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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북에 기독교를 전도하려는 사람들의 기본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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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9-04-01 20:34 조회3,5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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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환 박사는 <북에기독교를 전도하려는 사람들의 기본자세>라는제목의글을 <민족통신>에 기고하면서
"이북에 기독교를 전도하려는 이남과 해외의 교회들과 교인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북을 기독교화하기
위한 전략을 치밀하게 세우고 미국과 이남, 중국을 교두보로 만들어 가능한 모든 수단들을 다 동원하여 이북을
선교하려고 애쓰고 있는 선교단체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교방법도 다양하다."라고 설명하면서 이런
사람들은 북을 제대로 알고 해야한다고 충고했다. 전문을 싣는다.[민족통신 편집실]


[논평]북에기독교를 전도하려는 사람들의 기본자세




*글:김현환박사(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IMAGE##> 이북에 기독교를 전도하려는 이남과 해외의 교회들과 교인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북을 기독교화하기 위한 전략을 치밀하게 세우고 미국과 이남, 중국을 교두보로 만들어 가능한 모든 수단들을 다 동원하여 이북을 선교하려고 애쓰고 있는 선교단체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교방법도 다양하다. 이북을 경제적으로, 의학적으로 돕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구호물자들을 전달하면서 선교의 기회를 노리는 경우도 있다. 이북을 자주 드나드는 중국에 살고 있는 이북국적의 동포들을 이용하여 전도를 하는 경우가 제일 많고 때로는 미국동포들을 이용하여 선교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 미국의 마켓에서 전도지를 돌리듯 이북에서도 몰래 전도지를 돌리거나 성경을 나누어 주다가 틀켜 즉석에서 추방된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이북 동포들에게 선교하기 위하여서는 이북사회를 먼저 잘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상대방을 모르고서는 많은 노력과 재원을 들여도 선교에 성공하기가 힘들다고 생각된다. 이북에 기독교를 전파하려고 애쓰는 기독교인들은 이북사회와 이북의 주민들에 대하여 우선 자세한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이북에 기독교를 전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북사회가 어떤 체제를 가진 사회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이북은 우리가 살고 있는 <개인주의>에 바탕한 자본주의체제를 가진 이남사회나 미국사회와 아주 다른 <집단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 체제를 가진 사회이다. 그러기에 이북에 기독교를 전도하기 위하여서는 개별적으로 전도를 할 것이 아니라, 이북 전체 사회가 집단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가치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이남이나 미국의 기독교회가 전체적으로 코리아 반도의 통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이 그 한 예일 것이다. 이북 전체사회가 지향하는 사회주의체제나 통일정책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서는 선교에 성공할 수가 없다. 이 체제문제는 바로 이북사회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가를 설명해 주는 세계관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래서 둘째로, 이러한 사회주의사회에 살고 있는 이북 사람들이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를 다음으로 깊이 파악해 보아야 한다. 맑스-레닌주의(ML)가 나오기 전까지는 인류의 사상사에서 <관념론>과 <유물론>이 서로 오래 동안 논쟁을 벌려 왔다. 이 논쟁의 주안점은 세계의 <시원의 문제>와 관련된 철학의 근본문제였다. 세계의 시원을 물질로 보는 것, 물질이 의식에 대하여 일차적인 것이라고 보는 학설을 <유물론>이라고 하고, 한편 이와는 반대로 세계는 본질적으로 관념이요, 정신이라고 보는 학설, 즉 의식이 물질에 대하여 일차적인 것이라고 보는 학설을 관념론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물질이 일차냐, 의식이 일차냐>하는 문제, 다시 말하면 <세계의 시원이 물질이냐, 의식이냐>하는 문제는 세계의 시원을 물질로 보는 맑스-레닌주의 유물론 철학에 의해서 과학적으로 종결되었다. 이제는 세계의 시원이 <의식>이 아니라 <물질>이라는 것은 일반적 상식으로 되었다.

다음으로 과학적인 맑스-레닌주의 철학에 의해서 세계를 정지와 부동의 세계로 보는 <형이상학>이 극복되고 세계는 끊임없이 운동, 변화, 발전한다는 것이 맑스주의 <변증법>에 의해 밝혀졌다.

