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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획]터키의 발자취와 그 미래를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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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9-03-30 01:46 조회2,5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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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재미동포 통일운동 원로이며 은퇴 목사)는 터키(오스만 제국의 후예)의 역사적 발자취를 고찰하면서
터키 공화국 건설 이후 최근까지 친미지향적 정권들이 득세하였으나 터키 국민들의 대다수(83%)가 특히 이라크 전 이후
<미국증오>현상으로 나타나 그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가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민족통신》에
보낸 "<연재기획>터키의 발자취와 그 미래를 전망한다는 글을 전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기획]터키의 발자취와 그 미래를 전망한다



*글:유태영 박사(은퇴 목사, 재미동포통일운동 원로)


오스만제국의 후예들 미국의 군사지원으로 이루어진 터키
터키와 미국의 동상이몽을 넘어 반미감정으로 약진


<##IMAGE##> 터키는 트로이 목마를 비롯하여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아르테미스 신전, 노아의 방주가 묻혔다고 하는 아라랏산 등 신화와 고대 종교적 유적들이 풍부한 나라이다. 그리고 인류문화의 발상지인 티그리스 유푸라테스 강의 발원지가 바로 터키에 있으며 인류의 최초의 거주집단으로 추정되는 히타이트를 비롯하여 우라르트 , 이오니아, 리시아등이 고대 터키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고대의 그리스가 터키를 지배했고 BC 550-330년에 페르시아가 터키를 지배 했으며 그후 로마, 비잔틴 그리고 오스만 제국이 터키를 지배 했다. 비잔틴 제국이 터키를 1,100년 동안 지배하면서 남긴 문화적 유산들 그리고 막강한 세력을 떨쳤던 오스만 제국의 500년 동안 통치한 역사적 화려한 유적들로 인하여 오늘 터키에는 <인류문명의 박물관, 보물창고> 라고 말할 수 있는 다채로운 보물들이 가득 차 있다.

풍요로운 문화적 유산뿐만 아니라 터키는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을 갖고 있는 나라이다. 에게 해, 지중해, 흑해 등 아름다운 바다를 비롯하여 울창한 산림지대와 호수들은 물론 온화한 기후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유명한 문화관광지로도 손색이 없는 나라이다.

터키의 주요 인구는 투르크족 7천만을 포함한 터키인이 88%를 차지하고 있으며 분쟁이 되고 있는 쿠르드족이 10% 이고 아랍인들이 1.5%정도 있다. 인구 총수는 7천 3백만으로 세계 17위 이며 면적은 세계 37위이다.

터키가 유럽나라 인가, 아시아나라 인가에 대하여 확실한 대답을 하기에 매우 애매하다. 터키의 국토는 아시아와 유럽이 서로 맞붙어 있다. 국토의 서북쪽은 러시아등 유럽국가들과 접경하고 있기 때문에 단연 유럽나라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터키는 반면 동남쪽으로 광대한 영토와 대다수의 인구가 동남쪽에 집결 되여 있으며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도 아시아 쪽에 있다. 터키의 최대의 도시인 이스탄블이 본래 유럽쪽에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신도시가 크게 발달되여서 도시 자체가 유럽과 아시아에 모두 걸처 있다.

터키가 유럽국가도 못 되고 아시아국가도 못 된다면 그 이유는무엇 때문인가?
유럽은 기독교 문명을 대표하는 흐름이 있고 터키는 이스람을 상징하는 대표적 국가이다. 두 문화권이 호의적으로 상봉하는 역사적 만남이 이루워지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터키쪽이다. 그래서 터키는 1923년에 독립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유럽공동체(EU)의 회원국이 되려고 무척 노력을 하면서 애쓰고 있다.

