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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자주국가>로 방향전환한 <나이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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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10-22 23:27 조회3,0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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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영 박사는 이번에도 아프리카 나라 중 하나인 <나이제리아>의 역사를 연구해 민족통신에 <특별기고>로
보내주었다. 수백년 제국주의 나라들(폴투갈, 영국, 미국)에 의해 시달려 온 나라, 검은 대륙의 <나이제리아>는
10대 석유산유국에 속한다. 캘리포니아 땅보다 3배가량 큰 나라로서 인구도 1억4천만명이나 되는 큰 나라지만
17세기부터 4백년동안 강대국들에 의해 수난과 고통의 날을 지내온 나라이기도 하다. 이 나라는 최근에 와서
북부조국의 <선군정치>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강대국들이 주목하는 조건에서도 나이제리아는 조선과
밀접한 교류를 진행하고 있다. 나이제리아, 그 발자취를 게재한다.[민족통신 편집실]


<##IMAGE##>

<자주국가>로 방향 전환하는 <나이제리아>





석유부국 암흑의 나라 무너진 나이제리아
영미가 뿌린 씨앗 부족싸움 종교싸움


*글:유태영 박사(재미통일운동 원로)


<##IMAGE##> 검은 대륙의 <나이제리아>는 10대 석유산유국에 속하는 나라이다. 이 나라는 폴투갈, 영국, 미국 등 제국주의 나라들에 의해 시달려 온 나라로서 캘리포니아 땅보다 3배가량 큰 나라로서 인구도 1억4천만명이나 된다. 이 나라는 최근에 와서 북부조국의 <선군정치>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강대국들이 주목하는 조건에서도 나이제리아는 조선과 밀접한 교류를 진행하고 있어 세계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나는 이 나라에 대해 알아 본 것을 여기에 발표한다.


나이제리아의 작가인 ‘친와 아체베’ 는 1958년에 나이제리아에 대한 소설을 출판하여 아프리카 뿐만 아니라 서방 문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소설의 제목은 <모든 것은 무너진다 -Things Fall Apart> 이다.

서방 강국의 침략으로 인하여 나이제리아 사회는 물론 나라 전체가 총체적으로 ‘무너졌다’고 그는 주장한다.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 ‘누오이’ 라는 한 젊은이 에대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누오이’ 는 나이제리아의 전통적인 부족중심의 사회에서 연일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부조리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고 고민 한다.

동리에서 비교적 존경을 받고 있는 아버지가 어느날 다른 부족과 싸우는 과정에서 상상을 초월한 잔인한 장면을 목도하고 ‘누오이’ 는 그만 정든 고향 동리를 등지고 멀리 떠나 낮선 타향에서 끝없는 방랑생활을 한다.

어느날 우연히 만난 옛날 고향친구가 전해 주는 고향의 발전된 모습을 상상하면서 ‘누오이’ 는 고향 동리로 돌아간다. 고향에 돌아와 보니 옛날 아버지가 동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던 그런 시대와는 딴판이다. 누구 하나 돌아왔다고 반겨주 는 이웃은 찾아 볼 수없다.

고향은 많이 변했다. 교화가 들어서고, 작은 동리 사무소도 있고 그리고 학교와 병원도 들어서 있다. 석유를 생산하는 돈이 동리로 흘러 들어 오기도 했다. 모든 것이 변하면서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변하여 ‘누오이’ 에게는 생소한 분위기
가 된 것이다. 누오이는 고독하고 격분한다.

이런 소외감이 그를 슬프게 만들었고, 분에 못이겨 동리 관리인을 죽이고 자기 자신은 자살을 하고 만다. 비극적 이야기 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는 비굴하지 않은 나이제리아인의 꿈과 용기를 보여 준다. 침략자, 영국의 억압에 대한 분노와 그리고 절대로 굴복하지 아니 한다는 강직함을 보여준 것이다.

이 소설의 작가는 영국이 나이제리아를 식민지화하고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 대하 여 분개하고 규탄하고 있기는 하지만 또 다를 한편으로는 영국의 식민지배를 비관하고 체념하는 심리를 토로한 면도 있다.

어쨌던 이 작가는 나이제리아인의 순수하고 참된 면을, 그리고 인간적인 내면의 세계를 파헤처 알리는데 크게 공헌한 것이다.

