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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강대국 틈바구니에 끼어 배반당해 온 <티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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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9-12-09 15:18 조회4,3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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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은 이번에는 아시아의 섬나라 <티모르>에 대해 연구한 기획연재 글을
발표하면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라들 가운데 제국주의 나라들이나 또는 강대국들에 의해 피해를 받지 않은
나라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크고 작은 나라들이 상처를 받아 왔고, 암울한 역사를 경험해 왔다. 나는 민족통신에서
연재로 기획하는 남미,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등의 나라들을 연구하고 고찰한 글을 쓰면서 매번 비슷한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섬나라 <티모르>라는 나라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술회했다.
전문을 여기에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IMAGE##>
[기획]강대국 틈바구니에 끼어 배반당해 온 <티모르>



강대국 틈바구니에 끼어 배반당해 온 <티모르>
평화롭던 티모르 섬, 동서로 분리된 비극의 역사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IMAGE##>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라들 가운데 제국주의 나라들이나 또는 강대국들에 의해 피해를 받지 않은 나라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크고 작은 나라들이 상처를 받아 왔고, 암울한 역사를 경험해 왔다.

나는 민족통신에서 연재로 기획하는 남미,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등의 나라들을 연구하고 고찰한 글을 쓰면서 매번 비슷한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 섬나라 <티모르>라는 나라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동티모르의 수도인 딜리시의 동쪽 외곽 높은 산 언덕에는 브라질에 세워진 <예수상> 보 다는 조금 작기는 하지만 27m 높이의 <예수상>이 우뚝 서 있다.

브라질의 수도 리우데자네이루 언덕 위에 서 있는 거대한 <예수상>은 1922년부터 1931년까지 9년 동안 제작비 25만 달러를 들여 만든 조각물로 그 높이가 39m 가량된다.

브라질 언론과 은행들 그리고 룰라 대통령까지 나서서 수백만 달러를 들여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2007년 7월7일에 스위스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민간 재단에서는 이 <예수상>을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로 지정하였다.

그런데 브라질의 거대한 <예수상>은 두 가지의 특별한 특징과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포르투갈 식민지로 322년 동안 있다가 1822에 독립을 쟁취한 브라질은 절대 다수의 카톨릭 국가로서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카톨릭 전통을 따라서 거대한 <예수상>을 건설했다.

둘째, <예수상> 얼굴의 방향과 시선의 초점은 오직 브라질 땅 만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얼굴의 방향의 절반과 시선의 초점의 절반은 먼 곳에 있는 이웃 나라들 페루, 볼리비아, 칠레 등 이웃 나라들을 멀리 바라보면서 서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독립100주년을 축하하는 브라질은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이웃 나라들과의 우호적인 친선관계를 제시해 주면서 우뚝 서 있는 것이 <예수상>이 지니고 있는 큰 의미와 특징 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상>을 설계 한 알버트 카큐오트 (Albert Caquot) 의 사료 깊은 예술적 사상과 특히 카톨릭 나라의 종교적 교훈의 상징으로서 <예수상>은 이웃 나라들과 의 두터운 친선과 우호적 선린의 관계를 암시해 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 되고 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동티모르의 수도인 딜리시의 동쪽 외곽 높은 산 언덕의 <예수상>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궁금하다. 그리고 어찌하여 동티모르의 <예수상>은 27m로 조각되었을까? 그것은 동티모르를 강제로 침략한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정치적으로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편입시켜 인도네시아의 영토로 삼은 것을 과시하기 위한 상징적인 <예수상>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네시아는 동티모르를 무력으로 침략한 승리의 상징과 과시용으로 27m 높이의 <예수상>을 동티모르의 수도인 달리시의 외곽 높은 산 언덕에 세웠던 것이다. 도대체 <예수상>은 침략을 당한 비극의 동티모르를 두 팔을 벌린 채 서서 굽어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예수상> 가까이까지 산 언덕을 올라가려면 계단이 730개가 있다. 수백 년 동안 포르투갈의 통치를 받은 동티모르는 국민의 98%가 카톨릭 교인들 이다. 동티모르의 카톨릭 교인들은 730개 계단 위에 높이 우뚝 서 있는 <예수상>을 바라보면서 인도네시아의 침략과 <예수상>에 대하여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1. 둘로 갈라진 <동 티모르>와 <서 티모르>



티모르는 본래 오래된 역사 속에서 분열을 모르고 평화로운 원시적 섬나라 이었다. 고대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기원전 3천년 경 멜라네시아인들이 이주해 와서 베도-오스트랄로이드족과 함게 혼합하여 티모르에서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티모르섬에서 독립적 중앙집권적인 왕국을 세우지는 못하고 오랜세월 동안 족장체제로 유지된 역사적 흔적들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예를 들어 말 하면 티모르를 구성하고 있었던 테툼족, 부낙족 그리고 케막족등 여러 부족의 후손들이 티모르섬의 광활한 지역에 넓게 흩어져서 자유롭게 거주하고 있었던 흔적을 오늘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고 한다.