터키가 너무 성급하게 유럽식으로 변화하여 터키의 고유한 정체성을 손상시키는 것 아닌가 하고 자아비판의 소리가 크게 들려 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키 독립의 주도권을 과도하게 내세우고 있는 친서방주의적인 군부의 <케말주의>적 정치세력들은 터키가 유럽공동체(EU)에 가입하는 것과 친서방 노선을 선택하는 길 만이 오직 현대적 터키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다.
이와는 정반대로 유럽쪽의 반응은 어떠한가? 유럽의 반응은 터키가 단독으로 머리를 숙이고 유럽공동체(EU)의 회원이 되는 것을 반대하고 받이 들이지 않고 있다. 유럽이 바라고 원하는 것은 터키가 단독으로 유럽공동체(EU)에 가입하는 것 보다는 이슬람권 전체가 머리 숙이고 유럽의 기독교 문명권에 편입되는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터키의군부 세력은 기독교 문명권과 이슬람 문명권과의 결혼을 갈망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쪽에서는 타키의 EU 가입 갈망에 대하여 턱 없는 불가능한 <짝사랑> 정도로 여기고 있다. 유럽은 이슬람 문하권에 속해 있는 터키를 EU의 한가족 식구로 받아들일 만한 마음의 여유가 근본적으로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EU는 터키의 EU 회원가입 요청에 대하여 수십년동안 공염불의 논의만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면 미국은 터키에 대하여 어떠한가?

미국은 터키의 유럽공동체(EU)가입 문제에 대하여 <이중자대> 로 저울질 하고 있다. 미국의 관심은 터키를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터키를 북대성조약기구(NATO)의 회원국 으로 서둘러 1952년에 가입시켰다.

미국은 소련의 세력이 남하 하는것을 막는데 있어서 터키의 위치와 역할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터키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회원국으로 환영하여 가입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아낌 없이 군사원조와 경제적 지원을 지속하고 있는 형편이다. 미국은 1953년에 터키를 유럽경제협력기구 OEEC> 및 <유럽 의회> 에 가입시켰다. 1963년에 미국은 또 다시 터키를 <유럽 공동시장> 의 준회원국으로 가입시켰다.

미국은 중앙 아시아 지역에서 터키를 장악하는것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은 군사적 목적으로 터키를 유럽의 <군사경제공동체>의 회원국으로 가입시켜 놓고 미국 마음대로 터키의 군사정권을 지시하고 또 필요시에는 압력도 거침없이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1923년에 독립한 터키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독재적 군정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 언론을 통하여 줄곳 들려 오고 있는 보도들은 500년의 찬란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옛 오스만제국의 유산이 오늘의 유럽 나라들을 날마다 불안속에서 떨게 만들고 있다.

1923년에 터키는 <케말 파샤> 의 주도하에 급진적 친서방 국가로 독립을 했다. 독립 이후 터키에는 11명의 대통령들이 등장했고 3번의 쿠테타로 우익 친미군정이 부상했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군부가 여전히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미국이 뒤에서 막강한 힘으로 지원해 주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터키의 집권수반들이 여러차레 교체 되었지만 친미군부의 수뇌부가 완전히 탈바꿈 한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줄기찬 민중의 항쟁은 친미 군사정권의 독주를 마냥 방치하지는 않았다. 터키는 전통적인 이슬람교의 나라이다. 터키의 민중들은 군부의 친서방 정권을 <가출한 탕자>로 여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아랍권에서는 터키의 군부 수뇌부를 미국의 원조를 집어 삼키면서 살찌고 있는 <얄미운 고양이>로 보고 있으며 또는 <더러운 박쥐> 로 여기고 있다.

터키인 83%가 <미국증오>여론으로 반영

2008년 초에 실시한 터키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터키인 83%가 <미국 증오> 로 나타나 세계최고의 반미국가로 나타났다. 8년 전의 조사보다 터키인들의 반미정서가 20% 증가하고 있다. 터키인들의 반미정서의 원인은 첫째가 이라크전이며, 둘째는 이슬람 종교에대한 문화적 침해이고, 세번째는 미국인들의 오만과 위선이라고 지적 했다.

1. 터키의 고대 역사 개관


터키의 고대역사는 BC 6000 으로 거슬러 올라가 세계에서 가장 오랜 농경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 트로이 문명 제1기에 해당하는 BC 3500-2000 년경에 청동기와 철기 문화가 형성 되었다. BC 1200 년에 난공불락의 드로이가 그리스에 의하여 멸망되었고 BC 546년에 그리스는 페르샤에 의하여 패망 했다.

그리스의 패망으로 인하여 그리스 식민도시들과 소아시아 전역이 곧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들어 갔다.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하에 들어간 소아시아는 3,4개의 여러개의 소왕국으로 분리되였다. 그때 몽골족과 중국의 한족이 이곳에서 소왕국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과 이 모든 소왕국들은 BC 2-1 세기에 이르러 로마제국에 의하여 완전히 멸망되었다. 로마제국은 그후 300년 동안 유럽, 소아시아 그리고 중동의 모든 지역을 지배하는 <로마전성시대> 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런데 이 막강한 로마제국에 신흥종교 기독교가 침투해 들어 왔다. 로마 네로 황제는 기독교에 대한 무서운 박해를 강화하여 기독교인을 무자비하게 살해 했다. 하지만 콘스탄틴황제는 310년에 기독교를 자유화하여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선포 했다. 뿐만 아니라 로마 황제 자신이 기도교로 개종을 했다.

