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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우리 민족의 자주투쟁사 100년을 돌아본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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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4-08 13:24 조회4,7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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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100년, 미군강점 65년이 되는 해이다. 100년, 65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은 아직 미국의
예속 아래 놓여 있으며 동시에 부활하려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놀아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치욕과 수치를 계속 감내하며 살 것인가, 민족의 역량을 키워 제국주의 미국, 군국주의화하려는 일본에
맞서 민족의 자주권을 되찾을 것인가 결단을 해야 하는 시기를 살고 있다.박제민 민권연구소 연구위원이
고찰한 우리 민족의 자주운동 투쟁사 100년에 관한 논문을 몇 차례 나누어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IMAGE##>
우리 민족의 자주투쟁사 100년을 돌아본다(상)




<학습>미국의 조선점령정책과 조선민중의 항전

-19세기 중엽일제강점기

박제민 민권연구소 연구위원


<글의 차례>

연재를 시작하며

1. 19세기 미국의 조선점령정책

2. 미국의 3차에 걸친 무력도발과 조선민중의 항전
1) 1차 무력침공 <제너럴셔먼호>사건 (1886년 8월)
2) 2차 무력침공 <셰난도어호>사건과 남연군묘 도굴 (1868년 4월)
3) 3차 무력침공 <신미양요>(1871년 5월)

3. 미국의 조선점령정책의 방향전환: 미일동맹을 통한 조선점령
1) 일본을 조선점령과 아시아 침략의 돌격대로
2) 조선에 대한 정치, 경제, 문화적 침략
3) 일제의 조선강점 적극 지원

4. 일제강점기 미국의 조선약탈

연재를 시작하며

<##IMAGE##> 올해 2005년은 미군이 이 땅을 강점한 지 60년이 되는 해이자, 강도적인 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주권을 상실한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100년, 6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은 아직 미국의 예속 아래 놓여 있으며 동시에 부활하려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놀아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치욕과 수치를 계속 감내하며 살 것인가, 민족의 역량을 키워 제국주의 미국, 군국주의화하려는 일본에 맞서 민족의 자주권을 되찾을 것인가 결단을 해야 하는 시기를 살고 있다.

우리 민족은 지난 100년간 민족의 자주를 실현할 만한 의지와 역량을 키워왔다.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우리 민족은 1920년대 만주 벌판을 울린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총성으로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해방 직후에는 민족 분열을 꾀하던 외세와의 투쟁을 전민족적 항전으로 벌여내기도 했다. 그러나 분단은 고착되었고 그리하여 남과 북은 따로 외세와의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민족의 자주권을 지켜냈던 북은 자주노선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견지하며 외세와의 비타협적인 정치군사적 대결을 주동에 서서 이끌어왔으며 남은 외세가 심어놓은 민족반역독재정권과의 투쟁을 지속해왔다.

우리 민족의 반외세 투쟁의 역사 특히 남측에서의 반미투쟁사에서 하나의 역사의 획을 그은 사건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었다. 항쟁의 가장 큰 성과는 잊혀져가던 제국주의 외세 미국의 정체가 민중들의 피의 댓가로 폭로되었다는 것이며 반미만이 우리 민족이, 민중이 살 길이라는 것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광주항쟁을 계기로 1980년대 중반 이후 자주민주통일 노선이 각계각층으로 확산되어 반외세자주화투쟁은 새로운 고양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한국민족민주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본격화되기 시작한 한국의 민족민주운동과 북측 우리 민족의 견결한 투쟁은 결국 2000년 남북공동선언이라는 결실을 수확하였다. 6.15남북공동선언으로 우리 민족은 통일의 문을 활짝 열었고 지난 5년간 일찍이 있어보지 못한 남북의 화해와 단합을 이루어냈고, 갈라졌던 우리 민족이 하나 되어 반외세 투쟁을 벌일 수 있는 여건이 무르익힌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화해와 단합이 자신들의 세계전략, 동아시아 전략 실현의 걸림돌이라 여긴 미국은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다 못해 이른바 㰡북핵문제㰡‘를 만들어 북을 궁지로 몰려고 하였으며 또다시 북에 대해 핵 공격 위협을 가하며 한반도에 핵전쟁의 먹구름을 몰고 왔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 4년간 인내할 대로 인내해왔던 북은 결국 핵무기까지 갖추며 미국의 적대정책을 끝장내기 위한 본격적인 공세로 돌입하였다. 또한 남측의 민중들은 2000년 남북공동선언이 열어놓은 민족화해의 시대를 역행하는 수구냉전세력들을, 2002년 대통령 선거, 2004년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연달아 심판하며 미국과의 본격적인 대결을 향해 치달아왔다. 한편, 이른바 북핵문제를 둘러싼 정세가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긴장 국면으로 치닫자 미국을 등에 업고 미쳐서 날뛰고 있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을 반대하는 투쟁들이 전국민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이렇듯 우리 민족 대 미국의 대결이 본격화되고 반일운동이 전민족적으로 고양되고 있는 2005년 올해, 우리 민족은 6.15 남북공동선언 5년 간 단합된 남과 북 민족의 힘과 지혜를 모아 올해를 제국주의 미국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원년으로, 일본군국주의의 영토 침탈 위협을 극복하고, 그들과의 치욕스러운 과거를 청산하기 위한 총결산의 해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과 일본 양대 제국주의 세력을 반대하는 반외세민족자주화동을 새로운 높이에서 전개해 나가야 한다. 반외세 민족자주화운동의 고양, 반제민족민주운동의 힘있는 전개를 위해 필요한 여러 가지 과제 중 중요한 하나가 지난 100년간의 반외세자주화운동의 역사를 잘 돌이켜보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은 왜 100년간이나 외세의 예속 아래에서 신음해 왔는가 교훈을 찾고, 역사를 통해 100년간의 투쟁 속에서 우리 민족의 자주역량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투쟁하며 성장해 왔고 그 역량은 지금 어느 정도인지를 진단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민족의 나가야 할 길이 더욱 정확히 보이고 투쟁의지가 더욱 견결해 질 수 있다.

반외세 자주화운동 100년사를 잘 돌이켜 봄으로써 일제 강점 100년, 미군 강점 60년 치욕의 세월을 끝장내고 민족의 자주와 존엄을 높이 떨치는 길에 앞장서자! 반제 민족자주화 운동을 새로운 높이로 전개하자!(편집자)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민족의 반미항전이 시작된 시기를 미군이 조선을 강점한 1945년 9월 8일로부터 찾아 왔다. 물론 한반도 이남에 미군이 진주하면서 미국의 식민통치가 시작되었고 이에 따른 민중의 반미항전이 시작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의 조선점령정책이 준비되고 추진되었던 시기는 이보다 한 세기가 빠른 19세기 중엽부터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 글에서는 우리민족의 반미항전의 시작을 1866년 미국 군함인 <제너럴셔먼호>의 무력도발과 당시 조선민중의 항거에서부터 찾고 19세기 중엽부터 준비되기 시작한 미국의 조선점령정책을 부연코자 한다.


