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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남미12나라 중 9번째 좌파 나라 -우루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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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9-12-29 12:51 조회4,5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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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말이 있다. 국제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태들을 간파한다면 그 누구도 자기 나라를 강대국에 떠 맡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동안
아프라카 나라들, 아시아 나라들, 남미나라들을 두루 연구 고찰하면서 그 나라들이 걸어 온 발자취들을
살펴보면서 깨 닳은 것이 있다. 자기나라를 절대로 강대국이나 제국주의 나라들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면서 "이번에 우루과이를 살펴보면서도 똑 같은 결론을 얻었다. 그래서 우루과이는 남미의 12나라들
중 9번째 좌파나라가 되는 과정에 있다."고 설명한다.[민족통신 편집실]


[기획]남미12나라 중 9번째 좌파나라-우루과이



우루과이 좌파 대통령들 국민과의 거리는 1미터


<##IMAGE##>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말이 있다. 국제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태들을 간파한다면 그 누구도 자기 나라를 강대국에 떠 맡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동안 아프라카 나라들, 아시아 나라들, 남미나라들을 두루 연구 고찰하면서 그 나라들이 걸어 온 발자취들을 살펴보면서 깨 닳은 것이 있다. 자기나라를 절대로 강대국이나 제국주의 나라들에게 맡겨서는 안 되고, 그리고 의존하여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이번에 우루과이를 살펴보면서도 똑 같은 결론을 얻었다. 그래서 우루과이는 남미의 12나라들 중 9번째 좌파나라가 되는 과정에 있다. 좌파나라가 된다는 것은 강대국의 노예나라가 아니라는 뜻도 되고, 한편으로는 주권을 가진 나라가 된다는 뜻도 된다. 그러면 우루과이의 역사와 현주소를 알아본다.

우루과이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좌파 정권이 등장 했다. 남미의 12개 나라 중 9번째로 우루과이에서 좌파정권이 등장한 것은 2004년에 타바로 바스케스 대통령이 5년 단임제 정권의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 인하여 시작되었다.

1820년대에 들어서서 우루과이는 300여 년 동안의 식민통치에서부터 겨우 독 립을 쟁취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고질적이며 뿌리 깊은 제국주의의 식민정책과 군부의 파벌간의 정권탈취를 위한 쿠테타가 끊임 없이 반복되어 발생하고 있었다. 그 길고 긴 어 두음의 시대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서 우루과이는 한 때 <남아메리카의 스위스>라고 불리 울 만큼 충실한 사회보장정책을 실시하는 움직임이 잠시 동안 존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또 다시 외세와 군부의 정치개입이 심화되어 2004년까지 34년 동안 우익독재정권이 우루과이를 지배하는 불행한 나라가 되고 있었다.

34년 동안의 우익 독재정권을 타파하고 건국 이래 최초로 우루과이에 좌파 대통령이 등장 했다. 우루과이 제 39대 대통령이 된 타바레 바스케스 대통령은 우루과이 역사에 있어서 최초로 좌파계열의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던 것이다.

바스케스 대통령은 본래 의학을 전공한 의사였다. 하지만 그는 정치에 뜻을 두고 좌파계열의 <확대전선>의 후보자로 출마하여 1990년에 우루과이의 수도인 몬테 비데오 시의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시장으로 당선된 바스케스는 1990년 부터 2004년까지 14년 동안 우루과이의 수도인 몬테비데오 시의 시장으로 활약을 하면서 그의 정치적 재능과 위상을 과시하여 남미의 좌파계열의 나라들을 <확대전선>에 결집시키는데 공헌 했다.

그는 시장으로 재임 기간 14년 동안에 미국의 신 자유주의를 절대로 반대하여 사회복지 정책을 일관하면서 좌파계열의 정치노선인 <확대전선>을 확대강화 하는데 전력을 기우려 큰 성과를 거두었다.

바스케스는 2005년에 드디어 우루과이의 제 39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다. 그는 대통령으로 취임을 한 직후에 쿠바를 친히 방문하였다. 그는 그 동안 소원해진 쿠바와의 외교 관계를 복원하였고 중남미 대륙을 <좌파>로 물들게 하는 빈민구제정책을 솔선수범 함으로서 중남미의 좌파 계열의 대통령으로 우뚝 섰다.