로마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식 선포한 근본 동기와 이유는 무엇 이었을까?

그것은 대세에 몰린 위태로운 상황을 해소시키고 정권을 유지하기위한 기만적술책이며 임시변통의 위선적 종교적 행위이었다.

이것은 마치 오늘 날 남한 정부가 이명박을 장로 대통령이라고 내 세우면서 기독교의 배
경을 정치력으로 삼고 있는 양상과도 흡사한 것 같다. 이것은 옛날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기독교의 자유화를 선포하고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로마제국은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은 후에 기독교화하여 기독교국이된 로마제국이 359년에 둘로 갈라지고 말았다. 로마제국은 둘로 분열되여 하나는 <서로마제국>과 또 다른 하나는 <동로마제국>으로 분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계에도 나났다. 서로마제국에 있는 기존의 교황 중심의 교회가 분열되어 떨어져 또 다른 교회가 생겼다. 그것이 희합계 교회였다. 교회가 이렇게 둘로 갈라지기는 했지만 두 교회는 모두 다 <교황>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왜 그런가?

그것은 기독교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천국의 열쇠> 를 사도 베드로에게 직접 의탁했으며 베드로는 예수로 부터 의탁 받은 천국의 열쇠를 상징하는 <사도 베드로 교회>를 로마에 세웠다. 그럼으로 로마 교황은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의 절대적 대표자로 <예수의 대행자> 라는 권위를 보유했다. <성경 마태복음 16장16-19절 참조>

둘로 가라진 동서 교회는 서로 다른 사고방식속에서 교리와 정책문제로 인하여 수 백년 동안 대립하여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교회는 절대로 <로마교회와 교황>을 떠날 수 없다. 이것은 성경의 원리이며 명령으로 해석되고 있다.

<서로마제국>은 카톨릭 교회를 국교로 삼고 지금의 이타리아 로마를 수도로 삼았다. <동로마제국> 은 <비잔틴 정교회> 를 국교로 삼고 옛 날에 그리스 정복시대의 수도이었던 비잔티음을 콘스틴티노폴리스 라고 개명하고 그곳을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그래서 교회의 명칭을 <로마천주교회> 그리고 <동방희랍정교회> 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2.비잔틴 제국의 흥망성쇠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게르만족의 침략을 받고 패망 했다. 게르만족은 막강한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여 동로마제국이 떨어져 나감으로 인하여 국력이 쇠약한 기회를 이용하여 재빠르게 서로마제국을 침공했던 것이다.

한때 <팍스 로마나 Pax Romana> 를 구가했던 로마제국의 당당한 300년의 역사의
화려한 위세는 간곳 없고 약화된 모습으로 전락 했다. 위세가 당당하던 로마 황제는
페위를 당하고 별수 없이 로마 교황청의 밑으로 떨어져거 교황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그래서 교황은 로마 정권에 대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로마황제는 교황의 인준을 받아야만 집권할 수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교황이 직접
로마황제를 임명하기도 했다. 만일 황제가 교황에게 불손하게 행동을 하면 교황은 황제를 해임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동로마제국은 어떠 했는가?


동로마제국은 <비잔틴제국> 이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비잔틴 제국은 서로마제국이 망한 후에도 1,100년 동안 끄떡 없이 1453년까지 지속 했다. 비잔틴 제국은 로마와 정반대로 오히려 세속의 황제가 교회를 다스렸다.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비잔틴 교회의 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제도상 가지도록 했다.

비잔틴 제국은 본래 로마문화를 간직하고 운영되었다. 하지만 분열된후 세월이 흐름에 따
라 자연히 로마문화를 단절하고 점차적으로 그리스 문화를 정착화 했고 그 후에는 완전히
비잔틴 제국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 나아갔다.

