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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파나마 사기극>은 미국 대외정책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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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9-11-28 20:02 조회4,97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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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이번 기획연재로서 남미의 파나마 사태에 관한 역사를 고찰하면서
이 나라의 경우도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성을 적나라하게 나타내 준 사례라고 설명하면서 "그 동안 민족통신을
통하여 기획연재로서 파나마, 에콰도르 등 남미의 많은 나라들과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의 여러나라들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들의 문제가 결코 딴 나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조국반도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들과
유사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미국의 대외정책은 남미 뿐 만 아니라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등
지구촌 각 지역에서 제국주의적 간섭정책과 침략정책을 공통적으로 자행하여 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민족통신 편집실)



[기획]<파나마 사기극>은 미국 대외정책의 본질


노리에가를 납치한 행위와 그 행태에 나타난 교훈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IMAGE##> 나는 이번 민족통신 기획연재 중 하나로 남미의 파나마 사태에 관한 역사를 고찰하면서 이 나라의 경우도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성을 적나라하게 나타내 준 사례라고 생각했다. 그 동안 민족통신을 통하여 기획연재로서 남미,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의 여러나라들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들의 문제가 결코 딴 나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조국반도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들과 유사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미국의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은 지구촌 여러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자행하여 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고 있어 독자여러분과 함께 남미의 나라 파나마 역사를 살펴 보고자 한다.

파나마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기록(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 바바라 트렌트의 작품인 <파나마 사기극>이다. 이 <파나마 사기극> 다큐멘타리 영화는 아카데미상과 전 미국 교육 영상제의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1989년 당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파나마 운하의 보호와 파나마에 거주하고 있는 미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리고 범죄자인 파나마의 노리에가 대통령을 체포하기 위한 명목상 이유로 단 하루 만에 2만 6천명의 미군이 파나마를 침공했다. 사실은 그 당시 이미 파나마에는14000명의 미국의 침략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파나마 운하는 1903년에 체결된 헤이-뷔노-바리아 조약에 의하여 운하 건설 초창기부터 1980년까지 76년동안 완전히 미국의 소유와 관리하에 놓여져 있었다. 하지만 1977년에 파나마의 오마르 토리호스 대통령은 파나마 운하의 소유권과 운영권을 돌려 받기 위하여 지미 카터 대통령과 <파나마 반환 협정> 을 체결 했다.

이 <반환 협정>에 의하면 미국과 파나마 두 나라 정부는 1977년 부터 2000 년까지 파나마 운하를 공동관리를 하다가 2000년 이후 부터는 완전히 파나마 정부의 소유로 환원하기로 두 나라 정상은 합의를 했다.

이러한 <반환 협정>의 입장에서 볼 때 미국의 이해타산은 무엇인가?
파나마 운하 의 운영권을 완전히 반환하는 결과는 다름아닌 파나마에서 미군기지의 완전한 폐쇄를 뜻하는 것이다.

파나마에서 미군기지를 완전히 폐쇄하는 것은 곧 라틴아메리카에서 계속하여 발생하고 있는 반미적 진보운동을 억압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의 교두보를 상실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중남미에서 미국이 마음 놓고 미군을 주둔시킬 수 있는 나라는 오직 파나마 뿐이다.
이러한 파나마 운하의 <반환 협정>은 미국에게 치명적 손실을 가져 온다고 판단 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드디어 파나마침공 <파나마 사기극> 을 연출하게 된다.

파나마 침공으로 인하여 선량한 양민들2천여 명이 학살 당하며 생매장도 서슴지 않는 미군의 만행에 대하여 파나마 시민들이 아무리 거세게 저항을 해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미국의 파나마 정책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수행하는 미국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파나마 사기극>은 바로 그런 미국의 침략주의적인 제국주의의 성격을 말해 준다.

미국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지배할 때에는 언제나 미국의 이익에 맞추어진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면서 그 나라 국민의 귀와 눈을 한 쪽으로 돌리도록 하고 미국의 침략 행위을 정당화 시켜 왔다. 이로 인하여 오늘의 미국은 <민주주의 나라가 아닌 제국주의 국가>가 되고 있다.

<파나마 사기극>은 이러한 감추어진 미국의 군사적 비밀을 폭로하고 아울러 미국의 씨엔엔(CNN) 등 언론들이 파나마 침공을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로 보도를 하면서 미국정부의 앵무새 역할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디어들이 파나마 국민을 어떻게 기만을 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그 행태를 보여주었다.

