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명 논단] <볼셰비크 혁명의 종말(?)> > 기타

본문 바로가기
영문뉴스 보기
2024년 4월 20일
남북공동선언 관철하여 조국통일 이룩하자!
사이트 내 전체검색
뉴스  
기타

[이선명 논단] <볼셰비크 혁명의 종말(?)>

페이지 정보

작성자 민족통신 작성일08-10-06 01:32 조회2,312회 댓글0건

본문

이선명 유에스뉴스(USNews)주필은 소련의 붕괴와 볼셰비크 혁명과의 상관관계를 진단하면서 "소련의 붕괴를
볼셰비크 혁명이 추구한 이념적 가치 그 자체의 실패로 등식화(等式化)하는 것은 역사해석의 오류"라고 지적
하면서 "볼셰비크 혁명은 그 이전의 체제에 온존했던 제도적 불의의 종식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역사의
큰 전진이었다고 진단했다. 그의 논단을 소개한다.[민족통신 편집실]



[논단] <볼셰비크 혁명의 종말(?)>




*글: 이선명 (USNews) 주필


<##IMAGE##> 러시아의 대법원이 엊그제(10월1일) 1918년 볼셰비크 혁명의 와중에 처형된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 마지막 황제 니콜라스 2세(Nicholas II) 일가의 복권을 결정했다는 모스코바 발 Interfax 통신의 타전은 20세기 초 자본주의적 약탈의 대상이던 무산계급이 역사의 주역이 된 러시아 인민들에게는 희열을, 그리고 제국주의의 폭압에 신음하던 제3세계의 민중들에게는 커다란 희망을 안겨 주었던 이 위대한 혁명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실감케 한다.

니콜라스 황제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유해는 10년 전 우랄 산맥의 외진 마을 예카테린부르그에서 발견되어 세인의 관심을 일으킨 바 있고, 그 동안 미제로 남아있던 알렉세이 황태자와 마리아 공주의 매립지가 금년 초 발굴되어 DNA 검증을 거친 이들의 유해가 처형 90주년이 된 지난 7월17일 페트로그라드의 "성 베드로와 바울 성당"에 합장되었었다.

화려했던 제정 러시아 왕가(王家)의 비참한 운명이 던진 명암이 투영하는 역사의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

19세기 말 서구의 산업화에 따른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봉건제도에 항거하는 자유주의와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사회주의의 이상이 유럽의 오지(奧地) 러시아를 성난 파도처럼 덮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맞선 것은 전제군주 챠르 정부의 혹독한 탄압이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 그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1905년 1월 9일 제정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 있는 챠르 니콜라스 2세의 동궁(冬宮) 앞 광장에 20만이 넘는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황제의 초상화를 들고 "하나님, 챠르를 보우해 주소서!"라는 찬송가를 부르며 그들을 혹독한 가난에서 구해 줄 것을 호소하기 위해 모였다.

이윽고 이 평화로운 시위대의 맨 앞에 서 있던 러시아 정교회 신부(神父) 가퐁이 이렇게 애소(哀訴)했다.

"폐하, 저희들은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정도로 궁핍의 질곡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부디 저희들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노동은 규정된 시간에만 하도록 선처해 주시고, 하루에 단 1루불 만이라도 노동의 대가를 받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주시면 저희들은 물론 저희의 후손들까지도 폐하의 이름을 영원히 가슴에 간직할 것입니다. "

이 때 동궁 앞에 친 바리케이드 뒤에서 총을 겨누고 있던 챠르 군대의 총구에서 화염과 함께 총탄이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하얀 눈 위에 붉은 피가 튀었다. 대열은 흩어지고 텅 빈 광장에는 5백여 구의 시체가 뒹굴었고 수천 명의 부상자들의 신음소리가 인근주변을 진동했다.

이 사건은 당시 러시아의 3천여만 인구 중 2천만 명이 넘는 가난한 노동자와 농노들의 가슴에 챠르와 그가 상징하는 제도와 질서에 대한 기대와 환상을 일시에 무너뜨렸다.

이 때부터 노동자와 농노 사이에서 내연(內燃)하기 시작한 변혁을 위한 투쟁의지의 용암은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활화산이 되어 12여 년 동안 러시아의 곳곳에서 분출해 나갔다. 1917년 3월 8일 수도 페트로그라드에 또다시 대규모 항의 시위가 일어나고,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단행하자 이번에는 챠르 군대의 사병들까지 이에 동조하는 사태로 진전되어 각계를 대표하는 소비에트(협의회)가 조직되었다. 이 때 챠르 정부가 붕괴되고 두마(국회)에서 선출한 노동자, 병사 대표실행위원회가 한동안 임시정부 대행체제를 유지했으나 10월25일 새벽 소비에트의 "붉은 군대"가 마침내 페트로그라드 시를 점령하고, "노동자 농민의 정부" 인민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된 혁명의 주체인 레닌이 볼셰비키 혁명의 승리를 선언했다.

이 위원회는 곧 황제의 퇴위(退位)를 결의한다.

그리고 니콜라스 2세와 그의 일가는 결국 볼셰비크 혁명 이듬해인 1918년 7월 17일 에카테린부르그의 외딴 집 지하실에서 총살되는 비운을 맞았다.

종교가 무산대중을 생산수단의 노예처럼, 그리고 무한착취의 대상으로 부리던 지배계급과 자본가들을 위해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켜 비인간화와 절대 복종의 교화(敎化) 수단으로 악용되던 19세기 자본주의의 혼탁한 물결에 익사하지 않으려는 인류의 몸부림은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는 사회를 지향하는 정치적 이상을 필요로 했다.

마르크스가 외친 신분적 불평등과 사유재산에 의한 인간의 보편적 가치의 파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정치적 제도와 질서를 구축할 수 있다는 주장은 이 시대적 요구에 대한 해답이었으며, 인류의 가슴에 꿈과 낭만을 심어 주었다.

