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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인도 역사의 발자취와 강대국들의 분열정복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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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9-03-14 00:56 조회2,7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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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재미동포통일운동 원로, 은퇴목사)는 "나는 인구 11억을 자랑하는 인도에 대해 고찰하는
과정에서도 이 나라가 제국주의에 의해 2백동안이나 시달려 왔고, 하나의 나라였던 파키스탄과 수백년 동안
공존하여 왔으나 <분열이간시켜 정복지배>에 의한 조작정치로 두나라로 갈라놓고 그것을 이용하고 악용하여 온
강대국들의 횔포가 이제는 인도민중들에 의해 강하게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밝혔다. 그는 이번에는
<인도>에 대해 연구한 내용을 요악하여 소개하는 글을 특별 연재기획으로 다뤘다.[민족통신 편집실]



[연재기획]



인도 역사의 발자취와 강대국들의 분열정복 정책



영국의 침략으로 서방에 문연 어제의 인도와
핵보유국 오늘의 인도
타골과 간디의 고귀한 영혼을 더럽히는 미국


*글:유태영 박사(재미동포통일운동 원로,은퇴목사)

<##IMAGE##> 나는 인구 11억을 자랑하는 인도에 대해 고찰하는 과정에서도 이 나라가 제국주의에 의해 2백동안이나 시달려 왔고, 하나의 나라였던 파키스탄과 수백년 동안 공존하여 왔으나 <분열이간시켜 정복지배>에 의한 조작정치로 두나라로 갈라놓고 그것을 이용하고 악용하여 온 강대국들의 횔포가 이제는 인도민중들에 의해 강하게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번에는 <인도>에 대해 연구한 내용을 요악하여 소개한다.

오늘 우리가 인도를 생각하고 인도에 대하여 말을 하려고 한다면 인도의 시성 타골과 인도의 양심 간디를 먼저 생각하고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1919년에 일어 난 3.1 운동과 1920년대에 일제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조선반도 코리아를 위로하 고 격려하기 위하여 메시지를 작시한 타골의 시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바 있다. 그의 격려의 시 전문을 소개한다.

《...일찌기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이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 너는 동방의 밝은 빛 되리라, 마음에 두려움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인 곳, 지식은 자유롭고 좁다란 장벽으로 세계가 조각, 조각 갈라지지 않은 곳, 지성의 맑은 흐름이, 굳어진 습관의 모래벌판에 길잃지 않은 곳, 무한히 퍼져 나가는 생각과 행동으로, 우리들의 마음이 인도되는 곳, 그러한 자유의 천국으로, 나의 마음의 천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 》

위의 타골의 시를 읽고 코리아의 <보리 피리>의 시인 한용운은 다음과 같이 응답 했다.
《...벗이여, 나의 벗이여, 예언의 무덤위에 피어 있는, 꽃처럼 나를 울리는 벗이 여, 작은 새의 자취도 없는 사막의 밤에 문득 빛난 님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벗이여, 그대는 옛무덤 깨치고 하늘까지 사무치는 배골의 향기 입니다. 벗이여 개어진 사랑에 우는 벗이여, 눈물이 능히 떨어진 꽃을 옛가지에 도로 피게할 수 는 없습니다, 눈물을 떨어진 꽃에 뿌리지 말고 꽃나무밑의 티끌에 뿌리셔요, 벗이여, 나의 벗이여, 죽음의 향기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 백골의 입술에 입맟출 수는 없습니다. 》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여 조선반도에서1919년 3.1독립운동이 터져 나온것 처럼 인도에서도 1919년 그 해에 영국의 침략에 항거하여 간디의 무저항 독립운동이 일어 났다. 간디로 부터 시작된 인도의 독립운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되여 드디어 1947년에 인도는 독립을 쟁취 했다.

간디는 누구인가? 간디와 네루는 어떤 관계인가?

마하트마 간디는 1869년에 태어나 18세때 영국에 유학하여 변호사가 되었고 1891 년에 인도에 귀국하여 변호사로 활동을 하면서 민중을 돌보아 주는 일을 했다.

간디는 아프리카에 끌려간 7만여명의 인도인들이 백인의 노예로 비참하게 학대를 당한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간디는 그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아프리카로 갔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7년동안 봉사를 했는데 아프리카 활동이 간디의 생애에 있어서 삶의 의미와 목적에 큰 전환점이 되였다.

간디는 진리를 구현하는 실천적 삶을 통하여 민족과 민중을 위한 희생적 봉사를 전개했으며 인종차별과 약자를 압박하는 모든 악에 항거하는 투쟁을 계속 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불살생 ahimsa 아힘사운동> 을 전개하여 인도 민중의 정신적개조 운동을 선도했다. 그의 운동에 참가한 인도인 4000명이 아프리카 당국에 의하여 체포되었으며 간디도 아프리카에서 감옥살이를 했다. 하지만 간디의 운동은 마침내 승리하여 아프리카에서 아시아인 에대한 국제법이 제정되었고, 그 때문에 인도인들이 차별대우를 받지 않게 되었다.

1915년 인도로 귀국한 간디는 1919년에 <인도국민회의> 를 창설하고 지도하면서 비폭력 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비폭력운동에 대하여 악날한 영국은 유혈사태를 일으켜 수천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간디는 투옥되였다가 1922년에 석방 되었다. 석방된 간디는 운동을 조금도 쉬지 않고 계속 강행 했다.

그는 61세가 된 1930년에도 영국의 학정과 탄압에 대항하여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다가 또 다시 투옥되었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간디는 그 당시에도 영국을 향해 독립을 요구 했다. 1942년에 간디는 73세의 나이로 또 다시 체포되여 1년9개월의 감옥생활을 했다. 출옥 후 간디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인도의 고질적인 <힌두와 이슬람> 종파분쟁의 문제를 화해와 단합 으로 극복하고 해결할 것을 웨치면서 <독립맞이> 준비를 호소 했다.

영국은 1947년 7월에 인도의 독립을 시인하고 200년 동안이나 식민통치를 해온 영국의 주권을 인도에게 넘겨 주었다. 하지만 영국은 악의로 가득찬 제국주의적 악성을 버리지 못하고 독립과 동시에 오히려 인도의 분렬을 계획하고 있었다.

영국은 인도의 고질적이고 또 뿌리깊은 인종과 종파의 양대세력을 분렬시키면서 <분활독립>을 하도록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인도의 완전한 독립이 아니라 오히려 <파키스탄>을 인도에서부터 갈라 놓는 강압적 분렬주의 통치수단이었다.