그리하여 과학적인 맑스-레닌주의 철학에 의하여 <형이상학적인 관념론>이 극복되고 <변증법적 유물론이> 널리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다. 아마 구미지역에서 기독교가 몰락되고 있는 것은 미신이 타파되고 과학적인 <변증법적 유물론>이 널리 보급된 것과도 일부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맑스-레닌주의 철학이 이루어 놓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계승하면서 그러면 이러한 변화발전하는 <물질세계의 운동발전을 추동하는 힘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철학적 근본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거기에 답을 준 철학이 바로 <주체사상>이다.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하여 주체사상은 세계에서 차지하는 <사람의 지위와 역할의 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제기하였다. 즉 <세계를 지배하는 자는 누구이고 세계를 변화발전시키는 힘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새롭게 제기하였다. 주체사상에 의하여 철학발전의 <새로운 축>이 마련되었고 이 근본문제에 대답을 준 원리가 새로운 <과학적 철학의 근본원리>로 되었다. 이 근본문제에 해답을 준 원리가 바로 사람의 <지위와 역할>을 표현한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지위) 모든 것을 결정한다(역할).>는 주체사상의 철학적 근본원리이다. 주체사상은 바로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원리에 기초하고 있는 새로운 사상이다.

여기서 주체사상이 말하는 <사람, 인간>은 관념론이 주장하는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를 말하며 이 <물질적 존재>인 인간이 물질세계의 주인이며 물질세계를 변화발전시키는 힘, 추동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물론과 변증법 관점에서 보더라도 주체사상은 변증법적 유물론과 결코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혀 가장 발달된 물질적 존재인 <사람>을 고찰의 중심에 놓고 유물론과 변증법도 더욱 발전시킨 사상이다. 물론 주체사상의 <독창성>이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주체사상이 결코 <변증법적 유물론>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이북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을 잘 알아야 이북에 선교를 해도 그것을 성공시킬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북에서는 학생들이 어려서 부터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저 하늘 나라 어디엔가 긴 수염을 달고 있는 하늘의 할아버지가 인간을 포함하여 세계를 창조했으며 세계를 운영하고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북의 학생들은 그러한 독립적인 <관념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세상이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이 물질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변화발전하고 있다고 배우고 있다. 인간의 운명도 이미 예정되거나(예정론) 결정된 것(숙명론)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운명의 주인으로서 자신이 개척하기에 달려 있다고 주체사상은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들 이북의 학생들은 심지어 인간마저도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로 믿고 있으며 인간의 <의식>, <정신>이라는 것도 따로 어디엔가 생존하는 <독립된 존재자>가 아니라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인 인간몸의 기관들(organs) 중에서 가장 고도로 발달된 인간생명의 중심인 “뇌수(brain)가 자기의 활동을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것으로 만드는 지휘기능”이라고 믿고 있다. 이들 정식 학교교육을 받은 이북학생들에 의하면 의식, 관념(하나님, 절대이념, 등)도 결국 인간의 뇌수의 작용에 불과求? 기독교인들이 절대적으로 숭상하는 신인 <하나님>도 이들에 의하면 단지 관념, 의식에 불과하며 인간의 두뇌가 투사하여 만들어 낸 상(image)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북에 선교를 할 때는 이러한 기독교의 신관을 비롯한, 구속사관, 등 신학적 원리를 해설하는 방법으로는 선교에 성공할 수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세째로, 이북에서 기독교를 전도하려면 <신학적인 접근방법>보다는 <인간적인 접근방법>이 더 먹혀들어 갈 것이라 생각된다.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선포하고 예수는 안식일 법을 어겨가면서도 병자들을 고쳐준 인간적인 방법을 이북의 선교방법에도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안식일(종교, 사상) 보다도 인간을 중시한 예수의 사상은 인간을 중심에 놓고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문제>, 즉 <인간이 모든것의 주인이고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인간의 지위와 역할> 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제기한 주체사상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높이기 위하여 그 당시 종교인들이 가장 숭상하며 철저하게 지켰던 율법마저 어겨가면서 단호하게 인간을 위하여 행동하였듯이 이북을 기독교화 하겠다는 선교사들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그들이 숭상하며 철저하게 지키고 믿고 있는 신학적 신조들과 구원론을 접어두고 이북 민중이 지금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데 초점을 맞춘다면 선교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기독교도 결국 따지고 보면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높여 인간의 지위를 신의 아들, 예수의 지위처럼 높이자는 것이고 인간의 역할도 신의 아들 예수처럼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역할을 하게 하자는 것이 아닌가?