1. 19세기 중엽 미국의 조선점령정책

1834년 5월 13일, 미국의 특별사무관 에드먼트 로버트는 본국의 국무장관에게 행한 귀국보고에서 㰡’조선의 반식민지적 상품시장 가치㰡“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는 당시 미국의 조선정책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이후 미국의 조선침략과 점령정책의 시발로 되었다.

19세기 중엽 미국의 조선정책은 당시 미국이 추진하고 있던 팽창주의와 그에 따른 아시아침략정책과 잇닿아 있었다.1830-40년대에 미국사회는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자본축적의 과정을 거쳐 거대 독점자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형성된 미국의 독점자본은 중계무역을 통해 이익을 보아왔던 단계를 넘어 약소국을 식민지, 반식민지로 전락시켜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제국주의 단계로 서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미국은 아시아를 반식민지적 상품시장으로 만들기 위해서 아시아의 여러 약소국가들에게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강요하는 침략책동인 이른바 <함포외교>를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무력을 앞세워 체결한 1844년 중미통상협정, 1854년 미일화친조약 등이 그것이다.

같은 시기에 조선에서도 미국의 함선이 경상도 동래부 용당포, 강원도 통천등지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1860년대 들어와서 미국은 조선에 대한 점령정책을 구체적인 실행단계로 옮기기 시작하였다.

1860년대에 미국사회는 남북전쟁에서 북측의 산업자본가들이 승리하게 되자 더욱 큰 폭으로 아시아에 대한 침략정책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에 대한 지배의 욕구가 커지자 조선에 전초기지,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에 대한 욕구도 커지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1865년 8월 미국배 한척이 경상도 영일현 암곡진에 나타났고, 1866년 3월 샌프란시스코 선적의 한 미국배가 경상도 부산을 침범하였으며, 1866년 6월에는 미국 배 서블라이즈호가 평안도 철산 부선사포 선암리에 나타났다고 한다. 미국의 아시아침략교역이 빈번해지자 조선반도 근해에서의 표류와 정박이 잦았던 것이다.

지정학적으로 볼 때 미국에게 조선은 가장 안성맞춤인 아시아침략의 전초기지, 교두보였다.

1866년부터 미국의 상원에서는 조선침략계획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침략계획의 골자는 종래의 중국(중미통상조약), 일본(일미화친조약)과 같은 형식으로 무력도발을 통한 불평등한 조약체결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2. 미국의 3차에 걸친 무력도발과 조선민중의 항전

미국이 조선에 대한 침략계획과 점령정책을 추진하던 시기의 조선사회는 여전히 봉건적 정치경제체제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정치와 경제의 봉건성으로 인해서 조선민중들의 자주적 진출은 더딘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으나 기존의 관념적인 유교사상을 대신하는 실사구시의 실학사상이 널리 퍼져가고 있었고 주변국가들의 잇따른 조선내정 개입에 반대하는 반외세자주의 요구도 나날이 높아가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민중운동은 조선사회의 봉건적인 정치, 경제적 여건상 아직 반외세, 반봉건투쟁을 펼칠만한 세력으로 존재하지 못했다. 민중운동세력의 부재로 조선민중의 반외세 항전은 분산적이고 산발적일 수밖에 없었다.

1) 1차 무력침공 <제너럴셔먼호>사건 (1866년 8월)

1866년에 들어 미국은 그동안 준비해 두었던 조선침략과 점령정책을 구체적으로 집행하기 시작하였다. 군함 <저네럴셔먼>호를 앞세워 조선에 대한 무력침공을 감행한 것이다.
<제너럴셔먼호>는 8월 15일 대동강 하류에 도착하여 강을 거슬러 올라 8월 22일에는 평양성 밖의 두노도까지 침입하였다. 평양 근처에 다다른 <제너럴셔먼호>는 만경대에 이르러 군인들을 상륙시켜 부녀자를 폭행하고 조선군관을 납치하였다. 또한 쌀 1000석과 금, 은, 조선인삼등을 요구하며 연안의 주민들에게 총포를 난사하기 시작하였고 주변의 조선배들에 난입하여 무고한 조선민중을 학살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조선정부는 신식무기로 무장한 <제너럴셔먼호>의 무력도발에 이렇다 할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너럴셔먼>호를 격퇴하고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평양민중들이 궐기하기 시작했다. 8월 31일부터 <제너럴셔먼>호를 격퇴하기 위한 총공격이 개시되었다. 신식무기로 무장한 <제너럴셔먼호>와 미국 침략군대를 구식무기로 대항해야 했던 조선민중은 적지 않은 피를 흘려야 했지만 조그마한 배에 불을 붙여 <제너럴셔먼호>쪽으로 흘려보내는 창의적 전술과 과감한 육박전을 벌여 납치된 조선군관을 구출해냈고 마침내 9월 2일 미국의 침략선 <제너럴셔먼호>를 완전히 격멸하였다.

이 <제너럴셔먼호>사건은 미국이 조선에 행한 최초의 무력도발임과 동시에 조선민중이 힘으로써 미국 침략군에 대항해서 승리로 일구어낸 최초의 반미항전이었다.

2) 2차 무력침공 <셰난도어호>사건과 남연군묘 도굴 (1868년 4월)

1차 무력침공이 실패하자 미국은 <셰난도어호>와 <도굴단>을 앞세워 다시금 2차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이때 미국이 <도굴단>을 조직하여 남연군묘 도굴을 병행한 이유는 무력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여러 축으로 조선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술수였다.

미국은 1868년 4월 초순 <제너럴셔먼호>를 수장시킨 세력을 “정벌”하겠다며 군함 <셰난도어호>를 시켜 2차 무력도발을 감행하였다.대동강 하구에 침입한 <셰난도어호>는 한달 남짓 약탈과 무력을 행사하며 조선에 위협을 가하면서 조선정부에 ‘최후통첩’을 들이밀었다.
당시 기록은 “요즘 어리석은 침략자들이 자신의 분수도 모르고 뉘우침 없이 재차 침입하는 것은 어리석은 까닭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적의 만행에 치를 떨면서 그들에게 반격을 가하려고 주먹을 움켜쥐고 있다”(기성창의록)라고 미국을 단죄하는 애국적 민중의 소리를 전하고 있다.