독립은 했지만 오히려 <힌두와 이슬람의 대립>은 날로 날로 격화 되고 있었다. 독립 후 1년이 겨우 지난 1948년 1월30일에 간디는 여전히 비폭력 화해와 포용정신을 역설하면서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날이 간디의 운명적 마지막 날이 될줄 아무도 몰랐다.
간디의 <비폭력 화해운동>을 반대하는 힌두교의 극렬분자들은 <반이슬람주의> 를 웨치면서 간디의 이슬람포용정신에 정면 충돌하여 분개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날 간디를 향하여 암살의 총탄을 날렸다. 그는 총탄에 쓰러졌다.

이것은 바로 영국이 원하는 서로 싸우도록 하는 방법(Divide and Rule)이며 또한 동시에 영국이 무언으로 원격조종의 방법으로 약소국들을 지배하는 방법이었다. 이것은 마치도 미국이 한반도를 갈라놓고 영향력을 발휘해 온 수법이기도 하다. 이러한 방법은 제국주의자들이 상습적으로 사용해 왔다. 인도와 동남아 여러 나라에서 계속되고 있는 사건들이다.

간디가 죽은 후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자와할랄 네루 수상> 이었다. 네루는 부유한 브라만 가문 출신으로 전형적인 힌두교 전통의 지도자이다. 네루도 간디 처럼 영국 유학으로 캠브리지 대학 출신이며 변호사의 자격증을 취득하고 1912년에 인도로 귀국했다. 그는 간디와 매우 철친한 독립운동가로 농민운동 빈민운동등에 줄곧 간디와 동행하고 동조 했으며 8차례 체포 당했고 감옥생활도 모두 9년동안 했다. 하지만 네루는 간디의 <절대적 비폭력운동 방법>에 대해서는 완전히 동의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절대적 비폭력이란 곤란하다고 네루는 생각 했던것 같다.

하지만 간디와 네루는 정책과 정략에 있어서 유일한 동반자들로서 하나의 정당인 <국민회의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민회의당>은 후일에 간디-네루 가문 주동 의 정당일 뿐만 아니라 인도의 <힌두교적 전통의 정당>으로 공인되고 있었다.

간디의 암살 5개월전에 네루는 이미 총리직을 맡고 있었다. 네루는 간디가 사망 한 후 모든 일을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큰 책임이 지워졌다. 네루 총리는 인도의 모든 주정부들을 재편성하여 <사회주의적 사회>를 실현하려고 노력했고 제1차 5개년 계획을 세워 농지개혁과 농업개발 등 사회주의적 정책을 실현했다.

네루 수상은 냉전체제하에서 미국과 소련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는 <비동맹주의>적 독립노선을 강조하면서 <반둥회의 평화 5원칙>을 네루정권의 외교적 기치로 삼아 제3세계에 명성을 높이기도 했다.

인도의 간디와 네루 두 지도자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간디는 혼란기에 비폭력 불복종의 아이디어로 나라와 민족의 앞길을 인도하고 개척한 정신적 지도자였다. 간디가 죽은 후에 네루 수상은 간디가 이루어 놓은 안정된 민족정신과 사회적 기풍을 이어 받아 법대로 집행하는 법치국가를 세우는 데 있어서 크게 공헌했다. 이들은 인도 건국의 두 기둥이었다.

인도 국민들은 오늘 날에 와서는 그 누가 강대국 지도자라고 하여도 경우를 지키지 못하는 강대국 지도자에 대해서는 단호한 자세를 보인다. 지난 2006년 3월 2일 부시 미국 전 대통령이 인도를 방문하여 인도의 핵무장을 용인하면서 중국을 견재하기 위하여 인도를 포섭하려고 하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 부시 대통령이 인도의 성자 <간디 기념비> 에 꽃다발을 바치려 하자 인도 국민들은 분노하면서 <간디의 고귀한 영혼에 더러운 악마의 피를 쏱아 붓지 말라.우리 인도의 민중은 부시의 행각과 인도 방문을 원천 거부하고 반대한다>고 외쳤다.

부시대통령이 인도를 방문하여 인도 의회에서 연설을 계획했다. 하지만 의회의원 들의 야유가 연설도중에 터져 나올 것이 예상되어 인도 정부 당국은 그 일정을 급히 취소 하고 두번째로 <레드 포트>를 생각 했다. 이곳은 <네루 총리>가 인도독립일에 국민을 향하여 연설한 유명한 장소인데 이곳에서 부시가 연설을 한나면 네루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해 주저하다가 결국 세번째 장소로 부시 대통령의 연설장소를 인도문 밖 동쪽에 있는 옛성 푸라나칼라 로 최종 결정한바 있었다. 그런데 이 낡아빠진 옛성토 프라나칼라의 근처에는 인도의 유명한 동물원이 있다. 부시 대통령이 연설을 하기에 제일 안전한 장소가 동물원 근처라고 하니 참말로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인도의 유명한 소설가 아룬다티는 이러한 분위기에 대해 <동물원의 고릴라들이, 원숭이들이, 뿔 달린 사슴들이, 그리고 사자들이 으르렁거리면서 부시의 연설에 응원을 할가?>라고 비꼬는 묘사로 일침을 가한 적도 있다.

1.인도의 고대와 중세기의 간추린 역사


인도의 고대역사는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멀리 구석기 시대까지 더듬어 올라 간다. 인도 사람들은 브라호마신이 세계를 창조했고 그때부터 인도의 조상들이 살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인류역사는 고대에 4대 문명의 발상지로 고대 이집트, 앗시리아, 바빌론 그리고 인더스 문명 권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대락 BC 3000년경에 4대 문명권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들 문명 권은 농경문화로 발전했다고 한다.

인도의 고대역사는 대략 BC 2000-1500년경부터 아리안인들이 인도로 이주 하여 베다문화권을 이루었으며 선주민들과 전쟁이 자주 일어났다. 이 시기에 인도의 전통 브라호마니즘 사상, 우파니샤드, 슈라마니즘 같은 토종 종교적 사상들의 기원을 이루고 있었다.

BC 6세기경에 이르러 비비다시대가 열리면서 인도의 통일국가를 향한 크고 작은 전쟁이 빈발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 벌써 크샤트리야 계급, 바이샤 계급, 브라흐만 사제 계급등이 대립하는 혼란이 시작 되었다. 이시기에 페르시야의 침입과 불교의 윤회사상 그리고 자이나교등 세계종교들이 나타나 어지러운 사회 상을 형성하고 있었다.