나이제리아는 미국 칼리포니아의 3배가 넘는 크기의 국토와 인구 1억4천만을 가지고 있는 큰 나라이다. 하지만 17세기부터 시작한 포루투갈과 영국의 침략이 400년동안 계속하다가 1960년10월에 영국의 한 연방 일원으로 되었다.

그렇지만 영국은 절대로 나이제리아를 포기하지 아니하고 군정을 세워 놓고 국가권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1999년까지 38년 동안 또다시 지배해 왔다. <고난의 땅을 거룩한 땅이다> 라고 역사가 말 한다면 이 말은 나이제리아 에게도 가히 해당되는 말이다. 가혹한 침략자들이 모든 권리를 다 빼앗아 간다해도 <희망을 낳는 자유> 마저 빼앗아 가지는 못 했다.

실낱 같은 ‘희망’ 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희망출생의 충격’은 세계적인 사건으로 나타났다. 1986년에 나이제리아가 낳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 ‘웰레 소잉카’ 가 절망의 벽을 깨고 ‘희망의 자유’ 를 몸부림 치면서 출생 시켜 세계를 또 한번 놀라게 했다.

노벨 문학 수상자 ‘윌레 소잉카


노벨 문학 수상자 ‘윌레 소잉카’ 는 그의 작품 <그대는 새벽에 떠나야 한다 > 를 발표하여 ‘암흑의 나라’ 나이제리아의 어제와 오늘을 말한다.

‘소잉카’ 는 나이제리아의 불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이제리아는 출발부터 잘못되었다. 우리는 독립이후 저들이 (영국인들이) 우리에게 행한 잘못된 민주주의의 장난을 가지고 무엇인가 만들어보려고 해왔다. 지난 50년간 우리 사회가 겪었던 비효율적인 운영은 물론 나이제리아 엘리트의 책임이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자들이 우리 민주주의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왔다. 영국 식민지 정부가 독립당시 국가권력이, 예컨데 나이제리아의 가장 부적절한 세력, 군에게 가도록 진실을 왜곡 시켰다>

‘소잉카’ 의 작품 <그대는 새벽에 떠나야 한다> 는 민족 정신의 서사시 이며 나이제리아 역사의 요약이다. ‘소잉카’ 는 단순히 문학가로 그친 것이 아니라 나이제리아의 독재와 쿠테타에 저항한 문학가이며 영국의 식민주의에 대항하여 나이제리아 민족적 사색을 투영 시켰다.

박정희 군사독재 시대가 낳은 ‘김지하’는 있었지만 오늘 날 반민족 반통일 세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이명박 시대의 ‘오잉카’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영국은 나이제리아를 식민통치를 하면서 어떤 정책을 썼던가?
영국은 이른바 <간접통치> 방법을 활용하여 나이제리아의 종래 각개 부족들의 내부의 분쟁과 지배체제를 보존시키면서 오히려 더 분열을 심화시켰다.

이와같은 전통이 오랜 세월동안 계속되면서 부족들이 저마다 영국에게는 절대 복종을 하지만 부족끼리는 더욱 대립과 싸움으로 시간을 허비했다. 그리하여 나이제리아는 오늘날도 부족마다 다양한 전통문화를 경쟁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나이제리아에서 부족간의 대립이 엄존하는 사회구조를 가지게 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특히 북부는 회교도가 전체인구의 50%를 차지하고 있으며 경제력이 우세하다. 남부는 기독교도가 전체인구 40%를 차지하고 있으며 서구식 근대화가 북부보다는 앞서 있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빈곤하다. 이런 상황하에서 끝을 모르는 부족분쟁과 종교분쟁은 나이제리아의 ‘불치의 암’ 이 되어 왔다.

부시 대통령은 2003년 7월에 집권 최초의 첫번 아프리카 여행으로 나이제리아 방문 길에 나섰다. 나이제리아의 기근을 보고 등을 돌리지 않을것이라고 말을 했지만 사실은 나이제리아의 <검은 황금> 석유를 선점하기위한 전략적 방문 이었다.

부시의 나이제리아 방문에 대하여 언론들을 일제히 혹독한 비평을 발표했다.