바스케스 대통령은 2008년 8월에 한국의 봉헌사를 방문하여 대웅전에서 참배하고 법회에 참석한 신도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주지 스님과 함께 차를 마시면서 한국의 다도 체험 프로그램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의 불교문화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나타내 보였다.

바스케스 대통령의 좌파적 통치 방식은 미국 성조기를 불태우는 과거의 남미 운동권의 낡은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좌파 실용주의자>라고 불리 움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스케스 대통령이 미국의 신 자유주의 압력을 받아 들임으로써 국가적 경제정책을 신 자유주의의 나락으로 빠뜨리는 과오를 결코 범하지 않았다.

바스케스 대통령은 재임 기간 5년 동안에 경제, 사회, 국방 등 분야에서 획기적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빈곤퇴치와 실업율 감소에 크게 공헌했다.

특히 바스케스 대통령은 세계 최초의 기록이 될 전국의 교사들과 초등학생 모두38만여 명에게 <랩톱 컴퓨터, 노트북>을 무료로 공급하는 교육혁명을 실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미국이 지원하는 군사 독재정권 시절에 저지른 인권탄압 연 루자들을 철저하게 색출하여 사법처리를 함으로서 미국을 등에 업고 있는 군부의 정치개입에 대한 우려를 깨끗이 해소시킨 공적을 싸았음으로 국민들로부터 높이 평가를 받았다.

지난2004년10월에 우루과이 대선에 승리하여 우루과이 역사상 첫 좌파 정권을 탄생시킨 69세의 바스케스 대통령은 5년 단임제 규정에 따라서 2010년 3월 1일에 임기를 성공적으로 끝내게 된다.

그는 재출마를 시도하지 않고 법에 따라 평화적으로 민주적 선거를 통하여 정권 을 후계자에게 이양 해 줄 것이다.

바스케스 대통령은 좌파 정권의 승계자로 <호세 무히카>를 후임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정권을 평화적으로 이양하는데 성공했다.

호세 무히카 당선자는 74세의 나이로서 2010년 3월 1일에 우루과이의 제 40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될 것이다. 호세 무히카 대통령 당선자는 앞으로 3개월 후 에 남미 12개 나라 중 에서 9번째 좌파 나라의 대통령으로 취임을 하게 될 것이다.

1. .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의 식민지 쟁탈전


1516년에 스페인 탐험자들이 <치루아 인디안족>이 살고 있는 땅을 처음 침범한
이후부터 300년 동안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리고 뒤늦게 뛰어든 영국이 식민지 쟁 탈전을 서로 맹렬히 벌리고 있었다.

원주민 <치루아 인디안족>은 유별나게 호전적 기질을 가진 족속이며 또한 이 지 역에는 금이나 은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16세기와 17세기에 이곳에서 유럽인들의 식민지 정착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의 풍부한 초원에서 가축을 기르는 목축업이 성공하게 되자 1620 -1670년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서로 식민지 요새를 건설하여 쟁탈전을 전개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벌여지는 영유권 쟁탈전은 100년 동안 계속됬다.1777년에 이르러서 두 나라의 영유권 싸움의 정세는 스페인의 승리 쪽으로 기우려졌다. 하지만 1800년대 초에 들어서서 영국이 스페인과 전쟁을 하면서 우루과이 몬테비대오를 공격하기 위하여 영국군 10,000 병력을 동원했다. 그리하여 19세기 초에 우루과이 땅에서는 스페인, 포루투갈 그리고 영국이 계속하여 식민지 획득과 영유권 싸움을 치루고 있었다.

2. 우루과이 독립 투쟁



1811년에 이르러서 비로서 우루과이 독립을 위한 투쟁이 시작 되었다. 우루과이의 국민 영웅 호세아르티가스는 스페인 침략군을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1814년에 독립운동의 좌파 <연방 연합>을 조직하고 우루과이의 독립을 단호하게 선포했다.