BC 4세기에 마우리아 왕조기 세워졌다. 그 당시 중국에서는 진나라가 통일 중국을 세웠는데 인도에서도 오랜 혼란을 거친뒤 거대한 인도통일국가가 최초로 건설되었다. 통일국가를 건설한후 150년간 지속되었다. BC 2세기에 이르러 인도통일국가는 분렬되여 대개 4개 왕국으로 나누어 졌으며 그중에서 쿠산왕조가 제일 번성하여 인도 북부를 중심하여 중국과 전쟁을 벌리기도했다.

AD 4세기경에 인도의 굽타 왕조가 번창하여 굽타왕국 1세, 2세, 3세대에 이르면 서 최상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에 특히 브라흐마니즘의 옛 옷을 벗고 새로운 <힌두이즘> 이라는 새 이름으로 <인도의 중심적 종교> 로 등장 했다. 인도의 힌두교의 번창으로 인하여 인도불교는 자연히 쇠퇴를 가져왔다.

AD 7세기에 이랍의 이슬람교가 전세계의 지배자로 등장하면서 AD 8세기초에는 인도를 침입하기 시작하여 AD 11세기 에는 인도의 내부까지 침투하여 인도를 이슬람제국으로 한 때 번창하고 있었다.

인도는 북과 남 크게 두 지방으로 분열되고 또 남부지역 안에서 다시 2,3개의 소왕국으로 분산되여 독자적 경제와 문화형태를 이루고 상당히 오래 동안 지속되었다. 이슬람세력이 인도종교에 많은 영향을 끼치면서 페르시야풍의 문화가 유입되었다. 1220년대에 몽고의 칭기스칸이 인도를 침공하여 몽고의 후손들이 수 없이 많은 왕국들을 세우고 번창하면서 흥망성쇠의 역사는 수세기 동안 되었다. 인도는 본토인과 외래인 그리고 본토의 토속종교와 외래종교등이 동거하면서 함께 공존하여 왔다.

145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방의 포르투갈을 비롯한 네덜란드와 영국등 외세가 본격적으로 인도를 침입하기 시작했다. 제일먼저 1510년에 포르투갈이 인도의 비자푸르 왕국으로부터 고아지방을 탈취하여 침략의 전초기지를 획득 했다.
1600년에 영국이 처음으로 인도침략을 시작 했다.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침략의 기지를 설립했고 1608년에는 수라트에 <영국 상업기지>가 창설되었고, 1615년에 영국 토마스 경이 인도에 도착하여 무굴제국으로부터 인도 전역에 영국공관을 개설할 수 있는 허가를 획득하였다.
그리하여 1633년에 오릿사에 영국 무역공관이 설치되었다. 1639년에 마드라스에 영국 무역공관을 설립하고 성 조지 요새가 건립되었다. 1654-1667에 영국과 네덜란드 가 오랜 전쟁 끝에 영국이 패하자 인도네시아의 모든 섬들이 네덜란드의 손에 넘어갔다. 영국은 그 대가로 인도를 독점할 수 있게 되었다.

1668년에 영국은 봄베이를 포르투갈에게서 인수하여 동인도회사가 인도무역의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1690년에 영국은 무굴왕국과 평화조약를 맺고 캘커타에 무역공관을 설치했다. 하지만 1756년에 프랑스와 벵갈이 캘커타를 점령하고 영국인들을 캘커타에서 추방시키는 이변이 잠시 발생 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은 1600년 부터 인도를 침범하여 157년동안 착취와 만행을 자행했고, 1757년에 유명한 플라시전투를 통하여 프랑스를 몰아내고 인도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영국이 처음에는 경제적 목적으로 수탈을 달성했했지만 경제적 수탈에 그치지 않고 1757년부터 실질적으로 인도 전역을 식민지화 시켜 200년 동안 지배했다.

2.영국의 식민통치와 분활정책


영국이 인도 식민통치를 펴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우려하는 것은 11억이 넘는 인도의 거대한 민중세력들의 단결력에 대한 공포심 이었다. 영국은 인도를 사분오열로 분렬시키는 묘안을 고안하여 분활통치방법을 활용했다. 영국은 인도의 다양하고 혼란스러운 역사적 배경과 종파적으로 복잡한 사회적구조를 완전히 파악하고 이에 적절한 분열을 통한 지배통치를 실현했다.

인도의 사회구조는 다음과 같은 복잡하고 다양한 구조로 형성되여 있다.
(가) 카스트제도. 사회문화의 한 축을 형설하여 주요 5개의 카스트 계층이 있다. 1.브라만 (성직자 학자등). 2. 크샤트리아 (왕족, 귀족, 무사등). 3. 바아샤 (공민, 상인, 수공업자등). 4. 수드라 (잡역, 하인등) 5. 카스트 아래의 카스트 (천민들)
(나) 종교는 힌두교(83%), 이슬람교 (12%), 시크교 (3%), 불교와 기독교가 있다. (다) 인도의 언어는 3,372개의 언어가 있으며 10만명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는 216개 있고 헌법이 인정하는 지정 언어는 18개이다. 언어의 다양성은 부족사회가 역사적으로 그만큼 다양하고 복잡하다는 뜻이다.
(라)인도는 지역적으로 종교와 언어와 문화적 전통으로 인하여 제각기 분리된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그 예로 파키스탄, 뱅글러대쉬, 카슈미르가 지역사회이다.
(마)인도의 인구는 11억4천만이며 면적은 우리나라의 15배나 되는 광대한 땅을 가지고 있다. 인도는 제각기 개성이 강한 사회적 집단들이 모여 국가를 형성했기 때문에 각양각색의 원시적 문화와 현대적 문화가 서로 뒤섞겨 상상을 초월한 사건들이 매일같이 발생하고 있다.

영국은 이와같은 인도를 200년동안 식민지 통치하며 능수능란 하게 지배해 왔다. 예를 들면 영국은 1850년에 인도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방법으로 누구든지 기독교로 개종을 하면 조상의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한다고 선전 하며 많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데 성공 했다. 그런데 영국은 문제에 봉착했다. 간디의 독립운동의 뒤를 따르는 독립운동자들 가운데 개종한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었다. 이 개종한 기독교인들이 독립운동을 진행하면서 찬송가를 힘있게 열심히 불렀다. 그 찬송가는 <십자가 군병들아 …앞서 나가 굳세게 싸워라> <찬송가 390장> 이다. 영국은 인도의 개종한 기독교인들이 <십자가 군병들아 열심히 싸우라> 라고 하니 매우 위험한 찬송을 부른다라고 염려하면서 법으로 그 찬송가를 부르지 못하게 했다.영국이 인도를 식민통치하는 방법은 모두 다 이런식의 방법 이었다.

