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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파키스탄:유일한 이슬람 핵무기 보유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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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3-16 00:02 조회4,1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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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이번에는 아시아의 이슬람 나라 가운데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인 <파키스탄> 역사를 살펴보았다. 그는 민족통신을 통하여 연구 고찰한 나라들을 기획연재로서
지금까지 발표한 아프리카 나라들, 아시아 나라들, 중동나라들, 남미나라들 합쳐 총 44개 국이 된다고
밝히면서 "이 나라들 모두가 제국주의 나라들로부터 극심한 피해를 받은 나라들이었다"고 분석했다.
<파키스탄>은 특히 지금 이 순간까지 미국과의 관계에서 불편을 겪고 있어 세계 주목을 받고 있는
나라이다. 파키스탄, 이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인가? [민족통신 편집실]



[기획]파키스탄:유일한 이슬람 핵무기 보유국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이번에는 아시아의 이슬람 나라 가운데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인 <파키스탄> 역사를 살펴보았다. 그는 민족통신을 통하여 연구 고찰한 나라들을 기획연재로서 지금까지 발표한 아프리카 나라들, 아시아 나라들, 중동나라들, 남미나라들 합쳐 총 44개 국이 된다고 밝히면서 "이 나라들 모두가 제국주의 나라들로부터 극심한 피해를 받은 나라들이었다"고 분석했다. <파키스탄>은 특히 지금 이 순간까지 미국과의 관계에서 불편을 겪고 있어 세계 주목을 받고 있는 나라이다. 파키스탄, 이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인가? [민족통신 편집실]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IMAGE##> 파키스탄은 우리 나라 남과 북을 합친 땅의 3.6배 가량되는 나라이며 인구 1억 5천만 중에서 97%가 무슬린으로 세계에서 2번째로 회교도가 많은 나라이다. 인구 수로는 세계에서 6번째 나라이며 나라의 규모로는 아시아에서 7번째로 큰 나라이다.

파키스탄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식 후 1947년 8월 15일에 인도에서부터 분리되어 독립을 쟁취한 신생 국이다. 그럼으로 파키스탄의 역사를 고찰하려면 1947년 8월 15일 이후의 역사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파키스탄의 고대사>와 <인도의 고대사>에 의하면 파키스탄과 인도는 장구한 역사 속에서 제각기 상이한 문명의 꽃을 피우면서 두 개의 원시적 나라들이 상이한 전통문화와 특이한 유적들을 서로 보존하고 있는 두 개의 나라 였다.

그런데 이 두 개의 나라가 1536-1761년에 이르러서 무굴 왕국이 인도대륙을 하나의 대국으로 통합함으로 인하여 <인도-파키스탄>은 두 나라가 아니라 <인도> 라고 하는 대국으로 등장하여 하나의 나라로 합병되었던 것이다.

그 후 부터 인도와 파키스탄은 하나의 국가로 등장하여 무굴왕조의 통치를 400여 년 동안 받게 되었다. 그리고1700년대에 이르러서는 서구의 여러 나라들의 침략자들이 인도 대륙을 마구 침범하여 이권을 독차지 하려고 싸우면서 인도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는데 1858년에는 교활한 영국이 인도를 단독으로 침략하여 식민지로 통치했다.

그러니까 파키스탄은400여 년 동안 인도와 합병된 운명 속에서 외세의 지배를 받아 오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종식 후에 1947년에 인도대륙의 합병에서부터 이탈함과 동시에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부터 해방이 되였다.

파키스탄은 이렇게 400여 년의 멀고도 먼 길을 걸어와 1947년에 드디어 신생 국으로 창건되었다.

1. 고대 파키스탄의 역사


인도문화 혹은 인도의 고대 역사를 말하게 되면 우선 BC 1500년경에 번창했던 인더스 문명을 상식적으로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는 인도가 아니라 파키스탄 이라고 하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바로 알지 못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인도 대륙의 북서쪽에 있는 히말라야 산맥의 빙하로 이루어진 인더스강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농사를 짓기 사작한 편자브 평원이 바로 오늘의 파키스탄 지역 이였다
파키스탄을 발원지로 하는 인더스 문명은 무려 4500년 전에 고도의 청동기 문명을 일으켜 우물과 화장실 그리고 목욕탕 등을 갖춘 도시를 건설했다. 하지만 인더스 문명은 1000년을 지속하다가 BC 1500년경에 몰락했다.

