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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역사 속에 숨겨졌던 비극적인 <라오스 전쟁><br><br> 라오스 전쟁에 쏟아 퍼분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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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2-03 21:04 조회4,1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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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이번에는 아시아의 나라 <라오스> 역사를 살펴보았다. 그는
민족통신을 통하여 연구 고찰한 나라들이 기획연재로서 지금까지 발표한 아프리카 나라들, 아시아 나라들,
중동나라들, 남미나라들 합쳐 총 39개 국이 된다고 밝히면서 "이 나라들 모두가 제국주의 나라들로부터
극심한 피해를 받은 나라들이었다"고 분석했다. <라오스>는 특히 아무도 몰랐던 전쟁으로 알려졌으나 9년
동안 미군에 의해 말할 수 없이 시달려 온 나라이다. 이 나라에 대해 고찰한 내용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기획]역사 속에 숨겨졌던 비극적인 <라오스 전쟁>


라오스 전쟁에 쏟아 퍼부은 미군폭탄 2백만 톤


집속탄 투하 2억7천만 발, 불발탄 8천만 발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이번에는 아시아의 나라 <라오스> 역사를 살펴보았다. 그는 민족통신을 통하여 연구 고찰한 나라들이 기획연재로서 지금까지 발표한 아프리카 나라들, 아시아 나라들, 중동나라들, 남미나라들 합쳐 총 39개 국이 된다고 밝히면서 "이 나라들 모두가 제국주의 나라들로부터 극심한 피해를 받은 나라들이었다"고 분석했다. <라오스>는 특히 아무도 몰랐던 전쟁으로 알려졌으나 9년 동안 미군에 의해 말할 수 없이 시달려 온 나라라고 지적했다.이 나라에 대해 고찰한 내용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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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전세계의 눈이 베트남 전쟁에 쏠리고 있을 때 무명의 인접국 <라오스>에서는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라오스>에서 일어난 전쟁은 아무도 몰랐을 정도로 세계 언론에 오르내리지 못했다. 아무도 몰랐던 그 전쟁은 라오스에서 1964년에 시작하여 미국이 월남전에 완전히 패배하여 발을 빼버리기 바로 한 해 전인 1974년까지 계속 되었다.

미국은 이 라오스 전쟁을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도 하지 않았고 또 라오스 전쟁에 대하여 뉴스보도를 일체 금지하고 통제했기 때문에 비극적인 라오스 전쟁은 역사 속에 숨겨진 <아무도 몰랐던 전쟁>이 되고 말았다.

그 아무도 몰랐던 라오슨 전쟁은 <베트공 저지작전> 이라고 하는 기록에 의하여 훗날 그 내용들이 낱낱이 모두 밝혀지고 폭로되고 말았다.

라오스 비밀전쟁은 <강철호랑이>와 <배럴 롤>이라는 두 개의 작전으로 전개 되었는데 첫째는 주로 호지민 루투 에서 베트콩과의 대전이었고 둘째는 미 중앙정보부(CIA)의 비밀 공작작전 이였다.

<베트콩 저지작전>이라고 명명된 의 공격이 라오스 영토 내에 침입하여 본격적으로 폭격을 시작하여 9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또 라오스에서 그 폭격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이전부터 이미 CIA 비밀공작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라오스의 밀림에서 산악원시부족인 몽족을 포섭하여 게릴라훈련을 비밀리에 전개하고 있었다.

어찌하여 미국은 <아무도 몰랐던 전쟁>을 라오스에서 비밀로 감행 했을까?

인도차이나반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하여 라고 하는 명목으로 미국은 베트남에서 그 악명 높은 베트남전을 시작 하였다. 그런데 북 베트남의 공산 주의 군대 베트콩이 일명 <호지민 루트>라고 하는 비밀통로를 라오스의 아주 깊은 밀림 속에 개통해 놓고 남 베트남으로 군수물자와 병력을 수송할 수 있도록 전략적 통로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당시 베트콩은 구 소련과 중공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미국은 베트콩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라오스를 불법적으로 침 범하여 밀림 속에 있는 <호지민 루트>를 원천 봉쇄하려 했던 것이다.