왜 어찌하여 몇 천년동안 함께 살아온 파키스탄 사람들이 인도로부터 독립을 하겠다고 아우성을 쳤던가? 왜 어찌하여 뱅글라대쉬가 독립을 원했으며 또 왜 어찌하여 카슈미르에서 오늘도 끝을 모르는 분쟁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5만명이나 죽어야만 했던가?

대답은 간단하다. 영국이 200년 식민통치에서 경험하고 체득한 분열과 분활정책을 오늘도 여전히 또 다시 그대로 악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파키스탄은 몇 백년 동안 같은 민족으로 함깨 평화롭게 살아 온 한 나라 한 국민들 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는 순전히 영국의 모략에 의한 술책으로 비롯되었다. 그들에게 차이가 있다면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두 종교는 몇 백년을 같이 공존해 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종교의 차이때문에 50만명이나 죽으면서 싸워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다름 아니라 영국과 미국의 더러운 분열책동 때문으로 진보적인 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영국과 미국의 기독교는 타종교들끼리 서로 싸우도록 싸움을 부추기는 악덕 기독교 이며 타락한 기독교이다. 인도-파키스탄이 싸우면서 50만명이 죽었는데도 영국과 미국의 기독교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침묵해 왔다. 하지만 이라크전에서 죽은 미군들 4,200명에 대해서는 어찌 그리도 소란을 부리고 있는가?

인도에서 반미주의적 힌두민족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BJP 당의 한 관계자는 말 하기를 인도-파키스탄 분쟁문제는 미국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이 인도의 분쟁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는 이유는 인도가 동남 아시아 에서 미국에게 중요한 위치에 있기때문에 인도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미국은 인도를 친미국가로 묶어 놓기 위하여 인도에게 절대로 강경한 자세로 나오지 못한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미국은 파키스탄에게는 당근과 채찍을 활용한다고 꼬집는다.

미국은 인도에게 이렇게 귓속말을 해주고 있다.
<우리와 친하자. 그러면 너희도 핵을 가질 수 있고 우리와 핵 협정을 하자. 그리고 이란과 절대로 가까이 하지 말고 석유와 가스수송관등 협약을 하지 말라. 우리끼리 단합하여 이란을 고립시키자>.

하지만 미국의 속임수 귓속말에 고분고분 넘어 갈 인도가 아니다. 인도는 전통적으로 네루 수상 초기부터 창시한 비동맹 외교적 노선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서 미국의 어떤 속셈에 빠져서 제약을 받을 나라가 아니다.

한 예로 미국의 부시행정부와 체니 부통령은 엔론을 앞세워 인도의 전력사업을 독점 하려고 정치적 압력을 가한바 있었다. 이 때 미국의 압력에 대하여 비판적인 인도의 경제담당 언론인이 있었는데 미국은 이 언론인을 매수 하려고 연봉 1백만 달러를 제시하면서 엔론을 위하여 홍보책임자로 일해줄 것을 요청하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그 목적은 명백했다. 만일 엔론의 전력사업이 인도에 진출하게 되면 인도에게 전기사용 기존요금보다 4배를 더 강요하게 되고, 인도의 수요보다 엄청나게 과잉공급을 하게되고, 엔론은 인도정부에게 특혜를 강요함으로써 이중삼중의 이득을 챙기게 된다.

당시 인도의 야당 지도자 소냐 간디가 워싱톤을 방문했는데 체니는 소냐 간디를 압박 하여 엔론사업을 강요했다고 전해 진다. 그러나 미국의 9.11 테러사건과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동시에 엔론의 파산으로 인한 악 재가 겹치면서 미국이 추진하던 전력사업은 일단 중지되었다.하지만 미국이 인도 에 대하여 부과하고 있는 여러가지 압력은 경제적 뿐만아니라 침략의 역사적 맥 락에서 볼때 정치와 군사, 문화에 있어서 여전히 침략적 행위를 계속하기 위한 목적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3. 인도의 독립과 간디와 네루가문으로 이어지는 정치


1946년에 영국은 정부각료를 인도에 파견하여 식민통치를 종결하고 독립한 인도에게 정권을 이양할 것을 협의했다. 이 협의에 의하여 1947년 7월에 인도는 독립했다. 하지만 영국은 인도에게 조건부 권력이양을 했다. 그 조건부는 1947년 8월 15일에 <파키스탄을 독립시키라> 는 강요된 전제조건 이었다.

파키스탄 지역에는 이슬람교 수니파가 절대 다수이며 힌두교도는 소수파로 분류되고 있었다. 영국은 인도 당국과 아무런 합의도 없이 식민통치자의 최종적 권리의 강압적인 방법으로 <파키스탄의 분리독립> 을 기정사실화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파키스탄에 살고 있던 <힌두교도>들은 갑자기 짐을 싸고 인도로 이동을 하고 또 이와는 정반대로 인도에 살고 있던 많은 <이슬람 수니파교도> 들은 갑자기 고향을 떠나 이슬람의 나라 파키스탄으로 이주해 가는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와 분쟁은 이렇게 조작되었다.

인도는 영국으로 부터 200년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을하는 그 순간에 영국의 분활정책의 음모로 인하여 <파키스탄>을 송두리채 잃어버리는 수모를 당해만 했다. 이 때문에 인도는 독립의 기쁨보다 오히려 분렬의 비극을 받아야만 했다. 그 당시 인도에도 우리나라처럼 독립과 동시에 <분열의 38선> 이 그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 속에서 <자와할랄 네루> 는 세계에서 땅이 7번째로 넓고 인구가 두번째로 많은 인도의 초대 국무총리가 되었다. 네루 총리에게 주어진 무거운 짐은 인도통치 뿐만 아니라 영국연방국으로서 그 여왕을 동시에 수반으로 섬겨야 했다. 인도의 대통령은 명목상의 대통령이고 모든 실권과 책임은 네루 총리에게 있었다.

