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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의 자주화의 길 가로막은 잔인한 제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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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9-02-05 16:09 조회2,8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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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재미동포 통일운동 원로,은퇴 목사,뉴욕 거주)는 이번부터 남미,아프리카 나라들의 연구를 마치고
아시아의 첫 나라 인도네시아를 소개하면서 수많은 나라들로부터 상처받은 나라라고 지적하면서 자주적인 노선을
고수했던 수카르노 대통령 시대가 긑나고 지금은 유도요노 정권으로 넘어 왔으나 또다시 미국이 넘보고 있다고
진단했다.[민족통신 편집실]



인도네시아의 자주화의 길 가로막은 잔인한 제국주의

건국의 아버지 수카르노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음모



*글:유태영 박사(재미동포 통일운동 원로, 은퇴 목사)

<##IMAGE##> 나는 민족통신의 요구로 남미 나라들, 아프리카 나라들이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핍박 받았던 역사를 연구한 이후 이번부터 아시아 나라들의 대한 역사기행을 쓰기 시작하면서 또 다시 충격을 받는다. 우선 아시아 첫 나라로 인도네시아를 고찰하는 글을 쓰기 위해 연구한 결과는 인도네시아도 제국주의자들의 발굽에 밟혀 상처들을 입고 온 나라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기원전 3000년의 유구한 역사로 시작된 인도네시아가 16세기에는 풀투갈, 스페인에 침략당했고, 17세기에는 네덜란드와 프랑스에 침략당했고, 20세기에 들어 와서는 일본에 강점 당하여 3년 동안 시달리다가 1949년에 수카르노 대통령에 의해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들이 받은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인도네시아는 또다시 미국이 눈독을 드리는 나라로 되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인도네시아는 13,67의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섬나라이며 6,000개의 섬에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인구는 2억3천 160만으로 세계 4위의 나라이다. 비록 섬나라이기는 하지만 나라의 면적은 200만 km2 로 한반도의 9배에 해당하는 큰 나라이기도 하다.

제일 큰 섬은 보르네오 섬인데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섬이다. 인도네시아에는 220개의 활화산이 있는데 크라카타우 화산은 유사이래 가장 큰 화산으로 유명하다.

최근 미국 중앙 정보부의 자료에 의하면, 인도네시아의 전체 인구 2억3천만명의 86%가 무슬림인데 세계에에서 가장 많은 무슬림국가이다. 반면 인도네시아의 기독교인은 5.7%이며 천주교인 3%, 힌두교인 1.8%이며 그리고 기타 종교인들이 3.4%를 차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국민은 300개 이상의 인종집단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언어는 250여 종류의 언어를 가지고 있지만 주로 17개의 언어를 재각기 사용하고 있다. 공식 언어는 인도네시아어이지만 약 3천만 이상의 인구가 중국어, 영어와 네덜란드어를 사용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다양한 인종집단들은 세 개의 집단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첫째, 힌두교를 믿는 자바인, 순다인, 마두라인 그리고 발리인 등으로 전체인구의 2/3를 차지한다.

둘째, 이슬람교를 믿는 말레이인, 마카사르족으로 주로 스마트라섬과 남부의 셀레베스 섬에 살고 있다.

세째, 다야크족을 비롯하여 원주민과 중국인들이 몇 세대를 살고 있는 집단들인데 국가가 관장하는 생활권에서 벗어난 다양한 부족들의 집단들이 있다.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섬은 자바섬, 수마트라, 칼라만탄, 술라웨시, 이리안자야 등 5의 섬을 들수 있다. 인도네시아라는 명칭은 <인도 도서 Indo Nesos> 라는 뜻인데 영국인 침략자들이 19세기 말엽에 명명했다고 한다.

1. 인도네시아의 간추린 역사


인도네시아의 고대 역사는 BC 50만년 전의 것으로 추청되는 <자바원인>의 뼈가 발굴되여 이곳을 인류의 발상지의 하나라고 고고학자들은 주장한다. 그리고BC 3000년경부터 아시아에서 몽골계 이주민들이 인도네시아에 정착하여 수세기를 살면서 인도-아리안계의 사람들이 혼혈하여 후세에 큰 족속을 이루었다.

AD 1-2세기 이후부터 힌두 및 불교의 시대를 이루었고 8세기경에 불교가 번성했으나 13세기에 이르러서 페루시아로부터 회교 상인들이 인도네시아에 접근하기 시작하여 힌두교 왕국을 회교로 개종시켰다.

1511년에 포르투갈이 인도네시아를 침략하여 말레이 반도를 처음 점령하였다. 말레이 반도를 점령한 포르투갈은 그곳의 역사 깊은 말라카 회교왕국을 무너뜨렸다. 이것이 서구의 기독교 문명국들이 인도네시아를 침탈하는 첫 발걸음이었다. 포르투갈의 뒤를 이어 스페인이 뒤따라 왔으며 스페인은 인도네시아인들에게 Catholic 을 전파 했다.

1602년에는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에 침입하여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주의적 침략시대의 문을 열어 놓았다. 네덜란드인들은 인도네시아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를 개설하면서 침략을 시작했으며 1799년에는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의 여러 군도의 전역을 거의 다 장악하였다. 침략자들은 농산물 생산과 기타 자원들을 본격적으로 착취하여 본국으로 운송했다.

프랑스가 인도네시아를 일시 점령 했다. 하지만 나폴레온의 몰락으로 인하여 프랑스가 인도네시아를 떠나갔으며 이번에는 영국이 인도네시아를 붙들고 손에 넣고 지배하려 했다.