인더스문명의 몰락 후에 BC 9세기경에 이 지역에 아리안족이 인도 대륙을 향하여 이동해 들어와 갠지스 문명을 일으켰는데 이들은 반 유목민으로써 힌두교의 전신인 비딕종교의 엄격한 체제를 구축하여 초기 카스트 제도의 기초적 전통을 형성하고 있었다.

BC4세기경에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침입 이후에 인도의 서북지방은 외래세력들이 침투해 들어오는 통로가 되여 그리스와 터키 같은 세력들이 침입하여 문화 와 예술 그리고 언어와 종교의 흥망성세의 역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후 1-2세기에 이르러 쿠산 왕국이 등장했고 쿠산왕조는 불교를 도입하여 수천개에 달하는 불교사원을 지었으며 불교의 성지로 순례의 여행지가 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때 파키스탄의 쿠산 왕국의 지방명칭을 <간다라>라고 불렀다.

<간다라미술>이 중국을 거쳐 우리 나라 코리아에 들어 왔는데 이<간다라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유명한 <석굴암 불상> 이라고 한다. 파키스탄은 이렇게 우리 나라불교의 전통문화와 가까운 나라였다.

320-540년에는 굽타 왕조가 인더스강 유역을 포함한 인도북부 전역을 통치하면서 힌두교와 힌두문화의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다.8세기에 처음으로 이슬람 정복자들이 인도에 들어와 인도를 지배하였는데 13세기 술탄국을 창설하였고 16세기에는 아그바르 황제가 모든 세력들을 통합하여 <무굴 제국>을 창건하였다.

무굴제국의 창건으로 인하여 <인도-파키스탄>은 병합된 단일 국가의 영토가 되였는데 병합된 단일국가의 명칭은 <인도>라 불렀다. 무굴제국은 1526년부터 1761년까지 235년 동안 <인도- 파키스탄>이 하나로 병합된 <인도>를 통치했다.

1757년에<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를 침략하기 시작하여 다른 서구의 침략자들과 서로 경쟁을 하면서 인도를 독차지 하려고 싸움을 했다. 그러다가 1858년에 강력한 침략의 힘을 과시하는 영국이 인도를 독점하여 식민지로 삼고 200년 동안 식민통치를 했다.

인도에서 식민통치를 시작한 영국은 파키스탄을 <이슬람 지역>과 <힌두교지역>으로 양분하는 분리정책을 통하여 두 종교간의 갈등과 적대대감을 일으키도록 분할정책을 감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1947년에 인도가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독립을 했다. 이때 파키스탄도 인도와 분리하여 독립을 쟁취했다. 1526년에 무굴 제국의 침략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인도와 병합되었던 파키스탄은 그 이후 부터421년 만에 인도 와 분리하여 <영국의 자치령>으로 그리고 <이슬람 국가>로 독립을 쟁취 했다.

독립된 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를 포함한 단일 국가로 독립을 했다. 하지만 독립 후 1971년에 종교적 이유로<동파키스탄>이 떨어져 나가 방글라데시 국가를 따로 창건함으로써 파키스탄은 <서 파키스탄>만의 국토를 소유하게 되었다.

2.지킬과 하이드의 양면성을 유지하는 파키스탄 역사


신생국 파키스탄은 독립 후 지금까지 부패와 분쟁 그리고 동서 양 진영의 기로에 처하여 정치와 종교 그리고 사회적 문제들로 인하여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암울과 혼돈 속에 빠지게 되었다.

1947년 8월 15일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파키스탄은 1948년에 육군 사령관 아유브 칸이 군사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여 13년 동안 통치를 했다. 하지만 방글라데시가 떨어져 나가는 내전으로 인하여 칸 장군의 쿠테타 정권은 책임을 지고 퇴각 했다.

