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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르완다>가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받은 상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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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9-01-14 23:38 조회3,05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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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재미동포 통일운동 원로, 은퇴목사)는 민족통신에 보낸 특별연재 기고문을 통해 이번에는 아프리카
나라 중 <르완다>를 고찰하고 "나는 그 동안 남미 나라들과 다른 아프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들을 고찰한 글을 <<민족통신>>에
연재해 오면서 일관된 입장과 방향들을 제시해 왔다. 르완다의 밝은 미래를 소망한다면 르완다 지도자들은 외세에 의존하는
자세를 탈피하고 르완다 국민들의 힘을 믿고 르완다 국민들의 힘에 의해서 나라를 건설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같은 처지에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자주자립공동체 운동에도 적극 참여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IMAGE##>


<르완다>가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받은 상처들




르완다에 화약고 만들어 놓고 터뜨리는 제국주의 침략자들
100일 동안에 80만 살해하는 비극의 르완다


*글:유태영 박사(재미동포 통일운동원로, 은퇴목사)


<##IMAGE##> 나는 아프리카 대륙의 작은 나라 <르완다>를 고찰하면서도 이 나라가 외세에 얼마나 시달려 왔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나라가 외세, 독일, 벨기에, 미국 등 강대국들에 의해 받은 상처들도 엄청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히 외세가 조장한 민족분열 정책에 의해 자행된 14년 전의 대학살 사건은 너무나 끔직했다. 100일 동안 총인구의 10%에 해당하는 인구, 80만명 내지 1백만명이 대학살 당했다. 독일에 침략 당하며 받은 상처, 벨기에의 식민지 나라로 받은 상처, 그리고 유엔과 미국에 의해 농락당하며 받은 상처들은 과연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나는 그 동안 남미 나라들과 다른 아프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들을 고찰한 글을 <<민족통신>>에 연재해 오면서 일관된 입장과 방향들을 제시해 왔다. 르완다의 밝은 미래를 소망한다면 르완다 지도자들은 외세에 의존하는 자세를 탈피하고 르완다 국민들의 힘을 믿고 르완다 국민들의 힘에 의해서 나라를 건설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같은 처지에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자주자립공동체 운동에도 적극 참여해야 할 것을 강조하며 <르완다>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르완다는 아름답고 동물이 가득찬 나라>


르완다는 서구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나라이며 끊임이 없는 해발고도 4500m 산맥속에는 아직도 야생 고릴라들의 생식지로 남아 있는 순박한 나라이다.

동부지역은 해발고도 1000m의 평원지대에 호수와 습지가 펼쳐저 있어 사자, 표범, 얼룩말, 코끼리와 하마등 동물의 천국으로 평화로운 국립공원이 있는 유명한 나라 이기도 하다.

르완다는 자연과 동물이 가득 한 아름다운 나라이기도 하다. 이 나라에는 역사적으로 오래전 부터 토착 원주민들이 살았던 곳으로 이들은 농경과 목축으로 살아가면서 싸움을 모르고 수 세기동안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르완다는 아프리카 중부 지역에 위치한 면적 26,338km2 로서, 코리아 반도의 10분의 1 정도되는 작은 나라이며 인구는 850만명으로 아프리카에서 인구밀도가 최고로 높은 나라이다. 종교는 기독교 78%, 이슬람교 9%, 토속신앙 13%로 구성되어 있는 나라이다. 이나라는 특히 고대의 구전문화의 전통이 풍부하며 신화, 민간설화, 속담등으로 옛 전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런데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라, <르완다>에서 끔직한 사건이 벌어졌다. 더군다나 절대 다수의 기독교 신자들이 살고 있는 나라인 르완다에서 100일 동안에 무려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80만명 내지 1백만명이 집단학살을 당했다는 비극적인 사건이 서방의언론들에 의해 알려진바 있었다. 이른바 <르완다 종족말살학살>이다. 이 사건은 또 발생후 14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아직 이 사건의 진상이 규명되지 않고 오리무중에 빠져있어 세계인들의 의문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하루 24시간 동안에 1만명 이상이 살해를 당했고 3개월이 되는 기간에 무려 인구의 10%가 떼 죽음을 당한 사건이었다. 이 엄청난 수의 많은 사람들이 이른바 <종족말살 청소살해> 사건으로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극적으로 살아남은 임마꿀레 라고 하는 한 여성이 쓴 자서전 <내 이름은 임마꿀레>가 출판되어 세계의 이목을 모았다. 이 책에 의하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이지만, 그 많은 르완다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는 실제 목격담과 그리고 왜 어찌하여 이런 비극이 르완다에서 발생 했는가 하는 그 원인과 역사적인 배경을 알게 해 준다.

이 책의 저자 임마꿀레는 <르완다 민중들의 죽음은 오직 서방제국주의 침략자들의 이익추구와 그들의 음모에 의하여 일어났다. 희생자들은 모두 선량한 양민들이다. 이들은 억울하게 죽었다.> 라고 고발하고 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학살을 감행한 서방 침략자들이나 또 학살을 당한 르완다 민중들 거의 모두가 기독교인들 이다.