네루 총리는 집권 초기부터 <비동맹 중립> 을 기본정책으로 삼았다. 네루 총리의 통치 노선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1)비동맹 외교 (2)대소련 우호정 책 (3)경제중심적 정책으로 인한 대외적 경제관계중시 불가피 (4)주변국가들과의 친선 관계개선등 세계정세에 당면한 문제를 풀어 나가는데 있어서 매우 신중한 면을 보여 주었다.

네루 총리는 1962년에 중국과의 전쟁에서 패전하여 어둠을 경험했다. 그는 1964년에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간디 가문은 미국의 케네디 가문과 같은 격>

인도에서 간디 가문은 마치 미국의 케네디 가문처럼 확고한 존재였다. 건국의 아버지 네루 총리의 사망후에 그의 외동 딸 인디라 간디가 자연스럽게 총리직을 계승했다. 외동 딸 인디라 네루는 F. 간디와 결혼하여 네루-간디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인디라 간디 총리는 1971년에 소련과 우호평화조약을 맺었고 이어서 불편한 관계였던 중국과도 1988년에 정상회복하였다. 그래서 인디라 간디 총리는 중국을 친선방문 했다. 1993년에는 소련의 옐친 대통령이 인도를 친선 방문하기도 했다.

인디라 간디 총리는 그녀의 아버지가 창당한 <국민회의당>을 모체로하여 집권을 하면서 아버지 네루 총리가 주도했던 정치노선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 했다. 하지만 여러 야당들의 반대에 부딪쳐서 <국가위기상황>을 선포하여 불가피하게 강압적 통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1984년에 인디라 간디 총리는 시크교의 극렬분자에 의해 암살 당하고 말았다.

인디라 간디 총리가 사망한 후에 <국민회의당>의 계승원리에 의하여 그녀의 아들인 라지브 간디가 총리직을 계승 했다. 하지만 라지브 간디 총리는 집권 5년후에 많은 실수와 부패협의로 인하여 1989년에 퇴임했다. 오랜 전통의 <국민회의당>과 네루-간디 가문의 인도 통치의 화려한 역사는 드디어 마지막을 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민회의당>은 1989년에 집권당의 끝을 맺고 정권을 야당연합체로 구성된 <셰크하르> 에게 정권을 넘겨 주었다.

하지만 퇴임을 당한 라지브 간디는 네루-간디의 가문의 전통과 <국민회의당>의 명예를 다시 회복하겠다고 하는 야망을 품고 1991년에 총리직에 다시 재출마하여 간디가문의 정치적 기반이 튼튼한 남부지방에서 유세 연설을 열심히 하여 지역 민중의 인기와 열열한 지지를 받게 되었으나 이에 분개한 시크교의 따밀분리주의 게릴라의 폭탄공격을 받고 1991년에 향년 47세로 생을 마감하는 사건으로 인도의 건국의 아버지 네루-간디가문의 35년 동안의 집권은 종막을 고하고 말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라지브 간디의 암살로 쓰러진 비극으로 인하여 오히려 <국민회의당>에 대한 민심의 동정표를 획득하여 총선에서 놀랍게도 <국민회의당>이 승리하여 또 다시 재집권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 되어 이번에는 간디가문에서 사망한 라지브 간디의 미망인 소냐 간디가 직접 나서지 않고 간디가문과 <국민회의당>을 대표하여 그 대리인으로 라오 총리가 취임했다. 그는 5년동안 집권했지만 많은 실정을 반복했다. 특히 라오 총리는 1995년에 미국과 안보협정을 맺고 노골적으로 대미의존 정책으로 방향전환했다.

이 때문에 그는 미국과 7 개항의 안보협력협정을 맺고 40억 달러 규모의 경제협정을 맺고 말았다. 결국 라오 총리는 네루-간디정권이 그동안 지켜 온 중요한 정책을 완전히 무시하고 배신하는 쪽으로 나갔다. 이 후유증으로 라오 총리는 <국민회의당>과 간디가문의 명예로운 전통에 수치스로운 오점만 남기고 부정축재라는 범죄까지 연계되어 여야와 민중의심판을 받아 1997년에 불명예 퇴임 당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인도의 정치적 혼미속에서 <야당들의 연정>이 정권을 다시 잡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 후 <야당들의 연합정권>은 바지파이를 총리로 선출했다. 그는 1998년 부터 2004년 까지 6년동안 집권했다. 바지파이 총리는 인도에 새로운 지도자상을 제시하면서 <빛나는 인도> 라는 멋 있는 구호를 제창했다. <빛나는 인도> 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분별한 외국자본 의 도입 이었고, 무차별적 외교적 수단이였고, 무원칙적 개혁정책 이었으며 그리고 전적으로 외세의존적 통치방법이었다.

바지파이 정권은 외화보유 1,000억 달러라고 선전하고 경제성장 10%라고 크게 발표하면서 과감한 민영화와 경제자유화를 감행했다. 하지만 바지파이 총리의 6년 통치결과는 인도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결과만 초래한 것뿐 이었다고 평가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인도에서 극빈자로 전락하여 하루 $1이하의 수입으로 살아가는 노동자의 수가 3억 이상으로 증가 했으며 7억명이 하루 $2로 살아가는 빈곤층이 발생했다. 개혁의 성과는 인도 민중들의 삶과는 전혀 무관한 허위적 발전과 선전에 불과했던 것으로 폭로되고 말았다. 그래서 <빛나는 인도>는 < 수치의 인도>가 되고 말었다. 언론들은 일제히 비지파이 총리를 <개혁병> 에 걸린 불치의 중환자라고 혹평했다. 비지파이 총리는 그의 실정에 대한 농민과 빈곤층 민중의 심판을 받아 재선에 완패하고 2004년에 정계를 떠났다.

한편 소냐 간디는 1998년에 야당으로 전락한 <국민회의당>의 당수로 선출되여 네루-간디 가문의 정권복귀를 열망하는 민중들의 운동에 편승했다. 그 결과 2004년에 소냐 간디는 <국민회의당>의 당수로 재선되어 네루-간디 가문의 명예를 다시 회복시키는 기회를 만들었다.