미국은 <셰난도어호>를 대동강에 들여보내 조선민중을 학살하며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젠킨스(Jenkins F)를 시켜 중국 상하이를 근거로 활동하던 오페르트(Oppert, E J) 등 총 140명으로 <도굴단>을 구성하여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해서 시체와 부장품을 이용하여 조선정부와 블평등협정 체결문제를 흥정하는 양동작전을 감행하였다.
<도굴단>은 <차이나호>, <그레타호>등 기선 두 척을 끌고 같은 해 5월 10일 충청남도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하여 덕산군청을 습격하고 민가를 약탈하였으나 남연군묘 도굴에는 실패 하였다. 당시에 <도굴단>의 대표격인 젠킨스는 21개 조항의 불평등협정을 이미 준비해 두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은 즉각 젠킨스 <도굴단>에 대한 격퇴를 시작하였고 민가를 습격하고 관청을 습격한데 격분한 조선민중의 항전이 결합되면서 젠킨스 <도굴단>은 영종도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젠킨스 <도굴단>은 영종도에서 대열을 정비하고 조선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내어 다시금 협박하기 시작하였다. 그 최후통첩에는 “우리도 묘를 파헤치는 것이 사리에 어긋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러나 전쟁을 일으켜서 민중을 괴로운 도탄에 빠뜨린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부득이 도굴을 하였다. 파헤쳐서 나온 관을 여기까지 가져오려고 했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여 중지하였다. 나라의 안전을 원한다면 우리의 요구에 즉각 응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수개월 이내에 조선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를 것이다”(고종실록 5권 1868년 4월 23일)라는 내용의 협박이 담겨져 있었다.

이 최후통첩 직후인 5월 18일 젠킨스 <도굴단>은 다시 영종도에 상륙하였는데 당시 조선군은 즉각적으로 응전하여 젠킨스 <도굴단>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물러가게 되었다. 2차 무력침공의 선봉대격인 젠킨스 <도굴단>이 패퇴하여 물러가자 대동강변에서 조선민중을 학살하고 위협을 감행하던 <셰난도어호>도 결국 물러가게 되었다.

2차 무력도발과정에서도 보여 지듯이 미국은 조상의 묘까지 파헤치는 만행을 감행하면서 까지 조선과의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체결하려고 기도하였다. 아는 그만큼 미국의 아시아침략에서 조선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3) 3차 무력침공 <신미양요>(1871년 5월)

1868년 7월 미 국무성은 2차 무력도발도 실패했다는 정식보고를 접수하고 중국주재 대사로 일한바 있는 윌리엄을 책임자로 세워 대대적인 무력침공을 준비시켰다.미국의 기함 <콜로라도호>, <알래스카호>가 1869년 4월 뉴욕을 출발하였고 <페니시아호>는 그것에 앞서 3월에 포츠머드를, <컹뵌>는 6월 보스턴을 떠나 중국 인접 바다로 모여들었다.

이미 극동지역에 파견되어 있던 <모노카시호>와 <아슈루트호>까지 합세하여 대규모 함단을 이루었다. 이는 당시 미국이 해외침략에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무력으로 평가된다.미국은 1869년, 조선침략의 총사령관으로 중국주재 미국 공사 로이를 임명하고 침공을 준비했다. 당시 중국내의 정세가 좋지 않아서 잠시 시기를 고르던 도중 마침내 1871년 5월 30일에 <콜로라도호>등 5척의 군함과 80여문의 대포, 1230명의 군대를 싣고 조선에 대대적인 3차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미국은 1, 2침공 때와는 달리 협상이나 교섭요구도 없이 전면적인 침략을 감행하였다.
6월 1일 강화도 해협의 군사상의 요충지인 손돌항에 <모노카시호>를 돌입시켜 침략전쟁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 초기 전투에서 미국은 조선군대의 결사항전에 막혀 물러나게 되었다.첫 전투에서 패한 미국은 아예 초기에 통째로 서울을 함락하기 위해서 전투를 대대적으로 확대시켜 강화도의 요새로 전면전을 걸어 왔다.6월 10일 미국은 주력부대를 강화도 남부의 초지진에 상륙시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날 대규모전투에서 조선의 초지진의 수비병들은 용감하게 <야간습격전>을 조직, 전개하여 150여명의 미국 병사를 섬멸하였다. 심대한 타격을 입은 미국은 다음날 6월 11일 광성진으로 진격하여 승세를 잡고자 하였으나 역시 패배하고 말았다.결국 3차례의 전투에서 미국은 모두 패배하였고 상당기간 준비한 대대적인 3차 무력 도발도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전쟁결과를 기록한 미국문서에는 “....조선 정부에 대해서는 조금도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조선정부가 그 태도를 바꾸리라고 생각되는 징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미국외교문서1871년~1982년 129쪽)라고 기록되어 있다.

3차에 걸친 미국의 무력침공을 막은 조선민중은 외세침략세력들에게 한치의 땅도 내어 줄 수 없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제너럴셔먼호>를 몰아내는 결정적 역할과 남연군 묘 <도굴단>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조선민중이 보여준 기개는 남달랐다. 이후 미국은 3차에 걸친 무력침공 패배의 교훈으로 ‘직접적인 무력침공을 통한 점령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일본 군국주의자들을 동원하여 조선을 타고 앉는 새로운 조선점령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3. 미국의 조선점령정책의 방향전환: 미일동맹을 통한 조선점령

미국의 3차 조선침공 실패는 미일관계에서 명확한 전환점으로 되었다.
미국하에서 무력을 키워온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조선침략을 하기 위해 미국의 지지를 얻어 보려고 이토 히로부미를 정부대표로 세워서 미국에 파견하였다.

이미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미국이 1차 무력도발에서 패배한 이후 ‘복수’를 하겠다며 아우성을 친 적이 있다. 다만 미국이 직접 조선을 점령코자 무력침공을 하는 상황에서 자신들이 뛰어들면 미국으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실질적인 조선침략은 미루어 두고 기회를 노려 왔던 것이다. 결국 이토 히로부미 일본대표는 미국의 조선점령정책이 방향전환을 하자 이틈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미국으로부터 조선침략을 해도 좋다는 승인을 얻어내었다.

1872년 1월 22일 뉴욕 해럴드 지는 “미국의 태평양정책”이라는 사설을 통해 “일본과 힘을 합쳐 반드시 조선침략의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미일동맹을 지지한바 있다. 미국은 침략적인 일본군국주의를 이용하여 조선침략의 길을 뚫은 다음, 그 성과를 가로채기 위해서 일본의 조선침략을 적극 지원하였다. 미국은 스미스와 리센틀 등을 일본정부의 고문으로 보내서 일본의 조선침략을 직접 지휘하였을 뿐만아니라 막대한 군사원조를 주기도 하였다.

미국의 후원을 받은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조선침략을 노골화하여 1878년 9월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무력으로 위협하고 조선의 부패하고 무능한 봉건통치층을 협박하여 1876년 2월에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미국이 일본군국주의가 뚫은 조선침략의 길을 따라서 조선점령을 실현하고자 하였음은 물론이다.


4. 미국의 일제강점 지원과 조선약탈

1) 일본을 조선점령과 아시아침략의 돌격대로

1880년대에 들어선 미국사회는 급격히 제국주의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다.
미국의 독점자본이 제국주의화되기 시작하자 미국의 아시아침략정책과 조선점령정책은 한층 더 노골화되었다.