그런데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 대한 기득권을 되찾기 위하여 영국에게 머리 숙여 타협을 간청했다. 1814년에 런던에서 두 나라의 합의에 의하여 영국은 인도네시아에 대한 통치권을 포기하고 네덜란드에게 통치권을 되돌려 주었다.

네덜란드는 영국의 양보로 또 다시 인도네시아의 식민통치권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이리하여 네덜란드는 영국의 허락을 받고 1815년부터 인도네시아에 대한 식민통치를 또다시 재개했다. 네덜란드는 나포레온 때문에 일시 빼앗겼던 인도네시아에 대한 식민지통치권을 다시 회복했던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들에서는 네덜란드의 가혹한 통치에 대하여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네달란드의 침략자들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도서마다 하나씩 하나씩 진압하여 끄떡없이 통치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네덜란드의 침략자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투사 수카르노가 선두에 서서 1927년에<인도네시아 국민당>을 창설하여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주장하여 운동을 전개 했다. 네덜란드의 침략자들은 시대적 변화에 의하여 식민통치의 석양이 가까이 임해오고 있음을 마음속에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침략자들은 오히려 최후의 발악으로 독립운동가 수카르노와 그의 일당을 검거하여 투옥 시켰다. 스카르노는 1929-31년에 반둥에 있는 네덜란드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1933-42년에 스마트라 섬에서 유형생활을 했다.

1942년에 눈치 빠른 일본은 석양에 이른 네덜란드 침략자들의 발악적 행동과 또 한편으로 투옥된 수카르노가 곤경에 빠져 있는 기회를 교묘하게 역이용하여 그 틈새에 끼어들어 재빠르게 인도네시아를 침공하는데 일단 성공했다. 일본은 1945년에 연합군에게 항복할 때까지 3년동안 인도네시아를 통치했다.

세계 2차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물러간 후에 교활한 영국군과 네덜란드의 침략자들은 인도네시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되돌아와 4년동안 명목상 네덜란드의 연방제를 주장하면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지연시키고 방해를 했다.

하지만 스카르노의 지칠줄 모르는 독립을 쟁취하려는 의지는 4년동안의 투쟁 끝에 드디어 1949년에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했으며 국제연합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시인하고 인준 했다.

인도네시아는 서구 침략세력의 지배를 받은지 370년이 되는 1949년에 드디어 서구 세력들과 네덜란드 그리고 일본을 물리치고 주권국가로서 독립을 쟁취했다.


2. 건국의 아버지 수카르노 대통령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이 인도네시아에서 떠나간 후 1945년 8월17일에 인도네시아는 독립을 축하하면서 수카르노를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해방과 독립을 축하하면서 대통령을 추대한 인도네시아에 이게 웬 일인가? 네덜란드가 또다시 돌아와 인도네시아의 식민통치를 주장하면서 일본에게 빼앗겼던 인도네시아에 대한 식민통치를 또 다시 계속하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해방과 독립의 기쁨은 사라져 없어졌고 인도네시아에서 독립투쟁을 여전히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자바섬을 중심으로 하여 수카르노가 지휘하는 게릴라전이 4년동안 또다시 계속됐다. 1949년 2월에 UN이 중재자로 나섰는데 UN이 내놓은 중재안의 내용은 네덜란드 편에 서서 네덜란드에게 유리한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연방공화국> 을 발족 시키려는 어처구니 없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미국이 주도하는 UN의 역할은 창설된 초창기부터 시종 그런 역할만 하고 있다. 수카르노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포기하고 떠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게릴라전을 줄기차게 계속하였다. 드디어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완전히 포기하고 떠나갔으며 인도네시아는 1950년 8월에 자주적 독립을 다시 쟁취했다.

수카르노는 게릴라전을 지휘하면서 <독립준비위원회> 라는 지하조직을 통하여 독립된 나라의 민중들이 공통적으로 갖추어야 할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상교화 사업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었다.

사상교화의 과제를 <건국의 5원칙 ‘판치살라’> 이라고 하는데 곧 1. 유일신의 신앙 2. 인도주의 3. 인도네시아 통일 4. 협의에 의한 민주주의 5. 사회정의 등이다. 수카르노는 위의 5대원칙을 대통령의 정치적 소신으로 삼고 변함없이 실천했다.

인도네시아 독립 후에 냉전시대가 한창이던 때에 수카르노는 국내문제 뿐만 아니라 국제문제에 대해서도 용감하게 소신을 밣히는 역할을 했다. 그는 인도의 네루,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이집트의 나세르 그리고 자기자신을 포함하여 제3세계 국가들의 중립을 강조하는 <제3세계 비동맹주의> 운동을 주도 했다.

수카르노는 1901년 6월6일에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가난한 교사 집의 독자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너무 허약하여 부모는 길조를 바라는 뜻으로 수카르노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소년기에는 친구들이 별명으로 영웅이며 독립투사라는 뜻으로 <봉 카르노> 라고 불렀다고 한다.

수카르노는 15세에서 20세에 이르는 학창시절에 어학에 두각을 나타 냈는데 그는 이슬람교의 코란을 통하여 아랍어를 습득하였고, 학교의 교과인 네덜란드어를 비롯하여 독일어, 프랑스어, 영어 그리고 나중에는 일본어까지 배웠다고 한다.