비잔틴 제국은 과도기를 지나 헬라클리우스 황제<610-640>시대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에 돌입하고 있었다. 12세기까지 광범위한 정복과 막강한 세력으로 중세기의 국제적 정치무대를 거의 독차지하고 있었다. 비잔틴 제국은 지중해를 중심하여 경제대국이 되였고 종교, 학문, 예술과 건축에 있어서 비잔틴 고유의 전통을 세워 문화의 종주국이 된 적도 있었다.

비잔틴 제국은 슬라브, 아랍, 셈, 투르크 그리고 중국과 접촉하여 포용했으며 야만족도
세레만 인정하면 무조건 개방하여 유동성을 넓혀 거대한 제국이 되고 있었다. 비잔틴 제국은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동의 모든 나라들 그리고 이집트를 포함한 북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정치와 경제적인 주도권을 장악하고 종교와 문화에 있어서 종주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잔틴 제국의 과도한 정복과 지나친 영역이 오히려 비잔틴 제국에게
새로운 문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거대한 정복자는 마치 거대한 공용처럼 팽창한 정치적 구조와 광대한 인력 관리 및 국제적 교역의 혼잡한 관계들을 슬기롭게 풀어 나가 는데 있어서 무능함과 한계점에 봉착하게 되었다.

거대한 비잔틴 제국은 1,100년 동안 번영을 누려 왔지만 점차로 흥망성쇠의 어두은 그림자를 피할 수 없어 속수무책으로 패망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홍망성쇠 명암의 발자취를 사건 별로 몇 가지 살펴 본다.

ㄱ.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영구적 분리


로마 교황 레오 1세<440-461> 는 예수의 <단성론>에 대하여 절대로 반대하여 예수의 <신인겸존론> 을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 교리로 확정했다. 451년에 <칼체톤공의회>
에서 교황 레오 1세의 주장을 지지하여 캐톨릭 교회의 교리로 공식화 했다.

하지만 비잔틴 동방교회에서는 <단성론> 을 주장하면서 로마 교회의 <신인겸존론>을
적극 반대했다. 비잔틴 교회는 <칼체톤공의회>가 공식화한 교리를 수용할 수 없다고 반박 했다. 로마교회와 비잔틴 교회는 이 교리문제로 인하여 수 백년동안 논쟁을 하면서 대립되여 오다가 1054년에 결국 두 교회는 영구적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교황은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하늘의 열쇠> 를 상속 받은 절대 불변의 대리자라고 신성시 하고 있었는데 그 신성한 교회가 동서로 영구적으로 분리 되자 그동안의 주장은 허황된 소리로 변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동안 몇 백년 동안 동서의 두 교회가 싸운것은 교리를 빙자한 정치와 경제적인 이익과 세력다툼이라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재현되고 있다. 반공과 친미를 주장하기 위하여 교리를 내세워 정당화 하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우리 주변에는 그러한 교회들이 여전히 허구적 교리를 설교하며 반민족 논리를 펼치고 있다는 것은 만인이 주지하고 있는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

ㄴ.포시우스 총대주교와 <성화상> 론쟁.


포시우스 <810-895> 는 비잔틴 대학의 철학 교수이다. 그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화상 순경>이 한창 성행하고 있었다. 예수와 마리아의 성화나 조각품에대한 숭배행위를 로마 카톨릭 교회에는 교리적으로 고무찬양 하면서 정당화 했다.

이른바 <포시우스 사건>에서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교회의 <총대 주교> 로 평신도인 포시
우스 교수를 임명하여 로마 교황의 인준을 요구했다. 로마 교황은 <평신도는 안된다>
라고 강경한 입장에서 인준을 거부 했다. 물론 포시우스 교수는 교황의 <성화상> 숭배
주장을 반대 했다. 평신도 교주 임명 문제를 놓고 로마 교회와 비잔틴 교회는 몇 백년 동안 교리싸 움을 또 다시 되풀이 했다.

882년에 이르러 서로마 교황 요한 2세는 포시우스 교수의 평신도 <총대주교> 직위에 대한 임명을 결국 승락했다. 하지만 포시우스 교수의 임명으로 인하여 두 교회의 싸움이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고 게속 대립 하다까 1052년에 영구적으로 분리 되었다.

ㄷ.비잔틴의 정치와 사회 문제


비잔틴의 정치와 사회의 문화는 어떠 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왕중의 왕> 이라고
대답하면 적합하다. 비잔틴 황제는 주변국들의 왕과 교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을 다
총괄하고 지배하는 절대 군주이었다. 비잔틴 황제는 <신정일치> 의 절대군주이었다.
비잔틴의 정치사회 질서는 황제와 귀족, 교회와 무장한 군인, 그리고 유산계급들로 이루워진 <황제교황주의>적 제국주의 국가 권력의 사회이었다.