이에 당황한 포루투갈은 수적 우세와 물질적 강세를 앞세워 1817년에 호세 아르티가스의 독립군을 무찌르고 <연방 연합>의 독립선포를 무효화 했다. 뿐만 아니라 포루투갈은 우루과이를 브라질의 영토의 일부로 병합시키고 말았다.

그후 1825년에 우르과이의 독립을 포기하지 않은 33인 결사대는 안토니오를 수반으로 세우고 또한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받아 포르투갈의 강적을 물리치고 드디어 우르과이의 독립을 두 번째로 재 선포를 했다.

우르과이 독립의 두번째 재 선포도 완전한 독립을 보장해 주지 못했다. 우르과이에 대한 영유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이웃나라 <아르헨티나 – 브라질> 은 그 들의 배후에 서 있는 <스페인 – 포르투갈> 의 대리 전을 하면서 우루과이의 독립을 방해하면서 저지하고 있었다.

이 대리전은 1825 -1828년까지3년 동안 계속 되었다. 어느 쪽이 우세한지 싸움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인데, 이때 약삭빠른 영국은 싸움에 끼어들었으며 사실상 아르헨티나 편을 들어주면서 중재자의 역할을 했다.

영국의 중재로 인하여 양편은 1830년에 <우루과이 공화국> 건국의 조약을 맺고 첫 헌법을 1830년 7월18일에 제정하여 선포를 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우루과이 독립국의 깃발에는 아르헨티나의 깃발에 새겨 져 있는 동일한 <5월의 태양>이 똑같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독립 후에도 미국의 조정은 받고 있는 이웃 국가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두 나라들의 계속적인 개입과 갈등으로 인하여 우루과이에는 정치와 경제의 동요가 항상 계속되고 있었다.

3. 20세기 우루과이 새 시대



1830년 7월 18일에 독립을 쟁취한 우루과이는 제1대 대통령 리베라 대통령이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콜로라도 당>을 배경 삼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 했다.

이와는 정반대로 제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오리배 대통령은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받는 <블랑코 당>에 소속되어 제 2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했다.

그럼으로 독립 초기의 우루과이는 서방의 강대국들과 또한 이웃에 있는 브라질과 아르핸티나의 틈새에 끼여 홀난에 빠져 있게 되었다. 강대국들의 틈새에 끼여 있으면서 우루과이는 내적으로 <콜로라도 당>과 <블랑코 당>으로 양분되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서방의 외세를 반대하는 자유파와 외세를 의존하는 보수파가 서로 대립되어 독립 초창기부터 정권을 독차지 하기 위하여 싸우고 있었다. 이와 같은 대립은 쿠테타와 암살 및 내란으로 이여졌으며 1843 -1851년에는 큰 전쟁이 일어났다.

신생국 우루과이는 보수주의 <콜로라도 당>이 막강한 힘으로 정권을 오래 동안 독점함으로 인하여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분쟁과 혼란에 깊이 빠져 있었다.

이러한 분쟁과 혼란 속에서도 1903년에 대통령이 된 오르도네스 대통령 은 반란을 진압하고 민주적 개혁을 감행하여 20세기 민주국가 건설을 위한 기초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큰 공훈을 세웠다.

오르도네스 대통령은 기간 산업의 국유화, 8시간 노동제, 노인 연금, 교육제도의 개혁 그리고 정교 분리 등 여러 가지 개혁을 감행하였다. 오늘날의 우루과이가 자랑하고 있는 민주적 사회복지의 모든 제도들은 그때 수립 됨으로써 우루과이를 한 때 <남아메리카의 스위스>라고 불리웠는데 그것은 바로 이 때의 역사적 유산 이며 공적이었다.

그런데 1934년에 불행하게도 독재자 가브리엘 테라가 미국이 지원하는 군부의 쿠테타를 또 다시 일으켜 우루과이를 몇 년 동안 암흑의 정치로 바뀌는 불행한 사건이 잠시 발생했다. 하지만 1952년과 1957년에 선거를 통하여 보수주의 <콜로라도 당>이 자유파 <블랑코 당>에 패배하였다. <콜로라도 당>이 선거에서 패배하고 자유파 <블랑코 당>이 승리를 함으로서 지금까지 93년 동안이나 미국에 의존하고 권좌를 누리고 있던 보수주의 <콜로라도 당>은 권력 독점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 후부터 200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우루과이의 정치는 자유파와 보수파 사이에 줄 당기기 식의 분규는 여전이 계속 되었는데 1994년 선거와 1999년 선거에서 보수파가 두 번이나 우세하였다.