1878년 4월, 미 상원 해군위원회 위원장 서젠트의 발의로 상원에서 ‘일본의 호의적인 알선을 받아들여’ 조선과의 불평등조약을 체결할 것을 심의하였고 그 전권대표로 슈헐트를 임명하였다. 1880년 4월 슈헐트가 주일대사 빈캄과 함께 일본정부에 조미조약을 알선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정부에 의해 주선된 조미간의 협상은 미국이 제시한 불평등한 협상안의 내용으로 인해서 수차례나 결렬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조선의 봉건 지배층을 위협하고 일본막觀壙 조선을 보호해 주겠다는 감언이설로 결국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불평등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은 미국이 지난 1830년대부터 계획했던 조선점령정책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최혜국대우’, ‘치외법권’, ‘교회설립’, ‘항구개항 및 조차지’등의 조항들이 명문화되면서 조선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침탈을 합법적으로 인정받은 셈이 되었다.

미국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발판으로 조선에 대한 정치, 경제, 문화적 침략을 감행하는 한편, 일본의 조선지배를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준동했다.일본의 조선침략과 봉건적 통치배들에 대한 반대로 궐기한 군인들과 민중들의 항쟁(임오군란)을 진압하고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증대시킨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당시 일본정부는 임오군란을 빌미로 위문금과 손해배상금을 지불할 것, 일본공사관에 일본측 경비병을 주둔시키는 것 등을 조선정부에 요구하였다. 일본의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겠다는 것은 이미 당시 조선이 무장해체된 것이나 다름없는 조건에서 조선을 군사적으로 강점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요구였다. 당시 일본정부의 고문을 미국이 파견하고 있었다는 점과 미국이 일본군대의 조선진주를 사실상 찬성했다는 점 등을 생각해 볼 때, 미국이 일본의 조선침략을 적극 지원하였음을 잘 알 수 있다.

2) 조선에 대한 정치, 경제, 문화적 침략

임오군란 이듬해인 1883년부터 미국은 군사적 점령은 일본에게 맡기고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지배를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① 정치적 침략
임오군란이후 미국은 조선정부에게 미국인 고문 및 육군장교를 초빙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인 메릴은 해관세무사가 되어 조선의 세관을 좌우하기 시작하였고, 에치슨이라는 미국인이 우편국의 고문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미국인 데니가 내무협판 겸 외무장교사로 되어 외교와 내정을 좌우하기 시작했고 미군 소장 다이, 대령 겐벨, 소령 리 등이 군사고문으로 들어와 조선군을 좌우하기 시작하였다.

② 경제적 침략
경제적 침략도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자본가들이 앞다투어 조선에 상회를 내고 석유, 담배, 설탕 등의 잉여상품을 가져다가 비싼 가격으로 팔고 조선에서는 금, 은 등의 귀금속을 약탈하다시피 가져갔다.

당시 미국이 조선경제를 침탈했던 자료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883년
자딘마제슨 상회, 인천-상해간 항로의 설정권 획득
아메리카무역회사, 울릉도 목재 벌채권 획득
미국인 비춰, 사금채집권 획득

1884년
에지슨 상회, 왕궁의 전등가설권을 획득
돌튼 상회, 부산-나카사키 장기간의 항로설정권을 획득
미국인 로젠바움, 유리공장 및 성냥공장의 설립권 획득
아메리카무역회사, 운산금광 탐사에 착수

1885년
타운센드상회, 화약공장 설립권을 획득

1886년
미국인 뉴엘, 조선연안에서의 진주 채집권을 획득

1887년
필라델피아 자본가그룹, 샌프란시스코에서 북태평양을 경유한 원상까지의 해저 케이블 부설을 계획

1888년
뉴욕은행, 부산, 인천, 원산항에서 관세 포탈을 시도

③ 문화적 침략
문화적, 종교적 침략은 일반적으로 뒤떨어진 후진국에 대한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정책으로 활용되었는데 미국의 조선점령정책에서도 여지없이 이용되었다.

미국은 비조선인에 대한 포교가 가능하다는 조선정부의 승인을 이용하여 합법적으로 포교활동을 진행하기 시작하였다.우리에게 익숙한 선교사들인 언도우드 1세, 아펜젤러, 스크렌트등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이들은 서양식의 병원과 학교를 지어 근대문명에 익숙치않은 조선인들을 이른바 ‘개화’라는 이름아래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미국이 종교를 등에 업고 조선에서 자선가, 계몽가 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 이다.
이들의 선교활동과 교육활동은 미국의 조선점령정책을 미화분식하기 위함이었을 뿐이었다.

3) 일제의 조선강점 적극 지원

①갑오농민전쟁 개입
1894년, 조선에서는 대규모의 조직적인 반외세, 반봉건민중항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봉건통치배들에 의한 착취로 민중의 삶이 어려워지고, 외세의 개입으로 민족의 자주권이 위태하게되자 농민들이 고부농민봉기를 계기로 농민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갑오농민군은 줄곧 <척왜양>과 <보국안민>의 기치를 내걸어 외세의 침략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보여 주었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자행되자 제2차 농민전쟁을 일으켜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조선민중의 유례없는 대규모의 조직적인 반외세, 반봉건 민중항쟁은 미일제국주의를 놀래켰다

당시 미국공사 씰은 1894년 3월 17일자로 본국에 행한 보고에서 “토벌에 나선 조선봉건지배층의 군대는 신뢰할 수 없다”고 하며 미국함대를 파견해 줄 것을 제기 하였다. 미국은 군함 2척을 우선 파견하고 후에 4척을 더 파견하여 갑오농민전쟁이 유사시 조선의 봉건정부를 뒤엎고 미일등 외세를 몰아내는 투쟁으로 번질 것을 대비했다. 또한 일본군대의 갑오농민군에 대한 무력진압을 승인함으로써 조선에 뿌리내린 일본과 미국의 영향력을 존속시키고자 하였다.

② 청일전쟁 조작
갑오농민전쟁을 진압한다는 명목하에 들어온 일본과 청나라 군대간의 충돌을 우려하여 조선정부가 미국에게 중재를 요청하였으나 미국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미 일본을 타고 앉아 조선을 점령하고 대륙으로 진출할 계획을 세워둔 미국이 이 중재에 응할 리가 없었다. 또한 미국은 청나라 정부의 중재요청도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들어 거절하였다. 조선에 와있던 외세 중 가장 큰 정치세력인 미국이 청일간의 분쟁을 중재하지 않겠다는 것은 전쟁을 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자 미국의 언론들은 “어제까지 아시아적 국가에 불과했던 일본은 세계의 강국의 하나로 아시아 최강의 나라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일간지 리뷰), “일본은 이제 아시아의 미래를 좌우하는 나라들 가운데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빗시버그), “현대의 청국황제 보다도 터기의 슐탄 보다도 역사상 로마의 아우구스투스와 프랑스의 나폴레옹도 미칠수 없다”(뉴욕선)며 일본의 승리를 축하하는 글들을 실어 미국의 일본 지지입장을 세계에 공표하였다.

