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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식민통치가 빚어 낸 눈물의 역사-《스리랑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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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9-10-31 12:54 조회4,75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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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는 제국주의자들이 할퀴고 간 나라들은 대부분 심각한 상처들을
받았다. 그 상처가 아물어 정상적인 나라로서 운영되는 나라들도 있지만 아직도 그것이 아물지 않고 상처에서
고름이 나오고 부스럼이 가라앉지 않아 고생하는 나라들도 적지 않다."고 지적하고 그는 "아시아의
《스리랑카》를 고찰하면서도 이 나라가 포르튜갈, 네덜란드, 영국의 침략을 받아 443년의 식민지 생활의
고초를 당하고 독립된지60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20년 동안의 내분이 지속되고 있어 이 현상을 바라보는
심정은 마치도 우리 조국을 보는 안타까운 심정과도 같았다."고 고백했다.


[기획]식민통치가 빚어 낸 눈물의 역사-《스리랑카》



인도의 눈물 스리랑카


고대 스리랑카의 번영과
식민통치가 빚어낸 눈물의 역사


*글:유태영 박사(민족통신 상임논설위원)


<##IMAGE##> 제국주의자들이 할퀴고 간 나라들은 대부분 심각한 상처들을 받았다. 그 상처가 아물어 정상적인 나라로서 운영되는 나라들도 있지만 아직도 그것이 아물지 않고 상처에서 고름이 나오고 부스럼이 가라앉지 않아 고생하는 나라들도 적지 않다. 나는 민족통신을통하여 남미 나라들,아프리카 나라들을 고찰할 때에도 그리고 아시아 나라 일부를 연구할 때에도 비슷한 감정을 가졌지만 이번에 아시아의 《스리랑카》를 고찰하면서도 이 나라가 포르튜갈, 네덜란드, 영국의 침략을 받아 443년의 식민지 생활의 고초를 당하고 독립된지60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20년 동안의 내분이 지속되고 있어 이 현상을 바라보는 심정은 마치도 우리 조국을 보는 안타까운 심정과도 같았다.《스리랑카》, 이 나라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서 우리 민족이 취할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인도의 남동쪽, 인도양에 위치한 아름다운 섬나라 -《스리랑카》는 국토의 모양이 인도양에 떠있는 보석처럼 빛나고 눈물방울처럼 생겨 <인도의 눈물> 이라고 불리운다. 우리 나라 코리아반도의 1/3 정도 되며, 아일랜드 정도 크기의 아름다운 섬나라 이다.

열대성 기후를 가지고 있는 나라로서 광대한 평지는 연중 이모작으로 쌀을 생산하여 풍족히 먹고 살 수 있으며, 스리랑카의 우거진 삼림에는 세계 유수의 보석, 천연 고무와 코코넛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실론티> 즉 홍차를 무진장 생 산할 수 있는 천연자원의 삼림 이기도 하다.

영국은 스리랑카에서 <실론티>를 처음 발견하고 그 나라 이름을 세일론 (Ceylon)이라 바꾸어 놓았다. 상업상 이유로 피 침략국의 나라이름을 바꾸기 까지 했다. 하지만 스리랑카는 1972년에 독립을 쟁취한 후에 본래의 국명인 스리랑카로 회복 했다.

전설에 의하면 기원전 6세기경 지금부터 2500년 전에 인도지방에서 싱할라족인 위자야 왕자가 스리랑카를 건국 했는데 그는 사자 (Lion)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스리랑카의 국기에 용맹스러운 사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그림이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단군신화가 있는 듯 스리랑카의 건국 시조이며 오늘 스라랑카 인구의 75%를 차지하고 있는 절대 다수인 <싱할라족>의 자랑이기도 한 것이다.

스리랑카라는 국명의 <스리>는 아름답다는 뜻이며, <랑카>는 땅 이라는 말이다. 이것의 합성어로 <아름다운 땅>, 그리고 용맹스러운 민족이라는 뜻이다.

스리랑카의 총 인구는 약 2,000 만 명이며 싱할라족 75%, 타밀족 18% 그리고 기타 유럽 혼혈족과 소수의 말레이족등이 있다. 종교는 절대다수인 상할리족이 믿는 불교를 국교로 하고 있고, 인도를 배경으로 하는 타밀족은 힌두교를 믿고 있다. 그 외에 기독교와 회교도가 7% 가량된다.

