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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제국주의가 142년 괴롭힌 <말레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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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1-24 21:41 조회4,3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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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이번에는 아시아의 나라 <말레시아> 역사를 살펴보았다. 그는
민족통신을 통하여 연구 고찰한 나라들이 기획연재로서 지금까지 발표한 아프리카 나라들, 아시아 나라들,
중동나라들, 남미나라들 합쳐 총 38개 국이 된다고 밝히면서 "이 나라들 모두가 제국주의 나라들로부터
극심한 피해를 받은 나라들이었다"고 분석했다. <말레시아>는 특히 영국으로부터 142년 동안 시달린
나라이다. 이 나라에 대해 고찰한 내용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기획]제국주의가 142년 괴롭힌 <말레시아>



<##IMAGE##>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이번에는 아시아의 나라 <말레시아> 역사를 살펴보았다. 그는 민족통신을 통하여 연구 고찰한 나라들이 기획연재로서 지금까지 발표한 아프리카 나라들, 아시아 나라들, 중동나라들, 남미나라들 합쳐 총 38개 국이 된다고 밝히면서 "이 나라들 모두가 제국주의 나라들로부터 극심한 피해를 받은 나라들이었다"고 분석했다. <말레시아>는 특히 영국으로부터 142년 동안 시달린 나라이다. 이 나라에 대해 고찰한 내용을 소개한다.

지금은 이슬람교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과의 싸움

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이번에는 아시아의 나라 <말레시아> 역사를 살펴보았다. 그는 민족통신을 통하여 연구 고찰한 나라들이 기획연재로서 지금까지 발표한 아프리카 나라들, 아시아 나라들, 중동나라들, 남미나라들 합쳐 총 38개 국이 된다고 밝히면서 "이 나라들 모두가 제국주의 나라들로부터 극심한 피해를 받은 나라들이었다"고 분석했다. <말레시아>는 특히 영국으로부터 142년 동안 시달린 나라이다. 이 나라에 대해 고찰한 내용을 소개한다.

말레이시아인들이 민족의식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부터였다. 이 시기부터 그들의 오래된 전통적인 <군주제도의 왕국>형태가 무너지고 제국주의 형태로 변모되는 영국의 식민지 지배통치를 경험하는 비극적 과정으로 전환된다.

침략초기에 영국은 라는 우호적 정책을 쓰면서 호감을 사는 식민지정책에 의해 말레시아를 통치했다. 영국은 그 다음에는 Malay 해협을 통치하는 <해협식민지> 정책을 내 놓았고 또 얼마 후에는 <연방 말레이주>를 창설하여 형식적인 간접 통치수단을 활용했다.

영국은 여러 가지 형태의 식민통치수단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말레이시아를 노골적으로 식민지화하여 영국인 총독이 직접 통치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 하고 있었다. 영국은 세계 최대의 주석의 생산과 고무농장을 확대하여 중국인들과 인도인들을 말레이시아로 대량 이민을 시켜 노동력을 확보 했다.

영국의 식민지정책은 노동력에 비능율적인 말레이시아 원주민들을 시골로 이주시켜 농촌에서 쌀 농사에만 종사하도록 했다. 이와 같은 분리정책으로 인하여 말레이시아 사회는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 할 수 있는 기회가 농촌에서 쌀 농사에만 종사하고 있는 절대 다수의 말레이시아 원주민들보다는 오히려 외부에서 이주 해 온 소수의 중국인들에게 훨씬 더 유리했다. 이로 인해 경제적으로 부의 재분배 과정에서 소외된 대다수의 말레이시아인들과 소수의 중국인들 사이의 관계가 좋을 수 없었으며 이로 인하여 두 종족간의 반목과 불화는 이미 그 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영국의 식민통치가 오래 계속되는 역사 속에서 말레이시아 사회는 서구적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친영국 층이 되였고 나머지 일반 대중은 반 영국층으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는 영국의 두 종족의 분리정책에 의하여 중국인들이 유리한 처지에 있다고 판단한 말레이시아인들은 전반적으로 반중국인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1920년대에 들어서서 일본이 근대화를 꾀하면서 동남아시아를 향하여 새 식민지 침략 길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일본의 동향에 대하여 말레이시아의 친영국 기득권층은 물론 일본에 대하여 거부감을 강하게 나타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의 빈곤층인 일반대중은 영국의 식민통치에 대한 반감의 표시로 은근히 친일적인 성향을 나타냈다. 이와 같은 말레이시아 민중들의 친일적인 성향에 대하여 일본은 매우 기뻐했다.
일본은 말레이시아 민중들의 <반영감정>과 <친일 감정>을 반기면서 그것을 역 이용하여 약삭빠르게 말레이시아 민중들에게 달콤한 <반영국 독립>을 선전했다.