③ 가쓰라-테프트 비밀협정체결
1905년 7월 29일, 일본을 방문한 미국 육군장관 테프트와 일본수상 가쓰라 사이에서 비밀협정이 맺어졌다.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조선에서의 ‘경제적 이권’을 인정하고 미국이 일본의 조선강점을 지지한다는 악명 높은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정이 그것이다.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정은 일본을 앞세워 조선을 강점하고, 그 위에 타고 앉아 조선의 경제와 정치를 좌우하고 대륙진출의 교두보로 삼는募 미국의 조선점령정책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④ 을사보호조약 지원과 미국 공사관 철수
1905년 11월 17일 조선에서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정치를 실시하여 일본의 식민지배 체제를 수립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이 일본의 위협아래 체결되었다. 당시 조선정부의 외교고문인 스티븐스는 이러한 조약을 체결하는데서 일본정부를 지원하였다.
조약이 체결되고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미국은 ‘을사보호조약’체결을 바로 인정하고 조약체결 5일만에 조선주재 미국공사관을 폐쇄하고 동경주재 미국 공사관에서 조선관련 외교업무를 관장할 것을 통보하는등 을사조약의 국제적 인정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이후 미국은 조선이 완전 일본에 합병될 때까지 일관하게 일본의 조선식민지배를 지지하고 찬동하였다

4) 일제 강점기 미국의 조선약탈

일본군국주의를 타고앉아 조선을 잠식한 미국은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이후에 조선에 대한 약탈을 더욱 강화하였다.

① 일본식민지배 정당화
이미 일본과 수직적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미국은 조선에 대한 정치적 지배를 직접 강화하는것 보다는 일본의 식민통치가 무너지지 않도록 정당화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미국은 일제강점을 반대하는 조선민중의 투쟁을 무력화시키고 세계 여러 나라들의 비난을 무마시키기 위해 일본의 조선강점을 정당화하였다.반일과 조선독립을 외치며 조선민중이 들고 일어선 3.1봉기에 대해 미 국무성은 “조선문제는 전적으로 일본내정문제”라며 “폭동진압을 위해 일본정부가 취한 태도에 대하여 여러 가지 비판적인 보도가 유포되고 있지만 이것은 대단히 의심스럽다”고 발표하여 일본의 조선강점을 기정사실화 하였고, 3.1봉기를 폭동으로 규정하였으며, 일본의 무력진압과정에서 잔인하게 조선민중을 학살한 행위는 유언비어로 둔갑시켰다.

또한 가쓰라-테프트 비밀협정을 통해 일본의 조선강점을 적극 지원한 미국은 미일간의 야합을 통해 조선을 점령했다는 국제적 비난을 회피하기 위해 대대적인 여론조작을 시작하였다.
당시 미국의 대표적 신문인 보스턴 해럴드지는 “일본의 조선지배가 조선의 폭정을 개선했다”며 일본의 조선강점을 찬양하였고 뉴욕 이글지는 “만일 일본이 조선을 구원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동양평화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의 수단으로써 조선반도를 제국영토의 일부로 만들었던 것이다”라며 역시 일제강점을 찬양하였다.

② 경제적 침탈
미국의 경제적 침탈이 얼마나 크게 늘어났는지는 미국이 조선에 내다 팔은 잉여생산물 액수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1910년 32만 2천원 이었던 대(對) 조선 수출액은 1937년 2천 71만 1천원으로 80배나 증가하였다.미국은 1921년 평양에 설립한 전분공장을 비롯한 조선내의 여러 곳에 기업소를 설립하였으며 1924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채무형태로 1990만원을 투자하여 조선농민에 대한 착취와 수탈에 적극적으로 달라붙었다. 운산금광은 당시 수천명의 조선인 노동자를 고용하여 1903년에서 1928년의 25년간 8200만원의 금을 채취해 갔다.
미국은 상당수의 금광채굴권 및 벌채권, 항로 설정권등을 거머쥐고 이익을 최대한으로 만들어 내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은 미국과 일본 양측으로부터 착취를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③ 문화적 침략
미국의 문화적, 종교적 침략도 그 도수를 더해 갔다.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가 1910년 현재 454명이었는데 그중 306명이 미국인 선교사였다. 이들은 교회 및 교리 강습소를 2300개나 만들어 조선에서의 포교활동을 하였고 평양에 숭실전문학교, 서울에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등을 세워 교육활동도 하였으며 자혜병원, 기홀병원, 세브란스병원등 26개의 기독교 병원을 세우는 의료활동도 하였다.이러한 미국의 문화적, 종교적 활동은 미일의 조선점령과 강점을 미화분식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으며 숭미사대주의를 퍼뜨리는 공간으로 이용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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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남조선 식민지예속화책동과
조선민족의 반미민족해방투쟁

: 1945년부터 1950년까지 (1부)

<미군강점60년 기획특집>
군사분계선의 미군과 인민군


<순서>

보충: 조선에 대한 미국의 문화적, 종교적 침략의 해독성
1. 미일동맹의 파산
2. 해방조선의 정세
1) 조선의 해방과 미소의 조선분할
2) 민족주체역량의 형성과 활동
3. 미국의 조선 영구분할책동
1)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 왜곡
2)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
3) 미국의 남조선내 좌익운동 탄압과 친미우익세력 지원

지난 연재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였습니다.
또한 이 글에서는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고 이를 부연설명함에 있어 북한 또는 이북을 북조선으로, 남한 또는 이남을 남조선으로 표현하였습니다.(필자 주)


보충: 조선에 대한 미국의 문화적, 종교적 침략의 해독성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감행된 미국의 대 조선 침략행위 중 가장 집요하게 감행된 침략행위가 문화적, 종교적 침략이었다. 미국의 문화적, 종교적 침략행위는 정치적, 군사적 침략敾㎈릿 그 해독성이 컸다.

미국의 문화적, 종교적 침략은 교묘하게 교양자, 계몽자의 탈을 쓰고 감행되어 그 침략적 본질을 감추고 감행되었다. 미국의 문화적, 종교적 침략은 일찍부터 불법 선교활동을 통해 시작되었고, 불평등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감행되었다.

문화적, 종교적 침략행위의 해독성은 크게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① 숭미사대주의 유포와 식민지배 미화분식
문화적, 종교적 침략행위의 가장 큰 해독성은 미국이 유포한 숭미사대주의로 인해서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침략본질이 감춰지는데 있다.