이북에 선교를 하겠다는 기독교인들이 당장 효과를 보겠다고 신학적, 이념적 접근방법을 사용하여 전도지나 성경을 이북 주민들에게 돌리다가는 위에 길게 해설한 것 처럼 이북 민중들은 기독교를 <형이상학적인 관념론>으로 간주하고 당장 거절할 것이다. 선교사들이 기독교와 이북의 주체사상의 공통점인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높이는 문제>를 앞에 내세워 예수가 안식일법을 어겨 가면서도 병자를 고쳐준 것처럼 이북이 필요로 하는 것을 우선 돕는다면 선교가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통일교와 러시아 정교가 그러한 방법을 택하여 통일교는 평양에 사무실을 지었고 러시아정교는 평양 통일거리에 교회를 짓게 되었다. 이들은 이북이 가장 어려운 <고난의 행군>때 선교를 생각하지 않고 이북을 열심히 도와 주었다. 그러므로 이북에 선교를 하려는 사람들은 이들처럼 우선 기독교를 전도하지 않고 묵묵히 이북이 필요로 하는 것을 먼저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북에서 당신들이 우리를 위하여 많은 좋은 일을 했는데 우리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고 나올 것이다. 선교가 이런식으로 전개되어야 이북에서는 성공할 수 있다고 본다.

네째로, 다시 첫번째 문제로 돌아가서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익숙한 자본주의체제가 마치 기독교에 가깝고 사회주의체제는 기독교와 멀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인들은 자본주의는 기독교를 지지하는데 사회주의는 기독교를 배척한다고 믿고 있다. 사회주의 변혁과정에서 일부 몰지각한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를 잘못 이해하여 사회주의는 기독교를 반대한다고 믿고 사회주의변혁을 반대하여 나섰기에 충돌이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자들이 단지 기독교를 믿는 신자들이라고 자기들을 지지하는 기독교인들까지 반대했을 리가 없다. 사회주의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기 때문에 결코 인간들이 신앙하고 있는 여러 종교들을 무조건 반대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변혁 과정에서 노골적으로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자들일 경우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되지 않고 잘못이 인정되었을 경우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것은 자본과 생산수단을 소유한 소수의 자본가들만 살찌우는 불공평한 자본주의제도를 바꾸어 만인이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신구약성경에서 강조한 중요한 내용과 일치한다. 오순절 사건후 초대교회도 가진 것들을 다 팔아 서로 <유무상통>하였다. 기독교회는 가진 자들, 즉 부자들을 위한 단체가 아니다. 기독교회가 만민의 평등을 위하여 노력하는 사회주의를 반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기독교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자본가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지배층들의 헌금에 많이 의존하기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 문제에 대하여 설교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자본주의국가들의 이념기구들 중 하나가 되어 자본주의를 선전하는 도구로 되어서는 안된다. 기독교가 결코 사회주의를 반대하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국가이념기구들 중 하나가 되어서는 안된다. 기독교가 단지 가진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축복해 주는 기복신앙에 몰두해서는 민중의 지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이북 주체사회주의 사회에도 종교의 자유가 엄연히 존재한다. 이북에도 기독교회가 3개가 있다(신교 2개, 성당 1개). 절들에는 승려들이 상주해 있다. 현재 이북의 교회교인들의 대부분은 주로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오래 전부터 믿던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다. 제대로 학교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은 위에서 설명한 바대로 <변증법적 유물론>을 배우고 있으며 인간중심의 이북의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있다. 이북 교회들이 젊은 층들을 교인들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북의 기독교가 기독교신앙의 핵심 내용(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사상)과 주체사상의 핵심 내용(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높이는 사상)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잘 해설선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남 인구의 1/4을 차지하고 있는 이남의 기독교인들이 조국통일에 방해가 되지 않고 조국통일을 위하여 앞장 선다든가, 이북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앞장서서 도와준다면 아마 이북 선교의 문이 차츰 조금씩 열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없다”는 예수의 말을 문자 그대로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자신들만이 구원의 열쇠를 가지고 있고 다른 종교와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으니 그들을 단지 <선교의 대상>이라고 믿고 세계 각 처에 나가 전도를 하려고 하는데 이북의 주체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방법이 전혀 통하지 않으니 그러한 선교방법을 재고해 보라는 것이 이글의 주제이다.