말레이시아 민중들은 영국과 일본의 틈바구니 속에서 일어난 사회적 혼란을 겪어야 했다.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 <중국계 말레야인>들이 주동이 되여 1930년 4월30일에 <말라야 인민군>을 조직 결성 하였다. 이 <밀라야 인민군>의 조직은 훗날에 <말라야 공산당>의 창설의 기원이 되었고 합류하는 원천이 되었다.
<말라야 공산당>이 창설되기 전에는 중국 공산당의 지부 형식으로 존재했을 뿐이였으며 특히 중국 장개석 정부로부터 도망쳐서 탈출 해 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말라야 공산당>은 처음에는 지하조직으로만 활동할 수 있었지만 차츰 광산과 고무농장의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사상교육과 반식민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로 인하여 드디어 <말라야 공산당>은 친영국 기득권계층과 충돌하여 영국의 식민통치를 곤란하게 했으며 영국의 식민정부는 <말라야 공산당>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영국 식민정부는 말라야 공산당의 당원들을 체포하여 투옥과 추방을 강행 했고 때로는 대량으로 사형을 시키기도 했다.

1815년에 영국이 말레이시아에서 식민통치를 시작하면서 말레이 반도를 중심하여 동남아시아 전역을 식민지화 하고 또는 보호령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민중들의 반영반식민지 투쟁은 소수의 게릴라에서부터 시작하여 흐르는 강물처럼 남녀노소 대중운동으로 흘러 넘쳤으며,한 지역에서 시작하여 인근 동남아 전역으로 파도처럼 번져 나가고 있었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던 시기에는 영국의 식민정부와 <말라야 공산당>이 치열한 대결국면에 있었다. 말라야 인민군은 게릴라 투쟁을 벌리며 영국에 맞섰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 된지 불과 10주 만에 일본군이 말레이시아를 점령 했다. 다급해진 영국은 어쩔 수 없이 <말라야 인민군>을 의존 할 수 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영국은 할 수 없이 <말라야 공산당>과 손을 잡고 일본의 침략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합동작전 계획을 세우고 함께 싸울 것을 요청했다.

<말라야 인민군>은 지역적으로 싸우는 반영국 반외세 게릴라 조직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을 물리칠만 한 힘이 부족했다. 영국은 <말라야 인민군>에게 영국군 장교를 파송 하고 막대한 군수물자들을 지원 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밀림에서 활동하고 있는 게릴라들을 불러 내어 추가하여 병력을 증강시켰다.

1942년에 <말라야 인민군>수는 3,000명 이였는데 1945년에는 7,000명으로 대폭 증강하여 일본군을 격파하고 투쟁했다. 영국은 일본에게 쫒겨 항복했지만 <말라야 인민군>은 3년 동안 일본군을 격파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1945년 8월15일에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항복으로 끝나고 일본은 말레이시아 에서 물러갔다. 전쟁이 끝난 후에 항일투쟁에서 승리한 <말라야 인민군>은 영웅들이 되었다.

그들은 산에서 내려와 도시를 장악하고 평화를 선포했다. 인민군들은 영국으로부터 지급받은 무기의 일부를 영국에게 자진 반납하는 순진한 행동까지 했다. 영국 여왕은<말라야 인민군>이 일본을 패배시키고 말레이시아를 해방 시킨 데 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말라야 인민군> 대표 10명을 런던에 초청하여 그들에게 최대의 치하와 대우를 베풀어 주었다.