수카르노는 국가의 광범위한 정치적 영역을 망라하여 봉건영주의 문제로부터 망명중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정치 지도자들을 만나 토론을 하여 수카르노의 민족에 대한 애국심과 재능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학창시절에 그가 소유하고 있는 시적 매력과 위엄있는 풍채와 환한 인상, 생동감 있는 언행, 놀라운 기억력과 확고한 자신감 등은 수카르노를 대하는 사람들마다 수카르노는 확실히 인도네시아를 위하여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암시를 나타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수카르노는 대학에서 토목공학 학위를 받았으며 그후에 정치학과 웅변술에 철저한 소명의식을 갖고 자기자신을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 부각시켜 나갔다. 1945년 6월1일에 수카르노는 그의 여러 연설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기념비적인 연설을 했는데 그 연설의 내용이 바로 <건국의 5원칙 판치살라>이었다. 수카르노의 <판치살라> 는 인도네시아의 신성불가침적인 통치원리로 민중속에 남아 있다.

수카르노는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 자기자신은 이슬람교의 신자이며 또 인도네시아의 절대 다수의 종교가 이슬람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집권 초기부터 종교의 균등화 정책을 실시하여 넓은 영토에 수많은 종족, 다양한 종파들을 규합하여 종족간의 갈등을 해소하여 인도네시아를 명실공히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건설하려고 큰 꿈을 꾸면서 실천에 전력을 기우렸다.

1955년에 수카르노 대통령은 아시아-아프리카회의 <반둥회의>를 주최하여 인도네시아의 외교적 입지와 제 3세계 국가들의 단합을 촉구하는 역할을 감행했다.

수카르노 대통령은 1950년에 완전한 독립과 동시에 UN 에 가입했다. 하지만 그는 1965년에 UN 에서 탈퇴했다. 탈퇴이유는 무엇인가?

인도네시아 영내에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섬들중에 아직도 네덜란드와 서방 세력하에 묶여있는 섬들이 많이 있었는데 서방세력들은 서구식 의회정치를 선전하면서 인도네시아 통일국가 건설에 방해와 지장을 초래하고 있었다. 그중의 한 예가 동티모루의 복잡한 문제이었다.

수카르노 대통령은 서방이 방해공작을 하면서 명목상 주장하고 있는 <의회정치>를 반대하였다. 수카르노의 독자적인 통치방법으로 <지도민주주의> 를 제창하면서 UN 을 탈퇴하고 인도네시아의 자긍심과 주체성을 확실히 주장했다.

수카르노 대통령이 UN을 탈퇴한 또 한가지 이유는 인도네시아의 바로 인접국가인 말레시아에 UN이 군사원조를 대량으로 제공하여 인도네시아를 고립시키려고 하는 미국의 더러운 음모 때문이었다. 수카르노 대통령은 이와 같은 미국의 행태에 대항하여 사사건건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도네시아의 민중은 수카르노 대통령의 용단에 대하여 열광적으로 지지하였고 민중들은 수카르노의 정치슬로건을 노래하면서 환호했다. 수카르노 대통령이 지향하는 사회주의 정책노선을 절대 지지하는 사회주의 당원수는 1960년대초에 300만명을 확보 했다.

한편 수카르노 대통령의 사회주의적 노선을 찬동하는 민중의 수가1천 7백만에 이르고 있었다. 그당시 세계에서 3번째로 강력한 사회주의적 국가라고 평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카르노 대통령에게는 그의 굳은 신념에도 불구하고 국가운영에 있어서 허다한 문제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일본이 침략하여 4년동안 지배하는 동안에 망쳐 놓은 후유증이 남아 있었으며 또한 네덜란드 정부가 소유하고 있던 대기업들이 갑자기 4만명이나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남기고 간 피해는 속히 회복할 수 없는 크나 큰 사회적 문제이었다.

한편으로 수카르노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음모와 기도가 미극의 CIA에 의하여 항상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지원하는 인도네시아의 우파세력이 기승을 부리면서 좌파 정권과 충돌하여 지방에서의 폭동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와같은 어려운 조건하에서 수카르노 대통령은 자연히 중공과 소련으로 부터 군사적 지원과 경제적 원조를 받아 들이면서 두 나라와 유대를 강화했다. 뿐만 아니라 수카르노 대통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 주석과도 서로 왕래하면서 두 나라의 굳은 유대를 전세계에 과시하고 있었다.

1962년에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되는 Asian Games 에 이스라엘과 대만을 참가하지 못하도록 두 나라의 선수들의 인도네시아 입국을 불허하는 강경책으로 수카르노 대통령은 서방 제국주의에 맞서서 싸웠다.

미국은 수카르노 대통령이 감행하고 있는 사회주의적 국가운영과 비동맹 국가연합 운동에 대하여 제동을 걸기 위하여 전보다 더 적극적이며 더 노골적인 방법으로 인도네시아에 대한 압박을 계속하고 있었다.

미국의 Eisenhower 대통령 행정부는 중공과 소련이 수카르노 대통령에게 제공해 주는 군사적 원조와 경제적 후원을 무력화 시키기 위하여 대책을 고안했다.

미국은 중공과 소련의 원조를 훨씬 더 능가하는 대량의 물량을 인도네시아의 우파세력들과 친미 군벌집단에게 비밀리에 혹은 공개적으로 지원해 줌으로서 수카르노 정권의 붕괴를 목표로 삼고 공작을 계속 했다.

