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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좌파 열풍으로 깨어나는 <파라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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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10-01-09 16:24 조회4,7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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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이번에는 남미의 <파라과이> 역사를 살펴보았다. 그는 민족통신을
통하여 연구 고찰한 나라들이 기획연재로서 지금까지 발표한 아프리카 나라들, 아시아 나라들, 중동나라들, 남미
나라들 합쳐 총 37개 국이 된다고 밝히면서 "이 나라들 모두가 제국주의 나라들로부터 극심한 피해를 받은
나라들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간섭과 방해를 받지 않은 나라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미국의 횡포가 잔인했다."고
분석했다. 식민통치 300년, 친미독재정치 61년의 <파라과이>, 이 나라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기획]좌파 열풍으로 깨어나는 <파라과이>

1811년에 독립 후 쇄국정치와 내란 그리고 독재 61년




<##IMAGE##> 이번에는 남미의 <파라과이> 역사를 살펴보았다. 필자가 민족통신을 통하여 연구 고찰한 나라들을 기획연재로서 지금까지 발표한 아프리카 나라들, 아시아 나라들, 중동나라들, 남미 나라들 합쳐 총 37개 국이 된다. 이 나라들 모두가 제국주의 나라들로부터 극심한 피해를 받은 나라들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간섭과 방해를 받지 않은 나라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미국의 횡포가 잔인했다. 식민통치 300년, 친미독재정치 61년의 <파라과이>, 이 나라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파라과이는 우리 조국반도의 2배 되는 영토를 가진 나라로서 주요 종족은 스페인 침략자들과 인디오계의 과라니 원주민 혼혈족이 96%이고 유럽계와 동양계가 4% 이다. 파라과이 인구는 652만 명인데 약 1만 3천명의 혼혈되지 않은 인디오 과라니 원주민의 후손들이 오늘까지 겨우 생존하고 있다.

파라과이는 볼리비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큰 나라들에 둘러 쌓여 있으며 나라의 40%가 산림이며 광대한 초원으로 국토를 형성하여 농, 목축업이 주요 산업이다. 국민 45%이상이 농민이지만 대 토지소유자들이 경작지 75%이상을 독점하고 있다.

종교는 국교가 카톨릭이다. 인구 97%가 카톨릭 교인들로 사회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와 타 종교는 3%에 불과하다. 언어는 스페인어가 주요 언어이고 인디오 과라니어를 병용하고 있다.
파라과이의 수도인 아순시온 시에는 300년 식민지 역사의 호화로운 유물들이 그대로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 대통령 궁이 있다.

과거에는 이 대통령궁이 굳게 닫쳐 국민들에게 개방되지 않았다. 하지만 파라과이에 <개혁적 좌파정권>이 집권 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자유롭게 대통령 궁에서 사진을 찍고 내부를 관람할 수 있도록 시민들에게 널리 개방되었다.

지나간 61년 동안 친미독재 정권과 부정 부패한 콜로라도당이 파라과이를 통치했으나 2008년 8월 15일에 페르난도 루고 대통령이 친미독재정권을 퇴진시키고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했다. 중남미에 휩쓸고 있는 좌파운동의 열풍이 파라과이에도 불어 닥침으로 인하여 개혁적 좌파정권이 집권하여 실권을 잡기시작 했다.

남미의 마지막 보루 파라과이마저 좌파 열풍에 휩쓸려서 민주사회당과 민주진보당 등 10여 개의 정당연합체인 <애국연합당>의 통합대선후보자로 전 천주교 주교 페르난도 루고 주교가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여 2008년 4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2008년 8월 15일에 역사적인 취임식을 갖게 되었다.