미국은 교육, 의료, 선교, 구호활동을 하면서 조선민족에게 미국이 ‘자유의 나라’이며 ‘미국만이 조선의 후진성을 극복시켜 줄 선진국’이라는 인상을 갖게 하였다. 알다시피 미국은 조선에 그 무슨 교양자, 계몽자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철저히 침략자, 강점자로 들어왔다. 따라서 미국의 교육, 의료, 선교, 구호활동은 이러한 미국의 본질을 감추는데 적극 이용된 것이다.

이 결과 미국의 간계에 놀아난 일부 어용독립운동가들은 침략자 미국에게 도리어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이른바 ‘외교독립’운동을 펼치기까지 하였다.

이 숭미사대주의는 오늘날 급격히 앙양된 한국민중의 반미자주화투쟁으로 많이 퇴색되었으나 여전히 적지 않게 남아서 한국의 자주화를 발목잡고 있다. 최근, 주한미군이 교육활동,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도 숭미사대주의를 유포하여 자신의 범죄행위를 감추고자 하는데 있다.

② 공미주의 유포
숭미사대주의의 저변에는 미국을 ‘절대적’으로 보는 공미주의가 견해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이 공미주의는 오늘날 우리 한국민중의 반미자주화투쟁의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의 강도적인 이라크파병요구에 대해서 파병을 하지 않았을 때 미국으로부터 받을 불이익을 고려하여 ‘어쩔 수 없이’ 파병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는데 이러한 주장도 공미주의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공미주의는 아직도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다.

③ 민족허무주의 유포
"민족성이 부족한 조선민족이 선진 미국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숭미사대주의는 결국 조선민족이 ‘민족성이 부족한’ 열등한 존재라는 민족허무주의를 전제로 한다. 선교, 교육, 의료, 구호활동을 통해 교육자, 계몽자의 감투를 쓴 미국은 숭미사대주의, 공미주의, 민족허무주의를 유포하는 방식으로 문화적, 종교적 침략을 가하여 조선민족의 자주적인 사상의식을 무장해제 시키고 노예굴종사상으로 채워 넣고자 했다. 이를 통해서 반제자주의식, 조국통일의식을 말살코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지난 100년간 펼쳐온 반미항전을 통해서 미국이 한반도의 강점자, 침략자라는 것을 똑똑히 인식하게 되었다. 이제는 일부 친미수구세력들이 남아서 이제 그 명을 다한 숭미사대주의, 공미주의, 민족허무주의를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마지막 책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1. 미일동맹의 파산

조선을 감점한 일본은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조선을 발판으로 하여 아시아,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이는 역시 조선을 전초기지로 삼아서 아시아대륙으로 진출을 기도하고자 하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와 상충되는 것이었음으로 미일제국주의간의 모순은 차츰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미일제국주의간의 모순의 격화는 이미 일본이 조선을 강점했을 때부터 배태되어 있었다.

미일동맹은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계기로 차츰 깨어지기 시작했다.
1930년대 초, 만주는 조선의 새로운 항일무장투쟁세력의 등장과 함께 조선독립운동의 진앙지로 전변되기 시작하였고, 중국 공산주의 운동의 활무대로 되었다. 만주를 거점으로 하는 조선과 중국의 민족해방운동역량의 성장은 미일제국주의 모두에게 위협으로 되었음으로 미일은 제국주의적 모순이 격화되었지만 일단은 만주에서 조선과 중국의 민족해방운동세력을 진압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여겨 미일동맹을 유지하면서 조중민족해방운동역량을 진압하기 위한 조치로서 1931년 9월 18일에 만주사변을 단행하였다.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군대를 동원하여 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점차 오만해져 미국과의 예속적 동맹관계를 청산하고자 하였다. 결국 만주사변을 계기로 미일동맹은 점차 깨어져 마침내 1940년대에 들어 미일 제국주의간의 전쟁인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완전 파기되었다. 미일동맹의 파기이후, 미국은 대 조선정책, 대아시아정책을 직접 점령통치 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2. 해방조선의 정세

1) 조선의 해방과 미소의 조선분할

1945년 8월 15일, 일본왕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조선 등 일본이 점령한 식민지나라들의 영웅적 반일민족해방투쟁과 소련군대의 참전, 태평양전쟁에서의 결정적 패배는 일본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다. 조선의 해방은 조선민족의 반일민족해방투쟁의 승리이자, 2차 세계대전에서 반제반파쇼입장을 갖고 싸운 모든 진보적 인류의 승리였다.

그러나 해방된 조선은 자주독립과 정권수립을 열망하는 조선민족의 염원과는 딴판으로 흘러갔다. 미국과 소련간의 이해관계에 의해 나라가 양분되는 비극적 사태를 맞이한 것이다.

조선 대한 미소간의 이해관계는 본질적으로 대치되었다. 미국은 이미 19세기 초부터 조선을 자국의 식민지로 삼아 수탈을 감행하고, 아시아침략의 전초기지로 이용하고자 조선점령을 계획해 왔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소련은 조선에서 사회주의 국가 혹은 자주적인 독립국가가 건설되기를 원했으며, 적어도 미국의 영향을 받지 않는 중립적 정권이 수립되기를 원했다. 이러한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결국 해방조선은 북위 38도를 기준으로 북조선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고 남조선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분단되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간의 상반된 이해관계는 당시 조선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던 건국운동, 인민위원회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났다. 북조선에 진주한 소련은 북조선에 건설되기 시작한 각급 인민위원회를 인정하고, 일제로부터 넘겨받은 행정권을 즉각 이양하였다. 소련은 해방 후 6일째인 8월 21일 함경남도 함흥의 행정권을 자치조직이었던 함경집행위원회에 이양하는 것을 시작으로 지역 정권기관들에게 행정권을 이양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방조와 조선민중의 자발적인 인민위원회 수립은 새 조국 건설운동과 맞물려 큰 폭으로 전개되면서 마침내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기에 이르렀다.

미국은 태도는 소련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미국은 9월 7일, 미태평양 방면 총사령부 포고 1호, 2호를 발표하였는데 이 포고령의 중심내용은 첫째, 남조선에서 ‘미군정’을 실시하겠다는 것, 둘째, 기존의 일제 식민통치기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종사원들도 그대로 유지할 것, 셋째, 미 점령군에 반하는 자는 사형 등의 처벌을 하겠다는 것 등 이었다. 군정을 하겠다고 선포한 미군이 조선민중의 인민위원회를 인정할리 없었다. 미군은 남조선의 각급 인민위원회를 무시하였고 해산령을 내리고 전면탄압하였다..

이렇듯 남과 북에 진주한 소련과 미국은 본질적으로 대치했다. 조선민족의 뜻과는 무관하게 결국 조선은 남북으로 갈리고 만 것이다.

2) 민족주체역량의 형성과 활동

① 항일운동세력들의 개선

조선말기, 조선민중은 조직화되지 못한 상태로 미국과 일본 등의 외세와 항전을 해야 했으며 봉건 통치배들과도 싸워야 했다. 지도조직과 대중조직의 부재로 조선민중의 항전은 분산적이었고 산발적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 지향과 목표도 뚜렷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조국을 되찾기 위한 반일민족해방투쟁이 펼쳐진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굳건한 조직적 역량들이 자라났다.