<말라야 공산당>은 이와 같은 영국의 호의가 바로 <말레이시아의 완전한 독립>으로 큰 착각을 했다. 이 착각을 혹자는 <전술적 실수>라고 평했다. 하지만 그것 은 단순한 <전술적 실수>가 아니라 영국의 교묘한 <매수공작>에 빠지고 마는 치명적 패배인 것을 훗날에야 알게 되었다.

이렇게 <매수공작>에 성공한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또 다시 말레이시아로 되돌아 왔다. 되돌아 왔을 뿐만 아이라 영국은 <말라야 공산당>을 가차 없이 탄압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말라야 인민군>에게 무기를 대주고 군사원조를 해 준 일들과 인민군을 런던에 초청하여 그들의 공로를 치하 해 준 일들을 <손바닥 뒤집듯> 가볍게 모두 다 묵살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시대의 식민통치시대로 완전히 복귀하고 말았다.

영국은 말레이시아에서 식민통치를 완전히 다시 복귀하고 영구적 통치기반을 보다 더 공고히 하기 위하여 말라야 연합>을 창설하여 두 가지 정책을 선포했다.

첫째, <말라야 연합>을 창설한다. 말레이시아에 현존하고 있는 모든 친영국적인 우익단체들을 하나의 연합체로 묶어 놓는 형태이다. 그리고 이 새로 창설된 연합체는 영국 여왕이 새로 임명한 통치자로 하여금 말레이시아를 통치하게 한다.

둘째, <말라야 연합>은 민족의 근원적 전통인 <부족왕권의 군주제>를 완전히 폐지한다. 그리고 말레이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외국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한다.

이와 같은 정책은 말레이시아 본토인들에 대한 우대를 근원적으로 폐지함으로써 영국이 식민통치를 하는데 있어서 보다 더 쉽게 진행하기 위한 수단 이었다. 즉 원주민들의 기득권을 약화시키고 외국인들을 우대함으로써 내부의 일으켜서 식민통치 방법을 쉽게 하려는 술책이었다.

이와 같은 술책은 당연히 반대를 불러 일으켜 오히려 반영반식민적 좌익세력의 총집결을 유발시켰다. 1945–1948년에 걸쳐 3년 동안 치열한 반영반식민 투쟁이 말레이시아 전역에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투쟁이 3년 동안 계속되는 동안에 7-8천명의 게릴라와 7만여 명의 말레이시아 공산당원들이 단결하여 반영국 운동에 하나로 뭉치여 투쟁하게 되었다.

영국은 말레이시아 식민통치를 재개함에 있어서 새로운 좌익세력의 위협이 대두되고 있음을 감지하고 포대, 탱크 그리고 중무장한 전차를 비롯하여 각종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병력을 동원하여 말레이시아 민중의 집결을 진압하려 했다.

한편 제2차 대전 후 영국이 말레이시아에 다시 돌아와 식민통치를 강압적으로 재개하면서 난관에 봉착한 영국은 또 다시 새로운 통치 수단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1948년에 <말레이시아 연방>을 창설하여 강력한 통치 수단으로 삼아서 모든 친영국 우익 세력들을 하나로 묶어 놓으려 했다.

하지만 이 강력한 <말레이시아 연방>의 창설은 좌우파 모두에게 완전히 외면을 당하고 오히려 사분오열로 혼란만 더 가중시켰다. 당시의 상황들은 다음과 같다.

1. 보수파 친영국 계열은 영연방제도 안에서의 독립을 주장했다.
2.지식층에서는 영국을 완전히 배제한 독립은 불가능하지만 중도적 타협안을 주장했다.
3.영국을 완전히 배격하고 차라리 이웃나라 인도네시아와 합병통일을 주장하는 과격파도 등장했다.
4. 말레이 국민당의 창당을 주장하는 극좌파 세력과 중국계 말레이인들이 공동 보조를 취하고 있었다.
5.중국계 말레인들 중에서도 좌우파로 분열하는 혼란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좌우로 분열되는 말레이시아의 정국을 또 다시 수습하기 위하여 영국은 통치수단을 최고로 극대화 하는 방법으로 우파적 정치세력들을 총 집결시키는 <말라야 연방>을 또 다시 출범 시켰다.

