁이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그러나 이 같은 정세는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는 친미군사쿠데타로 완전히 뒤바뀌었다.

5월 16일 새벽, 당시 제2군 부사령관이던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공수 특전단, 해병대 제1여단 등 도합 3,600명에 달하는 병력이 서울에 진입하여 주요 통신시설들을 점령했다. 이어 이들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입법, 사법, 행정을 장악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의 행보는 말 그대로 ‘일사천리’였다. 다음날인 17일 오전 5시에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옥내외 집회를 금지’하고, ‘국외 여행을 불허’하며, ‘언론에 대하여 사전검열을 실시’, ‘야간 통행금지’를 연장하는 등 일련의 조치들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6월 6일, 이른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설치하고 사실상 국가권력을 완전 장악했다. 여기까지가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의 핵심내용이다. 이 박정희 군사쿠데타와 함께 이남민중운동사에서 가장 혹독한 탄압과 자주, 민주, 통일의 수난을 겪게 된 ‘반역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런데 이 박정희 군사쿠데타에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이 의문점을 풀 때 박정희군사쿠데타와 미국의 관계가 풀린다. 당시 이남에 주둔하고 있던 주한미군은 약 6만 명이었다. 그리고 국군은 60만에 달했다. 합하면 66만의 대병력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66만의 대군이 3600명 정도에 불과한 소규모 군사쿠데타를 막지 못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당시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쥐고 있던 맥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이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를 묵인했기 때문에 66만의 대군이 3600명의 반군을 진압하지 못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진압을 ‘못’한 것이 아니라 ‘안’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박정희의 군사쿠데타 준비징후를 CIA 및 서울과 워싱턴의 미군 군사정보기관은 이미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고, 주한미군사령관 맥그루더도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 중앙정보부의 최고 책임자였던 덜레스(존 포스터 덜레스의 동생)의 발언을 살펴보면 미국의 속내를 똑똑히 알 수 있다.

“나의 재임 중 CIA의 해외활동으로서 가장 성공을 거둔 것은 이 혁명(5ㆍ16 군사 쿠데타를 가리킴, 필자 주)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일부 지도자가 지지하고 있던 장면 내각은 부패하였고 이승만 정권을 타도한 민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위태로운 순간이었습니다. 만일 미국이 무엇인가를 하지 않았더라면 민중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현혹되어 남북통일을 요구하는 폭도들을 지원하였을지도 모릅니다.”(박세길, 앞의 책, 112쪽)

미국의 묵인 내지는 배후하에 진행된 전두환의 5.18 광주학살에 맞선 광주민중들의 항쟁은 우리 역사의 반미운동의 새역지평을 열었다

미국은 오늘날 당시 발표한 국무성의 성명의 내용을 발췌하며 미국은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와 관련해서 이남에 ‘중립인 민간정권이 들어서기를 바랬다’며 이 같은 의문에 반박한다. 그러나 이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 당시 이남은 미국의 경제원조와 군사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미국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원조조치를 중단시켜 박정희파쇼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박정희 군사쿠데타 이후 미 국무성 관리 체스터 보울즈는 미국정부의 견해를 밝히는 자리에서 이남에서의 군사쿠데타에 관해 “뜻밖의 충격을 받았다”, “미국으로서는 입헌정부의 전복을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등의 발언을 하면서도 “군사혁명위원회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간섭, 가령 가솔린의 공급이나 자금을 중단시키는 조치(경제원조와 군사원조의 중단을 뜻함, 필자 주) 등은 취하지 않을 것이다”고 밝힌바 있다.

미국이 아무리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와 무관하다고 주장해도 역사적 사실관계를 지울 수는 없는 법이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수립으로 가장 득을 본 세력 또한 미국이었음은 물론이다. 박정희 군사쿠데타의 성공은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이 보다 강경해 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미국은 한일관계 정상화를 강요하며 강도적인 한일협정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② 전두환 군사쿠데타(1980년) 지원
박정희의 피살을 전후하여 이남민중의 투쟁은 다시금 불붙었다. 한국 노동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YH항쟁(1979년 8월), 부마항쟁(1979년 10월), 사북항쟁(1980년 4월) 등과 같은 굵직굵직한 민중의 투쟁이 잇따랐다. 다시 4.19혁명과 같은 역사적 ‘변혁기’가 도래한 것이다.