이러한 불리한 정세 속에서 좌파에 속하는 바스케스는 몬테비데오 시장은 현직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1994년과 1999년에 두 번 대통령에 출마를 했다. 1999년에는 제 2차 투표까지 진출하면서 분투 했지만 아쉽게도 보수파 호르헤 바트에게 두 번 다 패배했다.

바스케스 시장은 민중들의 지칠 줄 모르는 지지를 얻어 2004년에 세 번째로 좌파 <확대전선>의 대통령 후보자로 또 다시 재출마를 하여 이번에는 당당하게 좌파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었다.

타바레 바스케스 대통령이 2004년에 우루과이 대통령으로 등장함으로 인하여 우루과이는 당시 남미 12 나라 중에서 6번째 좌파 나라가 되었다. 바스케스 대통령은 2010년 까지 5년 동안 집권하고 우루과이의 5년 단임제 제도에 따라 2010년 3월 1일에 퇴임을 하게 된다.

바스케스 대통령은 자기 자신의 재집권을 시도하지 않고 좌파 <확대전선>의 대통령 후보자 호세 무히카를 후임자로 당선시키는데 또 다시 성공했다.

호세 무히카 대통령 당선자는 이번에는 남미의 12 나라중에서 9번째 좌파 대통 령으로서 2010년 3월 1일에 우루과이의 제 40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4. 호세 무히카는 누구?


호세 무히카 대통령 당선자는 좌익 계릴라 지도자 출신으로 현 바스케 대통령 정권하에서 농업장관을 역임했으며 현직 상원 의원이기도 하다. 그는 이번 대통령 선거전에서 우파 후보자 루이스 라칼레와 맞대결을 펼쳐 승리했다.

라칼레 우파 후보자는 전직 대통령들중의 한 사람으로서 1990 -1995년에 우파 정당인 국민당 정권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었다. 선거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가 나오지 않아 2차 최종 투표에서 전직 대통령을 유유히 물리치고 무히카 후보자가 당선 되었다.

무히카 당선자는 1935년에 출생하여 1960년대에 정치활동을 시작했으며 미국이 지원하는 군사독재 정권과 맞서 싸우면서 좌익 계릴라 무장 조직에 가담했다. 그는 1970년대 초에 게릴라 무장투쟁 여성 동지를 만났으나 결혼을 하지 못하고 계릴라 전에서 총상을 당하고 곧바로 체포되었으며 15년 후에 독재정권 종식으로 감 옥에서 1985년에 풀려 나왔다.

그는 이와같은 게릴라와 정치활동을 하면서 독신으로 오래 동안 정상적인 가정 생활을하지 못한 개인적 어려운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4년 전에 정식 결혼을 했지만 자녀를 두지 못하고 있다.

무히카 당선자는 감옥에서 석방된 후에 <민중참여운동> 이라는 정치단체를 조직하였는데 이 조직에는 사회당, 공산당, 기독교민주당 그리고 좌익 게릴라 단체들이 동참하고 있었다.

무히카 당선자는 1994년에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들어 갔으며 2000년에는 전국최다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상원의원으로 당선 되여 유명 정치인으로 인식 되었다. 그는 이번 대통령 출마 유세에서 공약으로 소득 재분배 강화, 사회구호 제도 확대, 20만개 신규 일자리 창출, 빈곤층 감소, 여성 및 소수민족 우대 정책등을 강조하여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획득 했다.

그는 또한 당선 후 성명을 통하여 전략적 차원에서 브라질 루이스 룰라 대통령과 유대를 강화하여 실용주의적 좌파 정치노선을 따르겠다고 언명을 했다. 그리고 그는 중도 성향의 아스토리 전 경제장관을 런닝 메이트로 삼기도 했다.