미국은 <호지민 루트>를 봉쇄하고 베트공의 남침저지를 목적으로 라오스 영토를 중요한 전투장으로 여기고 선전포고도 없이 무자비하게 폭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라오스는 공연히 베트남전쟁에 휘말리어 <아무도 몰랐던 전쟁>의 비참한 피해국이 되고 있었다.

이 <아무도 몰랐던 전쟁>에서 미국이 라오스 영토에서 저지른 범죄행위에 대하여 통계상으로 나타난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가) 미군은 1964-73년까지 9년 동안 라오스에 공습한 횟수는 약 18만 번이나 된다. 이것을 포함하여 총 58만 번의 폭격을 자행 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미국의 폭격은 매 8분마다 한번씩 폭격 한 꼴이 된다.

라오스 폭격에 참전했던 한 미군 조종사의 회고담에 의하면 시카고의 오헤어(O’Hare)비
행장보다 라오스를 폭격하던 미군용 비행장은 더 바쁜 공항이었다고 증언했다.
그 결과 라오스에 투하한 폭탄 값은 무려 79억 달러로 계산될 정도로 무자비한 폭격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나) 미국은 공중폭격으로 약 220만 톤에 해당하는 폭탄 720만개를 라오스 땅에 투하함으로써 라오스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심한 폭격을 당한 나라가 되었다. 그 당시 라오스 총인구는 500만 정도 이었으니 1인당 1.75개씩 폭탄을 뒤집어 쓴 꼴이 되었다.

코리아 전쟁 때 미국이 코리아 반도에 투하한 폭탄은 49만 5천 톤 이였는데 라오스에서는 그 4배가 넘는 폭탄을 투하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폭탄으로 사망한 라오스 민간인 수는 50,000 이상 이고, 불발탄에 의하여 사망한 수는 12,000 이상 이라고 한다. 베트남전에서 사망한 미군의 수는 60,000명 이다. <아무도 모르는 전쟁>에서 희생된 라오스의 사망자는 미군의 사망자보다 훨씬 더 많다.

(다)미군이 투하한 집속탄의 30% 정도가 불발탄으로 아직도 라오스 땅속에 파묻혀 있기 때문에 피해자가 속출하여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불발탄에 의한 사망자가 1만 2천명이 공식 발표인데 실제로는 4배정도 더 많다고 한다.

라오스에서 불발탄 제거 작업은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완전한 제거는 어려운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런데 불발탄 제거를 위한 원조에 대하여 세계 여론은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라오스에서 불발탄 제거 문제에 대하여 매우 소극적이라는 세계의 비판을 받고 있다.

(라)미국의 CIA는 라오스의 밀림 속에 살고 있는 몽족을 포섭하여 친미적 게릴라 훈련을 시켰는데 한 때 전성기에는 20,000명의 대규모 병력을 유지 했다. 그런데 몽족 게릴라들에게 지급되는 급료는 하루에 일당으로 10센트 이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몽족 게릴라에게 필요한 비용을 자체조달을 하도록 하기 위하여 몽족에게 아편 재배와 제조를 허용하는 전략까지 활용 했다. 미국 정보국은 특별기를 동원하여 마약을 베트남에는 물론이고 동남아와 유럽까지 배달 했다. 그 당시 베트남군인 10%이상이 <뽕맞고 참전> 이라고 하는 말이 공공연히 유행어 처럼 알려지고 있었다. 그럼으로 그 때의 세계적인 마약시장은 미국 CIA의 산물 이였다 라고 말할 수 있다.

(마)미국에 포섭되어 용병으로 이용 당한 밀림 속의 몽족들은 라오스의 친미적 민족반역자들로 구분이 되고 있었다. 종전 후에 미군이 철수함으로 인하여 몽족 들은 친미반역자들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갑자기 집을 잃어 버린 고아처럼 되 고 말았다. 약 30만 명의 몽족이 월남전 종전 후에 태국 등 20여개 여러 이웃나라들에 흩어져서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피란민이 되여 살고 있다.