<부시는 나이제리아 정권의 독재와 부패에 대해서는 일체 못 본척하면서 다만 나이제리아의 ‘거대한 석유 매장량’ 에만 관심이 있다> 라고 혹평했다.

또 부시가 나이제리아를 방문하고 있는 거의 같은 시일에 부시에게 망신스러운 뉴스가 뉴욕에서 대서특서로 보도되었다. <딕 쳬니 부통령이 관련 있는 미국의 에너지기업 핼리 버튼의 엔지니어링 및 건설담당 지사가 나이제리아 세무당국에 세금감면을 위하여 240만 달러를 뇌물로 제공했다>고 월스트리저널이 보도했다.

부시 대통령과 나이제리아 대통령 두 사람은 이 거액의 뇌물을 주고 받은데 대하여 입을 다물고 있었다. 미국이 지배하고 있는 정권하에서는 석유자원은 헤택이 아니라 ‘비극의 씨앗’ 이 되고 있다. 고유가로 나이제리아에 달러가 쏟아져 들어오는것 같기는 하지만 수입의 헤택은 실제로 소수의 집권층에게만 돌아가고 있다.

나이제리아는 하루 200만 배럴의 원유를 생산하고 있으며 현재 가치로 계산을 한다면 지금까지 수출한 달러는 1조2천억달러가 될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외국의 독점기업들이 주관하는 무질서한 관리체제와 불공정한 배당으로 인하여 나이제리아는 고작 매년 40억 달러 규모의 석유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만일 외국 석유자본들이 끝끝내 불공정한 석유이익 배당을 시정하지 않는다면 나이제리아 민중들은 <노예무역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가 서구의 잔악한 침략의 역사적 앙금을 들춰 내야만 할 것이다.

부족싸움과 종교싸움의 핵심



끝을 모르는 나이제리아의 부족싸움과 종교싸움의 핵심은 또 어디에 있는가?

<석유수입을 어떻게 공정하게 배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싸움의 핵심이 있다. 석유 유전이 있는 남쪽 원주민 마을에 외국인들이 와서 석유를 펑펑 퍼내고 있는데도 그 마을의 원주민들의 생활은 오히려 점점 더 어려워 지고 있다.

나이제리아의 서민층이 당하는 고난중의 하나는 열약한 전기사정 이다. 가난한 서민들은 항상 정전에 대비하여 초를 준비하는것 조차 불가능 하다. 그래서 나이제리아의 가난한 집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야들아 – 천국에는 전기 안끊긴단다>

나이제리아의 북 쪽의 부유층에 속하는 라고스에 살고있는 1천만명은 날빛보다 더 밝은 전기 불을 켜놓고 샴페인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1천만명을 제외한 1억 3천만명의 대다수의 빈곤층은 석유 생산과 아무 런 관련이 없는 암흑속에 살고 있다.

석유의 수익분배를 많이 받는 지역, 적게 받는 지역, 또는 전혀 받지 못하는 지역들 사이에서 분쟁과 폭동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시민무장단체들은 외국 인 석유 기술자들을 무차별 납치하여 몸값을 요구하고 있다. 당연한 투쟁 이다.

2007년 1월-7월 사이에 100여명의 외국인들이 몸값을 노린 현지 무장 그룹에 피납되었으며 그 중에 한국인도 몇명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이제리아의 석유는 불행의 씨앗> 이 되고 있는 것이다.


1.나이제리아 악몽의 시작



나이제이아의 악몽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 되었던가?

대다수의 아프리카의 나라들의 악몽은 유럽의 백인들이 침략을 시작할 때부터 라고 대답을 하면 틀림이 없다. 물론 침략의 시기와 방법에 있어서는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을 수 있다.

<나이제리아> 라는 나라의 이름은 영국인들이 <나이저강이 있는 땅> 이라하여 저들이 부르기 편리하게 붙인 나라 이름이 되었다.

영국인들이 처음 나이제리아에 오기전에 이 땅에는 솜씨 좋은 녹 (Nok) 부족을 비롯하여 여러 부족들이 몇만년 동안 살았다고 보여지는 많은 문화적 유적들을 발견했다. 하지만 나이제리아의 초기의 역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고 역사가들은 말 한다.

11 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축조된 성벽의 흔적을 보고 ‘부족왕국’이나 ‘부족 종교’ 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 한다. 13세기에 이슬람교도가 북부에 들어와 주민들 사 이에 침투하여 무역루투를 장악 하고 있었다.