1973년에 줄리카르 알리 부토가 사회주의와 국유화 정책을 주장하면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부토의 사회주의 정권의 등장은 파키스탄의 부자들에게 도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와 희망이었다.
하지만은1977년에 육군 군부의 무함마드 하크 장군이 주도하는 친서방 쿠테타가 일어나 부토 대통령의 사회주의 정권은 단명으로 붕괴되었으며 부토 대통령은 군부에 의하여 사형을 당했다. 하크 장군이 정권을 잡고 장기집권이 시작되었다.

하크 장군은 정권을 장악하고 미국의 환심을 얻는데 성공하여 미국의 원조를 획득하였으며 서방의 영웅으로 널리 환대를 받았다. 하지만 1988년에 하크 장군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의문사 죽음을 당하였으며 미국은실망했다.

1980-90년대에 들어선 파키스탄의 군부정권의 지도자들은 아프가니스탄을 침범한 소련을 몰아내려는 미국에 적극 협력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용사들을 적극 후원했다. 그리고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에 친파키스탄 정권이 들어서기를 바라면서 탈레반을 후원 했다.

이로 인하여 파키스탄은 미국의 경제적 원조를 획득하면서 파키스탄 영토에 미국의 군사기지를 제공해 주기까지 했다.

1989년에 사형을 당한 전 부토 대통령의 딸 베나지르 부토 여사가 의회선거에서 파키스탄인민당의 승리로 당선되여 이슬람권 역사상 최초로 여성 총리로 집권을 했다. 부토 총리는 1977년에 사형을 당한 사회주의자 알리 대통령의 딸 이다.

부토 총리는 2번에 걸쳐 당선 되여 총리로 집권을 했으나 정권의 부패와 친인척의 권리 남용 등으로 인하여 1996년에 해임될 뿐만 아니라 그녀의 남편인 자르다리 하원 의원은 부패혐의로 투옥되는 수모를 당했다.

총리직에서 해임 된 베나지르 부토는 그녀의 남편과 함께1998년 부터 영국에서7년 동안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이듬해 인 1999년10월12일에 무샤라프 육군 참모총장이 쿠테타를 일으켜 성공하여 정권 을 장악했다. 미국은 무샤라프 군사 정권에 대하여 졍제 원조와 동시에 경제제재의 양면 카드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이중잣대를 교묘하게 사용하면서 무샤라프 정권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미국은 2001년 9.11사태로 인하여 무샤라프 군사 독재정권에 대한 미국의 이중적 정책을 돌변하여 보다 더 적극적으로 막대한 경제원조를 제공해 주면서 무샤라프 대통령을 미국의 테로와의 전쟁의 일등공신으로 만들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응해주면서 파키스탄 안에 있는 탈레반을 소탕하는 전략에 어느 정도 미국에 협조 했다.

무샤라프는 누구?

무샤라프는 이전의 집권자들이 요청했다가 실패한 국제금융기구(IMF) 구제금융을 획득하는데 성공함과 동시에 2001년 11월에는 총 110억 달러에 이르는 원조를 획득했다. 뿐만 아니라 이전 정권이 빚진 수백만 달러를 탕감 받는 미국의 호의를 획득 했다.

하지만 무샤라프는 그 막대한 돈으로 국민에게 약속한 개혁은 물 건너 갔고 부패한 정부관리들과 군장성들만 배를 채웠으며 개발대신 사치품 수입에 원조금을모두 탕진하면서 흥청거렸다. 미국은 파키스탄에게 테로와의 전쟁을 위하여 10년간 15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미국은 주저했다.

한편 파키스탄 내부에서는 무샤라프 대통령이 원조의 이유로 미국에 협조하고 있는데 대하여 이슬람 세력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나 무샤라프 대통령의 퇴진을 웨치는 시위에 직면하고 있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이슬람 세력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친미노선을 재검토 하여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가진다 라고 하는 모호한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무샤라프 대통령의 모호한 행동은 미국의 막대한 경제지원을 등에 업고 민중으로부터 인기가 떨어진 군사독재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으려고 비상한 수단을 발휘 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여 불안한 군사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대통령의 임기5년을 더 연장하도록 하는 법안을 전격적으로 통과시키는데 일단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샤라프 대통령은 태생적으로 군사독재정권 이라고 하는한계점과 또한 특히 미국을 등에 업고 생존하려고 하는 음모를 민중들에게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무샤라프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인 파슈툰족의 지원을 송두리채 상실 하게 된 것은 무샤라프 대통령에게 치명적 상처를 안겨 주는 원인이 되고 있었다. 무샤라프 대통령이 탈레반 소탕전에 비록 소극적으로라도 미국에 협조한 것은 그의 큰 죄과로 남아 있다.