이 책의 저자는 심각한 질문을 가슴에 품고 고민하고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 는 기독교의 교훈이 너무 사치스러운 말 아닌가? 아무 생각 없이 쉽게 내뱉었던 <사랑> 이라는 말이 이제는 목의 가시처럼 잘 넘어가지 않음을 어찌 하랴? 서방의 침략자들 악마에게 그들의 영혼을 팔아 먹지 않고서는 어떻게 사람으로서 가히 그런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만일 그들을 용서치 않고 총으로 혹은 다른 방법으로 그들에게 속이 시원하게 복수를 한다면 하나님은 나의 심정을 이해하지 않을까? 이 책 저자가 밝힌 고백적 하소연 이다.

나는 이 저자의 고백을 접하면서 내 가슴도 답답함을 느끼게 되었다.

1994년 4월7일부터 꼬박 100일간 하루 1만명씩 죽어가면서 피를 흘린 비극적인 사건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호텔 르완다> 라는 영화는 르완다의 최고급 호텔인 콜린스 호텔의 지배인 폴 루세사바기나는 살인적 폭동을 피하여 갑자기 호텔로 밀려 들어 닥친 1,268명을 자기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들에게 숨을 장소를 제공해 줌으로써 그들의 생명을 구해준 폴 루세사바기나의 <정의로운 실화>를 생생하게 영화로 제작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2005년 아카데미 남자 배우 주연상과 각본상 그리고 여자배우조연상 후보에 각각 오른바 있었고 같은 해 <베를린 영화제>에 초대되어 르완다 학살의 전모를 국제사회에 고발하고, 환기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영화, <호텔 르완다>는 르완다에서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여러 곳에서 아직까지도 서방 제국주의와 미국에 의하여 계속되고 있는 살인적 내전들의 비극을 숨김 없이 폭로해 주고 있다.

<호텔 르완다>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폴 루세사바기나(53세)는 2007년 6월에 유엔 사무총장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그는 <르완다 전범국제재판소>의 임기를 연장해서라도 반드시 <르완다 대집단 학살사건>을 국제 재판을 통해 공정하게 종결해 줄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르완다 전범재판> 에 대하여 프랑스, 벨기에, 영국 ,미국 등 관련국들은 저 마다 딴소리들만 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미국은 르완다뿐 아니라 동티모르, 칠레, 캄보디아, 보스니아, 시에라리온 등 수 없이 많은 나라에서 일어 난 사건들이 미국의 사주에 의하여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건들이 국제재판에 의해 진행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해 온 것으로 알려져 왔다.

미국은 또한 <국제형사재판소> 창설을 극구 반대하여 왔다. 그 이유는 뻔한 것이었다. <국제형사재판소>가 청설되여 정식으로 운영이 된다면, 가해국들은 당연히 국제법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미국은 그 동안 <국제형사재판소> 창설을 결사적으로 반대해 왔다.

1.르완다의 초기 역사


르완다의 원주민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AD 1000년경부터 시작된다. 르완다는 극히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르완다의 고대역사는 아프리카 중부지역의 전체적 고대역사에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필자는 르완다의 독자적 고대역사의 기록을 찾아 내는데 무척 어려움을 가졌다.

1000년경부터 반투계에 속하는 <후투족>이 르완다에 정착하여 농경을 주업으로하여 오래동안 살면서 뿌리를 내렸다. 그후 14-15세기에 이르러 북방에서부터 나일로트계에 속하는 <투치족> 이 가축 소를 몰고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 했다. <투치족> 은 가축을 기르는 우수한 부족으로서 군사적 두뇌와 토지를 점유하는 적극성으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16세기에 르완다의 <후투족> 과 <투치족> 은 서로 쌍벽을 이루어 제각기 왕국을 창건 했는데 <후투족>공동체는 므와미 왕을, <투치족>공동체는 브웜비를 왕으로 하여 각각 독자적으로 왕국공동체를 형성하여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17세기에 이르러 우수한 두뇌를 소유한 <투치족> 에 의하여 <후투족>이 지배를 당하는 시대적 변화가 도래했다. 그 당시 <후투족>은 전체 인구 85%의 다수파이며 <투치족> 은 겨우 15%의 소수파 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파인 <투치족>이 주도권을 발휘하여 단일왕국을 형성하여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2.르완다의 인종학살과 외세 침략자들



1890년에 독일이 제일 먼저 르완다에 침략자로 등장 했다. 독일 침략자들은 르완다 뿐만 아니라 아프라카 중부지대 넓은 땅을 분활받아 독일령 이라고 주 장하면서 르완다는 독일령 분활지역 내의 그 일부분 이라고 주장 했다.

독일 침략자들은 르완다보다 더 좋고 넓은 지역에 관심과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르완다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 식민지 정책을 하여 <투치족> 이 통치하고 있는 왕권의 지배체제를 어느 정도 허용하는 관용을 베풀어 주며 지배했다. 이런 이유로 지배부족인 <투치족> 은 은근히 독일 침략자들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독일은 17년 동안의 르완다 침략통치를 포기하고 르완다를 떠나 갔다. 독일이 떠나가자 그 다음에는 벨기에가 르완다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엔위임통치령>에 의거하여 <벨기에> 가 르완다를 지배하게 되었다. 벨기에 참략자들은 독일인들 보다 한 수 더 떠서 노골적으로 <투치족> 만을 따로 우대하여 르완다의 지배체제를 만들었다. 이와 같은 <투치족> 우대정책은 실질적으로 공공연한 <투치족> 매수정책이었다.