소냐 간디는 <국민회의당> 이 재집권할 수 있도록 본인이 용단을 내려야할 중요한 기회와 위치에 놓여져 있었다. 또한 인도 민중들의 열열한 지지를 무시할 수도 없는 처지에 있었다. 하지만 소냐 간디는 매우 신중했다. 인도의 미래를 위해서 뿐 만 아니라 간디의 가문을 위해서도 소냐 간디는 매우 신중했다. 그는 암살당한 시어머니 그리고 암살당한 남편을 사료 깊게 생각하면서 지나친 정권욕은 개인과 간디 가문 뿐만 아니라 인도를 위해서도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 했다. 그런데 그당시 인도의 민심은 네루-간디 가문의 전통적 정권의 복귀만이 인도의 유일한 희망 이라고 주장하여 <소냐 소냐 소냐>를 웨치면서 총리로 나서줄 것을 민중들은 열광적으로 호소했다. 이 와중에 감성에 사로잡히 않고 이성적 판단에 스스로 복종할 것을 결단 했다.

소냐 간디는 평생동안 인도 전통의 의상과 생활습관과 사고방식 모든것이 완벽한 100% 인도인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소냐 간디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영광과 특권 을 물리치고 인도의 수상직을 <맘모함 싱> 전재무장관에게 양보 하기로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맘모함 싱은 1991-96년에 재무장관을으로 재직하면서 그 당시 페쇠적이였던 인도의 경제를 과감하게 이끌어 어려움을 극복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소냐 간디는 이점을 착안하여 싱을 차기 총리로 지명하고 추천하면서 자신의 수상직 양보에 관련하여 일말의 미련이나 후회도 없다고 단호히 힘주어 말했다. 그녀의 수상직 양보는 인도의 역사에 있어서 고질적인 후진적 정치풍조를 일보 앞으로 전진시키는 역사적 계기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국민회의당>의 천거를 받아 총리로 취임한 싱 총리는 <국민회의당> 을 모체로 하고 있는 정치적 세력과 시크교의 배경 그리고 <24개의 좌파정당>들이 연합하여 이루워진 <진보연정 UPA>를 대표하여 집권을 시작했다.

4. 만모한 싱 총리 등장과 오늘의 인도


2004년 5월에 소냐 간디의 양보와 추천에 의하여 인도의 제14대 총리로 취임한 신임 싱 총리는 인도독립 이래 처음으로 <비힌두교도> 총리가 된 인물이다.

신 총리가 새로 부상하게된 시기의 인도의 지위는 국제사회에서 과거와는 다른 위치에 놓여 있는 때가 되었다. 인도는 이미 핵 무기 보유국으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고 있는 시기로 돌입하고 있었다. 1998년에 처음으로 지하핵실험을 성공했던 인도가 핵 보유국이 되자 곧 이어 인도와 경쟁관계에 있던 파키스탄도 핵실험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서방과의 관계가 매우 복잡 하게 전개 되였다. 그러나 인도의 핵 보유는 신임 신 총리에게 큰 힘과 특권이 됨과 동시에 또한 외교에 있어서 지혜와 능력이 요구되는 복합적 국제문제의 어려운 과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싱 총리는 시크교도 출신이다. 시크교는 인도독립 초기부터 힌두교의 정통가문인 네루-간디 집안과 철천지 원수처럼 대립하고 있었던 종파였다. 이 종파의 대립은 뿌리가 있었다. 시크교는 15세기에 인도와 파키스탄의 인접지역인 <편자브> 지역에서 발원한 일종의 힌두교의 분파적 종교이다. 영국으로 인하여 인도와 파키스칸이 두개의 나라로 분렬될 때 <편자브> 지역의 서쪽은 파키스탄의 령토가 되었고 동쪽은 인도의 영토가 되는 비극이 발생했다. 수백년 동안 함께 살던 고향땅이 갑자기 영국이 갈라놓은 국경선으로 인하여 한 나라가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로 되었다. 그것은 영국이 편자브 한 가운데 그어 놓은 그 분리선 때문이었다.

이런 정치적 혼란 속에서 파키스탄령 편자브에 살고 있던 시크교도들은 일제히 고향 동리를 떠나 서쪽의 인도령이된 편자브로 옮겨 왔다. 시크교도들은 파키스탄이 이슬람국으로 독립된다는 사실을 알고 파키스탄을 피하여 인도쪽으로 이동 했다. 또한 이와 정반대로 인도쪽에서는 이슬람교도들이 이사짐을 메고 인도를 떠나 독립한 파키스탄 쪽으로 집단적 이동을 했다.

이 모든 소동이 누구 때문인가? 그것은 무지한 인도인들 때문인가?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영국이 조성한 정치적 조작으로 비롯된 비극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인도령으로 옮겨 온 시크교도들은 하나로 뭉쳐 정치적 집단을 형성했다. 시크교도들은 15세기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는 시크교의 전통을 고수하면서 인도정부를 향하여 분리자치를 강력히 요구했다. 인도에서 뭉친 시크교도들은 편자브 지역을 <칼리스탄> 이라고 부르면서 그곳에 시크교의 사원인 <황금의 사원>을 건축했다. 시크교도들은 이 황금사원을 시크 교의 거룩한 성역으로 삼고 인도로부터 분리독립을 위한 운동의 요새로 삼았다.

그런데 1984년 6월 5일에 인도군 탱크가 이 황금사원으로 진격하여 분쟁을 심화시켰다. 그 당시 인도의 첫 여성 총리인 인디라 간디는 시크교의 분리주의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하여 인도군에게 <푸른별 작전> 을 지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푸른별 작전>은 완전히 실패했고 그에 대한 보복은 상상을 초월한 비극적 암살사건으로 확대되여 간디가문 뿐만 아니라 인도의 비극으로 나타 났다. 이와 같은 험란한 역사적 배경속에서 인디라 간디 총리가 암살로 쓸어졌으며 또 그녀의 아들이며 소냐 간디의 남편인 라지브 간디 총리도 역시 시크교의 극렬분 자들의 흉탄에 쓸어져 죽는 비극이 발생되었다. 이 비극의 원인은 인도의 11억 인구의 2-3% 되는 시크교를 무모하게 무력으로 진압하려고 군대를 동원한 <푸른별 작전>의 대가로 초래한 비극적재앙으로 진단되었다.

