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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목사]스페인-미국-일본의 밀약으로 식민지화된 필리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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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9-02-26 19:51 조회2,5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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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재미동포 통일운동 원로,은퇴 목사,뉴욕 거주)는 이번부터 남미,아프리카 나라들의 연구를
마치고 아시아를 조명하기 시작했다 세번째로 스페인, 미국. 일본의 밀약으로 식민지화된 필리핀 역사의
진실을 소개한다. 필리핀의 사회현실은 아직도 정치와 경제에 있어서 오랜 독재정치와 미국위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엘리트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지만 여러 필리핀의 사회운동세력들이 우경화를 막고 경제독점
세력인 엘리트 계층과 대항하여 결사적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고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스페인-미국-일본의 밀약으로 식민지화된 필리핀의 역사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리핀 ‘피플파워’의 현주소




필리핀은 7,107개의 섬을 가지고 있는 섬나라이다. 이름이 붙여진 섬은 2,700 개이고 사람이 사는 섬은 1,000 개의 섬 뿐이다. 섬이 하도 많기 때문에 해안선이 미국의 해안선보다 2배가 넘고 경치도 더 아름답다.

인구는 약 8천만이고 국토 면적은 30만 76km2이며 한반도의 1.2배이다. 인구 밀도는 270.5명/km2이며 환태평양 지진대가 지나고 있기 때문에 지진이 잦고 화산이 많다. 기온은 연평균 27도c이다. 언어는 미국의 영향으로 영어가 보편적이며 학교에서 고유한 언어인 타갈로그어를 가르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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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지배를 오래 받은 까닭에 종교는 아시아에서 유일한 카톨릭 국가이며 스페인과 미국의 영향으로 상당히 서구화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여성의 90%가 직장생활을 할 정도로 여성의 역할이 크고 여성 대통령도 2명이나 배출 했다. 최근에는 필리핀 민중이 자신들의 뿌리가 담긴 전통 문화찾기 노력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1. 필리핀의 간추린 역사


필리핀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때는 석기시대부터라고 한다. 약 5000여년 전부터 인도네시아인들이 필리핀땅으로 이주해 왔고 그후 2000년 전에는 말레이시아인들이 밀려와 기름진 땅을 차지하고 살았다.

AD 1,521년에 스페인 정복자들이 처음 필리핀에 왔을 때 필리핀에는 전체 인구 약 50만명이 살고 있었다. 필리핀의 부족장 라프라프는 스페인 탐험가들과 격투하여 살해했으며 일부를 쫓아내고 국토를 방위했다.

하지만 스페인 침략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원정을 시도하여 결국 1571년에 필리핀을 완전히 정복하고 그후부터 300년동안 필리핀을 침략통치 했다.

1898년에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을 하여 승리했다. 미국은 스페인에게 2천만 달러를 지불하고 필리핀에 대한 식민지 통치권을 탈취했다.

미국이 스페인에게 2천만 달러를 지불했다고 해서 물건을 팔고 사는 식으로 미국이 쉽게 필리핀을 손안에 넣은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미국은 스페인과 싸워 승리한 후에 또다시 필리핀과 싸워야 했다.

1899년에 미국은 마닐라 외곽에서 총성을 터뜨리면서 <미국-필리핀 선전포고>를 선언했다. 미국의 승리는 결정적이었지만 그래도 전쟁은 4년동안 계속됐다. 이 전쟁에 동원된 미군의 수는 126만명이며 미군의 부상자와 사망자는 약 5천명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숨기고 있던 필리핀 군인의 사망자는 16,000명이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난민과 질병으로 죽은 사람 모두 합해서 250,000명이었다. 미국의 필리핀 식민통치는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미국은 그후부터 50여년간 필리핀을 식민통치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6년에 형식상 독립을 승인했다.

제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필리핀을 점령하여 3년간 침략지배 하다가 물러갔다. 1946년에 마침내 필리핀은 형식상 독립을 했다. 하지만 필리핀이 독립은 했지만 미국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미국의 지배하에서 미국을 본뜬 정부를 세우고 필리핀공화국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니까 제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필리핀을 3년동안 지배한 기간을 제외하고 미국은 1898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111년동안을 계속해서 필리핀을 예속시키고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중국과 소련을 의식하여 필리핀을 미국의 중요한 반공의 보루로 삼고 있다.

2. 가쓰라-테프트 밀약에 얽힌 조선과 필리핀


가쓰라-테프트 밀약 이란 무엇인가?

이 조약은 조선반도와 필리핀을 지배하기 위하여 미국과 일본이 1905년에 맺은 비밀계약이다. 미국과 일본이 맺은 비밀조약에 의하여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배하고 일본은 조선반도를 점령하여 식민지화하는 것을 두 나라가 서로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는다는 비밀조약이었다. 당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1905년 7월에 미국 육군장관 테프트를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 수상 가쓰라와 비밀회담을 하여 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침략행위를 시인해 주는 그 대가로 일본은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하는데 미국이 협조하고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를 보장해 준다는 비밀조약이다.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하여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하도록 했으며 또 미국은 <영일동맹>에 가담하여 동남아와 극동침략에 공동행동을 취할 야망을 품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의 시인하에서 마음 놓고 조선정부에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1910
년에 비극적인 <조일합방>을 감행했다.