그 매수정책은 다음과 같다.

*투치족에게 특별한 신분증을 발행해 줌으로 특별대우를 했다. * 투치족에게만 캐톨릭(Catholic) 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허락 했다. *투치족에게만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 사회생활 전반에 있어서 <투치족> 은 우월하지만 반대로 <후투족> 은 태생적으로 열등하다는것을 공공연히 주장 했다.

벨기에 침략통치자들은 위와 같은 교활한 분열통치방법을 통하여 순진한 르완다 민중을 양분하여 두뇌가 우수하다고 판단되는 <투치족>을 포섭하여 세뇌공작 정 치를 통하여 식민지 지배체제를 굳혀 나갔다.

<투치족> 은 이와같은 유리한 특권하에서 권력을 마음대로 누리면서 캐톨릭 교회가 경영하는 학교에서 교육도 독점하고 사회적 진출에도 우선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투치족> 공동체의 마지막 왕인 키게린왕 5세는 물론 실권 은 없지만 그래도 벨기에 식민통치 하에서도 명목상의 왕위를 보존할 수 있었다.

세계 2차대전이 끝난후에 유엔(UN)은 르완다를 신탁통치령으로 만들어 놓고 벨기에로 하여금 계속해서 르완다에 대한 신탁통치하에서 지배를 할 수 있도록 특권을 허락해 주었다.

세계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의 주도하에 창설된 유엔(UN)은 가는 곳마다 <신탁통치> 아니면 <분단정책> 을 감행 했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구조속에 시련을 겪어 왔다. 815 해방후 미국은 조선반도 에서도 <신탁통치> 아니면 <분단> 이라는 두 가지 방안을 놓고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당시의 조선반도 사정은 마치도 르완다의 처지와도 유사했다.


이와 같은 유엔(UN)의 모순에 대하여 유명한 신학자 브른너 박사는 이미 그 당시 예언적 비판의 소리를 냈다. 그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그런 식의 ‘UN’은 조만간 ‘Two N’ 이 될 것이다> 라고 했다. 이 얼마나 적중한 예언적 신학자의 발언 이었던가?

하지만 세계 2차대전이 끝난후에 자유해방을 웨치는 세계역사의 변천의 폭풍이 불어 오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독립운동의 폭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자유독립을 웨치는 함성이 아프리카 모든 지역에서 들여 오고 있는데 어찌하여 르완다 에서만 잠잠할 수 있었겠는가?

눈치 빠른 <투치족> 은 지금까지 벨기에의 은혜와 특권을 혼자 독차지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단번에 돌변했다. <투치족> 은 지금까지 벨기에로 부터 받아 온 모든 은혜와 특권을 집어 던지고 앞장서서<벨기에 물러가라>, <신탁통치반대> <르완다 독립 만세> 를 요란하게 웨치면서 르완다 독립운동의 선두에 나섰다

………………….
.<벨기에 ‘후투족’에게 모든 혜택 넘겨>


이에 갑자기 당황한 벨기에 통치자들은 분개 했다. 벨기예 통치자들은 <투치족>의 눈치작전 보다 한 수 더 떠서 고차원적 교묘한 통치방법의 묘안을 고안해 냈다. 그들이 고안해 낸 묘안은 무엇일까?

벨기에 통치자들은 지금까지 <투치족> 에게만 베풀어 주었던 모든 특권정책을 즉시 철회 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당장 <후투족> 에게 그 모든 특권과 지원을 아낌 없이 무진장 제공해 줄것을 선포 했다. <투치족> 으로 부터 빼앗은 모든 특 권을 <후투족>에게만 허락한다는 완전한 변화의 묘안이었다.

수 백년동안 싸이고 싸인 <후투족> 의 분통이 순간적으로 풀리는 극적인 변화가 발생 했다. 복수의 주먹을 불꾼 쥐고 궐기한 <후투족>은 우선 당장 <투치족> 의 마지막 왕인 명목상의 왕 키기리 5세를 끌어 내려 국외로 추방시켜 분풀이 했다.

그리고 교활한 벨기에 통치자로부터 적극적인 후원과 무진장 특권을 받게된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후투족>은 이제부터 그들의 잠재력을 총동원하여 <후투족>이 주도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민족의 주도권 을 확보하게 되었다.

1961년 9월에 유엔(UN) 감시하에서 르완다 역사상 최초 <후투족> 출신의 초대 대통령이 탄생되었다. <카이반다> 가 대통령에 취임을 했다. 수 백년동안 <열등 부족>으로 천대를 받아 온 그들의 분노와 서러움을 깨끗이 청산하고 이제는 <집권 부족> 이 되었으니 벨기에 침략자들에게 그저 고맙고 감사(?) 할 뿐이었다.

교활한 벨기에는 수백년동안 특권을 부여하여 활용하던 <투치족>을 헌신짝 처럼 버리고 외면할 뿐만 아니라 <투치족> 의 생명과 사회적 안전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감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새로 창건한 독립국 정권하에서 <투치족>은 박해와 탄압뿐 아니라 생명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수 없이 많은 <투치족> 들이 외국으로 탈출하거나 게릴라에 가담하여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게릴라 투쟁에 가담한 <투치족> 중에서 이미 2만여명이 살해를 당했다.