이로 인하여 서방의 군사교육을 받은 장성들과 미국의 대량의 군사원조를 받고 있는 친미군벌들은 수카르노 대통령의 사회주의 정권과 정면대결하여 서로 긴장과 대결의 관계로 점점 더 발전시켜 나아가고 있었다.

미국은 수카르노 정권과 미국이 지원한 군벌세력이 쌍벽을 이루어 평행하면서 서로 싸우도록 할 뿐만 아니라 우파 민중세력을 더 키워서 반정부 데모를 하도록 CIA 공작을 계속하고 있었다.

1956년에 미국의 CIA가 노골적으로 지원하는 반정부 쿠테타가 발생했으며 화가 난 수카르노 대통령은 미국인 고문단의 활동을 봉쇄하고 고문단 일부를 추방하여 사태를 수습 했다.

1957년에 수카르노 대통령이 쟈카르타 지방순회로 초등학교를 방문했는데 미국의 군사고문단원이 관여한 대통령을 암살할려는 총격전이 벌어졌다. 다행히 수카루노 대통령은 무사했지만 6명의 어린이들이 사망했다.

이와같은 사건들은 지면상 제한으로 일일히 다 기록할 수 없으며 다만 그 당시의 정세만 간단히 소개할 뿐이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민중은 제국주의의 압박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오히려 더 수카르노 대통령을 옹호하고 지지했다. 1962년 7월에 수카르노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전국의 국민적 지지로 선포했다.

한편 영국은 인도네시아와 직접 인접해 있는 말레이시아를 영연방으로 선포하여 인도네시아와 정면대결을 하도록 부추겼다. 수카루노 대통령은 영국에 이용당하는 말레이시아를 향하여 서방 제국주의자들의 Neocolonial Plot 이라고 크게 웨치면서 UN과 영국을 규탄 했다.

370년간 지속된 서방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종식시키고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고 대대적인 영토확장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이어 국제사회에서 비동맹국가연합 운동의 선봉자로 위상을 높인 인도네시아의 영웅적 수카르노 대통령이다.

하지만 평생 반제반미투쟁으로 지칠줄 모르고 싸워온 수카르노 대통령에게 뜻밖에 비운의 날이 찾아왔다.

인도네시아를 미국의 제물로 삼아 바치려는 미국 CIA에 매수된 우익 군부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장성급 군벌들을 제거해야 하겠다고 굳게 결심한 사회주의 계열의 영관급 장교그룹이 있었다.

이 젊은 영관급 장교들은 1965년 9월 30일에 친미 육군 장성들을 전격적으로 공격하여 친미주의 장성급 군인 7명 중에서 6명을 살해 했다.

이 젊은 영관급 장교들은 라디오 방송으로 <미국 CIA 에 매수되여 수카르노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음모하고 있는 매국적 장성 군벌집단을 좌절시키기 위하여 혁명을 일어켰다> 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후에 알여진 사실인데 영관급 장교들 중에서 한 명이 수하르토 장군에게9.30 거사를 미리 비밀리에 알려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수하르토 장군은 이 비밀정보를 오히려 자기자신을 위한 기회주의로 이용하여 침묵을 지켰던 것이다.

그리고 거사 후에 미국의 동태를 예의주시 하다가 친미편에 서는 것이 신변의 보호와 미래의 진로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되여 즉각 반수카르노와 친미세력으로 등장하여 계엄령을 발표하고 일약 친미 계엄령사령관으로 활약했던 것이다.

서방 언론은 이 영관급 장교들의 반미적 공격사건을 <공산당 쿠테타> 라고 특별보도로 선전하면서 미국, 영국 그리고 호주는 긴급 대책을 세워 빠르게 대응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육군 전략사령부의 사령관인 수하르토 중장만 살아 남아 있었다. 수하르토 장군은 미국에 긴급지원을 요청하였다. 미국과 영국, 호주는 신속히 인도네시아의 긴급사태에 개입하여 필요한 병력과 군사적 지원을 무진장 즉각 제공해 주었다.

스하르토 장군은 미국의 긴밀한 지원하에서 인도네시아의 전군 부대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우익 군벌세력을 총동원 하고 좌익 세력의 동요를 차단하도록 특별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우익 반정부 군중시위를 선동하여 전국에 반공주의적 기세를 잡는데 성공했다.

위와 같은 인도네시아의 정경은 마치 한국에서 4.19 혁명으로 성공한 민주화운동이 전두환 장군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인하여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놓은 것과 꼭같은 일 이었다. 전두환 뒤에 숨어서 지원해 준 CIA와 미 8군의 역할이 생생하게 연상된다.

어째던 수하르토 장군은 갑자기 우익세력의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반면에 미국은 수카르노 대통령을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몰아 넣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수카르노 대통령을 헬기를 이용하여 자카르타에 있는 대통령 별장으로 임시 피신하도록 했다.

수하르트 장군은 수카르노 대통령의 별장에 찾아가서 <국가권력 이양서> 에 수카르노 대통령이 서명을 했다고 주장하면서 친미 군사게엄정권이 국가권력을 장악했다고 발표하여 군정의 정당성을 역설 하였다.

하지만 그 때 군부의 주장은 허위주장이며 또 그 문서는 허위문서라는 의문의 론란들이 수카르노 탄생 100주년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도 끝없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수카르노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2001년 6월6일에 인도네시아 체신청은 <건국의 아버지 수카르노를 기념>하는 우표 1천만장을 발행하였으며 아랍세계의 이슬람 단체들은 대대적인 100주년행사로 수카르노의 애국적인 반제반미자주정신을 기념했다.