한편 필리핀에서 미국은 어떠했는가?

필리핀에서 스페인이 물러갔고 일본도 패전하여 떠나갔는데도 미국은 필리핀을 떠나가지 않고 반공이라는 이유로 내정간섭을 하고 있었다. 필리핀 민중은 당연히 민중항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 농민들이 총궐기하여 외세의 식민통치에 멍이든 역사에 대한 <한풀이>로 격렬한 시위와 항쟁을 벌여 나갔다.

미국은 필리핀 민중의 항쟁에 대하여 야만적인 진압작전을 전개하여 체포한 민중들을 전쟁포로 모양으로 마구 취급하여 고문과 학살의 만행을 저질렀다. 국제적 비난을 의식한 미군의 아더 맥아더 사령관은 오히려 터무니없이 악의에 찬 변명을 역설했다.

<필리핀인들은 아직도 개명되지 못했다. 이들을 개화시키고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별도리가 없어 강제탄압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미군사령관의 탄압이며 필리핀 민중에 대한 멸시와 모독적인 변명이었던가?

제 2차 세계대전이 방금 끝나자마자 우리가 상상조차 못할 무서운 냉전체제를 형성하고 아시아 전지역을 지배하는 작전계획을 벌써 필피핀과 조선반도에서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루스벨트 대통령 시절에 필리핀에서 악명이 높았던 미군 사령관 <아더 맥아더장군>은 한국에서 악명 높은 <더그라스 맥아더장군>의 아버지이었다는 사실이다.

더그라스 맥아더는 6.25때 한반도에서 핵폭탄 사용과 압록강까지 북진을 웨치다가 해임을 당했다. <아더>와 <더글라스> 이 악명 높은 두 장성이 부자지간이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부전자전이라든가? 아버지와 아들의 유전자 속에는 제국주의적이며 야만적인 침략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1947년에 미국은 필리핀과 <군사기지 사용조약>을 맺었는데 그 조약에는 심각한 군사기지 환경오염에 대한 조항이 전혀 들어 있지 않는 불공정한 조약 이었다. NGO 와 필리핀 민중이 미국과 필리핀정부에게 환경오염 문제와 보상을 요구하면서 투쟁을 전개 했다.

하지만 미국과 필리핀 두 정부는 민중의 요구를 모두 다 묵살하고 미국은 오히려 군사, 무역, 투자지원 등을 핑게삼아 모든 요구와 협상을 거절하고 있을 뿐이다.

필리핀 정부의 한심한 태도는 오히려 철면피 미국의 얼굴을 정당화시켜주고 있다. 미군기지 환경오염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한국 정부가 필리핀 정부의 실패한 협상의 전철을 따르고 있으니 더욱 한심하다.

가쓰라-테프트 비밀조약은 103년의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하지만 오늘에도 미국과 일본 두 나라사이에는 비밀스러운 관계가 여전히 유효하게 작용하면서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방해하고 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은 이러한 역사적 산증거가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망각하고 오로지 친미친일 외교에만 매달리고 있다.

3. 이라크에서 김선일의 피살과 필리핀인 크루즈의 구출


2004년 5월 31일에 김선일씨가 이라크에서 단순무장단에 의하여 납치됐다. 김선일씨는 미국의 군수회사의 하청업체인 가나무역의 직원으로 이라크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선일은 서울 온누리교회 이라크선교단에 속해 있으며 사실상 선교사의
역할을 하면서 외형적으로는 가나무역에 소속된 직원으로도 일을 하고 있었다.

김선일 피살사건의 진상파악은 너무나 복잡하고 정보의 조작으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엉킨 실타래를 풀듯이 극히 간략하게 사건에 관련된 요점만을 기술한다.

이라크에는 수없이 많은 무장단들이 7백40만정의 총기를 가지고 이라크 전역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 무장단들을 대개 둘로 나눈다.

첫째, <단순무장단>이다. 이들은 몸값으로 거액을 요구하여 돈과 금품을 챙기는 것이 납치 행동의 주된 목적이다.
둘째, <반미무장단>이다. 이들은 몸값보다 우선하는 것은 정치적 목적으로 납치를 하고 있다. 단순무장단보다 더 강력하고 때로는 무참하게 살해도 한다.

김선일은 2004년 5월 31일에 납치됐는데 처음에는 <단순무장단>에 의하여 납치를 당했다가 6월10일에 <반미무장단>에로 넘겨졌으며 6월 21일에 비참하게 <반미무장단>에게 살해를 당했다.

김선일이 속해 있는 가나무역의 사장 김천호는 6월 3-4일에 분명히 김선일의 납치사건을 알고 있었으며 미군당국을 통해서 알게 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이라크 현지에 있는 온누리교회 선교팀은 6월 10일에야 비로소 김선일이 납치된 사실을 알았고 그때부터 구명을 위하여 기도모임을 했다고 현지에 있던 정병하 (익명) 직원이 밝혔다.

그런데 김천호 사장이 김선일 구명운동을 시작한 날은 6월 17일로 밝혀졌다. 어찌하여 김천호 사장은 김선일 구명운동을 서둘지 않고 13일 동안 잠잠했던가?
김선일을 납치한 <단순무장단>은 가나무역측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기 때문에 더 기다릴 수 없어서 김선일을 <반미무장단>에게 넘겨 주었다는 것이다.