페루난도 루고 당선자는 자기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당선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오늘 우리는 기득권층이 아닌 약한 소수계층들이지만 정의는 결국 승리한다는 것을 전세계인들에게 보여 주었다>

페루난도 루고 당선자는 300년의 오랜 세월 동안의 식민통치와 또 독립 후에는 외세에 의한 가혹한 독재로 인하여 고통을 받아 온 파라과이의 비극적 역사를 회고하면서 말하기를 <새로 탄생된 정부는 절대로 서민들 편에 설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스페인의 식민통치 300년과 또 1세기 동안 전통적으로 친미독재를 바탕으로 한 군부의 보수적 우파 정치세력이 득세하고 있던 파라과이를 남미에 불어 닥친 좌파바람의 힘센 강타에 의하여 획기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파라과이에서도 아르헨티나,칠레, 볼리비아 그리고 우르과이 등 여러 이웃 나라들의 뒤를 이어 친미독재군정에 대한 과거사를 근본적으로 청산하는 정치적 개혁운동을 통하여 페루난도 루고 대통령의 좌파정권이 탄생되었다.

페루난도 루고 주교는 로마 교황청과 파라과이 천주교 본부에 사제직 사직원서를 제출했다. 로마 교황청은 루고 주교의 사직원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페루난도 루고 주교는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은 이제는 더 이상 성직자가 아니고 정치가임을 주장하면서 파라과이 좌파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던 것이다.

color=blue>1. 파라과이의 간추린 역사



파라과이 땅에서 최초에 살기 시작한 사람들은 ‘과라니족’으로 알려진 준-유목민 집단 이었다. ‘과라니족’은 남아메리카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1524년에 스페인 침략자들이 도착하여 그 지역을 점령하고 식민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노예가 되고 말았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스페인 침략자들과 과라니 원주민들 사이에 문화와 언어의 교류가 이루워지고 또한 혼혈로 인한 결합이 발생함으로 인하여<메스티조>가 자연히 발생했다. 스페인 침략자들은 그들의 혼혈인 메스티조를 완전한 캐톨릭 교인이 되도록 예수회를 파견하여 150년 동안 맹렬한 선교활동을 전개 했다.

파라과이에 지금도 남아있는 웅대한 성당 건물과 석공, 조각 예술품들과 종교적 회화 등의 유품들은 150년 동안의 예수회가 지배하던 신정 공동체 시대를 과시하는 유물들 이다.

그러나 1767년에 스페인 왕가는 파라과이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예수회를 파라과이 에서 추방했다. 추방의 이유는 잘 알려지지 않으나 예수회의 지나친 착취행위와 스페인 왕가에 대한 불복종 때문 이였다고 추측된다.

예수회의 추방으로 인하여 기독교의 정착은 황폐해지고 원주민 노예들은 예수회의 지배에서부터 해방되어 뿔뿔이 흩어져서 다른 고용주들에게 소속되는 사회적 큰 변동이 발생했다.

파라과이는 1811년 5월 15일에 스페인 식민지 통치에서부터 274년 만에 독립을 쟁취했다. 독립을 쟁취한 파라과이는 5인의 집정위원회가 통치를 하다가 1814년에 프란시아를 초대 대통령으로 세웠다.

프란시아 초대 대통령은 무서운 독재자로 기록을 남겼는데 그는 27년 동안 집권을 하면서 종교인들과 학자들을 탄압하고 대외적으로 쇄국주의 정치를 실시했다.

하지만 그는 지주와 성당의 소유지를 몰수하여 사회적 개혁을 실시하여 국가적으로 자급자족의 정책을 실시하는 일면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1840년에 사망했다.

파라과이의 제2대 대통령으로 안토니오 로페스 대통령이 집권을 하여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여 쇄국주의 정책을 폐지하고 문호를 개방하여 국력을 어느 정도 신장시키는 정치를 하면서 19년 동안 집권 하다가 1862년에 사망했다.

안토니오 포페스 대통령의 사망후에 그의 아들 솔라노 로페스가 아버지의 대를 이어 파라과이의 제 3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다. 하지만 솔라노 로페스 대통령은 과대망상증에 사로 잡힌 비정상적인 정책을 실시하여 무리하게 국가신장 정책을 감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파라과이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그리고 브라질 <3개국 동맹전쟁>을 일으켜서 파라과이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1864년부터 1870년 까지 6년에 걸친 전쟁으로 인하여 파라과이는 영토의 대부분을 잃었고 인구의 ¼을 잃어 버리는 비극에 이르렀다.