그리고 파수툰족을 배신한 죄과로 인하여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된 것을 무샤라프 대통령은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파키스탄의 정국의 혼란을 틈타 영국에서 망명 중에 있던 부토 전 총리 부부가 파키스탄으로 귀국했다. 부토 여사의 귀국으로 인한 파키스탄의 인민당< PPP>의 부활은 무샤라프 대통령의 사퇴를 재촉하고 있었다.

특히 무샤라프 정권에게 해마다100억 달러 경제지원을 해 주고 있던 미국도 이제는 무샤라프 대통령에 대한 용도폐기 처분을 할 때가 된 것을 깨닫고 있었다.

영국에서 귀국하여 파키스탄 인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유세하던 전 부토 여사가 총격으로 암살을 당함으로 인하여 무샤라프 대통령은 사임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무샤라프 대통령은 2008년 8월 18일에 퇴임하여 9년 동안의 독재와 모호한 어용정권의 종말을 고했다.

암살을 당한 고 부토 여사의 남편인 자르다리는15억 달러의 부정 축재자로 감옥살이를 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 망명생활을 한 친영 친서방자 인데도 불구하고 파키스탄의 제11대 대통령으로 2008년 9월 9일에 취임을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그것은 미국이 무샤라프 전 대통령을 버렸지만 미국은 또 다시 친서방 성향의 대통령이 반드시 필요하였기 때문이다.부토 여사를 등용하여 제1막 연극에 연출한 후에 제2막의 연극을 연출하여 자르다리를 대통령으로 등장시킨 것이다.

순진한 민중들은 암살 당한 부토 여사에 대한 동정표를 총동원하여 그녀의 남편인 자르다리에게 몰표를 던졌다. 이것은 미국의 고등 수단의 선거전략의 결과로 분석되었다.

외신 보도에 의하면 파키스탄의 <부토 암살범 추적>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라고 전하고 있다. 그 배후에는 2중 3, 4중의 미국 CIA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마치도 박정희 대통령 저격범 김재규에게 사형이 전격적으로 선고된 사건과 육영수여사 저격범인 문세광에게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된 배후에 대하여 오늘 대한민국에서 그 누가 감히 배후추적을 할 수 있겠는가? 역시 이것도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 어렵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자르다리 대통령은 면책 특권으로 과거의15억 달러의 부패혐의가 문제되지 않지만 대통령직 에서 사임하여 물러난 무샤라프 전 대통령과 그와 가까운 전직 장관들은 부패혐의로 모두 다 출국정지를 당한 상태에서 기소될 전망이라고 한다.

오늘 파키스탄은 이러한 정국의 혼란 속에서 모든 것이 다 <지킬과 하이드>의 양면성의 후 폭풍으로 위기가 본격화 되면서 혼란이 고조되고 있는 것이다.

3.파키스탄 <핵 위협>에 잠 못 이루는 미국


파키스탄이 핵 보유국이된 역사는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파키스탄의 젊은 과학자 카디르 칸 박사는 네덜란드 우라늄 농축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말단 회사원 이었다. 어느 날 그는 인도가 처음으로 핵실험을 감행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칸 박사는 파키스탄 사회주의 국가의 영도자인 줄피카르 알리 부토 대통령에게 급히 편지를 보냈다. <파키스탄도 핵개발을 시작해야 합니다>라고 핵개발을 촉구하는 탄원의 편지를 보냈다.
진보주의적 영도자 알리 부토 대통령은 한 무명의 젊은 과학자의 탄원의 편지를 받고 즉각적으로 칸 박사를 귀국시켜 핵개발에 전념하도록 국가적으로 지원을 제공해 주었다.
칸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부토 대통령 이후에도 역대 정상들은 칸 박사의 핵개발 연구에 적극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놀라운 것은 1970-80년대 부터 특수 자석 등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기자재들을 일본의 기업들로부터 꾸준히 대량 수입했다고 한다. 일본의 한 관계자는 80년대에 적어도6천 개의 특수자석을 수출해 줌으로써 원폭 피해국인 일본이 파키스탄의 핵개발에 협력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파키스탄은 1998년에 첫 핵실험에 성공 했다.