김천호 사장은 김선일 구명운동을 서두르지 안했을 뿐만아니라 이라크주재 한국대사관에도 알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 후에 밝혀졌다.

왜 그랬을까? 김천호 사장은 한국대사관에 알리지 않은 이유를 횡설수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독자적 노력으로 능히 석방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2) 이라크인 고문변호사가 한국 대사관에 알리지 말라고 헸기 때문이다.
3) 미군당국도 알리지 말라고 했으며 나는 미군당국을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후에 미군당국에 속은줄 알고 실망하고 분노했다.


이유야 어쨋든 김천호 사장은 고의적이든 고의적이 아니든 간에 양심적 마비와 정신적 혼미상태에 빠진 가운데 김선일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고 있었다.

결국 가나무역의 김천호 사장은 미군당국에게 속았고 또 미군당국은 고의적으로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김천호 사장을 이용하여 미군당국의 목적을 달성했다.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 김선일은 무참하게 살해를 당했던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김선일 납치사건이 오리무중에 빠져서 아무도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그 혼돈의 기간에, 이라크- 서울- 워싱톤 정가에서는 활발하고도 급속도로 <한국군 이라크 추가 파병>을 위한 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은 김선일 납치사건으로 인하여 한국사회가 시끄러워질 것을 염려하여 우선 비밀로 처리를 해놓고 급속도로 이라크-서울-워상톤 세 나라가 분주히 오가면서 <추가파병> 문제를 결판냈던 것이다.

드디어 6월 18일에 <한국군 이라크 추가파병>이 공식 발표됐다.

미국은 김선일 파납사건으로 인하여 한국에서 한국군 추가파병에 대하여 반대여론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사전방지책으로 김천호 사장을 이용하여 김선일이 납치된 것을 당분간 비밀로 하고 구명운동도 지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2004년 6월 18일에 한국은 추가파병을 공식발표 했다. 한국의 추가파견발표에
대한 보복으로 <반미무장단>은 김선일을 살해했고 6월 21일에 미군당국은 김선일의 시체를 어느 길가에서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김선일은 TV에서 <한국정부에게 저를 살려 주십시요>라고 애타는 호소를 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김선일의 호소를 외면하고 묵살했을 뿐만 아니라 워싱톤을 비밀리에 분주하게 왕래하면서 미국의 추가 파병요구를 그대로 수용했다.

이라크 <반미무장단>은 한미 양국이 한국군 추가파견을 결의하고 발표하는 과정을 지켜 보고 있다가 한국에 대한 보복으로 김선일을 결국 살해했던 것이다.

또 미군당국은 김선일이 결국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으면서도 김천호 사장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고 시간끌기 작전을 하면서 <파병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미국이 김선일 살해를 시인한 후에야 비로소 김천호 사장은 미국에게 속은것을 알았다. 김천호 사장만 속은 것이 아니라 온누리교회 선교팀과 이라크주재 한국대사관도 미군당국의 음모작전에 의하여 모두 다 속임을 당하고 있었다.

김선일은 <선교>라는 환상을 품고 이라크에 갔다. 하지만 이라크에서 미군들의 악행들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김선일은 현장에서 목격하고 직접 자기 자신이 록화한 video 를 가지고 한국에 돌아와서 친구들에게 꼭 보이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김선일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국군 추가파병 교섭이 진행 되고 있는 와중에서 희생양이 되여 비참하게 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이라크에서 필리핀인 <크루즈>의 납치사건은 어떻게 됐던가?

2004년 7월 8일에 필리핀 노동자 크루즈가 이라크 <반미무장단>에게 납치됐다. 반미무장단은 TV를 통해서 크루즈의 눈물의 호소를 방영했다. 반미무장단의 요구는 몸값이 아니라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는 필리핀 군대를 7월 20일까지 완전히 이라크에서 철군시키라고 하는 정치적 요구이었다.

피납자 크루즈의 TV 호소 광경을 청취한 필리핀 민중들은 즉각 필리핀 정부를 향하여 이라크에 파송된 필리핀군을 곧 철수시켜서 납치된 크루즈를 구출하라고 데모를 했다.

필리핀의 <피플파워>는 마르코스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필리핀은 아라크에 59명의 병력과 경찰, 의료인력 등을 파견하고 있으며 미군기지에서 요리사와 청소부, 기술자 등 4,100명이 일하고 있다.

필리핀정부는 <피플파워>가 웨치고 있는 요구에 즉각 응했으며 또한 이라크의 <반미무장단>의 요구도 모두 다 수용하여 즉각 행동으로 실천하기로 결의 했다. 필리핀 정부는 우선 민중을 안심시켰고 가족 식구들에게도 굳게 약속을 했다.

그리고 필리핀 정부는 파병 59명을 이라크에서 철수하기로 결단을 내리고 이라크 무장단에게 공식통고 하고 필리핀 언론을 통하여 전세계에 발표를 했다.

59명의 군인들의 생명을 구해낸 것은 물론이고 4,100명이 이라크에서 일하고 있는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이라크의 <반미무장단>과의 화해와 협조를 요구하는 친선의뜻을 표시했던 것이다.