1.파나마 운하에 얽힌 파란곡절



파나마의 위치는 중미와 남미를 연결하는 탯줄과 같은 지협인 동시에 북미와 남미 두 대륙 간의 다리와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는 중요한 요새지 이다.

파나마 국토의 길이는 남북 2850km이지만 넓이는 좁은 지협이다. 넓이가 가장 좁은 곳은 50km 뿐인 곳도 있다. 파나마 운하는 이 가장 좁은 지점을 이용하여 운하를 건설한 세계적 걸작품이다.
1501년에 스페인 탐험가들이 처음 파나마에 도착했을 때 파나마에는 토착인 인디언 75만이 쿠에바 문화와 코클레 문화를 형성하여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1514년부터 스페인의 식민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약탈과 살인 질병 등으로 인하여 오늘의 인디언의 수는 전체 인구에 겨우 2%에 불과한 약4만 명 가량이 특별 보호지역에 갇혀서 살고 있다고 한다.

파나마는 침략자들이 남미 대륙에서 약탈한 어마어마한 양의 잉카 황금을 유럽 으로 운반하는데 편리하고 안전한 통로로 활용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북미 칼리포니아 골드러시로 몰려든 유럽의 많은 탐광자들이 파나마를 경유하는 편리한 통로로 활용 되기도 했다. 즉 파나마는 스페인 침략 초창기부터 유럽으로 물건을 옮기는 수송의 중심지로 발전되었다.

1800년대에 들어서서 파나마는 서구 열강들의 3파전으로 혼돈이 계속되고 있었다. 스페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은 저마다 유리한 조건을 내세우면서 파나마를 독차지하려고 격투를 버리고 있었다.

파나마는 40개의 행정부로 난립되었고, 50번의 폭동이 발생하고, 5번의 분리 시도와 그리고 13번의 미국의 간섭 등이 계속되는 사태들 때문에 어느 누 구의 땅 이며 또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조차 분간할 수 없는 혼돈에 빠져 있었다.

1880년에 프랑스는 파나마 지협을 가로 지르는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는 이권을 제일 먼저 획득하여 공사를 착공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막대한 자본만 허비하고 21,900명의 노동자들의 생명을 희생시키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 그 당시 프랑스 나폴레옹의 승리로 인하여 세계적으로 스페인의 영향력이 쇠퇴 해지고 있었는데 동시에 남아메리카에서는 혁명적 영웅으로 칭송받던 볼리바르 장군의 독립 운동이 남미 전역에 파도처럼 물결치고 있었다.

또한 1820년에 콜롬비아가 대연방제로 독립을 쟁취했다. 이 대연방제 독립국에는 베네주엘라, 에콰도르 그리고 파나마 등 4나라가 연합하여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물리치고 대연방제로 독립을 쟁취했던 것이다. 하지만 10년 후 1830년에 대연방제 독립국은 해체되고 말았다.

베네주엘라와 에콰도르 두 나라는 분리되어 떨어져서 제각기 독립국이 되었다. 하지만 오직 파나마는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콜롬비아 공화국>의 한 주가 되고 말았다.

이때 미국은 파나마주에 철도를 건설하기 위하여 콜롬비아 정부로 부터 건설허가 를 획득했으며 또 건설해 놓은 철도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명분으로 파나마주에 미군이 주둔할 수 있도록 콜롬비아 정부로 부터 허락을 받았다.

미국은 이와 같이 파나마 주에 눈독을 들이고 있으면서 파나마 운하의 건설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뉴욕에서 샌프란스코까지 항해 하려면 남아메리카를 빙빙 돌아서 장장 2만 5천 km 를 항해해야 했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면 불과 9,500 km면 충분하다. 뿐만 아니라 운하를 건설하면 운하의 통과세로 큰 수입을 얻을 수 있다.

미국은 파나마 운하의 건설을 위한 <건설권>을 실패한 프랑스와 협상 끝에 값을 후하게 지불하고 쉽게 사들였다. 그러나 미국은 콜롬비아의 반대로 파나마 운하 건설에 큰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다.