내가 이북에 선교를 하려는 기독교인들에게 권하고 싶은 자세는 <연방자세>이다. 자기와 사상과 종교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사상과 종교를 우선 겸허하게 배우고 서로 배격하지 말고 서로 용납하여 서로 함께 성장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연방자세>를 가지고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이북의 주체사회주의자들을 대하면 그들도 기독교인들을 경계의 눈으로 보지 않고 포용심을 가지고 대할 것이다. 위에서 강조한 모든 내용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절대적인 구원론을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도 <연방자세>를 가지고 다른 종교와 사상을 가진 사람들도 존중하고 그들의 다른 사상과 종교도 배울 것은 배워 서로 함께 성장하는 너그러운 포용심을 가질 때만이 이북에서도 선교를 성공시킬 수가 있다 것이다.

그럴 때만이 구원이 자기들에게만 있다고 믿는 기독교인들도 왜 이북에서 흡수통일방안인 <체제통일방안>을 반대하고 <연방제 방식에 의한 통일방안>을 내세우고 있는 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미 코리아반도에 자본주의체제와 사회주의체제, 그리고 그 체제를 지지하는 두 정부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이명박장로처럼 자본주의체제, 자유민주주의체제로 통일하겠다면 결국 전쟁을 해서라도 이북을 흡수시키겠다는 것으로 된다. 그처럼 기독교인들도 자기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믿고 이북의 주체사상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이북민중에게 선교하겠다고 하면 결국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코리아반도에서 전쟁없이 평화스럽게 통일하려면 <연방제 통일방안>이 필요하고 이북에 충돌없이 선교하려면 <연방자세>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선교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 내가 2007년에 쓴 다음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재미자주사상연구소>에 실린 글임.



모든 종교활동의 <최후심판>의 표준





*글 김현환 박사(재미자주사상연구소 소장)



나는 문자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독단적 기독교인이었을 때는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을 전도해야 한다는 조급증에 걸려 다른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나도 어렸을 때는 길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누어주기도 했고 새벽기도도 다녔고 이 교회 저 교회의 부흥회도 찾아다니며 은혜를 더 많이 받으려고 노력도 해 보았다.

내가 30여년의 긴 과정을 거쳐 독단적이고 문자주의적인 근본주의 기독교 신앙에서 해방된 후 유니테리안 유니버설리스트 교단의 목사가 되어서부터는 나의 모든 관심은 선교가 아니라 이 세상을 보다 정의로운 사회로 만들기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에 집중되었다. 이 후부터의 나의 선교는 나의 활동을 <와서 그리고 보라>는 것이었다. 와서 보고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하면 배울 것은 배우고 함께 동지가 되자는 것이 나의 선교의 태도가 되었다.

내가 처음 목회를 시작한 나성제일유니테리안교회에서는 매주 수요일이면 수석목사인 즈월링목사, 교육목사, 나와 인턴목사, 사회정의구현회 회원들이 로스엔젤레스 스트맅에 위치한 [연방이민빌딩] 앞에 나가 시위를 하였다. 그때그때 외치는 구호와 들고 선 글의 내용은 달랐다. 예를 들면 <미국은 큐바와 니카라구아에서 손을 떼라>, <더 이상 새로운 무기를 만들지 말라>, <택시노조를 지지한다>, <게이와 레스비안의 권리를 인정하라> 등이었다. 나성제일유니테리안 수석목사인 즈월링목사는 가끔 새로운 무기를 전시해 논 장소에 사회정의구현회 회원들과 참석하여 일부러 법을 어기고 무기를 전시한 테이블을 엎어버리고 체포되어 구금되곤 하였다. 그러면 교인들이 경찰서로 찾아가 <우?목사를 석방하라>고 외쳐 대었다. 우리 유니테리안유니버설리스트 목사와 교인들에게는 이런 활동도 종교활동 중 하나였다.