납치됬던 크루즈는 2004년 7월 22일에 귀국하여 마닐라에서 열광적인 민중의 환영을 받았다. 크루즈는 석방과 귀국 소감을 <내 생명을 우선시한 정부와 국민에게 감사한다>라고 발표했다. 크루즈는 납치된지 14일만에 아내와 아들 딸이 눈물로 기다리고 있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필리핀 국민은 80%가 필리핀 정부와 대통령의 용단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한편 미국의 반응은 필리핀 군대의 철수와 크루즈 석방에 대하여 어떠했나? 미국의 반응은 비인도적이며 패권주의적 본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편이상 미국의 반응을 ㄱ,ㄴ,ㄷ 순으로 기술한다.

ㄱ. 필리핀에 대한 강한 항의의 표시로 주필리핀 미국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했다.
ㄴ. 미국 정계는 필리핀 정부에 대한 적개감을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ㄷ.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한 사람을 위하여 너무 비싼 대가를 지불한 것은 잘못이다.
ㄹ. 필리핀은 무장단체에게 잘못된 신호를 주어 납치에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됐다.
ㅁ. 미국 국무부와 백악관은 필리핀에 대하여 매우 실망한다. 일부 극단주의자들 때문에 잘못된 신호를 이라크 무장단에게 보낸 것은 실망스럽다.
ㅂ. 야만적인 테로리스트와는 협상은 절대 없어야 한다. 필리핀에 실망했다.
ㅅ. 바우처 대변인은 <한국을 보라> 한국은 김선일의 피살로 테러범의 야만성을 이해하고 그러나 오직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의지를 더욱 강화했다.
ㅇ.테러범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한국의 용단을 필리핀은 모범으로 배워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매우 유감스럽고 앞으로 필리핀을 주시해야 겠다.
ㅈ. 한국이야말로 김선일의 피살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에 추가파병을 결정한 것은 테러와의 전쟁에 모범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


미국의 이와 같은 억지 주장은 한국 정부의 저자세 외교에 대한 승리감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였다. 반면에 반공으로 미국에 무조건 충성하던 필리핀이었지만 이제는 <피플파워>라는 새로운 변화된 모습으로 등장 했다. 미국은 이와 같이 변화된 필리핀 민중들의 모습에 대하여 우려와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4. 필리핀에 친미 반공주의자 막사이사이 대통령color=blue>


1946년에 필리핀은 미국의 승인하에 독립을 했지만 독립 후에도 미국의 강력한 영향하에 처해 있었다. 미국은 필리핀과 <군사기지혐정> <상호방위조약> 그리고 <군사원조헙정> 등 여러 조약을 맺어 필리핀을 미국의 방위체제 안에 묶어 놓고 꼼짝달싹도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러면서 미국은 필리핀의 정치체제를 미국이 1935년에 제정한 미국의 헌법을 그대로 모방하여 보수양당 체제를 취하도록 했다

1947년에 마누엘 록사스가 필리핀공화국의 초대대통령으로 취임을 했고, 1948년에 키리노가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 했다.

그 당시 필리핀에는 일본군과 싸웠던 <항일 게릴라>조직을 모체로 하고 있는 <후크단 게릴라>가 반외세투쟁을 전개하면서 사회주의 노선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친미예속정권인 카리노 대통령의 퇴진을 웨치고 있었다.

카리노 대통령 밑에서 6년 동안 국방장관을 지낸 막사이사이는 카리노 대통령을 밀어내고 1953년에 제 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지방활동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로 인하여 1957년에 죽었다.

막사이사이는 1947-1953 국방장관으로 6년과 그리고 대통령으로 4년 동안 모두 합해 10년 동안 활약을 했는데 반공주의 선봉자로서 필리핀에서 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유명한 친미주의 노선의 정치가이었다.

막사이사이의 주된 활약은 필리핀의 사회주의 게릴라들을 소탕하는데 공을 세 움으로 유명해졌다.

그 당시 필리핀에서 막사이사이의 존재는 <필리핀의 이승만>이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남한의 이승만 대통령과 꼭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 막사아사이 대통령이 활약하던 시대에 한국은 어떠했는가?

1948년 5월 10일에 남한에서는 미국의 군정하에서 분단국가 남한의 단독선거를 강행하고 있었다. 제주도에서 남한의 단독선거에 항의하여 이른바 <제주도항쟁>이 일어났으며 군정하의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 총인구의 ¼인 8만명을 살해했다.

제주도 항쟁은 곧 이어 <여순항쟁>으로 또 하나의 항쟁을 낳게 하였다. 여순항쟁을 주도하던 민중의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친애하는 동포여러분, 우리는 조선인민의 아들이고 노동자농민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조국의 방위와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
고 있읍니다>

<제주항쟁>과 <여순항쟁>은 일제하에서 침략의 멍이든 민중들이 남한 내부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민족운동 항쟁이었다. 그러므로 민족운동으로 자리를 잡아 온 민중세력에 근거한 조직력이 미국군정과 이승만 정권을 향한 항거와 투쟁으로 벌여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필리핀에서도 똑 같은 현상이 마찬가지로 같은 시대에 전개되고 있었다.