300년 동안 스페인 식민통치를 받아 온 콜롬비아는 독립 후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기득권 보수주의 진영과 이를 반대하는 진보주의적 개혁을 주장하는 민중세력 진영이 서로 정면으로 대립하여 싸우고 있었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무고한 민중 10만 명이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미국은 이와 같은 콜롬비아의 분쟁을 역이용하여 분쟁에 직접 개입하면서 파나마 운하 건설을 위하여 공작을 꾸미고 있었다. 미국의 공작과 강요에 쉽게 굴복하여 콜롬비아 정부는 파나마 운하 건설 권을 무조건 미국에게 승인해 주었다.

그 때 콜롬비아 의회는 무능한 정부가 미국에게 허락한 건설 권 승인을 전면 거부했다. 이로 인하여 미국과 콜롬비아 두 나라 관계는 서로 불편한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미국은 해결책을 고안해 냈다. 콜롬비아의 개혁 진보세력과 파나마 분리주의자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여 파나마의 보수세력과 서로 싸우도록 공작했다.

파나마를 콜롬비아로 부터 독립하여 떨어져 나오도록 분리공작을 했던 것이다. 미국은 파나마 분리주의자들에게 막대한 돈으로 원조를 제공하면서 분리공작을 계속했다.

미국의 공작은 완전히 성공하여 1903년에 파나마는 독립국이 되었다. 콜롬비아는 할 수 없이 1914년에 파나마의 분리독립을 공식으로 선포하고 말았다.

파나마는 스페인의 침략을 받은 지 402년 만에 비로서 처음으로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독립은 명분 뿐이고 미국이 마음 놓고 파나마 운하를 건설할 수 있도록 재 침략을 당하는 속임수와 허위적으로 분리된 독립국이 된 것 뿐이었다.

미국은 프랑스가 실패한 파나마 운하 건설을 1900년에 재시도하여 1914년에 77km의 운하가 뚫림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미국이 성공적으로 운하를 건설하기는 했지만 운하를 건설하면서 모두 27,500명이 흙더미에 묻혀 사망한사실에 대해서는 파나마 역사가 침묵을 지키고 있다. 또 파나마 운하의 운영권에 대한 분쟁으로 인하여 파나마는 오늘까지 큰 불행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2.그림의 떡 파나마 운하



미국은 파나마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개혁진영과 진보주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 하여 파나마의 독립을 성사시켰다. 미국이 파나마를 독립시킨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 이유와 목적은 오직 파나마 운하 건설에 있었다.그래야 미국이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계산하고 독립 쪽으로 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그 결과 파나마의 독립이 성취한 후 1903년 11월18일에 미국은 전격적으로<헤이-뷔노-바리아 조약>을 체결하는 공작에 성공한다. 이 조약은 무엇을 위한 조약 이었나? 이 조약은 앞으로 건설이 완공될 파나마 운하는 파나마 독립국의 소유가 아니라 영구적으로 <미국의 소유이다> 라는 것을 밝혀주는 조약이었다.

미국은 1903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14년에 파나마 운하를 개통했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의 주인은 파나마 독립국이 아니라 미국의 소유임으로 파나마 운하는 파나마인들에게는 <그림의 떡> 일뿐 이다. 파나마 운하를 세계 여러 나라의 선박 들이 하루 평균 33척이 횡단을 하고 있는데 그 막대한 통과세는 전적으로 미국의 수입으로 만 되어 왔다.

이러한 치욕적인 역사 때문에 파나마 국민들은 파나마 운하가 자랑스러운 건축물이 아니라 수치스러운 역사를 부각시켜 주는 하나의 부끄러운 현장이 되어 왔다.파나마 운하가 차지하고 있는 양쪽의 막대한 운하지대를 미국의 <운하행정부>가 관리하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이 파나마 땅의 2%에 해당되는 넓은 땅을 파나마가 운영관리하지 못하고 미국이 마음대로 점령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때문에 파나마는 국가적으로 영토뿐만 아니라 나라의 자존심을 완전히 미국에게 내준 채 말로만 우방국이라는 명칭에 만족해야 했다. 미국은 파나마에게 일시불로 1,000달러를 지불하고 9년 후 부터는 연간25만 달러를 구제와 보조의 명분으로 지급하도록 조약을 맺었다.

1903년에 독립과 동시에 망국적 <헤이-뷔노-바리아 조약>을 맺은 파나마는 그 후부터 84년간 파나마 운하의 운영권을 완전히 미국의 수중에 넘겨주고 있었다.