외신에 의하면 중국이 1982년에 핵폭탄 제조가 가능한 양의 농축 우랴늄 50kg을 파키스탄에 은밀히 제공해 주었다고 칸 박사는 폭로성 증언을 했다. 이와 같은 우랴늄의 대량 제공은 모택동-부토 사이에 맺은 친선밀약으로 이루어 졌다고 한다.

미국은 모택동-부토 사이의 친선밀약을 파악했으나 ‘노 코멘트’로 일관 했을 뿐이었다. 미국은 다만 핵무기 비확산조약에 대하여 원론적인 입장만 밝히고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파키스탄은 1974년부터 핵 개발을 착수하여 24년 동안 꾸준히 노력하여 1998년에 핵 실험을 성공했다.
이에 대하여 미국의 일부 언론은<미국의 묵인 하에서 파키스탄은 핵개발을 계속하여 성공 했다>라고 미국을 비판 하고 있다.

미국의 묵인에 대한 언론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1970년대에 지미 카터 대통령은 파키스탄을 <친미밸트>에 꽁꽁 묶어 두기 위해서 되도록이면 파키스탄의 핵 의혹에 대하여 너그럽게 못 본척 했다.

…1980년대에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파키스탄을 이용하기 위하여 너그럽게 못 본척 했다. 소련의 남하를 아프가니스탄에서 저지하고 물리치기 위하여서는 파키스탄을 반드시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파키스탄의 핵 의혹을 모르는 척 했다.

…아버지와 아들 부시 대통령들은 두 개의 이라크 전쟁에 신경을 온통 쓰느라고 파키스탄의 핵 의혹 문제를 모른 척 할 수 밖에 없었다.

만일 미국이 초기부터 칸 박사의 핵개발 활동과 핵 거래 비밀 의혹을 엄격히 차단하고 감시와 제재를 가했더라면 파키스탄이 핵 보유국 되는 것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미국의 언론은 주장 했다.

파키스탄은 핵무기를 얼마나 가지고 있나?
파키스탄은 핵무기 79-90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2000 kg의 고농축 우라늄과 90kg의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하고 있다고 미국은 말하고 있다. 파키스탄은 정확한 핵 보유수를 절대로 밝히지 않고 있지만 외부에서는 대략 이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미국이 파키스탄의 핵 위협으로 인하여 잠 못 드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것은 탈레반 반군과 알카에다가 핵무기를 탈취할 위험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미국이 지원하는 정부군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미국의 제일 큰 고민이 며 근심 걱정이다.

미국은 파키스탄 군 지위관들에게 핵 관리 능력을 높이고 탈레반의 고삐를 단단히 쥘 것을 수백 번 천 번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파키스탄의 군부의 동향과 능력을 도저히 확신할 수 없다.
파키스틴을 방문하고 돌아온 멀런 미국 합참의장은 파키스탄 군부의 취약점에 대하여 <그럴 리야 없겠지만 파키스탄이 200여기의 핵 탄두를 가지고 있는데 탈레반이 이 핵무기를 손에 넣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 우리의 염려이다>라고 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파키스탄에게10억 달러의 긴급 추가 원조를 제공하면서 강조한 역점도 바로 핵무기가 탈레반의 손에 들러가는 것을 방지하고 탈레반을 진압하라는 요구 이다.
미국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 놓고 잘 지키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과 같은 실정에 처해 있으면서 아무리 강조한들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미국이 파키스탄의 핵 문제로 잠 못 이루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4. 이락-아프칸에 빠진 미국의 파키스탄 딜레마