그 중 이념적, 조직적, 대중적 토대가 가장 튼튼했던 세력이 바로 항일무장투쟁세력이었다. 이들은 이미 1930년대 초에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노선을 정립하고, 항일무장투쟁을 기본 투쟁형태로 삼고 활동해 왔으며, 광범위한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펼치면서 자신들의 주위에 조선민중을 굳게 결속시켰다. 이 항일무장투쟁세력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1930년대부터 무장투쟁을 조직, 전개하기 시작한 항일무장투쟁세력은 일본 관동군과 치열한 무장투쟁을 벌이면서 자신의 대오를 더욱 확대, 강화하였고 마침내 1945년 8월 8일에 조국해방을 위한 최후진공작전을 감행하였다.

1945년 8월 8일, 항일무장투쟁세력 산하의 조선인민혁명군은 함경북도 선봉군을 해방시켰으며, 이어 은덕일대와 새별일대를 전격 해방시켰다. 또한 선봉에 상륙하여 일제와의 전투를 확대하면서 나진, 청진으로 계속 진격하면서 연이어 조선 북부의 여러 지역들을 해방시켜 나갔다. 이들은 조선의 산악지대들에 낙하할 ‘항공육전대’들의 출동준비를 하면서 조선의 전면적 해방을 위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고자 하였다. 이들의 최후 진공작전이 시작된지 불과 1주일도 못되는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은 항복을 하고 만 것이다.

항일무장투쟁세력이외에도 상해임시정부세력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해온 여러 세력들이 해방을 맞아 속속 조선으로 개선하기 시작하였다.이들은 각각 남조선과 북조선에 위치하면서 새 조국 건설을 위한 조직을 건설하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② 인민위원회 건설과 활동

그 동안 어용학자들은 해방된 조선은 자체의 정권과 국가를 건설한 역량이 못되었다고 가르치며 미군정의 통치를 필연적이었다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항일무장투쟁세력, 상해임시정부세력 등 도처에서 반일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한 역량들의 귀환과 애국적 민중들의 조직적인 건국운동은 해방된 조선이 외세의 개입 없이도 얼마든지 자기 힘으로 정권과 국가를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특히 해방과 함께 남, 북조선 도처에서 건설된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평가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인민위원회는 해방이후 민중의 손에 의해 자생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정권기관’이었다. 이 인민위원회는 1945년 8월말 현재, 전국적으로 145개지역에서 구성되었고 10월 말까지 전국 13개 도, 21개 시, 215개 군에 조직되었다.이렇게 등장한 인민위원회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실질적인 통치기능을 수행했다. 각급 인민위원회의 강령과 활동은 새 조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조선민중의 지향이 반영되어 있었다.

일례로 통영군 인민위원회 강령의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상남도 통영군 인민위원회 강령
첫째, 모든 일본인 재산은 한국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둘째, 토지와 공장은 노동자, 농민에게 속한다.
셋째, 모든 남녀는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③ 각급 대중단체들의 건설

해방과 함께 조선의 대중운동은 급격한 앙양을 맞이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청산과 봉건주의 청산을 위한 투쟁이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들 속에서 광범위하게 펼쳐졌다. 당시 노동자들은 인민위원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한편, 일제가 운영하던 공장, 기업체들을 되찾아 자신의 힘으로 관리하고 운영하고자 노력하였다. 농민은 자기의 향토를 굳건히 지키면서 친일지주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조직하였으며, 학생은 사회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활동에 나섰고, 애국적 지식인들도 새 조국 건설에 적극 참여 했다. 각계각층의 애국역량이 건국사업에 광범히 합류하는 과정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갖는 여러 대중단체들이 출현하였다. 남북이 분단된 조건에서 각계의 대중단체들은 같이 건설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따로 건설되기도 하였다.

남조선의 대중단체들의 설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창립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각지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각급 노동조합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기 위한 산별노조도 건설되었으며, 이에 기초하여 1945년 11월에는 1,680여 개의 노동조합들을 16개의 산업별 조직에 결속하고 전국 11개 지방평의회를 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결성되었다. 전평은 1946년 2월 현재 그 산하에 50여만명의 노동자를 묶어 세웠다. 농민들은 농민동맹, 농민조합, 농민위원회 등 농민의 자주적인 대중조직들을 묶어서 1945년 12월에 단일한 조직인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으로 통합시키고 그 산하에 빈고농을 중심으로 2백만의 농민을 묶어 세웠다. 청년학생들도 1946년 4월에 조선민주청년동맹을 건설하였고, 여성들도 1945년 12월에 조선부녀총동맹을 결성하였다. 애국적 지신인들도 1946년 2월에 각계조직을 통합하여 조선문화단체총연맹을 결성하였다.

북조선에서는 1946년 1월 16일에 북조선민주청년동맹이 결성되었고 1월 31일에는 북조선농민동맹이 결성되었으며, 5월 10일에는 북조선민주여성총동맹이 결성되었다. 5월 25일에는 북조선직업총동맹이 결성되는 등 남북조선민중들의 자주적 대중단체들이 속속 결성되어 새 조국 건설을 위한 조직적 지반으로 되었다.


군사분계선에서의 대치상황

3. 미국의 조선 영구분할책동

미국은 1945년 9월 8일에 남조선에 군대를 진주시키고 9월 11일에 미군인 아놀드를 군정장관으로 임명하여 본격적인 식민지배를 실시하였다. 미군의 강점과 군정청의 설치는 이후 오늘날까지 이어온 남조선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배의 시발로 되었고, 이때부터 조선민족의 반미항전은 반미민족해방투쟁의 차원에서 펼쳐지게 되었다.

남조선을 점령한 미국은 일본의 식민통치기관과 친일관료, 친일경찰 등 민족반역세력들을 그대로 유지시키며 그들을 이용하여 남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를 시작했다. 미국은 특히 남조선을 영구적으로 분할점령하려고 여러모로 획책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의 파산

1) 모스크바 3상회의 왜곡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 소, 영 3상회의에서 조선문제가 결정되었는데 미국은 이를 왜곡시켜 조선의 영구분단을 꾀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내 각 계층의 모든 민주세력이 참여하는 임시 조선 민주주의정부를 수립할 것
둘째, 임시정부와의 협의 하에 최고 5년간의 4개국(미, 소, 중, 영)에 의한 후견제 실시여부를 결정할 것.
셋째. 후견 기간에는 전적으로 조선인이 임시정부를 통해 스스로 통치할 수 있게 할 것.
넷째, 조선문제 해결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를 설립하고 조속히 논의할 것.