파나마는 망국적 조약을 맺고 미국에 종속된 국가가 되었다. 독립 후부터 간헐적으로 불공정한 조약에 대한 분쟁과 항의고소가 발생되어 왔다. 하지만 미국은 그 때마다 군부를 내세워 쿠테타로 정권을 교체하게 하여 친미적 대통령이 정권을 장악하도록 했다.

3.오마르 토리오스 정권 등장과 지미 카터 대통령



스페인 식민지와 콜롬비아 지배에서 독립을 획득 했지만 또 다시 미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파나마의 비운에 대하여 민중들이 자주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이미 20세기 초엽부터 이었다.

1963년에 파나마 운하 지역 내에서 23명의 학생들이 미국 성조기를 제거하고 파나마 국기를 게양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그 학생들은 미군과 충돌하여 곧 총탄에 쓸어졌다.

그 당시 쿠바 혁명의 영향에 의하여 파나마에서도 자기 나라 자주성에 대한 각성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그 연장 선상에서 반미감정의 물결이 파나마에서도 파도치고 있었다. 미국의 고압적인 침략적 정책에 대하여 반미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68년에 민중의 반미운동에 힘을 얻고 오마르 토리오스 장군이 쿠테타로 친미정권을 무너뜨리고 자주적 정권을 창출했다. 토리오스 정권은 미국이 파나마 운하를 강점하고 있는데 대하여 문제를 삼아 국제화 하는데 주력했다.

사실 미국은 오마르 토리오스 장군의 쿠테타를 친미적 쿠테타로 전향시키려고 동상이몽을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오마르 토리오스 장군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제3세계의 비동맹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쿠바를 방문 하는 등 정권의 기반을 튼튼히 하여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적 낡은 구도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오마르 토리오스 대통령에 대하여 실망한 미국은 또 다시 군부 일부를 동원하여 새로 등장한 토리오스 정권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오마르 토리오스 대통령은 미국의 음모에 대항하여 압박을 가하기 위하여 파나마 운하 지역 일대 에서 민중을 동원하여 반미시위를 하도록 했다. 파나마 운하지역 일 대에는 미국의 군사교육기관들과 특전사령부 등 중요한 미국의 군사기지들이 집결되어 있음으로 위험한 지역이다.

이러한 위험한 군사 기지에서 민중들을 동원하여 반미시위를 강행 하도록 한 것은 오마르 토리오스 대통령의 강한 의지의 표현으로서 미국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었다.뿐 만 아니라 토리오스 대통령은 그 때 파나마의 정보 책임자였던 노리에가를 막후 협상 대표로 워싱턴에 파송하기까지 했다.

훗날에 비밀이 모두 다 폭로되었지만 노리에가는 워싱턴에 가서 미국 CIA 의 수장인 그 때 아버지 부시에게 매수되여 오히려 오마르 토리오스 대통령과 파나마 국민을 배신하는 역적이 되고 있었다.

그렇지만1977년에 오마르 토리오스 대통령과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역사적인 상봉을 하여 파나마 운하에 대한 획기적인 조약을 맺는데 성공했다.

두 대통령이 1977년에 만나 맺은 조약은 어떤 조약 이였나? 그것은 96년 전인 1903년에 체결한 <헤이-뷔노-바리아> 조약을 완전히 무효화 한다는 조약이다.

그리고 1999년 12월31일 까지 파나마 운하를 두 나라가 공동으로 운영을 하며2000년 1월 1일 부터는 파나마 운하를 완전히 파나마 국가의 소유로 환원한다는 약속이였다.

토리오스 대통령과 지미 카터 대통령이 맺은 조약을 그 누가 믿겠는가?

왜냐하면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의 등장과 때 맞추어 1981년에 오마르 토리오스 대통령은 어느 날 갑작스로운 비행기 사고로 <의문의 사망>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마르 토리오스 대통령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한 후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에 매수되여 오마르 토리오스 대통령을 정면으로 배신한 노리에가를 미국은 재빨리 파나마의 대통령으로 세웠다. 오마르 토리오스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의문사와 노리에가의 재빠른 대통령 취임은 분명히 불가분리의 직접적 연결이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미국을 보면서 그 누가 미국과 파나마 사이에 맺은 조약을 그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미국은 강대국 이라는 고자세로 대통령이 바뀌고 정권이 교체되면 그 어떠한 귀중한 선언과 조약 이라도 이해관계에 따라서 휴지처럼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자세 때문에 미국의 대외정책이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잃어왔다.