비잔틴 교회는 러시아 정교회를 비롯하여 세르비아 정교회, 루마니아 정교회, 아프리카 정교회를 각 나라와 각 지역에 <그리스 동방정교회> 계열의 교회들을 많히 세웠다. 비잔틴은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음으로 서유럽, 동유럽, 중앙 아시아, 중동, 그리스와 이슬람 나라들과 사통오달 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었다.

비잔틴의 화려한 문화는 미술이나 건축에서 우수성을 과시하고 있으며 모자이크와 건
물의 둥근 탑으로 특이하다. 그리스적 고전과 동양적인 것과 시리아와 아프리카적 토착 문화들의 융합을 이루고 있다. 러시아의 이반 3세는 러시아 문화는 비잔틴 문화의 후계
자라고 하면서 모스크바는 제2의 비잔틴이라고 주장 했다.

ㄹ.비잔틴의 몰락.


인류의 홍망성쇠는 필연적인가 보다. 하지만 그 필연속에는 반드시 망할 수 밖에 없는
숨어 있는 비참하고 비극적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독일이 망한것은 히틀러의 유대인 600만 학살 때문이라고 한다. 몽고의 폭군은 1인이 50명
을 죽이는 행사를 벌여 놓고 감상하면서 즐겼다고 한다. 스페인은 인디오 180만 명을 죽이
고 남미를 점령했다고 한다. 대영제국은 수 백만 흑인들을 노예로 팔아 먹어 부강한 나라를 과시하고 있었다. 징기스칸은 아프리카에서 6개월 동안에 1,600만 명을 살해했다.
미국은 건국 이후 수 없이 많은 전쟁을 일으켜 최소 1,000 만명 이상의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강대국을 망하게 한 그리고 망할 수 밖에 없는 원인들로 분석되고 있다.

그러면 비잔틴 동방정교회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비잔틴 제국은 어떠 했을까?
1,100년 집권 기간 동안에 89명 황제들이 집권을 했는데 비잔틴 제국은 <정교일치>로 유명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나라 이었다.

매우 특이한 <예> 하나를 들어 비잔틴 제국의 역사적 비사를 알아 본다. 89명의 황제들 중에서 바실리우스 2세 황제<976-1025>는 정말로 독특한 최악의 기록을 남겨 놓았다.

바실리우스 황제는 불가리아에서 15,000며의 포로를 붙잡아 왔다. 그런데 이 황제는 아주 악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데 150명의 노예들의 한쪽 눈알을 빼내여 반소경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어지 1,4850 명의 포로들의 양눈을 전부 다 못보게 만들어 완전한 소경들을 만들어 놓고 1명이 99명의 장님들을 인솔하고 관리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불가리아 왕이 비잔틴을 방문했을 때 공격을 받아 사망 했다.

비잔틴의 89명의 황제들 가운데 설량하고 종교적인 황제도 있었으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옛 역사의 비사들을 접하게 될때 오늘 미국의 진실한 기독교인 대통령들이 저지르고 있는 악행들과 비교하면서 인류 역사의 허무함을 새삼 다시 느끼게 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09년 3월 23일 현재 이라크 전쟁발생 이후 이라크 양민 사망자 수는
1,320,110 명이다. 미국인 사망자는 군민 모두 합하여 7,100 명이다. 그리고 죽음은 겨우 면했지만 부상자는 31,089 명으로 나타났다. 이라크인 부상자들의 수는 알 수 없다.

터키의 비잔틴 기독교 왕국의 어제의 비극적 사건들을 고찰하면서, 오늘의 기독교 왕국이라고 자처하는 미국의 악행들을 우리는 모르는척 할 수는 없다.

중세기에 로마 교황청에서 발원한 십자군이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틴노플스를 침공하여 점령하고 그곳에 라틴계 십자군 나라를 건설 했다. 정세가 급속도로 기울어지기 시작한 비잔틴 제국은 1453년에 오스만의 메메드 2세에게 완전히 항복하여 비잔틴 제국은 1,100년의 마지막 막을 드디어 내렸다.


3.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숨쉬고 있는 오스만, 지금은 어디에?


비잔틴 제국을 붕괴시킨 오스만은 어떤 나라인가?