영국이 <말라야 연방>을 세번 씩이나 새로 출범시킨 목적은 좌익 민중세력과 게릴라들의 활동을 근원적으로 패배시키기 위한 영국의 극단적인 정치공작이었다. 말레이시아의 좌익 운동진영은 영국의 극단적인 정치공작에 대항하여 싸우는 데 있어서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대응 할 수 없었으며 약자들은 평화적인 방법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 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좌익 세력들은 간고한 결의로 무장하여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말라야 좌익 게릴라들은 주로 촌락과 외곽지대에 사는 중국계 농민들을 지지 기반으로 삼고 싸웠다. 가난하게 사는 농민들에게 해방의 희망을 불러 일으켰다. 영국은 모든 말레이시아의 가난한 민중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 잠재적 게릴라 폭도들로 간주하고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영국은 순진한 농민들을 의심하여 공산주의 게릴라들과 모종의 관계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죄 없는 용의자들을 대량 검거하여 처형하는 잔인한 폭정을 자행했다. 이러한 결과는 오히려 더 많은 남녀들을 게릴라에 가담하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말레이시아 민중들은 말레이시아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한 영국의 그 어떠한 반공작전에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무장봉기에 당황한 영국은 상투적 수단으로 <적절한 여건이 조성되면 독립이 가능하다>라는 애매한 말로 항상 당면한 위기를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상투적 수단도 말레이시아에서 대영제국의 몰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패배하여 일본이 떠나 간 후에 영국은 또 다시 말레이시아에 돌아와 12년 동안을 식민통치를 하였다. 하지만 영국은 12년 동안에 얻은 것은 별로 없고 다만 게릴라전에 시달린 것 뿐이었다. 영국은 1957년에 말레이시아를 결국 포기 하고 완전히 떠나 가고 말았다.

왜 영국은 떠나 갔나? 그것은 냉전시대에 들어 서서 미국의 영향력에 의하여 이제는 영국이 더 이상 말레이시아에서 버틸 명분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마침내 떠나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말레이시아는 1815년에 말레이시아가 영국의 손에 넘어간 후에 142년만에 자유 독립 을 쟁취했던 것이다.

1. 말레이시아인들의 발자취


말레이시아 땅에 사람이 거주한 시기는 기원전 8,000년 경으로 보고 있는데 이들은 주로 이동식 화전농업에 종사하면서 신석기 문화를 확립하였으며 1000년경에는 철기를 사용한 것으로 본다.

2-3세기에 이르러서 크고 작은 말레이 왕국들이 산발적으로 발생했으며 북쪽에서는 인도인들이 대량 밀려와 몇 백년 동안 인도문화의 영향을 끼쳤다. 이로 인하여 힌두교와 불교가 함께 융합된 란카수카 왕국이 4,5세기경에 세워졌고 8, 9세기경에는 스리위자야 왕국이 건설되어 말레이 반도 전역과 말라카 해협을 지배하면서 부를 축적하였다.

13세기에 이르러서 말레이인들이 투마세크 왕국을 건설하였고 14세기에는 마자 파히트 왕국을 건설하여 힌두교국이 되였는데 이 무렵에 아랍인 상인들이 왕래하면서 이슬람교을 전파 했다.

15세기에 말라카 왕국이 건설되여 아랍인, 중국인, 인도인들의 무역의 기점으로 삼고 통상과 교류의 중심지가 되였으며, 토후국들과 말라카 해협을 넘어 싱가포르와 수마트라의 동부까지 지배를 했다.

1511년에 서구의 침략자들이 처음으로 오기시작 했는데 폴르투갈의 포병부대가 침공하여 말라카 왕국을 멸망시켰다. 말라카 왕국의 잔존세력들은 조호르 지역으 로 밀려나고 말았다.