15세기에 들어서서 포르투갈인들이 남부에서 세력을 확장 하여 19세기까지 나이제리아는 이들에 종속되어 살았다. 17세기에는 영국도 이곳에 끼어 들어 노예무역에 한몫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노예무역이 불법화되자 영국은 야자기름 무역에 주력하였다.

그 후 영국은 나이제리아에서 광산을 본격적으로 캐기 시작하여 자연환경을 마구 파괴하는 원죄를 저질렀으며 농산물생산을 감소시켜 그때 벌써 삭량자급자족이 되지 못하게하여 식량부족 사태를 불러왔다.

18세기말에 북쪽에 칼리파데 (Caliphate) 이슬람국이 창설되여 남쪽의 여러부족들과 분리 되였는데 그 때 부터 시작된 ‘분리의 뿌리’ 는 치유되지 않고 오늘날 까 지 남쪽과 북쪽 사이에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영국은 분리된 남부지역을 관리하기 위하여 부족을 총괄하는 <조작된 추장> 을 임명하여 세우는 묘안을 고안해 넀다. 하지만 영국의 묘안은 동그란 구멍에 사각못을 박는 격이 되여 오히려 부족들간에 시기와 반목만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영국은 1827년에 해군기지를 설치하고 <왕립 나이저회사> 라고 불렀고, 1861에 노예무역 때 기지로 사용했던 <라고스>를 다시 점령하여 직할식민지로 만들었다. 그후 영국은 계속하여 나이저강을 중심하여 모든 부족의 족장들과 협약을 맺고, 경쟁자 불란서를 물리치고 그리고 잡다한 모든 영국계 무역회사들을 하나로 통합한후 1885년에 나이저강-베누에강 일대를 영국의 보호령으로 만들어 선포했다.

1914년 1월 부터 영국은 <보호령> 이라는 거치장 스러운 명칭을 아예 떼버리고 영국정부가 북과 남 모든 지역을 직접 통치 지배하는 <나이제리아 식민지> 를 구축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조선이 일제의 침략에서 해방된것 처럼 아프리카 에서도 민족주의 운동이 온 지역에 확산되고 있었다. 특히 1960년을 아프리카의 <해방의해> 라고 부르는데 이 시기에 아프리카에서 17개국이 한 해에 독립을 쟁취했다.

나이제리아도 1960년에 독립을 선포 하기는 했지만 독립국을 건설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영국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역할만 했다. 북과 남 사이의 뿌리 깊은 분쟁과 지역간의 적대감은 독립국가를 새로 건설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큰 장해물이 되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은 1963년에 나이제리아를 4개주로 나누어 <영연방공화국> 의 중앙정부 정권을 출범 시켰다. 하지만 새로 출범한 나이제리아 연방정부는 북부를 중심으로 분파적 정권을 창 출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새로 출범한 연방정부에 대하여 남쪽의 대다수인 기독교인들은 분노와 허탈감에 빠져 있게되여 이것이 나이제리아의 불안의 요소가 되고 말았다. 1966년 5월에 남쪽에서 <이보족> 출신인 군장성 <이론시 장군>이 군사쿠테타 를 일으켰으며 이 과정에서 연방정부의 총리를 비롯하여 많은 정치인들이 죽었다. 그 결과 쿠테타 정권은 불공정한 연방정권을 페지하고 새로운 중앙집권제를 새로 세울 것을 주장했다.

쿠테타를 주동한 <이론시 장군> 의 배후에는 절대 다수인 기독교가 지원했다. 그렇지만 쿠테타를 성공 시켰다고 생각하던 <이론시 장군>은 두 달만에 암살로 사라졌다. 이것은 북부의 군벌에 의하여 일어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후 1966년 7월에 북쪽의 군부에서 반발이 일어나 <이론시 장군>이 암살되자 또 다시 북부의 이스람교를 중심한 연방정부가 수립된다. 북부의 쿠테타를 주동한 <고원 중령> 은 정권을 장악하고 정부를 재구성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안 했다.