미국은 파키스탄의 격란 속에 빠져서 한 치 앞을 내다 보기 힘든 딜레마에 처해 있다.
9.11 테러사건을 빌미 삼아 똑똑하고 강경보수주의자로 유명한 전 부시 대통령은 이락-아프칸 전쟁을 전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락- 아프칸 전쟁 은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처럼 오늘에 이르러서 미국은 하는 일 마다 웃기고 헤어날 수 없는 난처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파키스탄 문제를 <아프팍 Afpak> 이라고 불렀다. 혹자는 말 하기를 아프팍은 <오바마-베트남>을 뜻한다 라고 했다.미국이 베트남전에 빠져 허덕인것 처럼 오늘 오바마 정권은 제2의 베트남전>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말한 <아프팍>은 아프팍- 오바마 딜레마를 뜻한다고 생각 된다.
아프팍-오바마 딜레마의 원인과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적해 본다.

ㄱ. 9.11 테러범 알카에다를 소탕하기 위하여 아프카니스탄과 파키스탄을 침공했 는데 오히려 그곳에서 알카에다와 탈레반 테러들을 재생산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ㄴ. 미국은 무샤라프 군사독재자에게100억불 이상을 지원하여 테러와 탈레반 을 제압했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이 주도하는 민주화를 시도하려고 부토를 네세 우는 눈가림의 민주화 전략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다.

ㄷ.인도에서 분리되어 독립한 파키스탄은 언제 다시 인도로 인하여 피해를 받을 지 모른다는 전략적 마인드가 항상 준비되어 있다.그럼으로 파키스탄은 결사적으로 핵 보유국이 되었다.

미국이 중국을 의식하여 인도 편을 들어줌으로 파키스탄은 쉽게 반미로 기우러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파키스탄 인민당의 자르다리 대통령이 제 아무리 친미적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카슈미르 분쟁이 도사리고 있는 한 민중은 언제라도 반 인도와 반미로 돌변할 가능성이 있음으로 미국의 딜레마는 기다리고 있다.

ㄹ. 탈레반-지하드-알카에다의 기원은 오직 미국이다. 소련을 제압하기 위하여 미국이 이슬람 무장세력을 양성하고 키운 것이 바로 미국의 전략이었다.

사회주의 지도자 알리 부토 대통령을 하크 장군을 시켜 암살하고 바로 그 하크 장군이 신생국 초창기부터 독재정치를 하도록 한 것이 바로 미국 아닌가?

무샤라프 대통령이 쿠테타를 일으켜 집권한 것이 미국 때문 아닌가? 무샤라프대통령과 핵 개발의 아버지 칸 박사를 통하여 핵무기의 연결고리가 이란을 비롯 하여 북조선과 중동 여러 나라들과 접촉하게 된 것 등을 총체적으로 볼 때 역시 핵문제는 미국의 딜레마 이다.

ㅁ. 파키스탄 탈레반은 어떻게 탄생되었는가? 미국이 앞세운 파키스탄 군대가 아프칸에서부터 숨어 들어 온 알카에다를 색출한다는 이유로 역사적으로 특이한 파슈툰족의 밀집 지역인 밀림에서 소탕작전을 개시한 것에서 비롯 되었다.

파슈툰족의 성역으로 여겨지는 밀림계곡으로 파키스탄군이 마구 색출 작업을 펼치는데 반항하여 이곳에 산재해 있던 13개의 자치 무장세력이 총집결 단결하여 창설한 것이 바로 파키스탄 탈레반이다.

파키스탄 탈레반은 미국이 장악하고 있는 파키스탄 정규군의 손아귀를 벗어난
강력한 무장세력이며 파키스탄 전역에서 귀신처럼 출몰하여 위협적 기세를 과시하고 있다.
2008년 2월에 파키스탄 군과 형식상 평화협정을 맺었으나 사실상 투쟁은 언제 어디서나 계속되고 있으며 특히 핵무기의 보호를 위하여 미국의 경고가 고조되면서 오바마-파키스탄의 큰 딜레마로 작용하고 있다.

