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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유하상 박사 2년반 동안 매주 뉴욕서 1인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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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9-11-30 20:43 조회3,1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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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최기봉 민족통신 통신원]불의를 없애는 것은 반드시 투쟁으로서만 가능하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82세의 고령인 유하상 박사는 2년 반이 넘도록 뉴욕의 한국총영사관 앞에서
외롭게 1인 시위를 벌이면서 한국의 공안당국의 횡포, 법원의 관제판결 등을 규탄하면서 가슴과 등뒤에
피케트를 부착하고 매주 오후1시부터 한 시간씩 지난 역사의 잘못을 바로잡아 달라고 촉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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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유하상 박사 2년반 동안


매주 뉴욕총영사관 앞서 1인시위



[뉴욕=최기봉 민족통신 통신원]불의를 없애는 것은 반드시 투쟁으로서만 가능하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82세의 고령인 유하상 박사는 2년 반이 넘도록 뉴욕의 한국총영사관 앞에서 외롭게 1인 시위를 벌이면서 한국의 공안당국의 횡포, 법원의 관제판결 등을 규탄하면서 가슴과 등뒤에 피케트를 부착하고 매주 오후1시부터 한 시간씩 지난 역사의 잘못을 바로잡아 달라고 촉구해 왔다.

<##IMAGE##>1인 시위를 하는 유하상 박사의 가슴에는 영어, 등에는 우리 말로 구호를 쓰고 한국정부와 사법당국을 향해 외쳤다. 그는 <고문---범죄 특무대>라고 쓴 것은 1952년 특무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폭행---기소 검찰관>은 군인수사대에서 검찰로 넘겨져 또 다시 폭행을 당해 고막이 터졌다고 말한다. <법원---무전유죄>라고 쓴 것은 돈이 있었으면 무죄인 것이었는데 돈이 없어 죄 없는 사람이 공작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것이다. <대법원---재심하라!>라고 쓴 것은 이러한 요구를 2년 반전에 대법원에 재심을 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묵묵부답이기에 계속 투쟁하고 있다고 말한다.

유하상 박사가 20대 중반이 되었던 그 시기에 숱한 고생과 고초를 받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의 집안에서 그 당시 남로당 간부의 주택을 산 것 때문에 사상범으로 찍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그 집 주인이 남로당 간부인지 누구인지 모르고 산 집인데 그것을 샀다는 단순한 이유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해 왔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과거의 인혁당 사건 같은 것도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에 조작한 사건으로 드러나 지금은 그에 관련된 희생자 가족들이 진실이 규명되어 올바른 역사 앞에 서게 되었다. 이 밖에도 과거사에 잘못된 역사들이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 많이 바로 잡혀진 것은 늦었지만 다행스럽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고초를 받던 시기에 육군 2등병으로 입대하여 야포대에서 근무했고, 그 후 공군하사관으로 옮겨 군복무를 마쳤다고 설명하면서 “나는 결국 분단의 희생자이며 동시에 이승만 독재정권으로부터 탄압받은 희생자”라고 설명해 준다.

유하상 박사, 그는 누구인가.

<##IMAGE##>1928년 7월8일 전남 곡성에서 사서3경을 공부하고 지낸 한학자 집안에서 출생했다. 3남2녀 중 막내로 혼자 순천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갔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그 후에 국민대학교에서 학사, 성균관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그리고 1970년에 건국대학교에서 <자원적인 국경문제>에 대한 논문을 통해 법학박사(실은 정치학 박사이지만 이 학교에는 법학과만 있었음) 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이 학위가 1호라고 그는 강조한다.


1971년 12월에 부인과 한살, 두살 된 두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 온 유하상 박사는 뉴욕 시에 정착하면서 뉴욕시티대학에서 사회정치학을 전공하면서 다시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했다. 낮에는 엘로캡 택시운전수를 하면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10년만인 1982년에 <세계정부---유엔시티>라는 논문을 통해 사회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 후에 잠시 뉴욕에서 조교수일을 보다가 6개월 만에 퇴직하고 조그만 한 미국회사에서 건강문제를 상담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을 갖게 되어 장기간 근무했다.

유하상 박사는 바쁜 미국생활을 하면서도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조국의 통일운동에도 꾸준히 참여해 왔다. 미국에서 최초의 박정희 반 군사독재 시위가 일어난 해가 1973년인데 그 시위에 선우학원 박사 등이 주동이 되어 계획된 거리시위에도 참여했다고 회고한다. 그는 70년대, 80년대에 뉴욕의 정일웅 선생, 고 강광석 박사, 지창보 박사 등과 함께 활동했고, 워싱턴 디씨의 로광욱 박사 등과 함께 활약해 왔다. 최근에는 유태영 박사와 송기뢰 박사와 친분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지금도 뉴욕시티대학에 등록하여 5년째 생물학 대학원에 재학 중에 있으면서 곧 생물학 박사학위를 취득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 논문과 관련하여 <인류를 위한 지구역사>에 대한 영문 도서를 출판할 계획 중에 있다.(끝)

*그의 연락처는 (718)445-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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