<고원 군사정권> 이 새로운 헌법을 제시하는데 반대하는 남쪽에서는 <오주쿠 대령>을 수반으로 하여 연방정부에서 탈퇴 한다고 선포 했다. 그 이듬해인 1967년 5월에 우주쿠 대령을 중심으로 <비아프라 공화국> 이 창설되어 독립을 선포 한다. <오주쿠 대령> 은 독립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남부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이권도 독점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고원정권> 은 <비아프라 공화국> 창건을 근본적으로 분쇄하기 위하여 곧 전쟁을 선포 했다. 이 전쟁을 역사는 <비아프라 내전>이라고 부른다.

<비아프라 내전> 은 2년 6개월 동안 계속되다가 1970년 1월에 끝나지만 이 내전으로 인해 250만명의 나이제리아 민중들이 목숨을 잃었고 남부의 기독교인들이 바라던 <비아프라 독립의 꿈> 은 물거품으로 살아 지고 말았다.

1975년에 고원군사정권이 또 다른 쿠테타로 인하여 실각 되었다. 그 후 1976년 2월에 오바산조 장군이 주도하는 쿠테타가 성공하여 정권을 장악 했다. 하지만 오바산조는 3년후에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 나면서 문민정부 등장을 주장했다. 1979년 8월에 오바산조는 민간인 <샤가리> 를 추천하여 후임으로 대통령에 취임 하도록 했다. 물론 민주주의 선거에 의한 대통령은 아니였지만 군인이 아닌 민간인 대통령은 이번이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민간인 대통령은 오래 가지 못하고 1983년과 1985년 그리고 1993년 세번째로 군사 쿠테타가 연이어 일어 났다. 그러다가 군사정권의 수반인 <아바차>가 1998년에 갑자기 병으로 사망하고 나이제리아는 독립후 39년만에 1999년 2월에 3개의 민간 정당들이 참가하는 민주주의 선거가 실시된다.

그 결과로 오바산조 대통령이 나이제리아 문민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나이제리아 독립후 역사상 처음으로 문민통치시대가 전개된다.

이로서 1960년 독립후 39년동안 쿠테타 군정통치는 무법정국과 부정부패 속에서 권력 싸움으로 일관해 왔다. 석유로 인하여 나이제리아로 몰려드는 외국자본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군정통치자들의 무질서한 경제정책은 엄청난 석유수출 에도 불구하고 나이제리아는 막대한 외국 부채에 빠져 있었다.

2. 문민정부의 등장


1999년에 실시한 문민정부를 탄생 시킨 대통령 선거에서 한 때 정치범으로 투옥 되었던 군인 출신인 <올루세군 오바산조- Olusegun Obasanjo> 가 61.9%의 득표로 당선되어 역사상 최초로 <인민민주당- PDP>이 집권하는 문민정권 시대의 문을 연다.

오바산조 대통령은 남부의 기독교 문화권의 배경을 기초로 하여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대통령 자신이 <나는 거듭난 기독교 신자>라고 싱앙고백을 했다. 그는 능력 있는 종교인 정치가로써 뿌리 깊은 종교간의 갈등과 불화를 능히 해결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다.

전기생산도 관리 잘못으로 인하여 종전의 3천mw 에서 1천mw 로 떨어져 남쪽의 빈곤층 서민지역의 전기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수도물의 안전과 의료 시설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바산조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 종교분쟁과 지역분쟁 그리고 부패와 빈곤의 문제등에 대해서는 모두 다 뒤로 미루어 두고, 국제관계 개선 문제를 우선 올바로 풀어 나아 가는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석유산업 개방과 서구자본 끌어들이는데 전심했다. 그는 아직 미개발 석유 대량 매장지인 델타를 적극 개발하여 아프리카 최대 산유국으로 떠올려 세계 6위의 석유 수출국으로 만드는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오바산조 대통령은 2002년에 미국의 강요에 못이겨 국제금융기(IMF)의 강도 높은 압력에 의하여 마지 못해 구조개혁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년간 7%에 이르는 경제성장을 과시하는 개발 붐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는 <문민정부> 라는 명분을 내세워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무대에서 인정 받는데 만족하면서 자원외교를 벌여 나아 갔다.

그러나 오바산조 대통령은 외국의 의존도가 높으면 높을 수록 내부의 갈등이 점 점 더 심화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하루 속히 내부의 갈등을 해소 시켜야 하는데 이 점에서 실패 했다.