최근 태국은 4000명 몽족 피란민을 라오스로 강제송환 했다. 아직도 라오스의 깊은 밀림 속에는 수천 명의 몽족들이 미국을 구세주처럼 믿고 30년을 기다리면서 숨어 살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30년 동안 믿고 기다리고 있는 몽족을 전혀 기억 하지 않고 완전한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이다.

친미 몽족의 게릴라 지도자 이였던 방파오씨는 올해 나이 80세인데 현재 미국의 L A 근처에 숨어서 생존해 있다. 2007년에 방파오씨는 10여명의 추종자들과 음모를 꾸며 오늘의 라오스의 사회주의 인민민주공화국을 붕괴시키는 쿠테타를 논의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현 라오스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하여 라오스 침투 군을 구성하고 해외에서 라오스 비밀정부를 수립하려 했으며 또 각종 무기를 비밀로 라오스에 반입하려고 음모를 모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미국의 연방검찰에 의하여 곧 체포되었다. 방파오씨는 또 최근에 1,000여명의 몽족들의 모임을 통하여 자기자신의 라오스에 안전귀국을 요청했다. 라오스 인민 민주공화국은 물론이고 또한 미국도 역시 그의 귀국 요청에 대하여 싸늘한 반응을 보였을 뿐 이다.

아무도 몰랐던 몽족의 비극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데 그 누가 그들을 도와 줄까?


1.코끼리 100만 마리의 나라


100만 마리 코끼리의 나라로 옛날부터 유명한 라오스는 코리아반도 보다 약간 더 큰 면적의 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구는 겨우 6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라오스는 중국, 태국, 베트남 그리고 캄보디아등 4개 나라들에 둘러싸여 바다가 없는 내륙국이다.

라오스에는 종족이 68개 이상 있으나 정부는 모든 종족들을 크게 3대 종족으로 구분하고 있다. <라오텅족>과 <라오쑹족> 그리고 <라오룸족>들이다. 그리고 라오스에는 방언이 약 90개 있으나 라오어를 국어로 삼고 정치와 문화 교육에서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라오스에 유명한 메콩강이 흐르고 있는데 중국에서부터 발원하여 라오스를 통과 하면서 지역의 6개 국가들에게 젖줄이 되고 있으며 또 베트남전쟁 때 에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역할을 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로 남아 있다.

라오스의 지난 역사를 살펴보자.

라오스 영토에서 사람이 산 흔적은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약4만년 전 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역사를 살펴보면 라오스 땅에 기원전 2000년경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증거로 돌도끼와 항아리 등이 라오스의 매장지에서 발견되었다.

라오스가 바깥 세상에 알려진 것은 AD 750년경에 쿰러 왕이 라오스 땅을 점령하고 이곳에 시양텅 도시국가를 처음 건설한 것으로서 알려졌다.

13세기에 중국 남부에 살던 타이계 민족 중의 하나인 라오족이 지금의 라오스의 영토로 이주해 옴으로서 라오스의 역사는 시작 되었다. 이들은 메콩강 유역의 비 옥한 땅에 정착하여 살았으며 차츰 넓은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1353년에 <100만 코끼리>를 상징하는 란쌍 왕국을 메콩강 유역에 건설하여 파눔 왕이 나라를 다스리면서 불교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17세기 중반에 술리 나봉 왕 때 크게 번영 했지만 얼마 후에 나라는 약해 졌다.

18세기 초에 급격히 약해진 란쌍 왕국은 3개로 분열되고 친 타이 세력과 친 베트남 세력이 서로 대립하여 나라가 어지러워 졌다. 결국 분열된 란쌍 왕국은 태국과 베트남 등 이웃 나라들에 의하여 지배를 받는 비운에 처해 있었다.

라오스의 조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란쌍 왕국은 1353년에 창건되어 장장 500여년 동안 번영과 쇠태를 반복하면서 겨우 지속해 오다가 결국 서구의 침략시대가 도래함으로써 란쌍 왕국의 역사의 종지부를 찍고 피 식민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713년부터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침략하기 시작하여 1800년대에 들어서서 이 지역의 모든 나라들은 프랑스-인도차이나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처음에는 태국과 베트남에 속해 있으면서 프랑스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던 라오스가 1893년부터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여 프랑스에 직속된 식민통치를 받게 되었다.