소냐 간디의 양보로 인하여 시크교 교도인 싱 총리가 집권을 하게 되였으며 네루-간디가문의 35년의 장기집권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시크교와 힌두교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역사적으로 오랜 원수가 되었는데 이번에 싱 총리 의 등장으로 인하여 시크교와 힌두교의 화해의 계기가 마련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04년에 싱 총리(71세) 가 인도의 신임 총리로 집권한데 대하여 그 당시 영국의 언론들은 싱 총리의 집권을 축하하면서도 혹시 간디가문이 싱 총리의 막후에서 어떤 작용을 할가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영국은 인도에서 좌파세력이 싱 총리 정권에 대하여 어떤 기세를 부리지 못하개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싱 총리는 첫번 가자회견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우리 갈라지지 맙시다. 종교의 이름으로 서로 갈라지면 이 나라는 위험에 빠질것 입니다>

싱 총리가 당면한 국내적 과제는 인도 내부의 화합과 경제살리기로 요약된다. 간디가문을 대표하는 <국민회의당> 은 세속주의적이며 <간디의 사회주의노선> 을 시종 지켜왔다. 인도는 힌두교 전통의 유일한 정권이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 는 진보적이며 세속화된 현대화를 추구 했다. <국민회의당>과 간디가문이 35년 동안 장기집권을 했는데 이에 대항하여 힌두교 근본주의 정당인 <인도국민당>이 출현하여 세속화된 인도의 힌두교를 맹렬하게 비판하면서 정통보수 힌두교로 복귀할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인도국민당>은 인도의 제 2의 종단인 이슬람교와 극렬대결을 주장 했다. 이들은 이슬람교와 대립하여 싸우는 것이 바로 힌두교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싱 총리가 당면한 어려운 과제이다. 첫째는 힌두교 내부의 분쟁을 화해 시키는 과제이며 둘째는 힌두교와 이슬람교 두 종파간의 화해를 시켜야 하는 어려운 과제이다.

싱총리의 경제살리기 정책은 어떠한가?

싱 총리는 과거 5년동안 재무장관으로 재직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는 시장검증을 통한 실천력을 증진시키고 있었다. 싱 총리는 인도경제에 전문성을 가진 인재들로 최대의 그룹을 형성하여 그들이 기업과 금융을 주도하여 인도의 경제를 살리도록 하고 있다. 싱 총리의 이와 같 은 지도력은 국내외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며 투자자들의 마음을 유도하고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오늘의 인도 사회의 실지적 현실은 극히 암담하다. 2009년 초에 아시아타임스(Asia Times) 가 보도한 기사에 의하면 1,000개의 미국의 기업체들이 외국에 하청업을 재공 하여 이득을 얻고 있는데 인도에서도 60%가 미국의 하청에 의하여 일들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 보도에 의하면 인도의 11억 인구 중 3 억명이 하루 $1로 살아 가고 7 억명이 하루 $2로 겨우 살아가고 있다고 보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임 싱 총리의 사명은 막중하다.

인도의 구조적인 모순을 치료하고 농민과 빈곤층 민중을 구제해야함과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개조로 인하여 발생하는 소외된 카스트 계급의 불평과 반란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신임 싱 총리의 부담스러운 과제중 하나로 대두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러면 싱 총리의 국제적 외교 정책은 또 어떠한가?

싱 총리의 대미정책에 대하여 일면을 설명해 주는 흥미로운 에피소오드가 하나 있다. 2002년 2월에 부시 대통령이 인도를 방문 했을 때 싱 총리의 가정에서는 아버지와 딸 사이에 큰 논쟁이 일어나 크게 시끄러웠다고 한다. 싱 총리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 출신이고 딸 암릿 싱은 미국 예일 법대 출신이다.

암릿 싱은 미국의 대외 정책에 대하여 독설을 내뿜기로 유명하다. 그녀는 미국이 인권을 유린하는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 학대와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범죄에 대하여 <자유인권협회>의 주요 회원의 자격으로 수위 높은 비난 을 퍼부었다. 암릿 싱은 말에 그치지 않고 9만 페이지에 달하는 미국의 비밀 문서인 포로학대에 대한 기록을 입수하여 그 내막을 숨김 없이 계속하여 폭로했다.

암릿 싱의 폭로는 방문하는 부시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싱 총리와 인도 행정부에게 큰 부담을 안겨 주었다. 부시의 방문 목적은 싱 총리를 설득해서 미국과 핵에 관련된 협의를 도출해 미국은 인도에게 핵 장비들을 수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암릿 싱은 부시와 아버지 싱 총리에게 모두 반대를 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아버지 싱 총리는 우유부단한 인물로 미국에게 그저 나약하게 끌려 다니는 인물이었다. 이것은 사랑하는 딸의 아버지에 대한 염려로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신임 싱 총리는 미국에게 나약하게 질질 끌려만 다니는 그런 지도자는 결코 아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인도의 전통적 네루-간디 가문의 지원과 <국민회의당>을 비롯한 <24개의 사회주의 좌파정당> 들의 연합을 배경으로 삼고 있음으로 싱 총리는 함부로 무시 못할 강경한 총리로 평가되고도 있다. 싱 총리의 지난 5년 동안의 통치 업적을 간략하게 기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인도는 1974년 5월에 첫 핵실험을 했다.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1998년에 핵탄두 실험을 또 하여 핵보유국으로 확인 되었다. 그리고 국제핵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없이 30여년을 당당하게 핵보유국으로 버티고 있다. 미국은 별수 없이 부시가 인도를 방문하여 싱 총리에게 머리를 숙여 핵협력 협정을 간청하여 결국 이른바 핵협정을 체결 했다.

하지만 이 협정은 어디까지나 인도의 민수용 핵허용과 기술지원에 관한 협정 뿐 이지 군수용 핵과는 절대로 무관한 협정 이었다. 싱 총리는 부시에게 사실상 인도는 <핵무기 보유국> 이라는 사실을 통고하는 결과가 된것 뿐 이었다.

---미국이 인도의 싱 총리에게 매달리는 이유와 목적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함 이라는 사실을 싱 총리는 알고 있다. 미국은 인도-호랑이와 중국-용을 무서워 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과 인도를 멀리하게 하려는 정책을 펼쳐 왔지만 그것이 헛수고라는 사실들이 확인되고 있다. 이것도 싱 총리의 뱃심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싱 총리는 2006년에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의 인도 방문을 극진히 환영했다. 두 정상은 양국의 협력을 강화하여 2010년까지 교역을 두배로 확대하고 10가지 협력 사업에 합의 했다.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의 인도 방문에 대하여 세계 언론은 <호랑이와 용이 손 잡았다> 라고 크게 보도 했다. 인도와 중국은 2003년에 동중국에서 연합 해상훈련을 실시했고 2007년에는 처음으로 양국의 육상군사훈련을 실시했다. 2008년 1월에 싱 총리는 중국을 친히 방문하여 원자바오 총리와 경제와 군사적 교류의 증진을 협의하여 2010년까지 600억달러로 대폭 늘리기로 합의 했다. 뿐만 아니라 인도와 중국은 천연 가스와 유전개발 분야 에서도 매우 중요한 협력관계를 맺었으며 지난 2006년을 두 나라의 <우정의 해>로 정한바 있었다.