오스만 제국의 창건은 1299년에 유목민의 부족장 오스만 1세가 소아시아의 아나톨라 서북부에서 여러 소왕국들의 세력를 규합하고 확립하여 왕위에오른 것으로 전해 지고 있다. 이 시기에 아시아에서 이동해 온 몽고족과 중국의 한족도 섞여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스만 1세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 오르한이 집권하면서 비잔틴 제국과 잦은 접촉을 하면서 비잔틴 제국의 영토 일부를 침략하고 오스만의 세 력을 키워 나아갔다. 1389년에 오스만은 보병군을 창건하여 코소보 전투에서 승리 하였으며 또 세르비아 왕국을 물리치고 위세를 과시 했다. 1396년에 오스만은 불가리아와 헝가리를 필두로 하여 십자군과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다. 1441년에 오스만 메메드 1세는 오스만의 강력한 제국의 대군으로 창건하여 최강의 군사력을 확보 했다.

1453년에 오스만 제국의 황재 메메드 2세는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틴노플리스를 침공하여 점령하는데 성공 했다. 비잔틴 제국은 허무하게 오스만에게 패전하여 1,100년의 찬란한 기독교의 영화를 마감하고 비운에 쓰러졌다.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틴노포리스> 기독교 도성의 명칭을 개명하여 이스람을 상징하는 <이스탐블>로 개칭하고 오스만의 수도로 삼았다.

역사는 이렇게 급변하여 오스만 제국의 군사력은 발칸반도와 아나톨라의 모든 땅을 거의 다 평정하고, 흑해와 에게 해의 섬들까지 모두 다 점령하여 오스만의 바다를 만들었다. 1512년에 맘투크 완조를 멸망시키고 이슬람의 제 2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의 보호권을 탈취하여 이스람 세계의 맹주로 군림하게 되었다.

1520년대에 들어 서서 오스만 제국의 제 10대 군주인 쉴레이만 1세의 치세하에서 모하치 전투에 승리하여 헝가리를 점령하고, 동쪽으로 사파비 왕조를 공격하여 바그다드를 손에 넣었으며 남쪽으로 아덴을 정복했다.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비잔틴의 영향하에 있던 모든 지역들을 이슬람권으로 전향시키는 이변을 일으켰다.

오스만 제국은 서유럽 내부까지 깊숙히 침투하여 기독교국들을 불안하게 했으며 스페인을 위시한 기독교의 연합함대를 격파하여 지중해 전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1573년에는 오스만 함대는 사이프러스 섬을 점령하고 다음 해에는 튀니스를 점령 했다.

1853년 러시아와 오스만 사이에 전쟁이 일어 났다. 그런데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오스만에게 가담하여 일시 오스만이 승리를 하게 했다. 영국의 계산은 오스만에게 접근하여 호감을 사서 오스만을 서방으로 개방하도록 유인을 하는데 숨은 목적이 있었다.

오스만은 영국의 꾀에 넘어 갔다. 오스만은 영국의 압력에 못이겨 서방식 개혁을 향한 초보적 약속을 했다. 하지만 이 초보적 약속은 오스만이 완전히 영국에게 붙잡히는 조건들이 포함되여 있었다. 그 조건들은 다음과 같다.

ㄱ. 오스만 내에서 비이슬람의 권리를 인정한다. ㄴ. 무슬림 종교법과 서양 근대 법과 절충하여 개정한다. ㄷ. 근대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세운다. ㄹ. 토지 사유 제도를 인정 한다.

영국은 이와 같은 요구 조건들을 시행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차관으로 제공했다.오스만은 1878년에 러시아와 두번째 전쟁을 하여 이번이는 러시아에게 패전을 했다. 패전으로 인하여 오스만의 위세는 절반 이하로 추락했고 영국의 압력과 간섭과 차관 제공 등으로 인하여 모르는 사이에 오스만은 벌서 영국의 반식민지로 추락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만은 독일편으로 동맹에 가입을 했다가 또 다시 패전국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오스만이 패전국으로 전락하는것을 보고 예속되여 있던 모든 나라들이 오스만으로 부터 독립하여 떨어져 나갔다.

오스만의 국가 형태는 1941년 이래 현재의 < 터키 공화국> 의 형태로 고정 지워졌다. 그 광활한 3개 대륙에서 소유했던 땅과 바다의섬들을 모두 다 상실 했다.오스만 정세가 이와같이 급변하게 되자 친서방적 오스만 군부는 무혈 쿠테타를 일으켜 황제의 왕위를 페위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메지드 2세는 1924년에 프랑스로 망명하였다가 그곳에서 사망 했다.