프랑스는 영국과 식민지 영토분쟁을 종결하고 라오스의 3개 지방을 하나로 합쳐서 루앙프라방 왕국 이라고 하는 새로운 명칭을 붙혀 놓고 <프랑스 보호령>으로 선포 했다. 이것은 프랑스의 독특한 식민통치 방식으로 다른 곳에서의 식민통치 보다 라오스 에서는 조금 덜 엄격한 온건한 통치방법에 이해 지배한 것으로 평가 되었다.

그리고 1941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됨과 동시에 일본군의 진출로 인하여서 50년 동안의 프랑스-인도차이나의 식민통치 시대는 모두 끝나고 말았다.

2. 라오스 인민민주공화국 탄생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세계대전이 끝나자 일본은 패전국이 되여 3년 동안 라오스를 통치하던 것을 모두 다 포기하고 이땅에서 떠나 갔다.

라오스는 일본군이 떠나간 후에도 급격히 혼란에 빠졌다. 그것은 잠시 물러 났던 프랑스가 또 다시 라오스에 되돌아와 재 침략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1945년 8월에 일본의 패전을 계기로 삼아 <라오 이싸라>는 공산주의 정당을 창설하여 해방과 독립을 주장하면서 라오스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라오 이씨라>는 베트남의 공산정권과 긴밀하게 유대를 강화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라오스의 독립을 반대하여 라오스 왕실을 우파로 앞세워 놓고 내전을 일으켰다. 프랑스를 의지하는 왕실 우파와 독립을 주장하는 <라오 이싸라>와의 불화는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 끝을 모르는 내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결국 프랑스는 1949년에 라오스의 독립을 형식적으로 승인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국방, 외교, 재정권을 그대로 장악하고 있음으로써 독립은 하나의 형식적인 말 뿐 이였다.

프랑스의 음모로 인하여 라오스는 <우익>과 <좌익>으로 양분되어 대립이 점점 더 심화되고 있었다. 우익의 지도자는 왕실의 <수바나 푸마> 이였고 좌익의 지도자는 독립파의 <수파누 봉> 이었다.

1950년에 라오스의 좌익세력이 뭉쳐서 <파테트 라오>를 창설하여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결국 1954년에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우파 왕실을 그대로 유지하는 전제조건 하에서 프랑스의 주선으로 좌익세력인 <파테트 라오>가 동참하여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프랑스가 꾸며 놓은 이와 같은 불완전한 평화조약은 얼마 가지 못하고 실패하였고 내전은 또 다시 계속되고 있었다. 라오스에서 좌파와 우파 사이에 내전이 계속되고 있는 똑 같은 시기에 베트남에서는 저 유명한 <베트남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소련과 중공이 베트콩을 지원하는 무기와 군수품들이 라오스 영내의 밀림 속에 개설해 놓은 <베트콩 루트>를 통하여 베트콩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미국은 이것을 라오스에 대한 침공의 이유로 삼아 좌파와 우파간의 내전에 시달 리고 있는 라오스를 선전포고도 없이 9년 동안 폭격하며 괴롭혀 왔다.

미국이 <베트콩 루트>를 차단하기 위하여 라오스를 9년 동안 폭격을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가? 이에 대하여 미국이 스스로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놀라울 뿐이다.

1966-71년 사이에 <베트콩 루트>를 통과하여 베트남전에 전달된 물량은 다음과 같다. 60만 톤 이상의 무기, 100만 톤 이상의 식량, 60만 명의 병력이 통과 했으며 지하에는 연료창고와 대공포대가 있었다. <베트콩 루트>를 관리 운영하는 베트콩이 2,500명 이였다. 미군이 비행기 폭격을 감행한 것은 사실상 별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프랑스와 미국은 라오스를 세계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나라로 만들어 놓은 용서 받을 수 없는 공범자들로 지목되고 있었다. 미국의 폭격이 심화되고 있는 라오스에서 좌파와 우파의 내전은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와중에서 왕실우파는 점점 계속해서 밀리고 감당하기 어려운 약세에 처하고 있었다.