또한 사회정의를 위하여 세계 각처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이 엘에이 시를 방문하면 그들을 교회로 초청하여 설교를 시키는 것이 우리 목사들의 큰 업무 중 하나였다. 그리고 버트란드 러셀을 비롯하여 세계의 석학들이 UCLA에 학회일로 방문할 경우 그들을 교섭하여 우리 교회에서 일요일에 연설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콜럼비아에서 반정부 활동을 하는 그룹에 들어가 3년간 같이 먹고 살면서 활동하다 돌아온 블레이스 본페인 신부를 초청하여 콜럼비아의 정치적 현실에 대하여 설교하는 날에는 엘에이 시의 관심 있는 일반시민들과 진보적인 인사들과 그룹들이 대거 모여든다. 교회가 유엔과 같다. 예배가 끝나면 교회 내의 각 처에서 인권운동가들, 반전평화운동가들, 여성해방운동가들, 무기반대운동가들, 게이레스비언옹호자들, 등이 조그마한 테이블을 갖다 놓고 자기들의 조직을 소개하는 내용과 그들의 활동계획을 알리는 팸플렛을 전달한다. 이것도 우리의 종교활동 중 하나이다.

소련이 망하기 전인 어느 일요일 아침 즈월링목사는 [러시아인들이 쳐내려 온다, 러시아인들이 쳐내려 온다]는 설교를 하여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고 이 설교가 유니테리안 유니버럴리스트 목사들의 설교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여 이 설교가 각 처의 유명한 신문에 소개 되었다. 마치 [이북이 쳐내려 온다, 이북이 쳐내려 온다]고 하면서 독재를 하던 박정희, 전두환정권처럼 미국에서도 [소련이 쳐내려온다]고 하면서 선량한 시민들을 협박하면서 온갖 못된 짓을 다하는 미국정치를 비판한 것이었다. 이러한 의식화 활동도 우리의 종교활둥 중 하나였다.

우리 유니테리안 유니버설리스트들은 이러한 인간적인 이상들(human ideals)인 평화, 정의, 민주주의, 자주, 평등, 화해, 사랑, 진리를 위하여 행해지는 모든 활동들을 질적인 차원에서 지극히 영적이라(very religious, or spiritual in quality)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상 죤 듀이가 1934년 쓴 [공통의 신앙]에서 잘 지적했듯이 이들 인간적인 이상들을 실천하기 위하여서는 자기 생명을 내놓을 때도 있어야 하고 많은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죤 두이가 생각하는 [종교심], [영적인 것]이란 어떤 것이며 종교활동이란 어떤 것인지 알아보자.

“Any activity pursued in behalf of an ideal end against obstacles and in spite of threats of personal loss because of conviction of its general and enduring value is religious in quality.<어느 한 이상이 지닌 그 일반적이고 영구적인 가치에 대한 확신 때문에 많은 장애물들과 개인적 인 자신의 손실에 대한 협박들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을 실천하기 위하여 추구되는 어떤 활동도 질적인 차원에서는 종교적(영적)이다.(위 책 27페이지)
사실상, 민주주의라는 이상(ideal)을 실천하기 위하여 4.19와 5.18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personal loss)을 당했으며 감옥을 가고 어려움들(obstacles)을 당했는가? 이러한 인간적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모든 활동들은 다 영적인 종교적 활동들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기독교회에만 [영적인 것], [종교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단이다.
나는 나성제일유니테리안교회에서 설교되는 설교 혹 연설(speech)을 듣고 감동되어 눈시울을 적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 와서 보고 사회정의를 위한 활동에 참석한 분들이 많다. 그리고 [영적인 것]에 대한 보다 넓은 이해를 하고 독단적인 종교의 도그마에서 해방한 사람들이 많다.