수카르노 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난 후에 만성신장병과 합병증으로1970년 6월21일에 69세에 별세 했다. 수하르토는 애써 조용한 장례를 명했다. 하지만 최소 50만 명의 민중이 빈소를 찾아 애도의 뜻을 표했으며 20만명이 묘소를 찾아가 장례식에 참석했다. 수하르토는 수카르노 대통령에 대한 숭배와 그의 사상에 대한 흠모를 법적으로 금지했다. 하지만 10년후에 수카르노의 명예는 완전히 회복됐다.

2. 미국의 CIA와 맻혀진 살인마 수하르토 대통령



1998년 5월21일 인도네시아의 2억 3천만의 국민들은 일제히 길거리로 뛰쳐나와 환호성을 지르며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불과 1,2개월 전만해도 상상도 못할 일 이었다.

수하르토는 32년전 1968년 3월에 건국의 아버지 수카르노 전임 대통령을 밀어내고 재빠르게 정권을 탈취하여 대롱령으로 취임했다.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의7선 대통령으로 32년간 장기집권을 했지만 계속되는 학생들의 데모와 재야세력들의 하야압력에 굴복하여 마침내 1998년 5월21일에 사임을 전격적으로 발표하여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놀라운 사실은 왜 어찌하여 32년 철권 대통령이 전격 사임을 발표 했을까?

그 이유는 전격 사임발표 바로 하루 전날인 1998년 5월20일에 미국의 국무장관 울브라이트가 미국 해안경비대 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은 즉각 사임해야 한다> 라고 사임을 촉구하는 발언을 한 바로 다음 날에 수하르토는 전격적으로 사임을 발표했던 것이다.

모든 세계언론은 수하르토 대통령의 전격 퇴임을 학생들의 극렬 시위와 재야세력에 굴복했기 때문이라고만 일제히 보도 했다.

하지만 진짜 숨어 있는 사임의 정치적 비밀과 원인은 미국의 백악관과 그리고 백악관과 직통하고 있는 CIA 공작에 의하여 수하르토 대통령의 전격적으로 사퇴를 했다는 이유와 원인에 대하여 그 사실을 그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강제로 퇴임당한 수하르토 대통령은 개발의 선봉자라고 한때 불리었다. 하지만 2004년에 발표한 <국제투명성>기구의 기록에 의하면 수하르토 대통령은 350억달러 거액의 부정축재자로서 20세기에 가장 <부패한 정치인> 으로 꼽혔었다.

미국은 매우 필요할 때는 수하르토를 격상시켜 <게업사령관-대통령>으로 32년 동안 동남아의 반공의 보루로 잘 이용했다. 하지만 이제는 부정부패와 살인마로 그리고 지나친 독재와 폭정으로 인하여 미국의 체면을 손상시키고 있기 때문에 클린턴 행정부는 울브라이트 장관을 시켜 수하르토 대통령의 전격 사임을 독촉했던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제2대 대통령으로 부패와 친미굴종 살인마 대통령으로 전 세계에 널리 알여진 수하르토 대통령의 정치행각을 다음과 같이 살펴 본다.

수하르토는 1921년생으로 어렸을 때 부모의 버림을 받고 자바섬 시골에서 친척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이슬람 중학을 졸업하고 침략자 네덜란드군에서 하사관으로 근무했다.

제2차전쟁 후에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다시 식민지화 할려고 재침했을 때 수하르토는 국민방위군으로 활약하였다. 1949년에는 자바를 침공한 네덜란드군과 싸울때 중령으로 활약하여 공적을 남기기도 했다.

1962년에는 수카르노 대통령이 마달라부대를 창설하여 수하르토를 소장으로 진급시켜서 부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로인하여 수하르토의 명성이 국민에게 널리 알려지게 됐다. 뿐만 아니라 수카르노 대통령 정권하에서 수하르토는 육군 중장의 게급으로 전략사령관이라는 요직을 맡고 있었다.

이러한 수하르토가 1965년 <9.30 사태>를 계기로 하여 친미 군벌의 총사령관으로 돌변 했다. 그는 수카르노 대통령을 추방할 뿐만 아니라 수카르노 대통령이 심혈을 기우려 건설해 놓은 <반제반미의 사회주의나라>를 단숨에 짓밟아 버리는 민족반역자가 됐다.

수하르토 장군은 대통령 별장으로 피신하고 있는 수카르노대통령을 찾아가서 그로부터 <국가권력 이양서>를 받아 냈다고 크게 선전을 하기까지 했다. 이 선전은 후세에 허위로 론란이 되고 있다.

그리고 수하르토는 자칭 게엄사령관이 되여 사회주의 국가를 붕괴시키고 좌익 공산당을 소탕시키는 이른바 <1955-1956 인도네시아 대학살사건>을 총지휘했다.

다음은 Internet 기사들 중에서 인도네시아 대학살사건에 대한 기사 둘을 소개한다.




이 두 기사를 통하여 수하르토 장군이 얼마나 잔인하게 살인마 행각을 했던가 하는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편의상 1,2,3 순으로 기록을 한다.

1. 미국, 영국 그리고 호주 세 나라 대사관들은 수시로 정보를 교한하면서 인도네시아 내부의 좌익의 동태를 파악하고 수하르토 장군의 계엄사령부가 적극 분쇄작전을 즉시 전개하도록 3국은 긴밀히 연락 지원한다.