4. 미국의 야만적 파나마 침공



미국과 소련 중심의 냉전 시대가 지나고 탈냉전 시대가 왔다고 해서 평화시대가 도래하였다고 믿는 것은 실제로 큰 오산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침략의 속성을 절대로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미국은 여전히 반공주의를 내세워 미제침략을 위한 구실을 찾아 내는데 새로운 방법들을 여전히 고안해 내면서 침략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이에 따라 미국은 <국제 테로리즘, 마약거래, 위조화폐, 비민주주의국가, 비인권국가, 이슬람 근본주의폭력, 핵확산 및 전파> 등의 여러가지 구실들을 계속하여 조작해 내고 있다.
미국은 이러한 치밀한 구실에 따라 파나마에서 악마의 우두 머리를 제거 한다는 구실로 <파나마 침공>을 단행했다.

월스트리트지의 폭로에 따르면 파나마의 노리에가는 1976-1977년에 매년 11만달러를 아버지 부시가 중앙정보국(CIA) 국장으로 있을 때 공작금 명목으로 받은 것을 비롯하여 총1천1백만 달러를 받아 중남미에서 맹 활동을 한 후에 파나마의 최고의 실권자의 자리까지 올라 앉았다고 했다.
노리에가는 미국의 중남미 침략정책과 무력침공에 있어서 관여하지 않은 곳이 없으며 오랜 세월 동안 미국 정보국의 앞잡이로서 역할을 해오던 끝에 드디어 파나마 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노리에가가 대통령이 된 후에 파나마의 행정부가 사사건건 미국의 골치거리로등장하게 되였다. 노리에가 대통령은 집권10년에 국내외적으로 선동적 괴물로 변했다.정적을 무참히 살해하고 민주주의를 짓밟았으며 마약 밀매로 돈세탁을 하면서 미국의 제재를 정면 거부 했다.

노리에가는 그러면서 그의 악명이 높아갔다. 지난 1989년에 대통령 선거에서 법벅으로 당선 된 후보자가 폭력을 당하는 모습이 테레비죤을 통하여 전국에 방영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는 또 당선자의 투표결과를 무효라고 선언하고 독재자의 면모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자기를 방해하는 미국과도 정면으로 맞서는 자세를 보였다. 이것은 물론 미국의 골칫거리가 되고 말았다.

노리에가의 오만한 자세는 극도에 달했다. 그에 대한 반발은 날이 갈수로 심화되었다.한편 미국 언론들은 노리에가 대통령이 콜롬비아를 비롯하여 중남미를 토대로 한 국제적 마약밀매에 장기적으로 깊숙이 개입해 온 사실들을 부각시키며 그에 대한 악 선전에 열을 올렸다.

미국 언론들은 또 노리에가 대통령이 콜롬비아의 마약조직을 이끌고 미국인들을 살해한다는 소문도 보도했다. 결국 미국은 노리에가를 감싸고 보호 할 명분을 완전히 상실하고 더 이상 미국을 위하여 사용할 가치가 없어진 것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미국은 1989년 12월20일에 파나마의 민주헌정을 회복한다는 명목과 국제적인 마약 밀수 범을 체포하여 미국법정에 세운다는 사실상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내 세워 2만6,000명의 미군을 파나마에 파견하여 침략을 자행했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이 파나마를 침공한 진짜 이유는 파나마에 반미정권이 들어설 것을 염려하여 사전에 이것을 차단하고 가장된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함 이었다.

미국은 노리에가 대통령을 반대하는 파나마 민중들에게 심리적으로 가장된 전략 으로 <독재자를 물리치는데 미국은 적극적으로 앞장선다> 라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일종의 시위적 무력행사 이었다.

그 결과 미국의 파나마 침공은 5일간에 끝났지만 그 동안에 민간인 2000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집을 잃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미국의 언론 보도의 유일한 관심사는 인명 피해나 법적인 정당성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니라 침공에서 사용한 스텔스 폭격기 F-117의 성능의 우수성에 관한 보도뿐 이였다고 비판 받아 왔다. 이 F-117은 걸프전 당시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공격에 95%를 담당하는 위력을 뽐내기도 했다.


노리에가는 미군의 체포를 피해 6일간 바티칸 대사관에 피신했으며 미군은 대사관을 포위하여 지독하게 꽝꽝 울리는 록음악을 틀어 대사관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지치게 한 후에 노리에가를 체포하여 미국으로 송치했다.