4. 친서방 군부와 대결하는 이슬람 민족주의


오스만 제국은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었다. 패전한 오스만은 1920년에 연합군과 <세브르 조약>을 맺고 그동안 오스만이 침략으로 획득한 모든 영토를 활양하여 오스만 제국은 사실상 해체되는 운명에 처했다. 1923년에 오스만 정권은 연합군과 <로잔 조약>을 맺고 오늘의 <터키공화국>이된 땅을 확정 받았다.

1923년 10월에 오스만 제국은 공식으로 해체되고 케말 파샤를 신설된 터키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 했다. 1924년에 케말 대통령은 터키의 수도를 <앙카라> 로 정하여 과거 비잔틴과 오스만에 대한 향수를 깨끋히 청산하고 새로운 터키공화국을 건설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도록 했다.

케말 대통령은 터키 공화국을 현대적으로 건설한 <건국의 아버지> 로 추앙을 받고 있다. 그는 1923년 부터 1938년 까지 15년 동안 집권했는데 15년 동안에 오스만 600년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깨끗이 지워 버리고 새로운 개혁을 주장 했다.

그 개혁은 7가지로 요약된다.

ㄱ. 어려운 아랍문자를 페지하고 로마문자를 도입하여 터키 알파벳을 만들고 숫 자도 라틴숫자를 도입 했다. ㄴ. 이전까지 터키인은 <성씨> 가 없었는데 모든사람들이 각자가 다 자기의 성씨를 가지도록 했다. ㄷ. 일부다처제를 법으로 페지하여 여성에게도 이혼의 권리를 부여 했다. ㄹ. 종교법을 개정하여 국교재도를 페지하고 모든 종교의 자유를 선포 했다. ㅁ. 전국에 도로망을 새로 건설 했다. ㅂ. 달역을 양역으로 통일하여 현대화를 강조 했다. ㅅ. 미터법을 사용하도록 법으로 정했다. ㅇ. 여성의 참정권 허용하고 여성들에게 강제적으로 머리에 스카프를 쓰도록 하는 제도를 페지했다.

하지만 케말 대통령의 혁신적 사회개혁에 대하여 찬반으로 엇갈리고 있었다.

페쇠된 사회를 개방하여 개인의 자유를 허용한 것과 낡은 문화의 옷을 새로운 문화의 옷으로 갈 아 입게한 것은 케말 대통령의 공적으로 치하한다. 케말 대통령의 혁신적이고 <통이큰 개혁> 으로 인하여 터키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다른 한편 케말 대통령의 개혁의 시행차고에 대하여 역사적인 긴 안목으로 볼때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케말 대통령의 개혁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다음과 같다.

ㄱ. 케말 대통령의 개혁은 터키를 서구문화에 종속된 나라로 만들여는가 하는 의구심을 일으 킨다. ㄴ. 케말 대통령의 개혁은 <민족주의 사상> 에 바탕을 두지않고 무조건 서구문명을 따르는데 너무 성급하게 추진하여 부작용을 일으켰다. ㄷ. 사회개혁 운동은 사회의 기반이며 기본인 민중과 함께, 민중을 위하여, 민중에 의하여서만 반드시 추진되고 진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케말 대통령의 개혁운동은 오직 군부와 사회 엘리트들만 중심하여 취진함으로 민중은 오히려 개혁으로 인하여 소외가 되는 결과가 됬다. ㄹ. 개혁으로 인한 헤택은 친미적 군부를 더욱 튼튼하게 해 주었으며 또한 기득권자들에게 더 큰 이득을 안겨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ㅁ. 서구문명화를 목표로한 무방비적 개혁운동은 서구세력이 마음 놓고 침입 해 들어 오도록 하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ㅂ. 군부가 민중을 마구 무시하고 깔보면서 열성적으로 개혁을 지지하고 앞장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미국 이 의도하고 있는 각본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은 터키의 군대에게 터키의 주권을 사실상 의탁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케말 대통령이 1938년에 사망한 후에 터키는 오늘에 이르기 까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터키의 군부는 시종 친서방 친미주의 노선에 굳게 서서 민중을 위 한 참된 민주화 정권이 들어서기만 하면 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하던가 아니면 직접 군부의 쿠테타를 일으켜서 민주화정권을 퇴진시키고 군부가 주동하는 정권을 계속하여 세우고 있다.