프랑스와 라오스 왕실우파는 또 다시 평화조약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화조약이 다시는 전혀 필요 없는 내전의 영구적 종식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1975년에 베트남전쟁은 베트콩의 승리로 끝났다. 베트콩의 승리로 베트남전이 모두 다 끝남으로 인하여 라오스에서도 내전이 끝날 수 밖에 없었다.

프랑스를 배경삼고 서구의 지원을 오래 동안 받고 있던 <수바나 푸마>우파왕실의 세력에게 영원한 몰락을 가져왔다. 1949년에 프랑스의 음모에 의하여 등장한 <왕정 수바나 푸마>와 처음부터 독립을 주장한 <라오 이싸라>와의 맞대결로 인 하여 발생했던 라오스 내전과 그리고 미국이 개입된 내전은 30년 만에 완전히 종식을 고하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600년 간의 라오스 왕정의 뿌리가 완전히 뽑혔고 또한 1713년에 시작하여 262년 동안이나 지속한 프랑스-인도차이나 식민지 통치의 역사도 역 시 함께 종말을 선언하게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라오스 민중이 오래 동안 바라고 소원하던 사회주의 국가건설의 염원이 드디어 성취되었다”고 평가했다.

라오스 민중들은 1975년 12월 1일에 <파테트 라오>는 라오스왕정을 완전히 몰아 내고 전국 인민대표대회를 개최하여 라오스 건국의 초석이 되는 이른바 <라오스 인민민주공화국>을 공식출범 시켰다.

라오스 인민민주공화국 출범 후 34년이 지난 오늘 2010년에 제4대 대통령으로 캄타이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다. 그는 프랑스 식민통치와 미군의 침공을 대항하여 싸운 혁명 1세대의 게릴라투사이며 <정치 개방 없는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대통령으로서 강력한 집권통치를 하고 있다.

라오스의 캄타이 대통령은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태국과 베트남과 우호적인 관계정상화를 우선하는 정책을 중요시하여 1982년 2월에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했다. 또 지정 학적으로 보나 역사적으로도 상호 의존도의 밀접한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1982년 8월에는 동남아시아 우호조약에 가맹하였다.

특히 중국과 라오스의 관계는 건전하고 깊이 있는 선린우호와 전면협력의 관계에 입각하여 부단히 새로운 단계로 매진해 나아가기로 후진타오(호금도) 중국의 국가주석과 라오스의 캄타이 대통령은 굳게 약속했다.

3.<라오스>의 이모저모


라오스의 불교는 600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국민의 95%가 불교도이다. 라오는 소승불교의 나라이며 길거리 어디를 가도 사원과 불상이 있고 그곳에서 항상 향과 꽃으로 예불을 올리고 있는 남녀노소를 볼 수 있다.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라고 말들 하지만 라오스 사람들은 절대로 절망과 서두름을 볼 수 없다. 오히려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희생하면서 꾸준히 참고 건실하게 살아 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나는 이 나라의 문화와 종교를 고찰하면서 라오스 사람들의 불교적 삶의 맥락에서 사회주의적 노선을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본래 불교적 사상에는 사유재산적 지나친 물욕을 사회 악의 근원으로 여기는 견해가 있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라오스의 소승적 원시 불교는 사회주의적 이상을 추구한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라오스가 프랑스-인도차이나 식민통치의 오랜 압박 속에서 또한 미국의 그 무지막지 한 공격 속에서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견디고 싸워 승리하여 라오스 사회주의 인민공화국을 건설한 것을 보면 그것은 바로 <불교적 사회주의 이념>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남한의 기독교 보다 라오스의 불교는 훨씬 더 개혁적인 동시에 진취적인 민족애를 실천하는 종교라고 가히 판단할 수 있다. 라오스를 여행하고 돌아온 서구인들이 한결 같이 주장하는 공통된 반응은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돋보이는 불교 국가이다”라고 하는 반응 이다.

그러면 오늘 라오스의 경제적 동향은 어떠한가?

경망스러운 서방의 일부 언론들은 라오스를 격하시켜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이며 수입한 낡은 버스만이 길에서 털털거리고, 굶주린 사람들이 가득 차 있는 나라이다”라고 묘사해 왔다.