1641년에 네덜란드가 말레이 반도를 쟁탈하기 위하여 포르투갈과 서로 싸웠는데 그 결과로 말레이 반도를 점령했다. 1700년대에 들어서서 네덜란드는 말레이시아를 완전이 점령하고 그 지역의 부족 왕들의 왕위를 폐지시키고 약 100년 동안 통치했다.

1786년에 영국은 베낭을 점령하고 1819년에 싱가포르에 무역항을 건설함으로 이 지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1824년에 네덜란드는 영국과 조약을 맺고 말레이 반도를 영국에게 내주는 대신 네덜란드는 수마트라 남부의 모든 영토를 통제하는 조약을 맺었다.

영국은 사실상 말레이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고 그 때부터 식민통치를 본격적으로 시작 했다.

그런 과정에서 1941년 12월 8일에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1942년 2월 15일에 영국은 말레이시아를 포기하고 일본에게 항복했다. 일본은 3년 8개월 동안 영국이 없는 말레이시아를 통치하다가 패전하여 후퇴했다. 그 후 영국은 1945년에 염치 없이 말레이시아에 다시 되돌아 왔다. 되돌아온 영국은 12년 동안 반공 정권을 세워 독재로 통치를 시도 했다. 하지만 영국은 이번에는 제국주의 침략을 항거하는 말레이시아 민중들의 성숙한 항쟁에 직면했다. 뿐만 아니라 민족해방을 위한 <말레이인민군>의 게릴라 전투에 영국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자인하고 142년 동안의 식민통치를 종결하고 1957년에 말레이시아를 완전히 떠나갔다.

2. 말레이시아의 독립



말레이시아는 한반도의 1.5배 되는 영토를 가지고 있으며 인구는 약 2,400만명이다. 말레이 본토인 58%, 화교 25%, 인디아계 7% 기타 여러 종족들이 10%정도로 집계된다.

1957년에 말레이시아는 독립했다.독립한 신생국 말레이시아는 영국이 오래 동안 실시한 식민통치의 후유증으로 나라는 전반적으로 혼란과 분열에 처해 있었다.

첫째로, 영국식 엘리트 교육제도로 인하여 사회적 분파와 계층간의 갈등문제가 심 화되고 있었다. 제일 큰 문제는 영어를 사용하는 전문적 고등관료들이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층과의 갈등이다. 영어권 말레이시아인들은 사회에서 전반적으로 유리한 특권층이며 친영국적 사람들이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1967년에 영어 대신 말레이어 를 국가의 공용어로 선포하였다. 말레이어를 국가 고용어로 선포함으로써 정치, 경제, 교육.문화 전반에 걸쳐 영국에 기생하여 특권을 누리던 계층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이 선포로 인하여 말레이시아의 탈식민적 근대화에 근간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둘째로, 경제적으로 우세한 위치에 있는 소수의 중국계인들과 빈곤층에 속하는 말레이시아 대중들 사이에 있는 갈등문제가 심화되고 있었다. 영국이 고의적으로 종족간의 차별정책을 통하여 말라야 원주민들에게 우매정책을 썼던 것이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중국인들의 경제적 우세로 인하여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영국의 식민통치 시대에 극심한 차별대우를 받은 말레이시아 본토인들에게 민족적으로 계급적으로 보상을 베풀어 주고 제도적으로 차별을 철폐하는 법령을 제정하여 선포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중국인들이 일본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싸운 공적과 또한 영국의 식민통치를 반대하여 줄기차게 투쟁한 중국계 말라야인들의 공과는 절대로 간과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말레이 본토인과 인도인들은 침략자들에게 협조를 제공하는 과오를 부끄럽게 여겨야만 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정치와 경제 또는 종족문제들을 원만히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1965년 8월에 중국계열의 정치 세력을 분리시켜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분리하여 독자적으로 <싱가포르 독립국>을 창건하도록 결단을 내렸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싱가포르 분리독립> 후에 13개 주로 구성된 독립국을 새로 창설 했다. 13개 주 가운데 9개 주들은 각 주마다 주의 왕 <군주>가 있으며 그 주의 군주는 세습제도로 주의 왕권을 이어 나가고 있다. 9개 주의 왕들은 5년마다 말레이시아의 국왕 < 군주, Sultan>을 새로 선출하고, 선출된 국왕은 말레이시아의 최고의 권위자로서 국무총리를 인준한다.