파라과이의 수도인 아순시온시를 점령한 동맹국 군인들은 이유를 막론하고 모든 성인 남자들을 살육하는 무자비한 전쟁을 감행했다. 파라과이를 침공한 <3개국 동맹전쟁>에 대하여 단순히 파라과이 솔라노 로페스 대통령의 잘못된 정책 때문이라고만 보지 않는다. 그 비참한 전쟁의 원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의 정설은 남미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영국의 목적 때문이라는 설이 정설로 유력하다.

이와 같은 정설을 뒷 받침하는 증거로 영국 정부는 당시 <3개국 동맹군>에게 군수물자와 전쟁자금을 전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브라질은 국가기밀 문서에 대한 공개를 법적으로 아직은 공개를 금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 이후에 파라과이에는 농업지대에 동남아 지역 에서와 유럽지역에서 많은 이민자들이 계속 들어 오기 시작하여 파라과이 인구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정치적 불안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1870년대 이후 부터 1916년에 이르는 46년 동안에 파라과이 정치는 콜로라도 보수당과 자유당으로 양당의 대립 속에서 22인의 대통령이 경질되는 혼돈이 계속 되었다.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 파라과이의 정치적 동향은 줄곧 외세를 의존하는 보수주의 콜로라도당이 주도적 위치를 견지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32-35년에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사이에 CHACO 국경분쟁이 발생하였는데 이 때에는 미국이 조종하여 휴전이 성립되었다. 또한 미국이 지원하는 모리니고 장군이 대통령이 되여 정권을 잡아 통치를 했는데 1932년에서부터 1954년에 이르는 22년 동안에 6명의 대통령이 바뀌는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었다.

1954년에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가 군부 쿠테타를 일으켜 대통령이 된 후에 35년간 장기 집권을 하다가 브라질로 망명했으며 1989년에 로드리즈 장군이 정권을 탈취하여 1993년까지 군정을 계속했다.

1993년에 군정을 종식시키고 쿠테타 이후 39년 만에 자유 시장주의자 와스모시 대통령이 제 4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문민정권을 집권했다. 그러나 그는 각종 부정 사건에 연루 된 의심을 받아 유감스럽게도 문민정권은 단명으로 퇴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 후에 또 다시 보수주의 콜로라도당의 루이스 마치 대통령이 1999-2003년 까지 집권을 했으며 2003년 4월에 역시 골로라도당의 니카노르 두아르테 대통령이 2008년 8월 14일 까지 집권을 했다.

두아르테 대통령은 임기 1년을 남기고 있는 2007년에 나타난 여론조사에서 국정운영의 만족도에서 11%에 불과하여 보수주의 콜로라도당의 재집권은 매우 불투명해 지고 있었다. 과거61년 동안 정권을 잡고 있던 친미 보수주의 콜로라도당의 운명은 종말을 고하는 풍전등화가 되고 있었다.

color=blue>2. 좌파 열풍으로 깨어 나는 파라과이




파라과이는 남미의 대표적인 빈민국가이다. 외세의존과 독재와 부정부패의 상징이었던 파라과이 콜로라도 보수당이 선거 참패로 인하여 61년 만에 정권 교체가 이루워저서 2008년 8월 15일에 페루난도 루고 대통령 당선자가 파리과이의 신임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다.

남미에서 콜롬비아와 함께 구제불능의 친미독재 국가라는 누명을 오래 동안 쓰고 있던 파라과이가 중남미에 휩쓸고 있는 좌파열풍에 영향을 받아 진보나라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였다.

파라과이 역사상 처음으로 여당의 여성 대통령 후보자가 등장했는데 이 여성 후보자는 <여성과 여당>이라는 특이한 장점을 부각시켜 맹공격을 가해 공격적인 선거운동을 진행했다.

하지만 빈민의 아버지이며 약자들의 벗이라는 전 캐톨릭 주교이며 좌파정치가인 페르난도 루고 대통령 후보자는 식민통치 300년 한풀이와 61년 독재의 무거운 멍에를 민중의 등에서 벗겨줄 대통령으로 인정을 받아 선거에서 승리했다.