필리핀이 독립을 쟁취했다고 떠드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미예속과 미국의 원조에 만족해 하는 친미와 친일세력들이며 이런 세력들은 필리핀에서 외세를 위하여 대리통치자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필리핀에서 자연히 또 마땅히 <필리핀판 제주항쟁-여순항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필리핀 민중의 항쟁은 미국의 재식민지 침략에 대한 항쟁이었다.

필리핀에 38선과 이승만은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미군의 지원을 받아 사회주의 게릴라를 무참하게 탄압하고 살해하는 막사이사이가 있었다. 무소불능의 막사이사이의 폭정과 남한의 이승만 정권의 무서운 폭정은 두 나라에서 함께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어쨋던 미국의 안목으로 역사를 평가하고 기록한 필리핀의 역사기록에 의하면 필리핀은 막사이사이 같은 유능한 지도자에 의하여 그리고 미국의 강력한 원조를 받아들임으로써 필리핀은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이 평정되고 경제성장이 궤도에 올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는것이다.

또 비행기 추락사고로 인하여 사망한 막사이사이 대통령에 대하여 미국은 필리핀의 카리스마적 위대한 인물의 손실이라 평했다.

막사이사이 대통령이 미국에게 얼마나 요긴하고 중요한 인물이었던가 하는것은 그가 죽은지 한 달여 뒤 미국의 <폭펠로 재단>이 필리핀 정부에게 서신을 보낸 것으로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 편지 내용은 막사이사이의 업적과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막사이사이상>을 제정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필리핀 정부는 쾌히 동의하여 1957년부터 매년 <아시아의 노벨평화상>이라는 별칭으로 <막사이사이상>을 그의 생일날인 8월13일에 마닐라에서 시상하고 있다. 시상금은 미국 <록펠로 재단>에서 지불한다.

지금까지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한국인은 장준하, 김활란, 김용기, 이태영, 장기
려, 김임순, 법륜스님 그리고 김대중 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여기 깜짝 놀랄 특기할만한 소식이 하나 있었다.
인도에서 빈곤퇴치 운동가로 2002년 수상자로 선정된 판데이씨는 자기를 수상자로 선정해 준 위원회의 성의에는 감사하여 상장은 감사히 받아 들이겠다. 하지만 상금 5만 달러는 거절하여 반납한다고 통고했다.

미국 록펠로재단의 돈이 그 어떤 돈인가? 록펠로재단이 제3세계에서 침략과 착취로 무진장 벌어들인 돈이 아닌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반대하는 뜻으로 상금 5만 달러를 반납한다>라고 했다. 그는 또 <미국이 과학을 이용하여 제 3세계에서 인명을 살해하는데 반대한다>라고 덧붙였다.

막사이사이는 <필리핀의 이승만>이라고 말할 수 있는 대통령이었으며 필리핀의 <제주항쟁>과 <여순항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미국을 등에 업고 총칼로 필리핀 민중을 수없이 많이 학살한 죄인이었다.

그런 막사이사이를 미국은 필리핀의 카리스마적 지도자이었다라고 칭송을 하고 있는데 대한 항의로서 수상자 판데이씨는 수상금 5만 달러를 반납했던 것이다. 판데이씨의 행위는 지금 몰락이 임박해 오고 있는 소용돌이 속에서 점점 퇴색 되어 가고 있는 미국의 모습을 분명히 바라볼 수 있다.

한국에서도 앞으로 혹시 막사이사이상 수상자가 또 탄생한다면 판데이씨처럼 용감하게 5만 달러를 반납하는 멋있는 소식을 듣게 되길 바란다.

5. 이멜다의 구두 3000 켤례와 마르코스의 행방은 어디로? color=blue>


막사이사이 대통령이 죽은 후에 부통령이던 가르시아가 제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임기를 채웠고 1961-65년에 제5대 대통령으로 마카파갈이 집권했다. 위의 두 대통령들은 하나 같이 전임 막사이사이가 닦아 놓은 친미의존 일변도의 정치적 노선을 고수하고 있었다.

막사이사이의 후광으로 무사안일주의적 통치능력에 대한 필리핀 민중의 불만과 항의로 인하여 마카파갈 대통령의 정권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필리핀 민중은 친미의존을 끝내고 민족의 자주자립적 정권을 요구하였다. 내셔널리즘의 팽창이 드디어 친미의존적 무능한 정권을 무너뜨렸다.

기회주의적 정치의 명수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필리핀 민중의 소요와 전임 대통령의 친미의존 일변적 정책의 약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1965년에 필리핀의 제 6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마르코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을 대항하여 싸우는 게릴라에 가담했던 경력을 과시했고 또 대통령 보좌관 경력과 상원의장 등 화려한 이력 덕분에 무난히 어려운 시국에 민중의 기대를 안고 대통령에 무난히 당선될 수 있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 친미일변도의 외교정책을 벗어나 아시아 외교를 축으로 하는 외교정책의 다변화를 국민들에게 선보였다. 그는 공산권 국가와도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한편 농지개혁과 식량증산, 상업재편성 등 다양한 사회경개발에 주력하는 시책을 추진해 나감으로써 민심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1969년에 재선되여 제7대 대통령으로 재집권에 또 성공했다.