이러한 사정으로 <투치족> 서민층의 민중들은 그저 머리 숙이고 숨 죽이며 낮은 자세로 목숨을 유지하기 위하여 하루하루 살아갈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이런 분위기는 마치도 815 해방후 38선 이북에서 친일파들이 당하고 있던 모습과
비슷한 모양 이었다.

르완다 독립으로 초대 대통령이된 후투족 <카이반다 대통령>은 12년동안 무서운 독재와 군사정권으로 정치를 했다. 수 백년 동안 차별대우를 받아 온 <후투족>의 분풀이로 <투치족>에 대한 가혹한 보복정치를 서슴치 않았다. 이러한 끝이 없는 혼돈속에서 진퇴양난에 빠지게된 벨기에 침략통치자들은 빠저 나갈 구멍을 찾고 있었다.

벨기에 식민통치 기간에 이른바 <분리통치> 로 인하여 발생한 양쪽 부족들 간의 갈등과 적대감정은 골이 너무 깊어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다. 벨기에가 무책임하게 급조하여 만들어 낸 르완다의 독립은 독립국의 진로에 있어서 혼란과 장해물들이 산적해 있었다. 이와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벨기에는 절대로 자유로 을 수 없었다.

<벨기에 통치 패권을 프랑스에 넘겨>


벨기에는 이러한 궁지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기 위하여 르완다에 대한 패권을 프랑스에게 넘겨 주었다. 르완다에 대한 패권을 물려받은 프랑스는 르완다 내 부의 갈등 문제를 손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르완다에 대한 패권을 물려받고 르완다를 취급하기에 아주 좋은 방법으로 군대를 양성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트완다의 군대를 양성하여 군대에게 무기를 공급해 주는것과 또 르완다의 군대를 육성하여 어용군으로 만드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프랑스는 실질적으로 르완다의 군대를 일으켜 세우고 훈련과 무기를 공급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는 콩고를 비롯한 이웃에 있는 여러 나라들의 <친서방 우익분파>들과 서로 연결시켜 줌으로써 아프리카 중부지역에서 반공적 군세력들의 유대를 강화시키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한편 카이반다 대통령은 12년의 장기 집권 기간에 무질서하고 가혹한 보복정치만을 계속하여 민중의 인기가 점점 떨어져 가고 있었다. 또한 <투치족> 게릴라와의 싸움에서도 실패를 거듭함으로 인하여 정권이 곤경에 처해 있었다. 경제적 파탄과 사회적 불안에 대하여 카이반다 대통령은 효율적으로 난국을 대처하지 못하여 국민의 원성이 날로 높아 졌다.

카이반다 대통령 밑에서 국방장관이며 또 <개혁혁명운동>의 지도자 이기 도 한 <아비야리마나> 가 1972년에 무혈 쿠테타를 일으켜 카이반다 초대 대통령을 축출하고 정권을 탈취 했다.

미국은 무혈쿠테타로 정권을 탈취한 아비야라마나 대통령을 환영하며 친서방친미 국가가 되도록 하기위하여 처음부터 용이주도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필요한 지원과 구제를 아낌 없이 제공할 것을 약속하며 미국은 아비야라마나를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공작을 시작했다.

정권을 탈취한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은 전임 집권자의 부족간 대결 통치방법 에서 약간 후퇴하여 대화와 양보를 통하여 난국을 돌파할것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이와같은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의 대화와 양보의 주장은 곧 정권을 두개의 양대 진영으로 분렬 시키는 역작용을 유발시켰다.

극렬주의적 강경파는 <투치족말살>을 주장하면서 <양보와 화해는 절대로 없다>라고 웨치고 있었다. <투치족> 을 르완다에서 전멸시킬 때까지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 했다

한편 극렬파에 맞서는 온건파는 대결을 피하고 대화와 화해로 연립내각을 구성하여 양편 부족에서 균등한 대표로 <영구적 평화체제> 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의 노선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아비야라마나 대통령은 온건파의 지지를 적극 활용했다. 하지만 그의 부인은 극렬주의 파에 속하여 남편의 화해와 온건주의를 반대하는 쪽에서 활동했다.

1980년대초에서 1992년 까지 10여년 사이에 르완다의 군사력은 대폭증가 했으며 이 증가는 해 마다 계속 되고 있었다. 군인은 7,000에서 30,000명으로 증가 했다. 이집트에서 6백만 달러의 군사지원금을 받기도 했다. 아프리카에서 6백만 달러의 포탄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450정의 총포(KAL)와 20,000 개의 소총을 지원 받았다.

뿐만 아니라 르완다 군대는 외부에서 2,000개의 로케트 포탄과 20,000개의 수류탄 등을 지원 받았다.(위의 기록은 국제적으로 공식 발표에 의하여 니타난 수량이고 비밀로 거래된 군수물자 지원의 수는 천문학적 수자로 전해지고 있다.)

르완다에 제공되는 무기와 군사지원은 지원의 통로만 각각 다를 뿐 근원적 제공자는 프랑스와 벨기에 그리고 미국 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로 되어 왔다.