파라과이는 남미의 대표적인 빈민국가이다. 국토의 77%이상을 1%에 불과한 보수 특권층의 사람들이 독차지하고 있음으로 지구상에서 빈부의 격차가 가장 심한 나라 중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20% 이상의 국민들이 문맹자들이며 젊은이들 가운데 40%가 중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파라과이의 실정에 대하여 책임을 통감하여 루가는 캐톨릭 신부로서 사제 복을 벗어 던지고 정치에 용감히 뛰어 들었다.이와 같은 루고 대통령 후보자에게 파라과이 민중들은 뜨거운 찬사를 아끼지 않고 투표를 통하여 그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페루난도 루고 대통령이 2008년 8월 15일에 취임하면서 발표한 그의 취임사에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첫째, 철두철미한 과거청산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결코 국가 자원을 훔친 도둑들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다. 강도 높은 과거청산을 약속 했다.

둘째, 그는 파라과이 민중들을 향하여 <우리는 새롭게 깨어 났음을 라틴 아메리카는 물론 전세계에 선포한다> 라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파라과이는 소수의 특권층들만이 부를 독차지 하고 있었는데 대하여 암흑에서 민중들을 깨어나게 해야 할 것을 외쳤다.

세째, 그는 <이 순간부터 파라과이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한다> 라고 했다. 이것은 과거의 봉건주의와 외세의존적 망국적 역사의 독재정권을 깨끗이 청산한다는 것과 새 출발을 한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선언한 것을 의미했다. 이 선언은 파라과이에 <민중의 시대>가 도래 했음을 전세계를 향하여 선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네째, 그는 <우리는 칠레의 아엔데 대통령이 남긴 마지막 유언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라고 했다. 이 말의 뜻은 칠레의 아옌다,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처럼 철두철미하게 외세를 배격하는 자주사상을 염두에 두고 강 조한 발언이다.

남미 전체에 단 한개의 나라 콜롬비아만이 아직도 친미국가로 남아 있는 오늘의 현실을 감안하여 페르난도 루고 대통령은 남미좌파 나라들의 대동단결을 외쳤다.

끝으로 그는 <파라과이여 깨어나라, 깨어나라 파라과이여> 라는 말로 그의 대통령 취임사를 끝 맺았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고통을 받아 온 파라과이의 어두운 역사의 깊은 밤에서 깨여나 암흑의 종지부를 찍고 새 출발을 할 것을 국민들에게 제시했다.

루고 대통령은 그 동안 여러 차례 내외의 언론과 기자들에게 성명과 질문에 대답 하여 그의 정견을 발표 했는데 그는 파라과이의 영세농민들에게 <당근을 던져 주듯이 오늘 빵을 던져 주고 내일 다시 배고프게 하는 과거의 잘못된 정책이 아니라 지속적인 새로운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라고 강조했다.
과거 파라과이는 서방의 강대국에게 <구걸외교>를 했다면서 파라과이 새 정부는 자주국가로서 존엄성을 회복하고 환경, 식량 문제 등 각종 현안에 대하여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당당히 할 것이라고 말했다.

파라과이 정부는 2009년 12월 25일 성탄절 선물로 전국민에게 <공공의료서비스> 전면 무료화를 발표했다. 파라과이 국민은 진찰과 치료, 입원과 의약품 등 모든 비용을 국가가 부담한다고 발표했다.

캐톨릭 사제 출신이며 가난한자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루고 대통령은 정치적 공약으로 특히 극빈층 구제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는 공공의료서비스 무료화를 위하여 2010년에 3천 120억 과라니 (약 6천 540만 달러)의 예산을 책정 했다.

지난61년간 정권을 잡았던 콜로라도당 보수 독재정권하 에서는 상상도 못할 기적 같은 정책이 루고 대통령의 집권 1년 안에 그의 선거공약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루고 대통령은 앞으로 <남미좌파 3인방>인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에콰도르와 밀착관계를 구축하여 남미의 기아문제 해결 및 빈곤퇴치, 사회적 불평등 해소 등을 위하여 공동노력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루고 대통령은 <남미공유시장,메르코수르>의 회원국으로 친미 콜롬비아만 제외한 모든 나라들이 정 회원국으로 가입 할 것을 추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루고 대통령은 베네수엘라와 <베네수엘라-파라과이 정치 에너지 동맹 협정>을 체결하여 양국의 연대감을 튼튼히 하여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세계 5위의 석유 수출국인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은 양국의 유대를 강조하면서 <파라과이가 단 한방울의 석유도 부족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한편 캐톨릭 주교 출신인 루고 대통령은 파라과이 역사상 최초로 노예출신 원주민 여성을 파라과이 정부의 장관으로 임명했다.