1. 불교의 나라 스리랑카의 흥망성쇄


스리랑카의 역사는 기원전 540년경에 아리안족 계통의 싱할라족 700명이 인도에서 스리랑카 섬으로 넘어와 위자야를 왕으로 세우고 싱할라왕국을 건설함으로 서 시작되었다. 싱할라왕국은 약 1,500년 동안 왕조를 존속시키면서 고도로 발달한 불교문명국을 건설했다.

스리랑카는 인도로부터 넘어 온 불교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독자적으로 불교문화를 구축했다. 스리랑카는 <상좌부불교> 즉 보수전통의 소승불교의 종주국이다. 그때 스리랑카 불교는 <대사파>와 <무외산파>로 분류되고 있었는데 <대사파>는 보수전통적인 소승불교 이며 <무외산파> 는 개방적인 대승불교의 승단이였다.

스리랑카의 소승불교는 본래 팔리어로 구전으로만 내려오고 있던 부처님의 교훈 <팔리삼장,Pali Tipitka>을 평민들이 읽기 쉬운 언어로 번역하고 문서로 편찬하는 위대한 공적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스리랑카의 불교는 2,600년 전의 고도로 발달한 건축기술과 의학의 역사를 보유하고 있다. 우리 나라 고구려 시대의 찬란한 유물들과 비슷한 문화적 유산들과 건축구조물들이 오늘의 스리랑카에서 많이 발굴 되여 외국 여행자들이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스리랑카는 남방 소승불교의 종주국으로 그 당시 인도, 태국, 미얀마등 여러 나라 승려 들이 스리랑카로 유학을 하고 있었다. 오늘에 있어서 놀라운 것은 한국불교의 조계종과 동국대학 불교대학은 스리랑카 불교와의 교류를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1979연대 부터는 행사교류와 유학 등이 보다 더 광범위하게 교환되고 있다.

스리랑카 불교와 코리아 불교와의 교류는 191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리랑카의 고승 다르마팔라 (1864-1933) 스님이 코리아 불교의 방대함을 알게 되여 친히 방문을 했는데 그는 코리아 불교에 대한 감명을 크게 받고 자신이 지니고 다니던 사리 1과를 기증했다.

코리아 불교 총 본산인 서울 견지동에 있는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는 1913년에 스리랑카의 명승 달마바라 스님이 코리아를 방문하여 기증한 <부처님사리> 를 모시기 위하여 17년 후인 1930년 에 7층 석탑이 세워졌다. 최근 조계종에서는 그 석탑의 구조가 일본식 구조이며 또 너무 낡았기 때문에 헐어 버리고 스리랑카 스님으로부터 기증 받은 <부처님 사리>를 새로 건립할 석탑에 모실 것이라고 한다.

스리랑카는 불교적 민족주의 국가이다. 스리랑카의 비구들은 종교와 국사(정치)를 동시에 중요시 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정치가 잘못되면 불교도 잘못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부처님의 교훈>을 스승으로 부터 구전으로만 전해왔는데 나라가 어지러워 짐으로 부처님의 교훈>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다. 그리하여 스리랑카의 비구들은 <부처님의 교훈>을 전체 민중들이 읽기 쉬운 글로 번역하고 집대성하여 <팔리 삼장, Pali Tipitaka>을 편집했다.

이것은 불교역사에 있어서 최초로 부처님의 교훈인 <팔리삼장>을 문자로 기록하고 편집하여 후대에게 전한 역사적 공훈이다. 오늘 전 세계의 불교도들은 <팔리 삼장>을 문자로 전승해 준 스리랑카에 대하여 정신적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예수의 교훈이 구전으로만 전해 오다가 몇 백년 후에 비로서 4복음서가 성경책으로 편집을 하게 된 경우와 같은 것이다.

2,500년의 스리랑카의 역사에 있어서 초기에는 크게 두 가지 국면으로 불교의 활난이 있었다.

첫째, 불교의 종단들간의 교리와 당파싸움 이었다. 스리랑카 건국의 초기에는 인도에서 전승된 불교국가로서 <상좌부 불교> 즉 소승불교가 스리랑카의 공 인된 국교로 자리매김을 했다. <상좌부 불교>는 스리랑카에 불교적 민족주의를 확립시키는데 큰 공헌을 세웠다.

하지만 <상좌부 불교>인 소승불교에 대항하여 이른바 <분별선부> 라고 하는 대승 불교가 스리랑카에 전래되었다. <무외산사, Vihara> 라고 하는 대승불교의 절을 처음으로 스리랑카에 건립하기 시작했다.