노리에가는 45년의 형을 받고 감옥살이를 시작했으나 그 후에 15년으로 감형 되여 출옥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노리에가는 전에 프랑스 은행을 통하여 마약 자금 300만 달러를 돈세탁 한 것이 밝혀짐으로 미국에서 출옥을 한다 해도 프랑스로 인도되어 또 프랑스에서 10년의 감옥 살이를 해야 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

노리에가는 용서를 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저질은 죄인 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저질은 죄의 전부는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에 공용된 조건하에서 저지른 행동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미국과 연결된 죄질의 삶을 살아 온 것을 감안한다면 그의 문제는 곧 미국 정보국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보국의 문제는 그 어떤 처벌을 받지 않았다.

노리에가 이후에 파나마는 어디로 가고 있나?

두말할 필요도 없이 미국 마음대로 극우파 친미적 대통령들이 줄줄이 등장하여 2004년까지 정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파나마의 상황은 변화의 기색이 보임으로 그저 절망적 이라고만 말 할 수 없다.2004년 대통령 선거에서 중도좌파 민주혁명당의 마르틴 토리호스가 당선되여 사회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파나마 운하를 미국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운영하며 운하의 대대적 확장을 위하여 제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혁명당은 2009년 5월 3일에 실시한 선거에서 실패했다. 아마도 마르틴 토리호스 대통령의 과도한 사회개혁을 주장함으로 인하여 악영향이 다소 작용한 모양으로 진단된다.

2009년 5월3일 대통령으로 당선된 리카르도 마르티넬리 대통령은 중도 우파성향의 대통령이다. 그는 파나마의 최대 수퍼마켓 체인의 소유자로 8000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제공하는 사회적 자선사업가이기도 하다.

브라질은 파나마의 인프라 사업을 위하여10억 달러의 금융지원을 신임 대통령정권에 제공하겠다고 발표했으며 또 온두라스의 셀라야 대통령은 귀국을 늦춘가운데 7월1일에 시행하는 파나마 신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할 것을 발표했다.

그 외에 많은 징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파나마에 새로 등장한 마르티넬리 대통령은 옛날의 파나마가 아니라 이제는 미국의 지배와 영향에서 부터 벗어나 독자적 행보를 걸어 갈 것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제부터 파나마는 중남미의 자주적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당당한 국위를 회복할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5.이 글을 끝 맺으며,


부패하지 않거나 미국에 저항하는 나라는 미국의 골치 덩어리가 된다. 미국의 석유회사를들을 내쫓겠다고 주장한 에콰도르의 하이메롤도스 대통령은 헬리콥터 폭발사고로 죽었다. 파나마 운하의 운영권을 미국에서 되찾으려고 목소리를 높혔던 오마르 토리오스 대통령도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결국 이들의 죽음에는 미국의 중앙정보국이 개입되어 있다는 의혹들이 공공연하게 일고 있다. 미국은 중앙정보부의 음모와 개입 마져도 실패를 하면 그 때는 미군이 직접 쳐들어 갔던 것이 미 제국주의 본성을 나타낸 과거의 대외정책이었다.

미국은 산유국에 돈을 빌려주고 100달러어치 석유를 캐면 시설비와 기술비 등 명목으로 75 달러를 미국이 가져가고 25 달러를 산유국에 준다. 하지만 25 달러 가운데서 15 달러를 미국에게 빌린 돈을 갚는데 지불해야 한다. 실제로 산유국은 단 10 달러로 겨우 살아 간다.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으로 돈을 벌어 들인 미국의 초국자본가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들을 동원하여 피지배국들에 들어가 착취행위를 단행한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미국 정부와 기업들의 행태들은 야비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나는 그런데 위에 기록 한 파나마 역사에 관련된 내용들을 살피면서 이것이 우리 조국반도에서 일어난 미국정부와 미군들의 행위와 유사한 점들을 많이 발견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민족이 미국과 관련해서 어떠한 입장과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뼈저린 교훈들을 파나마 사태를 고찰하면서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 동안 민족통신을 통하여 기획연재로서 파나마, 에콰도르 등 남미의 많은 나라들과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의 여러나라들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들의 문제가 결코 딴 나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조국반도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들과 유사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미국의 대외정책은 남미 뿐 만 아니라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등 지구촌 각 지역에서 제국주의적 간섭정책과 침략정책을 공통적으로 자행하여 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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