미국은 이전부터 30년간의 신탁통치를 주장해 왔으나, 전범국가도 아닌 조선이 30년씩 신탁통치를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음으로 미국의 주장은 받아들여 지지 않았고 소련의 주장이 받아들여 진 것이다. 이 3상회의 결정사항대로라면, 미국은 미군정을 해체해야 했고 5년뒤에는 남조선에서 완전히 떠나야만 했다. 결국 미국은 악의적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를 왜곡, 은폐시켜 심각한 조선의 국론분열을 조장하였고 이를 통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함을 무산시키고자 하였다. 미국에 우호적인 남조선의 언론들은 한결같이 ‘모스크바 3상회의는 소련의 주장에 의해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했다’는 날조기사들을 싣기 시작했다. 미국의 여론조작이 시작되자 조선에서는 ‘외세에 의한 신탁통치를 반대한다’고 주장하며 모스크바 3상회의에 의견을 제시한 소련을 반대하는 궐기대회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명망있는 독립운동가인 김구, 김규식이 반탁반소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면서 민심은 동요하였다. 이후 미국의 은폐, 왜곡사실이 공개되고 각계의 운동진영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이행할 것을 촉구하는 운동을 펼쳐졌다. 그러나 미국은 반탁반소운동을 통해 반소련, 반북조선, 반좌익운동을 진행하던 친미우익세력들을 양산하고 조직적 규합을 도모하게 되었다. 아울러 과거 친일세력들과 지주세력들이 힘을 더하면서 미국의 식민통치를 엄호해줄 우익집단은 더욱 커져갔다.

2)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1946년 3월 20일, 서울 덕수궁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사항인 조선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한 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다.

1차 미소 공동위원회는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미국측은 남조선에서 미국의 조작한 여론에 따라(또는 의도적인 지휘아래) 반탁반소운동을 펼친 친미우익단체들도 조선임시정부수립에 참여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소련측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왜곡하고, 악의적으로 반탁반소운동을 펼친 친미우익단체들이 조선임수정부수립에 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상식적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반대하는 친미우익단체들을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인 조선임시정부수립에 참여시키겠다는 미국측의 주장은 논리적 모순이었다. 미국이 의도했던 바는 차후 수립될 조선임시정부내에서 친미우익세력들이 다수를 차지하게 하여 전 조선을 자신의 식민지로 만들거나 또는 조선임시정부를 차후 결정적으로 파탄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 미소 공동위원회는 2차 회의를 열고 조선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논의를 더욱 진척시켰으나, 미 국무장관 대리 로버트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완전히 뒤집는 ‘유엔감시하의 인구비례에 따른 남북조선 총선거’를 주장하면서 그동안의 논의는 모두 허사로 돌아갔고 미소 공동위원회는 완전히 결렬되었으며, 조선민족의 통일정부수립도 어떠한 단초도 없이 무산되고 말았다.

30년간의 신탁통치를 제안했던 미국은 애당초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집행할 생각이 없었다. 결국 미국은 미소 공동위원회를 통해 시간을 끌며 미소대립, 남북대립, 좌우대립을 인위적으로 조장하여 조선의 영구분단을 획책한 것이었다. 이후 미국은 북조선을 배제한 ‘유엔감시하의 남조선만의 총선거’를 적극 추진하였고 이후 유엔에서 미국 측 나라들로 구성된 유엔조선임시위원회를 조작하고 남조선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남조선영구분할책동을 실천에 옮겼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논하기로 한다.

3) 미군정의 남조선내 좌익운동 탄압과 친미우익세력 지원

미군정은 ‘조선민족 자체의 힘에 의한 통일국가수립’을 주장해온 남조선내 좌익운동진영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남조선내에서 영구분할을 반대하는 세력을 완전히 없애고자 한 것이다.

사실 미 군정청이 감행한 탄압은 좌익에 대한 탄압이라기보다는 주체적으로 조선의 건국운동을 펼치는 모든 세력에 대한 탄압이었다. 1945년 10월 10일, 미 군정청 장관 아놀드는 성명을 통해 좌익이 주도하는 인민공화국을 부정하였고 같은 해 12월 12일에는 해산명령을 내렸다. 또한 남조선 전역에서 건설된 각급 인민위원회에 대한 해산명령을 내렸고 자진해산하지 않은 인민위원회에 대해서는 무장습격을 하고 간부들을 연행해 갔다. 1946년 2월 23일에는 정당등록법을 제정하여 좌익성향의 운동단체 또는 민족자주성향의 운동단체들의 활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으며 같은해 4월 23일 ‘인민보’, ‘자유신문’, ‘현대일보’ 등을 폐간시켰고 5월 15일에는 이른바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하였다. 1947년 8월 11∼14일에는 민족주의민주주의전선 중앙위 ·인민공화당 중앙위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중앙위 사무소를 폐쇄하고, 좌익계열 1,000여 명을 검거하는 등 미군정은 군정통치 3년동안 좌익에 대한 탄압에 열을 올렸다.

한편, 미국은 과거 친일민족반역자들과 結痼貫永湧 적극 기용하여 정치세력을 세워 내기 시작하였다. 1945년 10월 5일 군정장관 고문관에 친일민족반역자 김성수를 임명하였고, 친미성향의 11명을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1946년 2월 14일에는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의 친미어용기구로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민주의원’을 출범시키고 친미우익의 거두인 이승만을 의장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미군정은 미군청 안에 친미우익인사들의 보직을 마련하여 ‘남조선 과도정부’로 개칭하는 등 친미우익세력이 남조선의 정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여러모로 공작하였다.<계속> 2010/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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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남조선 식민지예속화책동과
조선민족의 반미민족해방투쟁

: 1945년부터 1950년까지 (2부)

<기획연재3>우리민족 대 미국의 대결 100년사

박제민 / 한국민권연구소 상임연구위원


반민족행위자처별특별위원회를 강제해산하는 미군정

<순서>

1. 미국의 조선분할정책과 식민지예속화정책
2. 조선 영구분할책동
(1) 1단계: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사항 무력화
(2) 2단계: ‘조선문제’의 불법적 유엔상정과 이른바 유엔조선위원단의 조작
(3) 3단계: 남조선만의 망국적인 5.10 단독선거 강행

3. 식민지 예속화책동
(1) 군사적 예속화책동
(2) 정치적 예속화책동
(3) 경제적 예속화책동
(4) 문화적 예속화책동

별첨: 미 태평양 방면 총사령부 포고 제 1호, 제 2호 전문

필자주: 본 기획연재 중 해방 후 5년을 다룬 ‘미국의 남조선 식민지예속화책동과 조선민족의 반미민족해방투쟁 :1945년부터 1950년까지’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특수하고 특기할 사변이 많은 관계로 3부로 나누어 작성하였습니다. 또한 당시 역사적 상황상 각각의 연재가 연관성이 크고 필자의 준비가 부족하여 중첩되는 내용이 다소 존재합니다. 이 점을 양해 바랍니다.

1. 미국의 조선분할정책과 식민지예속화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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