스리랑카에서 <상좌불교>인 소승불교와 <무외산 불교> 인 대승불교와의 싸움은 기원전 1세기부터 시작되어 천년 동안 계속했다. 하지만 12세기에 이르러서 대승불교를 스리랑카에서 완전히 퇴각 시킴으로서 소승불교의 교단을 완전히 확립시키는데 성공 했다.

이렇게 하여 1,200여 년 동안에 걸친 스리랑카 불교의 <상좌불교>와 <무외상사불교>와의 싸움은 끝났고 정통적인 <상좌불교>로 통합평정 되여 오늘의 스리랑카의 불교로 존속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스리랑카의 역사에 있어서 두번 째 활난의 역사는 <타밀족>과의 싸움 역사이다.
스리랑카에서 타밀족의 출현은 2,0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타밀족은 남아시아의 민족 중의 하나로서 본래 남인도 지방과 스리랑카 동북지방에 거주하고 있었다.

타밀족은 옛날 부터 단일 정치적 주체를 이루지 못하고 항상 단일 혹은 복수의 강대한 왕국들에 의하여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 왔다. 하지만 타밀족은 그들의 타밀언어를 중심으로 하여 자신들의 언어적 정체성을 밝히면서 살아 왔다.

타밀족은 본래 인도의 힌두교를 믿으며 불교를 반대 했지만 10세기경 한때는 불교의 대승불교와 합세하여 싱할라족의 소승불교를 괴롭힌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타밀족과 싱할라족과의 분쟁은 오랜 역사에 있어서 다만 내부적 갈등뿐 이였고 절대로 큰 전쟁은 없었다.

그런데 스리랑카에 서방의 강대국들이 침략해 들어 옴으로 인하여 타밀족과 싱할라족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과 함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들 두 종족들은 타의에 의하여 극한투쟁의 비극적 싸움을 계속하게 된 것이다. 베트남의 남북전쟁이나 또는 코리아의 전쟁처럼 스리랑카의 두 종족간의 싸움도 비극의 극치에 이르렀다.

오늘 현재 스리랑카에 타밀족은 3백60만명 정도 되며, 세계적으로는 인도, 호주, 동남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미국에 30만 명등 모두 7천4백만 명이 흩어져 살고 있다.

스리랑카에서 타밀족의 갑작스러운 증가는 전적으로 영국식민지 시대에 영국의 영향 때문이었다. 영국은 스리랑카 넓은 삼림속에 무진장의 실론차, 홍차를 수확하여 세계무역으로 장사를 크게 하기 위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인도에서 타밀족을 대량으로 스리랑카로 끌어 들였다.

스리랑카의 원주민 싱할라족 보다 타밀족을 노예로 부려먹기가 훨씬 편리하고 쉽기 때문에 영국인들은 타밀족을 인도에서 노루 사냥식으로 잡아 스리랑카로 강제로 대량집단 이주시켰던 것이다. 오늘 스리랑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종분쟁의 비극은 역사적으로 볼 때 전적으로 영국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포르투갈의 침략시대 (1505-1658)


최초로 스리랑카에 들어 온 서양 침략자는 포루투갈 사람들 이었다. 이들이 스리랑카에 도착한 것은 1505년 이었다. 이들은 스리랑카를 무역의 발판으로 삼고 해안지역 전역을 처음에 점령 했으며 1658년 까지 153년 동안 잔인하고 야만적인 방법으로 스리랑카 전역을 완전히 그들의 식민지 영토로 삼았다.

포르투갈 인들은 스리랑카의 민족 종교인 불교를 억압하고 카톨릭교를 강제로 권유하면서 만일 응하지 않으면 잔인하게 응징하여 처형을 했다. 스리랑카 인들이 카톨릭의 교리와 신앙을 받아 들이지 않고서는 절대로 살아 남을 수 없도록 무섭고 잔인한 방법으로 통치를 했다.

포르투갈인들의 밑에서 생명을 구하고 평안히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름도 성경에서 따온 천주교식의 새 이름으로 바꾸어야 했다. 이것을 반대하면 강으로 던져 악어의 밥이 되도록 했고 또 아이들을 부모가 보는 앞에서 목을 잘라 죽이기도 했다.