2.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타일란드 그리고 말라시아 등 나라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는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번 인도네시아 사건은 공상당의 뿌리를 완전히 소탕하는 무자비한 작전을 수행하도록 수하르토 사령관을 설득하고 압박해야 한다.

3. 3국의 대사관들은 일제히 본국정부에 중간보고를 하여 수하르토 장군이 성공적으로 멸공작전을 수행하여 수백 수천의 공산당원을 살해한다고 보고했다.
4. 오늘 현재 공산당원의 사망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들의 집과 상점, 도서관 등은 대량 파괴되고 있다. 작전을 차질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

5. 3국의 대사관은 인도네시아 내부에서 민심은 반공으로 돌고 있고 군부는 매우 고무적이다. 군에대한 지원은 보다 적절히 계속 중요하다.

6. 1965년12월23일 중간보고: 공상당원 1,500명 집단 살해 성공. 또 다른 지역 보고: 1,000-2,000 살해. 서독 대사관 보고: 70,000명 사망설이 있다.
현재까지 종합된 수는 적어도 150,000 이상이 살해 됐다.

7. 3국의 대사관은 인도네시아 계엄군들의 사상성분을 분별하는데 고심하고 있다. 즉 non-communist or anti-communist 이 두가지 종류의 성분에 대하여 열띤 토론을 하고있다.

8. 1965-1966년 인도네시아 대량학살 사건에 관여하여 성공적으로 멸공작전에 공을 세운 외교관들은 거의 모두 상급 외교관으로 표창과 진급이 보장됐다.

1990년 8월에 New York Times 의 기자 Kadane 이 인도네시아 대학살 사건 당시 인도네시아 대사관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외교관을 만나 대담을 한 기사가 있다. 신문기자: < 정말 인도네시아에서 500,000-백만의 공산주의자들이살해를 당했는가?>

이 관리는 500,000-백만 살해에 대해서는 직접 대답을 회피했다. 그렇나 한 가지는 분명히 밝혀 대답했다.
외교관: < 우리 미국 대사관은 인도네시아에 공산주의자 5,000명이 있으며 그들의 명단
을 확보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5,000 명의 명단을 인도네시아 계엄령 군부에게 넘겨 주었다>

수하르토 게엄사령관은 인도네시아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의 공산당의 위협에 대한 미국의 염려를 해소시켜주기 위하여 자기 나라의 국민을 최소한 5십만명( 백만이라고도 한다)을 학살했다. 아니 보다 더 정확하게 수하르토의 변명을 대신하여 말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으리라.

<나는 미국에게 절대적 신임을 얻어 대통령이 되기 위하여 철저한 반공주의자의 행동을 과시하였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수하르토는 1968년에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미국은 인도네시아 침략 과정에서 발생한 대학살에 대하여 깜짝 놀랄 만큼 가볍게 평가하고 있다. 오늘 이라크와 가자에서 수백만이 죽은데 대해서도 미국은 마찬가지로 가볍게 평가하고 있다. 6.25 한반도 전쟁 때 죽은 수백만에 대해서도 미국은 역시 가볍게 평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수하르토 대통령을 보호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미국은 반공주의 정권에 필수불가피한 모든 자원을 제공해주었다. 군사고문, 군인훈련, 각종무기, 헬리콥터 등 막대한 군수물자들이 인도네시아 군부의 수중으로 몇 십년 동안 흘러들어 갔다.

하지만 미국은 수하르토 대통령에게 줄곳 당근과 채찍의 양면적 지지를 해왔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서방에 문호를 활짝 개방하여 서방의 자본이 활개치게 했다. 수하르토 대통령이 그토록 오랜 기간 32년이나 집권할 수 있었던 능력을 잘 설명해 주는 대목이다.

수하르토 대통령의 통치 능력으로 나라가 부강해지는 듯 하기는 했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매번 선거를 치룰 때마다 국민들은 자신들을 먹여 살려주는 선거가 아니라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선거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게 됐다.

집권당과 공무원들의 부패는 만연하고 대통령 친인척들이 독차지한 정권의 권력체제는 날이 갈수록 국민의 지지기반을 무너떠리고 있었다.

파푸아, 아체 그리고 동티모르 등 여러 지방 섬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정부파동에 대하여 인도네시아 군부는 무지막지한 살인적 진압만이 수하르토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수하르토 대통령 집권 이후부터 1998년 까지 파푸아, 아체, 동티모르 등 여러 지역에서 이어진 이른바 폭동진압으로 인하여 사망한 수백만의 목숨에 대하여 전적으로 수하르토 대통령은 책임을 져야 한다.

수하르토 대통령이 퇴임한 후에 후임자 하비비 대통령은 1999년에 동티모르 문제를 주도하여 UN 참관 하에 평화적으로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하지만 그 투표는 완전한 독립이 아닌 임시적으로 자치를 허용한다는정도 뿐이었다.

현재 대통령인 유두호요노 대통령은 오랜 세월동안 문제지역인 아체에서 민족주의자들과 평화협정에 합의하여 전임 수하르토가 일으킨 문제들을 어느 정도 풀어 나가고 있다.

서방의 언론들이 수하르토 대통령 시절에 경제성장을 이룩 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평가의 뒤에는 수하르토 대통령이 인도네시아의 <고귀한 천연자원>들을 미친듯이 서방에 헐값으로 팔아 넘겨준 대가라는 사실에 대하여는 아무 말이 없다.

결론으로 어쨌던 미국은 <당근과 채찍>의 정책에 의하여 한 때 요긴하게 써먹은 수하르토 대통령을 미국의 체면을 손상시킨다는 이유로 사정없이 헌신짝 버리듯 포기하고 강압적으로 퇴진시켰던 것이다.