말레이시아의 하원은 국민이 투표로 선출하지만 상원은 국왕이 계층과 종족들을 골고루 고려하여 공정하게 상원을 임명한다. 2010년 현재의 말레이시아 국왕은 제13대째 미잔 아비딘 국왕이 재임 중이고 국무총리는 제6대 나집 툰 라작 총리가 집권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역사적 배경으로 보면 서방세계에 대한 불신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며,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말레이시아는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면서 중국과 관계유지를 원활히 이끌어 나아갈 것으로 전망된다.

말레이시아는 세계최대의 주석, 천연 고무, 팜유의 생산 수출국으로서 동남아 국가에서 3번째로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이다. 석유산업도 사라와크주에서 대규모 해양유전이 개발되면서 채취와 가공산업도 주요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과 모두 수교관계를 갖고 있다.

3. 말레이시아 사회주의당



1930년에 창당한 말레이시아 공산당은 반영 반일 게릴라전을 선포하고 줄기 차게 투쟁하여 1957년에 독립을 쟁취했다. 독립 후에 게릴라전선은 6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말레이시아의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는 맥을 이어서1994년부터 싹이 트기 시작하더니 2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서 1998년 5월 1일 메이데이에 드디어 말레이시아 사회주의당>으로 회생되어 부활했다.
사회주의당은 13분과로 구성되어 있으며13개월 동안 학습과정을 통과함으로써 사회주의 사상, 해외혁명사, 여성해방, 소수민족 인권운동 등에 관한 과정을 모두 완수할 수 있다.

사회주의당은 창당 된지 10년만인 2008년에 처음으로 정당 등록을 했다. 1999과 2004년 선거에는 후보자를 출마 시킬 수 없었으나, 정당 등록을 한 후에 2008년의 선거에서는 연방 국회의원 1명과 지방의회에서 각각 1명식 당선 되었다.

오늘 날 말레이시아의 정치제도에 있어서 정당정치는 말뿐이고 14개 정당들을 하나로 결속하여 묶어 놓은 기구가 있다. 이 기구를 <통합 말레이시아 국민기구> 라고 부른다.

이 <통합 말레리시아 국민기구>는 이름만 정당정치 형태를 붙여 놓았을 뿐 건국 이후 63년 동안 일당 독재 정치체제를 완강히 고수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철통같이 막혀져 있는 제도정치권 체제 속에서 드디어 새로 등록한 <말레이시아 사회주의당>이 1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한 것은 정말 놀라운 성공이다.

지금 말레이아 민중들은 1957년에 독립 이후 오늘까지 63년 동안 일당독재 체제 이며 군주정치제도를 고수하고 있는 <통합 말레이시아 국민기구> 의 폐지를 외치면서 거리에 나와 개혁ㅇ르 부르짓기 시작했다.

그러면 오늘 <말레이시아 사회주의당이 당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과업은 무엇인가?
첫째, 미국이 제3세계에 강요하고 있는 자유무역협정(FTA) 결사반대 운동을 적극 벌여야 한다. 공기업 민영화를 반대하여 서민들의 실업과 건강문제를 위하여 싸워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둘째, 미국에 종속되어 있는 국가들이 공통으로 품고 있는 <국가 보안법>의 폐지를 위해 투쟁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도 남한처럼 의심되는 사람은 영장 없이 60일 동안을 구금할 수 있다는 것이다.구타와 고문으로 인권의 침해를 당 하고 강제로 투옥되는 비극이 허다 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는 문제도 안고 있다.

셋째, 말레이시아의 일당독재적 체제인<통합말레이 국민기구>를 하루 속히 철폐시켜야 하는 문제도 안고 있다. 시민단체들이 선거를 통하여 제도정치에 진입할 수 있는 민주적 통로를 활짝 열어 놓도록 투쟁해야 하는 문제도 안고 있다.