불교의 기관은 모두 파괴되었고 승복을 입은 스님들이 발견 되기만 하면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불교의 역사적 고전과 보물들은 모조리 약탈 당했고 도서관들은 불질러 파괴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이탈리아의 트렌트(Trent)에서는 로마 카톨릭교회 평의회를 개최하여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1. 전통적인 로마카톨릭교 외의 모든 타 종교들은 본질적으로 해롭고 잘못된 것 이다.
2. 군주와 왕들은 로마카톨릭교의 선교를 위하여 명확한 의무와 책임을 지고 있다.
3. 신의 은총에 의하여 개종을 시켜야 한다.

이와 같은 결의문에 의거하여 포르투갈 침략자들은 스리랑카에서 모든 불교사원들을 파괴시키고 또 타종교인들의 종교활동을 철저히 금지 시켰다. 이들은 심지어는 결혼식이나 기타 종교적 의식들도 반드시 카톨릭교회의 의식으로만 수행할 것을 강요 했다.

카톨릭교의 교도가 아닌자는 공무원은 물론 상업도 함께 할 수 없도록 법으로 제재를 했다. 스리랑카인들이 카톨릭교로 개종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 남을 수없도록 했다.

반면에 만일 카톨릭교로 개종을 하기만 하면 명예와 이득을 얻도록 법적으로 보장을 해 주는 사회적 특권층 제도를 만들어 놓았다.

3.네덜란드의 침략시대 (1658 – 1796)


네덜란드인들이 스리랑카 (세이론)에 처음 나타난 것은 1602년 이었다. 싱할라 왕들이 잔인한 포르투갈 인들을 몰아 내기 위하여 네덜란드에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로마 카톨릭교회는 극도로 부패하여 생명을 잃고 있었으며 이로 인하여 독일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남으로 유럽의 정치적 동향은 매우 유동적 이었다.

따라서 카톨릭 나라인 포르투갈도 자연히 쇠퇴의 운명에 처하고 있었다.
스리랑카에 온 개신교 네덜란드 인들은 싱할리족과 합세하여 카톨릭 포르투갈 침략자를 몰아 내기 위하여 반세기 넘게 싸워 1658년에 드디어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때 부터 스리랑카는 포르투갈 대신 1658년부터 1796년 까지 138년 동안 네덜란드 인들을 또 다시 새로운 주인으로 모시는 기구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인들은 처음에는 스리랑카 인들을 친절하게 대했다. 그리하여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여 있던 불교는 어느 정도 소생하는 시기를 맞이하여 나라의 평화와 불교의 문화가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침략자들은 그들의 근본 목적인 무역확대를 달성하기 위하여형식상으로 얼마 동안 겸손과 인내로 자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네덜란드 침략자들은 점차적으로 스리랑카 인들에게 개신교를 주입시키는데 있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전 영토에 걸쳐 불교를 배격하고 개신 교적인 기독교 교육제도를 확립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교회와 학교를 겸했고 교사는 종교 사절의 역할을 담당 했다. 또한 그들은 싱할라 인들이 배정된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 범죄자로 취급하여 모든 시민적 공민권을 제한하기도 했다. 이것은 생존권과 결부된 문제와 같았다. 허용했다.

이런 방식으로 네덜란드 침략자들은 불교와 천주교를 개신교적 기독교로 바꾸게 하고, 불교문화를 개신교적 기독교문화로 전환시키는 정책을 무려 138년 동안 지속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스리랑카의 불교의 스님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 다하여 결사적으로 불교의 정신과 불교문화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최후의 순간 까지 투쟁했다.

기독교로 인하여 불교의 암흑시대가 수 백년 동안 계속되는 속에서도 스리랑카 불교의 등불은 결코 꺼지지 않고 민중의 추앙을 받는 위대한 스님들이 계속하여 배출되었다.

다르마수리야 스님 (1678년), 스리 사라난카라 스님 (1698년), 나린드라 스님(1739년) 그리고 사라난카라 스님 (1803년) 등 혜성과 같은 위대한 스님들이 스리랑카의 암흑 같은 역사 속에 등장하여 불교가 능히 부흥할 수 있는 기반을 굳게 다지고 있었다.

4.영국의 침략시대 (1796년 - 1948년)


유럽에서 영국과 네덜란드의 전쟁이 영국의 승리로 끝나게 되자 영국은 자연스럽게 네덜란드로부터 스리랑카에 대한 식민지 통치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영국은 벌써 1600년대부터 인도에 진출하여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그 지역의 상권을 거의 다 장악하고 있으면서 스리랑카 해역을 접근하여 탐내고 있었다. 1796년에 영국은 결국 네덜란드 군을 물리치고 스리랑카를 완전히 점령했다.