14세기경에 이르러서 중국과 인도의 상인들이 티모르 섬을 왕래한 기록들이 있다. 16세기에 이르러서 포르투갈, 네덜란드,영국 그리고 스페인등 서구의 열강들이 향로무역을 독점하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이 지역의 여러 섬 나라들을 점령하고 있었다.

1509년에 포르투갈이 최초로 티모르에 도착했으며 1520년에는 티모르 섬 전부를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1556년에 포르투갈의 카톨릭 선교사들이 티모르에 도착하여 동티모르 섬을 카톨릭화 하기 시작했다.

한편 1527년에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참략했다. 1520년과 1527년에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두 나라는 경쟁적으로 여러 섬들에서 특산물을 찾고 있었다. 포르투갈이 티모르 섬을 먼저 침략하여 섬 전체를 식민지화 하였다. 그런데 인도네시아를 침략하여 식민지배를 하고 있던 네덜란드는 티모르 섬의 서부지역에 대하여 관심을 품고 눈길을 돌려 침범했다.

그리하여 티모르 섬에서 두 나라 사이에 분쟁이 격화되고 있었는데 1749년에 펜푸이 전투(Battle of Penful)가 벌어져서 결국 네덜란드가 승리했다. 전투에서 패배한 포르투갈은 티모르 섬을 계속하여 지배하기는 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패전의 대가로 티모르 땅을 동서로 갈라놓고 절반인 <서티모르 땅>을 승리자 네덜란드에게 넘겨 줌으로서 두 나라는 서로 화해를 했다.

두 나라가 서로 화해를 했지만 그러나 그들의 회해의 대가는 티모르에게는 동서로 갈라지는 분열의 비극이 되고 말았다. <동티모르>와 <서티모르>가 둘로 분리된 비극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2.세계대전 종식 후 동티모르의 운명



제 2 차 세계대전 종식 후에 인도네시아를 식민통치 하고 있던 네덜란드는 붕괴되었다. 네덜란드 정권의 붕괴는 인도네시아에게 해방과 독립의 기쁨을 주었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와 서 티모르에서 떠나 간 후에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쟁취하게 됨과 동시에 불행하게도 서 티모르는 독립된 인도네시아의 영토로 편입되고 말았다.

그렇게 된 원인은 네덜란드가 식민통치를 하고 있을 때 인도네시아와 서티모르는 모두 다 함께 수백 년 동안 네덜란드의 통치권 안에 속해 있으면서 정치와 사회적으로 서로 동화되어 있었기 때문 이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서티모르는 영구적으로 인도네시아에 편입된 영토로 결정지어 졌다. 서 티모르의 비극적 운명은 이렇게 결정 지어졌던 것이다.

그러면 <동티모르>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나?

한편 동티모르를 오래 동안 식민통치하고 있던 포르투갈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동티모르를 떠나 가지 않고 여전히 1974년까지 장장 448년 동안이나 계속하여 동티모르를 통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티모르의 민중운동은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을 결성하여 거세게 저항하면서 독립운동을 꾸준히 전개했다.

포르투갈은 448년 동안의 식민통치를 포기하고 결국 동티모르를 떠나야만 했다. 1975년 11월 28일에 포르투갈은 동티모르 통치를 포기하고 떠나가고 말았다.그리하여 동티모르 민중은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을 높이 들어 드디어 자주의 동티모르의 독립을 만방에 선포했다. 동티모르저항세력을 이끈 힘은 민중들의 단결력 이었다.