3.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의 비행기 추락 사망



<##IMAGE##>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은 정권을 쟁취한 후에 <국가발전혁명운동당> 을 창당하여 일당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1978, 1983, 1988년에 형식상 선거를 통해 장기 집권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의 정권은 날이 갈수록 난관에 봉착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게릴라 내전이 르완다 전국 각 지방에서 계속 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르완다 민중들은 3파로 갈라져 극심한 분열현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첫째는 <투치족>이 해외에서 집결하여 침공을 계속하고 있다. 또 국내에서도 소규모의 게릴라 공격이 하루도 쉬지않고 연속적으로 발생하여 내전이 계속됨으로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문제였다.

둘째는 <후투족> 강경파들이 최후의 승리를 목표삼고 절대로 <투치족>의 게릴 공격을 두려워 하지말고 끝까지 싸워 <투치족>을 멸망시켜야 한다는 강경파들의 고집스러운 주장이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에게 큰 부담을 주고 있었다.

셋째는 <후투족>가운데 온건파는 <후투족> 이면서도 <투치족> 에 대하여 동정적이며 관용적 입장을 취하는 선량한 사람들로서 이들은 같은 부족에 속하지만 늘 강경파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이와같은 곤란한 입장에 처해 있던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은 국론의통일과 부족간의 대립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하여 지금까지 벨기에, 프랑스 그리고 미국에만 의 존해 온 일방적 친서방적 정치 노선을 탈피하고 리비아와 중국등 다양한 국제 관계를 모색하면서 실리주의 노선을 찾고 있었다

그리하여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은 중국의 원조를 받아들임으로써 국제관계의 개방성을 과시했으며 중국 뿐만 아니라 동독, 베트남 그리고 북조선 등 동구권 나라들과도 국교를 과감하게 개시했다.

1990년 9월에 이웃나라 우간다에 집결하여 반정부조직을 결성한 <투치족>의 <르완다 애국전선>은 국경선을 넘어 르완다 북부지역을 침공하여 북부 일대를 장악하고 지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내전이 확대되고 전쟁으로 장기화가될 조짐이 보이자 유엔(UN) 이 개입하여 약 3000명의 병력을 이곳에 주둔시켰는데 사실은 유엔(UN)은 이름뿐이고 주로 프랑스군이었다.

1993년에 유엔군이 개입하고 이웃 나라들의 중재로 평화협정이 체결되여 2년 동안의 내전이 끝났다. 뿐만 아니라 <투치족- 후투족>이 합의하여 평등하게 참여하는 <잠정 정부>가 설치 되었다. 이 <잠정정부> 설치를 <아루샤조약> 이라고 한다.

그러나 <후투족> 강경파들은 잠정정부의 권력 분배를 거절하고 <아루샤조약>을 원천적으로 부인할 뿐만 아니라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의 타협주의에도 반발 했다.

<후투족> 의 막무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은 <아루샤조약>을 실행하기위하여 <투치족-후투족>의 대타협을 조건으로 하여 <잠정정부>의 창설을 강행 했다.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은 <후투족-투치족> 잠정정부의 신임 대통령이 된것을 선포 했다. 그리고 <후투족> 측에서 <잠정정부> 의 국무총리 를 임명했다.

<후투족> 측 에서 국무총리를 임명한 아비야라마나 대통령의 처사에 대한 반발이 <투치족> 측에서 일어나 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이와같은 상황속에서 새로 구성된 <잠정정부>는 사실상 시작하자 마자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해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속에 처해 있던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에게 악몽의 날이 오고야 말았다. 1994년 4월6일에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이 탑승한 대통령 전용비행기가 그 누군가의 공격을 받아 비행기에 탑승한 전원이 사망 했다. 비행기에는 부룬디 나라의 은타리아마라 대통령이 동승했으며 비행기 조종사는 프랑스인 2명 이었다.

그 누가 대통령 전용비행기를 폭파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나중에 논의하려고 한다. 우선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의 사망으로 인하여 르완다에서 <후투족>강경파에 의하여 벌어진 비극적인 <인종청소살해> 사건에 대하여 먼저 알아 본다. 여기서 편의상 1,2,3, 순으로 사건의 요점들을 기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의 측근자들 가운데서 대통령의 <투치족> 에 대한 화해와 포용정책에 대하여 동의한 모든 측근자들은 전부 살해 당했다.

2. <후투족>정치인들 중에서<투치족>에대하여 온건파로 알려진 모든 정치
인들은 전부 다 살해 당했다.

3. 정치인은 아니지만 직장이나 사업상 <투치족>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모두 살해 당했다.

4. 어린이들도 <투치족> 아이들과 친구 관계를 끊지 않으면 살해 당했다.


5. 한 동네에서 이웃하며 살던 사람들까지도 <투치족>을 가까히하면 죽었다.

6. 정부의 방송과 신문은 <투치족>을 파리나 바퀴 벌레 처럼 잡아 죽이라고 선전 하고 있었다.


7. 방송이나 신문은 <투치족> 여성을 마음대로 강간하고 살해해도 죄가 되지 않는 다고 선전 했다.

8. <후투족>의 극렬주의 민병대가 직접 살해한 <투치족>의 수는 약 50만명 이라고 추산된다.


9. 1994년 르완다 인종청소사건으로 인하여 희생당한 사망자의 수는 서방 언론이 발표에 의하면 총 80-100만명이다.

10. 한편 <투치족>의 보복으로 인하여 <후치족> 측 에서 살해 당한 사망자
의 수도 수십만명이 될것으로 추산된다.