전두환의 군사쿠데타는 이때 일어났다. 1979년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노태우, 정호용 등과 함께 일거에 정치권의 중심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17일 경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전국의 대학들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국회를 봉쇄하는 등 전면적인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일사천리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키며 정권을 완전 장악했다. 이 전두환의 군사쿠데타와 미국은 또한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을까? 이 역시 당시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이 전두환의 군사쿠데타를 대했던 태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한미연합사령관을 겸하는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은 전두환의 전면적 군사쿠데타 감행 2일 전인 5월 15일에 한미연합사령부의 직접지휘 아래에 있던 20사단의 출동을 승인하여 전두환의 쿠데타를 직접적으로 ‘지원’했다. 또한 그는 “(한국)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한국의 안보가 유지된다면 이를 한국민의 뜻으로 받아들여 전 장군을 지지할 것"이라며 "한국민은 들쥐와 같은 민족이어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복종할 것이며, 한국민에게는 민주주의가 적합치 않다"고 폭언을 하기도 했다.(1980년 8월) 역시 같은 해 8월 위컴은 AP통신과의 기자회견에서 ”한국의 10월사태(박정희 피살, 필자 주) 이후 미국의 대한정책에서 가장 성공한 일 중의 하나는 전두환 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며 우리의 보람도 크다“고 발언했다.(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권, 78쪽)

4) 경제예속

① 이승만정권 시기: 원조를 통한 이남경제의 결정권확보와 이른바 ‘귀속재산 불하’
미군정 기간 무상원조의 여파로 이남 경제는 뿌리째 흔들렸다. 농업무문은 아예 “새판짜기”에 가까운 황폐화를 만들었다. 그 기초위에 이승만 정권시기 미국은 한미경제조정협정(일명 마이어협정, 1952년 5월)을 체결하고 한미합동경제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원조자금의 사용에 관해 실질적인 최고 ‘결재권’을 행사하였다. 당시 이승만정권의 정부예산에 절반 이상이 미국이 지원한 ‘원조’였는데 이 원조의 분배 결정권을 미국이 쥠으로써 미국은 이남경제를 마음대로 통제 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은 또한 일찍이 일제강점시기 일제가 가로챘던 민족의 재산을 ‘귀속재산’이라 하여 몰수하고 그것을 다시 친일파, 친미파, 이승만 정치세력에게 ‘적산불하’라는 명복으로 헐값에 넘겨주었다. 당시 이남 전체 재산의 8할이 이 ‘적산’이었던 점을 상기 할 때, 미국의 ‘적산불하’가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친일파, 친미파, 이승만 정치세력들은 이 ‘적산’을 불하받고 이후 매판자본으로 육성되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농업침탈을 살펴보자. 미국은 대단히 싼 가격으로 자국의 잉여농산물을 들여와 이남 농업을 황폐화 시켰다. 대표적인 잉여농산물은 면화, 설탕, 밀가루였는데 동종의 이남농업은 완전히 망해 버리고 말아다. 농업이 황폐화되자 다수의 농민들이 농촌을 이탈해 도시로 들어가 기아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극빈 노동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극빈 노동층의 증가는 ‘적산’을 불하 받아 기업을 육성해 나가던 매판자본가들에게 ‘좋은’ 노동력이 되었다.

② 박정희정권 시기: 차관을 통한 미국의 하청경제화
이승만정권하에서 대규모 저임금 노동자들을 만들어내고 매판자본의 기틀을 다진 미국은 박정희정권에 들어서서는 이남의 경제를 미국의 하청경제로 만드는데 주력했다.

원조를 미끼로 이남경제를 주름잡았던 미국은 박정희정권이 들어서자 ‘차관’을 제공하여 이남경제의 규모를 부풀려 나갔다. 1961년부터 1979년까지 박정희정권하에서 들여온 상업차관은 95억 달러였고 공공차관도 61억 달러에 달했다. 이 중 상업차관의 10%정도는 박정희정권의 착복하여 정치자금으로 이용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또한 미국은 한일협정을 직접주도, 체결시켰다. 일본은 36년간 조선강점에 대한 배상성격의 ‘청구권 및 경제협력자금’ 3억 달러를 지급했다. 이중 상당부분이 박정희정권의 정치자금으로 활용되었고 나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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