내가 이 교회의 목사가 되면서 교회와 맺은 계약서의 첫 조항에는
"이 교회에서 어떤 설교를 하던지 문제 삼지 않는다."
고 되어 있다. 참으로 멋진 교회가 아닌가? 성경의 해석이 조금 다르다고 같은 기독교인들끼리 싸움질을 하며 서로 이단이라고 몰아내는 데 우리 교회에서는 어떤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하던지 문제를 삼지 않고 있다. 그러나 누가 설교를 하던지 반드시 질의 응답시간을 가져야 한다. 자기주장만 하는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반드시 대중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위에서 죤 듀이가 지적한 것처럼 일반 대중들이 그것을 가치로 인정하는 [보편성]을 띠어야 하고 [영구성]을 띠어야 한다(its general and enduring vaue). 절대적 진리를 선포하는 교회에서 질의응답시간이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 아닌가!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첫째로, 우리의 종교활동은 사회정치적으로 교인들을 깨우쳐 사회정치적 현실을 올바로 보게 하는 것이다. 자기 종교의 교리를 절대화 하여 단지 선교활동에 교인들을 동원하여 교회성장에나 힘쓰거나 교인들을 죄인이라고 죄악시 하여 죄를 씻고 천당에 가기 위해서는 헌금을 많이 해야 한다고 부담을 주어 헌금이나 많이 거두어 들여 교회당이나 크게 짓는 것이 종교활동이 아니다. 또한 어느 지역에 전쟁이 일어나면 구호물자나 들고 들어가 선교나 하려는 선교지상의 교회는 전리품이나 도둑질하는 도둑놈들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의 선교활동은 우리의 이웃들 중 고통받는 사람들과 세계의 나라들 중 고통받는 나라들의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내용을 시민들에게 알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둘째로, 우리의 종교활동은 미리 전쟁을 막는 일이다. 전쟁은 인간이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을 파괴한다. 전쟁이 일어난 후에 구호물자를 들고 들어가 선교하는 것이 종교활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교도들이나 사상이 다른 사람들은 어차피 지옥에 갈 죄인들이니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선교할 수 있는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좋다는 식의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독단적 근본주의 기독교인인 부시대통령이 평화스럽게 잘 사는 이락민중들을 전쟁으로 몰아 죽이고 파괴하고 약탈하고 나서 하는 소리가 그들을 민주화시키기 위하여 당연히 할 일을 했다는 것이었다. 2차대전 후 남은 쟝크무기들을 소모시키기 위하여 저질러진 죄악중의 죄악인 6.25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코리아에 구호물자를 들고 들어가 기독교와 자유민주주의를 전파하는데 가장 성공한 예가 있으니까 코리아의 예처럼 세계 각처에서도 그런 짓을 하려고 하는 것이 근본주의 기독교인들과 제국주의의 본심이다. 이제부터는 모든 악의 근원인 전쟁을 미리 막는 일이 모든 종교의 활동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선교를 하려거든 각 처에서 필요한 물자를 조건 없이 보내라는 것이다. 어려울 때의 친구가 참된 친구라는 말이 있듯이 이웃이 필요로 하는 일이 있으면 무조건 돕는 것이 선교가 되어야 한다. 이북이 한창 [고난의 행군]을 할 때 통일교회에서 소문내지 않고 열심히 이북을 도왔다. 러시아정교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자 이북에서 당신들이 우리에게 너무 좋은 일을 많이 했는데 그러면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나왔다. 통일교회에서는 보통강호텔 경영과 평화자동차 생산, 보통강호텔 앞에 통일교 사무실을 짓는 것을 원했다. 원하는 대로 다 실행되었다. 러시아정교에서도 러시아정교 교회를 짓기를 원했다. 대동강변의 통일거리에 멋진 정교회가 들어섰다. 선교는 이런 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사상과 종교 신앙을 존중하고 서로 선교의 대상이 아니라 인격체로 인정하면서 서로 필요한 것을 도와주면서 서로 함께 성장하는 것이 선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양성경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46절에 [최후심판]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예수가 로마와 헤롯당과 종교지도자 가야바 3자의 야합에 의해 잡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이틀 전에 제자들에게 한 이야기이다.

예수(여기서는 인자 son of man)가 왕으로 심판자로 와서 천사들과 함께 앉아 전 세계의 모든 민족들을 그 앞에 모으고 그들을 양과 염소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 의인들로 구성된 양의 그룹은 그의 오른 편에, 악인들로 구성된 염소의 그룹은 그의 왼편에 앉힐 것이다. 그때 임금(king)이 오른 편에 있는 양의 그룹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stranger)가 되었을 때 나를 영접해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 옷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찾아주었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만나주었다.
그러니 나의 아버지께서 주시는 복을 받을지어다.
그리고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상속할 지어다"
이에 의인들이 주여, 우리가 언제 그런 일들을 하였나이까 하고 그런 의로운 일들을 한 일이 없다고 부인하였다. 임금이 대답하기를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또 왼편에 앉은 염소의 그룹에게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내가 헐벗었을 때 옷을 주지 않았으며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방문하지 않았다.
그러니 저주를 받을 지어다.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이에 그들이 주여 우리가 언제 그런 일들을 주를 위하여 하지 안았나이까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기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그리고 악인들은 "영원한 형벌(eternal punishment)에, 의인들은 영생(eternal life)에 들어가리라"고 임금은 최후심판을 하였다.