볼셰비크 혁명은 이 같은 마르크스의 이상에 따라 인간이 스스로의 자각과 의지에 의해 기존의 계급을 타파하고 모든 재산을 공유하며 모든 생산을 공동 분배하여 "공생"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따라서 레닌에 의한 볼셰비크 혁명의 성공은 불평등과 사유재산에 의한 인간의 보편적 가치의 파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정치적 제도와 질서를 구축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전세계 인민들에게 심어주었고, 실제로 20세기 초 지구의 곳곳에서 수많은 인민들이 봉건적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그리고 볼셰비크 혁명의 성공으로 건설된 소비에트연방은 건설 불과 20년 만에 낡은 봉건체제에서 신음하던 후진 농업국가를 제2차 세계대전 중 막강한 공업국인 히틀러의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고 미국과 필적하는 산업국가로 등장시킨 불세출의 기적을 보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뿐 아니라 1957년에는 우주선 스푸트니크를 띄워 자본주의 미국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1961년 유인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지구 궤도에 오른 유리 가가린 소령이 (지구는 푸르다) 라고 타전했을 때 많은 서방 옵서버들은 "미소의 게임은 이제 끝났다"고 외쳤다.

그러나 영국의 사학자 E. H. Carr의 표현대로 "제정 러시아의 썩은 문짝을 차고 나온" 레닌의 20세기 최대의 반(反)자본주의의 실험인 볼셰비크 혁명은 스탈린의 경직된 전제체제와 "프로레타라아 독재"라는 이름의 공포정치, 흐루시초프의 제한적 체제 변화 노력에 대한 보수세력의 반발, 이들의 지지로 등장한 브레즈네프의 "안정을 위한 통제" 등의 전 과정에서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평등한 사회"를 지향했던 혁명의 목표, 즉 마르크스의 이상을 배신하고 있었다.

뒤늦게 등장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민중의 주도적 역할, 본래의 레닌주의에의 복귀 및 정치 경제조직 전반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으나,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 정책 역시 마치 제정 러시아의 썩은 문짝처럼 허물어 지는 크레믈린의 기둥을 더 이상 부축할 수는 없었다. 이에 대해 이태리의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잔혹한 차르의 통제와 사회체제의 낙후성에서 야기된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슬라브주의적 전제정치의 부활 때문에 비극적 최후를 만났다"고 분석했다.

사실 경직된 전제체제와 공포정치는 볼셰비크 혁명이 타도를 외쳤던 챠르 시대 바로 그 구체제에 복귀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연출했고, 평등한 사회에 대한 열망이 추구했던 공동소유의 보편적 귀속감은 생산에 참여한 개인이 자신의 노력에 비례하는 분배를 기대하는 인간 본성을 도외시한 경제정책의 모순 때문에 많은 노동자, 농민들의 새 제도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또 배신감으로 변했다. 자연히 혁명세대의 공산공생의 이상주의에 대한 열기가 식어 갔다.

그리고 소련의 붕괴는 무엇보다도 비판적 언론의 부재가 오랜 세월을 통해 개선의 기회를 근본적으로 차단하여 자초한 비극이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이 비극의 틈을 비집고 밀물처럼 유입된 신 자유주의는 금융모리배, 토지사기꾼, 그리고 국영기업의 불하로 부를 축적한 마피아와 창녀들의 피를 빠는 후 커 등의 누보 부르주아를 양산하고 있고, 바로 이 때문에 러시아 인들은 "챠르에게 속았고, 또 공산주의에 속았던 우린 이제 자본주의에 속고 있다"며 실의에 빠져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따라서 소련의 붕괴를 볼셰비크 혁명이 추구한 이념적 가치 그 자체의 실패로 등식화(等式化)하는 것은 역사해석의 오류이다. 볼셰비크 혁명은 그 이전의 체제에 온존했던 제도적 불의의 종식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역사의 큰 전진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해 본다.(끝)



*필자소개

■ 주요 약력 및 저서: 서울대학교 국제정치학과에서 수학한 후 "The Korea Herald" 기자, 동화통신사 기자(1964),
London Daily Mirror 서울특파원, "Korea News Service" 파리 특파원, KPI 통신 위싱턴 특파원, "The Pacific Life" 주필,
"The Washington Weekly" 주필, 현 "USNEWS" 주필로 활약중인 언론인으로 재미동포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영문도서: 『The Descendants of Cane』, 『Epics of Korean immigrants』,
『Korea at A Crossrode』, 『The Age of Burning Ambition』등이 있다. 이선명 주필은 언론계에 첫발을 들여놓은 후,
1970년 전태일 열사 분신사건 당시 한국의 모든 언론이 침묵을 지킬 때 전태일씨의 일기를 단독 입수, 영국의 명망있는
"21st Centry"지(사상계와 같은 월간지)에 발표하여 한국의 열악한 노동문제를 국제적으로 부각시킨 횃불같은 언론인이다.
결국 그로 인해 박정희 군사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1970년대 중반 프랑스를 거쳐 1979년 도미, 망명객의 신분이 된
언론인 이선명씨. 그러나 그 어떤 탄압과 어려움도 역사의 파수꾼이기를 자처하는 이선명씨의 칼날같이 선 지성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부고]노길남 박사
노길남 박사 추모관
조선문학예술
조선중앙TV
추천홈페이지
우리민족끼리
자주시보
사람일보
재미동포전국연합회
한겨레
경향신문
재도이췰란드동포협력회
재카나다동포연합
오마이뉴스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재오스트랄리아동포전국연합회
통일부


Copyright (c)1999-2024 MinJok-TongShin / E-mail : minjoktongshin@outlook.com