11. <투치족> 이 정권을 쟁취한 후에 보복이 무서워서 외국으로 도피한 <후투족>의 난민의 수는 200만명으로 집계되었다.

위에 기술한 르완다의 비극적 사건에 대하여 필자가 분노를 느끼는 것은 미국이
다. 왜냐하면 미국은 세계평화를 혼자 떠들어 왔는데 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르완다를 침략해 왔던 독일과 벨기에 그리고 프랑스도 입을 닫고 있었다. 르완다에서 사람들이 대량으로 학살되어 가고 있었는데 이들 침략국들은 입을 닫고 있었다. 그들은 마땅히 광란의 <후투족> 만행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고 제동을 걸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은 유엔(UN)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관람자로 남아 있었을 뿐 이었다.

4.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는 르완다 내전


세계역사에서 전무후무할 인종청소 대량학살의 폭풍이 지나간 후에 르완다는 총체적으로 허탈에 빠져 있었다. 비행기 폭파로 사망한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의 유물 처럼 남아 있는 것이 <잠정정부>의 창설의 과제 이었다.

<잠정정부> 창설을 위한 재시도가 유엔(UN)의 관여하에서 겨우 이루워져 1994년 7월 23일에 <잠정정부> 가 건설되었지만 지나 간 비극의 자취들은 이 나라의 구석 구석에 상존하고 있는 상황이다.

<투치족>의 게릴라군이 전국을 거의 장악한 상태에서 <잠정정부> 가 겨우 창설 되었다. <투치족>이 정국을 주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타협의 원칙하에서 대통령과 국무총리는 <후투족> 에게 양보하고, 부통령과 국방장관은 <투치족>이 맡는 조건에 합의함으로써 일단 길고 긴 내전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잠정정부의 신임 지도자로 등장한 비지멍구 대통령이 <후투족> 출신이지만 양편의 두 부족들을 잘 화합시킬 수 있는 유능한 지도자로 평가를 받아 왔다. 그리고 부통령과 국방장관에 취임한 카가메 장군은 젊은 군인으로 <투치족>의 게릴라 투쟁의 총지휘관으로 국내외에서 크게 역할한 친미적 성향의 군인 이다.

비지멍구 대통령은 1994넌 7월 23일에 <잠정정부> 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6년 동안 집권하고 2000년 3월에 사임했다. 그리고 카가메 부통령이 후임으 대통령에 취임했다.

신구 대통령이 교차되는 6년 동안에 르완다의 정치를 둘러싸고 국내와 국외에서는 여러 가지 복잡하고 어지러운 사건들이 발생되었다. 중요한 사건들을 열거하면 다금과 같다.

1. 1994년 9월, 프랑스군 2500명이 르완다에서 철수했다.
2. 내란으로 외국에 피신했던 양측의 난민들 수 십만명이 귀국했다.
3. 1995년 양편의 난민촌에서 서로 총격 사건이 발생하여 8000명이 또 사망 했다.
4. 1996년 1월 탄자니아와 부룬디 국경에서 르완다 후투족 난민 17,000명
강제로 축출 당했다.
5. 1996년 2월에 콩고와 자이르에서 르완다의 난민 100만명의 수용소들이 폐쇄되었다.
6. 1996 4월에 유엔(UN) 잔류군 2000명이 철수 했다.
7. 1996 10월에 유엔은 르완다 난민100만명이 표류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8. 1996년 12월에 투치족 50-60만을 살해한데 대하여 재판을 개시 했다.
9. 살해행위에 가담한 용의자 5,460명을 구속하고 최고 책임자 2명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
10. 1997년11월에 정부군과 후투족 반군이 교전한 사건으로 300명이 사망 했다.
11. 1998년 5월에 유엔사무총장이 무책임한 발언을 하여 르완다 민중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80만명의 살해사건에 면죄가 필요하다고 발언을
했다.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의 비행기폭파에 미국이 관여 했다고 프랑스 군인이 발언 했다.(미국 정부는 이 발언을 거부 했다.)
12. 1998년 7월 투치족 인종학살의 실질적 책임자인 후투족 인물책임자 들이 탄자니아로 도망했다.
13. 1998년 8월 정부군과 투치족 반군의 전투로 200명이 사망하고, 반군지도자가 사망했다.
14. 1999년 3월 영국의 한 회사가 르완다 대학살에 이스라엘을 통하여 무기를 제공했다는 사실이 폭로 되었다.
15. 1999년 유엔은 대량학살사건에 관여 했다는 주장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수감중인 학살행위자 125,000명을 석방하라고 르완다 정부에 요구 했다. 도대체 유엔은 무엇하는 조직인가 라는 여론이 빗발쳤다.
16. 미국이 르완다 대학살을 사전에 방지하지 못 한데대하여 국제사회의비난
이 일었고, 프랑스는 책임 회피만 하고 자국의 무죄만 주장했다.
2000년 3월에 비지뭉구 대통령이 집권 6년만에 사임했다. 그 다음달인4월에 카가메 대통령이 후임으로 취임 했다.

위에 기술한 기사들은 학살사건에 관한 극히 일부분 뿐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위의 간단한 기사들을 통하여 르완다와 관련된 서방 국가들의 비리와 침략의 죄악상을 짐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도대체 유엔과 서방의 강대국가들은 약소 국가들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5.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의 비행기는 누가 폭파 했나?