동티모르는 448년 동안의 길고 긴 포르투갈 통치에서 해방되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을 결성하여 거세게 투쟁하고 있었다. 민중의 오랜 투쟁 끝에 드디어 1975년 11월28일에 침략통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쟁취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이 동티모르의 독립을 선포한 뒤 바로 10일 후 1975년 12월 7일에 미국이 지원하는 인도네시아의 군부가 군인 3만 명을 동원하여 동티모르를 마구 침공했다.
인도네시아는 군인 3만 명을 동원하여 동티모르를 침공했을 뿐만 아니라 1976년 7월 17일 에는 동티모르를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편입시키기 까지 했다.

이 짧은 기간 동안에 동티모르는 나라의 운명이 엄청난 비극으로 변했다. 이 짧은 한 달 19일 동안에 동티모르의 총 인구 80만 명 중에서 6만 명이 인도네시아 침략군에 의하여 비참하게 살해를 당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의 침략을 받은 동티모르 민중들은 구스마오 사령관의 지휘하에서 총력을 기우려 인도네시아의 침략을 대항하여 싸웠다. 미국이 뒤에서 지원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침략군을 물리치기에는 작은 돌로 바위치기 격이었다.

그래도 총력을 기우려 외교전선과 정치군사전선의 대오를 갖춰 악마적 인도네시아를 대항하여 싸웠다. 동티모르의 구스마오 사령관은 포로가 되여 투옥되는 비운에 이르렀다.
동티모르의 구스마오 군사령관이 투옥된 후에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은 마탄루아크 사령관이 중심이 된 국내비밀조직을 구축하고 외세를 대항하여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동티모르 민중들의 반미 반수하르토 항쟁은 지칠 줄 모르고 25년 동안 줄기차게 계속했다.

3. 80만 동티모르를 희생시켜 2억 인도네시아를
지원하는 미국의 위선



인도네시아 군부가 독립한 후 10일 밖에 안 되는 동티모르를 전격적으로 침공한 원인과 그 이유는 무엇인가? 침공 뒤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인가?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 식민통치에서 해방되어 1945에 독립했으며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이 1967년 까지 22년 동안 집권하면서 사회주의 국가건설에 큰 공헌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정권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여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이웃 나라들에게 사회주의를 이전시킴으로 미국의 유익에 큰 위협이 된다고 염려를 하고 있었다.

수카르노 정권에 대하여 불안한 눈으로 지켜 보고 있던 미국은 군인 출신인 수하르토를 등용하여 1967년에 군사쿠테타를 일으켰다. 미국이 지원하는 쿠테타로 인하여 사회주의 국가건설의 박차를 가하고 있던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은 정권에서 축출 당하게 되었다.

미국의 후원으로 군사 쿠테타에 성공한 수하르토는 1976년에 인도네시아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1999년까지 30년 동안 무서운 독재로 집권을 하면서50만 명 이상 인도네시아의 반미 반정부 민중들을 학살했다.

뿐만 아니라 수하르토 대통령은 동티모르에 대한 영토확장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1975년에 겨우 새로 독립을 쟁취한 이웃 나라 동티모르를 독립한지 불과10일 후에 인도네시아 군인 3만 명을 동원하여 침공했다.

동티모르를 침공한 후 수하르토 대통령은 인도네시아 군인 35,000명을 동티모르에 영구 주둔시켜 1975-1979년 사이에 최소 200,000명 이상의 동티모르 민중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그 후부터 1999년까지 25년 동안 동티모르를 지배 했다.

미국은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공하는데 대하여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미리 승인 했다는 사실이 숨김 없이 모두 드러났다. 1975년11월에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공하기 전에 미국의 그 당시 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하였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동티모르 침공에 대한 계획을 떠나가는 공항에서 포드 대통령에게 자세히 설명을 했다고 키신저 국무장관은 그 때 일을 회고하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하지만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정반대의 증언을 하고 있는데, 사실은 수하르토 대통령에게 동티모르 침공에 대한 청신호를 주기 위하여 두 사람은 친히 인도네시아에 가서 수하르토 대통령을 직접 방문했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 중앙정보국은 인도네시아 군부에게 지시하여 동티모르 침공을 시작하기 사전에 여자들과 아이들을 학교로 미리 피신시키도록 지시 했다. 왜냐하면 만일 침공으로 인하여 여자와 아이들의 사망과 부상이 많이 발생할 경우 유엔(UN)이 관심을 일으켜서 인권문제를 거론하게 되면 세계적 여론이 나빠질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미국 중앙정보국은 이런 사태발생을 미리 방지하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은 인도네시아의 반정부 민중들을 대량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티모르를 침공하면서 동티모르의 무죄한 민중들을 대량 살해 했다. 수하르토 대통령이 이렇게 할 수 있도록 대량의 무기와 막대한 군사원조를 무진장 제공해 주고 있는 미국의 목적과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2억의 인도네시아를 반공의 보루로 삼고, 동남아시에서 확장되고 있는 소련과 중공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함이며 또한 인도네시아를 미국 편에 묶어 놓기 위한 수단과 방법, 그리고 그 명분과 목적 때문으로 분석되었다.