하지만 마르코스 대통령은 1972년에는 영구집권을 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기 위하여 계엄령을 선포했다. 뿐만 아니라 1973년에는 <새로운사회건설>이라는 슬로건 아래 대통령에게 모든 권한을 집중시키고 대통령이 군부의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새로운 법률을 제정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국무총리직까지 겸임하게 하는 한편 부인 이멜다를 마닐라 시장으로 임명하고, 아들을 대통령 보좌관으로 세우는 등 족벌 독재체제까지 구축 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집권 초기에 민중에게 과시했던 서민위주의 정치 풍토와 탈미국의존적 정치노선을 크게 선전한 것은 거짓말이었다. 마르코스 대통령의 기만적 통치방법은 순진한 민중들의 신뢰와 지지에 대한 큰 배신행위이었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민중을 얕보고 그동안 폭정을 감행한 여러가지 죄악들을 글로
일일히 적는다 해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러면 어떻게 마르코스 대통령의 이와같은 극악의 독재 정권이 20여년을 끄떡없이 계속될 수 있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친미의존의 정치적 한계선을 넘어서서 아예 <친미예속정권>으로 추락시키고 말았다.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사령부가 필리핀 정권을 직접 지휘하고 운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코스 대통령의 무소불능의 장기집권이 능히 가능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르코스 대통령의 집권 18년재 되는 해인 1983년에 마르코스 정권에 치명적 사건이 벌어졌다. 반체제 운동가로 명성 높은 아키노 상원의원이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끝내고 죽음을 각오하고 위험을 무릅쓰며 귀국하고 있었다.

아키노 상원의원이 마닐라 공항에서 비행기에서 내리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필 리핀 군부는 아키노 의원을 총격으로 살해했다. 아키노 암살에 대한 민중의 항쟁은 3년동안 계속됐다. 날로 날로 격화되고 있는 필리핀 민중의 항쟁에 못 이겨 말르코스 대통령은 할 수 없이 1986년에 조기 대통령 선거를 선포했다.

피살된 아키노 상원의원의 미망인 코라손 여사와 마르코스 대통령이 서로 대항을 하는 진기한 대통령 선거전이 벌어졌다. 선거 결과는 부정선거라는 민중의 항의 속에서 두 진영이 서로 당선됐다고 주장했다.

서로 양진영에서 대통령 당선을 주장하고 취임식을 거행하는 혼란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때 필리핀 군부가 코라손 아키노 여사의 손을 들어주어 코라손 아키노의 당선과 취임식 행사를 공식 시인했다.

독재자 마르코스는 할 수 없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고도 놀라운 것은 왜 어찌하여 마르코스의 군벌정권이 마르코스를 외면하고 정적인 코라손 아키노의 손을 들어주고 대통령 취임을 선언해 주었을까?

대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미국의 압력으로 군부가 행동을 취한 것이고 마르코스 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하 군벌에게 큰소리 한번 치지 못하고 순수히 대통령직 사표를 내고 일절 말없이 미국이 마련해 준 하와이로 망명을 한 것이다.

미국이 20여년동안 동남에서 소련과 중국의 남하를 막기위하여 요긴하게 사용했던 마르코스이지만 그의 지나친 독재와 부패로 미국의 얼굴에 x칠을 했다. 미국은 할 수 없이 마르코스에 대한 <용도폐기> 처분을 결정했던 것이다.

한국의 독재자 이승만의 운명과 같은 같은 배를 탔던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는 하와이에서 두 번째로 등록한 망명객이 됐다.

마르코스는 1965- 86년 2월까지 20여년을 장기집권 독재를 하다가 민중혁명에 의하여 축출되여 부인 이멜다와 함께 하와이에서 망명의 여생을 살다가 1989 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구두 3000켤레를 남겨둔 채 말라카낭궁에서 쫓겨나 하와아로 망명 했던 사치와 부패의 상징으로 유명했던 올해 80세인 이멜다는 현재 마닐라시에서 70여평 되
는 빌라에서 비교적 조용하게 살고 있다.

이멜다는 마르코스의 시신이 방부처리 되여 유리관 속에 반듯이 누어 있으며 경비원도 별로 없는 <마르코스 소기념관 >을 가끔 방문하고 있으며 <엄마의 마음>을 소재로한 자서전 같은 글을 쓰고 있다고 전해 진다.

또 놀라운 이야기는 100억 달러 되던 그녀의 개인 재산이 국가에 몰수 당했지만 그래도 이 가운데서 50억 달러를 되찾기 위해서 901건의 민-형사 소송을 국가를 상대하여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소송의 결과에 대하여 필자는 관심이 전혀 없지만 들려오는 80세 그녀의 발언에 대하여 귀를 기울인다.

< 나는 김일성 주석님도 만나보았고 박정희 대통령도 만나 보았는데 남이 북을 적대시하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지금은 북남이 대화를 한다니 가슴이 뭉클했다>

< 내가 구두 수집 등으로 물욕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눠줄 때가 제일 행복하다>

6. 피풀파워의 여파로 등장한 코라손 아키노 여성 대통령color=blue>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 후보자가 막강한 마르코스 현직 대통령의 부정선거를 이겨내고 1986년에 제8대 대통령에 취임을 했다. 취임한 아키노 대통령의 승리는 이른바 <피플파워>라고 하는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로 이루어진 승리이었다.