역사적 사건의 진상조사는 항상 <누가 왜 어떻게> 에 근거하여 사실이 판명되고 진실이 밝혀진다. 하지만 르완다에서 불과 100일 동안에 80-100만명이 집단적으로 살해를 당한 사건이 이 지구상에서 그저 넘어 갈 사건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14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도록 그 사실이 아직도 판명되지 못하고 진실이 가리워 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때문일까?

그 동안 이 사건에 관련된 일부 보도에 대한 자료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해 본다.

누가 비행기 폭파사건을 사전에 미리 알고 있었을까?

콩고의 모부트 대통령은 그날 아비야리마나 대통령과 함께 그 비행기를 동승하기로 미리 약속이 되여 있었다. 하지만 모부트 대통령은 출발 한두시간 앞두고 갑자기 전화로 동승을 취소 했다.

모부트 대통령은 이 전화를 대통령 부인에게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 부인은 모부트 대통령의 전화 내용을 남편에게 전혀 전달을 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 졌다. 대통령 부인은 극렬분자로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의 화해정책을 결사 반대 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마치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의 죽음과 유사한 의문점을 자아 낸다.

모부트 대통령이 갑자기 동행을 취소한 이유는 본인 스스로의 결정이 아니였다. 그것은 대통령의 개인 비서기 어떤 비밀 정보를 입수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뭏든 비서의 말을 듣고 대통령끼리 약속한 동승비행 일정을 갑자기 취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음은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의 소속 부족인 <후투족>의 강경파들이 미리 계획한 음모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프랑스 기자들의 보도에 의하면 르완다 비행사들이 고의적로 빠지고 비행시간 2시간 지연하여 프랑스 조종사 2명과 비행탑승에 예정된 다른 외국인들이 그 비행기에 탄 것으로 되어 있다.

르완다 공항의 통제탑에서는 비행중인 조종사에게 다섯번이나 르완다 대통령과 또 브룬디 대통령 두 대통령이 탑승했느냐고 질문을 했다고한다. 프랑스 조종사는 규정상 그런 것 대답할 수 없다 라고 신경질조로 응답했다고 한다.

이와같은 정보에 의하여 <후투족> 강경파들의 자작극 음모라는 견해도 있다. 관용과 화해를 주장하는대통령을 제거하기위한 <후투족> 극렬분자들의 꾸민 자작극 이라는 해석이다.

반대로 <투치족> 의 게릴라 투쟁의 연장선에서 계획된 폭파사건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비행기가 폭파되는 시간을 전후하여 <투치족>의 게릴라들은 카가메 사령관으로부터 모종의 행동지시를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투치족>의 투쟁의 최후의 목적은<후투족>을 물리치고 정권을 쟁취하는것 인데 그 방법은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을 우선 제거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측면에서 <투치족> 의 감행으로 보는 주장도 있다.

또 다른 주장은 카가메 사령관 측의 게릴라들이 대통령 살해를 위해 1994년 3월 15일 혹은 4월6일로 정해 놓고 살해했다는 주장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살해할 장소로 4-5개 물색해 놓았다는 비밀 문서(?)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가 비행기 폭파에 관여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프랑스는 오히려 벨기에가 관여했다고 주장해 왔다.

벨기에 여성 기자로서 특히 르완다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독차자고 있는 콜레트 브라크만(Colett Brackman)기자의 증언에 의하면 한 프랑스인이 라디오 장비를 갖춘 상태에서 비행장 근처 어느 높은 지점에 자리를 잡고 <벨기에가 비행기를 공격했다> 라는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또 이 여류기자는 프랑스 군인 네 사람의 이름을 밝히면서 이 사람들이 비행기 폭파에 직접 관여 했다고 폭로하고 있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서로 책임을 전가하면서 서로 비밀을 폭로하고 있는 형국이다.

<카가메 대통령의 향방과 르완다의 미래>


대통령의 비행기를 폭파한 진범을 색출하는 과제는 불가능한 과제로 보이지만 언젠가는 그 진실이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사건과 관련해 지금까지 나타난 현상들을 종합하여 보아도 그 진범의 윤곽은 어느 정도 드러나기도 한다.

나는 여기에서 한가지 꼭 집고 넘어 가야 할 대목이 있다.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이 비행기 폭파로 죽은 후 <투치족>의 강력한 실력자이며 게릴라의 총사령관의 경력을 소유하고 있던 젊은 군인 카가메의 정체가 밝혀졌다는 점이다.

카가메는 명목상의 <후투족> 출신의 비지멍구를 대통령으로 앞세워 놓고 자신은 부통령으로 있으면서 실제로는 뒤에서 6년동안의 정치를 움직여 온 인물로 밝혀지고 있다.

카가메 부통령은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비지멍구 대통령이 최악의 곤경에 빠져서 허덕이고 있을때 대통령을 무혈쿠테타로 축출하고 2000년 3월에 42세의 젊은 나이로 르완다 대통령에 취임한 인물이다.

카가메 대통령, 그는 누구인가?

그는 22세에 군인생활을 시작하여 줄곧 상향하여 성공적으로 군의 최고 지휘관의 위치까지 올라 갔다. 문제는 미국이 르완다의 승승 장군 카가메를 그냥 보고만 있을리 없었다.