그런데 <뉴욕타임스>는 2008년에 꼭 가봐야 할 나라들 53개 나라 가운데서 라 오스를 1위에 추천하는 기사를 발표한바 있다. 그것은 “오염되지 않고 잘 보존된 자연환경과 다양한 민족적 생활방식이 오히려 생기가 넘치는 깊은 인상을 주고 있으며 위압적이지 않은 불교의 유산들이 불교의 가르침을 잘 전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라고 소개한바 있었다.

나는 라오스의 이모 저모를 살펴보면서 몇 가지 점들을 주목할 수 있었다. 그들 중 하나는 수력발전소들이었다.

라오스의 수도인 비엔티엔 북쪽 90km에 소재한 <남늠 댐> 수력발전소의 잠재 전력은 현재 아세안 국가들의 전력 수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전력이라고 한다. 발전소의 자료에 따르면 남늠 댐의 총면적은 약 1억1천2백만 평 인데 남한의 청평댐의 크기 보다 약 20배가 된다.

남늠댐 수력발전소는 1968년부터 착공하여 3단계의 확장공사를 거쳐서 오늘의 시설이 완공 되었다. 앞으로 인근에 두 곳의 댐을 더 추가 완공하게 되면 연평균 전력생산이 1천25GHh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라오스는 코리아 반도 전체면적의 1.1배이며 인구는 630만 명이다. 그런데 라오 스의 그 풍부한 물은 <아시아의 전지>라고 할 만한 역할을 하고 있다. 라오스의 무역은 수출과 수입 양 측면에서 주로 태국, 베트남,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그럼으로 이들 국가들의 경제상황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라오스의 큰 취약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광산산업 발전 가능성과 지속적인 경제개혁 추진으로 지금은 미국을 위시하여 서방국가들로부터 라오스는 <정상 무역 거래국 지위>를 획득하였다. 지금 라오스 정부는 자체적으로 국영기업 구조조정과 무역자유화 작업을 신중하게 고려하여 경제개혁을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다.

라오스의 놀라운 사실은 2009년 12월에 11개 국가들이 참가한 <동남아 게임>제 25차 대회를 라오스가 주최하여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다. 이것은 라오스 건국 후 처음 있는 국가적 경사이기도 했다. 새로 건축한 대형 경기장에서 팡파레가 울려 퍼졌다.

라오스와 북조선 사이에 외교관계가 수립된 것은 올해 36주년이 된다.1974년 6월 24일에 양국은 외교관계수립을 공식 개설하여 상주대사관을 개설했다. 1978년에는 무역증진협정을 체결하여 상호 교역을 시작했다.

특히 2009년 6월23일에는 북조선-라오스 외교관계설정 35주년을 축하하여 기념영화 감상회를 평양 대동강외교단회관에서 개최하였다. 영화감상회에 주조 라오스 특명전권대사 짜런 대사는 축사에서 말 하기를 <우리 라오스 인민혁명당은 피로써 쟁취한 혁명의 전취 물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에서 오늘도 커다란 성과를 거두 고 있다> 라고 말 하였다.

그는 또 <라오스당과 정부는 조선인민들이 나라의 통일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데 대하여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이다> 라고 말 했다. 한편 라오스 신문은 2009년 10월 20일부에 <조선사회주의 나라 어린이들의 회합장소 송도원> 이하는 기사를 대서 특필로 라오스 전역에 보도했다. 이와 갈이 양국의 친선우호관계는 오랜 세월 속에서 두텁게 지속되고 있다.

이글을 끝 맺으며


베트남 전쟁의 최대 피해국인 라오스의 비극을 새로 발견하고 필자는 분노와 비애의 눈물을 금할 수 없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필자는 <모르는 독약>을 먹고 있었다는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정말 미국 이대로 좋은가? 미국 당국이 선전포고도 없이 라오스에 자행했던 침략과 공격행위는 인류사회에서 용서받을 수 없는 잔인한 처사였다.

나는 잠시 눈을 돌려 시내 가에 샘물이 졸졸 흘러 가면선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무슨 소리 일까?