그녀는 남편 아키노의 민주화를 위한 정치활동을 뒤에서 말없이 오래동안 지원했다. 남편이 감옥에 구속되여 7년 7개월 동안 있을 때 남편의 편지를 몰래 외부에 전달하는 숨은 역할을 하였다. 출옥 후에 망명생활을 했고 귀국하여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총격으로 남편이 쓰러져 죽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새로 취임한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은 임시헌법을 선포하고 곧 이어 완전한 헌법의 초안을 만들도록 특별위원회를 지명했다. 새로 만들어진 헌법을 1987년 2월에 전국민의 투표에 붙쳤으며 절대적인 지지로 통과됐다.

새헌법은 진보적인 헌법으로서 국민들이 민주적 권리를 누릴 수 있고 IMF로 인한 피해로부터 민중을 보호하는 법이며 또한 노동운동과 좌파활동 등을 가능케 하는데 필수적 법률들이었다. 마르코스 독재정권 시절에 불법화됐던 모든 악법들들을 철폐하는 큰 변화를 일으켰다.

막사이사이-마르코스로 이어지는 필리핀의 어둡던 정치체제는 이제 끝장이 났다.
그동안 굴하지 않고 싸워온 민중항쟁 <피플파워>는 아키노 대통령의 새 정권하 에서 개혁과 민주질서를 다시 회복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됐다.

필리핀에서 오래전부터 활약하던 공산주의 게릴라들이 80년대에 들어서서 <신인민군 NPA>으로 발전하였는데 초기의 350에서 아키노 대통령 당시에는 20,000명으로 증가했다. NPA는 친미독재정권이 제안하는 협상에는 일절 응하지 않고 강경으로 맞서고 있었다.

이런 상항하에서 아키노 대통령의 정권이 들어선 후에 필리핀 군부의 쿠테타 시도가 5회나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아키노 대통령의 정권을 흔들려는 친미적 군부의 소행이었다. 또한 이에 따른 군부의 동요는 아키노 대통령이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서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독재정권 시대에 뿌리를 깊이 내린 기득권층과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지주들이 아키노 대통령을 얕보고 개혁정책에 협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빈부의 격차는 점점 더 심화되어 정치적 경험이 부족한 아키노대통령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있었다.

또한 미국이 아키노 대통령의 성공을 바라고 있을리가 만무한 것이었다.

필리핀에서 정부군과 모택동주의자라고 하는 공산당원들과의 분쟁은 최소 35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아키노 대통령의 정권이 들어서서 정부의 대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전을 방불케 하는 교전상태가 도서 여러 지방에서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1992년 5월에 아키노 대통령은 6년동안의 임기를 힘겹게 끝내고 그녀가 국방장관으로 임명한 라모스를 적극 지원하여 후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라모스는 4성 장군으로 군의 최고 사령관 이었으며 예편 후에 이키노 대통령이 국방장관으로 임명했다.

1992년 6월30일에 라모스 국방장관이 필리핀의 제9대 대통령으로 취임함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통하여 아키노 대통령은 명예롭게 퇴임할 수 있었다.

라모스 대통령은 임기 6년제 헌법을 개헌하여 장기집권을 꿈꾼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최종에 포기하고 순수히 6년 임기를 끝내고 1998년에 퇴임했다. 퇴임한 리모스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양면으로 엇갈리고 있었다.

긍정적 평가는 임기동안에 빈민층 비율의 감소, 연간 순수입 천 달러 상승 그리고 GNP 10%성장 등을 들어 긍정적으로 평가를 했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부정적 평가도 만만치 않다.

라모스 대통령 집권 6년에 실업자 약 323,000명이 발생했고, IMF로 정부의 재구조화를 최우선으로 한 정책 비판과 그리고 자유화와 탈규제, 민영화 등으로 인해 경제가 근본적으로 곤두박질하였다고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위의 평가보다도 1998년 5월1일 국제노동절기념일에 <필리핀 바얀당>이 내 놓은 라모스 대통령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특이하다.

미국-라모스 체제는 억압적인 노동수출정책으로 수많은 필리핀인들을 해외로 내보내 위험한 노동과 노예임금으로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고 있다.

미국-라모스 체제는 우리 노동자들을 <현대판영웅>이라고 추겨세우면서 사실은 우리를 <현대판노예>로 만들어 놓고 있다. 우리가 연간 7억 달러를 송금하여 벌어들이는 달러에 대하여 엄청난 강제징수, 수수료 그리고 이중과세 등으로 착취를 당하지만 아무도 우리를 미국-라모스 체제로부터 보호해 줄 힘은 없다.

미국-라모스 체제는 언제나 선거때만 되면 금과 총의 권력이 더욱 요동치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근본적으로 토지개혁과 민족산업화의 실현 그리고 민주적이고 민족적인 필리핀을 건설하는 길 뿐이다라고 필리핀의 <피플파워>는 오늘도 웨치고 있다.

7. 다시 우경화하는 오늘의 필리핀 color=blue>


라모스 대통령이 퇴진한 후 오늘까지 두 명의 대통령이 등장했는데 두 사람 모두 다 우경화 대통령들이다.