카가메는 1990년 10월에 벌써 미국 캔사스에 있는 군사 훈련학교 고등 군사반에서 특수 훈련과 교육을 받고 돌아왔었다. 그가 <투치족> 의 게릴라 총사령관으로 <후투족> 과 싸워 승리하여 공로를 세운것은 미국의 지원과 미국의 배경이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미국은 프랑스와 벨기에와 함께 <후투족>에게 무기를 지원 해주고 있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투치족>의 게릴라 총지휘관을 양성해 놓고 그에게도 필요한 지원과 무기를 제공해 주었다. 미국은 양쪽에 다 골고루 무기와 군사원조를 했다.

그가 미국의 지원 없이 어떻게 르완다 밖에서 그렇게 오래동안 강력한 게릴라전을 꾸준히 계속할 수 있었겠는가?

다음은 미국이 카가메 대통령에게 준 혜택들을 간단히 살펴본다.

-2005년 4월 명예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University of the Pacific in the USA) 2005년 9월에 공로 영예 훈장을 받았다 (Andrew Young Medal, (Georgia State University)

-2005년 9월에 African National Achievement Award 상을 받았다. (American Institute in the USA)

-2006년 4월에 명예법학 박사 학위를 받었다. (Oklahoma Christian University)
-2006년 5월에 ICT Africa Award 훈장을 받았다. (USA)
-2006년 9월에 Top-10 Award on the Ease of doing Business (World Bank),
-2007년 8월에 Hand Off Can Award (USA),
-2007년 11월에 명예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University of Glasgow)

나는 이 글을 쓰다가 문득 남녘동포 학자의 책 제목이 떠올랐다. 동국대학의 강정구 교수가 최근에 <미국을 알기나 하나요?> 라는 책을 발간 했다. 이 책 제목을 연상하며 이렇게 대답해 주고 싶다. 나는 <미국을 알고 있지요>라고.

르완다의 카가메 대통령이 1990년에 일찌기 미국에 외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가서 게릴라전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당시 정치 노선에서 우향우에서 좌향좌로 방향을 조금 씩 바꾸어 보려고 꿈틀거리고 있던 아비야리마나 대통령을 단번에 폭파시켜 죽이고 말았다.

사실 르완다는 미국이 탐낼만한 땅이 아니다. 땅도 작고 자원도 별로 없다. 하지만 이 작은 나라를 내버려두면 좌익으로 급속히 전환될것에 대해 미국은 크게 염려하고 있었다고 분석한다. 미국은 카가메 대통령을 지역적 버팀목으로 단단히 묶어 놓고 있다고 봐야한다.

그래서 요즘 카가메 젊은 대통령은 짐바브웨를 비롯한 노련한 지도자들이 아프리카의 장래를 염려하여 자주자립을 위한 연대를 웨치고 있는데 불쑥 카가메 대통령이 딴소리를 내면서 친미적 발언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카가메 대통령의 앞날이 결코 밝지는 못하다. 왜냐하면 분명한 사실들이 르완다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카가메 대통령이 자기 민족을 우선하지 않고 제 나라를 존중히 여기지 못하고 외세에 끌려 간다면 곧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왜 그렇게 보아야 할까?

카가메 대통령에게는 다음의 세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본다.

우선 염려스러운 점은 절대 다수인 <후투족>이 당장 인종청소 사건으로 인한 죄의식과 체면상으로 당분간 잠잠한것 같지만 만일 카가메 정권이 오직 미국의존 으로만 정권을 유지하려 할때 <후투족>의 봉기는 가히 예견할 수 있다.

다음은 <투치족> 내부 사이에 권력다툼이 일어 날 가능성이 높다. 특히 고집이 센 <투치족> 이 침략자들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주자립을 위하여 아프리카 지역연대에 솔선하여 나설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카가메 대통령은 <투치족> 내부 분란에 휘몰릴 공산이 크다.

또 한가지 미국의 자유개방 압력의 부작용으로 추방되여 미국의 버지니아(Verginia)에 숨어서 살고있는 옛날에 추방된< 투치족> 왕이 <투치족> 대통령 시대에 귀국을 요청할 가능성이있다. 이것은 벨기에가 과거 <투치족> 의 왕권을 보호해준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자주자립공동체 운동에 카가메 대통령이 어떻게 대처 할 것인가도 주요한 관심사로 남아있다.

이러한 관심사들은 향후 르완다의 미래와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이다. 독일에 침략 당하며 받은 상처, 벨기에의 식민지 나라로 받은 상처, 그리고 유엔과 미국에 의해 농락당하며 받은 상처들은 과연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문제들이 치유되고 해결되는 것은 무엇보다 르완다의 지도자들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민족통신>>에 연재한 남미 나라들과 다른 아프리카 대륙의 나라들을 고찰하면서도 같은 방향들을 제시해 왔다. 르완다의 밝은 미래를 소망한다면 르완다 지도자들은 외세에 의존하는 자세를 탈피하고 르완다 국민들의 힘을 믿고 르완다 국민들의 힘에 의해서 나라를 건설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 같은 처지에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자주자립공동체 운동에도 적극 참여해야 할 것이다. (끝)


[특별기획]유태영 박사의 아프리카 나라들 고찰

[특별기획]유태영 박사의 남미 나라들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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