한 <예> 를 들어 오늘의 터키군부의 행태를 알아보자. 2007년 8월 28일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는 대통령 후보자 압둘라 굴이 3차 투표에서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다. 터키 민중은 오래 전부터 친미적 군부정권을 적대시 하고 있다.

그런데 민선 대통령인 압둘라 굴 대통령의 취임식을 거행하는 날 터키 군부는 취임식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보이코트를 하고 불참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터키는 정부가 군부을 지휘하는 나라가 아니라 군부가 정부를 지휘하고 있는 나라라는 것을 잘 보여 주었다. 군부의 막가판식 행패에 대하여 정부는 속수무책이다.압둘라 굴 대통령은 제11대 대통령이며 그동안 4번이나 찬미 군부 쿠테타가 일 어 났다.

하지만 최근 미국과 터키 군부는 미묘한 불협화음의 소리가 들려 오고 있다. 터키 군부는 터키와 이라크 국경 사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쿠르드족>을 공격하여 멸망시킬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터키군은 1만명 구인을 동원하여쿠르드를 공격 했다.

터키 군부는 미국의 요청에 의하여 85억 달러를 받고 터키군 1만명을 용병으로 이라크에 파병할것을 결정하고 공식 발표까지 했다. 하지만 민중의 거센 반대에 부딪쳐서 다음날 전격 취소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지금 이라크의 모순에 빠져서 탈출구를 찾고 있는데, 미국은 이리크를 3 등분하여 <수니파>, <시아파>, 그리고 <쿠르드>족의 분리독립을 추진하면서 종전을 계획하고 있다. 이것이 미국이 이라크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최선의 계획이다.

이와 같은 미국의 계획은 1만명 군인을 파병하여 미국을 지원을 해 주기로 약속까지 했던 터키 군부와 상당한 마찰이 될 것으로 에상된다. 미국은 터키를 아주 귀중한 동맹국으 로 여겨 왔는데 이제 와서 쿠르드족 처리문제로 인하여 터키와 불편한 관계에 있어 상황은 정면 충돌을 할 가능서도 보이고 있다.

터키에서 민중의 항쟁이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었지만 미국이 지원하는 군부로 인하여 오래 동안 민중은 수난을 당하고 있다. 2007년 8월에 친이슬람 성향의 대통령이 취임한데 대하여 군부는 대통령 취임식 참가를 거부 할 뿐만 아니라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다. 하지만 군부가 친이슬람 대통령의 등장을 막지를 못하고 친이슬람계의 대통령이 취임을 한 것은 터키 건국후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현재 터키 군부의 지도자인 부유카니트 참모총장은 압둘라 굴 대통령의 취임에 대하여 이렇게 말 했다.

<국가의 체제를 좀먹으려는 ‘악의 중심’이 등장했다>.


하지만 미국을 포함한 서방 언론들은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깉이 논평을 하고 있다.
<압둘라 대통령을 지지하는 민중의 힘과 그의 탁월한 경제발전 정책에 대한 국민의 지원이 강하게 있는 만큼 군부가 아무리 방해를 해도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기에는 이제는 쉽지 않아 보인다.>

오늘 터키는 빈부의 격차가 날이 갈 수록 더욱 더 심해지고 있으며 소시민들은 큰 빚더미 속에 살아가고 있다. 지속적으로 터키에 침투하는 외국자본은 터키의 미래를 더욱 더 위기로 몰아 넣고 있다.

포춘에서 세계 700대 부호인 명단을 발표 했는데 남한은 단 4 명만이 포함 되었지 만 터키는 20명이 넘는 부호가 포함되여 있다. 돈 없는 서민은 꼼짝 없이 죽어가는 터키에서 세계적 부호는 20명이 넘는다.

터키의 사회구조 속에서 <경제정의>란 말 자체를 듣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키 군부 세력는 이미 한물간 미국식 신자유주의 전도사를 자임하고 있다. 그렇지만 터키의 진보성향의 정당과 정치적 세력들의 출현은 이제는 부인할 수 없는 그 어느 때 보다 두드러져 나타나고 있으면 이런 현상은 세계적 관심으로 떠 오르고 있다. 암둘라 굴 대통령의 선전과 승리가 예상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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