영국은 스리랑카 왕을 포로로 붙잡아 강제로 1815년에 <캔디협정>을 맺음으로서 스리랑카는 세번 째 서방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815년에 <캔디협정>을 통하여 또 다시 영국에 의하여 식민지가 된 것은 기원전 486년에 스리랑카가 건국된 이래 2301년 동안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끈 질기게 수호해 오던 스리랑카의 고귀한 <불법수호의 전통>이 그만 완전히 끝났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영국이 스리랑카를 지배하고 통치한 것은 그 어느 나라가 지배하고 통치한 것보다 더 잔인하고 근본적으로 스리랑카의 뿌리가 완전히 뽑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인들이 스리랑카의 불교를 말살시키는 방법이 첫째는 불교내부의 분열을 조장시키는 방법이었다. 내부분열을 통하여 유능한 지도 스님에 대한 반대세력을 키워 스님의 지도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둘째는 개신교 기독교 선교 활동을 통하여 전 국민을 기독교화 시키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선교는 곧 교육이며 교육을 통하여 불교는 저속한 미신이라고 세뇌교육을 했다.

셋째는 사회적 구조를 통하여 서양문화에 동화되도록 했다. 지위를 얻고 명성을 얻으려면 반드시 기독교인 되어야 하고 서양문화에 근본적으로 동화된 문화인이 되어야만 했다.

영국은 스리랑카 인들이 불교적 전통문화를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기도록 교육을 했고 불교를 버리지 못하고 믿는 것은 교육받지 못한 계층이나 산간벽지의 비문 화 권에 속하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이나 믿는 미신이라고 세뇌공작을 전개했다.

영국은 스리랑카 인들이 수치심이나 두려움 때문에 자기자신이 불교인 임을 밝히 는 것 조차 스스로 거부하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 놓고 식민통치를 152년동안이나 계속했다.

지난 날 포르투칼과 네덜란드의 식민지 시대에는 그래도 명목상 스리랑카의 군주와 왕조는 계속 존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의 식민지 통치하에서는 달랐다. 1815년에 영국군이 수도 캔디를 공격하여 왕을 포로로 붙잡아 왕위를 페위 시키고 스리랑카 왕의 통치권을 영국왕실로 합병시키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기원전(BC) 486년에 스리랑카가 창건되어 위자야 왕이 왕위에 오른 이래 그들의 나라의 명성과 상좌부불교의 영광을 안겨주었던 2,300년 동안의 스리랑카의 빛나는 불교왕조는 영국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송두리 채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5. <사자>와 <호랑이>의 내전으로 혈투 장이 된 스리랑카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8년에 스리랑카는 영국연방의 회원국으로 독립을 획득했다. 스리랑카는 443년 동안의 서방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열대지방의 비교적 온화한 기후와 실론차, 홍차로 유명한 신비스러운 삼림이 우거진 불교의 나라, 스리랑카는 나라의 독립과는 거리가 먼 종족간의 내전으로 참혹한 혈투 장이 되고 말았다.

스리랑카의 내전은 2,000만명의 인구가운데 8할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불교계 <싱할리 족>과 소수인 18%를 차지하고 있는 <타밀 족>간의 뿌리 깊은 종족, 종교간의 갈등과 반목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타밀족이 스리랑카에서 증오의 대상, 문제의 종족으로 존재하게 된 원인은 영국의 식민지 시절로 거슬려 올라가야 한다. 영국은 신비의 홍차를 발견하고 <실론차>라고 명명하고 세계무역으로 막대한 자본을 축적했다.

타밀족이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대량 노예로 끌려 온 것은 스리랑카의 깊은 산림속에서 실론차를 생산하기위하여 값 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내전의 뿌리>는 영국의 식민통치에 있지만 <내전의 몸통>은 종족간의 차별과 폭력에 의해 전개되었다. 스리랑카는 1948년에 독립한 이후 겨우 10년 동안 평화로운 기간이 있었을 뿐 60여 년간은 불안전한 상태 속에서 치열한 내전이 20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1970년대에 들어 서서 타밀족은 무장조직을 결성했다. 이 무장조직은 <호랑이>로 상징되는데 <타밀 일람 해방 호랑이>라고 부른다.

<사자>로 상징되는 싱할리족, 스리랑카 정부를 대항하여 분리독립을 주장 했다. 결국 스리랑카의 분쟁은 국제적 무대에서 <사자> 와 <호랑이> 의 싸움으로 인식되어 왔다.