ㅂ. 오늘 자르다리 정권은 진퇴양란에 빠져 있다.미국의 지원으로 정권이 창출되였기 때문에 미국의 요구대로 탈레반을 제압하도록 강력한 군사력으로 작전을 세워 싸워야 한다. 하지만 싸우면 싸울수록 민중의 반정부와 반미감정은 점점 더 고조되고 있으니 딜레마에 빠진다.

미군은 파키스탄에 군대를 욕심대로 보낼 수 없으니까 할 수 없이 무인 비형기로 폭격을 강행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오폭으로 사망자가 대량으로 발생하고 있다.

오폭사고로 인하여 난민이 발생하여 반정부 운동과 반미감정이 고조되고 있으니 자르다리 정권과 미국은 또 새로운 딜레마에 빠져서 고민하고 있다.

ㅅ.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칸에 미군3만명 증파를 발표하면서 증파가 파키스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란다 라고 밝혔다.

하지만 실제로 증파로 인하여 많은 탈레반들이 파키스탄으로 자유롭게 국경선을 넘어 왕래하고 있음으로 인하여 자르다리 정권이나 미군이 딜레마를 해결할 능력 이 없는 것이다.

우유부단한 무샤라프 정권을 교체하여 더욱 친미적인 자르다리 정권을 세웠다 할지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고 오히려 파키스탄에서 미국의 처지는 불안하게 될 뿐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아프팍 Afpak> 제스쳐는 오히려 <오바마의 베트남>으로 만들어 더욱 더 불안한 미국- 파키스탄 딜레마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다.

<이 글을 끝 맺으며…>


파키스탄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전망해 보면서 필자는 냉전시대보다 지금이 더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는 미국의 입장을 생각 해 본다.

아프칸 전쟁을 촉발시켰다고 하는 주인공 빈 라덴을 체포하지 않는다고 미국은 파키스탄을 비판 한다. 이에 대하여 파키스탄의 질라니 총리는 화를 벌컥 내면서 <우리나라에 없는 사람을 어떻게 체포하느냐> 라고 대들었다고 외신은 전한다.

미국과 파키스탄 어느 편이 강한지 분간하기 곤란하다.

그런가 하면 일부 파키스탄 고급 관리들의 말을 인용하여 세계 언론들은 빈 라덴의 사망설을 솔솔 퍼뜨리고 있으며 또한 심지어 어떤 뉴스는 빈 라덴의 체포설 까지 보도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서방 보도들을 종합해 보면 빈 라덴은 분명히 살아 있다.만일 빈 라덴이 어느 동굴 속에 살아 있다면 전쟁이10년을 끌고 출구 또한 아직 보이지 않 는 이 역사의 아이러니를 그는 마냥 즐기고 있을 것인가?

서방 정보들은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드 에서 불과 60km에 있는 카후타에서7000명의 핵 기술자들이 해 마다 6개의 핵무기를 만들어 낸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은 중국과 북조선 등 외국에서 미사일 기술을 획득하고 있다고 전해 주고 있으며 또 파키스탄을 통하여 중동의 여러 나라들에게 핵과 미사일 기술이 이전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의 중앙정보국과 영국이 제일 크게 문제삼고 있는 것은 파키스탄 내부에 거점을 두고 활동 중인 알 카에다와 탈레반에게 파키스탄의 핵 물질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감시하는데 있어서 애를 먹고 있다는 것이다.

냉전시대 보다 더욱 위험하게 만드는 곳이 바로 파키스탄 이라고 미국은 말하고 있으며 세계는 그 이유를 다 잘 알고 있다. 이러한 파키스탄을 가운데 놓고 미국은 인도에 대하여 신경을 쓰고 있다. 만일 미국이 인도와 너무 가까워 지면 파키스탄은 곧 반미 감정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파키스탄은235년 동안 인도에 병탄 되었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으며 오늘은 핵 보유국으로서 인도와 대등한 자부심을 가지고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중국을 의식하여 되도록이면 인도와 가까워 지기를 꾀하고 있다. 하지만 핵 보유국인 파키스탄의 반미감정 건드리지 않으려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래저래 미국은 냉전 시대보다 지금이 더 위험한 것을 염려하며 고심 하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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