그는 남부의 기독교 문화권의 배경으로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기독교인들의 밀집지역이며 석유 대량 생산지역인 니제르와 델타 주민들이 석유이익의 환수를 요구하고 있는데 대하여 반응이 전혀 없었다.

이때문에 석유대량 생산 지역의 주민들은 무장투쟁을 벌이면서 외국계 산유 시설들을 공격할 뿐만 이니라 외국인 석유 기술자들을 납치하여 몸값을 요구하면서 정치적 협상도 시도했다.

1999년 오바산조 대통령 취임 후 양 종교간의 본쟁으로 1만명 이상이 죽는 사태들이 벌어졌다. 대부분 사망자들은 기독교인 들이 었다. 그는 결국 2004년 5월 18일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슬람과 기독교간 분쟁으로 유혈 폭력 사건이 계속하여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바산조 대통령은 방송망을 통해 <폭력사태는 법과 질서에 대한 위협이며 폭력이 더 이상 확산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심각한 조치가 필요하다>라고 경고 했다.

나이제리아 북부는 자원은 없는 지역이었지만 인구가 많고 이슬람권이며 정치적 중심지 이기때문에 경제적 헤택을 많이 받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남부는 역사적으로 기독교권이며 정치적으로 항상 소외된 지역이다. 비록 지하자원이 막강하지만 지금까지 석유수익의 올바른 배분의 헤택을 받지 못하고 전기와 물과 의료시설이 전무한 상태가 계속 된다.

오바산조 대통령이 비록 문민정권을 창출하여 경제외교에 성공 했다할 지라도 남과 북 빈부의 격차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이로 인하여 남과북 양편으로부터 모두 다 같이 배격받는 실패한 대통령이 되고 만다.

특히 기독교 무장세력은 홍수림 습지 깊은 곳에 근거지를 보유하고 있으며 많은 무기를 보유하고 있음으로 정규군이 쉽게 접근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악조건과 태산 같은 과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바산조 대통령은 2003년 4월 19일에 재선에 출마하여 19명의 후보자들을 제치고 재선에 승리하여 정치권력을 계속 장악하게 된다.

AP 통신은 오바산조 대통령의 재선 승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평을 했다.

<여러 지역에서 종교간 부족간 유혈 사태가 벌어 졌으며 이와 같은 혼탁한 선거는 선거가 끝난 후에 최악의 정치적 위기를 불러 올것이 분명 하다> 라고 논평 했다.

지금까지 모든 권력자들 마다 전력 생산을 증대시키겠다고 선언했으나 선언 한 대로 이행한 권력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바상조 대통령(71)도 마찬가지였다.

나이제리아의 정치평론가인 앤서니 골드만은 <군부 독재자들만이 정부를 비합리적으로 이끌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수년간 목격하고 있다> 라고 하면서 오바산조 대통령에대해 쓴소리와 실망을 토로 했다.

오바산조 대통령에대한 실망은 그것뿐 아니다. 최근 의회 조사에서 벍혀진 자료에 의하면 그는 집권 시절에 정부의 전력증산을 위한 투자금 중에서 5천만 달러를 불법적으로 빼돌려서 유령 회사에 넘긴 것이 밝혀졌다.

나이제리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소잉카와 인권변호사 파와현미 두 지성인은 오바산조 대통령의 실정에대하여 말 하기를 < 오바산조 대통령은 물러나고 국가 의회를 통하여 헌법을 재검토해야 한다> 라고 강력히 주장 했다.

오바산조 대통령이 권좌에서 하루 속히 물러나야 한다고 나이제리아의 최고의 지성인들이 주장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었일까?

오바산조 대통령이 집권한 후 8년이 지난 오늘 나이제리아의 전체 인구의 평균 하루생활비는 1 달러이다. 8년전에 비해 하등의 변화가 없다. 빈민층의 비율이 70.8%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비율이 높은 나라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면 오바산조 대통령의 실정에 대하여 총체적 평가와 실정의 근본적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오바산조 대통령의 실정과 미국의 지배체제 전환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아프리카 무역발전 HR434> 이라는 법안을 만들어 나이제리아의 경제구조를 지배체제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 법안은 (1) 교통과 통신등 거대 산업과 공공 서비스에 대한 민영화 실시, (2) 외국인에대한 개방 확대, (3) 농업과 토지, 광물을 포함한 자연자원에 대한 외국자본의 제한 없는 접근, (4) 기초식량에 대한 외국기업이 요구하는 농업전환에 대한 정책등 이다.