인도네시아 군부가 지난 25년 동안 동티모르를 침공하고 지배하면서 사용한 무기의 90%는 미국으로부터 수입해 왔다. 미국은 무기수입에 필요한 돈 4,530만 달러를 오래 전에 빌려줬다. 1977년의 발표에 의하면 지미 카터 대통령은 1억1200만 달러의 무기판매를 승인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동티모르 내부에서 동티모르의 독립을 반대하는 친미적이며 친 인도네시아적인 동티모르 민병대를 육성하여 이들에게 무기를 제공해 주면서 군사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미국군과 인도네시아군이 합동군사훈련을 하는데 대하여 미국의회가 문제제기를 하지만 펜타곤은 반공훈련 이라고 주장 하면서 훈련을 계속 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36년 친미독재를 하고 있는 수하르토 대통령에 대하여 말하기를 <우리가 시키는 대로 잘하는 사람이다>라고 표현 했다.

영국도 인도네시아에게 전투기와 기관총등을 수출했다. 영국수상 토니 블레어는 말로는 도덕적 외교를 편다라고 주장을 하면서도 인도네시아 군부가 비도덕적 침략과 인간학살에 사용하는 무기를 판매 했었다.

사실은 미국과 영국뿐 만 아나라 네덜란드,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도 수는 비록 적지만 인도네시아에게 무기를 계속하여 수출했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독재 정권의 잔악성과 그리고 동티모르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병대의 반민족적 학살행위에 대하여 전 세게는 놀라움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수하르토 독재정권과 잔악한 민병대들이 사용하고 있는 그 많은 무기들은 바로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방의 자유주의 나라들로부터 조달되고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역사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4. 피에 젖은 동티모르의 독립



동티모르의 독립을 위한 민중운동의 불이 불붙기 시작한 것은 1991년 11월12일 이였다. 인도네시아 군에 의하여 살해된 한 청년의 장례식에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인도네시아 점령군은 이렇게 모인 선량한 군중들을 향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271명이 사망하고 278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이 혼란 속에서 270명이 실종되었다.이와 같은 비참한 사실이 서방의 어떤 한 방송국 기자에 의하여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과거 26년 동안 인도네시아 군부를 무조건 지원해 오던 미국은 이와 같은 지원정책을 곧 시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93년 3월에 유엔인권위원회는 인도네시아 군부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는데 미국은 이 결의안에 할 수 없이 찬성표를 던졌다.

1976년에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을 군사 쿠테타로 몰아내고 친미독재정권을 31년 동안 이나 지속하고 있던 수하르토 대통령은 1998년 5월 21일에 사회불안에 책임을 지고 독재정권의 종지부를 찍고 권좌에서 쫓겨 나게 되었다.

그러면 수하르토 대통령이 31년 독재에서 물러 나야 할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수하르토가 대통령이 되었고 또한 미국은 자국의 이익 때문에 31년 동안 무서운 독재를 보고도 일제 함구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 시효가 지났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진단된다.

1974년에 포르투갈을 물리치고 동티모르의 혁명세력이 독립을 쟁취했다. 동티모르에서 사회주의적 혁명세력이 정권을 잡음으로 그 지역 많은 섬 나라들에게 사회주의 영향이 점점 번창해 질것을 미국과 호주는 크게 염려 했다.

미국은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이 영토에 대한 야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의 야욕을 자극 시켜서 그로 하여금 독립한지 10일 밖에 안되는 동티모르를 침공하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호주는 자신들이 그렇게 했던 과거는 잊어 버리고 모르는 체 하면서 인도네시아 군부의 폭악 행위를 문제삼고 핑계 삼아서 인권문제 라는 명분으로 수하르토 대통령을 <평>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유엔을 앞세워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동티모를 독림국으로 만들었다. 인도네시아는 미국이 마음대로 하는 일에 대하여 아무 말 못하고 국민투표 바로 다음날 25년 동안 주둔하고 있던 주둔군을 동티모르에서 철군 시켰다.