어쨋든 무히카 당선자가 2010년 3월 1일에 집권을 시작하게 되면 분명한 것은 중남미의 막강한 좌파 블록인 <미주를 위한 볼리바르 동맹, ALBA>과 유대를 강화하여 적극적으로 활약할 것이 분명하다고 국제문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루과이 제 40대 대통령으로 취임을 하게 될 무히카 대통령에게 지워진 책무와 과제는 무엇일까?

특히 <중도좌파연합 확대전선, FA> 후보자로 당선된 무히카 대통령은 남미의 반미적 정치동향에 대하여 어떤 역할을 담당 할 것인가?

미국은 세계 각국의 보호주의를 없애고 미국의 주도하에서 대국주의적 자유무역을 주장하여 1986년에 우루과이의 푼타 델 에스테에서 <우루과이 라운드, UR>결성을 위한 협정을 시작했으며, <우루과이 라운드,UR>의 완전한 결성은 마침내 1994년에 협정을 종결했다.

미국이 주도하는<우루과이 라운드>의 발효로 인하여 세계100여 개 약소국가들이 당하고 있는 막대한 손실과 피해는 엄청나다.

남한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남한에서 쌀 개방을 비롯하여 모든 농산물의 덤핑 수입으로 인하여 남한 농촌은 여지 없이 붕괴 되였고 또한 신자유주의 도입으로 시장개방은 정리해고를 유발하여 빈부의 격차를 심화 시켰다.

그러면 우루과이를 비롯하여 남미 나라들은 어떠한가?

유럽에 <유럽연합, EU>이 있는 것처럼 남미에도 미국을 대항 할 수 있는 <남미국가연연합, UNASUL> 이 있다. 남미의 12개 국가의 인구는 4억에 가까우며 거대한 시장과 풍부한 천연자원과 농업자원을 보유하여 미국을 압도하고 있다.

또 남미에는 <메르코수르, MERCOSUR> 남미공동 무역을 위한 조직이 있다. 남미공동시장에는 회원국으로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베네수엘라가 있고, 준 회원국으로는 볼리비아, 칠레,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 등 나라들이 있다. 준회원 국가들도 베네수엘라를 비롯하여 곧 정 회원국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메르고수르>의 동향은 콜럼비아가 미국과 군사협정을 체결하는데 대한 보복으로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콜롬비아와의 무역 직거래를 기피하고 있는 실정이다.
<메르코수르>의 유일한 목적은 미국의 독점자본을 배격하고 물류와 인력 그리고 회원국들 사이에서 자본의 자유로운 교환을 구축하여 남미 회원 나라들 사이의 정치, 경제통합을 증진키는 것에 있다.

이와 같은 남미 12개 나라들의 동향에 있어서 우루과이의 좌파 전임 바스카스 대통령과 후임 무히카 대통령 두 대통령의 등장은 남미에 불어 닥치고 있는 좌파 국가들의 정치적 열풍에 있어서 막대한 힘을 더 해 주고 있다.

이 글을 끝 맺으며,


우루과이 좌파 두 대통령들은 전통적으로 일반 서민들과 거리가 아주 가까운 것 으로 유명하다. 현직 바스케스 대통령이 평상시 복장 차림으로 거리를 산책하는 모습을 우루과이 국민들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무히카 대통령 당선자는 당선이 확정된 후에 기자들에게 앞으로 5년 임기 동안에 대통령 궁인 <수아레스 궁>으로 이사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화초와 채소가 가득히 심어진 자신의 농장을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 당선자의 이와같은 발언에 대하여 우루과이 언론들은 대통령 경호원들이 머물 시설에 평소에 없었던 전등 빛이 초목이 우거진 전원의 밤을 밝히게 될 것이라는 기사를 쓰고 있다.

우루과이에서 좌파 대통령이 연이여 집권을 하게 된데 대하여 정치 평론가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루과이에서는 거리에 걸어가는 평복 차림의 대통령을 쉽게 만날 수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대통령과 서민들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서민 사이에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오히려 낯선 진풍경이다>

위의 정치 평론가들의 말은 <우루과이 좌파 대통령과 국민과의 거리는 1미터 정도>라는 말의 뜻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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