1998년 6월에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영화 배우 출신으로 미국의 레간과 <닮은꼴>의 대통령이다. 그는 레간처럼 영화 배우일 뿐만 아니라 또 반공주의 전도사로도 레간을 꼭 닮았다.

그는 독재자 마르코스 시대의 악명 높았던 반공법을 다시 부활시키려고 시도했으며 IMF-세계은행의 정책명령을 그대로 준수하여 외국의 독점자본의 도입과 무차별 민영화 등을 강행하여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었다.

천주교 신추기경을 선두로 하는 교회와 좌파세력들 그리고 아키노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민중들 8만명의 마니라 시민이 데모로 시가행진을 했다.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반대하여 필리핀 좌파들이 재편성을 유발하여 노동자연맹, 필리핀 공산당, 필리핀좌파연합세력과 천주교회 그리고 공무원노동총연맹 등이 총궐기하여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하야를 주장했다.

영화 3류의 희극배우 모양으로 출연한 배우출신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6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친미극우파정권>이라는 민중의 심판을 받고 집권 3년만에 2001년에 부통령인 글로리아 아로요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쫓겨났다.

아로요 여성 대통령은 어떤 인물인가?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피플파워>에 의하여 퇴진 됐는데 아로요 부통령은 군부의 <절대 지지>에 의하여 그의 후임으로 대통령에 취임을 했다.

이 얼마나 필리핀의 정치적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가?

필리핀 <피플파워>가 마르코스의 철통 20년 독재정권 타도에 성공했다. 그리고 미국-라모스 체제의 정권도 무너뜨렸다. 뿐만 아나라 친미적 희극배우 레간 스타일의 에스트라다 대통령도 <피플파워>에 의하여 도중하차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지금까지 필리핀 역사에서 <피를파워>의 위력을 유감 없이 과시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군부가 우파인물인 아로요를 대통령으로 또 다시 세웠으니 말문이 막힐 뿐이다.

그것은 마치 한국에서 4.19의 위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부세력이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으로 연결되었다가 또 다시 오늘의 이명박으로까지 작동하고 있는 한국의 맥락과 같은 것이 아닌가?

이유야 어쨋던 아로요 여성 대통령은 2001년 1월에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2004년에 부정선거의 론란 속에서 또 다시 재선되어 제 12대 대통령으로서 2010년까지 특별한 사유가 없는한 임기가 보장되어 있다.

2007년 어느날 아로요 대통령은 기자회견 장소에 나타났다. 기자들의 질문공세에 아로요 대통령은 여성적인 신경질 반응을 일어켜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기자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마르코스 대통령과 라모스 대통령 독재 때 기득권갑부들이 지금도 여전히 어마 어마한 재산가들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대통령께서 우려하지 않으십니까?>

아로요 대통령은 질문을 듣고 그저 대답을 회피한 것뿐 아니라 아예 기자 회견장을 박차고 나갔다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무엇은 말해 주는가?

< 그래 나는 전임 두 독재대통령들의 후계자이다>
라고 하는 사실을 행동으로 나타내 보인 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필리핀의 사회현실은 아직도 정치와 경제에 있어서 오랜 독재정치와 미국위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엘리트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이들 엘리트 중심의 세력계층들이 고의적으로 필리핀의 우경화 정책을 부추기고 있으며 우경화된 군부가 요지부동하게 강성화 되고 있는 것이다.

아로요 대통령의 집권으로 인하여 필리핀에서 세계화로 표현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와 신식민주의가 득세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현재 필리핀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과거와 현재의 운동세력들의 연합체인 <민족민주전선>과 <신인민군조직> 등 여러 필리핀의 사회운동세력들이 우경화를 막고 경제독점 새력인 엘리트 계층과 대항하여 결사적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얼마전 필리핀 카라파탄 지방에서 아로요 대통령의 정부군과 지방경찰이 공산주의게릴라라는 죄명으로 833명을 암살했고 또 193명이 실종됐다고 한다. 게릴라는 아니지만 조금 접근만해도 게릴라 지원이라 하여 죽임을 당한다고 한다.

필리핀에 수천의 섬들이있는데 그 가운데서 술루군도는 가장 아름다울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손색이 없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섬들이다. 하지만 오늘의 필리핀의 고난의 현실로 인하여 아름다운 술루군도의 섬들은 세계에서 가장 무섭고 제일 위험한 곳이 되고 있다.

이 섬에는 가는 곳마다 군인들이 감시하고 위협하여 언제 어떻게 죽임을 당할지 알 수 없으며 아로요 정권이 들어선 후부터 술루군도의 19개 주요 도시에서 9개 도시가 초토화되여 75,000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지면상 제한으로 아로요 대통령의 우경화된 집권 이후 8년 동안에 필리핀 민중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현주소에 대한 이야기들은 여기서 불가불 그쳐야 겠다.

하지만 한 마디를 더 첨부하고 펜을 놓겠다.
< 아로요 대통령의 전쟁은 미국의 대리전이며 좌파에 대한 전쟁이다>.
아로요가 말하는 필리핀의 좌파는 결코 쇠하지 않는 <피플파워>이다.

끝. (2/24/09 류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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