이 [최후 심판]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많다.
첫째로, 이 마지막 심판에서 심판자인 왕(인자)은 절대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기독교회에 다녔느냐? 어느 교회에 다녔느냐?
2)새벽기도에 다녔느냐? 열심히 기도했느냐?
3)안식일을 지켰느냐? 매주 일요일 날 일을 하지 않고 교회에 나갔느냐?
4)헌금을 많이 했느냐? 십일조를 냈느냐?
5)전도하여 몇 명을 교인으로 만들었느냐?
6)얼마나 화려하고 큰 교회당을 지었느냐?
지금 기독교회가 강조하는 위의 종교활동이 전혀 [마지막 심판]의 관심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심지어 세계의 많은 종교들 중에 어느 종교를 믿었느냐는 것도 관심거리가 아니다. 또한 어떤 주의, 사상을 신봉했느냐도 [마지막 심판]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그러면 [최후 심판]의 <심판의 잣대>, <심판의 표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들 중 하나(one of the least)에게 내가 어떤 일을 했느냐>
가 [최후심판]의 표준, 기준이다.

예수의 [최후심판]의 기준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활동하다 지극히 작은 자들을 무시하고 학대하고 죽이던 로마와 헤롯당, 가야바 종교지도자 3자의 야합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최후 심판]의 기준에 대한 위대한 말씀이다. 참으로 내가 위대한 인간 예수를 만나 변화된 것은 바로 이러한 예수의 인간적인 실천 때문이었다. 예수는 결코 지금 형태의 기독교를 만든 사람이 아니다.

위대한 나의 스승 인간 예수는 지금도 나의 사상이 어떤 것인지를 묻지 않는다. 그는 내가 어떤 종교를 믿는 지 묻지 않는다. 단지 내가 지극히 작은 이웃을 위하여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 그것으로 나도 [최후심판]을 받을 것이다.

만약 사회주의자가 지극히 작은 이웃을 위하여 헌신했다면 여기 [최후심판]의 잣대로 라면 기독교를 믿었던 믿지 않았던 상관없이 구원, 영생을 받았을 것이다. 만약 기독교회를 열심히 나가며 전도, 새벽기도, 헌금을 열심히 했어도 지극히 작은 이웃을 돌보지 않았다면 그는 영원한 형벌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가 80년대에 북과 해외기독자들과의 대화를 시도했을 때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이러한 가장 작은 자들에게 우리가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 신을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그런 논쟁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최후심판]의 잣대가 아니다.
주체사상의 근본원리에서도 강조하듯이 우리가 어떤 종교와 사상을 신봉하던지
지극히 작은 자들의 “지위(모든 것의 주인의 지위)와 역할(모든 것을 결정하는 역할)을 높이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

이것이 [최후심판]의 잣대이다.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보는 일]이 모든 종교들의 활동의 내용이 되어야 하며 선교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아프칸, 코소보, 이락, 등에 폭탄을 퍼부어 선량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고 무기를 팔아 돈을 버는 자들이 기독교회에 나가 헌금을 열심히 하고 장로가 된다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종교는 죄악의 근원인 전쟁을 막는데 앞장서야 한다. 그래야 지극히 작은 자들이 곤경에 처하는 것을 미리 막을 수 있다. 종교가 병주고 약주는 일에 앞장서서는 안 된다. 한국 기독교회는 이제 근본적으로 그 틀을 바꾸어야 한다. 사회봉사에 앞장서고 조국통일에 앞장서며 사회의 민주화와 자주화를 위하여 앞장서야 한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주된 종교활동이 되어야 기독교도 민중의 사랑을 받는 교회가 될 것이며 기독교 자체도 다시 부활할 것이다.

나는 지금도 매주 일요일 나성제일유니테리안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서 교인들과 함께 암송하던 [신앙고백]을 외우곤 한다.

우리는 항상 깨어 바른 통찰과 올바른 역사인식과
창조적 정신으로 이웃과 인류에 봉사하며
사랑과 화해와 정의가 곳곳에 넘치도록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할 것이다.

우리 교회는 사랑이 교리이며
진리탐구가 성만찬이며
봉사가 기도이다.
우리는 함께 평화스럽게 살며
자유스럽게 지식을 찾고
공동으로 인류에게 봉사할 것을 서로 언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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