이 것은 누구를 위한 무역법안인가? 이 법안은 미국이 모든 약소국가들에게 강도적으로 요구하는 법안들 이다. 뿐만 아니라 2002년 7월에 미국을 위주로한 G8 정상회담에서는 아프리카개발을 위한 새 동반자 관계 <네파드 NEPAD> 라는 법안을 채택했다.

위의 법안에 대하여 <아프리카연합 AU> 은 열띈 찬반 토론이 벌어 졌다. 놀랍게도 모든 아프리카 나라들이 반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독 두 나라가 찬성 했다. 이 두 나라는 <남아공 음베키 대통령> 과 <나이제리아의 오바산조 대통령> 두 대통령 뿐 이었다.

<네파드> 법안은 국제자본이 아프리카에 파고 들어와 민영화를 강요하면서 신자유주의적 개발을 독촉하는 법안이다. <네파드> 법안은 아프리카 자원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미국 엘리트들에게 아프리카의 자원을 팔아 넘기려는 공작 중의 하나로 진단된다.

남아공의 음베키 대통령은 임기 6개월을 남겨 놓고 권좌에서 쫓겨 났고, 나이제리아의 오바산조 대통령은 <실패한 대통령> 이라는 오명을 남기고 권좌에 서 퇴장 하고 만다.

3. 나이제리아의 혼란과 역사적 전망


이 지구상에서 나이제리아처럼 잠재된 가능성을 현실에 반영하지 못하는 나라도 드물다. 나이제리아를 <잠든 거인> 이라고도 한다. 어쨌던 나이제리아의 역사는 지금까지 자멸로 치닫고 있다.

세계 8위의 산유국으로서 몇백억 달러를 해마다 벌어 들이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행운이 무색할 만큼 나이제리아는 고질적 빈곤과 환경오염에 시달리고 있으며 무거운 외국채무에 허덕이고 있다.

이와 같은 나이제리아에서 지난 2007년 4월 19일에 대통령 선거가 치러젔다. <우마루 야라두아, 56세 > 후보자가 대통령으로 당선 된다. 기성정치에 대한 염증을 또 다시 느낄 만큼 혼란이 난무하는 가운데서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앞으로 4년의 임기 동안 문민정부의 제 2대 정권 야라두아 대통령이 무엇인가 이루워 줄것이라는 기대감은 여전히 지대했다. 야라두아 대통령에게 주어진 제일 큰 과제는 오바산조 전 대통령이 실패한 <부패정치 척결> 이다. 정권을 강화하여 올바른 수사와 성역이 없는 징계를 강행 해야 할 것을 민중들은
요구하고 있었다.

오바산조 전 대통령 시절에 석유생산지로 유명한 델타지역에 일년에 총예산 13억 달러를 지원금으로 투입 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지원금의 대부분은 저소득 빈민층에게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지원금의 대부분은 부패한 중간층 관리들과 지방의 부패한 말단 관리들에게 모두 다 넘어 갔다.

그럼으로 야라두아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길은 남부 석유생산 지역의 빈곤한 민중들에게 공정한 배분을 실행하는 길뿐이다. 그러자면 <부패적결> 을 최선의 과업으로 하여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나라를 쇄신 시키는 길 밖에 없었다.

그리고 야라두아 대통령은 이슬람교 출신이기 때문에 종교적 선입감으로 인하여 남부의 기독교 세력권에서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반발이 일어날 가능성을 간과할 수 없었다.