공장 일꾼으로 팔려 다녔던 원주민 여성 이며 세 아이의 엄마인 음비왕기(46세)를 원주민 담당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녀는 자기자신이 한 부족의 부족장 이다. 음비왕기 장관은 네 살 때 정글에서 백인에게 납치되어 농장 노예로 여러 차례 팔려 다닌 적이 있는데 한 때 어느 주인이 학교에 보내 글을 읽고 쓰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그녀는 회고했다.

파라과이에는 현재 약 1만 3천명의 원주민이 있으며 그 중에 100여명의 추장들이 있다고 한다.

color=blue> 이 글을 끝 맺으며,


페르난도 루고 대통령 <1951년 5월 30일생>은 1977년에 천주교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그는 1994년에 파라과이에서 가장 가난한 지방으로 알려진 산페드로 교구의 주교로 임명을 받았다.

그는 주교로 재직하면서 빈민과 인디오 원주민의 권리를 옹호하고 토지개혁을 주장함으로써 그때부터 <가난한자의 아버지>로 이미 알려졌다.

루고는2006년에 수도 아순시온에서 대규모 반정부 집회를 주도하면서 정치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게 되었다. 이와 같은 계기로 인하여 2008년 대통령선거에 좌파 의 유력한 후보자로 떠 올랐다.

그는 정치적으로 사회주의 조직들과 관계를 맺고 동시에 좌파계열 8개 정당들과 연합하여 파라과이의 변화를 위한 <애국동맹>의 공식 대통령 후보자로 추대 되었다.

2008년 4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41%의 득표로 보수 여당의 막강한 후보자와 기성 정치인들의 유리한 조건들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2008년 7월에 그의 대통령 취임을 시인하여 로마 교황청은 그의 사제직 사임원을 수용하였다.

루고 대통령의 집권으로 인하여 61년 동안이나 장기독재정권을 누리고 있던 콜로라도 당 정권은 붕괴되고 말았다. 그리고 파라과이는 남미의 좌파나라들의 반 열에 당당하게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루가 대통령은 캐톨릭 신앙의 실천적 해방신학에 입각하여 <종교는 아편이 아니다> 라는 것을 증명하고 그의 사회주의적 사상의 창조성을 실천을 통하여 강조하면서 참으로 먼 길을 단숨에 달려와 성공한 인물이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남미의 역사상 최초로 원주민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과 더불어 주목해야 할 사건이며 그들의 과제는 앞으로 태산처럼 남아 있다.

그러면 앞으로 페루난도 루가 대통령이 넘어야 할 또 하나의 태산 같은 과제는 과 연 무엇인가?
루가 대통령의 앞길에 놓여진 태산 같은 과제와 난관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의 간섭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에 온두라스에서 성공적인 군사 쿠테타가 일어 났다.

오바마 대통령이 쿠테타를 비난 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응은 절대로 믿을 수 없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 쿠테타 세력은 지속적으로 재미를 보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온두라스 쿠테타 사건에 대하여 모호한 언급을 되풀이 하면서 <중도우파의 입지>와 <중도 좌파의 몸짓> 사이에서 시계추 모양 왔다 갔다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보도에 의하면 루고 대통령은 최근 이미 제기되고 있는 군부의 쿠테타 시도설에 대처하여 관련 군 수뇌부를 완전 개편을 완료 했다고 한다.

루가 대통령은 그의 임기 2013년 후에 재선을 절대로 시도하지 않겠다고 취임과 동시에 천명 했다. 허지만 루가 대통령이 2013년 8월 15일까지 임기를 무사히 마친 성공한 대통령이 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파라과이 국내 변수에는 큰 문제가 없겠으나 외적 변수 즉, 미국의 간섭정책이 머리를 다시 드느냐 아니냐의 관계와도 연관 될 것으로 예상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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