수하르토 대통령의 하야 후에 하비비 대통령이 인도네시아의 제 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하비비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동티모르의 인권문제에 대한 유엔의 압력에 굴복하여 동티모르의 독립주장을 더 이상 방해할 수 없음을 느꼈다.

이와 같은 국제정세 흐름의 큰 변화 속에서 동티모르의 독립운동은 급 물살을 타게 되었다. 하비비 대통령은 동티모르의 <독립>과 <자치권> 둘 중에서 어느 편을 선택할 것인가를 국민 투표로 결정하도록 하고 유엔의 감시하에서 동티모르 전 국민이 1999년 8월30일에 투표를 하도록 공포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비비 대통령과 인도네시아 군부와 그리고 통티모르의 독립을 절대 반대하는 민병대등은 유엔의 감시하에서 실시되는 국민투표에서 <독립>이 아니라 <자치권>이 통과 되기를 내심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독립>을 절대로 반대하는 민병대는 전국적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독립>을 반대하고 <자치권>에 찬성 투표를 하도록 위협했다.독립을 반대하는 민병대는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지방조직 16개를 조직하였다. 이 16개 지방조직들은 막대한 돈으로 유혹하고 총칼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서<자치권>에 투표하도록 운동을 전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9년 8월 30일에 실시한 국민투표는<독립>으로 나타났다. 국민투표는 <독립>으로 97%의 승리를 했다. 하지만 국민투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약 2000명이 사망했고 또 25만 명이 공포심으로 고향을 떠나 는 난민이 발생했다.

국민투표에 실패한 민병대는 실패의 보복으로 약탈과 방화로 동티모르 전국을 쑥대밭이 되도록 난동을 부렸으며 이로 인한 후유증은 오랜 세월동안 계속되고 있다.

2002년 4월 14일에 대통령 선거에서 83%의 둑표로 구스마오가 당선되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동티모르는 신생 독립국으로서 191번째 유엔(UN) 회원국으로 2002년 9월에 가입했다.

독립 쟁취후 동티모르는 수 없이 많은 난제들을 품고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은 위선적 양면성을 여실히 드러내면서 동티모르 민중이 독립을 성취한 데 대하여 <국민과 지도자의 강력한 독립 정신과 건국 의지의 승리이다>라고 높이 평가 했다.

이 글을 끝 맺으며,


2002년에 독립을 쟁취한 동티모르의 교훈은 무엇인가?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선과 악의 구별이 전혀 없다는 교훈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직 쌍방이 함께 상생할 수 있는 공정한 게임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하리라고 생각 된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독재자의 나라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공한 그 원인과 이유는 무었이었는가?

그것은 동티모르 동쪽 해안과 호주대륙 사이에 매장 되어 있는 거대한 유전을 노린 것으로 분석된다. 동티모르 해협 남쪽에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408억 배럴의 석유와 천연가스는 인도네시아와 호주 그리고 미국과 일본 등 강대국들의 지대한 관심을 모아왔다.

이 지역에는 3개의 유전< C-L유전, B-U유전, G-S유 > 들이 있는데 거리상으로 3개 유전들의 68%가 호주보다는 동티모르 편에 더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

동티모르가 독립 후에 벌어들인 수익 (2000-2004)은 총 3억 5,900만 달러에 이른다. 이에 비해 호주는 C-L유전에서 약 10조 달러의 수익을 획득하고 있다. 엄청난 이득의 차이와 불공정한 비율이다.

앞으로 유전의 관련국들 사이에서 맺은 해양경제협정이 국제사회의 주요한 변수로 작용하여 상생게임으로 정착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동티모르가 걸어 온 역사를 고찰하면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라들 가운데 제국주의 나라들이나 또는 강대국들에 의해 피해를 받지 않은 나라들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느꼈다. 그리고 작은 나라들이 힘센 나라들로부터 상처를 받아 왔고, 암울한 역사를 경험해 온 그 역사적 사실들을 발견하면서 우리 민족의 분단 현실도 강대국에 의해 조작되어 왔고 지금도 그 비극의 역사는 미 제국주의에 의해 반복되고 있다. <티모르>의 역사, 그리고 <동티모르>의 현주소를 보며 우리 민족의 실체를 보는 것 같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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