전임 오바산조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 <나는 거듭난 기독교 신자 이다> 라고 선전을 하면서 <신앙적 경건성>을 과시하여 정치력을 행사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종교적 위선> 은 남쪽의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북쪽의 이슬람교 인들에게도 갈등을 더 심화 시켰을 뿐 이었다. 그의 비현실적인 <말 로만의 신앙고백>은 행함이 없이 울리는 꽹가리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마치도 남한의 이명박 대통령이 정권 초기부터 <소망 교회 장로> 를 내세워 정치력을 행사 하려는 태도와 유사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나이제리아의 실패한 대통령인 오바산조의 뒤를 따르고 있는 것과 같다. <행함이 없이 믿어보았자 남는 게 없다> 라고 하는 교훈을 이명박 대통령은 오바산조 대통령의 실패담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

나이제리아의 문제는 끝이 없어 보인다. 부정 부패가 일상화 되여 난무하고 있으며 국가 경제는 지나칠 정도로 오직 석유에만 의존하고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분쟁은 날로 심화되고 있다. 특히 야라두아 대통령은 북부의 유력한 부족인 플라나족 출신이다. 그가 종교와 부족문제를 어떻게 풀어 갈것이가에 대하여 큰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야라두아 대통령은 취임식 날인 2007년 5월 28일 취임식장 주변에 경찰병력 5만명을 배치 했고, 전국에는 20만명을 배치했다. 끝이 없는 불안과 논란 속에서 취임식이 거행된다.

세계는 이 나라에 관심을 돌릴만한 하다. 나이제리아가 이른바 <석유전쟁의 화약고>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의 원유 메이저인 셰브론을 비롯하여 엨손 모빌등 수십개의 석유회사와 JP모건과 베릴린치등 세계적인 투자은행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마치도 벌떼처럼 야라두아 대통령의 취임식에 관심을 쏱았다.

<나이제리아와 북조선의 관계>


<##IMAGE##> 이런 상황하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새로 취임한 우마루 무사 야라두아 대통령(57)은 <북조선을 방문해 에너지와 천연 가스에 대한 투자 문제를 의론하도록 에너지 담당 장관에게 지시하겠다> 고 발표했다.

그런데 나이제리아 신임 대통령이 대대적인 에너지 개발을 위하여 북조선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하여고위급 인사를 북조선에 파견하겠다는 언급에 대해 가장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은 미국이었다. 나이제리아는 미국의 5번째 원유수입국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북조선을 중심으로 한 전 세계의 자주화의 물결이 이제는 막을 수 없는 대세로 등장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또한 야라두아 대통령의 발언은 멀지않아 북미관계가 정상화 될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했다. 당시 나이제리아에는 개발을 위하여 외국기술과 외국자본이 홍수처럼 차고 넘치게 이미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야라두아 대통령이 북조선으로부터 개발유치에 대하여 언급했을까?

야라두아 대통령은 외국의 침략과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늦게나마 북조선과 같은 <선군정치>의 나라와 외교관계를 터야한다는 결심이 섰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야라두아 대통령이 북조선과 석유자원의 공동개발을 원해서 그런 언급을 했을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없다. 나이제리아가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제라도 군사강국으로 나아가 더 이상 강대국들에 의하여 지배당하지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북조선의 언론 <내나라>보도에 의하면 김영남위원장은 야라두아 대통령 취임식에 축전을 보냈다. 그리고 2007년 6월에 야라두아 대통령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대표단 양형섭 단장과 대표단 일행을 접견했다고 보도 했다.

뿐만 아니라 나이제리아에는 <주체사상연구전국위원회> 가 조직되어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해 마다 년차 총회를 진행한다고 보도했다. 나이제리아 국민들은 제국주의적 참략책동에 격분하고 있으며 뿌리 깊은 경제적 착취에 대한 부노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야라두아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다. 1년이 벌써 지났다. 앞으로 3년을 신발끈 단단히 묶고 현장의 실물정치를 펼쳐 나아갈 것 같다. 진보와 선진이라는 이름으로 침략과 독점을 정당화해도 아무 말 못하고 받아들인 종속적 역사는 이제 종지부를 찍아야 한다는 자주화의 바람이 이곳에도 불고 있었다.

나이제리아 민중들은 과거 300년동안 강대국들에 의한 식민통치로 말할 수 없는 수난의 세월을 보낸 피어린 아프리카 역사를 뼈저리고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아프리카의 검은 땅에서는 미국지배세력의 잔학행위가 멈추지 않고 있다.

나이제리아 문민정부 제 2대 야라두아 대통령은 늦게 나마 자주의 길을 찾고 있는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이제 민중 중심의 정책을 수립하여 더 이상 강대국의 노예가 되지말자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나이제리어는 자주성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북조선과 협력하여 투자를 이끌어 오도록 하겠다고 밝힌 것은 현 정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시사하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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