어느 한 여행자가 라오스에서 경험한 목격담 중의 한 토막이 떠오른다.

<라오스 사람들은 유난히 온순하다. 실제로 길거리마다 노점상들이 즐비하지만 어느 상점도 호객 행위를 하지 않는다. 이곳 사람들은 말도 소근거리면서 이야기를 한다. 그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 오히려 성급한 관광객들만이 더운 날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돌아 다닌다. 메콩강의 부처님이 주는 교훈을 외지인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

욕심을 버리면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하는 부처의 교훈을 이곳 라오스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진리로 삼고 살아 온 것이라고 생각 된다.

또 다른 어떤 한 라오스 방문객은 이렇게 라오스를 묘사했다.

<라오스는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조용하고 소박한 나라이다. 공산주의 국가이면서 사원으로 가득 찬 불심이 지배하는 불교의 나라이다. 새벽 5시 30분, 고요하고 어스름한 길을 따라 욕심을 내려 놓고 마음 찾는 느리게 걷는 긴 행렬로 이어지는 젊은 스님들의 행진이다>

<스님들에게 고양을 하는 예식으로 라오스에서는 매일 새벽이 밝아 온다. 스님들에게 밥을 고양하는 것이 의미가 있지만 젊은 스님들은 공양 받은 그 밥을 거리의 헐벗은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다. 세상이 환해지기 이전 이른 아침이지만 보시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스님들의 나눔의 빛으로 이미 세상은 반짝인다>

라오스 사람들은 슬플 때는 따뜻하게 서로 안아 주고 대화가 필요할 때는 동무처럼, 친구처럼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에게 불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생활인 것이다.

때로는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하여 침략자와 싸울 때에는 그 어느 다른 민 족 보다 더 용맹스럽다. 그들은 피로써 쟁취한 사회주의 나라건설에 오늘도 게릴라 정신으로 경제성장과 경제개혁에 총 진군하며 달려가고 있다.

그들에게 불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차라리 피로써 희생하고 헌신하는 민족애의 참 된 정신인 것이다. 라오스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고 필자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새로 발견했으며 약소 민족의 비애 보다는 차라리 강대국들이 죄악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패망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라오스 민중들의 삶의 모습은 깊은 뜻이 가슴에서 솟아 나오는 천연적 행복감 같 은 것이다. 남한에서는 흔히 <잃어버린 10년>이니 뭐니 하면서 공연히 허무한 소모적인 민족분단의 세월만 보내고 있다.

라오스의 고난의 역사는 우리 나라의 고난의 역사와 참으로 비슷한 점이 많이 있 다. 하지만 라오스 사람들이 두 손을 합장하고 공손히 <싸바이다>라고 하면서 미소 짓고 서로 인사하는 모습에서는 좌우니 북남이니 하면서 싸우는 험악한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들도 우리처럼 똑 같은 시기에 30년 동안 기나 긴 내전을 겪었다. 하지만 그것은 외세인 프랑스-미국의 강압적인 연장 술 때문에 있었을 뿐이었다. 라오스 사람들은 그 연장 술의 쇠사슬을 자체의 힘으로 끊어 버리고 벌써 35년 전에 평화를 되찾고 하나된 사회주의 나라를 창건했다. 라오스 인들에게는 <잃어버린 세월>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라오스 사람들의 행복관은 누가 얼마큼 소유했는가를 따지는데 있지 않고 행복의 판단은 인식의 차이에 있다고 본다. 라오스 하면 공산국가, 은둔의 나라 정도로 바깥 세상에 알려졌다. 서방언론은 “불교의 사원 외에는 별로 볼거리가 없는 국가”라고 악평을 했다.

하지만 라오스 사람들의 행복감은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체험하고 실천하는 삶의 깊은 속에서 솟아나는 행복감이다. 행복에 대하여 제국주의적 물량을 앞세울수록 회의에 빠지고 좌절감이 생긴다. 필자는 라오스 사람들의 삶과 역사를 살펴 보면서 그 누구, 어느 민족, 어떤 나라가 참으로 행복한가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 게 되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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