3. 수하르토 이후와 오늘의 인도네시아


우리가 New York Times 나 CNN의 보도만 읽고 들으면 세계에서 네번째로 많은 인구의 나라 인도네시아에서 85%의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서로 죽이면서 싸우는 무지하고 이상한 나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절대로 아니다. 집권 여당인 골카르당의 친미 엘리트 그룹과 독재적 군벌들이 서로 결탁하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종족들과 종교들 간의 차이점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국민을 분쟁으로 분리시켜 서로 싸우도록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물론 미국이 숨어 있다.

콜카르당이 수하르토 대통령을 23년이나 집권하도록 지원을 했으며 이번에는 또 다시 콜카르당이 유숩 하비비를 제3대 대통령으로 세운 것이다. 한국에서 박정희가 없어진 후에 전두환 노태우가 줄줄이 등장 한 것과 꼭 같은 현상이다.

1998년에 수하르토 대통령의 후임으로 등장한 하비비 대통령은 두터운 가면을 쓰고 빤짝 민중들의 편에 서는듯한 행동을 했다. 그러나 곧 본색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전두환이 백담사로 갔다고 한들 무슨 효과가 있었던가?

하비비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 동티모르에서 독립은 아니지만 평화적인 자치를 허용하는 조약에 서명하면서 전임 수하르토 대통령과의 차별성을 과시 했다. 그런데 그 때로 부터 8개월이 지난 어느 날 하비비 대통령의 본색이 완전히 드러나고 말았다. 동티모르 교회에서 폭력배들이 수백 명의 분리주의 운동가들을 집단으로 살해했는데 이 큰 사건에 대하여 히비비 대통령은 모르는 척 했을 뿐이었다.

에리트 강경파와 군부의 지지를 받는 하비비 대통령을 1999년 3월에 울브라이트가 방문하여 IMF와 미국 국방부가 이전 처럼 계속 지원해 준다고 확인해 주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이것은 수하르토 대통령 독재정권 시대의 통치제도를 여전히 계속할 수 있도록 하비비 대통령의 통치를 도와준다는 약속이었다.

하비비 대통령은 군부의 권한을 전보다 더 확대하는 ‘새로운 법안’을 추진 했다. 하지만 이를 저지하는 반대운동이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몇 십명이 사망하고 또 수 백명이 부상을 당했다. 할 수 없이 하비비 대통령은 그 법안을 철회하고 말았다.

하비비 대통령은 불과 16개월의 짧은 단명의 대통령으로 하야했다. 하비비 대통령의 후임으로 압두라만 와힛 대통령이 취임했다. 하지만 와힛 대통령도 역시 단명으로 취임한지 20개월만에 퇴임했다.

놀라운 일은 인도네시아의 <건국의 아버지>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의 딸인 메가와티 수카르노 여사가 2001년 7월 23일에 인도네시아의 제5대 대통령으로 등장했다. 인도네시아의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메가와티 제 5대 여성 대통령이 집권을 하게된 인도네시아에는 현재 육군 병력 26만2천명, 해군 5만3천명, 공군 2만5천명이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호주에서 지원을 받은 함정들과 항공기들로 무장되어 있다.

메가와티는 대통령 선거에서 와힛과의 경쟁에서 373:113으로 60표 차이로 부통령이 됐다. 그런데 와힛 대통령이 집권을 시작하자마자 부정부패의 탄핵으로 인하여 대통령직에서 쫓겨났다.

메가와티 부통령은 자동적으로 대통령직을 계승받았다. 어쨌던 메가와티가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이 된것은 사회에서 소외받는 소상인, 지방상인, 불만에 가득찬 지식인들 그리고 도시 빈민들이 총집결하여 힘을 모아 메가와티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메가와티는 정계에 입문한지 15년만에 대통령 됐다. 메가와티의 남편은 국회의원인데 키에마스 의원은 부인이 태통령으로 취임하는 취임식에서 감격의 눈물을 뚝뚝 흘리는 장면이 TV에 보도 됐다. 이 장면을 보고 민중도 울었다고 한다.

사회주의자들과 순수한 민중을 좌익으로 몰아 비참하게 학살한 친미 엘리트들의 집권여당인 콜카르당은 집권 수 십년만에 참패를 당했다.

수하르토 독재정권은 국가에서 민중을 떼어 놓았다. 그러나 이와같은 정치 행태는 더 이상 인도네시아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메가와티 여성 대통령의 등장으로 인하여 인도네시아의 민중은 깨닫게 됐다.

메가와티 대통령은 2002년 3월에 평양을 방문하여 감정일 국방위원장을 방문하여 대화와 교류를 촉구했으며 부친이 1950년대에 김일성 주석과 교류하여 양국간의 우호와 사상적 동지적 관계를 상기시켰다.

1957년 5월에 상호 무역협정, 1965년 8월에 통신 및 우편물 교환 협정, 1985년 9 월에 공보협력 협정 등을 체결했다. 1964년 11월에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이 북조선을 친선방문 하였으며, 1965년 4월에 김일성 주석께서 인도네시아를 답례로 방문하셨다. 그 당시 쌍방의 무역은 새로 시작하는 초보적 단계이었지만 공화국은 쌀, 비료, 시멘트를 수출하고 천연고무, 니켈과 목재들을 수입했다.