1983년 7월에 폭동진압 이라고 하는 이유로 <사자> 와 <호랑이> 간에 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이 분쟁으로 인하여 타밀족 3,000명이 죽고 2만 채의 타밀족의 가옥이 파괴되는 비극이 발생되었다.

이와같은 비극을 계기로 인하여 5,000명 정도의 타밀군 <호랑이> 들이 6만 명이 넘는 싱할리족 정부군과 힘겨운 싸움을 계속 했다. 이 싸움은 하루도 쉬지 않고 오늘날까지 30년 동안 치열하게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30년 넘게 지속된 타밀족의 독립투쟁은 2009년 5월 16일에 큰 분기점에 이르게 되었다. 타밀족의 <타밀 일람 해방 호랑이> 가 정식으로 패배를 인정함으로써 30년 넘게 지속된 전쟁은 일단 끝이 났다.

10만 명 타밀족이 그 긴 투쟁속에서 목숨을 잃었고, 60만 명의 타밀족이 난민이 되여 세계 곳곳에 흩어졌다. 현재 35만 명의 타밀족이 강제수용소에 같혀 있고 타밀족 인구의 25%가 <삶의 자리>를 잃고 방황하고 있다.

그러면 스리랑카의 사태에 대하여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어떠한가?
그 동안 스리랑키에서 하루에도 수천 명이 죽고 몇 달 사이에 1만 명의 타밀인이 살해를 당해도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냉혹하게 침묵으로 <모름쇠> 로 일관했다.

왜 그랬을 까? 그 이유는 강대국들의 자국의 이익 때문이다.
인도양은 미국의 이익과 직결 되는 지역이다. 인도양은 세계석유의 40%를 생산하는 곳이며, 세계 유조선의 50%가 인도양을 항해한다. 스리랑카는 지정학적으로 군사적 요충지가 되기 때문에 스리랑카의 항구를 이용하는 것은 미국의 절대적 요구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므로 미국은 스리랑카의 주체세력인 싱할라족의 군부를 절대적으로 지원하면서 타밀족의 아우성에 대해서는 못들은 척 하고 굳게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2006년에 스리랑카의 <타밀 일람 해방 호랑이>를 위험한 테로리스트 조직이라고 낙인을 찍기도 했다.

미국은 스리랑카의 라자파스카 대통령을 지원하면서 그의 폭력 사용에 대하여는 일언반구 말이 없고 다만 그가 <타밀 호랑이>를 격파한 데 대해서 스리랑카 군부의 승리를 극구 찬양하면서 축하해 왔을 뿐이다.

스웨덴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선교 윤리문제> 를 다루고 있는 단체는 최근 비윤리적 선교정책의 사례로 스리랑카를 지적했다. 서방의 기독교들은 스리랑카에서 비윤리적으로 선교를 시행했다고 지적했다.

스리랑카의 불교는 역사적으로 서방교회의 비윤리적 선교정책으로 인하여 회생된 불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오늘 스리랑카의 불교는 어떠한가?

포르튜갈,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 교회가 역사적으로 스리랑카에서 생생하게 보여준, 그들이 저지른 불교에 대한 비윤리적 선교정책을 오늘 스리랑카의 불교는 그대로 본받아 힌두교 타밀족을 향하여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양심적인 스라랑카의 일부 신문 기자들은 목숨 걸고 스리랑카 군부의 학살 행위를 폭로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광주학살을 재현하고 있는 스리랑카의 대량 학살에 대하여 서방 교회들은 그저 침묵만을 지키고 있다.(끝)

*필자소개:

유태영 고문은 1930년 9월27일 화해도 신천에서 출생하여 평양성화신학교를 수료하고 대한예수교장로교 총회신학을 졸업, 미국 드류대 목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70년부터 베드포드 팍 장로교회에서 시무하다고 30년 목회생활을 정리하고 2000년 은퇴했다. 그는 그 동안 뉴욕지구 한인교회협의회 회장, 뉴욕목요기도회 회장, 국가보안법철폐 및 양심수석방을 위한 미국운동본부 뉴욕지역위 위원장, 1990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재미본부 공동의장을 15년동안 역임해 오다가 지난 해 고문을 맡고 있다. 그는 또 북부조국에서 시상하는 <조국통일상>을 수상한바 있다. 지금은 <민족통신> 논설위원으로 선우학원 박사와 함께 집필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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