넷째, 말레이시아는 미국의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침략주의를 대항하여 동남아 여러 피지배 국가들과 굳게 연대하고 공동으로 투쟁하여야 할 전략체를 형성하여 대응해야 할 문제도 안고 있다.

과거 냉전 시대에 미국은 <동남아 국가연합>을 창설하여<반공주의>를 강요했다. 하지만 오늘에 있어서 동남아 국가들은 <반공주의>가 아니라 <반제국주의와 반세계화 운동>을 위하여 <동남아 국가연합> 이 굳게 단합하여 힘차게 싸워야 하는 문제도 안고 있다.

이 글을 끝 맺으며


지금까지 온건한 이슬람 국가로 알려진 말레이시아에서 종교적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오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종교적 갈등과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슬람교가 절대적으로 다수인 말레이시아에서 서방의 보수주의적인 기독교 선교사들이 너무 무례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보여진다.

<알라>는 이슬람교에 있어서 <신에 대한 거룩한 호칭> 이다. 그런데 말레이시아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 서방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하나님> 호칭을 대신하여 <알라 호칭>을 사용하는 데서부터 발생한 사건들이다.

왜, 어찌하여 하필이면 다른 종교에 <알라신에 대한 거룩한 호칭>을 아전인수 격으로 말레이시아의 기독교인들이 도용하여 불러야 하는가를 따져서 질문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질문을 하는 것 보다는 좀더 다른 각도에서 말레이시아에서 발생하고 있는 종교적 갈등과 긴장 문제에 대하여 그 문제의 뿌리부터 고찰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레이시아 인구 2천 800만 중에서 이슬람교도는 65%를 차지하고 있으며 기독교인 수는 약 9%에 불과하다. 그리고 절대 다수의 이슬람교도들은 거의 다 본토의 원주민들이고 기독교인들은 중국인들이다.

말레이시아의 역사를 초보적으로 라도 좀 알고 있는 사람 이라면 극히 상식적으로 쉽게 문제의 원인과 뿌리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긴장과 갈등의 문제 원인은 <알라 신의 호칭> 문제로 발생한 순수한 종교적 문제만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뿌리 깊은 정치적이며 사회적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국인 영국이 300년 동안 뿌려 놓은 분규와 갈등의 씨앗이 빈곤한 본토의 이슬람교도들과 기독교를 믿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이와 같은 분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를 주장하는 미국을 배경하고 있는 한국의 극단적 보수주의 기독교 목사들이 말레이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과 긴장에 대하여 <앞으로 보다 더 공격적으로 선교 정책을 세워 나아가야 한다> 라고 강력하게 주장해 왔다.

서구세력과 그 문화가 말레이시아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갔고 지배했는데 이제는 이슬람 종교의 거룩한 <알라 신의 호칭> 마저 빼앗아 간다라고 분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속담에 <복숭아 밭에서는 갓끈도 고쳐 매지 못하고 참외 밭에서는 신발끈도 바로 매지 못한다> 라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의 뜻은 오해와 문제 발생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을 수 있음을 자각하고 조심하라는 뜻이다.

말레시아 인구 65%가 <알라>를 신봉하고, 9%에 불과한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교회에서
<하나님 대신 알라>를 도용하는 처사는 분개와 문제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름지기<기독교인들만 들어 갈 수 있는 천국도 거부하고, 불교인들만 들어 갈 수 있는 극락도 거부한다>라고 하는 용기와 넓은 마음을 소유해야 한다.

우리는 <알라 신>을 이슬람교 민중들의 거룩한 신으로 존중히 여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들의 신앙의 <하나님>을 폭군처럼 여기고 무엇이든 강요하는

공격적 종교행태로 인하여 타 종교로부터 비판을 받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2,800만 중에서 65%가 되는 말레이시아의 많은 민중들이 오늘도 그들의 전통적 종교인 <알라>에 대한 굳은 신앙과 신념으로 정의롭고 평화로운 그들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싸우는데 대하여 존경심을 가져야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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