2005년 4월은 김일성 주석님의 인도네시아 친선 방문 40주년이 되는 해이며 또 <김일성화>를 기념하는 40주년의 해이기도 하다. 김일성 주석님이 인도네시아의 유명한 <보고르식물원>을 참관하실 때 난과계통의 특이한 어떤 꽃을 보시고 <참 아름다은 꽃이다> 라고 말씀 하시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있던 수카르노 대통령이 <이 꽃에 김일성 수상 각하의 존함을 모시도록 하면 합니다> 라고 했다. 그곳 식물원 원장도 < 이꽃을 김일성화로 합시다> 라고 찬성했다.

김일성 주석은 <별로 한 일도 없는데 꽃에 자신의 이름을 달겠는가?> 하시면서 겸허하게 사양했지만 수카르노 대통령은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세계적으로 큰 일을 하고 계십니다 라고 하면서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김일성 주석은 수카르노의 정성을 결국 받아들여 <정 그렇다면 우리 인민에대한 찬양으로 알고 받아들이겠다> 라고 응답 하시였다. 수카르노 대통령은 자기 자녀들에게 김일성 주석님을 <삼촌이라고 부르라> 라고 할 정도로 각별한 친분관계를 유지하면서 <우리는 한 식솔이다> 라고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메가와티 대통령은 3년 6개월 동안 성공적으로 집권하고 평화적으로 정권 교체를 하여 후임 유도요노 대통령에게 2004년 10월 20일에 정권을 넘겨 주었다.

유도요노 대통령은 누구?

유도요노 대통령은 <생각하는 장군> 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도 역시 장성출신 대통령이기 때문에 장군이라는 호칭이 따르는데 군에서 제대할 때 4성장군으로 예편 했다.

그는 음악가이기도 하다. 음악가로서 자신이 작곡한 음악 제 3집까지 음반 앨범을 낼 정도로 열성적인 음악가이다. 대통령 선거유세를 할 때 음악으로 표를 많이 얻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유도요노 대통령은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과 정상회담도 가지면서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으려 하는 듯 하고, 쓰나미 피해 때 중국으로 부터 1억 달러 차관을 받는 협력을 얻기도 했다.

2006년에 북조선 큰물피해 때는 위문의 전문을 보내기도 했으며, 수카르노 대통령이 제창했던 제 3세계 비동맹 ‘반둥회의’ 50주년 행사에 참석한 북조선의 김영남 위원장과 친밀하게 만나 나란히 사진 촬영도 했다.

최근 인도네시아 정부는 가자지역에서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부상자들이 속출하자 의사들을 계속 파송하여 구호에 힘써기도 하며, 또한 인도네시아의 이슬람교 성직자들은 가자에서 jihad 성전을 주장하면서 이스라엘에게 선전포고를 웨치기도 했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전통을 깨고 민간인을 국방장관에 임명하는 용단을냈다.

하지만 유도요노 대통령이 달려드는 파리떼를 쫓아 버릴 힘과 능력이 얼마나 있는가에 대하여 세계는 저울질하고 있는 형국이다.

미국은 10년 전에 수하르토 대통령의 막가식 독재 폭정에 분개하여 인도네시아에 대한 군사원조를 중단했다. 사실은 민주당 의회원들이 제동을 걸어서 중지했었다.

그런데 그런 미국이 이제 와서 유도요노 대통령에게 미국의 군사원조를 받으라고 사정을 하고 있다. 실은 사정이 아니라 강요이다.

<미국은 동남아에서 이슬람 과격세력의 단속이 미국의 최우선 과제이며 이를 위하여 인도네시아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으니 인도네시아가 미국에 적극 협조를해 주기 바란다>
이것은 사정이나 요청이 아니라 공갈과 협박이다.

미국이 수하르토대통령 시절에는 제제와 불신으로 불편한 관계를 면치 못했지만 유도요노 정권이 들어서자 이제는 친선의 웃음으로 군사적 유대를 강화하자고 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Internet, Anti War의 기사에 의하면 미국은 수하르토 시대에 있어서 결정했던 무기원조 금지령을 2005년에 해제했다고 한다. 그리고 2006년부터 인도네시아에 무기원조를 재개 했는데 그 원조액은 다음과 같다.

2006년 $ 990,000; 2007년 $ 6.5 million; 2008년 $ 15.7 million 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은 군사훈련이라는 명목으로 또 경제지원을 했는데, 2006년 $ 18.4 million; 2007년 $ 28.7 million 을 제공 했다. 그리고 또 다른 명목으로 훈련장비를 위하여 2회 경제지원을 제공 했는데 $ 200 million 과 $ 750 million 이다.

군사부문이 아니라 국무성이 지난 2년동안 제공한 원조는 총$ 150 million 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보도에 의하면 소련이 인도네시아에 지원한 시기와 액수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보도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2007년 9월에 소련의 대통령 Putin 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하여 화기애애하게 회담을 했는데 Putin 은 우도요노 대통령에게 $ 1 billion 차관을 약속 했다. 뿐만 아니라 군사 장비로 단거리와 중장거리 미사일등을 제공할 것을 약속 했으며 대량의 전투기들과 그 외에 또 별도로 최신 무기 $ 3 billion의 군수 물자를 지원하기로 합의 했다.

그러면서 이 기사는 미국에 대하여 쓴소리를 했다.

미국은 인도네시아에 군사원조를 대량으로 제공해 주면서도 속 마음으로는 불안을 느끼고 있으며 이상한 눈초리로 유도요노 대통령을 주시하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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