---인도는 소련, 프랑스, 영국, 미국, 중국, 이스라엘, 파키스탄,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등 8개 나라들과 나란히 9개 핵무기 보유국 중 한 나라로 세계의 인정을 받고 있다. 인도는 세계에서 2번재 머슬림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인도와 접근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인도가 민수용이던 군사용이던 모두 핵무기 보유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싱 총리의 외교 능력은 부시를 따돌리고 자유자재로 중국과 소련을 상대하여 광폭외교를 행사하고 있다.

---2007년 1월에 싱 총리는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의 인도 방문을 열렬히 환영했다. 두 정상은 2004년의 만남후 두번째 만남이다. 이번 정상 회담에서는 현재 인도의 원자발전소 건설 중인 2기와 또 앞으로 4기의 추가 건설에 대하여 두 나라가 협력하기로 밝혔다. 싱 총리는 미국과의 핵 협력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로 러시아와 핵협정을 맺을 뿐만 아니라 두 나라 정상은 현재 연간 교역 30 억 달러 규모에서 2010년 까지 100억 달러로 늘리기로 합의했다.

---인도의 싱 총리는 미국, 중국 러시아 뿐 만 아니라 인도-브라질-남아공 세 나라의 정상들과 함께 <입사 IBSA> 포럼에 대한 첫 모임을 가졌다. 이 포럼은 3 대륙의 신흥 경제대국으로서 13억5천만명 인구 <경제 공룡> 을 아우르는 경제 협력을 강화하려는 구상이다. 인도의 싱 총리와 브라질 룰라 대통령 그리고 남아 공의 음베기 대통령의 모임의 의미는 <미국의 독자적 금융횡포에 휘둘리지 말자> 라는 강력한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싱 총리는 미국의 압력에도 아랑곳않고 인도의 에너지 확보를 위하여 이란에 친선의 손짓을 보낸다. 싱 총리는 인도를 친선 방문한 이란의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을 열열히 환영하여 부시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세계 6위의 에너지 소비국가인 인도가 미국 때문에 이란과 에너지 거래를 주저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볼때 싱 총리의 판단은 단호하고 강력하다.

---미국이 인도에게 접근하면서 협력에 주력하는 것을 보고 눈치 빠른 일본도 이에 질세라 인도에게 추파를 던지면서 미국-인도-일본의 안보협력 관계를 들고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인도는 대국적 견지에서 취사선택의 여유를 가지고 일본의 잔꾀를 여유있게 대처하고 있다. 싱 총리의 주요한 정책은 러-인-중의 튼튼한 3각 협력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유일한 관심이 있을 뿐 일본의 본성을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진단된다.

---2006년에 싱 총리는 파키스탄 대통령의 초청에 쾌히 승락하였다. 현재 카슈미르와 아프칸 문제로 인하여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얼키고 설킨 관계를 생각한다면 싱 총리의 파키스탄 방문은 상상도 못한다. 하지만 싱 총리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파키스탄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놀라운 일 아닌가?

이글의 끝을 맺으며,


싱 총리는 작년에 심혈관 질환으로 큰 수술을 받았다. 수술후 회복속도가 아주 양호하여 지금은 거의 정상으로 집권을 하고 있다. 싱 총리는 4월1일 런던에서 개최되는 G-20 회의에 참석하고 오바마 대통령도 만나기로 계획되어 있다.

올해 77세의 싱 총리는 2008년 7월에 싱 총리에 대한 의회신임투표 결과 찬성 275표, 반대 256 표로 집권당에게 겨우 승리를 안겨 주었다. 싱 총리가 부시와 민수용 핵협약을 맺은데 대하여 <미국에 종속되었다> 고 비판하는 좌파들의 반대가 의회신임투표에 부정적으로 크게 반영된 것으로 나타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 투표결과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인도의 의회는 좌파세력이 거의 좌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중국은 펄펄 날고 있는데 인도는 고립주의로 뒤떨어지면 곤란하다.>는 여론이 팽배하고 있는 가운데 싱 총리는 인도의 보수파의 고집을 따라야 할것인가 아니면 경쟁분야에서 중국과 과감하게 손을 붙잡아야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다.

싱 총리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가 재선에 다시 출마할 것인가에 대하여서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보도에 의하면 소냐 간디는 말하기를 <싱 총리는 나의 변함 없는 유일한 후보자> 라고 했다.

하지만 또 다른 보도에 의하면 소냐 간디의 아들인 <라울 간디 Rahul Gandhi> 가 강력한 차기의 총리 후보자로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라울 간디는 39세의 의회 회원이며 네루-간디가문의 유능한 승계자로 주목 받아 왔다.

마하트마 간디와 네루-간디를 비롯하여 인도의 민족주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인도는 이 세상에서 찾아 보기 힘든 독특한 나라이다. 식민주의에 대한 혁명과 폭력에 대한 혁명으로 독립의 초석을 삼은 나라이다. 오늘날 인도는 11억의 민중 파워는 <떠오르는 대륙> 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다. 미국은 세계패권을 유지할 욕심으로 인도를 경쟁의 동반자로 삼으면서 본의 아니 게 인도의 몸값을 치솟게 올려주고 있다. 중국과 소련 그리고 미국은 저마다 인도에게 전략적 동반자로 자기편이 되여 달라고 접근해 왔다.

이제 이 지구상에서 미국을 당할 나라가 없다고 하는 것은 어제의 이야기가 되고 있다. 오늘 이 지구상에 11억 인구의 민중 파워와 핵무기를 소유하고 있는 인도는 그 어느 나라도 침범하지 못하는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11억 민중의 힘을 가진 인도는 막강해 지고 있다. 지난 30년동안 핵무기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의 간섭도 없었다. 핵보유국 인도는 이미 강대국 대열에 들어섰다.

인도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는 1962년 부터 영사관계가 수립되었으며 주뉴델리 조선영사관이 개설되어 왔다. 인도와 북조선 사이에는 해운협정, 항공운반협정, 무역협정 그리고 문화협정등이 체결돠어 왔다. 두 나라는 문화교류협정에 의하여 5회 조-인 문화공동위원회가 열리기도 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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